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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rpe's havoc'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2.10 어느 용자의 초상 - 프랑스군의 포르투갈 탈출 (11)
  2. 2018.02.04 이발사 vs. 원수 - 포르투(Porto) 전투 3편 (8)

1809년 5월 12일 포르투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이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허겁지겁 산길로 후퇴해야 했고, 따라서 모든 짐은 물론 대포까지 다 버리고 가야 했습니다.  분노한 포르투갈 민간인들에게 학살당할 것이 뻔한데도 부상병들을 버리고 감은 물론, 군자금까지 병사들에게 마구 나누어줄 상황이었습니다.  때는 이른 5월이라 차가운 비까지 계속 내려 후퇴하는 프랑스 병사들의 사기까지 축 적셔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 길 바쁜 프랑스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폰트 노바(Ponte Nova, 새 다리, 스페인어로는 Puento Nuevo)라는 이름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술트 원수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두개의 긴 대들보만 남기고 그 위를 가로지른 널판지는 다 해체된 상태의 다리였습니다.  이 다리는 프랑스군이 스페인으로 퇴각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다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백여명의 포르투갈 민병대(ordenanza)가 기세를 올리며 프랑스군에게 야유를 보내고 있었지요.  원래 영국군은 포르투갈 민병대에게 연락하여, 이 폰트 노바 다리를 완전히 끊어 버릴 것을 요청했지만, 중세 시대 때 지어진 이 유서깊은 다리가 완전 파괴되면 당장 그 일대의 포르투갈 민간인들이 생활이 당장 크게 곤란해졌으므로, 민병대는 영국군의 요청보다는 자신들의 생활을 위해 이 다리의 상면과 난간만을 뜯어낸 것이었습니다.  다리를 완전 파괴하여, 그 덕택에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전멸시키거나 항복을 받아내더라도, 영국군이 이 다리를 재건해줄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어쨌거나, 이 폭 90cm 정도의 좁은 대들보 2개만 나란히 놓인 이 다리는, 포르투갈 민병대 백여명이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계속 비가 내려 대들보는 무척 미끄러운 상태였습니다.  포르투갈 민병대는 이 정도면 다리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폰트 노바 앞에 도착한 것이 5월 15일 낮이었는데, 이미 영국군의 척후 기병대가 프랑스군 후미에 나타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틀도 아니고 하루만 더 여기에 발이 묶이면 프랑스군은 항복하거나 옥쇄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폰트 노바입니다.  지금은 살라몬데 Salamonde 댐 건설로 수몰되어, 저 수면 30m 아래에 위치해 있답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술트 원수는 제2 군단 전체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소문난 사나이를 소환했습니다.  바로 루이-에티엔 뒬롱 (Louis-Etienne Dulong) 소령이었습니다.  뒬롱 소령은 영국 작가 버나드 콘월의 나폴레옹 시대 전쟁 소설인 샤프 시리즈 중 Sharpe's Havoc 편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9년 포르투갈) -------------------


(샤프 중위의 영국군 라이플병들이 점거하고 있는 고지 위의 감시탑을 뒬롱 소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야밤에 급습합니다.  샤프 중위의 지휘 하에 영국군이 반격에 나섭니다.)


프랑스군은 폐허가 된 감시탑 앞의 석조 테라스 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한 장교가 그들에게 화가 난 듯 고함을 지르더니, 그 장교가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왔다.  영국군 측에서는 샤프가 앞으로 나서며 그와 검을 맞부딪히며 힘을 겨루었는데, 그는 이번에도 박치기로 상대를 공격했다.  번개불 속에 드러난 상대 장교의 얼굴을 보니 박치기 공격에 깜짝 놀라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장교도 샤프와 같은 부류 출신임이 분명해 보였다. (샤프는 런던 극빈층 고아원 출신입니다 : 역주)  그 장교도 두 손가락으로 샤프의 눈을 찌르며 샤프의 사타구니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던 것이다.  샤프는 옆으로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손에 쥔 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상대방의 턱을 강타했다.  프랑스 병사 2명이 쓰러진 장교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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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소설 속에서 샤프와 개싸움을 벌이다 얻어 터지는 장교가 뒬롱(Dulong) 소령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앙리 뒬롱(Henri Dulong) 소령으로 나오고, 제31 경보병 연대 소속으로 나오지만, 실제 이름은 루이-에티엔 뒬롱 (Louis-Etienne Dulong)이었고 이때 당시는 제32 경보병 연대 소속이었습니다.   또, 위 소설 속에서는 뒬롱 소령이 마치 주인공 샤프처럼 깡패 출신이었다가 입신양명하여 군 장교직에 오른 것과 비슷한 경력을 지닌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외과의사의 아들로서,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뒬롱 소령은 저렇게 영국군 중위에게 얻어터지고 질질 끌려나간 적은 없습니다.  작가인 버나드 콘웰도, 뒬롱 소령과 같은 장교가 자기 소설 속에서 저런 굴욕을 당하도록 만들어서 무척 미안했다고 후기에 적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의 뒬롱 소령과, 실존 인물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용기입니다.  위의 Sharpe's Havoc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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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뒬롱 소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제 곡사포 포격의 엄호 하에, 고지 위의 영국군 라이플병들을 향해 대낮에 돌격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라이플의 긴 사정거리와 정확성 때문에 고전합니다.)


