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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6.10.09 빵과 금화 - 나폴레옹 시대의 징발 이야기 (48)

나폴레옹 시대의 해전

나폴레옹의 시대 2016. 10. 20. 22:35 Posted by nasica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함대라고 하면  16세기 말의 스페인 무적 함대 또는 20세기 초의 러시아 발틱 함대 정도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역시 스페인 무적 함대가 더 유명하겠지요.  결론적으로는 이 두 함대 모두 기대와는 달리 풍비박산이 났습니다만, 사실 당시에도 그 '기대'는 현실감이 없는 지배층의 기대였고, 실제 항해를 떠나는 두 함대 실무자들의 마음은 매우 무거웠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준비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개럿 매팅리의 '아르마다'입니다.   한글판도 있고, 저는 한글판으로 읽었습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  퓰리처 상도 받은 명작입니다.)

 


아뭏든, 당시 개박살이 난 스페인 무적 함대의 경과를 그린 개럿 매팅리의 '아르마다'라는 책을 읽어보면, 스페인 함대가 진 이유가 결코 영국군의 대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기 전에는, 단거리포만으로 무장하고 실제 전투의 결판은 전통적 방식인 칼과 피스톨로 끝내려는 스페인 함대에 대해, 영국 함대는 단병접전을 피하고 장거리포로 무장했기 때문에 영국이 이겼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장거리포가 스페인 함대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 포격으로 침몰한 스페인 배는 없었습니다.  심각한 파손을 입은 배도 없었고요.  가장 큰 타격은 영국군의 화공선(fire ship)에서 비롯되었고, 더 큰 타격은 폭풍과 기아 때문이더군요.  당시 영국군 함대가 보유하고 있던 컬버린 포 등으로는, 아무리 명중을 시켜도 나무로 만든 군함을 격침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영국 함대 지휘관 중의 하나였던 호킨스 경은 '조국을 침공하는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지 못하고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다가' 화약과 포탄이 다 떨어져서 전투조차 불가능해진 영국군 함대를 보고 "이것이 다 우리 탓이지 누굴 탓하겠는가"하면서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영국 해군도 더 큰 구경의 대포를 매우 근접한 거리에서 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8세기말, 19세기초의 군함들은 분명히 아르마다 시절인 16세기 군함들에 비해 훨씬 더 날렵한 디자인과 육중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만, 기본적인 무기 체계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해전에서도, 상호간의 포격의 결과로 침몰하는 군함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넬슨 제독의 함대입니다.  당시 군함들은 매우 복잡한 밧줄 구조물로 엮어 놓은 아름다운 목공예품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주로 파도가 아래 방향으로 물결칠때 발포했고, 프랑스나 스페인 해군은 파도가 윗 방향으로 물결칠때 발포하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영국 해군의 목적은, 적함의 본체를 타격하여 적의 포병들을 무력화시키고 갑판 위의 적병들을 쓸어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너무 낮게 조준을 하는 경우에도, (마치 돌로 물수제비 뜨는 것처럼) 포탄이 물 위를 퉁퉁 튀겨서 적함을 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좀더 명중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 호의 포열 갑판의 모습입니다.  포병들이 가득찬 이 공간에 쇳덩어리 roundshot이 두꺼운 나무 벽을 뚫고 나무 파편들과 함께 날아들어오면 그야말로 끔찍한 피바다가 일어났습니다.)







(저렇게 돛대에 수도 없이 묶여있는 밧줄들은 단순히 선원들이 기어오를 수 있도록 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돛대라는 물건은 배의 용골에 못을 박아 고정한 물건이 아니라, 저 밧줄들에 의해 지탱되는 물건입니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전투 중 돛대가 쓰러지는 것은 대포알에 돛대가 부러지는 경우보다는, 저 밧줄들이 끊겼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프랑스나 스페인 해군은, 주로 막대기 탄이나 쇠사슬탄 (그림참조)을 발사하여, 적의 마스트나 가로돛대, 돛 등을 망가뜨리는 것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좀 높게 쏘아야 했지요.  사실 이런 방식도 나름대로의 잇점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배는 본체보다도 돛대가 훨씬 면적이 컸기 때문에, 이 부분을 노리고 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습니다.  조준이 다소 낮게 된 경우에도, 갑판 위의 적병들을 쓸어버릴 수도 있었고, 또 돛대나 가로돛대에 명중했다면, 거기에서 떨어지는 나무파편이나 도르레 뭉치에 갑판 위의 적병들을 다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적의 돛대를 망가뜨리고 나면, 적함은 거의 움직일 수도 없고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으므로, 적함의 이물이나 고물 방향으로 접근하여 이쪽편의 broadside (옆면의 포문을 통해 퍼붓는 일제 사격)로 적함을 긁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영어식 표현도 rake(긁는다)라고 합니다.  이 rake가 무서운 것은, 당시 군함들의 구조상, 주포는 모두 옆면을 향하고 있고 고물이나 이물에는 변변한 포가 없었으므로, 이쪽은 지근거리에서 적에게 포탄을 마음껏 퍼부울 수 있는데 반해, 상대편은 반격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Raking fire, 즉 종사입니다.  일제 포격 한방으로 많은 적병을 쓸어 버릴 수 있었으므로 갈퀴로 긁는다는 뜻의 rake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당시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요즘도 그렇지만) 대부분 대포알에 직접 맞은 직격탄보다는 대부분 파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포는 폭발탄을 쏘는 것이 아니고 속이 쇠로 꽉 찬 roundshot을 쏘았기 때문에, 파편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목숨을 노렸던 파편은 모두 나무 파편이었습니다.  대포알에 맞아 부서지는 돛대나 두꺼운 목판은 날카로운 파편을 수없이 튀게 만들었고, 여기에 맞으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특히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돛대나 가로대 등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전투 준비가 시작되면, 꼭 행해지는 작업 중의 하나가, 갑판 위의 병사들 머리 위에 큰 그물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파편들을 막자는 것이었지요.


