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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시대

갈증과 이질 - 러시아군의 뒤를 쫓아서 (2)

by nasica 2020. 2. 3.



여기서 잠깐 앙리 뒤코르(Henri Ducor)라는 프랑스 해군 수병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앙리는 원래 12살 때부터 사환으로 프랑스 해군 함정에 타기 시작한 선원이었고, 타고난 신체 조건과 근면함으로 20세가 되기도 전에 조타수 직위까지 승진한 유능한 뱃사람이었습니다.  뱃사람이었던 그는 러시아 원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할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진짜 모르는 것입니다.  그의 첫 고난은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빌뇌브 제독의 함대가 카리브 해의 영국 식민섬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함대가 바로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게 박살이 난 바로 그 함대였거든요.  빌뇌브는 영국 해군의 포로로 잡혔지만 프랑스 함대 전열함 중 5척은 무사히 탈출하여 카디즈(Cadiz)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잔존 함대 수병들의 고난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제 대포알에 맞아 죽을 뻔 한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카디즈로 돌아와보니 로질리(François Étienne de Rosily-Mesros) 제독이 잔존 함대의 지휘를 하겠다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래 트라팔가 해전이 벌어지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이 로질리 제독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이끌고 있던 빌뇌브 제독은 영국 해군에 맞서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보고 카디즈 항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빌뇌브의 무기력함에 화가 난 나폴레옹이 빌뇌브를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임명할 새 제독으로 로질리를 파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빌뇌브는 그런 치욕을 당하느니 뭐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로질리가 오기 전에 서둘러 출항을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대참패였지요.

 

 

(앙리 뒤코르의 회고록은 아직 영문판으로는 없고 프랑스어판만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못 읽어봤습니다.)

 



로질리로서도 황당한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33척의 전열함을 갖춘 대함대를 지휘하려고 왔는데, 카디즈까지 와보니 함대는 다 부서지고 프랑스 해군 전열함은 5척만 남아 있었으니까요.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카디즈에 갇힌 상태로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이 시작되는 바람에 로질리의 함대는 바다에서는 영국 함대에 의해, 육지에서는 스페인 육군에 의해 졸지에 독안에 든 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의 3년 가까이 카디즈 항구에 갇혀 있던 1808년, 항구에 정박한 프랑스 해군 전열함에 대고 스페인 함대가 이틀에 걸쳐 1200발의 포격을 가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로질리는 결국 스페인 측과 항복 협상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로질리와 장교들은 프랑스로 돌아가되, 프랑스 전열함들은 모두 스페인 해군에게 압수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수병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포로로 스페인에 남아야 했는데, 제대로 된 수용소도 아니고 헐크(hulk, 프랑스어로 ponton)선이라고 불리던 폐선박에 빽빽히 수용되었습니다.  햇빛도 들지않고 습기만 가득한 헐크선에서 썩은 음식만 먹어야 했던 프랑스 수병 포로들은 배고픔보다도 더 절실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스페인 감시병들이 물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심각한 갈증에 시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앙리 뒤코르도 이렇게 갈증과 배고픔에 시달리던 불쌍한 포로 중 하나였습니다.

 

 

 

(로질리 제독입니다.  그는 비교적 비정치적이고 단순 기술직 관료여서 그랬는지 부르봉 왕가 복위 후에도 이런저런 기술 관직을 맡으며 잘 지냈습니다.)

 

 

