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제가 블로그에서 아래 구절을 인용하면서 결투를 할 때 신사들은 실크로 된 셔츠를 입고 싸우거나, 실크 셔츠를 입을 형편이 안 되는 신사들은 아예 셔츠를 벗고 싸웠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명이나 삼베로 된 옷은, 총알에 맞으면 그 부위가 총알 모양으로 동그랗게 잘려나가며 총알과 함께 살 속으로 파고 들게 되는데, 그것이 결국 염증을 일으킵니다.  그에 비해 무척 질긴 섬유인 실크는 총알에 맞더라도 찢어질 뿐 파편이 잘려나가지는 않기 때문에 상처 속에 실크 파편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HMS Surprise by Patrick O’Brian (배경 180X년 인도) -------------


(잭 오브리의 친구인 군의관 스티븐 매튜어린이 여자 문제로 동인도 회사의 고위 간부와 권총 결투를 벌입니다.)


스티븐은 코트를 벗더니, 이어서 셔츠까지 벗어서 조심스럽게 접어놓았다.


“자네 대체 뭐하는 건가 ?” 잭이 옆으로 와서 나직히 물었다.


“난 항상 바지만 입고 싸운다네. 상처 속으로 말려들어간 천 조각은 아주 끔찍한 결과를 낳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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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렇게 셔츠 뿐만 아니라 코트까지 입고 권총 대결을 벌이시는 분들은 뭘 몰라도 한창 모르거나 또는 목숨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인터넷에서 18세기 시절의 세탁 방법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가 "Two Nerdy History Girls" 라는 웹사이트에서 매우 흥미로운 정보를 발견했습니다.  (맨 아래 source 부분에 URL 올려놓았습니다.)  Loretta Chase와 Susan Holloway Scott이라는 두 여성 작가분이 운영하는 이 역덕 사이트에 따르면 적어도 18세기 영국 신사들의 셔츠는 절대 실크로 만들지 않았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셔츠라는 것은 속옷 개념의 옷이었거든요.



마태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And if any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shirt, hand over your coat as well.



그래서 원래 제대로 된 신사들은 절대 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항상 겉에 자켓을 입고 다니며, 자기 사무실에서도 셔츠 위에 조끼(베스트)를 입는다고 합니다.  그런 양반들은 한국의 찜통 더위에 한번 제대로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제 후배 직원 중 아주 잘 생기고 깔끔한 친구 하나는 정말 더운 여름철 사무실에서도 항상 양복 자켓을 입고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친구 지금은 월급 많이 주는 더 좋은 회사로 갔습니다.)


이 역사학자들의 말씀에 따르면 - 저는 맞는 말씀 같다고 생각합니다 - 19세기 중반까지 셔츠라는 옷은 유럽 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인 의류였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3세의 셔츠나 그의 시종들이 입었던 셔츠나 재질이나 디자인이 사실상 거의 똑같았다고 합니다.  어차피 속옷인걸요 !  




(왕도 장군도 병사도 농부도 다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다니 !!)




