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2 21:34

5월 21일 오전,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2개 마을에 포진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은 8만4천의 보병과 1만4천이 넘는 기병, 그리고 무려 292문의 대포를 동원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고작 2만2천의 보병과  3천이 채 안되는 기병, 그리고 고작 52문의 대포를 도나우 강 좌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오스트리아군은 그러나 다소 어정쩡한 진형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즉, 힐러(Hiller)와 벨가르드(Bellegarde), 그리고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이 각각 이끄는 3개 군단이 북쪽으로부터 아스페른을 향했고, 에슬링으로는 데도비히(Dedovich)가 대리 지휘하는 로젠베르크(Rosenberg)의 군단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로젠베르크 본인은 본인의 군단 중 일부 사단을 이끌고 에슬링 동쪽에 있는 좀더 큰 마을인 그로스-엔저스도르프(Gross-Enzersdorf)를 향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는 아예 프랑스군이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이렇게 병력을 분산시켜 공격해들어간 이유는 카알 대공의 판단 착오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부교가 끊어져 프랑스군 대부분은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몰랐던 그는 여전히 프랑스군의 본진은 아스페른에서 북진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 주된 공세를 3개의 강력한 군단으로 틀어막고, 그 사이 로젠베르크의 군단을 프랑스군의 옆구리인 에슬링과 그로스-엔저스도르프에 꽂아넣어 그 부교를 노리겠다는 것이 그의 작전이었습니다.


이에 맞선 프랑스군은 사실상 마세나의 제4 군단 하나에, 베시에르가 지휘하는 예비 기병대 뿐이었습니다.  란 본인은 에슬링에 있었으나, 그의 제2 군단은 아직 로바우 섬에 있었으므로 란은 원래 마세나 휘하였던 부데(Boudet) 장군의 1개 사단을 빌려서 에슬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세나의 군단 대부분은 아스페른 마을 남쪽에 위치했고,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 1개만 마을 안에 쏙 들어가 있었습니다.  마을이 너무 작았던 것입니다.  몰리토르의 병사들은 마을 건물들과 돌담 뒤에 재주껏 숨어 적의 내습을 기다렸습니다.  에슬링에서의 상태도 비슷했고, 이 두 마을 사이는 사실상 텅 비어 있었습니다.  지킬 병력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유일한 생명선인 부교까지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므로, 나폴레옹은 부교 자체는 신참 근위대(Jeune Garde)가 지키도록 하고, 베시에르의 예비 기병대를 이 두 마을 사이의 평원에 배치했습니다.  여기서 작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란 휘하에는 부데 장군의 1개 사단 밖에 없었는데, 이건 군단장인 란에게는 너무 적은 병력을 준 셈이었습니다.  괜히 부데 사단에 지휘관이 2명 있게 되는 셈이었지요.  그래서 나폴레옹은 평원을 방어하는 베시에르의 기병대를 란 밑에 배속시켜 버렸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 란이 베시에르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을 뻔히 봤으면서도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사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나폴레옹이 란과 베시에르의 성숙함을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나폴레옹은 역시 란의 편을 들어줬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이건 결국 또 하나의 작은 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정말 느렸습니다.   오전부터 시작한 공격이 아스페른 마을에 당도한 것이 거의 3시가 다 된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나마 마을 안에서 강력하게 저항한 몰리토르의 사단에 의해 금방 격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도 자신들의 진격에 맞서 뛰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조심스럽게 전진을 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주공을 맡은 3개 군단이 마을 북쪽에 완전히 포진을 한 것은 거의 오후 4시가 되어서였습니다.  아스페른 서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마세나의 군단은 용감하게 맞섰고, 오스트리아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마을 안쪽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의 전투는 농가들 사이에서의 밀고 밀리는 혈투가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 되었습니다.  마세나는 그 사이에 증원된 생-시르(Carra Saint-Cyr) 장군의 사단의 도움을 받아 집요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적의 우세가 막강했으므로, 마을의 절반 정도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밤이 되어 전투가 일단락 될 때는 마을의 북쪽 절반은 오스트리아군이, 남쪽 절반은 프랑스군이 점거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첫날은 기본적으로 치열한 시가전이었습니다.  그림은 아스페른이 아니라 에슬링에서의 시가전의 모습입니다.)





(1809년 5월 21일, 드디어 격돌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첫날의 상황입니다.)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중앙부의 베시에르도 상황에 비해서는 무척 분전했습니다.  오후 3시반 경 적의 기병대가 몰려오자 몇차례 돌격을 감행하며 꽤 잘 싸웠고, 덕분에 중앙부가 적의 기병대에 의해 돌파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 에슬링을 노리는 로젠베르크의 군단이 느릿느릿 나타나자 비로소 베시에르는 아스페른-에슬링을 연결하는 도랑 뒤편으로 물러났습니다.


에슬링에서의 형편이 어떻게 보면 가장 좋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면 로젠베르크 1개 군단이 2개 대오로 나뉘어 오는 것이었습니다만) 2개 군단급의 오스트리아군을 고작 1개 보병 사단만으로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1대3의 열세였지요.  그러나 여기서도 오스트리아군은 너무나도 느렸고, 너무나 미숙했습니다.  오후 느직히 에슬링 앞에 나타난 데도비히의 병력만으로도 란의 1개 사단 정도는 가뿐히 제압이 가능했지만, 데도비히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스-엔저스도르프를 거쳐 올 예정이었던 로젠베르크의 부대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로젠베르크는 아무 적군도 없던 그로스-엔저스도르프에서 꾸물거리다 저녁 6시 30분이 되어서야 나타났는데, 이렇게 두 부대가 모였음에도 본격적인 공격은 없었습니다.  에슬링 안에 포진한 프랑스군의 병력수를 잘 모르다보니 좋은 말로 조심스러웠고, 막말로 겁이 났던 것이지요.  이들의 공격은 7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는데, 그나마 따로따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데도비히의 공격은 7시에, 로젠베르크의 공격은 8시에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공격을 시작한 이유도 한심했습니다.  에슬링에서의 전황을 파악한 카알 대공이 '뭘 기다리는 것인가 ?  당장 공격 !'이라는 명령을 전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어설픈 공격이라고 해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호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두꺼운 석벽을 가진 곡물 창고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의 돌담 뒤에 숨어 에슬링 전체를 요새화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적의 압도적인 포격에 무척이나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은 로젠베르크와 데도비히를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중앙부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에슬링의 거대한 곡물 창고로 돌격하는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의 모습입니다.)



카알 대공은 오후 늦게서야 비로소 프랑스군이 기어나올 생각이 전혀 없고, 정말 아스페른과 에슬링을 사수하며 버틸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카알 대공도 나름 명장이었으므로, 그렇게 프랑스군이 수비에 치중한다면 좁은 아스페른 정면에 3개 군단이나 집중시켜봐야 효율적인 부대 운용이 안 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병을 상대적으로 텅빈 아스페른-에슬링 사이의 중앙부로 진격시켰습니다.  그 곳은 에슬링에서 고군분투 중인 란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그에게는 따로 병력이 없었습니다.  아니, 있긴 있었는데, 그게 베시에르의 기병대였습니다.  란은 오후 한때 잠깐 싸우는 척 하더니 도랑 뒤에 숨어 있는 베시에르에 대한 증오심이 새삼 솟아 올랐나 봅니다.  그는 부관을 베시에르에게 보내면서 "지금 당장 돌격할 것, 그리고 제대로 할 것"이라고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전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비록 욕설은 섞여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명령을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장교 집단이란 신사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급한 상황에서 명령을 내릴 때도 예의를 갖추어 권고형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제독이 일개 중위 하나를 당장 오라고 소환할 때도 연락 장교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The admiral's compliments, sir, and he'd like Mr Hornblower's presence on board the flagship as soon as is convenient."

(제독님께서 안부와 함께 여쭙습니다만, 혼블로워 중위께서 시간이 나시는 대로 기함에 와주셨으면 하십니다.)  


그런데 일개 대위 나부랭이가, 아무리 더 높은 란 원수의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베시에르 원수에게 '지금 당장, 그것도 제대로 돌격하라십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습니다.  이런 위태로운 전갈을 가지고 간 것은 루이 드 비리(Louis de Viry) 대위였는데, 당연히 무척 순화된 버전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돌아온 드 비리 대위에게 란은 그가 전달한 명령을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읊게 했고, 그 내용이 무척 순화되어 전달된 것을 안 란은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는 다시 샤를 라베도예르(Charles LaBedoyere) 대위를 보냈으나, 이 대위도 베시에르 앞에서는 겁을 먹고 드 비리 대위와 비슷한 메시지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부하들에게 화가 난 란은, 때마침 도착한 마르보(Marbot) 대위에게 '오쥬로 원수께서 자넨 믿어도 된다고 했네, 그러니 그 말씀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보게'라는 말과 함께 다시 또박또박 명령을 불러주며 반드시 그 말 그대로 전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르보는 정말로 '지금 당장, 제대로 돌격하라십니다'라고 베시에르에게 전달했고, 베시에르에게서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대위 나부랭이를 봤나'라며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란에 대한 베시에르의 분노는 나름 좋은 효과를 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돌격으로 승화시킨 그는 즉각 도랑을 넘어 중앙부로 몰려오는 적을 향해 돌격하여, 적의 포병대를 제압하고 밀집 대오를 구성한 보병대를 한바퀴 돈 뒤 복귀했습니다.  비록 적 보병대를 깨뜨리지는 못했지만, 어차피 기병만으로 적 밀집 보병을 격파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의 용감무쌍한 돌격만으로도 오스트리아군의 중앙부 공격은 돈좌된 셈이었으므로 상당한 공을 세운 셈이었습니다.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일대의 전투는 밤 11시까지 진행되다, 양군 모두 병사들이 지치는 바람에 정식 휴전없이 소강상태로 빠져 들게 됩니다.  에슬링에서는 란의 분전, 그리고 베시에르의 분노의 돌격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이 발을 못 붙였으나,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이 시가지 내에서 혈투를 벌이던 아스페른에서는 그 상태 그대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을 지새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지쳐 쓰러졌지만 지휘관들은 또 다시 모여야 했습니다.  마세나의 사령부로 모인 베시에르와 란은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또 으르렁거렸습니다.  이 둘은 서로 모욕을 퍼붓다 결국 검을 뽑아들었는데, 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더 상관이었던 마세나가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결투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로바우 섬에서 부교의 수리에 대한 보고와 함께 이 날의 전황 보고를 받고 있던 나폴레옹은 그 다음날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1대3 이상의 우세를 가지고도 프랑스군을 축출하지 못한 오스트리아군은 서툴고 느린 예전 그 모습 그대로임이 틀림없었고, 자신의 공세를 막고 있던 후방의 부교가 마침내 수리가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는 다부의 군단에게 카이저엔저스도르프에 집결하여 도강 준비를 하라고 명령서를 날리고, 란의 제2 군단을 밤새 도나우 강 좌안으로 계속 이동시켰습니다.  그는 란의 제2 군단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취약한 적의 중앙부를 돌파한 뒤 아스페른 쪽으로 선회하여 적의 주력을 섬멸할 계획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달콤한 꿈에 젖어 제2 군단 병사들을 밤새도록 도강시키던 5월 22일 새벽, 병사들이 밟고 건너던 그 부교 및의 도나우 강의 물결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aspern_essling.html

Lieutenant Hornblower by C. S. Forester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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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nk 2017.03.12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열심히 연재 보고 있읍니다. 오늘 제가 1번의 영예를 가졌네요.

    • nasica 2017.03.12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일이 댓글은 못 달아드려도, 댓글 달아주시고 좋아요 눌러주시는 모든 분들께 항상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 프로이센군 2017.03.12 2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잌ㅋㅋㅋㅋ 설마 란이 베시에르를 열받게 해서 돌격시키기 위해 일부러 무례하게 군건가요ㅋㅋㅋㅋ

  3. 석공 2017.03.13 0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오늘은 3등~~~

  4. boribob 2017.03.13 1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순 전술의 차이보다는 중간 장교 및 부사관들의 차이도 제법 있나보네염.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5. 연습장 2017.03.13 15: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민감하고 시급한 내용을 그냥 글로 써보내지 뭐하러 전령을 3번이나 보내냐고 생각했지만 좀더 생각해보니 예전 블로그에 저 시대의 글쓰기(쥐노의 모래뿌리기?)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셨던 글을 봤던 기억이 나네요

  6. Deborah 2017.03.14 16: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정말 멋진 책 리뷰네요. 감사히 잘 읽어 보면서 저도 모르게 책의 매력에 빠져드네요. 처음 방문합니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어요. 이웃으로 추가합니다.

    • 아가아야해써 2018.03.30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 이사람은 이게 무슨 책 리뷰인 줄 아시넨 ㅋㅋㅋㅋㅋㅋㅋ 대책이 없넨...

  7. 오옹 2017.03.14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나 러시아군의 지휘관이었다면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카를대공을 이길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지휘관 차이도 차이지만 하드웨어 성능이 거의 다른 시대의 차이같은...

  8. 궁금 2017.04.11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기 등장하는 라베도예르 대위가, 영화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부관으로 영화 내내 곁에 붙어있는 그 라베도예르인가 보네요.

  9. 찰리 2017.07.08 07: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만 그림들의 링크가 깨졌는지 많이 안보이네요

2017.03.05 18:45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도나우 강 좌안에 발을 내딛은 5월 20일 밤, 오스트리아군의 거센 저항이 있을까 두려워하던 프랑스 지휘관들은 의외로 조용한 주변의 동정에 다소 놀랐고, 일단 안심하면서도 불안했습니다.  기병대를 이끌고 주변을 한바퀴 돌았던 베시에르는 주변에 적은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란은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면서 아마 1개 사단 정도의 병력을 후위대로 남겨 놓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밤중에 아스페른 교회 종탑까지 직접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적의 존재는 감지할 수가 없었던 마세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머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위급 지휘관 3명의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므로, 이들은 21일 새벽 2시 일단 로바우 섬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나폴레옹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들은 모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긴 당장 몇 시간 후면 오스트리아군과 혈투를 벌여야 할 수도 있는데, 그 새벽 늦게까지 잠도 못 잤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 했으니 그럴 법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란은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장 밥티스트 베시에르입니다.  그는 당시 이미 구식 패션으로 치부되던 '흰 가루를 뿌린 긴 장발'을 고집할 정도로 귀족적인 외모를 고집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는 평민 출신에 하사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고, 비록 란처럼 가스코뉴까지는 아니어도 그 근처 남부 프랑스 출신이었습니다.   덕분에 처음에는 란과 꽤 친한 사이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종장이었던 콩스탕(Constant)에 따르면, 이때 작은 난동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앞에서 이 세 원수들이 서로 자기 짐작이 옳을 것이라고 티격태격했는데, 결론이 날 수 없는 이 입씨름에 짜증이 났던 란은 나폴레옹과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마세나와 베시에르를 버려두고 나폴레옹 쪽으로 성큼 다가가려 했습니다.  그때 베시에르가 거의 반사적으로 란과 나폴레옹 사이를 가로 막았습니다.  황제 폐하께 불손하다는 것이었지요.  당시 나폴레옹은 외모와 옷차림도 근사하고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던 아부꾼 베시에르를 가까이 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1807년 러시아 짜르와 만나던 틸지트(Tilsit) 회담 때도 란 대신 베시에르를 데려갈 정도였지요.  란이나 베시에르나 둘다 자신이 나폴레옹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충돌은 시간의 문제였을 뿐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이야기하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다니 !  이걸 참고 넘길 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뜸 베시에르의 멱살을 쥐고 이리저리 흔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꺼져 ! 폐하께서는 너 따위의 호위는 필요 없으시다 !  아주 희한하네 ? 전투 현장에서는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폐하를 뵈려하니까 떡 나타나니 말이야 !"


군인에게 있어 최대의 모욕은 싸움을 회피하는 겁장이라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나폴레옹 면전에서 그런 비난을 당하다니 !  베시에르는 란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감히 나폴레옹 앞에서 란과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재빨리 나폴레옹이 끼어들어 직접 란의 손목을 꽉 잡으며 말렸습니다.  만약 나폴레옹이 "이게 무슨 짓인가, 란 원수"라고 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영리한 그는 "진정하게, 장"이라며 부드럽게 말렸기에 란도 베시에르를 내팽개치고 일단 싸움을 그쳤습니다.  물론 베시에르는 혼자 밤새도록 란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분을 삭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란과 베시에르의 마지막 충돌은 아니었습니다.




(5월 21일 아침의 상황입니다.  당시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좌안으로 이어진 부교는 아스페른과 에슬링 사이에 딱 1개 있었습니다.)




그 소동이 있은 뒤에도 마세나가 밤새도록 병력을 이동시켰지만, 몇 시간 뒤인 21일 새벽에 도나우 강 좌안으로 건너온 프랑스군은 마세나의 제4 군단 뿐이었습니다.  워낙 병력이 적었으므로 일단 나폴레옹은 부교 좌우 쪽으로 1.6km 정도씩 떨어진 아스페른(Aspern)과 에슬링(Essling) 두 마을을 점거하고 더 많은 병력이 넘어올 때까지 버티기로 합니다.  아스페른과 에슬링은 둘다 농가 백여채 정도가 있는 매우 작은 마을이어서, 사실 대단한 방어거점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방어 거점으로 쓸만 한 것은 아스페른에 있던 교회와 그에 딸린 돌담으로 둘러싸인 묘지, 그리고 에슬링에 있던 돌로 지은 큼직한 곡물 창고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을 모루로 삼고 에슬링으로부터 공격의 쐐기를 박아넣을 생각이었으므로, 마세나로 하여금 부대 대부분을 이끌고 아스페른을 지키도록 하고 란은 에슬링에 자리를 잡게 했습니다.  그나마 아직 란의 제2 군단은 아직 도나우강 우안에 있었으므로, 일단 마세나 휘하에 있던 부데(Boudet) 장군의 1개 사단을 란에게 빌려주고, 그 병력만으로 에슬링을 지키게 했습니다.  





