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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보로디노 에필로그 (3) - 쿠투조프, 러시아를 구원하다

by nasica 2020. 11. 2.


비아젬스키 대공의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군 대부분이 전설 속의 영웅 나폴레옹을 상대로 잘 싸웠다고 스스로 우쭐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젊은 장교들과 최전선에 서지 않았던 부대들의 병사들 상당수가 정말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러시아군은 괴멸상태였습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대략 3만8천에서 5만8천 정도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 병력을 12만으로 추정하고 약 4만5천의 병력이 전사나 부상으로 손실되었다고 가정하면 37.5%의 손실을 낸 셈입니다.  보통 당시 전투에서 승자의 손실률이 10%, 패자는 20%였던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참패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정말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던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손실률은 각각 14%와 28%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은 시간이 갈 수록 점점 사상률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바로 직전의 대규모 전투이자 양측이 유례없이 높은 사상률을 냈던 바그람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의 손실률도 28%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공식적 첫 패배인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35%의 손실을 냈습니다.

보통 부대가 전투에 참전했다가 몇 %의 전력 손실을 입으면 전멸이라고 표현하느냐에 대해서는 30%부터 80%까지 다양한 수치가 주장됩니다만, 전멸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병력을 상실했느냐 보다는 패배 뒤에도 단위 부대로서의 일체성과 기능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입니다.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14%의 손실만을 입고도 사실상 궤멸되어 제대로 된 재집결 및 반격을 못하고 저 멀리 동프로이센까지 패주하기만 했습니다.  그에 비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35%의 손실률로 패배한 프랑스군은 질서있는 퇴각을 한 뒤 재집결하여 결국 바그람에서 승리를 얻어냈습니다.  

전쟁은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가혹한 것인데, 특히 패배했을 경우 병사들을 규합해줄 정신적 이데올로기나 사명감, 도덕심 등이 없다면 비교적 작은 손실에도 부대가 궤멸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 제1,2차 이탈리아 침공전 때의 오스트리아군이 그랬고,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의 프로이센군이 그랬습니다.  심지어 존 무어 경의 영국군 같은 경우는 아무런 전투 없이도 춥고 배고프다는 이유만으로도 후퇴길에 부대가 거의 와해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지요.  그에 비해 혁명정신과 위대한 프랑스, 영광과 헌신 따위의 잡다한 교육을 나폴레옹이 정비한 학교 교육에서 받은데다 레종 도뇌르 등의 훈장과 진급이라는 당근으로 고무된 프랑스군 병사들은 아직 징집 연령이 되지도 않았으나 끌려나온 어린 병사들까지 패배를 비교적 잘 견뎌냈습니다.

러시아군은 어땠을까요 ?  대부분 농노 출신 문맹인데다 장교들로부터 가축 취급을 당했던 러시아군은 누가 봐도 프랑스군보다는 영국군 쪽에 가까운 군대였습니다.  그런 군대가 40%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으니 붕괴되지 않는다면 정말 희한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진짜 제대로 된 지휘관은 이런 상황에서도 군을 추스리고 규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쿠투조프가 바로 그 어려운 일을 해닙니다.

 

(가난한 러시아 농노의 모습입니다.  짜르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 해방령을 선언하던 1861년 경의 사진입니다.)



쿠투조프는 처음부터 나폴레옹과 보로디노에서 이판사판 끝장을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물론 싸웠는데 어쩌다보니 대승을 거두면 정말 좋은 일이겠으나, 그렇게 운수대통을 바라는 것이 Plan A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고 이건 무의미한 전투이니 싸우지 않고 후퇴하겠다는 전법도 쓸 수 없었습니다.  바로 전임자인 바클레이가 그러다가 쫓겨난 것이었으니까요.  좋든 싫든 득이 되든 실이 되든 쿠투조프는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보로디노에서 정말 피가 튀기게 한판 거하게 싸웠으니 쿠투조프는 당당히(?)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퇴를 해야지 패주를 해서는 곤란했는데, 이때 상황은 러시아군이 극심한 피해로 인해 붕괴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병력의 40% 정도를 잃은 것 자체도 큰 문제였습니다만, 상실한 병력 대부분이 정예 부대라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도 온갖 어중이떠중이를 긁어모아 급조한 군대였지만, 러시아군도 원래의 정규군에 농민병들과 코사크 기병 등 오합지졸 비정규군을 잔뜩 섞어넣은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 희생된 것은 대부분 제1선 정예부대였고 장교들 중에서도 고위 장교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원래 1,300명 수준이던 쉬르반스크(Shirvansk) 연대의 경우 9월 8일 새벽 3시에 인원 점검을 해보니 사병 96명에 위관급 장교 3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보론초프(Vorontsov) 장군이 지휘하던 사단의 경우 전투 개시는 4천명의 사병과 18명의 영관급 장교로 시작했는데, 전투 후 인원 점검 때는 사병 3백명이, 영관급 장교 중에서는 3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네베로프스키(Neverovsky) 사단은 700명이 남았고, 제50 야거(Jaeger, 엽병) 연대는 40명의 소대급 병력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오데사(Odessa) 연대에 남은 최고위 장교는 중위였고, 타르노폴(Tarnopol) 연대에는 장교가 모두 전멸하여 주임상사(Sergeant Major)가 최고위 지휘관으로 남아있어습니다.