당시 셔츠는 거의 모두 동일하게 아마포(linen)으로 만들었습니다.  속옷을 실크로 만드는 일은 (설령 있었다고 해도) 거의 없었습니다.  요즘 속옷은 다 면으로 만듭니다만, 당시 면포는 속옷 따위로 쓰기에는 아직 너무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면으로 만든 천인 모슬린(muslin, mousseline)은 마리 앙뜨와네트가 드레스로 만들어 입을 정도로 비싼 유행품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산업 시찰을 가기 직전에 조세핀과 부부 싸움을 벌인 이유도 모슬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리용(Lyon)산 견직물(비단)로 만든 드레스를 입으라고 지시했는데 조세핀은 당시 대유행이던 모슬린 드레스를 고집했거든요.  물론 그런 모슬린은 인도를 독차지한 영국산이었으니 산업 시찰을 나가는 나폴레옹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앙뜨와네트의 유명한 초상화입니다.  당시 앙뜨와네트가 검소해서 비단이 아닌 면직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같은 아마포 셔츠라고 해도 신사용 셔츠를 만드는 아마포는 더 하얗고 고운 실로 짠 것이었겠고 바느질도 더 촘촘하게 되어 있었을 것이며 다림질도 더 잘 되어 있었겠지요.  부유한 신사의 셔츠 소매 등에 레이스 등의 장식이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왕이든 신사든 농부든 모든 셔츠의 디자인은 동일했답니다.  현대 정장 차림에서는 와이셔츠가 앞이 완전히 열려 있고 그걸 많은 수의 단추로 잠그는 형태입니다만, 당시 셔츠는 무조건 머리 위로 뒤집어 쓰는, 그러니까 요즘의 티셔츠 같은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린 목과 소매를 단추로 잠그는 형태였지요.  또 당시의 셔츠는 품이 매우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요즘도 속옷의 사이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듯이, 당시 속옷 개념이었던 셔츠도 사람의 체격이나 체형에 따라 옷이 맞지 않는 경우가 없도록 어느 정도 프리사이즈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나 군함 등에서는 고참이 후임의 깨끗하게 세탁해놓은 셔츠를 빼앗아 입기도 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 분처럼 가슴팍은 물론 복근까지 다 까보이는 셔츠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Mr. Midshipman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 1790년대 HMS Justinian 함상)   ----------------


(10대의 혼블로워가 사관후보생 생활을 하고 있는 군함에는 못된 고참 사관후보생이 있어서 후임들을 몹시 괴롭히고 있는 상태입니다.)


가장 큰 원망을 자아냈던 것은 그 고참의 일상적인 수탈 행위가 아니었다.  후임 사관후보생들로부터 깨끗한 셔츠를 빼앗아 입는다든가, 식사로 나오는 고기 중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을 자기 몫으로 독차지한다든가, 심지어 후임들 몫으로 나오는 럼주를 빼앗는 것조차도 참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 것들은 이해할 만한 수준으로 넘어갈 만한 일이었고, 후임들도 만약 그럴 권력이 손에 들어오면 스스로도 저지를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고참에게는 고전 교육을 받은 혼블로워에게 로마 황제들의 광기를 연상시키는 종잡을 수 없는 변덕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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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코제트가 'In My Life'를 부를 때의 장면입니다.  장발장이 저렇게 셔츠 바람으로 나오는데, 의복 고증이 매우 잘 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목 부분의 열린 부분이 약간 많이 파인 것 같군요 ?)




그렇게 목과 소매의 단추를 풀기만 하면 무척 편한 속옷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잠옷으로도 사용했습니다.  즉, 잠을 잘 때는 따로 잠옷을 입고 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켓과 바지만 벗고 그냥 셔츠 바람으로 자는 것이었지요.  당시 셔츠는 꽤 길어서 넓적다리를 덮을 정도의 길이였거든요.  실제로 잠옷이라는 영어인 파자마(pajama)는 원래 인도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인도 식민지에서 영국인들이 배워온 것이었고 이 단어가 영국에 정착한 것은 19세기 후반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였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길이가 길다보니 당시 셔츠는 정말 속옷 역할도 톡톡히 했습니다.  당시의 신사들은 별도의 속옷 하의(drawers)도 입긴 했습니다만 많은 서민들은 그냥 셔츠가 속옷 하의 역할까지도 했습니다.  즉 긴 셔츠의 아랫자락을 다리 사이에 넣어서 남성의 주요 부위를 감싸는 역할까지도 했던 것입니다.  