(Jean Boudet 장군입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동갑으로서, 혁명 발발 이전에 어린 나이에 소위부터 군생활을 시작했습니다.그는 방데 지방에서의 반란 진압 뿐만 아니라, 황열병으로 인해 모두가 꺼리는 카리브해 식민섬에서의 작전 등 험하고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임무를 잘 수행해낸 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렝고 전투가 있던 1800년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 나폴레옹 바로 밑에서 싸웠는데, 그의 가장 빛나는 전공은 바로 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그도 냉정한 나폴레옹 밑에서는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과의 전설에 남을 대회전을 꿈꾸며 마르쉐펠트(Marchfeld) 평원으로 전군을 이끌고 나왔던 카알 대공을 기다리던 것은 그저 텅 빈 평원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지금쯤은 다 건너와 결전 준비가 되었으리라 생각했던 카알 대공은 당황했습니다.  척후들로부터 '병력의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프랑스군은 아스페른과 에슬링 두 마을을 점거한 채 웅크리고 있다' 라는 보고를 받은 카알 대공은 혀를 찼습니다.  그렇게 마을 건물 등 복잡한 방어물을 끼고 싸우는 것은, 대부분이 신규로 편성된 연대로 구성되어있다 보니 투지와 용기만 있을 뿐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오스트리아군에게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전술적 융통성이 풍부했던 프랑스군이 선호하는 형태의 전투였지요.  카알 대공이 나폴레옹에게 마음껏 도강하시라고 강변을 활짝 열어줬던 것도 오스트리아군이 선호하는, 탁 트인 평원에서 잔재주없이 남자다운 전투를 하고자 함이었는데, 프랑스군의 포진을 보니 괜히 강변만 열어줬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시작한 공격을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좀더 많은 병력이 포진한 것으로 보이는 아스페른 쪽으로 3개 군단을, 에슬링에는 2개 군단을 보내 공격을 시작하기로 합니다.  이제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의 포성이 울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란은 적 2개 군단을 고작 빌려온 1개 사단으로 막아내야 했습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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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oribob 2017.03.05 1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용기가 장군의 큰 덕목이던 시절이네염. 저런걸로 버럭하다니ㅋㅋ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2. 프로이센군 2017.03.05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 제국의 황제가 휘하 장수를 부드러운 말투로 간신히 타일러서 진정시키다니... 언제나 불같이 열정적이고 뜨겁던 란의 성격과 유이하게 나폴레옹을 '너(tu)'라고 부를 수 있었다던 란의 프랑스군 내에서의 입지를 살펴볼수 있는 일화네요.

  3. 뱀장수 2017.03.05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빠인가요^^ 연재글 언제나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4. 검불 2017.03.05 2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를 대공이 기대한 나폴레옹과의 전설에 남을 대회전은 바그람까지 기다려야겠네요.

  5. 마우스핏 2017.03.06 0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 팬입니다. 나도 그간 (뭐..그래도 한 삼십몇년 되어가네요 ^^) 남 못지않게 독서를 요즘 복싱운동하듯 가파르게 해왔지만 타고난 글솜씨가 그만 못해 늘 남의 컨텐츠만 탐독하죠. 그간의 세월동안에 간혹 비판할점이 없진 않았으나 내가 그만 못하니 조심하면서 늘 감탄과 존경만 보냅니다. 학습의 기본자료로도 많이 쓰이니 만큼 더 정확하고 검증가능한 양질의 포스팅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6. 푸른장미 2017.03.06 0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데 장군의 비참한 최후가 궁금하네요

    • 최홍락 2017.03.06 0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지만 다음 전투인 바그람 전투에서 도나우강을 도하하는 프랑스군을 엄호하는 역할 수행에 실패하고 포병대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나폴레옹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고 합니다. 결국 얼마뒤 자살했다고 하네요.

  7. 최홍락 2017.03.06 0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중에 전투 막판에 오스트리아군의 예비대가 큰활약을 할 것을 감안했을때 이제까지 오스트리아군 장성들중에서 그나마 사람답게 싸웠던 리히텐슈타인 대공을 예비대로 돌린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네요.

  8. 석공 2017.03.08 2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17.02.26 14:46

몰리토르(Molitor) 장군의 프랑스군 선발대가 로바우 섬에서 오스트리아군 수비대를 쫓아내고 있던 5월 19일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카알 대공은 나폴레옹이 뉘스도르프 혹은 다른 어디로 도강할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오스트리아군 사령부에서는 5월 18일 저녁부터 이루어진 프랑스군의 도강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카알 대공이 오스트리아군 본대를 도나우 강가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위치시켜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송양지인은 십팔사략에 나오는 고사로서,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양공의 일화입니다.  http://blog.daum.net/wahnjae/17994302 참조)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중국 고사성어에서도 나오듯이, 강을 건너는 적은 그야말로 상대하기 가장 쉬운 상대였습니다.  아예 적이 도강을 못 하도록 강가에서 막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적이 대군 중 약 1/3 정도만 건너온 상태에서 들이치는 것이었습니다.  전투의 기본은 'divide and conquer', 즉 적의 세력을 분산시킨 뒤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는데, 강이라는 천연장벽이 그것을 해주는 절호의 찬스였으니까요.





(명장은 아군의 수가 더 적더라도 어떻게든 혈투를 벌여 이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적의 수가 많더라도, 전투 현장에는 아군 수가 적의 수보다 더 많은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바로 명장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곧 강을 넘어온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던 이 때에, 왜 카알 대공은 강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저 후방으로 군대를 물려놓은 상태였을까요 ?  그건 카알 대공의 작전 계획이 당장의 전투 결과가 아니라 좀더 큰 전쟁 결과에 치중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카알 대공도 바보가 아닌지라, 나폴레옹이 어중간하게 강을 건넌 상태에서 공격하는 것이 가장 승률이 높은 작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고 해서,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에게 항복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거기에 대해 yes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애초에 카알 대공은 1809년 상황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모두 나가 떨어진 상황인지라, 혼자서 싸워야 하는 오스트리아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나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이 헛발질을 하고 있고, 또 애써 편성해놓은 30만 대군을 오스트리아 정부의 재정난으로 인해 곧 해체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상황이면 애초에 전쟁을 안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제국의 지도자들이라고 항상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라,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지요.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카알 대공은 당장 나폴레옹에게 한방 먹이고 군기 몇 자루 빼앗는 것이 카알 대공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증원 병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군대가 더 오래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정말 양쪽 다 여한이 없을 정도로 거하게 한판 제대로 붙어 나폴레옹을 꺾은 뒤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살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자면 나폴레옹의 병력이 도나우 강 좌안으로 다 건너온 뒤에 싸워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만 아니면 내가 이겼다'라는 식의 변명거리를 줘서는 안 되었지요.  그랬다가는 나폴레옹이 다시 본국에서 증원군을 받아다 또 도전을 해 올 것이 뻔했으니까요.  그렇게 싸운다고 해도, 어차피 강을 등 뒤에 끼고 있는 것은 나폴레옹이었으므로 결국 지형은 카알 대공에게 절대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쾌승을 거둔다면, 도나우 강을 등 뒤에 둔 프랑스군을 전멸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강가에서 멀리 떨어져 로바우 섬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모르고 있던 카알 대공도, 5월 19일 낮이 되자 더 이상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른 오후 비잠베르크(Bisamberg)에 자리잡은 관찰병들이 신호기(semaphore)를 통해 로바우 섬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프랑스군이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왔고, 스파이들이 속속 달려와 나폴레옹의 도하 소식을 전해왔기 떄문입니다.  또한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집결하는 프랑스군 보병과 기병들이 일으키는 먼지는 강 건너에서도 뚜렷이 보였습니다.  곧 힐러(Hiller) 장군이 달려와 적이 도하를 완료하기 전에 속히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카알 대공은 침착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는 애초에 마음 먹은 대로, 나폴레옹이 전군을 다 건너게 만든 뒤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운명을 걸고 한판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이 결전을 위해 그의 야전군 10만을 5개 대오로 편성하고 별도의 예비대도 준비했습니다.  


제6군단 : 힐러(Johann von Hiller)

제1군단 : 벨가르드(Heinrich Graf von Bellegarde)

제2군단 : 호헨촐레른(Friedrich Franz Xaver Prince of Hohenzollern-Hechingen)

제4군단 : 로젠베르크(Prince Franz Seraph of Rosenberg-Orsini)

제4군단 일부 : 호헨로헤(Friedrich Karl Wilhelm, Prince of Hohenlohe)

예비군단 : 리히텐슈타인(Johann I Joseph, Prince of Liechtenstein)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워낙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이다보니, 그 귀족들의 이름도 독일식, 프랑스식, 헝가리식, 크로아티아식, 체코식 등 정말 다양합니다.  저 초상화 속의 인물은 벨가르드 백작이신데, 이 분은 사보이 Savoy 귀족 가문 출신이신지라 가문 이름이 프랑스식입니다.  그러나 이 분 개인은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100% 독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은 기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신출귀몰한 지휘에 노리개감이 되는 역할을 주로 맡으셨지요.)



그가 도나우 강 좌안인 마르쉐펠트(Marchfeld)의 평원으로 병력을 출동시킨 것은 5월 21일 오전이 되어서였습니다.  그렇게 2일 간이나 시간을 줬으면 충분히 전군이 다 건너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척후병들이 프랑스군이 아직 평원에 전개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자, 그는 몹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비장의 각오로 잔뜩 차려 입고 운명의 결투를 하러 나왔는데, 정작 무대에 상대방이 안 나온 셈이었으니까요.  그는 도나우 강 우안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놓인 부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프랑스군의 도하가 9시간 동안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카알 대공의 기대처럼 운명의 한판 결전을 위해 평원으로 우우 몰려나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아스페른(Aspern)과 에슬링(Essling)이라는 두 작은 마을을 점거하고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에 따라 야전에서의 대규모 충돌이 아니라, 이 두 마을 탈환을 위해 병력 전개를 새로 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싸우기는 싸워야 했으니까요.  






(현대의 마르쉐펠트 평원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강건너 빈에게 농작물을 공급하는 농지였고, 구릉지대까지는 아니지만 완전히 평탄한 지역은 아니며 또 이런저런 작은 시냇물이 가로지르는 지형입니다.)




한편, 21일 아침 강을 건너 전장을 둘러본 나폴레옹은 또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저런 시냇물과 그 강둑에 자란 작은 숲들로 인해 완전히 평탄하지는 않았던 마르쉐펠트 평원을 둘러 본 뒤, 옆에 선 마세나에게 '좌측을 움켜쥐고, 우측에서부터 돌돌 말아올린다'라는 작전 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즉 그는 좌측의 아스페른을 모루 삼아 굳게 지키며 오스트리아군을 유인한 뒤, 오른쪽 에슬링으로부터 망치같은 강력한 공세로 적진을 돌파한 뒤 오스트리아군을 중앙으로 몰아붙일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강을 등지게 되는 것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정말 대담한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선결 과제가 있었습니다.  아직 절반 이상의 병력이 도나우강 우안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부교가 계속 버티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도나우 강의 물살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망치와 모루 전법은 기병 전술을 중시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즐겨쓰던 전법입니다.)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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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형석 2017.02.26 1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글을 읽을 때마다 정말 제 사고를 트게 해주시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보물같은 연재를 읽을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번 게시글에서 출판 이야기가 있으시던 것 같더군요. 만약 출판하시게 되면 3권은 사서 주변인들에게 돌리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2. Nocchi 2017.02.26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기도 재미있고 필력도 장난 아니십니다 잘 보고 갑니다

  3. 유동훈 2017.02.26 2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Cut 하는 타이밍이 점점 예술입니다. 나폴레옹이 저런 대담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비결은 역사와 지리라는 인문학적 배경 때문이었겠죠?

  4. 최홍락 2017.02.26 2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카알 대공이 처한 상황과 전략적 딜레마는 탄금대 전투를 앞둔 신립의 상황과 유사해보입니다. 양쪽 모두 나라가 동원할 수 있었던 최정예 병력을 지휘했다는 점, 그리고 그 병력을 장기간 유지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 그래서 단순히 적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 아예 부숴버려야 했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아군에 유리한 지형과 타이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이러한 딜레마를 신립은 실패했지만 카알 대공은 극복했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확실히 이전에 비해 준비가 잘된 것 같네요.

    • boribob 2017.02.27 0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초딩때는 신립장군이 허세부리다가 실패한줄 알았지만 알고나니 아니더라구요. 그당시 확실한 조선의 에이스였고, 조총같은 투사 무기 상대로 기병의 압도적인 모습도 많이 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탄금대의 조선병력이 최정예였나요? 동원되었던 병력의 질이 그리 좋지는 않은것 같았는데요

    • 최홍락 2017.02.27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립은 조정의 허락을 받아 저자에서 강제징병을 하고 원래는 체찰사 류성룡이 끌고 가기로 되어있던 군대까지 넘겨받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 서울에서 10000명이 훨씬 넘는 병력을 이끌고 남하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도성의 무사, 즉 왕실의 친위대인 갑사까지 이 부대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권율이나 김시민 장군 등이 이끌었던 관군들에 비해 양이나 질적 수준에서는 상대적으로 앞서면 앞섰지 떨어진다고 볼 수 없었지요.

      일본군의 조총 운용능력은 신립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고 창, 총, 검을 조합으로한 기병 대응 능력 자체가 매우 뛰어났으며 별동대를 이용해 배후의 충주성을 공략하고 본대로 돌격하는 기병대를 측면에 포진된 소 요시토시 등 다른 부대와 함께 포위 섬멸하는 등 포위 전술의 교과서같은 전술에 깔끔하게 패배한 것이 탄금대 전투이고요. 단순 조총만을는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후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군의 실패로 나타났지요.

    • 야채 2017.02.27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세요. 신립의 상황은 오히려 반대가 아니었을까요. 조선은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대비를 안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선의 제승방략체제는 각 지방의 병력이 정해진 장소로 집결한 후 중앙에서 내려보낸 경장의 지휘를 받아야 하고, 그 지휘권의 인수라는 게 한 순간에 뚝딱 되는 것도 아닌데다가, 지방 병력이 훈련도가 높지도 않고, 그 경장이 해당 지역의 지형을 숙지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는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후 전투태세를 갖추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체제입니다. 실제로 경상도쪽 병력들은 집결지로 꾸역꾸역 모였다가 경장이 도착하기 전에 지휘관이 없는 상태로 격파당하거나 흩어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뒤가 없는' 카를 대공과는 반대로 신립은 조선의 전투태세가 완비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전라도 쪽의 근왕병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앙 정부가 좀 더 질서 있게 북으로 후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최근에 나온 반론이 조령을 막고 있어도 다른 왜군 부대가 우회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이 주장은 상당히 억지스럽습니다. 기본적으로 신립이 고니시 이외의 부대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신립은 조령을 포기할 것을 명령하면서도 다른 왜군 부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말이 달리기 어려운 습지에서 궁기병을 데리고 배수진을 쳐야 한다는 헛소리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을 텐데, 그러한 언급은 병사들 앞에서나 이일같은 다른 장수들 앞에서나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다른 왜군부대의 존재를 인지했다면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하는데, 신립은 오히려 왜군이 왔다고 보고한 군관을 대뜸 목을 날리기나 했지 왜군의 동태 파악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습니다. 또한 왜군 다른 부대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길을 틀어막는 정도로 충분히 방어하며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가토의 부대는 고니시 부대가 신립군을 전멸시키고 있는 와중에 그 옆을 유유히 지나갔습니다.

      게다가 조총의 위력에 대해서는 류성룡도 지적한 바 있지만 신립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면전에서 무시했습니다. 당시 신립 주변에는 이일처럼 왜군과 교전한 경험이 있는 장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말도 무시했습니다. 신립은 한두명이 쏘면 그저그런 무기인 조총을 부대 단위로 쏘는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상상력도 없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경험한 사람들의 말을 들을 귀도 없었던 겁니다. 이일은 북도 제승방략을 체계화하는 등 군사이론가로서 상당한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결코 신립이 그렇게 쉽게 무시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조선의 기병은 거의 궁기병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을 데리고 배수진을, 그것도 말이 달리기 어려운 습지에 '평지'랍시고 배수진을 친 후에 돌격해서 보병을 물리칠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발상입니다. 만약 한 번의 싸움으로 반드시 왜군을 격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더더욱 이런 사지를 선택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신립이 명장이었다고 하지만 신립의 전공을 보더라도 소규모의 부대를 인솔한 상태에서의 일신상의 무용과 용맹함에 의존한 전공들이지, 대규모 병력의 지휘관으로서 전술이나 전략적 능력을 보여주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신립이 탄금대 전투 이전에 본인이 직접 한 말 이외의 다른 전략적-전술적 이유를 고려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할 이유 자체가 없어 보입니다.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이 돌격해서 왜군을 몇 차례나 물리쳤다는 식의 서술이 가끔 보이지만, 순수한 창작에 불과합니다. 신립의 조선군은 고니시군을 향해서 몇 번이나 돌격을 시도하다 일제사격에 번번이 격퇴당한 후 결국 전군이 무너졌고, 고니시군은 신립군을 전멸시킨 후 별다른 병력 손실 없이 계속 북상할 수 있었습니다.

