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술트를 몰아내고 기세를 탄 웰슬리의 영국군과는 달리, 쿠에스타의 스페인군, 좀 더 정확하게는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군은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인데다 무척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쿠에스타의 군대는 그해 3월 28일에 있었던 메데진(Medellin) 전투에서 빅토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1 군단과 격돌하여 총 2만2천 중에 약 7천5백의 사상자와 함께 2천에 가까운 포로를 내는 등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쿠에스타가 거느린 3만6천은 그 이후 새로 끌어모은, 애국심만 있는 신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쿠에스타의 스페인군은 빅토르의 뒤를 추격하다가 그가 세바스티아니와 합류하자 황급히 웰슬리가 자리를 잡고 있던 탈라베라로 허둥지둥 후퇴해온 상태였습니다.


웰슬리는 확실히 명장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탈라베라에 도착하자마자 일대의 지형을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다만 그의 그릇은 나폴레옹보다 확실히 훨씬 더 작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우스테를리츠의 평원을 살펴보며 어느 위치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유인하여 어떻게 적군에게 섬멸적 타격을 입힐까 구상했지요.  그에 비해, 웰슬리는 그저 어느 위치가 방어하기에 더 유리할까를 부지런히 살폈습니다.




(현재의 탈라베라 주변 지도입니다.  당시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방어선은 대략 저 포르티나 시냇물을 따라 구축되었습니다.)




보통 방어선은 강을 따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탈라베라 인근에는 유량이 꽤 풍부한 알베르체(Alberche) 강이 있었으나, 웰슬리는 여기서의 방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동쪽에서 올텐데, 불행히도 이 강의 동쪽이 고지대였고 연합군이 자리잡을 서안이 저지대였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자신들을 훤히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댈텐데, 그건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지요.  결국 그는 탈라베라 북쪽으로 길게 뻗은 포르티나(Portina) 시냇물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실은 이 시냇물은 너무 얕고 좁아서 방어선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웰슬리가 여기를 택한 이유는 이 시냇물 바로 동쪽에 언덕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언덕의 이름은 메데진 언덕(Cerro de Medellin)이라고 했는데, 다만 이 언덕은 웰슬리가 제일 좋아하는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어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언덕을 선호했습니다만, 불행히도 메데진 언덕은 거의 동서 방향으로 늘어진 언덕이었습니다.  다만 이 언덕 북쪽으로는 또 세구리야 산맥(Sierra de Segurilla)가 이어져 있었고 메데진 언덕과 세구리야 산맥 사이에는 좁은 협곡이 있었습니다.  이 협곡만 잘 틀어막으면 꽤 훌륭한 수비 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메데진 언덕과 탈라베라 사이의 텅빈 공간은 오히려 더 좋은 방어 조건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곳은 평탄한 평원인 대신, 그에 맞게 올리브 나무들이 울창하게 심어져 있었고 거기에 올리브 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한 돌담까지 잘 만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Talavera de La Reina, 여왕의 탈라베라)라는 이 소도시 자체도 중세 시절의 아담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근대적인 포격전에는 못 버티더라도 총격전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어진지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도 남아있는 탈라베라의 성벽 일부입니다.  탈라베라를 감싼 성벽은 사실 성벽이라기보다는 한양 도성처럼 city wall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중세에 만들어진 것이라 근대적 포격을 버틸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보병 전투에서는 여전히 훌륭한 방어벽 역할을 했습니다.)




웰슬리는 스페인군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부하인 영국군 사병들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웰슬리는 스페인군의 사병들은 물론 장교들, 심지어 쿠에스타 장군도 믿기는 커녕 경멸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는 27일 프랑스군에게 쫓기다시피 허둥지둥 탈라베라로 들어온 스페인군에게는 언덕 후사면을 이용하는 고급(?) 방어전술을 구사할 능력이 없다고 보고 상대적으로 더 견고한 위치인 남쪽 전선, 즉 메데진 언덕과 탈라베라 사이의 돌담으로 둘러싸인 올리브 밭을 맡도록 제안했습니다.  쿠에스타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약 1년 전에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안달루시아 지방에 펼쳐진 올리브 밭을 보고 그 규모가 하도 광대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저 사진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온 산과 들판이 모조리 올리브 나무로 가득하더군요.)




