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henberg2 쿨름 전투 에필로그 - 다시 트라헨베르크 흔히 쿨름 전투에 대해, 방담이 무분별하게 연합군의 퇴각을 추격하다 벌어진 패배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당시 드레스덴에 있었던 근위포병대의 노엘(Jean-Nicolas-Auguste Noël) 대령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 군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방담 장군에게만 물어야 할까? 사람들은 원래 그가 산 속에 남아 프로이센군의 후퇴를 저지해야 했는데, 워낙 성격이 과감했던 방담이 러시아군을 추격하여 산 밑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이런 패전을 겪었다고들 했다. 또는 그게 아니라, 방담이 토플리츠(Toplitz)까지 추격전을 벌였던 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에 부합하는 것이었을까?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한 비난을 건성으로 추격에 나섰던 구비옹 생시르(.. 2024. 6. 24. 휴전 (14) - 베르나도트의 운수 좋은 날 원래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의 싸움에 있어서 스웨덴의 도움이 절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스웨덴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장에서 승리는 결국 누가 더 많은 총검과 대포를 동원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는데,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구가 많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각각 3천만에 육박했던 프랑스와 러시아에 비하면 인구가 240만 정도에 불과했던 스웨덴은 초라한 수준의 병력만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영토를 절반 이상 빼앗긴 프로이센은 인구가 975만에서 450만으로 줄어드는 봉변을 당했지만, 그래도 스웨덴의 2배에 달하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장 자신의 영토와 바로 인접한 작센에서 전투가 벌어지다 보니 일종의 .. 2023. 10. 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