물론 당시에도 폭발탄은 있었습니다만, 특히 해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시 폭발탄은 모두 곡사포로 발사했는데, 움직이는 군함을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곡사포를 발사하여 명중시키는 것은 당시 기술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는 당시 배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임무를 띄고 있던 해병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해병들의 소총은 육군이 사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약간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고장이 훨씬 적게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육군에서는 종종 사용되는 라이플 소총은 사용할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배 위에서 적함을 향해서 조준 사격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일부 해병들은 돛대 위의 망루에 올라가서 거기서 적함을 내려다보며 사격을 했는데, 그렇게 높은 망루는 파도의 움직임에 따른 흔들림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회전 포(swivel gun)라고 하는, 꼭 오늘날의 탱크 해치에 장착하는 50구경 기관총처럼 생긴 작은 대포를 망루에 장착해두고 거기서 포도탄을 내리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그림이 swivel gun입니다.)

 



다만, 넬슨 제독은 그렇게 망루에서 총을 쏠 경우, 발사할 때 튀어나오는 wadding(화약 마개)으로 인해 돛에 불이 붙을 수 있다는 이유로 망루에서 총을 쏘는 것은 금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발생한 화재가 보고된 바는 없고, 결국 넬슨 자신은 프랑스군이 아마도 망루에서 쏜 듯한 총탄에 맞아 최후를 맞게 됩니다.

 






(넬슨 피격 장면입니다.  실제 상황은 그림보다 훨씬 더 안 좋아서, 서 있는 수병보다는 쓰러진 수병들이 훨씬 더 많았고, 거의 패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위험한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  바로 갑판 위였습니다.  특히 함장과 고급 장교들, 그리고 조타수가 있는 quarterdeck, 즉 후갑판이 제일 위험했습니다.  앞서 말한 회전포도 그  quarterdeck을 노렸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해병 한명이 하갑판으로 통하는 햇치를 지키고 서있게 되는데, 이유는 겁을 집어먹은 수병들이 갑판 아래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  Orlop deck이라고 부르는, 즉 가장 배 밑에 있는 수면 아래에 위치한 갑판이었습니다.  당시 포탄 특성상, 수면 아래 깊숙한 부분은 절대 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포탄은 수면을 튕겨나가 물수제비를 뜨게 되거나, 또는 물 속으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두꺼운 목재를 뚫기에는 힘이 너무 약해졌습니다.  부상병을 치료(...라기보다는 팔다리를 자르는 것이 보통이었던)하기 위한 군위관은 전투가 벌어지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당시 군함에는 군인들 뿐만 아니라, 해외로 파견나가는 정부 관료나 그 가족같은 민간인이 타고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민간인들은, 전투가 벌어져도 사실 목숨 걱정을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두 orlop deck이나, forepeak 같은 수면 아래 깊숙한 공간으로 내려갔거든요.  다만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은 그런 구석진 공간에 우글거리는 바퀴벌레 및 쥐떼들과 친하게 지내야 했겠지요.

 


 




(뒤쪽의 다소 높은 갑판이 quarterdeck.  살기를 바라는 자는 전투 중 이 곳을 피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맨 뒤쪽의 가장 높고 작은 갑판은 poop deck이라고 불렸습니다.)


 


요즘 군함이야 레이더 성능이 곧 그 군함의 성능과 맞먹을 정도로, 먼저 적을 탐지하는 것이 중요했고, 또 그에 맞서 스텔스 기능에 대한 연구도 활발합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레이더도 없고, 또 레이더가 있어라도 어차피 장거리 미사일이 없었으므로 별 쓸 모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당시 군함끼리 전투에서 보이지 않는 군함으로부터 급작스럽게 기습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군함이라는 것이, 반드시 투명 군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아군 또는 중립국 군함인 줄 알았다거나, 또는 민간 상선인 줄 알았다가 지근거리에 와서야 적함인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도 낭패입니다.  당시에는 그러한 점을 이용한 전술이 아주 흔하게 활용되었습니다.  즉, 깃발을 자국기가 아닌, 엉뚱한 국가의 깃발을 내다는 것이지요.

 

이게 불법 아니냐고요 ?  대개는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첫번째 발포를 시작하기 전에 진짜 자국기를 내걸기만 하면, 그건 정당한 위장 전술(ruse de guerre)로 인정받았습니다.  보통 해적 영화보면 해적선이 마지막 순간에야 해골이 그려진 해적기를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게 다 적법한 (어차피 해적인데 적법 불법을 따지나 ?) 전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군함들은, 단독 항해시에 미확인 선박을 만나면, 어떤 깃발을 올리고 접근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일단 가짜든 진짜든 깃발을 올리고 접근을 합니다.  가령 저쪽이 프랑스 깃발과 펜던트를 날리고 있다면, 일단 이쪽도 프랑스 깃발과 페넌트를 올리고 접근했다고 치지요.  이쪽도 프랑스 군함이라고 선언을 했다면, 그 다음 차례는 저쪽이 'private signal', 즉 비밀 신호를 보냅니다.  물론 깃발 신호로요.  이건 현대 전투기에서의 IFF (If Friendly or Foe, 피아식별) 장치 같은 것이지요.  이 깃발 신호에는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으므로, 우물쭈물하면서 최대한 접근하다가 결국 영국 깃발을 내걸고 '꽈광' 발포를 하는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정확한 정보는 전투에서건 상거래에서건, 엄청난 가치를 지닙니다.  일단 군사 행동에서는 공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군함이 중요한 연락 문서를 가지고 홀로 인도양을 항해 중인 프랑스 프리깃 함이라면, 저렇게 발견된 미확인 선박이 영국군의 74문짜리 전열함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적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당장 침로를 변경하여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것이 장땡이겠지요.  또, 상황이 반대라서 이쪽이 공격을 하려는 입장이라고 해도, 가능한한 미리 전투 준비를 해두고 있는 것이 유리합니다. 