(1808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바일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항복하고 있는 프랑스군 제2 군단장 뒤퐁 장군의 모습입니다.  이때 프랑스군 2200명 정도가 사망하고 나머지 1만7천 이상의 병사들이 항복했습니다.  이때 항복한 병사들은 앙리 뒤코르와 함께 카브레라 섬에 수용되었고, 이들이 비참한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것은 무려 6년 후,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1차 귀양을 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이들을 언제까지고 여기에 둘 순 없었던 스페인군은 이들을 결국 바일렌(Bailen) 전투에서 포로가 된 프랑스 제2 군단 포로들과 함께 지중해의 무인도인 카브레라(Cabrera) 섬에 내팽개쳤습니다.  처음에는 그 좁고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헐크선에서 나와서 밝은 햇살을 보게 되니 좋았습니다만, 그 기쁨은 곧 다시 배고픔으로 바뀌었습니다.  스페인군은 이 외딴 섬에 4일에 한번씩 일인당 빵 1.5 파운드와 약간의 콩과 쌀 정도만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배식 정량이 하루에 빵 1.5파운드에 고기 1파운드였던 것을 생각하면 정량의 1/4에도 미치지 못하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일은 식수였습니다.  이 섬에는 샘이 하나 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수량이 적어서, 섬의 프랑스 포로들이 한모금씩 마시기에도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결국 앙리 뒤코르는 카디즈의 헐크선부터 이 카브레라 섬까지 계속 갈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앙리 뒤코르는 1811년 결국 뗏목을 만들어 이 저주받은 섬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앙리는 특별 휴가를 받아 10년 넘게 만나지 못한 어머니를 보기 위해 파리에 왔는데, 여기서 옛 상관이었던 보니파스(Boniface)라는 중위와 만나게 됩니다.  보니파스 중위는 파란만장한 고난을 겪은 앙리의 이야기를 듣고는 감동을 받아 나름 호의를 베푼답시고 앙리에게 파리의 황실 근위대 휘하 해병 대대로 배속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앙리는 당연히 덥석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앙리에게 또 다른 악몽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다음해인 1812년, 해군 수병이라면 갈 일이 없었던 러시아 원정길에 근위대 소속 해병으로서 앙리도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어판 앙리 뒤코르의 '근위 해병대원의 모험' 속에 포함된 삽화입니다.  아마 근위 해병대원의 모습을 저렇게 묘사해놓은 모양입니다.  대포를 한 손으로 지탱하고 있네요...)

 

 


여기서 앙리는 비록 배는 고플지언정 바다도 아니고 갇힌 것도 아니니 목은 마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착각이었습니다.  일단 7월의 러시아는 매우 더웠고, 그만큼 더 목이 말랐습니다.  한 러시아 장교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의 여름 온도는 36도 정도였는데 바람도 잘 불지 않아서 정말 더웠다고 합니다.  비가 가끔씩 내리긴 했지만 더위를 식혀주기 보다는 옷과 대지만 축축하게 적실 뿐이었고, 곧 증발하는 습기 때문에 습도만 괜히 높아져서 더욱 무더웠답니다.  그런데 길 주변에 농가가 별로 없다보니 우물도 없었고, 결국 어쩌다 반갑게 만나는 시냇물 외에는 웅덩이나 도랑에 괸 꺼림직한 물 외에는 마실 것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가끔씩은 너무나 목이 말랐던 병사들이 좀 축축한 대지를 만나면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고이는 물을 마셔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인 물에는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손수건 등으로 그 꺼림직한 물을 걸러서 마셔야 했습니다.  그런 물을 끓여마시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물을 끓여마시는 것은 밤에 숙영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사람들은 물에 들어있는 세균이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과, 그런 병은 물을 끓여마심으로써 예방할 수 있다는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고이는 물을 마시는 것은 시간이 있고 힘이 남아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앙리 뒤코르는 그것보다도 상황이 더 안 좋았습니다.  앙리는 결국 살아남아 프랑스로 되돌아왔고, 1830년 대에는 수익성 좋은 증기선 사업을 하는 사업가가 되었는데, 그때 즈음에 자신이 겪었던 기구한 역경에 대해  "Aventures d'un marin de la garde impériale, prisonnier de guerre sur les pontons espagnols, dans l'île de Cabréra, et en Russie" (황실 근위대 소속 수병이자 전쟁 포로로서 겪은 스페인 헐크선과, 카브레라 섬과,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모험담)이라는 긴 제목의 회고록을 썼습니다.  여기에서 앙리는 러시아에서조차 또 다시 갈증에 시달렸던 일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길바닥에 난 말발굽 자국에 고인 물을 마시기 위해 몇 번이나 배를 깔고 엎드려야 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 누르스름한 액체의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뱃속이 뒤집힌다."

앙리는 자기처럼 말 오즘이 섞인 고인 물을 마셨던 것이 자기 하나 뿐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먹을 것도 부실한데 식수 사정까지 이 모양이다보니 병사들 상당수가 극심한 이질과 설사에 시달렸습니다.  하인리히 폰 루스(Heinrich von Roos)라는 뮈라 휘하 기병대 장교 하나는 러시아군을 추격하다 러시아군 후위대가 방금 버리고 간 진지를 발견했습니다.  보통 이런 진지 뒤편에는 병사들이 볼 일을 보는 긴 도랑이 있었습니다.  폰 루스의 말에 따르면 그 도랑 속의 내용물을 보면 이 진지가 러사아군 것인지 프랑스군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내용물의 상태가 괜찮으면 러시아군이었고, 설사에 가까운 것이었으면 프랑스군 진지였습니다.  