좀 더럽지 않냐고요 ?  예, 좀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셔츠가 가장 민주적인 의류였다고는 해도, 당연히 귀족이 입는 것과 밭일하는 농부가 입는 셔츠는 차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 바로 청결함이었습니다.  신사들은 자주 셔츠를 갈아입었고 특히 외출을 할 때는 닳지 않고 하얀 새 셔츠만 입은 것에 비해, 서민들의 셔츠는 누렇게 찌들고 여기저기 헤어지고 너덜너덜해진 셔츠를 입어야 했습니다.  신사 중에서도 진짜 부유한 신사는 조금 헤어지고 변색된 셔츠를 하인들에게 던져 주었을 것이지만, 신사치고는 가난한, 가령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 같은 청년은 구멍난 셔츠 팔꿈치 부분은 물론 헤어지고 닳은 소매 부분이 자켓 밖으로 보이지 않도록 노심초사해야 했을 것입니다.  17세기 중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고골리(Nikolai Gogol)의 소설 '대장 부리바'(Taras Bulba)에서도 어떤 폴란드 귀족을 묘사하면서, '행사장에는 화려하게 잔뜩 껴입고 나왔지만, 집에는 구멍난 셔츠와 낡은 구두 한켤레 밖에 없는 신세'라고 조롱하는 부분이 나오지요. 


서민들은 낡고 헤지고 구멍난 셔츠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입다가 완전히 넝마조각이 되면 그걸 또 푼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당시는 생산성이 무척이나 떨어지고 물건이 귀한 시대였습니다.  헌 셔츠도 하나도 붕대로든 걸레로든 다 쓸모가 있는 시대였거든요.  더 밑에서 설명하겠습니다만, 당시 그런 아마포 셔츠는 한벌에 대략 6실링 정도 했습니다.  현재 가치로는 7만원 정도하는 셈이지요.  하지만 당시 비숙련 노동자의 일당이 1실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요즘 최저 임금으로 계산하면 당시 사람들의 체감상으로는 대략 30만원 정도 했던 것입니다.  셔츠가 닳고닳아서 넝마조각이 될 때까지 입었던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지요. 




(율 브린너가 부리바로, 토니 커티스가 그 아들로 나왔습니다.  어렸을 때 정말 재미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물론 흑백 TV로요.)




하지만 현대 정장에서 와이셔츠의 칼라 부분이 무척 중요한 것처럼 당시 신사들의 옷차림에서도 목 부분은 자켓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냐고요 ?  가만 보면 당시 초상화의 신사님들과 장군님들의 목 부분은 목에 매는 별도의 장식 천, 즉 neckcloth나 초기 형태의 넥타이인 cravat 등으로 잘 가려져 있습니다.  물론 살짝 드러난 셔츠의 목자락 부분이 누렇게 찌들어 있다면 그 창피함은 말할 수 없었겠지요.  




(자켓 밑에 드러난 단추 많이 달린 옷은 셔츠가 아니라 조끼(vest)입니다.   조끼 위로 드러난 셔츠의 대부분은 넥클로쓰(neckcloth)로 덮혀 있습니다.  당시 신사들은 아무리 더워도 저 넥클로쓰를 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영국에서나 통할 이야기이고 인도에서는...)