 

여기서 전투 준비라 함은, 'clear for action'을 말합니다.  Clear for action 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작업입니다. 

 


1. 먼저 갑판 아래에 있는 선실들을 구분하는 나무 벽들을 모두 떼어내서, 간판 아래를 넓은 하나의 공간으로 변형시킵니다.  이래야 대포 사격 및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일반 장교들은 물론 함장의 가구나 서류, 소지품같은 것들은 모두 하갑판 창고로 쳐박히게 됩니다.







(선원들을 위한 별도의 선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렇게 선원들이 식사하는 저 공간은 바로 포열 갑판이었고, 그림 왼쪽에 보이는 것처럼 대포 사이사이의 공간의 접이식 식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전투 시에는 저런 잡다한 기물들은 모두 떼어내 선창으로 내려보냈습니다.)


 

2. 수병들의 침구인 해먹 말아둔 것을 꺼내어 난간 등에 고정시켜 둡니다.  진지 구축시의 모래주머니 쌓아둔 것과 같은 방탄 효과를 냅니다.  또, 포격에 맞아 떨어질 삭구나 가로활대 등으로부터 갑판 위의 수병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그물막을 펼쳐 고정합니다.

 

3. 주방(galley)의 불을 끕니다.  재수없게 적의 포탄이 주방 아궁이를 때릴 경우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 시간이 있다면 clear for action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염장 쇠고기를 삶아두는 것이 좋겠지요.  치열한 포격전 중에도 수병들이 원기를 찾을 수 있도록 약간의 음식과 물을 준비해두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대개는 찬 음식이었지요.

 

4. 탄약고에서 적절한 숫자의 포탄과 화약을 날라오고, 포격에 필요한 슬로우 맷치 (slow match, 천천히 타는 도화선) 및 포구를 식히는데 쓸 물통 등을 준비합니다.  또 포구를 막아두었던 마개도 뽑고, 핸드 스파이크 등 대포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이런저런 도구들을 가져다 둡니다.  또 화재가 날 때에 대비하여 소방용 물통도 채워둡니다.  시간이 충분하면, 대개 벌겋게 녹이 슬어있을 포탄의 표면을 정으로 쪼아서 녹을 벗겨냅니다.  그래야 명중률이 좋아지거든요.






(이건 텍사스 오스틴의 군사 박물관에 전시된 18세기 후반 ~ 19세기 초반 함포의 모습입니다.  저런 나무 물통 하나하나가 포격에 꼭 필요한 주요 장비였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저렇게 깔끔하진 않았겠지요.)



 

5. 이런저런 준비가 다 되면, 각자 지정된 전투 위치로 가서 사격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군의관은 선창 바닥 근처의 응급실(cockpit)에 칼과 톱, 붕대 등을 갖다놓고 기다립니다. 

 


이런 준비들은 대개 상대 군함이 사정거리 내로 접근하기 전에 다 마칠 수 있습니다.  한 30분 걸릴까요 ?  어쨌거나 조금이라도 먼저 전투 태세에 들어가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고, 특히 깜깜한 야밤 중이라서, 적함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라면, 그야말로 앉아서 눈뜨고 당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당시의 전투 양상은 대략 아래와 같았습니다.



1. 양쪽 함대가 서서히 접근합니다.  


이때, 적함대와 안싸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면 도망을 쳐야 하는데, 이럴 경우 바람을 등지고 있는 함대가 훨씬 유리합니다. 도망을 칠지, 교전을 할지 마음대로 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양쪽이 서로 다른 진영으로 격돌하여 뒤엉킵니다.

 

학익진 같은 것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합니다만, 이때의 함대 진영은 상황에 따라 제각각이었습니다.  가령,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에서 썼던 전법은 이열 종대로 길게 늘어선 함대가 적 함대를 수직으로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적함대를 양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이열 종대로 쳐들어가면, 적함대를 돌파할 때까지는 적의 broadside 공격을 받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일단 적함의 이물과 고물 사이에 뛰어들면 저항할 수 없는 적함을 '긁어'줄 수 있었으므로 그다지 나쁜 전술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먼거리에서 쏘아대는 broadside는 그리 명중률이나 파괴력이 대단치 않았으므로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사실 트라팔가에서도, 모든 군함들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쳐들어간 것이 아니고, 각 함선의 사정에 따라 제각각 전투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함대의 제독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각 함의 함장들이 제대로 해주기를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트라팔가 전투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횡대에 돌진하는 영국 함대입니다.  2열 종대로 이렇게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3. 상호간에 무자비한 근접 포격을 주고 받습니다.


좀 먼 거리에서는 roundshot이나 chainshot 등을 쏘아대다가, 정말 바로 옆으로 다가오게 되면 grapeshot을 쏘았습니다.  이건 일종의 산탄 같은 것으로, 적함의 갑판 위의 전투원들을 피떡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또 갑판 아래의 대포에서는 계속해서 roundshot을 퍼부어서, 적함의 대포를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슬탄의 제대로 된 용도입니다...  끔찍하지요 ?)




4. 해전의 영원한 로망 - boarding


글자 그대로 총칼로 무장한채  적함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미리 적함에 뛰어들 전투원들을 선발해 두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들을 boarding party라고 불렀습니다.  당연히 붉은 코트를 입은 해병들이 선두에 섰고, 원거리 전투에서는 포수 노릇을 하던 선원들도 권총이나 칼(cutlass)로 무장시켜 전투원으로 썼습니다.  보통의 전투는 이렇게 백병전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함상에서의 백병전입니다.  아무 옷이나 대충 입고 싸우는 수병들 중 마치 육군처럼 머스켓 소총을 들고 군모까지 쓴 병사들은 해병, 즉 marine입니다.  원래 해병대의 기원은 저렇게 함상에서의 백병전 담당 전문병이었습니다.  해병들은 저렇게 멋은 있을지 몰라도 거추장스러운 군복을 입어야 했던 대신, 이런저런 뱃일에서는 면제되었습니다.)