(보론초프(Mikhail Semyonovich Vorontsov) 대공입니다.  그는 상트 페체르부르그의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으로서 보로디노 전투 당시 30세에 불과했으나 이미 사단장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보로디노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적어도 당시의 귀족들은 전쟁터의 위험에서 몸을 사리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이렇게 정예부대와 고위 장교들의 피해가 극심했던 것은 쿠투조프의 기본적인 방어선 배치가 종심을 두껍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의 1차 방어선을 뚫고나면 불과 수백 미터 뒤편에 제2, 제3의 방어부대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이 전술 덕분에 결국 프랑스군은 러시아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러시아군은 아우스테를리츠나 프리틀란트 전투에서처럼 패주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방어선 바로 뒤 쪽에 제2, 제3 방어선을 두껍게 배치해두는 전술은 프랑스군의 포병대에게 최적의 타겟을 제공했습니다.  제1 방어선을 때린 포탄들이 굳이 노리지 않아도 단단한 러시아의 평원을 퉁퉁 튀어 그 뒤의 예비 병력들을 덮쳤던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필요 이상으로 많은 병력이 피해를 입었고, 최전선에 서지도 않았던 고위 장교들도 숱하게 쓰러졌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뷔르템베르크의 오이겐 대공은 자기 휘하의 한 예비 여단은 전투가 시작된지 30분 만에 아무 전투를 벌이지 않고 그냥 제자리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0%의 병력을 잃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건 1807년 아일라우 전투 때의 그림입니다.  저렇게 대오를 짠 보병 병력이 겹겹이 서있으면 라운드샷 한방에 줄줄이 희생자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병사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밀집대오를 포기할 수 없었지요.)

 



이렇게 제대로 된 부대들과 실무 장교들이 전멸을 해버리다보니 남은 것은 멋도 모르고 들뜬 초급 장교들과 어중이떠중이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기기라도 한 것 마냥 당장은 들떠 있었지만, '아침에 후퇴할 것이니 철수할 준비를 하라'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그로 인해 실제로 러시아군이 얼마나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는지 알게 되면 슬글슬금 어둠 속으로 뿔뿔이 흩어질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쿠투조프가 내놓은 해결책은 바로 '전군, 내일 아침 프랑스군을 추격할 준비를 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명령이 전군에 하달되면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각 부대와 병사 개개인들은 실제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러시아 병사들은 도주나 탈영의 생각을 하지 않고 지친 몸을 이끌고 쪽잠을 잤습니다.  클라우제비츠가 쿠투조프의 협잡질이 바클레이의 정직함보다 유용했다고 평한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러시아군에 아직 4~5만의 병력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싸우기 위해서는 병력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고위 장교들을 보충받아야 했고, 휴식과 재편성을 거치고 탄약과 식량을 보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적어도 수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마 바클레이처럼 명예욕에 불타는 강직한 지휘관은 어떻게 해서라도 군을 추스려 당장 다시 반격할 기회를 찾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모스크바를 지켜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무관심하고 게을러 빠졌지만 대세 판단을 할 줄 알았던 쿠투조프에게는 모스크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병력의 보존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확보하고 병력을 보존하면 쿠투조프에게는 승산이 있었습니다.  병력과 보급품을 재충전하는 것은 자국 영토에서 싸우는 러시아군에게는 시간만 주어지면 충족 가능한 조건이었고, 무엇보다 러시아군은 기병대와 포병대가 대부분 멀쩡했습니다.  이 점이 향후 프랑스군을 상대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우위로 작용합니다.