    • boribob 2017.02.28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채님이 말씀하신대로 현재 우리관점에서 보면 조령을 꽉잡고 시간을 버는게 유리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침입은 원나라 이후로 처음이었고, 믿었던 성곽들도 무너졌으니 멘탈은 탈탈 털리고 믿을것은 에이스 장군의 회전일 것 같습니다. 그 장군이 용장이 아니라 지장이었다면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가정은 무의미 하죠. 신립의 경험자와 주변의 조언들을 무시하는 경향은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쉽게 볼수 있는ㅋㅋㅋ주제와 상관없는 댓글이 이어져 나시카님께 송구하옵니다.

    • 최홍락 2017.03.01 1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말씀하신대로 최고 지휘관의 자질 부족이 원인이었던 것도 있습니다. 제가 언급한 부분은 사학계에서 신립이 문경세재를 버린 이유중에 그나마 가장 설명이 가능한 입장이지 확실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당시 조선 입장에서는 당시 1군을 단순히 막기에는 장기전 준비가 안되어서 확실히 1군이라도 격파를 해야 답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카를 대공의 입장과 비슷했다고 보여지네요.

  5. boribob 2017.02.27 0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력 포착과 격멸이라는 전략자체는 상당히 좋지만, 지휘관의 능력 차이가 가슴아프네요. 어찌보면 나중의 러시아는 현실주의자들ㅋㅋ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6. starlight 2017.02.27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망치와 모루 전법은 역대 명장이라면 대규모 회전에서 필히 구사할 수 있었야 했던 비장의 전법이었죠. 카알대공이 패장이라는 사후 인식이 있긴해도 나폴레옹의 대규모 정규 병력을 맞아 아스페른과 에슬링 바그람까지 전투를 전개한 것은 상당히 분전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연재가 너무 기다려지네요.

  7. 프로이센군 2017.02.28 0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알 대공의 비장함이 물씬 느껴집니다.
    비록 후대에 패장이라는 이름을 남기긴 했어도, 당대의 먼치킨 나폴레옹과 대등한 전략 대결을 펼치는 모습은 매우 간지나죠.

  8. 석공 2017.02.28 2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저는 비수대전이 생각나네요...

  9. 석공 2017.02.28 2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저는 비수대전이 생각나네요...

2017.02.19 18:43

포병 전문가인 베르트랑 장군의 계산에 따르면 대포가 건널만 한 부교를 짓기 위해서는 20피트, 즉 약 18미터마다 한 척의 보트가 필요했습니다.  그러자면 최소 80척의 보트가 필요했는데, 비엔나 일대를 나흘 동안 미친 듯 뒤지니 90척의 보트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부교 건설에 사용될 만한 상태인 것은 70척 뿐이었고 그나마 부교를 위해 보트를 고정시키는데 꼭 필요했던 닻은 정말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속이 탔습니다.  그는 작업 현장에 계속 참모를 파견하여 널빤지가 어쩌고 로프가 어쩌고 하는 지극히 잡다한 보고를 일일이 직접 챙기며 부교 건설을 위한 자재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고, 마침내 충분한 수의 보트를 확보하여 5월 19일부터는 부교 건설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닻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도나우 강을 건너는데 쓰이거나 낚시질 등에 쓰이는 보트들이다 보니, 바다와는 달리 평소에 닻이 필요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임시 방편으로 어부들이 쓰는 통발에 포도탄을 재워 넣은 무게추를 닻 대신 쓰기로 했습니다.





(이 그림은 오스트리아 부교병들이 사용하던 평저선, 즉 bateau입니다.  프랑스군이 로바우 섬에서 도나우 강 좌안으로 건너기 위한 마지막 부교는 바로 이 오스트리아군의 평저선을 사용하여 건설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5월 18일 쇤브룬 궁을 떠나 직접 카이저에버스도르프(Kaiserebersdorf)의 강변으로 갔습니다. 늦은 오후에 현장에 도착한 그는 6척의 대형 보트에 수백 명의 병사와 2문의 대포를 실어 도나우 강 속에 있는 첫번째 섬인 롭그룬트(Lobgrund) 섬에 보낼 때, 병사들에게 탄약이 분배되는 것을 직접 관리 감독하면서 거의 모든 병사 하나하나에게 일일이 격려의 말을 전할 정도로 작전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저녁 6시 경에 섬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섬에서 경계 근무 중이던 소수의 오스트리아군을 간단히 제압하고 부교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작업은 순조로운 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건너야 했던 징검다리 섬들은 정확하게는 2개가 아니라 3개였고, 30m짜리 짧은 다리까지 합하면 총 4개의 다리를 놓아야 했습니다.  롭그룬트 섬과 로바우 섬은 불과 30m 폭의 강줄기로 갈라져 있었으므로, 그 사이의 다리는 매우 짧았습니다.  


도나우 강의 우안 

- 450m - 

슈나이더그룬트(Schneidergrund) 

- 225m - 

롭그룬트(Lobgrund) 섬 

- 30m - 

로바우(Lobau)섬 

- 80m - 

도나우 강 좌안  






(지도 아래 부분의 복잡한 섬 그림 중 가장 큰 것이 로바우 섬입니다.  5월 21일의 상황입니다.)



로바우 섬이 상당히 큰 섬이었으므로 좌안에서 우안까지는 총 2.5km 정도에 가까왔습니다.  프랑스군은 몰리토르(Molitor)의 사단을 앞세워 로바우 섬을 지키던 소규모 오스트리아군을 내쫓은 뒤, 로바우 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지키는 좌안까지의 마지막 4번째를 제외한 3개의 다리를 5월 19일 밤 사이에 다 놓고, 5월 20일 새벽에 마세나의 군단을 선두로 병력을 강 좌안으로 쏟아 부을 계획이었습니다.  로바우 섬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적의 대포알이 휩쓸 수 있는 평탄한 섬에 대군을 밀집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베시에르의 기병사단들과 란의 군단은 강의 우안 저 너머에서 대기하다가 5월 20일 아침까지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그에 덧붙여, 상크트-푈텐(Sankt-Poelten)에 있던 다부의 군단도 비엔나를 거쳐 카이저에버스도르프로 달려오도록 명령서를 보냈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4개의 다리는 프랑스 부교 건설대에 의해 밤을 새워가며 동시에 놓아지고 있었습니다.  슈나이더그룬트에서 롭그룬트까지의 두번째 다리는 예정대로 5월 20일 아침까지 작업이 완료되었지만, 정작 도나우 좌안에서 슈나이더그룬트까지의 첫번째 다리는 정오가 되어서야 완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공병들이 죽을 힘을 다해 놓은 다리들은 여전히 내재된 위험을 가득 안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닻 대신, 포도탄으로 대충 만든 무게추를 대신 써서 고정시킨 것이다보니, 무척이나 불안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첫번쨰 다리가 완성된 5월 20일 이른 오후에 휘하 원수들과 함께 일련의 부교를 건너 로바우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오후 3시쯤 그는 몰리토르가 좌안으로 건너갈 최후의 다리를 놓을 위치를 확인한 뒤, 즉각 부교 건설을 지시했습니다.  다리는 저녁 6시까지는 완료될 예정이었습니다.  


그 사이 프랑스군 병력들은 강의 우안, 즉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속속 모여 차례로 부교를 건너 롭그룬트, 이어서 로바우 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부교를 건너는 병사들은 불과 하루 사이에 강물이 눈에 띄게 불어난 것과, 부교가 상당히 부실해 보인다는 점을 걱정했습니다.  기병들은 말을 타고 건너지 않고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조심스레 부교를 건너야 했습니다.  


병사들의 이런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좌안으로의 최종 부교가 완성되기도 전인 오후 5시 30분 경, 불어난 강물에 떠내려온 무엇인가에 우안에서 롭스그룬트로 이어진 부교 일부가 끊어진 것입니다.  어떤 기록에는 통나무 등의 부유물이라고도 하고, 어떤 기록에는 보트라고도 하고, 또 오스트리아군이 고의로 떠내려보낸 보트라고도 합니다만, 어찌 되었건 이 사고에서 몇 척의 보트가 하류로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부교병(pontonnier)들이 서둘러 수리를 했으나, 임시방편이었던 이 수리조차도 완료되는데 다음날인 5월 21일 새벽 3시까지 걸렸습니다.  보트 등의 자재가 부족하여 이런저런 재료를 임시방편으로 조합해야 했었고, 물살이 점점 거세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물살이 거세졌던 것은 1809년 봄, 유난히 따뜻했던 날씨 때문이었습니다.  도나우 강의 수원지라고 할 수 있는 저 서쪽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검은숲)에 쌓인 눈이 평소보다 빨리 녹았던 것이지요.  도나우 강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평년처럼 6월에나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한 나폴레옹에게는 아직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와 닿지 않았겠습니다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후방에서 이런 난리가 벌어진 것과는 무관하게, 저녁 6시 경 좌안으로의 다리가 완료되어 라살(Lasalle)의 지휘 하에 경기병대가 드디어 좌안의 평원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소규모 정찰대였던 이들은 곧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가로 막혔고, 별 다른 정보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는 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혹시라도 좌안 교두보 바로 코 앞에 오스트리아군이 대규모 포병대를 방열하고 캐니스터탄을 쏘아대며 도하를 막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일단 그런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로바우섬을 통해 도하한다는 것을 오스트리아군이 몰랐거나, 알았다고 해도 당장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우안의 부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5월 20일 저녁부터 5월 21일 새벽까지 근 9시간 동안이나 프랑스군의 도하가 중단된 상태라서, 이때 오스트리아군이 습격한다면 좌안으로 건너간 소수의 프랑스군은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비잠베르크 Bisamberg 산입니다.  이 비잠베르크는 약 350m 정도의 높이로서, 서울 인왕산 정도입니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고지이므로, 카알 대공은 이 곳에 오스트리아군을 주둔시키고 관측병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도하 지점의 좌측에 있던 작은 마을인 아스페른(Aspern)으로 마세나의 부대를 보내 점령하게 했습니다.  마세나는 밤 12시 경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었던 아스페른 교회탑에 올라가 정찰을 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의 캠프 불빛은 저 멀리 비잠베르크(Bisamberg) 산 쪽에서만 보였고, 그 아래부터 펼쳐진 마르쉐펠트의 넓은 평원 어디에도 군대의 숙영 불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는 '평원에 오스트리아군은 없다'라고 나폴레옹에게 보고했고, 나폴레옹은 쾌재를 올렸습니다.


프랑스군이 방해도 받지 않고 도나우 좌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대체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AustrianWar/bridges/c_danube.html

https://de.wikipedia.org/wiki/Bisamberg_(Berg)

https://en.wikipedia.org/wiki/Antoine_Charles_Louis_de_Lasall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spern-Ess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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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sy9370 2017.02.19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빠의 영광이?

  2. ksy9370 2017.02.19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처음으로 차지한 영광에 목이 메일만큼 감격스럽습니다.

  3. 프로이센군 2017.02.19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불후의 명장 테셴의 카를 공의 군대는 어디에??

  4. mip 2017.02.20 0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분위기가 고조되다가 딱 컷이네요 ㅠㅠ 다음편 기대됩니다!!

  5. starlight 2017.02.20 1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너무너무 흥미진진합니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주도면밀하네요^^

  6. EC 2017.02.20 17: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파트릭 랑보의 "전투"의 배경이지요

  7. 석공 2017.02.20 2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8. 민물장어의꿈 2017.02.25 06: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잘보고 있습니다.
    20피트면 6미터 정도고, 20야드가 18미터 같은데요

2017.02.05 22:56

(ㄹ혜와 가족 여행 때문에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제5차 대불동맹전쟁 다시 시작됩니다.  짧더라도 매주 연재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지난 편에서는 1809년 5월 13일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을 다시 정복하는 모습과, 5월 17일 카알 대공이 린츠(Linz)에서 반격을 꾀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운명의 아스페른-에슬링(Aspern-Essling) 전장을 향해 달려갑니다.


1809년 5월, 모든 상황은 나폴레옹의 최종 승리를 낙관하게 했습니다.  적국의 수도도 점령했고, 군의 보급과 사기도 매우 양호했으며, 병력도 프랑스군이 더 우세했습니다.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를 앞둔 상황도 지금처럼 유리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엔 물러난 오스트리아군이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저항을 준비했으나, 지금의 오스트리아군은 아무도 도와줄 동맹이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였습니다.  또 1805년 당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프로이센의 존재가 나폴레옹의 뒤를 위협하고 있었지만 지금 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제국들은 나폴레옹에게 협력하고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1809년 5월 12일 뮈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내 군대가 이토록 잘 정비되고 숫자가 많았던 적이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나폴레옹 휘하 독일 방면군의 준비 태세는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알 대공을 주축으로 한 오스트리아군의 반격 준비는 1805년 당시에 비해 훨씬 견고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동안 절치부심하며 준비를 해놓은 군단들이 아직 대부분 건재했습니다.  그리고 타보르(Tabor) 다리가 끊긴 것이 오스트리아군의 숨통을 틔워 주었습니다.  1805년 당시에는 11월 13일 비엔나 점령 직후 도나우 강을 건널 유일한 다리인 타보르(Tabor) 다리를 란과 뮈라가 기만작전으로 무사히 손에 넣었기 떄문에, 프랑스군은 사람과 말, 대포와 물자를 매우 손쉽게 도나우 강 좌안, 즉 동쪽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반복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던 오스트리아군이 이번에는 다리를 파괴했기 때문에, 카알 대공과 나폴레옹 사이에는 볼가 강을 빼면 유럽 최대의 강인 도나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브렉(Breg) 강의 수원지이라고 합니다.  저는 큰 강의 시작점은 어떤 모양인지 항상 궁금했는데, 이렇게 잘 정의되고 보존되는 곳도 있긴 있네요.)






(사진 속 오른쪽 뒤에 보이는 브리가흐(Brigach) 강이 왼쪽의 브렉(Breg) 강과 합류하여 사진 아래 오른쪽의 도나우 강이 되는 지점입니다.  독일의 양수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도나우 강은 남부 독일 지방인 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에서 시작하여 바이에른(Bayern)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을 거쳐 흑해로 흘러가는 큰 강입니다.  도나우 강의 수원지는 '검은 숲'(Schwarzwald) 지대인데, 이 곳은 독일 지역 특유의 춥고 습기찬 겨울 덕분에 겨우내 많은 눈이 쌓이는 지역입니다.  봄이 되면 이 눈들이 조금씩 녹아 흘러 내리므로 도나우 강의 수위는 여름으로 갈 수록 점점 높아지는데, 이 때문에 당시 빈 지역은 많은 경우, 6월이 되면 도나우 강이 범람하여 크고 작은 피해를 내곤 했습니다.  





(눈에 덮힌 검은 숲 슈바르츠발트입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와야 그렇게 쌓인 눈이 봄 내내 조금씩 녹아내리면서 저 아래 평원을 비옥하게 적셔 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여름에 비가 몰아서 오고 겨울이 건조한 편인 경우, 여름에 홍수가 날 뿐 봄 가뭄에 시달리기가 쉽지요.)




지리와 역사에 대한 독서량도 많았고, 또 정보 수집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6월이 되기 전에 강을 건너지 못하면 이 전쟁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길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보르 다리가 파괴된 것이 더더욱 아쉬웠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은 과거 이탈리아 전선에서 적의 저항을 앞에 두고도 포(Po) 강이나 아디제(Adige) 강을 보트를 이용해 잘도 건넜고, 또 그럴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도나우 강은 너비 80m 정도의 아디제 강과는 차원이 다른 큰 강이었고, 또 움직여야 하는 병력도 당시의 수천 명 단위가 아닌, 수만 명이었으니까요.  나폴레옹은 결코 '안 되면 되게 하라'식의 무책임한 정신력 신봉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번 작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다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병대 사령관인 베르트랑(Henri Gatien Bertrand)에게 빈 근처에서 도하에 가장 적절한 곳을 찾아 다리를 놓을 것을 지시했습니다.





(베르트랑 장군입니다.  유복한 부르주와 가정 출신의 그는 일찍부터 군문에 들어가기 위해 예비 사관학교를 다니던 중 프랑스 혁명을 맞았습니다.  그는 자원병으로 군에 입대했고, 이집트 원정에 종군하면서 나폴레옹의 눈에 들어 대령으로, 이어서 준장으로 고속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엔지니어는 아니었던 그는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결과적으로 훌륭한 성과를 내지는 못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끝까지 나폴레옹을 따라 세인트 헬레나 섬까지 갔었고, 나중에 그곳에서 나폴레옹의 유해를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온 것도 그였습니다.)