5. 항복 


가끔씩은, 백병전 없이 포격전만으로도 항복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의 피해가 너무 커서,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면 당시의 함장들은 주저하지 않고 항복을 했습니다.  '침몰하는 군함의 함장은 배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없던 말이었습니다.  일단 나무로 만든 군함은 아무리 구멍이 뚫려도 잘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또, 정당한 상태에서, 즉 선원들의 사상자가 너무 많은 경우 항복하는 것은 전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대체로 사상자가 얼마나 되면 항복하는 것이 보통이었을까요 ?  여기에는 좋은 예가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프리깃함 레안더 (HMS Leander) 호는 넬슨 제독의 지휘하에 나일강 전투에도 참전하는 등 맹활약을 하다가, 넬슨의 명령에 따라 지브롤터로 되돌아 가던 중이었습니다.  크레타 섬 부근을 지나갈 때 자신보다 더 큰, 프랑스의 대형 전함 제네로(Le Généreux) 호를 맞닥뜨리게 되어, 전투를 벌입니다.  레안더 호의  톰슨 함장은, 총 300명의 선원 중 92명이 죽거나 다치게 되자, 항복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포로 교환으로 풀려나서 본국에 돌아오자, 항복의 이유에 대해 형식상의 군법 재판을 거친 뒤에, 명예로운 항복이었다는 판결을 받고 무죄 방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리한 상황에서도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됩니다.  C.S. Forester의 연작 소설 혼블로워 7편 'Flying Colors'는 바로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레안더 호과 제네로 호의 전투 모습입니다.  전면이 제네로이고, 저 뒤쪽에 박살이 난 전함이 레안더입니다.)



 

항복한 장교들은 적군으로부터도 거의 예외없이 모두 상당히 명예로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승리한 함장은 항복한 적 함장을 당연히 식사에 초대해서 대접해야만 했습니다.  또 항복한 적함에 민간인, 특히 부녀자가 타고 있을 경우 이들은 각별한 보호를 받았고, 또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본국으로 되돌려보내졌습니다.  항복한 장교들조차도, 가석방 문서에 서명만 하면 적함 내부나 적국 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고 (물론 돈이 있을 경우에는) 상당히 호화로운 생활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 많은 경우 포로 교환 조치에 따라 본국으로 귀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포로 교환에 '가불'도 있었습니다.  즉, 가령 프랑스가 영국군 포로를 많이 잡아두고 있는데, 영국군 측에서는 대신 풀어줄 프랑스군 포로가 없다면, 양쪽 다 난감했습니다.  포로들이야 당연히 난감했을 것이고, 영국측도 자기 장교들을 못 돌려받으니 난감했겠지만, 프랑스측은 왜 난감했을까요 ?  포로들은 하는 일 없이 계속 먹고 마시는데다가, 장교 포로들의 경우는 가끔씩 식사에 초대를 하는 등 상당히 예의를 차려주어야 했습니다.  정말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적절한 포로 교환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절대 프랑스와의 전쟁에 복무하지 않겠다' 라는 선서를 받고는 그냥 풀어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로 '가불'입니다.




출처 : 아르마다 - 개럿 매팅리


Patrick O'Brian's Navy - The illustrated Companion to Jack Aubrey's World - editor Richard O'Neill


British Napoleonic Ship-of-the-Line  - Angus Konstam


http://www.icollector.com/Naval-chain-shot-12-pounder-early-1800s-rare_i17425677

http://www.keyword-suggestions.com/Y2hhaW4gc2hvdA/

http://www.bbc.co.uk/history/interactive/animations/trafalgar/index_embed.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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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ㅁㅇ 2016.10.21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류의 해전을 다시 보게 될 날은 없겠지요
    근데 1등.가문의 영광.

  2. 유애경 2016.10.21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삽화에 나와있는 사슬탄은 폭발하진 않고 그냥 사람몸을 가르고 지나가기만 하는 건가요?
    그림만으로도 끔찍하네요!

  3. Mavs 2016.10.21 05: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같은 해적질이라도 정식으로 사략선 허가를 받고 하는 경우라면 법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4. 수비니우스 2016.10.22 1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로'가불'은 나중에 그 값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많은 경우 떼먹었을것 같기도 하네요 ㅎ

  5. 꾸르르 2016.10.23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전쟁사를 봐도 그렇고 나폴레옹과 몇몇 명장들을 제외하면 통제된 전투가 거의 없다시피하네요. 프러시아의 참모장교단이 도입되기 전까지 상당히 주먹구구 식으로 싸움을 한 것 같아요.

    이런거 읽으면 읽을수록 좀 충격입니다 ㅋㅋㅋㅋㅋ 조직이 더 조잡했던 고대에는 이런 게 더 심했다는 건데 알렉산더나 한니발 같은 명장도 설마 알고보니 주먹구구식 병력 운용을 했다던가 ㅋㅋㅋ

  6. 프로이센군 2016.10.23 0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의 넬슨 제독도 전투 상황에선 자신의 함대를 통제하지 못했군요ㅋㅋㅋ 그나저나 육군도 그렇고 해군까지 죄다 백병전으로 승부를 보네요?

  7. ㅇㅇ 2017.02.23 0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IFF는 Identification Friend or Foe의 약자입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이던 1805년 11월, 린츠(Linz)로부터 빈(Wien)을 향해 전진하던 란의 제5 군단은 (전투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랬습니다만) 심각한 보급 부족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진흙투성이 길로 강행군을 하는데다 추운 늦가을에 노숙을 하는 것도 고달픈데, 먹을 것까지 부족하니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모두 지치고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지요.  그때 란의 개인적인 형편은 더욱 안 좋았습니다.  아팠거든요.  란은 아픈 상태에서도 부하들이 겪고 있던 보급 부족에 대해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내린 명령이 이런 것이었지요.


