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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 개발 이야기 (14) - 19세기에는 파동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WW2 중 제대로 된 공대공 레이더를 개발하려던 영국 공군의 치열한 노력은 결국 cavity magnetron이라는 소자를 만들어 내면서 결실을 맺음. 이 캐버티 마그네트론 덕분에 연합군은 전쟁 내내 훨씬 우수한 레이더로 독일과 일본을 제압. 캐버티 마그네트론 덕분에 연합군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자신만 야시경을 가진 것과 같은 우월함을 누렸음. 그런데 이 캐버티 마그네트론 없이도 영국은 물론 독일과 일본도 레이더를 만들어 잘 운용했었음. 캐버티 마그네트론 없이 어떻게 수십 MHz에 이르는 주파수를 만들어냈을까? 그 이야기까지 가려면 먼저 18세기 중반 독일 포메른 지방으로 가야함. Ewald Georg von Kleist라는 카톨릭 수사가 있었는데, 전기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가지 실험을 하고.. 2022. 12. 29.
바우첸을 향하여 (3) - 샤른호스트의 빈 자리 5월 6일 아침, 나폴레옹은 스파이들로부터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이 각각 따로 엘베 강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특히 프로이센은 북쪽의 마이센(Meissen)으로 향하고 러시아군은 예상대로 남쪽의 드레스덴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나폴레옹은 자신이 토르가우로 네의 군단을 보낸 것에 프로이센군이 베를린이 위협받고 있다고 겁을 집어먹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기분 좋게 그 날 저녁 뷔르젠(Wurzen)까지 도착했지만, 프로이센군 중 일부 1만2천 정도만 마이센으로 갔을 뿐 나머지는 모두 러시아군을 따라 드레스덴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에 놀란 나폴레옹은 정확한 정보를 얻기를 원했고, 프랑스군의 진격은 또 잠시 멈춰야 했습니다. 혹시나 이것들이 결별하지 않으면 어떡.. 2022. 12. 26.
레이더 개발 이야기 (13) - 야간 전투기의 다양한 꼼수 보웬이 만들던 공대공 레이더 AI (Airborne Interception) Mark II는 여태까지 기술했듯이 많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젠 정말 곧 전쟁이 터진다고 판단한 영국 국방부는 그 미완성인 AI Mk II를 생산하여 30대의 Bristol Blenheim (사진1)에 장착하라는 주문을 냄. 브리스톨 블렌하임은 원래 민간 여객기로 1935년에 개발된 것이었는데, 바로 작년에 복엽 폭격기인 Handley Page Heyford를 최신예 폭격기랍시고 도입했던 영국 공군은 그 단엽기에 전신을 듀랄루민으로 만든 멋진 고속 쌍발 여객기 블렌하임에 홀딱 넘어가서 2년 만에 폭격기로 개조하여 도입했던 기종. 폭격기로서도 그저 그런 성능이었지만 그래도 쌍발 엔진에 장거리 전투반경을 가지.. 2022. 12. 22.
바우첸을 향하여 (2) - 민병대의 의미 뤼첸에서 후퇴할 때 드레스덴으로 향한 러시아군과는 달리 프로이센군은 마이센으로 향했으나, 정작 프로이센 국왕은 물론 프로이센군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샤른호스트는 러시아군과 함께 드레스덴으로 향했습니다. 이는 프로이센 수뇌부가 당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뤼첸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소극적으로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이 전쟁의 주역은 러시아군이었고 프로이센군은 러시아군을 보조하는 역할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베를린을 지킨답시고 러시아군과 갈라선다면 프로이센은 베를린 뿐만 아니라 프로이센 전체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샤른호스트는 불안해하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다독거리며 엄청난 분량의 서류를 처리하며 프로이센군의 재편성에 돌입했습니다. 뤼첸 전투에서 잃은 병력을 보.. 2022. 12. 19.
미군 탱크병이 먹는 제육덮밥의 정체는? - Minute Rice 이야기 저는 군대 밥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서 인터넷에서 관련 내용을 종종 찾아봅니다. 오늘 글은 Armour and Company라는 이름의 미국 식품 회사에서 생산한 기갑 부대용 5인 1세트의 C ration 광고 포스터에 나온 메뉴 중 하나에 대한 것입니다. (Armour and Company라고 하니까 기갑 부대 전용의 특별한 전투식량만 생산하는 회사처럼 오해되기 쉽습니다만, 아머 & 컴퍼니는 시카고에 근거를 둔 대형 육류회사 이름입니다. Philip Danforth Armour를 중심으로 한 아머 형제들이 1867년 설립한 회사로서, 남북 전쟁 이후 철도와 전신이 미국 서부 개발을 촉진하면서 성장한 대표적인 회사 중 하나입니다. 위 사진은 1910년에 찍은 시카고의 아머 & 컴퍼니 사의 전경입니다.) (.. 2022. 12. 15.
바우첸을 향하여 (1) - 나폴레옹의 꽃놀이패 아무리 잘 싸운 뒤에 수행된 전략적 후퇴이고 아무리 추격자가 없다고 해도, 후퇴하는 군대의 사기가 드높다면 매우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뤼첸 전투로부터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던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잘 싸운 뒤에 하는 후퇴라서 두 나라 군대는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잘 싸웠는데 왜 후퇴를 하는 것이냐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 남탓을 하기 마련입니다. 보통은 사회의 소수 약자가 그런 비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습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유태인 탓을 했고 1812년 후퇴하던 러시아군에서는 러시아군 내의 발트 연안 독일계 장교들 탓을 했지요. 이 경우에는 비난 대상을 찾는 것이 아주.. 2022. 12. 12.