 

쿠투조프의 후퇴 결정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부분은 모스크바를 향해서 후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쿠투조프는 이미 모스크바는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좀더 남쪽에 있는 공업 지대인 칼루가(Kaluga) 쪽을 향해 후퇴한 뒤, 거기서 재보급을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모스크바를 향해서 후퇴했을까요 ?  쿠투조프는 거기에 대해 아직 휘하 장군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신뢰하는 참모였던 톨에게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거센 급류인데 우리에겐 그걸 막을 힘이 없어.  하지만 모스크바는 스폰지처럼 그 급류를 빨아들일 거야."

 

즉, 쿠투조프가 러시아군을 이끌고 남쪽을 향한다면 도시 정복이 아니라 러시아 야전군 격멸을 노리던 나폴레옹이 후퇴하는 쿠투조프의 뒤를 따라올 가능성이 매우 컸습니다.  그건 쿠투조프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면 결국 러시아군이 재정비를 충분히 마치기 전에 다시 나폴레옹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살 길은 모스크바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은 러시아군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모스크바로 유인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수도 모스크바를 미끼로 던져주는 일은 쿠투조프 정도의 대인배가 아니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로디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잘 지휘한 것은 바클레이였지만, 러시아를 구한 것은 누가 뭐래도 쿠투조프였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의 손실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n.wikipedia.org/wiki/Battle_of_Borodino

www.tandfonline.com/doi/full/10.1080/14702436.2020.1750300

www.histclo.com/country/rus/hist/serf/back/enser20.html

 

 

 

댓글18

  • hms 2020.11.02 09:51

    고금의 전략전술가들이 얘기하던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네요.

    러시아군을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도 쿠투조프였고 러시아군을 살린것도 쿠투조프였군요. 나폴레옹은 지금까지는 정치?를 잘 했습니다만, 모든 것을 전투로 해결하려고 하고 그리고 멈추는 것을 몰랐던 데에서 몰락의 길을 걷는군요.
    답글

    • 가람이 2020.11.02 10:59

      나폴레옹이 멈추는 것을 몰랐던 게 아니라 애초에 멈출 수 없는 정세흐름을 탄 거죠.
      나폴레옹전쟁의 근본흐름은 나폴레옹이 결정한 게 아니라 그 이전 역사의 연장선입니다.
      스페인침공과 러시아원정은 모두 연장선에 있을 뿐, 나폴레옹이 본질적으로 결정한 게 아니죠.
      나폴레옹은 단지 표면적으로 결정행위를 했을 뿐, 그 심층적 이유는 역사적 흐름입니다.


      러시아 원정은 분명히 나폴레옹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고
      그 기회를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스스로 저 버렸을 뿐입니다.
      부하들이 하는 말 무시하고 족벌체제를 강화하는 등 적들이 망한 이유를 그대로 답습한 겁니다.
      나폴레옹의 정신적 한계를 드러내 스스로 망하게 만드는 물질적 무대를 마련한 쿠투조프의 지혜가 그래서 빛나는 거죠.

    • hms 2020.11.02 15:10

      흐름이라는 것도 인간의 선택이 만드는 건데요. 최고 권력자인 나폴레옹이 선택할 수 없었다라는 별로 동의할 수 없는 얘길하시는군요.

    • 흠흠 2020.11.02 15:25

      유럽의 그 누구보다도 선택할 기회가 많았던 것이 나폴레옹이죠. 나폴레옹은 일개 장군이 아니고 프랑스 황제입니다. 본인이 전쟁 멈추고 싶으면 멈추는 것이지, 반드시 스페인과 러시아에 쳐들어가서 나도 망하고 프랑스도 망하게 만들고야 말 역사적 흐름 따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집트 쳐들어간 것만 봐도 나폴레옹의 공명심 알만 하잖아요.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다? 누구는 그런 기회 없었나요?

    • 푸른 2020.11.03 15:49

      분명 러시아 원정이 피할 수 없었던 선택이었음이 보로디노 전투 연재 전에 설명되었던거 같은데요... 다들 너무 뛰엄뛰엄 보시는거 아닌가 싶습니다.

      하다못해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도 ♩♪~♪ 일이 생겨도 퇴사하고 잃을껄 생각하면 (+주변의 시선도 고려해서) "나 안해!"하면서 뛰쳐나가지 않는데, 황제자리에 있는 이가 모든걸 내려놓을 수 있는 선택을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건 아니시겠죠?

    • 흠흠 2020.11.04 11:19

      프랑스가 러시아를 침공하게 된 계기는,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몰래 무역하는 것을, 나폴레옹이 괘씸하게 여겼기 때문인데,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은 아니죠.