뒬롱 소령은 이제 라이플병들을 볼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곡사포탄이 프랑스 보병들의 머리 위를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고지 위에서 폭발하며 위협하는데도, 라이플병들이 그걸 무시하고 이젠 숨어있던 바위 틈에서 일어나 서서 소총을 재장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뒬롱 소령은 그의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러 저 녹색 군복을 입은 적군에게 사격하라고 명령했지만, 머스켓 소총의 총성은 미약했고 머스켓 총알은 크게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에 비해 라이플 총탄은 아주 정확하게 프랑스 병사들을 노렸으므로, 병사들은 고지로 향하는 좁은 길목 위로 계속 올라가기를 꺼려했다.  

뒬롱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운만 좋다면 라이플 사격에 쓰러지지 않고 고지 위 방벽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솔선수범의 예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소리를 지르고, 검을 뽑아들고 돌격했다.  "프랑스 만세 !"  그는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


"사격 중지 !" 샤프가 외쳤다.


뒬롱을 따르는 프랑스 병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는 혼자 돌격해오고 있었고, 샤프는 그 프랑스인의 용기를 높이 사서, 그에 경의를 표하고자 앞으로 걸어나와 예식에서 하듯 그의 검을 들어 경례를 했다.  뒬롱은 그 경례를 보고는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고, 그가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샤프를 향해 돌아보고, 그도 검을 들어 경례를 한 뒤, 난폭한 동작으로 검을 다시 검집에 찔러넣으며 황제 폐하를 위해 죽기를 겁내는 그의 부하들에 대한 경멸을 드러냈다.  그는 샤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걸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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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이 불필요하고 어색한 장면은, 아마도 작가 버나드 콘월이 뒬롱 소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억지로 밀어넣은 장면 같습니다.  샤프처럼 무자비하고 인정머리없는 친구가 단순히 혼자 돌격하는 프랑스 장교를 보고 사격 중지를 외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러나 실제 뒬롱 소령이었다면, 소설 속의 이런 행동을 실제로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역사 속 실존 인물인 뒬롱 소령이 그 용기를 드높인 사건을 보면,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말 들거든요.


술트는 뒬롱 소령에게 100명의 선발된 척탄병을 맡기며, 밤까지 기다렸다가 다리를 탈취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뒬롱 소령은 그 중 단 12명의 척탄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야음을 틈타 완전한 침묵 속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비바람이 부는 때라서, 12명의 척탄병들 중 1명이 다리를 건너다 미끄러져 저 아래 급류 속에 빠질 때의 비명 소리나 다리 입구에 서있던 보초병을 뒬롱 소령 자신이 검으로 해치울 때의 소리가 묻혀버렸습니다.  이렇게 다리를 건넌 뒬롱 소령 일행은 비바람을 피해 움막에 들어가 있던 포르투갈 민병대를 급습했고, 프랑스군 수백명이 넘어온 것으로 착각한 민병대는 별 저항을 못하고 흩어져 도주해버렸습니다.


뒬롱 소령의 이 위업이 술트의 제2군단 전체를 구출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포르투갈 민병대의 경계 태만이 더 주요한 원인 같습니다만...)   당장 그날밤 중으로 다리를 수리한 뒤 전체 프랑스군이 다리를 건넜고, 술트는 자신이 달고 있던 레종 도뇌르 훈장을 떼어내 현장에서 뒬롱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이번에는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또 다시 같은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 폰트 다 미사헬라라는 다리는 폰트 노바와는 달리 로마 시대에 지어진, 석조 다리로서, 이번에는 대낮이었고, 또 밤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소설 속의 장면을 보시지요.





(구글에서 Ponte da Mizarela를 찾아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19세기 초에 다시 지어진 다리라고 하니까, 이 사건 이후에 다시 지어진 모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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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2개 대대가 다리를 공략하겠지만, 다리 건너편 끝에 설치된 가시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공격하는 병사들은 산산조각 날 것이 뻔해 보였다.  1.2m 높이에 두께도 그 정도 되는 이 장애물은 20여개의 가시 덤불을 서로 묶고 통나무로 눌러놓아 만든 것으로서, 돌파하기 아주 곤란한 물건이었다.  따라서 결사대(Forlorn Hope)가 제안되었다.  결사대라는 것은 동료들의 돌파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된 병사들의 무리로서, 보통 이런 자살 공격대는 방어가 철저한 적의 요새 벽에 뚫린 구멍에 투입되곤 했지만, 오늘의 공격조는 반쯤 해체된 다리의 좁은 통로를 건너야 했고, 쏟아질 머스켓 사격에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이 가시덤불 장애물을 치워야 했다.  


