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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배신 (9) - 토지 개혁과 전쟁 1813년 10월에 바이에른이 나폴레옹을 배신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물론이고, 바이에른의 친프랑스 정책을 주도했던 총리 몽겔라스조차도 나폴레옹에 대해 개인적인 충성심이나 존경심 같은 것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나폴레옹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는 사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함께 해서 더 이상 이익이 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1813년 9월 말, 나폴레옹의 형세는 누가 봐도 전혀 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이에른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에 대해 물론 나폴레옹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야말로 바이에른이나 이탈리아, 스위스 등은 물론, 정말 나폴레.. 2024. 10. 7.
바이에른의 배신 (5) - 빛은 프랑스로부터 어떻게 보면 몽겔라스의 친프랑스 정책은 구한말 때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믿었던 김옥균 등의 개화파의 생각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간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최소한 당시 조선에게 있어 청나라나 러시아나 일본이나 모두 외국어를 쓰는 이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와 프로이센은 최소한 바이에른과 같은 독일어로 말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사회적 관습을 가진 게르만 형제국이었고, 프랑스는 과거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게르만족과 대치하며 게르만족끼리 서로 싸우도록 부추긴 적대적 이민족 국가였습니다.  형제 국가들을 격파하려는 이민족 국가와 굴욕적인 동맹을 맺는 것은 독일 민족에 대한 배신 행위로 여겨졌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가 즉위하던 .. 2024. 9. 9.
바이에른의 배신 (4) - 모든 것은 계획대로 막시밀리안 조제프에게 1799년 2월 날아든 소식은 바이에른 선제후 카알 테어도어가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막시밀리안 조제프가 바이에른 선제후로 등극하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전에 이미 언급한 대로, 이는 이미 정해진 일로서, 적자가 없던 카알 테어도어의 후사는 원래부터 또다른 방계인 팔츠-츠바이브뤼컨(Pfalz-Zweibrücken) 공작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후계자는 그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츠바이브뤼컨 공작 카알 2세(Karl II. August Christian)였는데, 카알 2세가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갑자기 그 동생인 막시밀리안 조제프가 자동으로 지명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알 테어도어의 사망과 함께, 이제 막시밀리안 조제프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 2024. 9. 2.
바이에른의 배신 (3) - 일루미나티의 그림자 나폴레옹보다 10년 먼저 태어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막시밀리안 칼 조제프 프란츠 드 파울라 히에로니무스 드 가네린 드 라 튈(Maximilian Karl Joseph Franz de Paula Hieronymus de Garnerin de la Thuille)이라는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뒤섞인 매우 긴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 아버지가 사보이(Savoy) 공국 출신으로 바이에른 군대에 자리를 얻고 뮌헨에 정착한 귀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뮌헨에서 태어난 이 청년의 국적은 바이에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프랑스어를 썼고, 나중에 바이에른의 총리가 되어 몽겔라스 백작(Graf von Montgelas)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지게 된 이 청년은 노인이 되어서도 독일어보다는 프랑스어를.. 2024. 8. 26.
바이에른의 배신 (2) - 럼포드 수프를 먹는 나라 바이에른 공국에게 있어 처음에는 강 건너 불구경이던 프랑스 대혁명은 예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활활 불타올라 밀물처럼 국경을 넘었습니다.  1793년 루이 16세와 앙트와넷을 처형한 프랑스 국민공회는 1795년 불한당 같은 명장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를 앞세워 평소 그렇게 탐을 내던 라인강 서쪽의 바이에른 고립영토(exclave)이자,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였던 카알 테오도어(Karl Theodor)의 고향이자 본거지인 팔츠(Pfalz) 선제후령과 율리히(Jülich) 공작령을 점령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 해인 1796년 모로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까지 점령했는데, 바이에른군은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대국 프랑.. 2024.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