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zweibrücken2

바이에른의 배신 (3) - 일루미나티의 그림자 나폴레옹보다 10년 먼저 태어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막시밀리안 칼 조제프 프란츠 드 파울라 히에로니무스 드 가네린 드 라 튈(Maximilian Karl Joseph Franz de Paula Hieronymus de Garnerin de la Thuille)이라는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뒤섞인 매우 긴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 아버지가 사보이(Savoy) 공국 출신으로 바이에른 군대에 자리를 얻고 뮌헨에 정착한 귀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뮌헨에서 태어난 이 청년의 국적은 바이에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프랑스어를 썼고, 나중에 바이에른의 총리가 되어 몽겔라스 백작(Graf von Montgelas)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지게 된 이 청년은 노인이 되어서도 독일어보다는 프랑스어를.. 2024. 8. 26.
바이에른의 배신 (2) - 럼포드 수프를 먹는 나라 바이에른 공국에게 있어 처음에는 강 건너 불구경이던 프랑스 대혁명은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활활 불타올라 밀물처럼 국경을 넘었습니다.  1793년 루이 16세와 앙트와넷을 처형한 프랑스 국민공회는 1795년 불한당 같은 명장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를 앞세워 평소 그렇게 탐을 내던 라인강 서쪽의 바이에른 고립영토(exclave)이자,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였던 카알 테오도어(Karl Theodor)의 고향이자 본거지인 팔츠(Pfalz) 선제후령과 율리히(Jülich) 공작령을 점령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 해인 1796년 모로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까지 점령했는데, 바이에른군은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대국 프랑.. 2024.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