베르트랑이 찾아낸 곳은 비엔나에서 하류 쪽으로 약 8km 떨어진 지점인 에베르스도르프(Ebersdorf)라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넓은 도나우 강은 두 개의 섬에 의해 3개의 물길로 갈라졌습니다.  강의 우안, 즉 에베르스도르프에서 첫번째 섬 사이를 흐르는 첫번째 강 폭은 약 450m 폭이었습니다.  두 섬 사이의 강폭은 약 225m, 그리고 두번째 섬과 강의 좌안 사이의 강 폭은 약 135m였습니다.  꽤 큰 섬이었는데, 이렇게 징검다리 삼아 건널 섬이 두 개나 있다고 해도, 여전히 도나우 강은 너무 넓고 너무 깊었습니다.  이런 곳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더군다나 적의 저항 하에 그렇게 한다는 것은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도나우 강의 빈 주변 평원은 전형적인 범람원이라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계속 지형이 변해왔습니다.  그림 소스 및 도나우 강 정리의 역사에 대해서는 https://seeingthewoods.org/2013/06/05/danube-floods-present-and-past-exploring-historic-precedents-through-the-arcadia-project/  참조...)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교(pontoon)이라는 대안이 있기 때문이었지요.  전쟁에서 부교가 사용된 것은 꽤 오래된 일입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때 크세륵세스도 헬레스폰트 해협에 2km가 넘는 부교를 놓고 소위 백만대군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시켰고, 나폴레옹이 건너야 하는 도나우 강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로마군이 부교를 놓고 건넌 바 있었습니다.  거의 2천년 전의 사람들이 해낸 것을 19세기 초의 문명인들이 못 해낼 리가 없다고 나폴레옹은 믿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둥에 새겨진 부조입니다.  도나우 강에 부교를 놓고 건너는 로마 군단병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포병 출신답게, 공병 부대에도 많은 신경을 쓴 편이었습니다.  특히 전투 공병대(sapeurs) 뿐만 아니라, 전문적으로 부교를 만드는 부대를 폰토니에르(pontonniers)라는 이름으로 별도 편성해놓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군대에는 공병대하면 요새 공략에 쓰이는 전투 공병대를 생각했지만,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에서는 오히려 전투 공병대의 활약보다는 이 부교 건설대의 활약이 훨씬 더 컸습니다.  나폴레옹의 작전 스타일이 농성하는 요새에 대한 포위전보다는 기동전을 선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강이 많았던 유럽의 지형상, 그런 기동전을 위해서는 부교 건설대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지요.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에는 부교 건설대가 무려 14개 중대나 있었고, 그들은 상당히 숙련된 기술 수준과 다양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부교 건설대 1개 중대는 약 80척의 보트를 이용해 약 120~150m의 부교를 7시간 이내에 놓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뜻 밖의 횡재도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을 제외하면, 당시 유럽 군대에서 그래도 가장 부교 건설대가 잘 구비된 부대는 바로 오스트리아군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발칸 반도 등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자주 싸워야 했기 때문에 역시 부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레겐스부르크 전투에서 도나우 강을 건너 후퇴할 때도 오스트리아군은 원래의 다리 옆에 부교를 추가로 놓고 강을 건넜지요.  그런 오스트리아군을 바로 직전인 4월 21일 란츠후트(Landshut)에서 격파하면서, 나폴레옹은 30문의 대포와 9천의 포로, 수천 대의 수송 마차와 함께 3개 중대 분량의 '매우 뛰어난' 부교 세트를 노획한 바 있었던 것입니다.  또, 에베르스베르크 앞에 놓인 두 섬, 특히 꽤 큰 편이었던 두번째  로바우(Lobau) 섬에는 숲이 무성하여, 이곳에서 부교 건설 준비 작업을 할 때 오스트리아군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스트리아 공병부대의 유니폼입니다.  확실히 전투부대에 비해서는 무척 소박한 것이... 영광의 선두에 서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이공계의 운명이지요.)



나폴레옹은 부교에 의한 도하 작전의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5월 19일 밤, 에베르스베르크에서 부교의 건설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물론, 카알 대공도 처음에는 별로 인식하지 못했던 요소 하나가 뜻하지 않게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됩니다.  바로 1809년 봄 날씨가 평년보다 더 따뜻했다는 점입니다.  저 동쪽 하류에서 하찮은 인간들이 부질없는 싸움질을 하기 위해 부산을 떠는 동안, 도도한 도나우 강의 상류에서는 평소보다 더 많은 눈 녹은 물이 강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고, 일부 강변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그 거센 물결에 실려 떠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계속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https://seeingthewoods.org/2013/06/05/danube-floods-present-and-past-exploring-historic-precedents-through-the-arcadia-project/

https://en.wikipedia.org/wiki/Danube

https://en.wikipedia.org/wiki/Breg_(river)

https://en.wikipedia.org/wiki/Grande_Arm%C3%A9e#Engineers

https://books.google.co.kr/books?id=3yrDCwAAQBAJ&pg=PT51&lpg=PT51&dq=napoleon+pontooneers&source=bl&ots=W6Rua_ProE&sig=KzjNFQaOaSy3h2OW7zBKEA_kp_Y&hl=en&sa=X&ved=0ahUKEwjElLKI9vjRAhUCjJQKHRO-CC0Q6AEILzAF#v=onepage&q&f=false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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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잡지식98 2017.02.05 2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작스런 비로 다잡은 사마의를 놓친 재갈량의 일화와 비슷한 일이 다음 글에 있으려나 봅네요.
    아우스테리츠에서는 안개로 도와주었던 날씨가 이번에는 이렇게 홰방을 놓다니 묘하네요.

  2. 재영 2017.02.06 0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오신것 같아서 기쁘기 한량이 없습니다. 항상 이길수 밖에 없는 전투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던 나폴레옹도 천기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나 봅니다...

  3. 프로이센군 2017.02.06 0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나폴레옹 전쟁이 연재되기 시작하는군요!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네요. 그런데 오스트리아 제국이 빈까지 잃고 도나우강 너머로 후퇴한 상황이었다면,황제가 머무르던 임시수도가 어디였나요?

    • nasica 2017.02.08 1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황제가 있는 곳이 곧 집무실... 아니 임시수도입니다...는 농담이고, 당시 임시수도라는 개념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4. 최홍락 2017.02.08 0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나우강 빈 주변 평원의 지도를 보니 서울 잠실 주변의 예전 모습은 저리 가라할 정도로 변화가 심하네요. 그나마 1869년부터 1875년까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주도한 방수로 건설 및 하천 직경화 사업을 통해 1870년대 이후로는 강이 정비된 모습을 보이는 듯 합니다. 이젠 마인강-라인강-도나우강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로테르담에서 흑해까지 배로 갈 수 있다고 하네요.

  5. 애독자 2017.02.12 1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직전 까지 다음 블로그에서 연재하시던 '장 란'에 대한 주제는 끝난 건가요? 물론 이 전투에서 장란이 죽는건 알고 있지만, 장란에 대한 주제에서 갑자기 전투로 넘어가게 되서 아쉬워서요! 항상 좋은 글 잘읽고 있습니다!

    • nasica 2017.02.12 2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일단 대략 끝냈습니다. 나머지는 아스페른-에슬링에서 다루려고요. 장 특집 자체가 아스페른-에슬링 때문에 시작했던 것이거든요.

  6. 지나가는 2017.02.14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병을 신경썼다니 역시 나폴레옹! 그런 느낌이 드네요.

  7. 석공 2017.02.14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공계의 숙명이 눈에 띄네요..^^* 요즘은 문송하다는 말이 유행한다니~~ 격세지감입니다. ^^*

  8. starlight 2017.02.20 1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나폴레옹 연재가 꿀잼입니다.

2017.01.30 17:45

전에도 몇 번 인용했던, 하인리히 E. 야콥이라는 분이 지은 '빵의 역사'라는 책에는 프랑스 대혁명 직후, 빵을 달라며 난동을 부린 억센 아주머니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혁명 정부의 무능함과 상인들의 탐욕, 그리고 혁명과 전쟁의 혼란이 겹쳐 파리에서는 정말 빵은 커녕 밀가루를 구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라서, 분노한 아주머니들이 주동이 된 군중이 빵집 주인은 물론 국민공회의 의원까지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끔찍한 비극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수년간 계속 되는데, 대체 파리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요 ?




'빵이 없으면 케익(정확하게는 브리오슈)을 먹으면 될 것이 아닌가?' 라는 말처럼, 정말 케익을 먹었을까요 ?  물론 아닙니다.  이 '빵의 역사'란 책에도, 파리 시민들은 오로지 밀가루로 만든 진짜 빵만을 원했을 뿐, 감자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즉, 감자 같은 구황 작물은 먹을 수 있었으나, 그런 것으로는 불만이 달래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1805년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가던 나폴레옹의 군단들은 프랑스-독일 간의 자연 경계인 라인강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독일 현지에서 징발한 식량으로 먹고 살아야 했는데, 전쟁 초기다 보니 징발이 그런대로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배급되는 1인당 식량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빵 1.5 파운드

고기 0.5 파운드

쌀 1 온스

요리를 위한 장작은 현지 주민들이 공급


감자는 무지렁이 아일랜드인들 또는 돼지 사료로나 쓰는 뿌리 채소일 뿐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고 여기던 영국군은 물론이고, 감자 전도사 파르망티에(Antoine-Augustin Parmentier)의 모국인 프랑스에서조차도 감자는 정규 식단에 오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감자 전도사 파르망티에입니다.  그는 7년 전쟁에 참전했다가 프로이센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감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 돌아온 그는 프랑스인을 괴롭히던 기근과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신세계 작물을 널리 보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많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현대적인 마케팅 기법으로 볼 때도 매우 훌륭한 마케터였습니다.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이나 라브와지에 같은 유명인사들을 감자가 메인 요리 중 하나인 오찬에 공개 초청하기도 하고, 왕과 왕비에게 감자 꽃을 달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감자 마케팅 중에 가장 빛나는 부분은 감자 밭의 보초병이었습니다.  그는 1787년 루이 16세에게서 할당받은 파리 근처의 농지에 감자를 잔뜩 심어 놓고는, 마치 귀한 작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장 병사들을 배치하여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몰래 그들에게 '사람들이 너희에게 뇌물을 주고 감자를 뽑아 가려 하거든 못 이기는 척 허락하고, 혹 밤에 감자를 훔치려 하는 도둑이 있거든 못 본 척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폭망이었습니다.  아무도 밍밍한 맛의 못 생긴 감자를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배고픔 앞에서는 인간도 돼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부터 척박한 토지에 영국인들의 수탈에 시달리던 아일랜드인들은 감자 덕분에 인구가 계속 늘어났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병사들도 감자를 먹으며 전장을 누볐습니다.  흔히 유럽 앙시엥 레짐 간의 마지막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1778~1779)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은 흔히 '감자 전쟁'(Kartoffelkrieg)이라고 불립니다.  서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전략 기동 및 상대방 보급 차단에만 주력할 뿐 큰 전투가 없었던 이 전쟁에서, 양측 군대는 상대보다 더 오래 버티기 위해 식량 확보에 주력하다 보니 이런 평화롭지만 다소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었던 것입니다.





(감자 전쟁 도중 터진 상처를 치료 받고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입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크로아티아 저격병과 프리드리히 사이의 일화가 있지만, 별로 재미가 없으므로 패스...)




나폴레옹의 자랑스러운 그랑 다르메(Grande Armee)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3차 대불동맹전쟁이 시작된 지 약 2달이 된 1805년 10월 24일, 나폴레옹은 (아마도 자신의 부하 관료였던) 프티에(A. M. Petiet)라는 사람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냅니다.


"우린 보급창도 없이 행군했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  우린 현지 식량 조달에 아주 유리한 계절을 끼고 있었고, 또 우리가 게속 승리를 거두고 밭에서 채소를 얻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생을 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네.  밭에 감자가 없거나 우리 군대가 일부 패배를 겪기라도 했다면, 보급창이 없다는 점은 우리에게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을 것이야."





(고달픈 행군과 노숙 중에, 모닥불 속 뜨거운 감자 몇 알은 정말 큰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수석 비서관이던 콩스탕 (Constant)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2일 전부터는 아무런 정식 배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병사들이 주변 마을에서 구한 감자를 구워먹어야 했는데, 나폴레옹도 그런 병사들 틈에서 구운 감자를 집어 먹었다고 합니다.  또 1813년 메츠(Metz)에서 세바스티앙 마리(Sebastien Marie)라는 병사는 20일간 빵이라고는 구경도 못 했고, 최근 3일 동안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행군해야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3일 중에도 먹긴 먹은 것이 있었는데, 바로 밭에서 병사들이 직접 뽑아낸 감자였습니다.  이런 기억들 때문인지, 1814년 1차로 폐위되어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유배되었을 때 나폴레옹이 섬에 도착하여 처음 한 일 중의 하나가 섬 주민들에게 감자를 심도록 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엘바섬은 이탈리아어를 쓰는, 사실상 이탈리아 땅이었는데, 거기엔 아직 감자가 널리 보급된 상태가 아니었나 봅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나폴레옹 전쟁사를 읽다보면 여기저기서 감자 이야기는 자주 나오는데, 감자와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인 옥수수(maize) 이야기는 정말 찾기가 힘듭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  혹시 이때는 아직 옥수수가 유럽에 전파되지 않았던 것일까요 ?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옥수수는 오히려 감자보다 유럽에 일찍 전파되었습니다.  감자가 유럽인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스페인 사람들이 페루에 도착한 1531년의 일이고, 감자는 그 몇 년 후에야 유럽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옥수수는 1492년 아메리카에 최초로 도착한 콜럼부스가 첫 항해에서 가져온 신세계의 물자 중 하나였습니다.  옥수수는 기르는데 쟁기질도 필요없고 물도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으며, 수확량도 엄청나게 많은데 자라는데 불과 3개월 밖에 걸리지 않는 꿈의 작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전파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1493년 그 알갱이가 콜럼부스 손에 의해 최초로 스페인에 들어온지 불과 오십년도 안되어 옥수수는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발칸반도-터키를 거쳐 오늘날의 이란은 물론 중국까지 밭에 옥수수가 넘실댈 정도였습니다.  중국에서 옥수수 이야기가 처음 나오는 것이 1540년 정도인데, 이는 아무리 전파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너무 빠르기 때문에 '중국으로 들어간 옥수수는 서쪽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을 통해 들어온 것'이라는 학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옥수수는 비교적 건조한 지방인 중동에서도 잘 자라 이슬람 지역에서 매우 선호하는 작물이 되었습니다.  1574년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여행하던 독일인 하나는 그 강 유역에 옥수수가 그득히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 이전에 발간된 백과사전에는 옥수수에 대해 '터키가 원산지'라고 적힐 지경이었습니다.




(정작 요즘은 중근동 지방에서는 옥수수를 별로 재배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하긴, 미국과 중국, 우크라이나 등에서 워낙 대량으로 재배하니까 상대적으로 미미해 보일 수 밖에 없겠지요.  세계 옥수수 생산량 중 대부분은 사료와 공업용 알코올 원료로 사용되고, 식용은 전체의 한 10%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도 식용유나 전분 생산용을 빼고 사람 입 속에 직접 들어가는 것만 치면 전체 생산량의 3%도 안된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감자는 지겹도록 먹었으나 옥수수는 그다지 먹지 않았습니다.  아니, 최소한 저는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옥수수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단 한번도 읽지 못했습니다.  딱 한번, 영국군이 옥수수 빵을 먹은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아래는 J. Kincaid 라는 이름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젊은 영국군 장교의 포르투갈에서의 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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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빵 또는 그 비슷한 아무것도 없이 지낸지 3일 째다.  빵 없이 고기만 며칠 먹다보면 고기가 정말 구역질 날 정도가 된다.  


오늘 새벽에는 평소처럼 매우 이른 새벽에 행군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해가 뜨기 전에 시에라 데스트렐라 (Sierra D'Estrella) 앞에 있는 약 2마일 (약 3.2km) 떨어진 한 마을로 출발했다.  그 마을은 프랑스군의 동선 바깥 쪽에 있었으므로, 뭔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도착해보니, 인근 수녀원에서 도망쳐 나온 수녀들이 마을 공동 화덕 건물 바깥 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 반죽을 들고 와 여기서 굽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 빵을 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자, 그들 중 두 명이 친절하게도 자신들의 몫을 내게 내주었다.  


난 그녀들에게 키스와 함께 1달러 (dollar는 당시 스페인 화폐 단위입니다 미국 달러도 원래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를 보답으로 주었다.  그녀들은 나의 키스를 '무척 특별한 호의'로 받아들였고, 내가 내민 1달러 은화에 대해서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런 말을 하면서 받아 들었다.


"우리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가난이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네요."


난 이 설구워진 빵덩어리를 들고 이제 막 무장을 하고 있던 동료 장교들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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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훈훈한 일화에서, 왜 당시 병사들의 모닥불에 걸려 노릇노릇 구워지는 작물에 감자는 있어도 옥수수는 없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강원도에서 길러진 햇옥수수를 삶아서 그대로 먹는 우리와는 달리, 당시 유럽인들은 옥수수를 가루를 내어 밀가루처럼 먹으려 했습니다.  이는 이해가 가는 일인 것이, 우리가 '즉석 제철 간식' 정도로 먹는 옥수수는 sweet corn이라고 하는 것이고 말리지 않으면 장기 보존이 되지 않습니다만, 대량으로 재배하는 옥수수는 밀이나 보리처럼 오래 저장하려면 바싹 말려 낟알 형태로 저장해야 했습니다.  저는 직접 본 일이 없습니다만, 옥수수도 바싹 말리면 그 알갱이가 매우 단단해지고, 특히 그 껍질은 쌀겨나 밀겨처럼 사람이 먹기에는 매우 껄끄러워지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바짝 말린 옥수수 알갱이들입니다.  보기만 해도 이가 아픈 듯 합니다.)




그런 옥수수를 가루로 만들어 빵이나 죽을 만드려면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는 밀이나 보리도 마찬가지지요.  가령 들판에 잘 익은 밀이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걷어들여 배를 채우려면 낫으로 추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껍질을 벗기는 도정 작업 이전에 며칠 동안 햇빛에 말려야 하거든요.  곡물 창고에 잘 마른 밀알이 쌓여 있다고 해도 문제였습니다.  변질을 막기 위해 밀알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낟알 형태로 보관하는데, 그 껍질을 벗겨내려면 풍차나 물방앗간이 없는 상황에서는 맷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뜩이나 무거운 병사들 배낭 속에 맷돌이 들어있을 리가 없지요.  그러다보니, 기원전 40~30년에 로마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us Antonius)가 파르티아(Parthia, 오늘날의 이란-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먹을 것이 떨어지자, 그의 캠프 안에서는 거칠게 간 밀가루로 만든 빵 한덩어리가 같은 무게의 은과 교환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입니다.