"어떤 병사 또는 부대라도, 약탈, 사사로운 싸움 및 위협을 하다가 적발되거나 장교를 구타할 경우 즉각 총살될 것이다.  집행 권한은 사단장이 행사한다."


이에 따라 실제로 일부 병사는 총살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약간 혼란에 빠지실 수 있겠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원래 보급이란 것이 없고 그저 현지 약탈에 의존해서 먹고 사는 것 아니었던가요 ?  그런데 느닷없이 약탈하면 총살을 하겠다니요 ?


여기서 우리는 사사로운 약탈과 징발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약탈은 영어로 pillage, 불어로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pillage(피야쥬)라고 합니다.  징발은 영어로 requisition, 불어로도 역시 réquisition(레퀴지시옹)이라고 하지요.  짐작하시다시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전해진 말입니다.  약탈이나 징발이나 군대가 주민들의 사유 재산을 강제로 가져가는 행위라서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약탈은 주민들에 대한 아무 보상 없이 이루어지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에 비해서 징발은 군대가 필요에 의해 지휘관의 결정에 따라 수행하는 공식 행위이고, 그에 대해 즉각적인, 혹은 향후에 보상이 이루어집니다.



(자신들과 군마들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프랑스 병사들입니다.  나폴레옹 자신도 '감자가 밭에 없는 계절에 작전을 펼치는 것은 병사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라고 할 만큼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의존도는 높았습니다.)



보상이라고요 ?  설마 주민들에게서 빵이나 밀가루, 와인 같은 것을 가져올 때 돈을 주고 사오는 것인가요 ?  예 맞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현장에서 즉각 돈을 지불하고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용도로 각 연대에는 민간인 신분인 병참 장교(commissariat)가 할당되어 금화나 은화를 담은 튼튼한 돈 궤짝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할 경우의 이야기였고, 대부분의 부대들은 현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돈 궤짝 속에 든 돈은 병사들의 급료를 주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거든요. 


결국 대부분의 징발 댓가는 병참 장교가 무성의하게 쓱쓱 휘갈려 써준 징발 영수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액수보다는 주로 징발된 물품이나 서비스의 물량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령 밀가루 몇백 파운드, 와인 몇 통, 옷감 몇 평방 미터, 구리솥 몇 개 뭐 그런 식이었지요.  이런 영수증은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 시장 가격으로 징발 대상자에게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아마 제 값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징발 대상이 된 주민들은 그에 대한 원망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징발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본인이 남긴 편지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러시아와 제3차 대불동맹전쟁을 준비 중이던 1805년 9월 22일, 북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으로 있던 양아들 외젠(Eugene)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엄마가 데려온 새 아빠를 만나보니 나폴레옹이었다는 행운의 소년 외젠 보아르네입니다.  그는 나폴레옹 패망 후에도, 나폴레옹 덕에 얻은 장인어른인 바이에른 국왕 덕분에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한 곳에 집결한 8만 대군을 먹이기 위해서는 지방민들로부터 밀과 와인, 사료, 귀리, 밀짚을 징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야.  우린 군 편성도 잘 되어 있고 파리로부터의 자금 조달도 용이한 프랑스령 알사스(Alsace)에서도 이 조치를 취해야 했지.  모든 물자의 가격이, 준비해둔 거액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올라버렸거든.  우리가 훨씬 이전부터 물자 집적소를 준비해 둔 곳에서는 징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 밖의 곳에서는 징발은 필수조치였어.  오스트리아군도 독일과 베네치아에서 징발을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대군을 먹일 방법이 없었겠지.  그런 징발에 대해 지방민들은 적절한 가격을 지불받을 것이야."


즉, 나폴레옹은 정상적인 군수품 구매 계약이 가능한 경우에도, 때로는 강제로 물품 구매가를 깎기 위해 징발을 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대규모 작전 수행 준비 중이거나 한창 전쟁 중에는 모든 물자의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각 부대들이 장기간 원정에 대비해 미친 듯이 물자를 사모을테니, 공급이 뻔한데 수요가 많아지면 물가가 오르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가격을 강제로 통제하기 위해 구매보다는 일부러 징발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중에 보상을 받는다고 해도 징발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크게 반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나폴레옹은 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민중은 툴툴거리기 마련이지만, 그 불평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단다.  오스트리아군도 같은 주민들에게 비슷한 규모로 징발을 했고,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더 많이 했다.  게다가, 주민들은 만약 징발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군대가 무력으로 물자를 빼앗아 갈 것이므로 상황이 더 안 좋아질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


이런 징발은 자국 영토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적국 영토에서도 마찬가지 원칙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즉, 적국 마을에서 보급품을 조달한다는 것이 산적처럼 무자비하게 주민들로부터 사유 재산을 강탈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참 장교의 꼼꼼한 물품 확인 및 영수증 발행 작업 하에, 나름 조직적으로 징발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단지 신사다운 전쟁을 수행한다는 측면 뿐만 아니라, 군 전체의 효율적인 보급과 작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적국 마을을 점령한 병사들이 장교들의 지휘가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배고픔 혹은 사사로운 욕심에 따라 주민들을 약탈한다고 하면, 그렇게 빼앗은 빵이며 감자, 와인 등을 옆 부대 병사들과 사이 좋게 나누어 먹겠습니까 ?  절대 그럴 리 없지요.  아마 직접 약탈에 참가한 병사들끼리 배터지게 먹고 취하도록 마실 것입니다.  금화나 은접시 같은 값나가는 물건은 장교들 몰래 배낭 속에 숨겨질 것이고요.  그런 식으로 무질서한 약탈이 일어나면 절대 전체 병력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일부 운 좋은 병사들의 무절제한 낭비로 이어져 식량의 균등하고 효율적인 분배가 불가능할테니까요.  또한 그런 약탈은 피점령 주민들의 저항과 반란으로 이어져 괜히 불필요한 유혈 사태만 불러오기 쉽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징발 활동은 반드시 체계적으로, 장교의 감독 하에 이루어져야 했지요.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피같은 곡식과 와인, 말과 수레를 빼앗긴 주민들에게 던져진 프랑스군의 징발 영수증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  전쟁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 시골 농민들이 손에 그런 영수증을 들고 머나먼 파리의 육군성으로 찾아와 번쩍이는 금화를 받아갔을까요 ?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기 마을 반경 10마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던 19세기 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eBay에 올라온 1809년 오스트리아 문서입니다.  가격은 3장 모두 해서 $276.10로서, 생각보다는 비싸지 않네요.  여기 올라온 것은 복제품일까요 ?  그렇다면 생각보다는 너무 비싸고요.)