제31 경보병 연대의 뒬롱 소령은, 반짝거리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단 채로, 이 결사대의 지휘관으로 자원했다.  이번에는 어둠을 틈탈 수도 없었고, 또 적의 수도 훨씬 많았지만, 장갑을 끼고 가시 장애물을 치우는 혼전 속에서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검 손잡이에 달린 가죽끈을 손목에 졸라매는 그의 굳은 얼굴에서 걱정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전위대를 지휘하는 루아송(Loison) 장군은 전 병사들이 강둑에 늘어서서 머스켓이든 기병총이든, 심지어 권총이라도, 포르투갈 민병대(ordenanza)에게 위협 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격으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음이 극에 달했을 때, 뒬롱은 검을 높이 들었다가 앞으로 내지르며 돌격 명령을 내렸다.


뒬롱 자신이 속한 연대의 유격 중대가 다리 위를 내달렸다.  남아있는 돌다리의 좁은 틈 사이로는 겨우 3명이 나란히 통과할 수 있었고, 뒬롱은 그중 가장 첫번째 줄에 있었다.  포르투갈 민병대는 크게 야유를 보내고는 흙으로 쌓은 엄폐물 뒤에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뒬롱은 가슴에 총을 맞았고, 그는 총알이 어제 밤의 공로로 새로 받은 훈장을 때리고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총알이 폐까지 뚫고 들어왔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에게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고함을 지르려 했으나, 숨이 가빠 소리를 지를 수 없었고, 대신 장갑을 낀 손으로 가시덤불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더 많은 병사들이 도착하여 좁은 다리 위에 빽빽히 늘어섰다.  한명은 발이 미끄러져 흰 거품이 일어나는 미사렐라(Misarella) 강의 급류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총알이 결사대 병사들의 여기저기를 강타했고, 대기는 화약 연기와 뭔가 부러지는 소리와 총탄이 핑핑 날아다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하지만 뒬롱 소령은 마침내 장애물 한 부분을 강 속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고, 병사 한명이 통과할 만한 틈을 만들어냈다.  이 틈은 함정에 빠진 프랑스 2군단 전체를 구하기에 충분할 만큼 큰 것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 틈 사이로 들어가 검을 높이 들고, 숨을 쉬려 애쓰며 입으로 피거품을 내뿜었다.  지원 대대들이 총검을 꽂은 채 다리로 달려들면서, 그의 뒤에서 엄청나게 큰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뒬롱의 결사대 중 살아남은 병사들이 가시덤불의 나머지 부분들을 치워내면서, 이미 전사한 유격병(voltigeur) 10여명의 시체를 무자비하게 다리 밑 강물 속으로 발로 차 던져 버렸다.  그들은 함성과 함께 돌격했고, 뒬롱 소령의 결사대를 저지하기 위해 총을 쏜 뒤 아직 재장전 중이던 포르투갈 민병대원들은 프랑스군이 떼거리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도주해버렸다.  수백 명의 민병대원은 프랑스 총검을 피하기 위해 서쪽 언덕을 기어 올랐다.  


뒬롱은 포르투갈 민병대가 버리고 간 가장 가까운 엄폐물 근처에 멈춰섰고, 거기서 그는 검이 손목에 연결된 가죽끈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채로 허리를 굽혔고, 피와 침이 섞여 그의 턱으로 길게 흘러내렸다.  그는 눈을 감았고, 기도를 하려고 애를 썼다.


"들 것을 가져와 !" 한 하사관이 외쳤다.  "들 것을 만들어. 의사를 찾아 !"  프랑스군 2개 대대가 포르투갈 민병대를 다리에서 쫓아냈다.  아직 포르투갈인 몇몇이 왼쪽의 높은 바위 언덕에서 얼쩡대고 있었지만, 머스켓 소총을 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그들이 그냥 자신들이 탈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뒬롱 소령이 함정의 마지막 틀을 억지로 열어젖힌 것이었고, 이제 북쪽으로 향하는 도로는 활짝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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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장면을 읽고 대체 뒬롱 소령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중상을 입은 것은 사실인 모양인데, 당시 프랑스군은 금은보화도 다 버리고 가는 마당에 설령 살 수 있다고 해도 저런 중상자를 데리고 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 더 마음에 걸렸습니다.  예, 좀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가인 버나드 콘월은 작품 맨 끝 부분에 historical note를 적는 것으로 유명한데, 거기서 작가 자신도 이 사건 이후 뒬롱 소령의 생사 여부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작가 버나드 콘월입니다.)




