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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제나우7

휴전 (5) - 차가운 남자의 함박웃음 휴전이 되자 바클레이는 즉각 오데르 강을 넘어 후퇴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런데도 바클레이는 재빨리 슈바이트니츠에서 더 서쪽인 상(上) 슐레지엔의 슈트렐렌(Strehlen, 폴란드어로는 스첼린 Strzelin)으로 이동하려 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휴전까지 되었는데 뭐가 무서워 자꾸 도망치려고 드냐고 거세게 항의했지만, 바클레이는 절대 나폴레옹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휴전은 시간 벌기용 위장일 뿐이고, 나폴레옹이 그 사이에 오데르 강 상류쪽으로 행군하여 러시아군의 퇴로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클레이가 워낙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알렉산드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모두 후퇴에 동의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정식 조약이 서명되기도 전인 6월 3일 즉각 부대를 동쪽으로 행군시.. 2023. 7. 31.
휴전 (3) -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 러시아 공사삼일! 이 때 즈음 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습니다. 바클레이로 대변되는 러시아군은 오데르 강을 넘어 폴란드로 후퇴하고 싶어했으나 프로이센놈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지나 다름 없는 슈바이트니츠로 끌려간다는 불만이 있었고, 그나이제나우로 대변되는 프로이센군은 온갖 핑계를 대고 폴란드로 후퇴하려는 러시아군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나폴레옹의 휴전 요구에 대해서 러시아나 프로이센이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지요. 애초에 연합군에게 종전이 아닌 임시 휴전은 별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2연패를 당한 지금,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만족할 조건으로 나폴레옹이 종전 협정을 맺을 가능성은 전혀.. 2023. 7. 17.
바우첸을 향하여 (9) - 바우첸 방어선 설계 (캐쓰카트 백작입니다. 귀족 집안에 태어나 이튼 스쿨에서 교육받은 전형적인 영국 귀족인데 1771년 그가 16살일 때 러시아 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상트 페체르부르그에 가면서 러시아와 연을 맺었습니다. 그는 불과 26세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작위를 물려받은 뒤,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군 장교직을 구매하여 군에 투신하여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1807년 제2차 코펜하겐 원정에 육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덴마크의 항복을 받아낸 공로로 자작이 된 그는 1812년 4성 장군으로 승진하면서 주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1814년까지 짜르의 사령부에서 행동을 같이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폐위되면서 전쟁이 끝나자 그는 1814년 백작 작위를 받았고, 그런 뒤에도 1820년까지 주러시아 대사로서 상트 페체르.. 2023. 2. 6.
바우첸을 향하여 (7) - 비트겐슈타인의 결정 밀로라도비치가 프랑스군의 기습 도하 작전을 막지 못하고 쩔쩔 매던 5월 9일, 프로이센군의 총사령관은 블뤼허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부상을 입고 있었던 블뤼허는 이 날 특히 상태가 좋지 않아 병석에 드러누웠고, 지휘권을 다른 사람에게 이양해야 했습니다. 상식적인 관례에 따른다면 프로이센 야전군 내의 서열 2위인 요크 대공이 임시 사령관이 되어야 했는데, 뜻밖에도 일개 참모에 불과한 그나이제나우가 지휘권을 이양받았습니다. 이는 프로이센군 위아래 모두가 블뤼허의 모든 작전은 어차피 그나이제나우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요크 대공 본인도 새파랗게 아랫것인 그나이제나우로부터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무척이나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2023. 1. 23.
바우첸을 향하여 (3) - 샤른호스트의 빈 자리 5월 6일 아침, 나폴레옹은 스파이들로부터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이 각각 따로 엘베 강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특히 프로이센은 북쪽의 마이센(Meissen)으로 향하고 러시아군은 예상대로 남쪽의 드레스덴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나폴레옹은 자신이 토르가우로 네의 군단을 보낸 것에 프로이센군이 베를린이 위협받고 있다고 겁을 집어먹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기분 좋게 그 날 저녁 뷔르젠(Wurzen)까지 도착했지만, 프로이센군 중 일부 1만2천 정도만 마이센으로 갔을 뿐 나머지는 모두 러시아군을 따라 드레스덴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에 놀란 나폴레옹은 정확한 정보를 얻기를 원했고, 프랑스군의 진격은 또 잠시 멈춰야 했습니다. 혹시나 이것들이 결별하지 않으면 어떡.. 2022. 12. 26.
상책과 하책 - 두 천재 참모의 작전안 나폴레옹이 잘러 강 서쪽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프로이센군 수뇌부를 걱정시켰다기 보다는 흥분과 전율을 넘어 기대감에 차오르게 했습니다. 가장 흥분한 사람은 블뤼허 본인이었는데, 사실 블뤼허는 이 희대의 괴물과 어떻게 싸워야 하겠다는 작전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프로이센군의 모든 작전은 블뤼허가 아니라 그의 참모들인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도맡아 짜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렇다고 블뤼허가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샤른호스트는 블뤼허를 매우 존중하고 있었는데, 블뤼허의 진짜 가치는 비상한 머리로 기가 막힌 작전안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적과의 싸움에 임했을 때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부하들에게 용기와 투지를 불어넣고 사기를 고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용기와 투지가 넘쳐나는 프로.. 2022. 8. 8.
최초의 민족 전쟁? - "나의 국민에게"(An mein Volk) 먼저, 언제나 문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본인이었습니다. 러시아와의 동맹 체결을 위해 2월 26일 칼리쉬로 떠나면서 샤른호스트는 한시가 급한 프로이센군 병력 증강안을 세세히 마련해두었습니다. 그 요지는 대국민 호소에 따른 국민방위군(landwehr)의 대대적인 증강이었습니다. 그러나 샤른호스트가 칼리쉬로 떠나자마자 그런 모병 움직임은 딱 멈추고 말았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나폴레옹에 대한 선전포고를 최대한 늦추고 싶어했고, 또 지엄하신 호헨촐레른 왕가의 수호를 귀족들이 아닌 평민들에게 호소하여 국민방위군을 모집한다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이런 마음가짐은 재빠른 병력 증강을 위해서는 프랑스식으로 국민군을 모병해야 한다는 개혁파 관료들의 염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습.. 2022.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