(구글에서 roman hand mill 로 검색하니 이런 사진도 나오는군요.)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고 내일이면 또 다른 장소로 행군해가야 하는 병사들에게는 감자가 딱 적격이었습니다.  감자는 추수 및 건조, 도정과 체질, 반죽 같은 것이 전혀 필요없이, 그저 삽 한자루, 혹은 아예 막대기나 맨손으로도 캐내서 냄비만 있으면 간단히 삶아 먹을 수 있었으니 병사들에게는 정말 고마운 작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옥수수가 나폴레옹의 병사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이유는 아무래도 기후 탓이 클 것입니다.  감자는 추운 페루의 고지대 출신이고, 옥수수는 무더운 평원 지역 출신입니다.  옥수수의 성장에는 뜨거운 태양, 그것도 연간 평균 온도보다는 정말 뜨거운 날이 며칠이나 되느냐가 더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옥수수는 주로 남부 유럽에서 많이 재배되었고, 나폴레옹의 후반부 주무대였던 독일과 폴란드 등 북부 유럽에서는 옥수수 재배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나폴레옹의 주무대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어땠을까요 ?  감자나 옥수수나 성서에 나온 곡식이 아니다보니 유럽에서는 그에 대한 경계심과 반감이 강했는데, 종교적으로 좀 광신적인 스페인에서는 무더운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만 가축 사료용으로 키웠습니다.  그러다보니 나폴레옹의 군대가 옥수수를 빼앗아 먹을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옥수수죽 폴렌타입니다.  거의 떡과 죽의 중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에 케이블 TV에서 어떤 이탈리아 요리사와 영국인 미술학자가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찍은 먹방을 봤는데, 거기서 말하는 내용에 따르면 폴렌타는 마당에서 장작불로 반드시 남자가 요리하는 것이 전통이랍니다.  그런데 뭐 요리랄 것도 없이, 그냥 옥수수 가루에 물 넣고 끓이는 것이더라고요.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정말 먹을 것이 폴렌타 밖에 없었다라고 회고하는 장면도 나오더군요.)




다만 이탈리아에서는 옥수수를 많이 키웠고, 사람도 많이 먹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에 옥수수가 널리 퍼진 것은 17세기 후반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granoturco, 즉 '터키 곡식'이라는 이름으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역수입 되었습니다.  옥수수 종자를 적국인 오스만 투르크에게 팔아넘긴 것이 그들의 선조인 베네치아 상인들이었다는 것은 잊혀진지 오래였던 것이지요.  어쨋거나 18세기 전반에 이미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노란 옥수수 죽 폴렌타(polenta)가 배고픈 서민들의 음식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북부 이탈리아를 마치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던 나폴레옹의 군대가 폴렌타를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아마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나폴레옹의 군대도 폴렌타를 좋든 싫든 먹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폴렌타를 값싸고 우수한 군용 식품으로 채택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탈리아에 유행하던 병 펠라그라(pellagra)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병은 옥수수 죽 폴렌타를 먹고 생기는 병입니다.





(펠라그라에 걸린 남자의 사진입니다.  손의 피부염을 보십시요.)




옥수수를 먹으면 병이 생긴다고요 ?  예, 생겼습니다.  이 병은 피부염, 설사, 탈모, 정신착란까지 일으키는 무서운 것이었는데, 요약하면 비타민 B의 일종인 나이아신(niacine)의 부족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원래 옥수수를 주식으로 했던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절대 옥수수를 그대로 먹지 않았고 잿물 등에 담가 불린 뒤 껍질을 벗겨내어 가루로 만든 뒤 죽이나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또 콩과 채소, 물고기 등을 함께 먹었지요.  핵심은 잿물, 즉 알칼리 용액에 옥수수 낟알이 오래 잠겨 있는 동안 옥수수 속에 들어있는 나이아신이 활성화되어 풀려나오는 것이었고, 또 다른 비타민 함유 음식과 섞어 먹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아신이나 비타민 같은 것을 알지 못했던 이탈리아 농민들은 잿물에 불리는 과정 없이, 옥수수 알갱이를 그대로 갈아 노란 가루를 내어 그대로 폴렌타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최악인 것은 가난하다보니 오직 폴렌타만 먹었다는 점이지요.  많은 농민들이 펠라그라에 걸려 죽어야 했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옥수수 이전에는 없었던 이 병이 생긴 것은 오로지 옥수수 떄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만, 굶어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그래도 농민들은 폴렌타를 먹었습니다.




(현대적인 옥수수 가루 제조법입니다.  염기성 화학약품으로 처리를 하는 부분이 맨 처음에 들어갑니다.)




이에 대해서는 1786년~1788년 이탈리아를 여행했던 괴테도 한마디 남길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탈리아 주민들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도 없고, 한다고 해도 그리 호의적인 평가는 내릴 것이 없다... 누렇게 뜬 얼굴의 아낙네들이 빈곤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았고 그 애들도 다를 바 없이 불쌍한 모습이었다.  난 그들의 비참한 건강 상태는 계속 노란 폴렌타를 먹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펠라그라 병은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옥수수를 먹는 모든 가난한 지역, 즉 미국 남부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했고, 1915년에 들어서야 그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현대 미국인들이 즐겨먹는 아침 식사 메뉴 중 하나인 하미니 그리츠(hominy grits)도 수산화칼슘(limewater)으로 알칼리 처리를 해서 껍질을 도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색깔이 하얗지요.  이탈리아의 옥수수 죽 폴렌타(polenta)는 여전히 알칼리 처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대개 노란색입니다만, 편식하지 않으면 펠라그라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답니다.  오히려 한반도 북부에 있는 김씨 왕조 국가에서는 여전히 펠라그라가 홍반병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제가 카투사로 군 생활할 때, 전혀 불평하지 않은 것이 아침식사였습니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잘 먹었는데, 그 중에서도 저는 저 하얀 하미니 그리츠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서 먹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맛이... 밍밍한 흰쌀죽보다 더 고소했는데, 우리가 아는 그런 옥수수맛은 거의 나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폴렌타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이탈리아 농민들의 무솔리니에 대한 저항이 시작된 것은 정부가 전쟁 물자 부족을 이유로 paiolo라는 구리솥을 징발하려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폴렌타는 뭘로 만들란 말이냐라며 어머니들이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결국 무솔리니는 구리솥 징발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권력과 목숨도 잃었지요.  시사하는 바가 큰 이야기입니다.)




옥수수보다 감자를 선호했던 것은 아일랜드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춥고 일조량이 많지 않은 아일랜드에서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요.  아일랜드 농민들은 거의 전적으로 감자를 먹고 살았습니다.  감자는 옥수수와는 달리 자체적인 비타민도 충분하여 펠라그라와 같은 병도 일으키지 않았고, 유일한 단점인 칼숨과 단백질 부족은 영국인 지주를 위해 키우는 암소로부터 얻은 우유로 해결이 되었거든요.  그러나 뭐든 순혈주의, 단일화, 획일화는 좋지 않다는 것이 1840년대 아일랜드를 덮친 잎마름병(blight)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요.




(다 썪은 감자 밭에서 먹을 만한 감자를 찾는 비참한 아일랜드인들의 모습을 그린 당시 삽화입니다.)



순식간에 아일랜드 전역으로 퍼진 잎마름병은 불과 수주일만에 아일랜드 감자 농사를 황폐화시켜버렸고, 아일랜드인들은 순식간에 기아의 비극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대에도 아프리카 등에서 발생하는 기아에 대해 UN 등의 구호활동이 그리 원활하지 않은데, 당시의 구호 활동은 더욱 부진했습니다.  당시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의 집권당은 보수당인 토리(Tory) 당이었습니다.  이들은 소위 자유경제주의의 신봉자로서, 이들의 경제철학은 한마디로 Laissez-faire(레세-페르, 내버려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언급한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의 힘이 알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므로 정부의 간섭과 그에 따르는 세금은 최소화하라는, 좋게 말해서 순진하고 나쁘게 보면 가진 자의 편만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일랜드의 기근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몰랐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laissez-faire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만든 법안치고는 매우 모순적인 규제 조치 하나가 구호 조치를 막고 있었습니다.  곡물법(Corn law, 영국에서 corn은 옥수수가 아니라 곡물, 특히 밀을 뜻합니다)가 그것이었는데, 이 법은 지주계급의 이익을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당시 귀족들은 대개 농지를 소유한 지주들이었는데, 해외의 싼 곡물이 들어와 자신의 수익 구조를 해치지 못하도록 해외로부터 수입되는 곡물에는 엄청난 관세를 붙이는 것이었지요.  




('평화의 축복과 곡물법의 저주'라는 제목의 당시 만화입니다.  가운데 서있는 잘 차려입은 4명은 영국 지주들입니다.  이들은 자루당 50실링에 밀을 팔겠다는 프랑스인들에게 꺼지라고 말하고 있고, 결국 프랑스인들은 바다에 그 밀을 버리고 있습니다.  한편, 창고에는 자루당 80실링의 영국산 밀이 잔뜩 쌓여있습니다.  이 밀을 살 돈이 없어 굶고 있는 오른쪽의 영국인 가족은 이런 개같은 나라를 떠나겠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헬조선은 특정 지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백성 대부분이 희생해야 하는 곳이며, 언제 어디에나 다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사람 중 하나는 집권당의 수장인 로버트 필(Robert Peel) 총리였습니다.  그는 일방적으로 진보당인 휘그(Whig) 당과 연합하여 자기 당이 지키려던 곡물법을 파기하고 미국으로부터 배 두 척 분량의 옥수수를 수입하여 아일랜드의 기근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양으로는 턱도 없다는 점과 아무리 싸다고 해도 그런 옥수수에 대해서도 아일랜드인들이 1파운드에 1페니라는 돈을 내야 했다는 점 외에도, 곡물 자체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들어온 옥수수는 강원도에서 막 온, 부드럽고 달콤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찐 옥수수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총알처럼 단단하게 말린 알갱이 형태로 들어온 이 옥수수는 삶는다고 해도 도저히 그대로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먼저 갈아서 껍질을 벗기고 가루를 낸 뒤 물에 삶아 그리츠건 폴렌타건 팬케익이건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일랜드에는 제분소는 커녕 맷돌도 충분히 없었습니다.  온 나라가 감자만 먹다보니, 밀이나 보리, 옥수수 등 단단한 곡물을 제분할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서둘러 맷돌과 그릇을 모아 옥수수 가루를 내긴 했습니다만, 아일랜드인들은 포만감을 주던 감자에 비해 이상한 맛이 나는 노란색 옥수수 가루를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옥수수 가루를 필(Peel)의 유황가루(Peel's brimstone)라고 불렀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옥수수를 먹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당장 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름 최선이랍시고 노력했으나, 결국 좋은 소리는 못 들었던 필 총리입니다.)



펠라그라가 생기기도 전에, 괴혈병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원래 감자는 비타민 C도 풍부한 훌륭한 식품이었는데, 옥수수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타민 C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은 채소를 먹으면 해결되는 간단한 병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푸성귀를 먹지 않아도 (감자 덕분에) 끄떡 없었던 아일랜드 사람들에게는 옥수수를 먹으면 생기는 괴상한 병이었습니다.  결국 필 총리는 아일랜드인들에게 옥수수라도 먹이기 위해 독단적으로 곡물법을 폐기하는 바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아일랜드의 기근은 1852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총 1백만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등, 아일랜드는 인구가 20~25% 감소하는 참혹한 변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일랜드 미스 교구의 주교인 토마스 널티(Thomas Nulty, 1818-1898)입니다.  그는 아일랜드 대기근시 처음 맡은 교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 뿐만 아니라, 세금 문제 때문에 가뜩이나 굶주리는 소작농들을 지주들이 수천명 단위로 매몰차게 쫓아내어 결국 그중 상당수가 길 위에서 굶어죽는 것을 목격한 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는 그런 비극적인 장면들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그치지 않고, 성직에 있으면서도 적극적인 개혁주의자가 되어 소작농들의 권리 증진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핍박받는 빈민들의 어려움을 보고도 '그건 정치적인 문제라서 개입하면 안된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은 성직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감자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트럼프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게 되네요.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은 영국의 경제 수탈에 따른 기형적 경제 구조와 가진 자만을 위한 불합리한 법규 등에 의한 비극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우수하다고 해도 단일 품종의 곡물에 의존하다가는 언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는 다양성에 대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트럼프가 정말 특정 이슬람 국가 출신에 대한 입국 금지 명령을 내려 말썽입니다만, 미국의 힘은 다양성이고 미국의 본질은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점을 미국인들이 깨달았으면 합니다.




Source : Napoleon on the Art of War  By Jay Luvaas

Napoleon's Men: The Soldiers of the Revolution and Empire By Alan Forrest

http://www.historyplace.com/worldhistory/famine/begins.htm

http://www.defencejournal.com/2001/apr/weapons.htm

http://www.zingermansfoodtours.com/2011/08/why-did-polenta-become-italian/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Famine_(Ireland)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Nulty

빵의 역사 By 하인리히 E. 야콥 (우물이 있는 집 출판사)

Adventures in the Rifle Brigade, in the Peninsula, France, and the Netherlands from 1809 to 1815 By J. Kincaid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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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웅진 2017.01.30 1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근 읽은 [아침식사의 역사]에서는 이미 미국인들 중에도 인디언들과 잘 교류하던 사람들은 펠라그라의 예방법이 옥수수를 잿물로 처리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고 나오더군요. 한 예로 드라마 [초원의 집]의 원작 메모아(그 양갈래 댕기머리하던 둘째 따님의 글이었다지요)에서는 어머님께서 옥수수 알갱이를 잿물이 담긴 솥에 넣고 햐얘질 때까지 푹 삶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아일랜드 기근은 기실 좋든 싫은 감자만 먹어야 했던 탓에... 곡물 농사는 잘 되었지만, 그 곡물들은 레드코트들이 싸그리 영국으로 가져갔다지요(샤프의 부하인 그 부사관 아재도 딱 이때에도 살아있었을 것 같은데...). 마치 일제 시대에 군산항 등을 통해 조선산 쌀이 내지로 이동(...)되는 동안, 조선인들은 만주산 콩조밥을 먹어야 했던 것과 비슷하달까요.

    • nasica 2017.01.30 2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샤프의 친구이자 부하인 패트릭의 고향이 도네갈인데, 대기근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합니다. 저도 마음이 아프네요.

  2. dd 2017.01.30 2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3. ㅇㅇ 2017.01.30 2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감자만한게 없네요

  4. 하하하 2017.01.31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 글은 정말 볼 때마다 자료 조사나 풀어 나가시는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어요. 정말 부럽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메리카 대륙(남미나 북미) -> 태평양 -> 아시아 이런 코스로 들어온 문물이 있나요?

    • nasica 2017.01.31 0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과찬이십니다. 감자의 태평양 전래설에 대해서는...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 sori-J 2017.01.31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미-서구(포르투갈)-아시아(일본)를 거쳐 온 문물중에는 담배가 있지요.

  5. 프로이센군 2017.01.31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이 올려 주시는 글은 항상 유익해서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예전엔 북독일 지방에서 자라지도 않아 징발도 안되었던 옥수수가 지금은 중부유럽 전역에서 폭넓게 재배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네요

  6. boribob 2017.01.31 1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7. 유니크 2017.01.31 1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
    늘 좋은 글 재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도 근래에 나폴레옹에 대한 흥미가 생겨서 몇몇 책을 읽어보고 있는데

    nasica님의 '아우스터를리츠 전투 후일담'
    연재편 중에 나폴레옹이 한 말인

    "러시아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동화같은 전쟁을 치룰 수 있는 나라이다. 이기든 지든 전쟁이 끝나면 저 멀리 어디론가 그냥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은 전쟁의 결과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야 한다."

    이 말이 나온 책의 저자나 책제목이 기억 나신다면 알려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본편과 무관한 질문이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 nasica 2017.01.31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에 Daum blog에도 비슷한 질문을 올리신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드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해서 방금 책을 뒤져 봤습니다.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라는 책입니다. 제1장 The glorious peace 앞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네요.

      "Russia is the sole power in Europe able to make a war of fantasy," he wrote. "After a battle lost or won, the Russians vanish; France, Austria, Prussia, to the contrary, must live a long time with the results of the war."

      그 책에 나온 출처를 보니 나폴레옹이 1805년 12월 10일 Brunn에서 보낸 편지에 나온 내용입니다.

    • 유니크 2017.02.01 1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ica님 답변 정말 고맙습니다
      평소에 양질의 글을 읽기만 하는 것에 반성합니다

      특정 위인의 공로나 선악을 이분적으로 보는 경향이 유독 강한 세태인데,
      nasica님은 나폴레옹이라는 일대의 풍운아가 가진 빛과 어둠을 함께 다루시는 균형잡힌 시각이 돋보여 더욱 연재글의 품격이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nasica님의 나폴레옹 시기 전반을 다룬 훌륭한 글들을 기대하면서
      다시 감사의 인사말 올립니다

  8. 블랑 2017.01.31 16: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옥수수 얘기 볼 때 마다 궁금한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옥수수처리법을 어찌 알았나 싶네요.
    펠레그라의 원인을 옥수수라고 어떻게 특정했는지와 그걸 잿물로 처리해야 한다는걸 어찌 알았는지. 실험군 대조군 놓고 식단 비교테스트를 한것도 아닐텐데 말이죠.

  9. 연습장 2017.01.31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르망티에의 감자도둑 양성계획은 세계사의 일화를 다루는 책들에서 몇번 본 기억이 나는데 그 책들에선 다들 이 기발한 시도가 대성공해서 감자를 전파하는데 성공했다고 나왔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군요.