빅토르가 이끄는 프랑스군 제1 군단 본진은 27일 오후에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알베르체 강을 건넜습니다.  빅토르의 프랑스군은 가볍게 볼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27일 낮 쿠에스타의 후퇴를 지원하러 웰슬리가 내보낸 영국군 보병 연대와 기병대는 서투르게 움직이다 서로의 거리를 필요 이상으로 떨어뜨리는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노련한 빅토르는 그 작고 짧은 틈은 덮쳐 영국군을 400명이라는 큰 숫자의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빅토르는 무척이나 부지런하고 투지가 넘치는 전형적인 나폴레옹의 부하였습니다.  혼쭐이 나서 물러난 영국군과 스페인군은 저녁 무렵이 되자 일단 오늘 전투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녁 7시 경 연합군의 방어선 앞에 도착한 빅토르는 스페인군의 방어선을 확인하고자 탈라베라와 메데진 언덕 사이의 올리브 밭 쪽으로 소수의 정찰 기병대를 내보냈는데, 여기서 그만 사고가 터집니다.  저 멀리 나타난 프랑스군 기병대를 보고 흥분한 스페인군이, 아직 그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더 꼴불견이었던 것은 그 일제 사격 직후 머스켓 소총을 쏜 스페인군 병사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공포에 질려 '배신이다'를 외치며 방어선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점이었습니다.  영국 측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렇게 도망친 스페인군은 탈라베라 시내까지 도망쳐 들어간 뒤 시내 술집을 습격하여 와인을 퍼마셨다고 합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여기서 도망친 스페인군은 약 2천명에 불과(?)했습니다.  작은 수는 아니지만 전체 3만4천 중 3만2천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겁에 질려 도망친 2천명은 쿠에스타가 출동시킨 스페인 기병대에 의해 곧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스페인군 전체가 어이없이 이렇게 무너졌다면 영국군의 작은 실수도 포착하던 빅토르가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겠지요.


이 사건이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빅토르는 연합군의 방어선 지형을 면밀히 관찰해 본 뒤, 웰슬리가 의도하던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탈라베라와 메데진 언덕 사이의 올리브 밭은 상당히 견고한 방어선이므로 차라리 메데진 언덕을 공격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군의 상태로 볼 때 영국군이 무너지면 스페인군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므로, 영국군이 맡은 메데진에 전력을 기울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빅토르의 모든 생각이 웰슬리가 예상했던 범주 내에 들어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빅토르는 웰슬리의 예상과는 반대로, 27일 밤 영국군이 편하게 잠을 자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빅토르에게는 서둘러야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를 독차지하고 싶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그렇다치고, 그는 경멸하던 조제프 왕과 주르당의 지휘를 받아가며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빅토르는 한밤 중에 뤼팽(Ruffin) 장군의 사단을 출동시켜 영국군 방어선 중 가장 강력한 부분이었던 메데진 언덕 정상부를 들이쳤습니다.  거길 탈취하면 영국군은 물러날 것이고, 그러면 스페인군도 물러날 것이라는 계산이었지요.  그러나 과욕은 실수를 낳는 법입니다.  게다가 평소 나폴레옹이 야간 전투를 싫어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뤼팽 사단 3개 연대 중 무려 2개 연대가 어둠 속에 길을 잃고 엉뚱한 곳을 헤맸고, 목표 지점에 제대로 접근한 것은 약 1600명 규모인 제9 경보병 연대 하나 뿐이었던 것입니다.  



(세구리야 산맥에서 내려다본 메데진 언덕입니다.)