그런 징발 영수증의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문서를 구글링하다가 찾았습니다.  화려한 캘리그래피로 쓰여져 알파벳도 알아보기 힘든 이 독일어 문서는 180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바그람(Wagram) 전투에 의해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된 뒤 맺어진 평화 협상 문서 중 일부로 보입니다.  독일어로 된 것을 보면 아마 오스트리아 측에서 작성한 것 같은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Das kaiserliche fraenzoesische Gouvernement hat eine neue Requisition..."   (프랑스 제국 정부는 새로 징발을 한다...)


그 밑으로 나오는 것은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에서 가져가는 물품과 그 물량을 적은 것입니다.  밀, 밀짚, 브랜디, 식초 등등이지요.  이건 다소 뜻 밖입니다.  나폴레옹은 항상 전쟁 비용을 패전국에 막대한 배상금 형태로 전가시켰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일종의 보호무역주의자라서, 전쟁 승리 후 패전국으로부터 상품 형태로 배상금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은 1809년 9월,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오스트리아 쇤브룬(Schonbrunn) 궁전에서 당시 프랑스 내무부 장관이던 푸셰(Fouche)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며 투덜거렸습니다.  "해당 부서에서 일을 제대로 했다면 짐이 비엔나로 밀고 들어온 전과를 활용하여 프랑스의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이 더 많은 직물과 도자기 등의 상품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도록 독려했을 걸세.  이전에 그런 상품들은 오스트리아에게 엄청난 관세를, 가령 직물만 하더라도 무려 60%의 관세를 내고 있었네.  당연히 나의 승리를 이용하여 거의 무관세로 비엔나의 창고들이 터질 정도로 프랑스 상품을 판매해야 하네.  그런데 관련 부서에서는 생각도 없고 행동도 없군."  이렇듯,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현금, 그것도 가능하면 금이나 은으로 된 경화(specie)였습니다.  그런 그가 밀가루나 브랜디 같은 상품을 배상금으로 받아올 리가 없었습니다.


이건 제 추론입니다만, 프랑스군이 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징발 형태로 가져간 그런 보급품 물자에 대해 위의 문서와 같은 형태로 정산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오스트리아 관리들은 전국 곳곳에서 프랑스군이 물자를 가져가고 발행한 징발 영수증을 모아오고, 나폴레옹은 그것들에 대해 전쟁 배상금 일부를 변제해주는 형식으로 정산을 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물자를 강탈당한 주민들에게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어떤 보상을 해주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패전국에 대해서야 이런 식으로 처리가 될 수 있겠지만, 중립국이나 동맹국은 어땠을까요 ?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가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제4차 동맹전쟁에서나 제5차 동맹전쟁에서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편에서 싸운 바이에른 등의 동맹국에게는 새로운 영토나 노획품 공여 등으로 두둑한 보상을 해주었으니, 그런 밀가루와 와인, 식초 등의 사소한 물품 대금은 거기에 묻어 처리했을 것입니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가끔 정말 산골 오지에 남겨진 징발 영수증은 정말 처리가 안 되고 남아 있다가 먼 훗날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바로 스위스 알프스 산골의 작은 마을 부르-생-피에르(Bourg-Saint-Pierre)의 경우입니다.  1984년에 프랑스 미테랑 (Francois Mitterrand) 대통령이 스위스를 국빈으로 방문할 때, 뜻하지 않게 이 마을 대표가 나폴레옹의 180년 묵은 징발 영수증을 들고 미테랑을 찾아온 것이지요.  1800년 5월, 나폴레옹이 제2차 이탈리아 침공을 위해 알프스를 넘을 때 이 마을에서 구리 솥과 수천 그루의 통나무 등 물품과 용역을 징발하면서 남겨둔 영수증이었지요.  당시 금액은 약 4만5천 프랑(지금 가치로 약 6억5천만원)으로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습니다.  가령 당시 하루 노임을 3프랑, 현재 가치로는 약 5만원으로 계산했더군요.  그런데 이것이 180년 동안 차곡차곡 이자에 이자를 붙여 계산하니 2천만 스위스 프랑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미테랑의 내각 수석이었던 콜리아르(Jean-Claude Colliard)가 이 마을을 찾아 기념 동판과 함께 원금만 현금으로 지불했다고 합니다.  이자에 대해서는 입을 닦았고요.  




(나폴레옹이 184년 전에 진 빚을 현대 프랑스 정부가 갚았다는 훈훈한 (?)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안 갚았다는 조롱조의 구절로 끝맺는군요.)



적국이 아니라 주로 동맹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작전을 펼쳤던 영국군의 경우는 좀더 문제가 까다로왔습니다.  자기 정부의 말도 믿지 않는 현지 주민들에게 뭐라고 적혀 있는지도 모를 영어로 된 징발 영수증을 줘봐야 순순히 식량을 내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과 싸우기 위해서는 현지 주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영국군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식량을 징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징발 영수증이 즉각적으로 현금화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보여주기 위해 영국은 나름 애를 많이 썼습니다.  즉, 본국에서 국채 발행으로 돈을 모은 뒤, 그 돈을 인도 등 전세계에서 긁어모은 금화로 바꿔 선박 편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지속적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주조된 금화는 아예 군용 기니화(military guinea)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영국이 주조한 마지막 기니화였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어지는 항로에는 영국 화물선을 약탈하려는 프랑스 사략선(privateer)들이 우글거렸으니까요.  이들 중 일부라도 프랑스 사략선에게 나포될 경우 잃어버리는 금화도 아깝지만, 그 액수만큼 프랑스의 군사력을 키워주는 셈이었습니다.  당시 금화 및 은화는 요즘의 석유 못지 않은 필수 전쟁 물자였거든요.