이런 설사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기 때문에 병사들은 행군을 하다가도 허겁지겁 바지를 내리며 길가 풀 숲으로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덕분에 그랑다르메의 행군길은 악취가 진동해서, 프란츠 로이더(Franz Roeder)라는 헤센 근위대 장교의 말에 따르면 때때로 구토를 참기 위해 숨을 쉬지 않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오뱅 뒤떼이예(Aubin Dutheillet de la Mothe)라는 21세짜리 어린 소위도 그런 곤란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 급히 신호가 오는 바람에 황급히 말에서 내려 길가로 들어가 바지를 내려야 했는데, 너무 급해서 말을 어디에 묶어놓지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뒤떼이예 소위의 말은 곧 뒤를 따라오던 흉갑기병 연대의 대오를 따라 걸어가버렸고, 뒤떼이예 소위는 그 말에 실려있던 소위의 전체 소지품과 함께 그 말을 두번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형편없는데 이질설사까지 심각했으니 그랑다르메 병사들은 행군길에 픽픽 쓰러졌습니다.  징발대가 먹을 것을 본진으로 가져오는 일이 많지 않았던 독일계 뷔르템베르크나 바이에른군의 피해가 특히 컸습니다.  칼 폰 수코프(Carl von Suckow)라는 뷔르템베르크군 장교의 중대는 고향을 출발할 때는 150명이었으나 아직 적군을 단 한번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즈음해서는 38명으로 줄어있었습니다.  전체 2만5천이었던 바이에른군은 비텝스크 근처에 이르렀을 때 1만2천으로 줄어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롬이 내팽개치고 간 베스트팔렌군은 특히 열사병에 큰 고통을 당했는데, 1980명으로 출발했던 베스트팔렌군 연대 하나는 32도의 더운 날씨에 강행군을 한 뒤에 210명만 남아있엇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books.google.co.kr/books?id=IvSXI0vN5VIC&pg=PA27&lpg=PA27&dq=Henri+Ducor+Russia&source=bl&ots=D2gK-B2TXm&sig=ACfU3U04Tqy5SQdaMdUeZgZueyxrysObdA&hl=en&sa=X&ved=2ahUKEwjI8vfx1pnnAhW5KqYKHWuvCogQ6AEwAHoECAkQAQ#v=onepage&q&f=false
https://books.google.co.kr/books?id=Y81vCwAAQBAJ&pg=PT577&lpg=PT577&dq=henri+Ducor+napoleon&source=bl&ots=qBSE35ZTfb&sig=ACfU3U0DJqefPPrn1Vn2KtZRWrmeb7-_RA&hl=en&sa=X&ved=2ahUKEwi446_B3ZnnAhXIyYsBHYgfD9QQ6AEwAHoECAgQAQ#v=onepage&q=henri%20Ducor%20napoleon&f=false

 

 

댓글23

  • 샤르빌 2020.02.03 07:22 신고

    트라팔가르 전투에 포로생활에 근위대원까지 되었다가 러시아 원정까지.. 그것도 결국 무사히 돌아오다니 무서운 사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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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inhardt100 2020.02.03 07:53

    더 심각했던 발진티푸스는 아직 시작도 안 했군요.

    유럽에서 석회수나 다른 요인으로 수인성 질병은어느 정도 만성화되었지만 그래도 대규모 원정 한번 발생하면 꽤 심각해지는건 언제나 비슷합니다.

    여담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과 일본군을 제외하고 모두 비전투 손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질병이 수인성 이질이었다고 합니다. 왜 양국군만 덜했냐고요? 미군은 아예 대규모 증류장치를 사단급 이상에는 전부 완비하고 거기서 증류시킨 물을 수통에 매일 몇리터라도 지급했죠. 일본군은 이시이식 정수기를 연대급 혹은 독립 지대별로 완비시켰고 이 덕분에 적어도 물 때문에는 고생을 안 했죠. 반대로 독일군과 영국군이 가장 심각했는데 양군 모두 식수 준비가 엉망이었고 특히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전선의 양군은 장성급까지도 이질은 아예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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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sica 2020.02.03 22:13 신고

      당시에 그냥 물을 끓여서 마시는 것도 아니고 증류기를 갖춰서 식수를 공급했다니 정말 놀랍군요.

    • reinhardt100 2020.02.04 08:10

      의외로 간과되지만 일본군이 절대 막장 군대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미군을 제외한 군대 중 기술병과의 효율성 수준은 확실히 타국의 군대보다 뛰어났습니다. 영국군조차도 동 시기 레이더나 일부 원시적 컴퓨터 분야를 제외하고는 일본과 겨우 비등했다는 것은 간과되고 있죠. 이탈리아? 프랑스? 소련? 기술병과만 한정하면 일본군보다 나을것도 없었죠.