  10. 알타리무 2017.01.31 2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들은 소위 자유경제주의의 신봉자로서, 이들의 경제철학은 한마디로 Laissez-faire(레세-페르, 내버려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언급한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의 힘이 알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므로 정부의 간섭과 그에 따르는 세금은 최소화하라는, 좋게 말해서 순진하고 나쁘게 보면 가진 자의 편만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
    자유주의경제학이 가진자의 편만 들어준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를들어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을 많이 가진 덴마크보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정책을 많이 가진 미국의 빈부격차가 훨씬 적습니다. (계층의 계급화성향도 도리어 복지정책을 실시하는 덴마크가 훨씬 뚜렸합니다.- 즉 부의대물림 현상도 덴마크가 미국보다 더 또렸히 나타납니다)
    다른예로 전에 자유주의경제학과 관련하여 낙수효과가 없다고 말씀하신분이 있었는데...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경우 2000년대 이전까지는 낙수효과가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자유주의경제학이라서 신자유주의라서 부자들만 좋고 가난한자는 무조건 손해가 나는 경제학또는 사상일것이다라는 것은 굉장한 편견입니다.
    사회주의가 무조건 부자나 서민들이나 다같이 망하는 길이라는 것이 편견인것처럼 자유주의는 부자가 무조건 좋고 가난한자는 손해가 난다는 것도 편견입니다.

    • 알타리무 2017.01.31 2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리고 본문에도 나온것과 같이 당시 아일랜드에 완전한 자유주의정책이 시행된것도 아니었습니다. 해외농산물에 고관세를 매기는 반 자유주의정책이 펼쳐졌고, 그결과 기아는 더 심해졌습니다.
      또한 자유주의 정책의 가장큰 특징이 낮은 세금인데, 당시 아일랜드에는 고율의 세금이 기근 중에도 계속 부과가 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알타리무 2017.01.31 2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나온김에 부연을 하자면(아래의 내용은 본문과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2000년대 이전에는 낙수효과가 뚜렷하였는데, 2000년대 이후에는 낙수효과가 확연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럼 결국 어떠한 현상이 벌어지는가하면, 밥그릇이 100개가 있는데 200개 300개로 늘어나면, 부자와 서민둘다 충분하게 더 많은 밥그릇을 가져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률이 떨어져서 밥그릇이 100개 있는데 거기서 1개 늘어 나고 2개늘어나는 수준이라면, 부자들이 더많은 밥그릇을 가져간다면 서민들은 더 적은 밥그릇을 가져갈 것이요, 서민들이 더 많은 밥그릇을 가져간다면 부자들이 더 적게 가져갈것입니다. 즉 사회자체가 제로섬게임으로 변해버리고, 부자가 이기던 서민이기던 간에 진쪽은 너무 큰것을 빼껴버리기때문에 극렬히 저항을 하고 그것을 막기위해 이긴쪽은 어쩔수 없이 강압적인 독재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서민이 이기던 부자가이기던간에 상관없이 결국 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찰국가로 전환이 됩니다)

      본문에 트럼프에 대한 이야기도 있듯이 왜 미국이 반이민 반멕시코적인 정책을 펼치는가, 미국의 성장률도 정체가 되어버렸기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누군가가 누군가를 억합하는 식으로 게임의 룰이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반민주주의적으로 말이지요. 참고로 버니 샌더스도 트럼프 못지 않은 강력한 이민제한을 주장했습니다. 정치사상적으로 양극단의 사람들이 성장률이 정체된 사회환경때문에 결국 똑같이 억압적 정책으로 귀결되어져버리는 것이지요.

      그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부자들 서민들 둘다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가하면, 성장률을 높여야합니다. 어느정도 이상의 경제성장률이 유지가 되지 않으면 민주주의 체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서 사회주의적 방법보다는 자유주의적 방법이 보다 경제성장률을 올리기 쉬우므로 민주주의수호를 위해서라도 자유주의 경제저액이 보다 더 한국사회에 더 수용이 되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행여나 어떤분은 이명박 박근혜 법인세인하해주고 그래도 경제성장률을 계속 떨어지던데 이것은 어찌된일인가 물으실수도 있으실것입니다. 이명박 박근혜는 FTA제외한다면 신자유주의 정책을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도리어 이명박 자원외교는 반 자유주의적이지요. 박근혜는 아예 자유주의정책이랑 거리가 멀고요...
      도리어 생뚱맞게 김대중 노무현 정부시절에 자유주의정책이 더 실현된 측면도 있습니다)
      암튼 저는 이러한 이유로 신자유주의를 믿습니다.

    • 0_- 2017.02.02 14:35  댓글주소  수정/삭제

      > 말나온김에 부연을 하자면(아래의 내용은 본문과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알고 있으면 왜 하시나요? 관계없는 내용 알고 있으면서 꼭 그런식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게 참 이상하게 보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가 있는 국가고, 마침 블로그 주인장님도 저나 님같은 비로그인 사용자 댓글도 허용하시는 상황이라 댓글에서 다양한 의미의 잔치가 벌어집니다만, 관계없는 이야기를 왜 끌어와서 훈장질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훈장질 하시려거든 차라리 본인 블로그를 하나 파셔서 거기에서 하세요. 영주권 따려고 노력하는 시간도 있고, 남의 블로그에 관계없는 내용 장문으로 댓글 달 시간은 있지만 스스로 블로그 만들고 가꿀 여유는 없는것을 보니, 우파식 SJW네요.

      저도 이번을 끝으로 상대를 안 하렵니다. 더 이상 관심을 안 줘야지 이런사람 없어지려나 싶어서요...

    • 알타리무 2017.02.02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솔직히 알지도 못하면서 자유주의가 나쁘니 신자유주의가 나쁘니하면서
      자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한답시고 이리저리 날뛰는 바람에 복지와 상생같은 사회주의경제방식 도입하는 바람에 대한민국경제를 다 망가뜨려버려서 청년실업이 심화되고 나라와 서민경제도 어려워졌습니다.
      난 솔직히요. 까놓고 말해서. 전에도 말한적있지만, 과연 소위 자유주의 어쩌고 저쩌고 자유주의는 좋게말하면 순진한거고 나쁘게말하면 가진자들의 편을 들어준다고 글을 쓰는 사람이 국부론 책이나 한번 보고 저런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담하는데 나시카님은 경제학고전이던 경제학전공서적이던지 한번도 공부는 커녕 책한번 안읽어봤을 겁니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저것하나는 별거아니지만 저런자그마한 교만들이 모이고 또 모여서, 사람들을 선동시키면, 또 정선희남편죽이듯이, 또 누군가에게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민주주의의이름으로 가하겠지요.
      솔직히 나시카님보라고 덧글다는게 아니고...
      나시카님글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유주의는 가진자들 편을 들어주는구나 하고 생각할까봐 걱정될까봐 덧글다는것입니다.
      솔직히 한국사람들 귀가 얇은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국부론 책만 한번만 딱 읽어도 "이들은 소위 자유경제주의의 신봉자로서(중략) 좋게 말해서 순진하고 나쁘게 보면 가진 자의 편만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안 쓸텐데...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렇게 뭐는 뭐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다니는지...
      아무튼 그래서 누군가에게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는것을 제가 못견뎌서 썼읍니다.
      ----
      그리고 저보고 블로그파서 글쓰라는 분도 많은데.... 그것도 의미가 없는게 제가쓰는 내용이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그냥 국부론 책봐서 읽으면 됩니다. 요약이 필요하니까 요약을 블로그에다가 써주면 안되냐 하는 분도 있겠지만, 원래 고전은 요약해서보면안됩니다.
      국부론이 번역이 안되어 있는것도 아니고...
      그 책만 읽더라도... 그 2권짜리 책 사람들이 읽는게 참 제게는 진짜 커다란 꿈인데..
      그책만 읽더라도 지금 대선주자들 공약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다 이해가 가실겁니다...(결론적으로 대선주자들도 경제학 지식이 전무하다는 이야기...)
      참... 그게 저의 큰 꿈입니다. 사실 이거 대한민국 중학교에사 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해 요약을 가르키긴했습니다.
      사람들이 요약만 외우니... 다 잊어먹고 이상하게 이해하고 ... 심지어 배웠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고..,
      정말로 책을 봐야합니다. 책을 진짜.

    • 최홍락 2017.02.02 2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인도 아는게 없으면서 떠드는걸 본인은 스스로도 모른다는게 더 정확하겠죠. 뭐 저도 국부론을 다 읽지는 않았으니 저도 ㅂㅅ 취급하겠다면 할말은 없겠네요.

  11. 최홍락 2017.02.01 0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국제무역과 경제사를 재미있게 들었던 입장에서 토리당이 자유경제주의의 신봉자라는 언급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토리당은 왕권을 옹호하는 귀족들과 지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만큼 농산물의 가격을 지탱하기 위한 규제인 곡물법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합리한 규제를 옹호한 보수주의자에 가깝지 자유경제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당이었습니다. 당시의 떠오르는 신흥세력인 산업자본가들의 지지를 받는 휘그당과는 반대편에 있었지요. 곡물법 폐지 및 자유무역으로 곡물 가격이 낮아지면 노동자의 저임금과 기업가의 고이윤을 낳고 자본 축적과 고용 기회 확대, 경제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펼친 주식중개인 경제학자 데이빗 리카르도와 농산물 보호 무역이 국내 생산 및 수요의 증가와 고가격을 낳고 농가 소득이 높아져 결국 사회 전체의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중농주의적인 논리를 내세운 목사이자 인구론으로 유명한 토머스 멜서스의 신문 지면을 통한 논전은 경제학 논쟁의 시초격이지요.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주계층과 자본주의를 동일 선상에 놓으려는 것은 매우 잘못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당시 배경을 놓고 볼 때 더더욱 그러하고요. 곡물법은 1846년 폐지되고, 이후 자본가들은 그들이 원했던 산업경쟁력 회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했고, 소비자들인 노동자 계급 역시 소비부담을 덜게 되어 지주를 제외한 모두에게 이득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시도는 수구계급인 지주에 대항한 혁신 주도계급 부르주아에 의한 진보였고요. 이러한 자유무역의 성공이 진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주의 이익을 지키려는 토리당이 레쎄페의 신봉자라고도 할 수도 없습니다.

    여담으로 프랑스에서 감자를 보급한 파르망티에는 레쎄페라는 말을 회자시킨 중농주의자 중의 한사람입니다. 파리 북서부 지하철역에도 이 사람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2. 아무리 우수하다고 해도 단일 품종의 곡물에 의존하다가는 언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는 다양성에 대한 메시지라는 평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게 국내에서 아일랜드인들이 감자가 제일 많이 나니까 감자만 심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이 아일랜드인들의 탐욕이 원인인것처럼 기술한 것과 유사한 시각으로 보이는데요, 아일랜드인의 몰빵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강한 빛에서 광합성 효율이 높은 옥수수는 맑은 날이 적은 아일랜드의 날씨에 비해 효율이 크게 높지 않습니다. 아일랜드 지역은 대부분 기후 조건이 현대 기술 없이는 곡물 경작이 극히 어려웠던 지역이지요. 게다가 옥수수는 지력을 소모시키는 경향이 강해 비료의 존재가 없다면 계속해서 농사를 짓는게 불가능하고요. 반대로 그나마 기후조건이 괜찮았던 수도 더블린 주변의 영국인 거주 지역이었고 여기는 밀과 호밀이 경작가능한 곳이어서 기근을 피해갔다고 하지요.

    두번째 문제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그 당시 아일랜드 소작농들은 옥수수 종자를 살 자본이 없었을 뿐더러, 아일랜드에서의 생산 효율은 옥수수보다 감자가 높았고, 당시 아일랜드인 사이에 유행했던 부업 중 하나였던 돼지 사육에 필요한 부수물을 낼 수 있는 감자가 월등히 나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2. 무는개 2017.02.01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우 저 위에 누구 진짜 혓바닥 기네
    주어없네요

  13. 최홍락 2017.02.02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에 대해 추가적으로 수정할 사항이 있어 다시 글을 올립니다.

    1. 감자 마름병과 아일랜드 대기근에 대해 영국은 자유 방임주의를 택했다? No. 영국정부가 손만 놓고 있지는 않았다.

    감자 마름병의 소식이 초기에 여론과 정부의 큰 관심을 얻지 못했던 것은 피해의 정도가 지역마다 달랐고 피해를 다룬 신문들도 다른 논조의 기사를 실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겨울이 되자 감자의 피해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아서 1845년의 가을 더블린 시장에서의 감자 가격 거의 변동없이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2월부터 감자 마름병의 피해가 급격히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다음해 1846년 4월까지는 감자 가격이 15배 정도 급등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었지요. 그 때가 되서야 영국 정부에서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이미 초동대처가 늦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장관을 역임한 경력이 있어 이 지역 상황에 밝았던 필 총리를 주축으로 과학자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설립하여 병의 원인을 밝히는데 전력을 다하였으며, 필 총리는 곡물법을 즉각 폐지하기 위하여 야당인 휘그당과 여당인 토리당에서 자신을 따르는 계파와 연합하여 곡물법을 폐지하는데 노력하였습니다. 1845년 후반에는 베어링 브라더스 상사와 100,000 파운드 가치의 인디언 옥수수와 식량 수입을 계약하였으며 이 식량들은 중앙 구제위원회와 각 지방의 구제위원회를 통해 배분되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식량을 무상 분배하지 않고 식량들을 원가에 지방위원회에 판 다음 가난한 자들에게 다시 원가로 판매하는 방식을 채택합니다. 이 자금은 아일랜드 지주계층의 기부금을 받아서 구매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주들의 불만이 누적되었지요. 영국의 조치는 초동 정보 파악 및 대처, 수단의 제약이 있었을 뿐이지 절대 자유방임주의의 무책임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영국인들의 시각이었습니다. 본토의 영국인들은 이 자연 재앙을 사치와 자기만족에 내리는 경고로 보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일부 반 카톨릭 성향의 복음주의자들은 아일랜드의 재난을 종교상의 실수와 연관시켜, 영국정부가 취한 1829년 카톨릭 해방령 등 유화적인 조치에 대한 초자연적 영향이나 악령의 작품, 혹은 하느님의 저주라고도 보았지요. 이러한 시각은 후술할 정책적 실패의 기반이 된 인식을 낳게 됩니다.

    2. 자유무역보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다면 대기근을 막을 수 있었다? - No, 잘못된 Keynes 정책에 가까운 대책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1846년 필 총리의 토리당 정권은 존 러셀의 휘그당 정권으로 교체됩니다. 러셀 행정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자연재앙에 대해 엄격한 도덕주의적 기준을 적용하여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능한 지주와 나태한 소작인들을 계도하여 국토 자원에 아일랜드인이 참여하여 식량을 살 돈을 충분히 마련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둡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나타난 정책이 바로 대규모 공공사업이었지요. 1846년 늦은 봄 아일랜드의 대부분의 주에서 도로 포장, 강의 수로 개설 같은 사업이 시작되었고 최대 97,617명이 고용되었습니다. 1847년 3월에는 그 수가 700,000명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러셀 행정부의 정책은 결론적으로 실패였습니다. 우선 성과가 너무 저조했습니다. 공공사업으로 파헤쳐진 도로는 수송은 방해했고 1846년 8월부터 지주들이 후원자의 역할을 하도록 허락했는데, 그들은 공공사업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향상시키는데 이용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1846년 가을과 겨울, 마름병이 다시 창궐하여 그 해 겨울까지 감자의 90%가 파괴되어 1847년 초까지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기근에 이어 닥친 전염병이 원인이었지요.

    이런 정도의 엄청난 규모의 일을 다루는 행정에 정부 실패가 나타나지 않을 리 없지요. 일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졌고 많은 일들이 너무 먼 곳에서 진행되었으며, 행정을 다루는 사무원들도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성과급 시스템을 적용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나 이는 훨씬 더 일을 지연시키고 불공평하기도 하기도 했지요. 공공사업에 영국 정부가 쏟아부은 금액은 약 500만 파운드로 이는 아일랜드 대기근 동안에 영국 정부가 구제정책에 사용한 700만 파운드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아일랜드인들은 토지개발, 하수처리, 점진적 토지향상을 의미하는 재생산의 작업을 호소했으나 정부는 도로공사나 방파제 건설 같은 사업을 더 선호했습니다. 결국, 농업 생산량의 직접적 증가를 유발하는 사업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상황은 더 악화되었지요.

    결국 러셀 행정부는 무료급식소를 급히 도입하여 기근의 절정기였던 1847년의 여름에, 하루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급식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이미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다음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더 안타깝게 되었지요.

    3. 그럼 영국정부는 할만큼 했으니 책임 회피는 가능하지 않은가? No, 보다 근본적인 면에서 영국정부의 책임이 크다.

    1815년 이후 기근 직전까지 아일랜드는 1/3의 지주들(대부분 영국인들)이 2/3 이나 그 이상의 토지를 차지하는 토지의 불균형적인 분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아일랜드의 농업은 여러모로 통제를 받았지요. 각 에이커 당 곡식의 생산량은 사유지 관리의 개선에 의해 증가하였지만, 지주들은 대리인, 집행 관리자, 소작인을 쥐어짜는 중매인을 통해 더 많은 이윤을 취하였으며, 여전히 아일랜드 농부 한 명의 농업 생산량은 1845년 당시 영국의 약 1/2에 불과하였습니다. 게으름이나 무능력보다도 자원의 구속의 차이가 원인이었지요. 이후에 이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 제3세계 국가들이 토지 개혁에 성공한 동북아 선진국가들과 달리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은 아일랜드의 산업구조를 취약하게 만들었고, 대기근이라는 타격에 의해 국가 전체가 흔들린 것이지요. 이러한 산업구조의 형성은 식민지배자인 영국정부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 푸른 2017.02.08 0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씨의 댓글은 참 좋은것 같습니다. 설명보충이나 이견을 달아주시는데 잘 챙겨보고 있습니다. 다만 나시카님의 글과 다소 다른 정보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나시카님의 글은 밀, 감자, 옥수수 등 식량작물과 그 연관사항에 대한 서술이었던 것에 반해 최홍락씨의 댓글은 아일랜드 대기근에 초점이 맞춰져있네요. 물론 나시카님의 글에 아일랜드 대기근과 정부대처가 안나온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이유로 댓글을 이렇게 길게 쓰는 것은 '침소봉대' '혀가 길다' '안다는 이유로 글을 쓴다'소리를 들을 법 합니다. 따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심은 어떨런지요. 연재하신다면 꼬박꼬박 들러보겠습니다.