(1813년에 주조된 소위 'Military Guinea' 금화입니다.)



당시 영국군 재무관이었던 헤리즈(John Charles Herries)가 1811년~1815년 사이에 웰링턴의 원정군, 그리고 대륙 동맹국을 위한 보조금으로 지출한 금화 및 은화는 425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금 1g을 대략 5만원으로 계산하면, 이는 무려 13조원이 넘는 거금입니다.  생산력이나 인구, 금융 규모가 요즘과는 크게 차이나는 당시의 대영제국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때 어쩔 수 없이 영국 정부가 손을 벌렸던 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 쪽이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륙 곳곳에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군과 싸우는 영국군의 군자금을 영국과 말타, 스페인과 시실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은행까지 거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스페인 현지의 웰링턴에게 공급했습니다.  





(웰링턴의 군자금을 책임지고 있던 병참 총감(Commissary-General)이던 헤리즈 John Charles Herries 입니다.  웰링턴이 한창 반도 전쟁을 수행하던 1810년대에는 기껏 해야 30대 초반이었을텐데... 대단하네요.)



1813년 말이 되어 이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침공을 시작한 웰링턴은 여태까지와는 좀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고지식하고 배가 불렀던 프랑스 농민들은 낯선 영국 기니 금화를 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항상 현지 주민의 지지 확보를 중요시했던 웰링턴은 그에 따라 프랑스 농민들에게 징발 댓가로 지불할 프랑스 금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는 그 어려운 요구조건도 훌륭하게 수행해 냈습니다.  네덜란드에 가서 프랑스 금화 및 은화를 사들인 뒤 선박 편으로 스페인으로 보낸 것이지요.  물론 이런 금융 거래에는 막대한 이윤이 따랐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 전쟁 금융을 통해 큰 부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웰링턴이 평펑 써대던 징발 영수증 및 군수품 구매 계약서를 로스차일드는 스페인 현지에서 헐값에 대량으로 매입하여 런던으로 가져온 뒤 제값을 받아 냈습니다.   훗날인 1834년 로스차일드는 벅스턴 경(Sir Thomas Powell Buxton)에게 말하길 "그 거래가 자신의 일생 중 최고의 비즈니스였다"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네이썬 로스차일드 Nathan Mayer Rothschild 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태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거대한 부를 이룬 것은 웰링턴의 전쟁 자금 금융을 사실상 대리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렇게 엄청난 돈을 버는 사람들이 꼭 생깁니다.  하지만 전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행위이고, 병사들은 고통과 죽음 속에 신음하게 됩니다.  이렇게 큰 돈이 오가는 와중에도 정작 병사들은 굶기 마련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로 이번 편을 마무리하지요.  


1807년 폴란드 땅에서 러시아군과 싸우던 때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종인 콩스탕(Louis Constant Wairy)이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행진하는 병사들 옆을 말을 타고 지나치고 있었답니다.  프랑스 병사들은 현지에서 먹을 것을 구하다보니, 재빨리 폴란드 현지어를 몇 마디씩 배운 상태였는데, 그 중 한명이 용감하게도 황제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Papa, kleba !"  (아빠, 빵이요 !)


그러자 뜻 밖에도 나폴레옹도 폴란드어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Nie ma !"  (없다 !  There is none !)


이 말에 병사들은 빵 터져서 크게 웃고는 더 이상 배고프다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콩스탕에게는 약간 쑥스럽게도, 폴란드어로 빵은 클레바 kleba가 아니라 흘렙 chleb이라고 합니다.)





출처 :  


Margaret S. Chrisawn.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Contributions in Military Studies) (Kindle Locations 1698-1704). Kindle Edition.

Heckscher, Eli F.  The Continental System: An Economic Interpretation

http://www.ebay.com/itm/1809-Napoleon-Austria-Napoleonic-France-Requisition-Documents-48901-/371711363946?hash=item568bb94b6a:g:x2kAAOSwHoFXsnoH

http://www.npr.org/sections/thesalt/2015/06/18/414614705/appetite-for-war-what-napoleon-and-his-men-ate-on-the-march

https://books.google.co.kr/books?id=zq8GhdLeK_kC&pg=PA115&lpg=PA115&dq=requisition+napoleon+war&source=bl&ots=4DKmy7f1pY&sig=QpxPMR2WgfRmpe7r8NDbXXYLnNU&hl=ko&sa=X&ved=0ahUKEwicz_T7gMrPAhWCipQKHTVCAT4Q6AEISDAK#v=onepage&q=requisition%20napoleon%20war&f=false

https://books.google.co.kr/books?id=PS4CVCq-70sC&pg=PT56&lpg=PT56&dq=wellington+france+gold+money&source=bl&ots=Y87Pmfkw8V&sig=n0XCX_P2qArtLtgicDcBnyA3hCg&hl=en&sa=X&ved=0ahUKEwjWxZGL8szPAhWCpZQKHWU6BAUQ6AEIJTAA#v=onepage&q=wellington%20france%20gold%20money&f=false

https://en.wikipedia.org/wiki/Nathan_Mayer_Rothschild 

https://www.the-saleroom.com/en-gb/auction-catalogues/spink/catalogue-id-srspi10011/lot-a905b379-2ad3-45f2-900d-a3f800fbadff

https://en.wikipedia.org/wiki/John_Charles_Her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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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남변 2016.10.11 0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에는 이자채권의 소멸시효가 없나보군요. 우리나라 법 같으면 시효에 걸려서 원금 및 이에 대한 몇년분 이자만 지급하도록 판결이 나올 것 입니다. 진짜 유럽 법이 저런거라면 오히려 비합리적이네요. 현실적으로 프랑스 측은 어차피 다 갚을수가 없을테니 징발당한 사람의 후손이 이자를 전혀 받지 못하는 찝찝한 결과가 나와버릴 수밖에...