이렇게 고작 1개 연대 병력으로 영국군 방어선 중 가장 단단한 곳을 들이친 프랑스군의 공세는 산산조각 나면서 좌절되었을까요 ?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능선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던 KGL(King's German Legion, 하노버 출신의 독일인들로 구성된 영국군) 여단을 삽시간에 격파하고 메데전 언덕 최정상부를 점령했습니다.  웰링턴이 철석같이 의지하려고 했던 메데진 언덕이 어이없이 떨어지는 순간이었고, 어쩌면 이대로 탈라베라 전투의 끝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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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비니우스 2018.03.10 1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참 신기한게 4년전에 트라팔가스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스페인군을 박살냈는데 이번엔 영국-스페인군이 프랑스군을 박살내려 하고... 7년 전쟁 직전에 있었던 동맹의 역전도 그렇고 유럽 외교는 참 다이나믹합니다 ㄷㄷ

  2. 수비니우스 2018.03.10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댓글 후열독하다가 "탈라베라를 감싼 성벽은 사실 성벽이라기보다는 한양 도성처럼 city wall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라는 부분이 훅 와닿네요. 동대문으로부터 북소문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길을 일년에 한두번씩 가는데 산세가 꽤 험해서 이거 짓느라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18.7km나 되는 이 성곽은 정작 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병자호란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죠. 길이는 너무 긴데 높이는 5m정도 밖에 안되서 제대로 된 농성을 할수 없다고 본 조정이 바로 한양을 버리고 몽진했으니까요. 이럴꺼면 왜 지었을까 싶습니다. 왕도에 성벽이 없으면 모양이 빠지긴 하지만 북대문쪽을 개고생하며 지었을걸 생각하면 진짜 왜지었을까 싶어요. 근대 일본의 오사카성이나 에도성 아니면 고대 한국의 (신라가 지은) 삼년산성이나 (백제가 지은) 진주성 같이 지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3. 발음충 2018.03.11 15: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Medellin은 메데인이 정확한 발음 같습니다

    • nasica 2018.03.11 18: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에는 메데인이라고 쓰려고 했는데 (영화 '시카리오'에서 메데인이라는 단어를 자막으로 봤거든요), 혹시나 싶어 다음 site에서 확인을 해보니 제 귀에는 '메데진'이라고 들리더라구요. 일단 귀에 들리는대로 쓰자는 생각에 메데진이라고 표기했습니다.

      https://ko.forvo.com/search/Medell%C3%ADn/

  4. 발음충 2018.03.11 15: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Medellín (Spanish pronunciation: [meðeˈʝin] 인데 ʝ은 y 발음이기 때문입니다

  5. 발음충 2018.03.11 15: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데인 카르텔'이 유명합니다.

  6. reinhardt100 2018.03.11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흔히 말하는 'city wall'이라는 서구식 용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동양적으로 보면 상당히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탈라베라 성벽같은 스타일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에서의 공성전 이전, 즉, 중세식 스타일의 성벽이긴 합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는 말 그대로 전면전 수준의 회전보다는 흔히 말하는 '고정되지 않은' 휴전선의 GOP나 GP같은 전방의 소규모 기지 하나하나를 서로 치고 들어가서 탈취하면서 덤으로 노예로 쓰거나 팔아먹을 포로 및 물자 약탈에 좀더 치우쳐 있다보니 저런 스타일의 성벽들이 꽤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병만 가지고는 공성전을 한다는 건 사실상 말도 안 되니까요.

    흔히 프랑스 혁명전쟁의 만토바와 야파,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바다호스니 함부르크등의 공성전이 있긴 하지만 주 전투가 거진 다 회전화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6-17세기, 정확히는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까지는 오히려 공성전의 전성시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플랑드르와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수백개의 요새들이 건설되면서 독립하려는 네덜란드 공화국과 이를 막으려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 사이에서 거진 80년 전쟁 중반부터는 매년 공성전이 벌어졌으니까요. 당장 유명한것만 따져도 오스탕스, 브레다, 스헤르트헨보스, 그룬로, 올덴잘, 엠덴, 울리히 같은 요새들입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정면 회전을 할 수는 없던 네덜란드가 무한정의 재력을 바탕으로 에스파냐를 소모시키는 전략으로 나갔으니까요. 동시대, 베네치아 역시 동지중해의 주요 거점을 모조리 요새로 도배해버리면서 터키제국의 공세를 최대한 막아내는 방식으로 싸웠기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30년 전쟁, 1630년대 중반 신교도측, 특히 스웨덴군을 패전 직전에서 구해낸 결전수단이 연안 요새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자금지원 및 해군력에 의한 보급을 통해 가톨릭동맹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방식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먹히면서 켐니츠니 비트슈토크 같은 전투로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얀카우등에서 야전에서의 절대우세를 확보하는데 성공. 결국 승전을 이끌어낸 방식이다보니 공성전 중심으로 전쟁의 진행방식이 한동안 이루어집니다.