    • nasica 2017.02.08 12: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푸른님// 저는 항상 댓글에서 많이 배웁니다.

  14. javaxer 2017.02.03 1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자라고 하니, 저는 러시아 원정 때 얼어 붙은 감자를 몰래 먹었던 어느 프랑스 병사 이야기만 생각나네요.
    전쟁 시작 할 때만 해도 설마하니 이리 될줄은 몰랐겠지요.

    • 무는개 2017.02.04 16: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 원정하니 당시 현지징발&구매에 의존하던 당시의 보급체계가 생각나더군요

      당연히 러시아에서도 현지징발&구매로 보급을 충당하면 될줄 알고 쳐들어갔을듯...

  15. 카페리쿠페 2017.02.06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옥수수의 문제중 하나는 3개월만에 쭉쭉 자라는만큼 지력을 아주 그냥 인삼저리가라 할정도로 뽑아 먹습니다.

    옥수수 한번 심으면 현대적인 비료가 없을시에 1~2년을 휴지기를 가져야한다고 하니 ㅎㄷㄷ하죠.

    북한의 식량난도 옥수수 키우는거까지는 좋았는데,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비료를 구할수 없어져서 농경지가

    적어진 문제도 있다고 하죠.

    • 무는개 2017.02.17 2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북지원 방안의 하나로
      국내의 남아도는(!) 음식물쓰레기를 퇴비화 해서 북한에 제공한다는것도 있었죠

      음식물쓰레기를 퇴비화해도 우리나라 내에서 처리하는데는 한도가 있어서 북한에 지원하자는거죠

  16. 고구마 2017.02.16 0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구마는 감자와달리 귀족들도 먹던 고급작물이었다던데 사실인지 모르겠네요 달달한게 감자보단 확실히 맛있죠

  17. 나삼 2017.02.24 0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말씀대로 미국의 힘은 다양성이고 미국의 본질은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점이라는 것에 동의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합법적인 이민자들이지요.

    트럼프가 내쫒으려 하는것은 불법 이민자들입니다. 이점을 명확히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 수비니우스 2017.05.16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2&aid=0003172420
      "중동·아프리카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반이민 행정명령" 이야... 7개국이 싸그리 다 불법자인가봅니다.
      "트럼프 정부는 자국에 체류 중인 기존 서류미비이민자(불법체류자)의 단속과 추방을 강화하고, 새로운 이민자에게는 문턱을 높이고 있다." 새로운 이민자는 불법적인건가봐요.

  18. 학살 2018.11.05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운 정보 얻고가용

2017.01.16 00:10

세비야에는 알카사르 궁전과 세비야 대성당 외에도 특히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명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김태희 광장입니다.  현지인들은 그 광장을 에스파냐 광장(Plaza de España)라고 부르더군요.  





(왜 에스파냐 광장이 김태희 광장으로 더 유명한지 모르시는 분은... 그 젊음이 부럽습니다 !) 




이 광장은 스페인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1929년 스페인어권 이베리아-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진, 비교적 현대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명소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 같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이 광장에는 양쪽에 2개의 탑이 있는데, 이 탑들의 높이가 세비야 대성당의 유명한 종탑 히랄다(Giralda)와 맞먹을 정도로 높게 설계되자 세비야 전체가 들고 일어나 난리를 피웠다는 것 정도입니다.  결과적으로 히랄다의 높이는 약 100m 넘는 것에 비해, 이 두 탑의 높이는 약 70m 정도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종탑 히랄다입니다.  Giralda는 풍항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원래 이슬람 모스크에 딸린 첨탑 미나렛(minaret)이었던 이 종탑은 독특하게도 종탑 꼭대기로 올라가는 통로가 계단이 아니라 그냥 경사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에 이 곳을 지배하던 무어인들은 그 꼭대기에 올라갈 때 말을 타고 올라갔다는 믿거나말거나 전설이 있습니다.)





(이건 히랄다 종탑에 올라가 내려다 본 세비야 풍경입니다.  아래에 보이는 것은 세비야 대성당과 그 뒤뜰입니다.  저 배경에 길쭉한 현대적 건물 보이십니까 ?  무슨 건물인지는 못 알아봤는데, 아무튼 저렇게 삐죽 솟은 건물이 있으니 확실히 도시 경관을 확 해치더군요.  아마 저 건물 지은 사업가는 '불합리한 규제 때문에 세비야 경제가 망한다'라며 협박한 끝에 저 건축 허가를 받아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설마 모 반도국가처럼 모종의 불법적 뒷거래를...???)




이 광장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가 없는 대신, 이 광장의 반원형 벽면에 있는 총 48개의 각 지방을 대표하는 알코브(alcove, 벽면으로 움푹 들어간 조그만 공간)에는 해당 지방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 타일 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것은 신대륙 탐험을, 어떤 것은 이슬람으로부터 스페인을 되찾은 레콩키스타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대한 투쟁을 그린 것은 5개였습니다.  하엔(Jaen)의 바일렌(Bailen) 전투, 카디즈(Cadiz)의 1812년 헌법 제정, 마드리드(Madrid)의 도스 데 마요 (Dos de Mayo) 봉기, 폰테베드라(Pontevedra) 전투, 그리고 헤로나(Gerona)의 항복입니다.






(에스파냐 광장의 모습들입니다.  맨 마지막 사진에 제가 언급한 48개의 알코브들과 그 벽면의 타일화가 보입니다.)





(위에서부터 하엔, 마드리드, 카디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다호스의 벽화입니다.  제 블로그를 계속 보셨던 분들은 하엔, 마드리드, 카디즈의 그림들은 다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의 바다호스의 벽화는 보시다시피 나폴레옹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레콩키스타에 관련된 것입니다.)



바일렌 전투, 카디즈의 헌법 제정, 그리고 도스 데 마요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다룬 바가 있으고 또 폰테베드라 전투는 너무 규모가 작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고, 헤로나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여기서 묘사된 사건은 1808년~1809년에 3차례에 걸친 헤로나의 포위전과 결국 헤로나의 스페인 수비대가 1809년 12월 항복한 일입니다.  보통 승전을 그리는데, 굳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한 이 전투를 그린 것은 이 항전이 그만큼 의미있는 것이라는 반증이겠지요.  





(헤로나의 항복, 1809년이라는 제목이 보입니다.  보기 추한 제 그림자가 보이는군요.  모든 사진은 애국 기업 LG의 V20으로 찍었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좌 강탈에 나섭니다.  마침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서 왕위 양도를 받아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웠습니다.  무능한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에 못지 않게 너절했던 아들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 바욘으로 유인한 뒤 체포해서, 두둑한 연금과 안락한 궁전을 제공하니 국민이야 어떻게 되건말건 쉽게 왕위 이양에 동의해버린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고, 스페인 귀족들과 국민들에게는 근대적인 헌법에 따른 통치와 경제적 번영, 국가적 영광을 약속했습니다.  


1808년 바르셀로나의 요새인 몬주익(Montjuïc) 요새를 지키고 있던 알바레스(Mariano Álvarez de Castro) 장군은 프랑스군이 요새를 점령하려들자 그에 맞서 싸우려 했으나, 그의 상관은 요새를 프랑스군에게 넘겨주라는 명확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왕 자신이 나라 전체를 팔아먹은 판국에 무의미한 저항은 포기하라는 것이 그 상관의 생각이었겠지요.  알바레스는 군인이었으니,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그의 의무였습니다.  만약 거기에 저항했다면 알바레스는 정당한 군 통수권자에 의한 명령을 거부한 반란군이 되어 처벌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와 가장 가까운 지방인 카탈루냐의 주도인 바르셀로나가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버렸습니다.





(몬주익 언덕에서 내려다본 바르셀로나 항구입니다.  Montjuïc을 스페인어식으로 읽으면 아마 몬트후익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불어의 영향을 받은 카탈란어로는 몬주익이라고 읽습니다.  "유태인 산"이라는 뜻이지요.  아마 이슬람 시절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나 봅니다.  바르셀로나의 요새 이름이 몬주익입니다만, 헷갈리게도 헤로나의 요새 이름도 몬주익입니다.)




그러나 카탈루냐 사람들도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마드리드에서 도스 데 마요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에 대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카탈루냐에서도 활발한 반프랑스 게릴라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 쪽에 가장 가까운 대도시였던 바르셀로나조차도 당장 프랑스 본국과의 연락이 위태로울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새로 병력을 파견하여 바르셀로나와 프랑스 본국과의 교통로를 뚫기로 합니다.  그 타겟이 프랑스 국경과 바르셀로나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였던 헤로나(카탈란어로는 Gerona, 스페인어로는 Girona)였습니다.  아일랜드인들로 구성된 350명의 정규군과 자원 민병대 약 1600명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수비대는 1,2차에 걸친 프랑스군의 공격을 집요하게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으로서도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헤로나를 굴복시키지 못하면 바르셀로나도 포기해야 했고, 바르셀로나를 포기한다면 스페인 정복 전체를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프랑스군은 생시르(Laurent de Gouvion Saint-Cyr) 장군의 지휘 하에 1만8천의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세번째 포위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에 대항하는 6천도 안 되는 민병대 위주의 빈약한 헤로나 수비대의 지휘관은 그 사이 반란군에 가담했던 알바레스(Mariano Álvarez de Castro)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본격적인 포위전이 시작되기 직전, '누구든 항복이나 협상 이야기를 꺼내는 자는 처형한다'라고 선언할 정도로 비장한 각오였습니다.




(이 분이 알바레스 장군이십니다.)




1809년 5월부터 시작된 포위전에서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헤로나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무려 2만 발의 폭발탄과 6만발의 대포알(roundshot)을 쏘아댔고, 3개월 만인 8월에는 헤로나의 요새인 몬주익(Montjuïc)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바레스는 바르셀로나 때처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새를 빼앗긴 뒤에도 길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참호를 파며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4개월을 더 버틴 뒤, 전염병과 기아, 전투로 헤로나 시내의 사망자가 민간인 포함 1만을 넘어선 뒤, 자신도 병에 걸려 지휘가 불가능해지자 알바레스는 지휘권을 부하에게 넘겼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수비군은 즉각 항복 협상을 시작했고, 연인원 총 3만5천의 병력을 동원했다가 전염병으로 인해 자신들도 1만5천의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도 더 이상의 약탈을 금하는 조건으로 항복 협상을 체결했습니다.  1809년 12월, 포위전 시작 7개월 만의 일이었습니다.




(헤로나 포위전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알바레스 장군이 좀더... 이마가 넓게 그려졌네요.  실제로는 대머리셨나 봅니다.)




지휘관이었던 알바레스에 대한 프랑스군의 조치는 가혹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를 스페인군 대 프랑스군의 정규전으로 보지 않았고, 정당하고 적법한 스페인의 군주 조제프 국왕에 대한 무장 반란으로 보았습니다.  그 지휘관인 알바레스는 반란군의 수괴이자 법에 의한 통치에 대한 배신자였지요.  당시 전쟁에서 항복한 적장은 일종의 손님으로서 예우를 갖춰 대접해야 했는데, 알바레스는 당시 중병을 앓는 몸이었지만 일개 범죄자로 취급되어 재판을 위해 프랑스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달 만에 죽었습니다.  스페인 측에서는 그의 죽음이 프랑스 측의 독살이라고 주장했고, 프랑스 측에서는 단순 병사라고 주장했지요.  


실제로 당시의 정당한 국제 협약과 스페인 법에 따르면, 스페인의 적법한 국왕은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였습니다.  그에 저항했던 알바레스는 범죄자이자 반란군, 폭도가 맞는 것이었지요.  아마 알바레스가 그냥 당시의 적법한 국왕인 조제프를 섬겼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그런대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던 마드리드의 도스 데 마요 사건에서도, 프랑스군이 마드리드 시민들을 학살하던 그 순간 마드리드 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대부분의 스페인 정규군은 동맹군인 프랑스군이 적법한 명령에 따라 폭도들을 척살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딱 한 부대, 즉 몬텔레온 (Monteleón) 병영에 주둔하고 있던 포병 부대가 다오이스(Luis Daoíz de Torres)와 벨라르데(Pedro Velarde y Santillán)라는 두 열혈 대위의 지휘 하에 시민군과 함께 프랑스군에 대항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프랑스군에게 곧 제압되었고, 두 열혈 대위는 전투 중 폭도 중의 일부로 사살되고 말았지요.  기록에서 찾아보지는 못했으나, 그 대위들의 가족들도 범죄자의 가족으로서 무척 험한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드리드에서 질서를 유지하려는 프랑스군의 정당한 치안 활동에 반기를 들고 몬텔레온 병영에서 폭도들과 합류하여 반항한 폭도들의 괴수, 벨라르드 대위입니다.  물론 오늘날 스페인에 가서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으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특히 국가와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을 때 그를 바로 잡기 위해 현행법을 어겨가며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판단입니다.  확실한 것은 어느 나라든지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어렵게 산다는 것은 공통적인 일인가 봅니다.  그러나 그런 값진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스페인의 정체성과 긍지는 없었겠지요.  1929년 박람회를 위해 에스파냐 광장을 만들 때 각 지방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을 고를 때,  스페인에는 화려하고 영광스러웠던 역사가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48개의 지역 중 무려 5개 지역이 반-나폴레옹 항쟁을 선정한 것을 보면 그들의 희생에 대해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 분명합니다.


저같은 겁장이는 사회적으로 옮은 일을 한답시고 법을 어길 용기를 내기 어렵습니다.  저는 누구에게도, 특히 제 어린 아들에게는 그런 어려운 일을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제 아들을 포함한 다음 세대가 그런 어려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 사회를 제대로 만들어 놓고 싶습니다.  부디, 곧 있을 대선에서 여러분들이 올바른 대한민국을 위해 꼭 심사숙고 뒤 후회없는 한표를 행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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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른장미 2017.01.16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 1빠네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제가 독신이라면 법에 저항해서 나서겠지만 아무래도 가족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할 것 같아요
    현 정부가 출산율을 높이려는 목적에는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요?

  2. 최홍락 2017.01.16 0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등의 아쉬움과 더불어...

    뒤에 보이시는 현대적 건물은 "세비야 타워"라고 하며 스페인어로 "Torre Seville"이라고 하는 40층 건물입니다. 높이가 180미터로 세비야 전체를 넘어 안달루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입니다. 2015년에 완공이 되서 스페인 저축은행의 하나인 Cajasol의 본사로 쓰이고 있고요. 저 건물이 들어선 위치가 92년 세비야 엑스포가 개최된 위치이기도 하고요.

    우려하신 도시 미관 문제와 관련해서는 유네스코에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2012년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세비야 대성당과 알카사르를 포함시킬 것을 고려한 적이 있으며 이때 공사를 중지시키지 못했던것을 후회한다고는 하네요.

    참고로 유럽의 경우 오랫동안 내려저 온 전통적인 저층 건축물과 그를 통해 생긴 스카이라인을 보존하기 위한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고도제한을 강하게 유지해왔지만 예외 케이스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1973년 에펠탑(324m) 인근 동남쪽에 들어선 몽파르나스 타워(231m, 56층)가 좋은 예이지요. 파리나 다른 유럽 도시들이 고도제한을 유지한 원인은 미관 외에 약한 지반이라는 것도 있었지요. 그나마 라데팡스 지역은 상황이 괜찮은 편이고요.

    근래에는 마천루 열풍이 불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도제한이 서서히 완화되고 있는 추세에요. 최근 파리 시의회가 에펠탑 전망을 해친다는 여론에 밀려 9년여를 끌어온 높이 180m(42층) 규모의 트라이앵글 타워(가칭)에 대한 건축 허가를 최종 승인한 바 있습니다. 파리시가 경관에 대한 자존심을 접고 끝내 트라이앵글 타워를 선택한 주된 원인은 일자리 창출과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에 둔 것이었습니다. 총 5억5,500만달러가 투입되는 트라이앵글 타워를 지으면서 약 3,000개의 정규직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최신식 호텔과 7만㎡ 규모의 오피스 공간, 위락시설이 해외 투자자들을 유치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문화재 보호나 도시 미관을 위한 고도 제한 규제가 꼭 그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고도제한이 공항 주변이면 모를까, 특정한 상징물의 과시를 핑계로 고도제한을 묶으면 그만큼 난개발 및 스프롤 현상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이는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자연경관을 오히려 망칠 수 있지요. 심하면 도심 공동화로도 이어질 수 있기도 하고요. 대표적인 사례가 홍콩 카이탁 공항 시절에 고도 제한으로 인해 슬럼이 되어버린 구룡성채 지역이지요. (아비정전에서 Sin city로도 표현되지요.)