당시 셔츠에서 또 한가지 이색적인 부분은 목과 소매의 단추입니다.  당시에는 플라스틱이 없었으니 셔츠의 단추로 어떤 것을 썼을 것 같습니까 ?  나무 ?  상아 ?  설마 녹슬지 않는 구리 ?  물론 부잣집에서야 색다른 재료를 쓸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표준적인 재료는 바로 아마포 그 자체였습니다.  아마포 실을 둥글게 뭉치고 매듭을 지어 헝겊 단추를 만든 것입니다.  이는 두가지 때문이었습니다.  나무 같은 단단한 물건으로 단추를 만들면 그로 인해서 옷이 더 빨리 닳습니다.  게다가 세탁 비누가 없던 당시의 빨래 방법은 잿물과 삭힌 오줌 등의 괴이한 세제로 옷을 불린 뒤에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옷을 두들기는 것이었거든요.  그런 과격한 세탁 방법을 견딜 재료가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헝겊 단추라니 !  굉장히 이색적이지만 생각해보면 꽤 실용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자, 나폴레옹 시대의 영국군 병사들의 셔츠는 어땠을까요 ?  물론 마찬가지로 동일한 형태의 셔츠를 입었습니다.  당시 복장 규정은 연대마다 또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 달랐습니다만, 대개 3~4벌의 셔츠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가령 1800년 제40 보병연대의 경우 병사들이 소지해야 하는 셔츠의 수량과 재질과 크기는 물론 그 가격에 대해서도 세밀한 규정이 있었습니다.  즉 '1야드 당 1실링 6펜스 짜리 아마포로 1실링 짜리 바느질삯을 주고 만들어진 셔츠를 4벌씩 준비하되, 목과 소매 길이가 넉넉해야 한다'라는 규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셔츠는 재질과 구입 장소에 따라 한벌에 대략 4실링에서 10실링까지의 가격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평균 6실링이라고 해도, 모병제였던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급여가 일당 1실링이었으니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인데 군복을 자기 돈으로 마련해야 하는 건 너무 하지 않느냐고요 ?  당시 군에서 일괄적으로 셔츠를 지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급된 셔츠들은 (당시 영국도 방산 비리가 심각하여) 재질이나 바느질 품질이 형편없었고 그나마 가격을 아무 할인 없이 시장가 그대로 쳐서 병사들 급여에서 공제했으니 병사들로서는 군에서 지급하는 셔츠가 전혀 반갑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전선에 투입되어 검열이 좀 느슨해진 병사들은 2벌의 셔츠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병사들로서야 돈이 나가는 것보다는 그냥 좀 더럽고 구멍난 셔츠를 입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았을테지요.  


이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1811년 정도가 되자 장교 위원회에서 병사당 2벌의 셔츠만 소지하면 되는 것으로 규정을 바꾸자는 건의를 올렸고 영국 육군 사령부에서도 그 건의를 받아들여 1812년 정식으로 복장 규정을 바꾸었습니다.  이유는 금전적 부담이 아니라 병사들의 배낭이 너무 무겁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긴 당시 그렇게 넉넉한 품의 아마포 셔츠는 무게가 1파운드, 그러니까 0.453kg이나 되었으니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결국 이 규정은 1817년 다시 '3벌 소지'로 바뀌게 됩니다.


저 위에서 당시 모든 셔츠는 아마포가 표준이라고 했는데, 항상 혁신은 군대에서 일어나는 법입니다.  1812년 캐나다에 주둔했던 영국군은 아마포 셔츠 외에 모직인 플란넬(flannel) 셔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심지어 1814년 북부 캐나다에 주둔하고 있던 제89 연대 제2 대대의 모리슨(Morrison) 중령이라는 분은 아래와 같은 명령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플란넬 셔츠를 지급받은 병사들 중 몇몇은 여전히 가끔씩 아마포 셔츠를 입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건강에 해로운 것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각 중대 지휘관들은 플란넬 셔츠가 지급되는 대로 기존 아마포 셔츠를 금지하고 처분하도록 강제하기를 바란다."


물론 플란넬 셔츠가 더 비쌌습니다.  한벌에 8~10실링 정도 했으니, 6실링짜리 아마포 셔츠보다 약 1.5배 더 비싼 것이었지요.  그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던 병사들의 원망이 있었겠습니다만, 사령부에서는 플란넬 셔츠가 병사들의 건강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캐나다에 비해 더 따뜻한 지방이었던 스페인 전역에서도 플란넬 셔츠가 지급되었습니다.  심지어 열대 지방인 자메이카 주둔 부대에도 플란넬 셔츠가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1804년에 나온 로버트 잭슨(Robert Jackson)이란 분의 '군대의 구성, 규율, 경제성에 대한 체계적인 관점'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플란넬 셔츠의 장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플란넬은 아마포보다 더 온기를 잘 보존한다.  습기 흡수도 잘 되고 피부에 닿는 감촉도 더 좋은 재료이다.  더운 날씨에서는 땀을 재빨리 흡수한다.  추운 지방에서는 비에 젖는 것이 건강에 무척 해로운데 플란넬로 몸을 감싸면 그 해로움이 덜해진다."