그런데, 이 뒬롱 소령의 생사 여부를 구글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Sharpe's Havoc이 씌여지던 2002~2003년 당시엔 구글이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었나 보지요 ?  다음 사이트, 즉 유명한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 뒬롱 소령의 초상화가 1997년 5월 22일에 무려 $1,652,500, 우리 가격으로는 대략 18억원에 팔렸다는 상세 기록이 나와 있더군요.   1997년 가격으로 18억원이면, 지금 가격으로는 한 30억 되겠네요.


http://www.christies.com/LotFinder/lot_details.aspx?intObjectID=226156





(저 도전적인 표정 속에 뭔가 슬픔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




이 별로 손이 많이 간 것 같지 않은 단색 초상화가 무려 18억원에 팔린 것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대가인 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Ingres)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General Louis-Etienne Dulong de Rosnay의 초상입니다.  즉, 뒬롱 소령은 푸엔테 마세렐라에서 죽지 않았고, 나중에 장군까지 승진한 것입니다.  이 크리스티 경매 기록에는 앵그르가 1818년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1815년 나폴레옹 몰락 이후, 일감이 떨어져 돈이 궁했기 때문...)은 물론이고, 모델이었던 뒬롱 장군에 대해서도 상세히 씌여 있습니다.  그가 폰트 노바에서 영웅적인 활약으로 술트의 포르투갈 원정군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818년에 그려진 것으로, 흐릿한 로마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앵그르는 이런 나폴레옹 찬양화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나폴레옹 몰락 직후에는 금전 사정이 급격히 안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주로 이런저런 중산층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먹고 살았고, 뒬롱 장군의 초상도 그런 이유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1840년 앵그르가 사정이 좋아진 뒤에 그린 '오달리스크' 입니다.)




원래 뒬롱 드 로즈네는 1780년 프랑스 동부 시골인 로즈네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보다 11살 정도 어린 셈이지요.  그는 1798년 18살의 나이로 처음에는 외무성에 잠깐 몸을 담았다가, 1년 만인 1799년에 장교로 군에 입대합니다.  역시 당시에는 출세의 야망이 있는 건강한 젊은이에게는 군대가 최고의 직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수완이 좋았는지 1년만에 중위를 거쳐 대위까지 승진합니다.  그러나 소령 진급에는 다소 시간이 걸려, 1807년에야 승진을 합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809년, 즉 위 소설 속 배경이 되는 포르투(Porto) 작전 직후에는 대령으로 진급을 했더군요.  그러니까 술트가 자신과 제2군단을 구해낸 영웅을 잊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1800년부터 1807년 사이에는 여러가지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는데, 그 사이에 뒬롱의 활약은 별로 없었을까요 ?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도 참전했었고, 이때 큰 부상을 입어 평생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  저 초상화를 자세히 보시면, 오른팔이 슬링에 걸려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즉, 1809년 포르투갈에서 술트의 제2 군단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넘어 돌격할 때, 그는 이미 한 쪽 팔은 못쓰는 불구의 몸이었고, 검은 왼손으로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트가 그에게 결사대의 지휘를, 그것도 2번이나 맡긴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용감한 사나이였는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1810년에 이루어진 그의 건강진단서를 보면, 그의 몸에는 13군데의 큰 상처가 있었고, 모두 평생 큰 고통을 주는 상처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폰트 다 미사헬라에서 입은 것이겠네요.


뒬롱 소령이 폰트 다 미사헬라에서 입은 상처가 어디에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웹사이트에 따르면 그는 이때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또, 이때 쓰러진 그를 어떻게든 데리고 가기 위해 (다른 부상병들은 버리고 가더라도 낭만적인 프랑스인들이 아니더라도 이런 영웅을 그렇게 버리고 갈 리는 없지요) 사단장이 들 것을 만들어, 각 연대에서 가장 신체 조건이 좋은 척탄병들이 번갈아가며 그의 들 것을 운반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속했던 연대의 척탄병들이 우리의 영웅을 다른 연대에게 맡길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하고, 자기들끼리 떠매고 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또 그의 소속 연대가 32연대가 아니라 15연대라고 되어 있네요...)


1813년에, 그는 자작으로 봉해지면서 장군이 되었는데, 그때 그는 나폴레옹의 신참 근위대(Jeune Garde)에서 복무해줄 것을 요청받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된 사람들을 보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자신의 주변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병사나 장군이 있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사람을 신참 근위대 지휘관으로 삼은 것은, 이 고참 장교의 용기에 대한 대단한 칭송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쨌거나 뒬롱 장군은 1815년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 때, 나폴레옹을 따르지 않고 부르봉 왕가를 섬기는 것을 택했습니다.  부르봉 왕가는 이미 혼이 단단히 난 상태였기 때문에, 군 장교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안절부절하는 상태였던지라, 뒬롱 장군과 같은 저명한 장군의 비위를 맞추고자 뒬롱을 백작에 봉하고 루이 18세의 근위대 부지휘관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는 나중에 샤를 10세의 즉위식에도 참여했고, 생 루이(Saint Louis) 훈장도 받고, 왕실 인사(gentilhomme de la Chambre du Roi)로도 인정받을 정도로 출세를 거듭했습니다.





(샤를 10세의 즉위식 광경입니다.  뒬롱 장군을 찾아 BoA요.  저는 포기.)