레이더 개발 이야기 (12) - 근시도 아니고 원시도 아닌 레이더 레이더의 전파가 40 MHz냐 160 MHz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 근데 이런 단위는 모두 주파수의 단위. 전파의 파동 주파수는 대체 무슨 장치로 만들어냈을까? 압전(Piezoelectricity) 효과는 이미 18세기 후반에 발견되었으나, 이걸 실험으로 입증해보인 것은 바로 퀴리 부인의 남편인 Pierre Curie과 그의 형 Jacques Curie. (윗 사진이 퀴리 형제가 황옥, 수정, 로쉘 소금 결정 등등의 다양한 결정체로 그런 실험을 수행했던 장치) 압전 효과는 한동안 신기한 과학 현상으로만 알려졌으나 이게 실제 활용에 사용된 것은 역시나 전쟁 때문. WW1 동안 잠수함 탐지 방법을 연구하던 프랑스 물리학자 Paul Langevin이 active sonar 개발에 수정의 압전 효과를 이용한 변.. 2022. 12. 8.
뤼첸 전투 (14) - 나폴레옹의 새 그림 5월 2일 밤, 블뤼허의 프로이센 기병대가 4개 마을의 프랑스군 진지를 야습했을 때만 해도 나폴레옹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 10시가 넘자, 나폴레옹은 좀 더 안전한 후방 뤼첸으로 돌아가 숙소를 정했습니다. 이건 특별히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현장은 거의 언제나 피범벅에 시신이 즐비하고 죽어가는 부상병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했기 때문에 거기서 총사령관이 숙소를 정하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사령관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할 일이 매우 많았는데, 대부분 지도와 문서 작업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는 책상과 촛불이 꼭 필요했고, 따라서 호화롭지는 않더라도 벽과 지붕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4개 마을 전투를 그로스괴르쉔 전투라고 부르지 않고 뤼첸 전투라고 부르는 이유도 나폴레옹의 숙소와 상.. 2022. 12. 5.
레이더 개발 이야기 (11) - 항공기 탑재용 레이더의 난관들 1935년 로열 에어포스의 레이더 연구팀이 발족되면서, 그 팀장인 왓슨-왓(Robert Watson-Watt)이 직접 뽑은 5명의 연구원 중 한명이 흔히 'Taffy' (웨일즈 사람이라는 뜻인데 다소 멸칭으로 쓰임, 한국어 느낌으로는 경상도 문딩이 전라도 하와이 정도의 어감)라고 불렸던 보웬(Edward George Bowen, 아래 사진). 당시 24세의 새파란 젊은이였던 보웬은 바로 작년에 박사 학위를 딴 상태였는데, 박사 학위 과정에서 전파 방향 탐지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다 왓슨-왓의 눈에 들었던 것. 지상 레이더, 즉 Chain Home 시스템 연구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젊은 보웬은 곧 항공기에 장착할 레이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항공 레이더 연구팀으로 옮겨 거기에 매진. 그가 주도한 항공.. 2022. 12. 1.
뤼첸 전투 (13) - 혼란 속의 퇴각 연합군의 후퇴 결정이 늦게 내려졌기 때문에 당연히 실제 후퇴도 꽤 늦게 이루어졌습니다. 군대가 후퇴를 시작하려면 의외로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립니다. 총사령관이 결정을 내린 뒤에도 정식으로 명령이 구두 또는 서면으로 일선 대대장들에게까지 전달되는데까지 시간이 걸렸고, 천막이나 탄약, 솥단지 등의 짐을 싸는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가장 시간이 걸리고 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후퇴 계획의 작성이었습니다. 어느 부대가 어느 경로를 통해 어디로 후퇴하느냐도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후방 엄호 임무에 어느 부대를 배치하느냐 하는 결정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후위 임무에 이번 뤼첸 전투에 전혀 참전하지 않고 자이츠(Zeits)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밀로라도비치의 군단을 배치했습니다.. 2022. 11. 28.
레이더 개발 이야기 (10) - 대공포 레이더의 공헌 방공포용 레이더는 그 부족한 성능과 기능에도 불구하고 공군의 항공기 탑재용 레이더 개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 가장 큰 기여는 안테나의 길이. 거대한 구조물로 만들어진 공군의 Chain Home 레이더와는 달리 방공포용 안테나는 적 폭격기의 방향 탐지를 위해 송수신 안테나를 포가 위에 올려놓고 회전시켜 가며 써야 했으므로 안테나가 비교적 짧아야 했음. 이를 위해서 육군 연구실인 Army Cell은 1930년대 중반에 개발된 NT57D 진공관(사진1)을 사용하여 45MHz의 주파수를 만들어냄. 이 NT57D 진공관은 영국내 제조업체들에게조차 1938년에야 그 존재가 공개된, 당시로서는 가장 최신인 기밀 전자부품. 그리고 그 기술의 핵심은 텅스텐 전극과 함께... 외외로 밀봉 기술. 진공관이 제 성능과 기능.. 2022. 11. 24.
뤼첸 전투 (12) - 프로이센의 분노와 아쉬움 양측이 도합 2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던 뤼첸 전투는 당연히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며 후세의 역사가들이 나름대로 추측한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프랑스군과 연합군이 각각 얼마씩의 병력을 동원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기록은 없을 정도입니다. 프랑스측은 약 1만5천, 혹은 2만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고 하고, 연합군측은 그보다는 적은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입니다만, 역사가에 따라 연합군의 피해가 더 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참고로 비트겐슈타인은 공식 보고서에서 프랑스군의 피해는 1만5천, 연합군의 피해는 1만으로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연합군 진영에 있던 영국군 장교 캠벨(Neil Campbel.. 2022.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