      이시이식 정수기, 오늘날에는 흔히 말하는 키디딩정수기 계열의 원조급인 물건인데 이 물건 덕분에 일본군은 보급만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절대 물 걱정 안해도 된다는 자신감에 넘쳤죠. 심지어 731부대조차도 이 정수기가 없었다면 부대 창설 시도조차 못했을거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참고로 이 물건 개발자인 이시이 소좌. 731부대장인 그 분 맞습니다.

      전후 서방권이든 동구권이든 추축국의 특허권을 강제 소멸시키면서 꽤나 많은 이익을 봤는데 일본에서 가장 가치 있는 특허 중 하나가 바로 이시이식 정수기의 특허권이었습니다. 양측 다 전술핵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군용 소형 정수기가 나타난 것이니까요.

  • Franken 2020.02.03 10:52

    이런 말 적기가 꺼림직하지만 볼일 볼려고 급하게 수풀 뛰어들다 바지에 실례한 이들 역시 많았을 것이고 마실 물도 없어 죽을 판국에 세탁할 물도 여유도 없다 보니 그냥 입고 다녔을 테고...바지 엉덩이 하단에 노란 물이 든 병사들이 말로도 표현하기 싫은 구린내 풍기며 행진하는 장면이 상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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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sica 2020.02.03 22:14 신고

      어우...

    • arandel 2020.02.04 16:43

      이 댓글을 읽고나니...그 바지를 갈아입지도 못하고 러시아의 추위를 맞이하고 게다가 철수할때는 강물에 풍덩하고 건너야 했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하고 오싹해지네요 베레지나 강물 건너는 병사들 그림..그 병사들도...나중에 옷이라도 갈아입을 수 있었을까 별 오지랖스러운 걱정이 드네요...첨부터 지고 들어가는 전쟁이라고 짚은 점쟁이는 없었을까요...

  • 웃자웃어 2020.02.03 12:15

    러시아군도 갈증과 이질문제가 있는건 비슷하지 않나요?
    답글

    • nasica 2020.02.03 22:19 신고

      저도 그 부분이 궁금해서 찾는 중인데, 아직까진 별 성과가 없습니다. 먹을 것은 러시아군이 다소 유리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데, 식수 부분은 러시아군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허참 2020.02.03 20:44

    이쯤되면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이 히틀러보다 부족해보이네요. 이 정도 속도로 군대를 말아먹지는 않은 것 같은데. 딱 수양제 프랑스 버전인 듯.
    답글

    • nasica 2020.02.03 22:19 신고

      에이, 그래도 히틀러 수준은 아니죠.

    • Franken 2020.02.04 03:30

      다시 한 번 이 블로그 글 좀 정독해 보세요. 나폴레옹은 당시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준비란 준비는 다 하고 갔으며 히틀러 역시 기술의 발달로 전과만 좀 올렸지 러시아에서 패망한 건 똑같아요.

    • 웃자웃어 2020.02.04 12:45

      나폴레옹이 더 뛰어나지만 욕심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해서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게 했다고 봅니다.

    • 허참 2020.02.05 13:21

      저도 여기서 나폴레옹 전쟁사 공부 다했는데, 보면 볼수록 나폴레옹이 전술적 능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전략적인 재능은 평범함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독일군으로 치면 딱 롬멜급 장군인 것 같아요.

      아무리 할 수 있는 준비를 다했다 한들 저 정도로 군대를 말아먹기 어디 쉬운 일인가요. 러시아 원정 전에도, 병력이 10만에 가까워지니 힘대힘 정면 맞불로 쌍방 누가 피떡갈비 더 잘 견디나 대결 외에는 별로 못 본 듯 한데, 애당초 4~50만을 지휘할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 너무 많은 병력을 이끌고 있는 느낌입니다.

      40만을 끌고 다니면서 러시아 1, 2군 합쳐봤자 몇 이나 된다고 그거 집요하게 방해하는 것도 그렇고, 결과적으로는 패했지만 프랑스 군대가 온전한 상태로 강을 건너오면 한 판 붙어본다던 카를 대공이 전략적인 식견은 더 있는 듯 하네요.

      최고사령관이라는 사람이 병사들이 저렇게 만신창이로 굶어죽고 있는데 그런 거나 고민하고 해결해야지, 병사들 희생은 신경도 안 쓰면서 허구헌날 대포는 어디에 배치할지, 얼마나 멋진 대형과 기동으로 적을 쓸어버릴지 토탈워 게임만 하고 있으면, 걍 군단장이나 해야죠.