    • Nap 2017.01.16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소한 태클(?)을 걸자면, 구룡성채는 고도제한땜에 슬럼가가 된 게 아닙니다. 영국에 조차된 홍콩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받던 동네인데, 청이 망한 뒤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지네 영토임을 포기했죠. 그렇다고 영국령 홍콩이 관리한 것도 아니라서 사실상 삼합회의 영토가 되어버린 거죠. 홍콩정부는 카이탁 공항 주위에 고도제한을 걸었지만 구룡성채는 관리대상이 아니라 단속을 안 했고, 성채는 점점 위로(옆으로 확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올라가게 됩니다. 구룡성채는 오히려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아(혹은 바디지 못해) 슬럼화가 진행되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 최홍락 2017.01.16 1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그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홍콩 다른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낡고 개축과 증축 위주로 두서없이 되어있던 구룡 성채의 모습을 비교해보면서 공항을 빨리 이전시키고 고도제한을 풀어 고층 건물의 개발이 활성화되었다면 이런식의 난개발이 이뤄졌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 프로이센군 2017.01.16 1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여기 계신 분들에 비하면 많이 무식하지만, 정말 고도제한 걸린 지역이 점점 낙후되는건 체감이 되더군요.

  3. 유애경 2017.01.16 05: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태희는 아는데 김태희광장은...
    사진으로 보니 김태희가 에스파냐 광장에서 춤을 춘것으로 한국인 들에게 유명해 졌나 보죠?
    스페인 하면 투우랑 플라멩코 정도의 이미지 였는데 사진으로 보니 참 아름다운 곳이네요 .(역사공부도 포함해서)잘보고 갑니다~~(^-^)v

  4. 석공 2017.01.16 05: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7개 광역을 대표할 만한 그림을 그린다면 일제에 대한 항쟁이나 민주화항쟁을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는 광역단체가 몇 개나 될까 궁금하네요..^^*

  5. 정암 2017.01.16 1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행지 가서 대충 훅 둘러보고 사진만 찍으시는게 아니라 이렇게 꼼꼼하고 깊이있게 보시는 탁월한 지성이 부럽습니다.
    근데 옆에서 가족들이 그만 보고 다른데로 빨리 이동하자고 찡찡거리지 않았나요? ^^

  6. 뱀장수 2017.01.16 1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 선생님 저 5월 2일 봉기상 보셨는지요... 솔광장에서 왕궁가는 중간 놀이터 근처에 있는데^^ 천사가 쓰러지는 애국자들을 안아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죠.

    그나저나 아주 철저히 답사하고 가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7. 2017.01.16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nasica 2017.01.17 2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별 건 아니고 LG가 독립운동 자금도 대고, 그 대주주 가족들의 병역 이행 상태도 다른 재벌 대비 매우 양호하고, 그래서 그렇습니다.

  8. yoon슬 2017.01.17 1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보고싶군요~~^^

  9. 샤르빌 2017.01.18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이 시기에도 힘이 있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많이들 말하더군요..
    실제로는 자신의 희생도 각오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이 바꾸죠..

  10. 엘쥥 2017.01.24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교롭게 김태희 광장이라는 이명을 만든 CF도 LG의 사이언 CF...........이것은 과학...

  11. 요롱 2017.01.25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nasica님 글을 매우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이 블로그를 드나든게 아마도 2008년부터인 것 같은데, 9년 사이 처음으로 댓글 달아봅니다. 뱀장수님 말씀대로 솔 광장에 그런 역사적 상징물이 있었군요. 미리 알았으면 보고 가는 건데 아쉽네요. 저는 5년 전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했었는데,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그때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이, 솔 광장을 걷고 있는데 머리 희끗희끗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면서 외국인들에게 영문으로 된 팜플렛을 나눠 주더라고요. 그 중에는 카탈루냐 깃발을 든 사람도 몇몇 있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프랑코 독재를 비판하면서 그 독재의 기억과 유산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를 기억 투쟁의 차원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위를 하는 분에게 어떻게 시위를 하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자기네들은 프랑코 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이나 가족으로, 솔 광장 앞에 있는 건물이 우리로 치면 중앙정보부 또는 보안사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하에서 고문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예상은 했지만 스페인에서 프랑코는 민감한 문제이긴 하더라고요. 예전에 프라하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스페인 젊은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 대통령이 "strong man's daughter"라고 하니까,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면서 프랑코야말로 스패니시 히틀러이자 독재자라고 일갈을 한 것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2017.01.08 21:15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알함브라 궁전이었는데, 실제로 본 알함브라는 그 기대치를 100%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알함브라는 약 700년 간 이슬람의 통치를 받았던 스페인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인데, 그 이름은 아랍어인 알-함라(Al-Ḥamra), 영어로 직역하면 The Red 정도로 번역됩니다.  이 궁전은 그냥 연한 황갈색이고, 주변 토양이 붉기는 하지만 이름의 기원은 이 요새를 약 9세기 경 이 장소에 맨 처음 세운 아랍 족장의 별명이 알-함라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알함브라는 10년 20년 사이에 지어진 하나의 건물이 아니고, 여러 채의 궁전과 요새, 정원이 수세기에 9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어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더 좋은 다른 글들이 많을 것이니, 여기서는 두어 가지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랍식 궁전에 분수와 오렌지 나무가 많은 것은, 이슬람 믿음에 '천국에는 샘과 미녀와 과실이 열리는 나무들이 있다'라는 말 때문에 그렇답니다.  정말 지상에 만들어 놓은 낙원이지요.)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슬람 통치 기간인 8세기~15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아랍인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정복자는 소수였고, 피지배인인 기존 스페인 주민들은 여전히 그대로 살고 있었지요.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고, 또 그대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은 세금만 내면 정복민들이 무슨 종교를 가지든 용납해주는, 꽤 너그러운 종교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슬람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면세 혜택을 줄이기 위해 개종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뜻 밖의 혜택을 받은 일파가 바로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원수들'이라는 인식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신봉하던 유럽 사회에서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었는데, 이슬람이 장악한 스페인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비야나 그라나다 등 이슬람 주요 거점 도시를 가면 꼭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거리가 있고, 세고비아 같은 도시는 유태인들 덕분에 흥하다가 기독교 세력이 다시 세고비아를 탈환한 뒤 유태인 사회가 붕괴되면서 도시 전체가 경제적 활력을 잃기도 했습니다.





(알함브라는 이렇게 정원, 요새, 아랍 궁전, 카톨릭 수도원, 그리고 르네상스식으로 새로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 등이 어우러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그 중의 꽃은 물론 아랍식 궁전인 나스르 궁전입니다.)




정복자 아랍인들이 계속 본국인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활발히 내왕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래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원정을 보냈던 아랍 왕조도 본국에서의 정변으로 교체되었고,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도 얼마가지 않아 독자적 왕국을 세우고 칼리프를 선언하면서 오히려 모로코 본국과는 경쟁 관계에 접어 들었습니다.  스페인의 코르도바 왕조의 왕족들도 자신들의 고향이 아라비아나 북아프리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간 스페인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자신들의 고향을 스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왕조에 충성하던 이슬람 교인들도 다 아랍 혈통은 아니었고, 그 중 상당수는 스페인 혈통의 이슬람인이었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이 700년 넘게, 반올림해서 천년간 스페인을 지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슬람 세력끼리의 전쟁도 많았고,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전쟁도 많았으며, 이슬람과 기독교가 합세하여 다른 이슬람 또는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일도 많았습니다.  가령 스페인의 전설적 영웅 엘 시드(El Cid)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기독교 왕을 위해 싸우다가 정치적으로 불리해지자 사라고사의 이슬람 왕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이슬람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용병이 될 정도였지요.  


기독교 세력이 진행한 스페인 재정복 전쟁, 즉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이슬람 세력의 분열 덕분에 확실한 성과를 차곡차곡 쌓았고, 13세기가 되면 어느덧 남부 그라나다 왕국을 빼고는 이베리아 반도는 대부분 기독교 세력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정복된 영토에서 차출할 수 있는 병력과 자원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라나다 왕국, 정확하게는 그라나다 토후국(Emirate of Granada)의 운명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남쪽에 찌그러진 그라나다 왕국에게, 저렇게 커다란 키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1482년부터 10년 간 이어진 그라나다 전쟁의 결과, 이슬람 에미르(Emir)인 무함마드 12세(Muhammad XII)는 알함브라 궁전을 포함한 그라나다 왕국 전체를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에게 넘기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걸린 67개 항복 조건 중 주요 내용은, 이슬람 교인들은 계속 그 종교와 사유 재산을 유지할 수 있고, 기존의 법과 질서에 따른 보호를 받게 되며, 또 원할 경우 10%의 통행세를 내면 재산을 모두 가지고 북아프리카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도, 강요에 의해 다시 기독교로 개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무함마드 12세 등 왕족들에게는 그라나다 바로 남쪽의 네바다 산맥 너머 지중해 인근 지역에 적절한 영지가 주어져 거기서 살게 되었지요.





(무함마드 12세가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에게 항복하는 장면입니다.  배경에 알함브라 궁전이 보입니다.)




무함마드 12세는 최후까지 항전할 용기는 없었던 망한 나라의 군주로서 용기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확실히 대단한 여장부였던 모양입니다.  원래 당시 항복할 때의 의례적 절차에 따르면, 패자는 승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항복하는 도시의 열쇠를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 12세의 어머니가 '절대 그런 치욕만은 참을 수 없다'라고 강경하게 버틴 덕분에 무함마드 12세는 그냥 열쇠만 바치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레온(Leon)의 주교가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로 내려옵니다.  또 당시 현장에는 인도로의 서쪽 항해 계획에 대해 승인을 받으려 이사벨라 여왕을 쫓아다니던 콜럼부스도 있었다고 합니다.  


알함브라의 항복에 얽힌 이야기 그 다음은 전설입니다.  무함마드 12세가 그에게 배정된 영지로 식솔들과 함께 그라나다 남쪽으로 넘어가는 어느 고개 정상에 이르자, 무함마드 12세는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두번 다시 못 볼, 그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그렇게 그의 눈에 들어온 궁전과 그라나다 시의 애틋한 모습에 그는 끝내 탄식을 뱉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장부이던 그의 어머니가, 요즘 같으면 남녀 성차별이라고 지탄받을 그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네가 남자답게 지키지 못한 것을 돌아다 보며 이젠 여자처럼 우는거냐 ?"







무함마드 12세가 이렇게 알함브라를 돌아본 고갯길은 Suspiro del Moro (무어인의 탄식)이라는 로맨틱한 이름이 붙였졌습니다.  이번에 알함브라에 갈 때, 일부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며 그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냥 도로 위의 한 표지판만 있더군요.  차를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고갯길에서 일부러 천천히 차를 몰며 바라다 보았지만 시야에 알함브라가 분명히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아쉽더군요.






이 무함마드 12세는 한동안 네바다 산맥 남쪽에서 살다가, 결국 당시 모로코를 통치하던 마라니드 왕조에게 탄원한 뒤 모로코로 넘어가 지금도 관광도시로 유명한 페스(Fes)에서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약 100년 뒤, 그의 자손을 페스에서 만난 어떤 스페인 여행가는 그 자손들은 빈곤 속에 살고 있더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쓸쓸한 전설 속에 탈환된 알함브라 궁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나 세비야의 알카사르 등 이슬람 궁전들을 접한 스페인 군주들은 이슬람 건축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은 이슬람 양식으로 자신의 궁정을 장식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발전된 이슬람 양식을 무데하르(Mudéjar) 양식이라고 합니다.  원래 무데하르는 아랍어로 '길들여진'이라는 뜻인데, 이슬람 축출 이후로도 스페인에 남아 이슬람 신앙을 유지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 매력에 흠뻑 빠진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궁전이 되었고, 그들은 아랍 양식을 살리면서도 일부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보수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 벽에 '알라 외에 승자는 없다' 등 근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볼 때 불온한 글귀가 벽면에 새겨진 방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그대로 놓아두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아랍어를 읽을 수 없었으니 상관없을 수도 있었겠네요.  콜럼버스가 마침내 신대륙으로의 항해를 승인 받은 것도 알함브라 궁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데하르 양식이 발전한 것은 대항해 시대로 스페인에 금은이 쏟아져 들어올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스페인의 국운이 점점 몰락하면서, 옛 이슬람 왕궁들은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고, 알함브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는 폐허가 되어 그 아름다운 파티오(patio, 건물로 둘러싸인 안마당)들에는 온갖 쓰레기더미가 가득 쌓이게 되었고, 노숙자들의 쉼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알함브라의 벽 아래에서의 판당고' 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작가는 나폴레옹 직속의 지도 제작가이자 화가 바클레르-달브 Bacler d’Albe 입니다.  아마 달브가 이때는 세바스티아니의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나 봅니다.)




그런 알함브라가 다시 빛을 본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덕분이었습니다.  1810년 1월 28일, 본격적으로 스페인을 침공하던 프랑스군 중 일부는 마침내 그라나다 시까지 몰아닥쳤고, 그라나다 시는 2년간 프랑스군 점령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프랑스군 부대를 지휘하던 것은 오라스 세바스티아니(Horace Sebastiani) 장군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원래 오스만 투르크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꽤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외교관으로서는 능력있는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군 지휘관으로서는 영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교양있는 외교관에 가까웠던 이 사람이 그라나다에 온 것이 알함브라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점령군 지휘관이 아니었지만, 황폐화되어있던 알함브라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대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알함브라를 프랑스군 사령부로 삼고 내부를 청소했으며, 알함브라의 일부인 알카사바(Alcazaba) 요새를 보수했습니다.  그렇다고 세바스티아니가 문화재를 보존하려는 문화 애호가만은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를 군사 요새화하기 위해 일부 건물을 부수고 개조하기도 했으니까요.  게다가 알함브라 내에 자리잡고 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convento de San Francisco)은 그 내부 장식물은 물론 청동으로 된 종들까지 모두 징발당하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알함브라 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나스르 궁전(Palacios Nazaries)은 완전히 보수되어 말끔히 청소가 되어, 다시 그 분수에는 물이 흘렀고 정원에는 꽃이 심겨졌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이 근 200년 만에 다시 아름다움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에 좋은 일만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1812년 9월, 전세 악화로 프랑스군이 그라나다에서 철수하게 되자, 이들은 방어 진지를 고스란히 스페인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면서 알함브라의 일부 탑을 폭파한 것입니다.  바로 다음날 그라나다에 진입한 스페인군은 알함브라 궁전 내의 감옥에 갇혔던 스페인 포로들을 석방했고, 대신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 병사들을 쳐넣었습니다.  이 스페인군의 지휘관인 바예스테로스(Francisco Ballesteros) 장군은 이 프랑스군 포로들에게 노역을 시켜 프랑스군이 폭파한 잔해를 치우게 했습니다.  이후 알함브라는 과거 스페인의 황금 시대를 상기시키는 역사적 현장으로 관심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인과응보였는지 역사의 블랙 유머인지 모르겠으나, 징발당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의 종들은 1818년 프랑스군으로부터 노획했던 24파운드짜리 대포를 녹여서 새로 주조되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를 훼손했다고 비난하지만, 19세기에 알함브라를 여행하며 그 존재와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던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은 프랑스군 덕분에 알함브라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썼던 것입니다.





(포도주의 탑 Torre del vino 꼭대기에서 바라본 네바다 산맥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터도 아주 좋더군요.  부동산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정말 아름다왔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은 아닙니다.  오른쪽의 창문이 많은 유럽식 건물은 후세에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입니다.  나머지 왼쪽에서 중앙,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긴 건물이 나스르 궁전입니다.)



Source :  http://revistadehistoria.es/la-alhambra-tras-la-ocupacion-napoleonica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XII_of_Granada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Granada_(1491)

https://en.wikipedia.org/wiki/Alhambra

https://en.wikipedia.org/wiki/Granada_War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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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홍락 2017.01.08 2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태인 얘기가 나오길래 알함브라 칙령 얘기도 나오겠거니 했는데 안나오네요.

  2. 재영 2017.01.09 1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를로스5세라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를 일컫는가요? 당대의 금수저인데 뭘 못했겠습니까만은 마지막 사진에 그 양반이 증축한 건물을 보니 솔직히 기존 궁전과는 형태가 아니라 부피(볼륨감)에서 약간 부조화스런것 같습니다. 물론 개인간에 견해차는 있을 수 있겠죠...^^;;

    • 박종필 2017.01.09 2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를 5세가 증축한 다음에 후회했다고 하네요.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던 것을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바꿔버렸네' 하고 후회했다네요.

    • 최홍락 2017.01.10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증축한 부분(카를 5세 궁전)조차 2014년에 갔을때는 보존 공사 중이라 내부가 대부분 아시바로 도배가 되어 있어 더 흉물이 되버린 듯합니다.

  3. 박종필 2017.01.09 2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때 인류 문명권 중 가장 발달된 문명을 자랑했고, 저렇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긴 이슬람권이 요즘 불안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것을 보면 참 역사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고민스러워집니다. ㅠㅠㅠ
    (물론 이슬람권도 뭉뚱그려 하나로 통칭할 순 없겠지만요.)

  4. 석공 2017.01.10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연스럽게 나폴레옹 이야기로 넘어가서~~ 살짝 기대를 했습니다. ^^*

  5. 프로이센군 2017.01.13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살면서 꼭 가보고 싶은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알함브라 궁전입니다! 이베리아의 이슬람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궁전에서 옛 무어인들의 영광과 몰락을 모두 느껴보고 싶네요. 햇빛을 받으면 궁전이 붉게 물들어 상당히 아름답다는데 Nasica님, 정말 그렇던가요??

  6. 청명 2017.05.09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작년 겨울에 가족여행으로 갔던 알함브라 궁의
    아름답던 모습이 떠오르네요ᆞ
    저흰 단체 관광이라 아침 일찍 갔었는데
    키높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우리 일행의 길다란 그림자가 펼쳐진 장면이나
    마악 동이 틀 무렵이라 아들들과 성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발그래한 얼굴로 나왔던거ᆞᆞ
    후궁들의 방 천장에 에머랄드색으로 빛나던 돌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ᆞ
    나시카님 덕분에 알함브라 궁과 무어인들의
    연원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