그러나 역시 용감한 군인의 최후는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1828년, 그는 자살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아닌, 평생 그를 괴롭혔던 수만은 전투 부상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불과 48세의 나이였으니, 정말 용감한 늙은 군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Source :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https://fr.wikipedia.org/wiki/Louis_%C3%89tienne_Dulong_de_Rosnay

https://gw.geneanet.org/dorsner?lang=fr&p=louis+etienne&n=dulong+de+rosnay

http://thenapoleonicwargamer.blogspot.kr/2010/07/general-louis-etienne-dulong-de-rosnay.html

http://histoiresdenosfamilles.fr/cahiers_ba/cahier_2_chap3.html

https://en.wikipedia.org/wiki/Ponte_da_Mizar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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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홍락 2018.02.10 2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슷한 일이 100여년후 중국 사천성에서 반복되는 듯 하네요.ㅎ

    • nasica 2018.02.11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공내전 때 일인가요? 저는 그쪽은 잘 몰라서...

    • reinhardt100 2018.02.11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정교 전투 말씀이시군요.

      대장정 직전, '1-4차 초공작전의 실패'라는 실적을 명백히 무시한 오토 브라운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당시 막 제기되었던 스베친이나 트리안다필로프등의 소련식(마르크스적)군사학을 무분별하다 싶을 정도로 맹종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결국 5차 초공 작전에서 강서소비에트등 그나마 있던 기반을 싹 다 날려버리면서 유랑 무장집단화 되어버립니다. 준의회의에서 모택동 지도노선이 채택, 겨우 장국도와 하룡의 홍4방면군과의 합류를 결정하면서 와해 직전 분위기를 추스립니다. 합류 직전에 최대 도하 장애물이었던 대도하의 현수교인 노정교에서 지문과 똑같은(?) 전투가 벌어집니다.

      사실, 노정교 도하전이 대단히 중요했던 이유가 노정교를 도하하지 못하면 70년전 태평천국군 잔당과 똑같은 말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수신과 그 휘하 군단이 사천 정복에 나섰다가 청군의 반격 및 추격에 의해 노정교 근방에서 포위, 전멸된 전례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노정교를 우회하면 추가 이동거리가 2천km였는데 이건 그냥 홍1방면군 붕괴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모택동,주은래,주덕 등의 홍1방면군은 귀주성을 약탈한 후, 사천방면으로 북상, 군벌들 간의 분열로 틈이 많았던 사천 북부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장국도와 하룡의 홍4방면군과 합류하지만, 장국도에 의해 섬서성 대신 사천성 공략으로 전략적 목표가 바뀌면서 국민당군 및 군벌군과 정면대결을 하고 그대로 박살나면서 오히려 모택동 지도노선은 더 확고해집니다. 모택동은 오히려 자기 주장대로 하면서 신화적인 지도력을 가지면서 공산당에서 확고부동한 1인자로 등극하면서 대약진운동 이전까지는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 최홍락 2018.02.11 2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그 노정교 전투 맞습니다. 예전에 이 일화를 접했을때 다리 상판만 제거하고 다리 기본구조는 남겨놓은 것을 보고 군벌들이 군 기강이 헤이하고 상대인 홍군을 가볍게 여겨 홍군에 결정적인 생존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했는데 nasica님의 포르투칼 민병대가 자신의 생활을 위해 똑같이 행동했던 얘기를 보니 그들도 그만한 사정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P.s. 뒬롱 장군 이야기는 예전에 한번 다뤘던 얘기인데 그때 좋은 일화를 소개해주셨지요.

      "용감한 조종사도 있고, 늙은 조종사도 있다. 그러나 용감한 늙은 조종사라는 건 없다." 이 말은 나이가 들면 용기가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나치게 용감한 조종사는 젊은 나이에 일찍 죽기 마련이라는 뜻이더라는ᆢ

    • reinhardt100 2018.02.11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정교 상판만 떼 버린 이유가 이 다리 소유권 문제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18세기에 처음 가설할 때 워낙 돈을 여기저기 끌어다 써서 함부로 철거했다가는 재가설시 비용부담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노정교의 경우, 차마고도와의 연결까지 겹쳐서 대상들의 무역손실까지 겹치니 군벌들 입장에서는 상판철거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는거도 고려해야 합니다.

      흔히, 중원대전을 기준으로 전후 군벌들의 재정조달은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만주의 경우, 장작림과 휘하 군벌이 양찬 등의 곡물상들과 은행들로부터 대두수출의 안전 보장등과 연결해서 만철과 연계, 재정조달을 했습니다. 반면 동부의 연안 지역은 무역 통제 및 상해지역에서의 금융을 통해 조달하였고, 산서의 염석산은 무기제조 및 판매 등 군수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채권 발행 및 지폐발권 등으로 조달했습니다. 서북군벌의 경우에는 신강등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및 중앙아시아, 소련과의 육상 무역으로, 운남이나 양광지역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와의 육.해상 무역 등으로 어떻게든 재원을 마련했습니다. 문제는 사천인데, 사천이 유독 단일군벌로 통일이 되지 못한 이유가 각 군벌별로 확실한 재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천의 잠재력 치고는 굉장히 군벌이 빈약한(?) 편이었다는 게 대장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2. 석총 2018.02.11 1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그분

  3. 쇼펜하우어 2018.02.11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궁금한데 이런 역사적 지식을 어떻게 다 아시는거죠? 서양사 전공하셨나요? 어디서 이런 지식을 쌓으셨나요?