글쎄요, 모직이 땀을 더 잘 흡수하고 피부에 기분 좋은 감촉을 주나요 ??  저는 전혀 동의못할 내용입니다.  아마 저 잭슨이라는 분의 친척이 모직 공장을 운영하든가 또는 양떼 목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네요.  실제로 몇몇 병사들은 플란넬 셔츠를 맨살에 입는 것을 꺼려 했습니다.  1799년 10월, 제49 연대의 제임스 피츠기본스(James Fitzgibbons) 하사는 '도저히 플란넬이 맨살에 닿는 느낌을 견딜 수 없다' 라며 아마포 셔츠를 밑에 입고 그 위에 플란넬 셔츠를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을 괴롭히던 것은 더운 날의 플란넬 셔츠 뿐만 아니었습니다.  당시 복장 규정은 셔츠의 목과 소매의 단추를 항상 채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진지 구축 작업 등을 할 때 군복 자켓을 벗고 일하는 것은 허락될지라도, 소매를 걷어올리거나 목 부분을 풀어헤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빌라 벨라(Velha) 근처에서 숙영 중인 부대' 라는 1811년 C, Turner의 판화입니다.  소매를 걷은 병사들이 없다는 점 보이십니까 ?)




위에서 '당시 셔츠는 비교적 프리 사이즈'라고 언급했는데, 특히 그렇다면 병사들끼리 셔츠를 훔치거나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요 ?  실제로 좀 그랬나 봅니다.  특히 전장에서는 병사들이 현지 주민들에게서 술이나 음식을 사기 위해 셔츠를 팔아먹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자기 것을 벗어 주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전우의 것을 훔쳐서 주는 경우도 있었겠지요.  그 때문인지 1811년에는 셔츠에 잉크로 소유자의 이름을 표시하라는 새로운 규정이 나왔다고 합니다.  






Source : http://www.warof1812.ca/shirts.htm

http://twonerdyhistorygirls.blogspot.com/2011/04/finer-points-of-18th-c-mans-shirt.html?m=1

https://militaryhistorynow.com/2016/11/03/pistols-at-dawn-officers-gentlemen-and-duelling-in-the-18th-and-19th-centuries/

https://en.wikipedia.org/wiki/Duel

https://en.wikipedia.org/wiki/Matthew_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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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erdad 2018.12.17 1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어린시절 위인전에서 본 나폴레옹시절 병사들의 옷이 너무 멋져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과도 근위대와 후사르, 흉갑기병들의 군복과 군모들은 화려하기 그지없지요. 예전엔 이런 제복들을 일괄생산해서 수십만명에게, 그것도 곧 죽어자빠질 군인들에게 지급하는 근대유럽의 생산성이 경이로웠는데, 실제 모습은 그렇게 통일된 모습은 아니었겠지요.

    • franken 2018.12.17 15: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유럽은 이미 가내수공업 수준은 벗어나서 풍력이나 수력으로 돌아가는 기계장치가 있는 원시적인 방직공장이 곳곳에 있어 군인들에게도 그럭저럭 피복공급은 가능했죠. 근데 말씀하신 데로 생산성 한계는 명확해서 나폴레옹 전쟁 말기에 징집당한 장정들은 코트를 자기가 사 들고 오든 자기 것을 푸른색으로 물들여서 오든지 알아서 해결해야 했죠.

  2. franken 2018.12.17 1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투가 끝나고 나면 병사나 인근 주민 모두 다 시체의 옷가지는 다 벗겨 챙기는 게 다 이유 있었군요. 구멍이 많이 없는 의류는 그깟 피야 빨면 지워지니 본인이 입어도 되고 팔면 짭짤한 수입원이 되는 것이고 대포구멍이 뚫린 것도 걸레나 다른 옷가지 수선용으로 쓰면 되니...

  3. 유애경 2018.12.18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장에서 전우의 셔츠를 훔쳐 술과 음식으로 바꿨다니, 도둑맞은 사람은 얼마나 열받았을까...상상하니 웃음이...