      대륙봉쇄령 자체가 다른 유럽 국가들 누구에게도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압제와 억압에 불과하고, 이걸 강요한 사람이 나폴레옹인데, 전 유럽과 러시아를 제 맘대로 통제할 역량도 안 되면서 이런 걸 강요하는 것이 어찌 피할 수 없는 선택입니까?

      누가 나폴레옹이 스페인과 러시아 침공 안 하면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린대요? 대영제국을 굴복시키지 못하면 프랑스 국민들이 나폴레옹을 루이16세 마냥 목을 날린답니까?

      전부 영국을 굴복시키고 유럽을 제패하고 아르메 뽕 맞은 본인의 공명심도 채울 겸 형제들한테 왕국 도 하나씩 뿌릴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쳐들어간 것이잖아요. 나폴레옹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왜 없습니까?

      이미 저 시기 되면 전쟁터에서 평생을 구른 원수들도 "보나파르트가 우릴 다 죽일 거야." 라면서 전쟁에 환멸을 내고, 프랑스의 명사들이 "황제는 프랑스의 모든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갈 셈이심?" 이라며 이 상태에서 제발 멈추자고 간청하고, 탈레랑 같은 정치인은 나폴레옹 저거 전쟁에 미쳐 돌아간다며 뮈라를 왕으로 옹립할 쿠데타까지 꾸며대는데, 누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 안 했다고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린대요?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흐름? 필연적 선택? 온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면서 그런 변명이 어딨습니까? 온 유럽한테 얻어터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중증 질병에 불과한거죠. 히틀러가 레벤스라움 건설하겠다고 소련 침공해서 2000만명 죽인 것도 필연적 선택이고 역사의 흐름인가요?

    • Franken 2020.11.04 11:33

      흠흠// 유럽을 재패할려면 반드시 영국을 제압해야 했던 게 당시 상황입니다. 산업혁명으로 막강해진 나라였던 만큼 무시할 수가 없었고요. 근데 해군력으론 상대가 안되니 경제적으로라도 제압하고자 했던 게 대륙봉쇄령이었고 특성상 온 유럽이 참여해야 효과가 있는 만큼 말 안 듣는 나라 손봐줘야 했고 나폴레옹이 아닌 누구라도 러시아가 퉁명스레 나오면 군사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고요.

    • 샤르빌 2020.11.04 18:23 신고

      나폴레옹을 깐다고 내가 나폴레옹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도전쟁은 본인 과실이 큰 것 같고 또 그걸 키운게 문제라고 생각하나 러시아 원정 자체는 다소 필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게 다 아미앵 조약을 파토낸 영국의 잘못입니다(?)

    • 흠흠 2020.11.05 02:08

      Franken// 그러니까 유럽을 왜 재패하냐고요? 욕심 부리다 결국 망했잖아요. 그래서 멈출 때를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구요. 나폴레옹은 뭐 반드시 유럽과 영국을 정복해야 할 운명이라도 타고 났대요?

    • 흠흠 2020.11.05 02:26

      샤르빌// 아미앵 조약의 파기는 쌍방이 서로의 신경을 잔뜩 긁어대고 있었으니, 딱히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런데 조약 파기의 잘잘못을 떠나서,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세인트 헬레나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 어찌되었든 러시아 원정이 현명한 선택은 될 수 없는거죠.

    • Franken 2020.11.05 03:04

      흠흠//이것 참...사람이 위로 올라가려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권력은 손에 넣는 순간 지켜야 하는 것이지 욕심 안 부린다 해서 주위에서 봐주는 것도 아니고...하류 귀족에서 프랑스 제1제국 황제로 대성공한 나폴레옹이니 자신이 노력해서 이만큼 되었으니 못 할 건 없다고 보았겠죠.

  • 롬. 2020.11.02 20:50

    흠... 아직 나오진 않았지만 러시아군 못지 않게 프랑스군의 피해 역시 만만찮으리라 생각되는군요...