    • nasica 2018.02.11 2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끼적인 것은 지식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책 두어권과 인터넷질 좀 하면 다 나오는 내용인걸요.

    • 쇼펜하우어 2018.02.12 2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영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도 할 줄 아시나 보네요 참고 사이트 보니 대단하시네요

    • nasica 2018.02.13 0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딩 수준의 불어일 뿐이고요, 구글 번역기 씁니다. 불한은 못 봐줄 수준이지만 불영 번역은 꽤 쓸 만 하거든요.

  4. 이부프로펜 2018.02.16 0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때는 제대로된 진통제도 없었던 시절이니... 불과 100년전만해도 지금같은 의약품은 꿈도 못꿨을테니 현대에 태어난 걸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이 도우루 강 남안에서 강을 건널 방법을 못 찾고 당황하는 동안, 술트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5월 10일 도우루 강 남쪽에 있는 그리조(Grijó)라는 작은 마을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트는 비교적 여유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요 ?


그는 나름대로 안전조치를 취해놓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가 위치한 도우루 강 하구는 꽤 넓고 깊어서 사람이나 말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술트는 도우루 강 인근의 모든 바지선과 보트, 조각배들을 모조리 압류하여 북쪽 강변에 끌어다 놓은 상태였습니다.  영국군에게 날개 혹은 지느러미가 없는 이상, 도우루 강을 건너 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만 술트는 영국 해군을 걱정했습니다.  제해권은 영국에게 있으니, 당장 30km 밖 수평선 너머에 영국 프리깃함들이 호위하는 수송선들이 잔뜩 대기 중일 수도 있었습니다.  술트는 웰슬리가 선박을 이용하여 포르투 북쪽 해안 어딘가에 기습 상륙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트는 도우루 강 하구의 산토 조아오 다 포스(S. Joao da Foz) 요새에 수비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습니다.  술트는 전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며, 따라서 이젠 후퇴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정확히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짐을 싸고 있었고 이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강남에 영국군이 나타난 5월 10일 다음날인 5월 11일, 술트는 이미 짐마차와 포병대를 메르메(Julien Augustin Joseph Mermet) 장군의 1개 사단과 함께 스페인으로 후퇴시켰습니다.




(메르메 장군입니다. 원래 귀족의 아들이었고, 오슈(Hoche) 장군 밑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는 네 원수가 나폴레옹 편에 서서 군을 지휘하라고 종용했으나 그 명령을 거부하고 부르봉 왕가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강 남안에 2만이 넘는 영국군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배들을 모조리 북안에 끌어놓았다는 것만 믿고 강변에 경계 병력을 전혀 세워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일인데, 술트처럼 수많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이 이런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주민들이 프랑스군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지요.  어쩌면 그는 일부 영국군이 건너온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보트로 수십 명씩 넘어올 수 밖에 없으므로, 프랑스군이 뒤늦게 그를 알게 되더라도 신속하게 전개하여 아직 수백 명 수준일 영국군을 잽싸게 포위하고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정작 영국군은 강변에 도착한지 하루가 지나도록 정말 아무 것도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술트의 생각대로 영국군에겐 강을 건널 방법이 전혀 없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100%라는 것은 없습니다.  5월 12일 아침,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강변을 수색 중이던 워터스(John Waters) 대령에게 웬 포르투갈 이발사 하나가 다가 왔습니다.  워터스 대령은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해보니 그 이발사는 포르토 시내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프랑스군의 침공과 약탈을 피해 피난 나왔다가, 강 남쪽에 영국군이 왔다는 것을 알고 2~3인용 낚시배 하나를 저어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낚시배 하나로는 병력을 실어나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발사에겐 결정적인 소식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지 않는 강 북안에 와인 수송용 바지(barge)선 몇 척이 있는 곳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발사와 함께 워터스 대령은 그 조각배를 타고 강 북안으로 넘어갔고 실제로 바지선들과 그걸 지키고 있던 현지 주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워터스 대령과 이발사는 마침 현장에 있던 신부의 도움을 받아 그 주민들을 설득, 그 바지선들을 끌고 남안으로 끌고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을 실어날랐을 도우루 강의 와인 수송용 바지선입니다.  저 정도면 한번에 30~40명은 실어나를 수 있겠네요.  바지(barge)선이란 강이나 호수 등 파도가 잔잔한 곳에서 사용되는 평저선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돛대나 엔진이 없어 자력으로 항행하지 못하고 다른 배에게 끌려다니는 배를 말하지만 자력 항해를 하는 평저선도 바지선이라고 부릅니다.)