    • ian 2016.10.12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구소련 붕괴후 러시아가 새로 국채발행시에 과거 재정러시아 발행채권을 상환한 사례가 있습니다.

    • 수비니우스 2016.10.19 15: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전 세대의 일을 왜 후손인 우리가 갚아야 하는가 하고 말이에요. 2007년에 신동아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진짜로 그렇게 인터뷰하던데요. 후손들이 조상들로부터 받은 것이 있으니 저런 빚도 갚아줘야죠.

  3. boribob 2016.10.11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추천 버튼 없는건 안타깝네염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4. 연습장 2016.10.11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 집에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확실히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로스차일드의 모습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물론 현대에까지 유태인과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각종 음모론이 넘쳐나게 된 원인은 확실히 제공한것 같군요

  5. 유애경 2016.10.12 07: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전 축하합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발판으로하는 것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잘보고 갑니다.

  6. Mavs 2016.10.12 1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시절과 지금은 국제법이 많이 달라졌는데 제1제정 당시의 부채를 현재의 공화국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지는 의문이군요. 그냥 서비스로 원금만 갚아준거 같은데요.

  7. 정암 2016.10.12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으로 이사를 축하드립니다^^

  8. feel96 2016.10.12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 축하드립니다! 늘 잘 보고 있습니다^^

  9. Gale 2016.10.12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갑니다!

  10. 오리앙 2016.10.13 1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 축하드립니다. 지난 몇 년간 좋은 글 감사했습니다.

  11. 뽀또 2016.10.14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 마련 축하드립니다.
    징발이라...총 칼 든 군대에게 징발시 거부할 배짱은 없겠지요.
    보상은 어느정도로 되었는지 평균치가 궁금해요 ㅎㅎ

  12. 에그-egg 2016.10.16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을 마련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새집 마련하신 기념으로 재미있는 글을 올리셨군요. ㅎㅎ
    앞으로도 자주 찾아뵐께요. :)

  13. 이보트 2016.10.16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이 아주 깔끔하네요. 축하드립니다.

  14. 달마 2016.10.19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15. 라인하르트 2016.10.20 0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 1806년 프로이센이 처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답이 안 나올 정도로 국가재정에 구멍이 나서 결국 바그람 전투 이후 패전 처리에서 프랑스 군이 징발했던 물자에 대한 처리를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전쟁 피해가 적던 헝가리에서 대량으로 물자을 반 강제로 징발해서 당장 급한 불은 끄는 수준이었지만, 이 때문에 가뜩이나 반 합스부르크 분위기가 강하던 헝가리인들이 반발이 더 심해집니다.

    영국같은 경우에도 대프랑스 동맹국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는데 보유하고 있던 경화 상당수를 쏟아부은 결과, 경화준비용 지금(지은) 보유량이 거의 바닥날 지경이 되다 본국에서 한 동안 불태환 지폐를 발행해서 썼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사실, 영란은행이 가장 위험했던 시기는 프랑스 제국 시절이 아니라 1795-1797년, 즉 프랑스 공화국군이 네덜란드, 베네치아 공화국을 멸망시키면서 암스테르담의 은행가와 베네치아의 은행가 전부를 털어 버리면서 이들 은행들에 보관되었던 영국 내 자본 상당수가 묶이면서 일종의 금융공황이 발생했던 시기입니다. 이 때, 스미스와 멜서스, 리카도 사이의 경제학의 석학 중 하나인 헨리 손턴이 크게 활약하기도 합니다.

  16. 까마구 2016.10.20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하셨으니 축하 댓글은 하나 남겨야죠... 티스토리 이사를 축하드립니다... 근데, 이제 노안이라 본문은 그럭저럭 보이는데, 댓글은 너무 작아요...ㅜㅜ

  17. 흉갑 2016.10.23 1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이해가 안되서 그런데 승리했을때는 징발한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나요?

  18. 삽질랜드 2016.12.08 0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당시의 현지 징발을 약탈에 가까운 행위로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거래하고 보상도 하는군요. 저는 저렇게 보급 수송도 없이 무계획적인 현지 징발을 하면 정작 중요한 때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의문이기도 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이 최소한의 식량과 은자만 가지고 조선에 들어와 조선 사람들로부터 식량과 은자를 교환하려다 이런 거래 방식 등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 사람들의 거부로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 약탈로 겨우 식량을 확보하다가 요동의 상인들을 통해 식량을 수송해 와서 보급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하는데 상업이 발달한 국가들은 어느 정도 이런 방식이 익숙했나 봅니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이동 중인 군대의 현지 징발 외에는 후방에서는 따로 아무런 보급 물자 지원이라던가, 보급로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없었던 것인가요? 아, 뭐 화약이나 예비 화기, 군복 등, 전투나 축조 등에 필요한 건 후방에서 보급될 수밖에 없겠지만 식량 같은 건 결국 무조건 현지 징발이었던 건가요?

  19. 2018.03.25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 유수 2018.03.25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하지만; 답신을 주신것 같은데 제가 티스토리 가입이 안되어 있어서인지 비댓덧글로 말씀을 드리고도 정작 저는 답변해주신것을 보지 못합니다;; 링크를 써놔서 홍보가 될까봐 비댓을 했는데 번거로우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21. 유수 2018.03.26 0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양하신다면 안타깝지만 어쩔수가 없네요. ㅠㅠ

    괜찮으시다면 글을 퍼가는 것이라도 허락을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당연히 글의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