    마지막 카드인 선임근위대를 밀어넣지 않았던 나폴레옹의 판단이 역시 맞았던 것일까요...?
    답글

  • 애쉬 2020.11.03 10:17

    프랑스군의 피해가 너무 궁금합니다!!!!!!!!!!!
    답글

  • 정암 2020.11.04 17:23

    '사명감'과 '부대 궤멸'간 인과관계와 관련하여 옛날 90년대 중반 대학생 시절의 시위 기억이 떠오르네요..
    아직도 기억나는 두 장면이 있는데,
    당시 '80년 광주학살과 관련하여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공소시효 만료가 다가오고 있어서
    모처럼 대학가는 전-노 학살자에 대한 법적 심판을 외치며 뜨겁게 타올랐었습니다.
    해서 서울 한복판인 명동에서 전국 대학생 수만명이 기습시위를 벌였는데 역시 수만명의 전경부대가
    한국은행과 종로 방면을 틀어막고 최루탄을 쏘아대며 반격해서 시위대는 충무로, 을지로 방면으로
    퇴각했지요.
    하지만 다시 집결하여 시위하다가 또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등 오후부터 저녁까지 내내
    치열한 기동전이 이어졌었습니다.

    반면 다른 한번의 경우, 아직도 그때의 시위 배경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목적이 불분명한 대규모
    기습시위가 종로 거리에서 일어났고.. 이어서 전경부대의 최루탄 공격과 돌격에 뿔뿔히 흩어진 것까진
    어느 때와 다르지 않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재집결을 하려고 몇몇 학우들과 함께 아무리 종로 거리를 헤매도
    지휘부(과 학생회 간부, 단과대 학생회 간부 등등)를 찾기가 어려웠던거지요.
    결국 1~2시간을 헤매다 '에라 모르겠다'면서 지하철을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는데
    아마 별 뚜렷한 목적도 없는 일회성 세력과시용 시위여서 지휘부도, 병력들도
    공권력의 한방에 그대로 궤멸(?)되었던거 같습니다.
    (당시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학생운동이 방향성을 잃은채 관성적인 시위를 답습하여
    시민들에게 별로 지지도 못받았었고, 결국 96년 연세대 사태로 학생운동의 힘이 많이 빠지게 되죠)

    이런걸 보면 페르시아 각지에서 별생각 없이 모인 다리우스 3세의 수십만 병력이
    알렉산더 대왕의 4만 군대에 깨져나간 가우가멜라 전투가 이해가 됩니다..

    답글

    • 흠흠 2020.11.05 13:38

      80년대는 아니지만 90년대 말에 기동대에 복무하며 다수의 학생 운동권과 노조 사수대를 많이 상대해 보았는데, 결정적인 차이는 군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노총의 최정예라는 금속노조나 운동권 중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남총련도 팽팽한 대치 상황이나 앞으로 밀고 들어올 때는 엄청나게 사나운데, 뒤로 밀리는 상황에서는 싱겁게 대열이 무너지고 흩어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도 없고 밤새도록 술래잡기만.

      보통 진압봉과 쇠파이프의 몽둥이 찜질 대결은 우리가 접근하는데도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지 않으면 정예로 보았습니다. 저도 무서운데 쟤들은 얼마나 무서울까요.

      이에 비해 기동대는 처절하게 난타당하고 뒤로 밀리고 박살나는 상황에서도 대열이 무너지고 중대가 흩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개개인의 역량이야 기동대원이나 운동권 짬밥 먹은 대학생이나 크게 다를 것도 없고, 노조 아저씨들은 훨씬 강하고 힘이 센 사람들이죠.

      애초에 시위진압 하는지 모르고 끌려온 대원들이 태반이니 사명감은 없을 터이고, 그냥 내가 여기서 밀리면 뒤에 있는 고참놈이 날 죽일 것 같다는 공포와 군율이 결정적 차이를 만든 것 같네요.

    • 정암 2020.11.05 16:16

      그 군율 때문에 시위대(사수대)는 기동대의 상대가 될수 없죠. 다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여론 때문에 기동대가 무자비한 진압을 자제하는 것이고요.

      따라서 시위대가 기동대를 제압하는건 언감생심이고, 다만 얼마나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주변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처절하게 알리느냐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시위의 사명감과 진정성이 있으면 끈질기게 저항했고, 없으면 적당히 하다 해산했던거 같습니다..

      전-노 처단 시위만 하더라도 명분이 있어서 아직까지 뜨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만, 명분이 없었던 몇몇 시위는 시민들만 불편하게 만드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방식이었던거 같습니다. 운전기사들과 상인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지요 ㅎㅎ

  • 흠흠 2020.11.05 13:55

    보로디노는 아마 인류 역사 전체에서도,
    하루동안 발생한 전투의 사상자 수치로는 최대였겠죠?
    답글

    • hms 2020.11.05 19:14

      떠오르는 건 1차세계대전인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