    본문이랑 상관없는 얘긴데 중학교 다닐때 남자 선생님께 들은 군대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봅니다.
    훈련의 일환으로 가끔씩 사병의 군모나 군화등 개인의 사물을 일부러 감추어 버리는일이 있는데 그걸 잃어버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것을 훔쳐야하고 당한 사람은 또 다른 사병의 것을 훔치러 가고...이게 반복되다가 결국 마지막 사람이 기합을 받는다더군요.
    어느날 별을 다신 높은분이 시찰인가를 오셨는데, 하필 그날 어떤 사병이, 훈련인지 아니면 진짜로 모자를 분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급한 마음에 화장실 칸안에 있던 다른 사병의 모자를 (화장실 위아래가 뚫려있나보죠?) 훔쳐 쓰고 연병장에 집합했는데 알고보니 그 별 다신 분의 모자를 훔친거였다고...

  4. TheK의 추천영화 2018.12.18 2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면 우린 무척이나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나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님의 글을 읽다보면 그 시대 한 복판에 있다 온 느낌입니다.
    매번 심도 깊은 글 감사합니다. ^-^0*

  5. 웃자웃어 2018.12.18 2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질문있어요.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이 영토 절반을 잃은걸로 아는데, 그로 인해 인구는 어느정도의 손실을 했나요? 틸지트 조약 이전에는 인구가 500만 정도였던걸로 압니다만.

    • reinhardt100 2018.12.19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틸지트 조약 이전에 프로이센 인구는 1000만 정도 였습니다. 7년 전쟁 이후 라인란트 등 엘베강 이서에서의 영토 확대,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시절보다 인구가 배로 늘어났거든요.

      틸지트 조약 때 프로이센이 상실한 지역이 2,3차 폴란드 분할 때 획득한 폴란드계 다수 지역으로 이들 지역 인구가 200만 이상, 엘베강 이서 지역의 인구 200만 이상이 날아가 버렸죠. 실질적으로 프로이센 인구가 1808년 기준 500만 조금 넘는 수준으로 거진 반 정도 줄어든 겁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종전으로 인해 빈 체제가 된 후 프로이센은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프리슬란트 등을 엘베강 이서에서 확보했고, 2차 폴란드 분할 당시 획득한 지역 및 작센 왕국령 58%를 패전국인 작센으로부터 획득하여 1818년 기준 인구 1200만까지 증가합니다. 프로이센 및 독일 인구가 이 때부터 폭증하는데 단 40년만에 인구가 2400만으로 증가했고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통일 독일 2제국이 성립한 1871년에는 독일 제국 전체 인구가 4200만이 됩니다. 다시 1900년 기준으로 7000만까지 증가하면서 사실상 인구만 치면 영국과 프랑스 모두 합친 수준이 됩니다.

    • 웃자웃어 2018.12.19 1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프로이센이 틸지트 조약 이후로 예비군 제도를 도입한걸로 아는데, 그걸 통해 어느정도 규모의 병력을 동원할수 있었나요?

    • 최홍락 2018.12.19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틸지트 조약에 따라 상비군이 4만3천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예비군을 통해 8만까지 동원 가능했다고 하니 아마 상비군과 비슷한 규모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 reinhardt100 2018.12.19 2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비군법 및 각종 법률을 통해서 동원가능한 예비군 정원을 현역병 정원과 거의 같게 유지토록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된게 소총수급문제였는데 소총 생산을 할 수 있는 슐레지엔의 병기창이 프랑스군의 직접 감독하에 들어갔죠. 이 때문에 예비군 숫자는 전면 도입되었던 국민개병제로 어떻게든 채울 수 있었지만 소총부족 때문에 병력동원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예비역 훈련 주기를 짧은 대신에 자주 돌아오게 하는 식으로 구성시켜 생활에 주는 부담을 줄이는 부수효과도 있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원정 이후, 현역 및 예비역 총소집을 통해 12만 병력을 동원하는데 이 때 소총이 모자라 러시아군이 프랑스군으로부터 노획한 소총까지 대거 도입해서 겨우 무장을 완료시키기도 합니다.

  6. 찰리 2019.05.24 0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인들의 옷은 총에 맞았을 때 찢겨져 살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