때는 해가 훤히 뜬 대낮이었습니다.  이들이 약 45m 정도 되는 도우루 강을 가로질러 바지선들을 끌고 가는 모습은 양쪽 강변에서 훤히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배들이 남쪽 강변에 모인 영국군들을 잔뜩 싣고 북안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강북의 프랑스군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영국군 1개 중대가 재빨리 강을 건넜고 강변에 있던 수도원 건물을 점령하고는 돌로 된 벽 뒤와 지붕, 창문 등에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프랑스군도 영국군이 도강 중이라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달려왔을 때는 이미 1개 대대 전체가 수도원에 위치를 잡은 상태였습니다.


아침 11시 30분, 헐레벌떡 달려온 프랑스군의 지휘관은 막시밀리앙 포이(Maximilien Foy)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술트에게 전갈을 보낸 뒤 급한 대로 3개 대대의 보병을 이끌고 달려왔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3대1의 수적 우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튼튼한 돌담이 둘러쳐진 수도원은 막강한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이 비록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미숙한 군대라고는 하지만, 막강 프랑스군에 비해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영국군은 기동성이나 전술적 유연성, 병사들의 자율성이나 인내심, 동기 부여 등 모든 면에서 있어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비해 떨어지는 군대였습니다.  보통 직업 군인인 모병제 군대가 강제로 끌려온 병사들로 이루어진 징병제 군대보다 전투력이 우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그 지휘관인 웰슬리조차 '술 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녀석들'(the scum of the earth, enlisted for drink)이라고 부를 정도로 형편없는 자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민간 사회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입대한 빈민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군에 잉글랜드 출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잉글랜드인들과 그 왕 조지 3세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아일랜드인들이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1/3은 독일인들과 스코틀랜드인으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1/3 정도만 잉글랜드인이었으나 그마저도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사회 최하층민들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사회 지배 계급이었던 장교들은 자기 부대의 병사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당근으로는 럼주를, 채찍으로는 사람 등가죽을 홀랑 벗겨놓는 무지막지한 진짜 채찍질을 휘둘러 병사들을 통제했습니다.  그런 군대에게 다양한 전술을 이해시키고 자율성 및 전술적 유연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비해 우월한 것이 있었습니다.  돈이 많다보니 전체 유럽 군대 중에서 가장 많은 실탄 사격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탄약 뿐만 아니라 머스켓 소총의 부싯돌(flint)을 아끼기 위해 사격 훈련을 할 때 실탄은 커녕 공이치기에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끼워넣고 장탄 및 격발 훈련을 하는 것이 예삿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어지간한 2선 부대들도 실탄 사격 훈련만큼은 상당히 많이 할 수 있었고, 장교들도 병사들에게 다른 것은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그저 빨리 장전해서 빨리 쏘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어차피 저 신뢰할 수 없는 병사들에게 명중률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군 병사들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전투가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실제로 포이 장군의 프랑스군이 수도원을 향해 돌격을 해보니, 빗발처럼 날아드는 영국군 머스켓 소총 세례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포이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많은 사상자만 남기고 프랑스군은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여기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국군은 계속 바지선을 통해 수십 명씩 증원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잘못 하면 스페인으로의 후퇴길이 막힐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3개 대대를 더 끌고 와서 다시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때 즈음 해서는 영국군도 2개 대대가 더 넘어와 3개 대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번에도 무의미한 희생만 낸 채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꽃중년이 막시밀리앙 포이 장군입니다.  그는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사관학교 출신의 몇 안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쥐노의 제1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고, 웰슬리와 싸운 비메이로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번 포르투 전투에서도 웰슬리와 싸워 또 부상을 입었지요.  나중에 술트의 제3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는데, 웰링턴과 싸운 부사코 전투에서 또 부상을 입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 편에 서서 웰링턴과 싸운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거기서도 부상을 당했고, 그게 평생 입은 15회의 부상 중 마지막 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젠 술트도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바삐 움직였습니다.  그는 강변 다른 곳에 모아놓은 바지선들을 지키기 위해 배치했던 부대까지 불러 들여 황급히 영국군을 상대하게 했는데. 이것이 더 나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영국군이 쳐들어온 것을 알게 된 포르투 주민들이, 프랑스군이 물러가자마자 바지선들을 몰고 강남으로 넘어와 영국군을 실어나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술트는 정신을 차렸는지 비로소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과감히 결행합니다.  수도원에 쳐박혀 시시각각 증원되는 영국군을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북동쪽 스페인 방향으로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영국군은 총 2만에 가까운 병력으로서 시시각각 증원되고 있는데, 이미 어제부터 철수를 시작했던 프랑스군은 포르투 시내에 고작 1만2천 정도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미련을 두지 않고 철수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포르투 전투 상황도입니다.  저 멀리 동쪽에 머레이 장군의 사단 약 3천이 아빈타스 쪽에서 강을 건넌 것을 보실 수 있는데, 머레이 장군은 자신의 병력만으로는 후퇴하는 술트의 군단을 막아서기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는지 술트의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웰슬리도 술트 못지 않은 명석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술트가 택할 길은 후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그의 목표를 술트를 단순히 포르투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술트 군단의 격멸로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웰슬리는 미리 약 1만 규모의 영국군과 포르투갈군을 베레스포드(William Carr Beresford, 1st Viscount Beresford) 장군 지휘 하에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훨씬 더 동쪽의 도우루 강 상류로 보내 거기서 도하한 뒤 프랑스군의 퇴로를 끊도록 해놓았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도 추격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확실히 프랑스군에 비해 너무나 느렸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는 결국 술트의 군단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술트는 이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600명의 사상자와 무려 1500명의 포로를 내며 도망치듯 후퇴했습니다.  영국군의 피해는 고작 100여명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이렇게 체면이고 뭐고 아랑곳 하지 않고 서둘러 후퇴한 덕분에 프랑스군은 베레스포드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봉쇄에 걸리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 산악지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신 술트는 58문의 대포 전체와 군용 금고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부상자들도 포기해야 했지요.  산악지대로 들어갈 때는 짐마차는 모두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이때의 사건을 소재로 한 버나드 콘월(Bernard Cornwell)의 소설 Sharpe's Havoc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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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들에게는 배낭과 잡낭에서 식량과 탄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어떤 장교들은 검열을 실시하여 이번 원정에서 병사들이 얻은 약탈물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부대가 산 위로 올라가는 길 가에 은제 포크와 나이프, 촛대, 접시 등이 버려졌다.  대포와 마차, 탄약 수송차 등을 끌던 말과 황소, 노새는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두 사살했다.  짐승들은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걸을 수 없는 부상자들은 짐마차 속에 그대로 남겨졌는데, 곧 그들을 찾아와 복수를 시도할 포르투갈 민간인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 최소한의 시도는 해볼 수 있도록 머스켓 소총도 주어졌다.  술트는 군자금 금고, 즉 은화가 가득한 11개의 커다란 통을 길 가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병사들이 한줌씩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여자들은 치마를 펼쳐 한웅큼 은화를 퍼담고는 병사들과 함께 걸어갔다.  용기병과 경기병, 엽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걸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황량한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고, 그 뒤로는 와인과 포트 와인, 교회에서 약탈한 황금 십자가와 북부 포르투갈의 대저택에서 훔친 오래된 그림들이 실린 짐마차들이 버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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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술트와 프랑스군의 고생과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점령지역인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험난한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했는데, 곳곳에서 험한 협곡과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허술한 다리들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산악 지대는 포르투갈 민병대인 오르데난사(Ordenança)들이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까마득한 계곡 위에 걸린 좁고 허술한 다리 너머를 한줌의 포르투갈 민병대가 지키고 있다면 아무리 프랑스군이 대군이라고 해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의 발이 묶인 사이, 느리긴 해도 나름대로 서둘러 웰슬리의 영국군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술트와 그의 군단은 결국 이렇게 포르투갈 산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술트 군단 전체가 전멸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용감무쌍한 한 남자 덕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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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규규 2018.02.04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번째인가요? ^^