      챙길 수 없는 물건은 딱딱 불태우고, 병사들 질서정연하게 후퇴시키고, 전쟁터에서 대포 부리는 기술은 나폴레옹보다 좀 부족할지 몰라도 맞은편의
      바클레이나 스페인의 웰링턴이 훨씬 더 최고사령관 다운 것 같아요.

    • 하이텔슈리 2020.02.09 10:39

      오히려 나폴레옹은 당대 지휘관중에도 전략적 능력이 특출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러시아원정에서 나폴레옹의 전략적 목표는 러시아 정복이 아니라 러시아와 협상을 해서 굴복시킨다는 현실적인 내용이었잖아요. 백일천하때조차도 웰링턴은 작전술적인 관점에서는 나폴레옹에게 속았죠.

      문제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게 아닐까 해요. "내 쩌는 능력이면 러시아와 한판 붙어서 러시아군을 DOG박살낼 수 있고 이러면 러시아가 항복하겠지."라고 말이죠...

  • 제이슨 2020.02.03 23:26

    전쟁기록화에서도 차마 표현을 못하는게 주둔지 주변에 널려 있는 병사들의 똥무더기이지요
    답글

    • 제리 2020.02.05 17:06

      널려있는 시체는 그려도 똥덩어리는 그리지 않아야겠지요

  • keiway 2020.02.04 12:22

    전쟁터에서 이정도는 더러워 줘야
    몇달동안 샤워 한번 안하는 배 위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면서 사랑도 나누고 (혼블로워) 그러지 않겠습니까. ㅎㅎ
    답글

  • keiway 2020.02.05 10:47

    연재글을 보면 볼 수록 불가능한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고, 전부 결과론이죠.
    1. 대륙봉쇄령을 내리지 않고 프랑스 패권하의 유럽대륙 질서 확립에 집중했다면
    2. 러시아 차르 동생과 결혼했다면
    3.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1년만이라도 계속 참여했다면
    4. 스페인 원정을 시작하지 않고 고도이한테 실속만 쪽쪽 뽑아먹었더라면
    나폴레옹도 원하지 않았던 러시아 원정은 시작되지 않았을지 모르죠.

    전쟁이 시작된 상태라도
    1. 제롬이 좀 더 정상적이었다면 (혹은 아예 참여 안했다면) 초기에 2군을 박살내었을지도
    2. 다부가 좀만 덜 유능해서 러시아 전군과 단기결전으로 이끌었다면 - 이기면 더할나위 없고, 차라리 여기서 졌어도 피해가 덜했겠죠.
    3. 러시아 차르가 계속 지휘권을 휘둘러서 러시아군이 예전 오스트리아 처럼 바보같은 이동을 보여줬다면
    4. 어느 지점 만큼은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러시아군의 목표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때 이겼다면 - 모스크바는 포기할수 없어 라던지..
    나폴레옹의 전성기는 좀 더 이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이 계속 승승장구했을까... 라는 데에는 좀 회의적이죠. 권력기반도 불안하고 본인 하나에만 의지하는 제국인데다가, 프랑스 우선주의로 다른 나라를 억누르는 형태이며, 나폴레옹과 측근들의 방만도 심해지고 있고 등등..

    역사의 가정 하에서는 뭐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고 - 나폴레옹 시대부터 하나의 유럽이 되었을지도 - 이런 대체역사 상상은 항상 재미있는 일이지만, 지난 뒤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땐 이랬어야 했다는 등의 비난을 하는건 그당시 사람들에게 부당한 일인거죠. 미래를 누가 알았겠습니까? ㅎ

    저는 나폴레옹을 좋아하니 이제부터 일어날 그의 몰락을 보는게 마음 아프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보여줄 그의 몇번의 번뜩임이 기대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Nasica 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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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자웃어 2020.02.06 10:47

    근데 나폴레옹이 집권하던 시기에 전문적인 장교를 양성하는 사관학교가 있었나요? 있었다면 교육과정 기간이 어떻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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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텔슈리 2020.02.09 09:00

      왕정시대부터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자신부터가 왕립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에요. (단, 현재 있는 프랑스의 육군사관학교는 나폴레옹이 설립했습니다. 혁명 이전에는 귀족만을 위한 기관이었고 혁명 후에 그거 폐쇄하고 누구에게나 개방된 기관으로 새로 창설했습니다. 그게 지금의 생시르 사관학교입니다.)

      http://bemil.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14/2018051402541.html

  • 오킹 2020.02.06 12:06

    나시카님은 지금 까지 연재한 나폴레옹 전쟁사를 책으로 출판하실 생각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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