    다만, 공성전 중심의 전쟁 진행은 지나친 소모전이다보니 재정부담이 극심했었고 평시에도 국가예산을 꽤나 잡아먹는 형국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 공성전의 대가인 보방후작이 프랑스국경지대에 건설한 요새가 대충 300개 이상인데 이걸 초기 종심방어형태로 몇개의 선에 걸쳐 건설하고 게다가 그 많은 요새의 설계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이미 예산이 미친듯이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보방이 8각형 요새 같은 규격화된 요새형식을 선보였지만 그런거로는 너무 부족했죠.

    18세기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는 공성전이 꽤 이루어지지만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슬슬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말플라크, 드냉 같은 중요한 전투는 모두 야전으로 결정되었으니까요. 결정타를 날린 것은 7년 전쟁의 로스바흐, 로이텐 같은 프리드리히 2세의 기동전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준 겁니다. 이러다보니 나폴레옹전쟁에서는 주로 기동전, 회전 중심으로 전쟁이 진행되게 된니다.

  7. JPM 2018.03.12 0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웰즐리와 나폴레옹의 그릇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 — 이기면 다 잘하는거 아닌가요? ㅋㅋㅋ) 웰즐리는 해외원정군으로써 방어만 해도 이기는 전쟁이였고 나폴레옹과 대회전을 하는 전략적 목표가 달라서 방어우선과 공격중심의 전략이 나온거 아닐까 합니다. 아 물론, 그냥 해당 포스팅에서 비교하신 것만 생각한겁니다. 쓰다보니 또 나폴레옹은 열세에서도 공격을 외쳤네요. 어려운 교지만 둘 다 한끗발 하던 분들이니 비교가 힘든거 같습니다. 뭐, 그냥 웰즐리 변호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나시카님은 나폴레옹 vs 웰즐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도 사실 조금 궁금하구요.

    • nasica 2018.03.12 0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웰슬리가 나폴레옹을 꺾었지만, 나폴레옹이 해낸 것을 웰슬리는 못 했을겁니다. 가령 대전차 미사일이 상황이 맞으면 탱크를 파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전차 미사일이 탱크보다 더 우수한 무기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8. 발음충 2018.03.12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 보고 찾아봤는데 메데진에 가까운 발음이 들리는 게 제가 알고 있던 얄팍한 지식에 너무 벗어나는게 신기해서 좀더 찾아보았더니
    이런 현상이 있나 보네요

    https://en.wikipedia.org/wiki/Yeísmo
    요약하자면 ll은 원칙적으로는 y 발음인데 스페인의 다양한 사투리나 남미 지방의 상이한 발음에 따라 z로 발음되는 경우도 많이 통용된다고 하네요
    Most dialects that merge the two sounds represented by ⟨ll⟩ and ⟨y⟩ realize the remaining sound as a voiced palatal fricative [ʝ], which is similar to the ⟨y⟩ in English your, but it sometimes sounds like ⟨j⟩ in English jar, especially after /n/ or /l/ or at the beginning of a word. For example, relleno is pronounced [reˈʝeno] and conllevar is pronounced [koɲɟ͡ʝeˈβaɾ] or [koɲdʒeˈβaɾ].

    Yeísmo has always been common in much of Latin America, mainly in lowlands, and in large areas in Sp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