  2. 유애경 2018.02.05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용감무쌍한 한 남자는 누구일까요!
    다음글이 엄청 기다려지네요!!!

  3. 석총 2018.02.05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글에 언급된 그분?

  4. 안타레스 2018.02.05 1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수를 쫓아낸데 막대한 공헌을 세운 이발사에게 포상같은게 주어졌는가요?

  5. reinhardt100 2018.02.05 2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트의 경우, 일단 영국함대 때문에 도우루 강 남안에 신경쓰기 쉽지 않았던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전술하신 대로 영국함대가 어느 방향에다 육상군을 상륙시킬지에 대하여 도저히 답이 없었으니까요. 즉, 영국군 주력은 네덜란드나 다른 전장들 처럼 함대가 적 주력 근처에 직접 육상군을 상륙시킬 것이고 여차하면 화력지원 및 철수지원을 하기 용이한 해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합니다. 특히 웰즐리 이전의 영국군 주력의 상륙방식은 거의 항상 함대의 화력지원이 보장되는 해안가였지 포르투같은 해안포로 공격받기 좋은 지역은 아니었다는 것 또한 일종의 고정관념같이 여겨졌을 겁니다.

    여담으로 도우루 강은 745년 이슬람 영주들간의 내전이 시작되면서 갈리시아 및 도우루강 북안에서 이슬람군이 철수한 뒤부터 1030년 후우마이야조 붕괴시점까지 아스투리아스왕국과 그 방계국가들(갈리시아,레온,카스티야)간의 국경선으로 기능합니다. 이 당시 도우루강 연안에는 다수의 거점 요새가 세워졌고 이를 바탕으로 북부의 기독교 국가들이 끊임없이 남진을 하면서 강 전체가 전장터가 됩니다.

  6. 넬슨 2018.02.20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감무쌍한 전투란 빅토르 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