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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avera'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3.04 왕과 원수들 - 탈라베라 전투 (2편) (6)
  2. 2018.02.25 계곡의 연합군 - 탈라베라(Talavera) 전투 (1편) (8)

1809년 7월 27일, 탈라베라에 모인 프랑스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제1 군단장 빅토르 원수, 제4 군단장 세바스티아니 장군, 그리고 조제프 국왕을 보좌하는 주르당 원수의 3명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총사령관은 조제프 국왕 본인이었습니다만, 아무도 그에게서 전략이나 지휘를 기대하지는 않았지요.  세 명의 장군들 중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빅토르 원수였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원수가 아니었으므로 계급도 낮았지만, 사실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및 행정 관료라고 할 수 있었지요.  문제는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원수였습니다.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주르당은 16살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고,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도 복무하는 등 험한 곳을 돌아다닌 뒤, 서인도제도에서 얻은 말라리아로 건강을 해친 채 귀국했습니다.  결국 건강 문제로 제대를 한 그는 고향인 리모쥬에서 잡화점을 하는 등 평범한 서민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제대한 지 5년 뒤 터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주르당은 당시 47세로서 장군으로서는 한창 나이였고, 빅토르보다는 2년 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국민개병제를 법제화하여 프랑스군을 유럽 최강으로 만들어준 징집제의 창시자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징집제는 흔히 주르당 법(Loi Jourdan de 1798)으로 불릴 정도로 그의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나폴레옹의 대관식 때 원수로 임명된 원년 원수 그룹 멤버가 되었지요.  그에 비해 빅토르는 3년 뒤인 1807년 당시 제1 군단장이던 베르나도트의 부상으로 인해 임시 군단장이 되었다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맹활약을 한 덕분에 간신히 원수가 되었지요.


하지만 선임자가 꼭 능력치가 더 높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르당이나 빅토르나 모두 대혁명 이전에 사병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한 뒤, 대혁명 발발 뒤에 자원병으로 다시 입대하여 장교로 선발된 뒤 승승장구하여 장군 계급까지 승진한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주르당은 알고 보면 명성에 비해 그다지 뛰어난 전과는 별로 없는 군인이었습니다.  가령 1796년 모로가 중앙을, 나폴레옹이 우익인 이탈리아 방면을 맡을 때 주르당은 좌익을 맡아 바이에른 방면을 공략했는데, 당시 나폴레옹만 성공했을 뿐 독일 지역에서의 공세는 카알 대공에게 분쇄되었습니다.  그때 모로까지 후퇴하게 된 원인이 바로 주르당이었습니다.  암베르크(Amberg) 전투에서 주르당이 카알 대공에게 철저히 패배했기 때문에 모로의 측면이 노출되어 부득이하게 모로도 후퇴했던 것이지요.  그때 패배의 책임을 지고 주르당은 군문에서 물러나 정치에 입문했는데, 그때 만든 것이 1798년의 주르당 법이었습니다.  1799년 그는 다시 군에 기용되어 다시 라인 방면군을 맡았지만, 이번에도 다시 카알 대공에게 패배하며 체면을 구긴 바 있었습니다.  그때도 책임을 지고 지휘권을 부하에게 넘기고는 물러났는데, 그 부하가 바로 나폴레옹 군문에서 2인자라 할 수 있는 마세나였습니다.  마세나는 주르당이 이끌던 바로 그 군대를 넘겨 받아 눈부신 활약을 펼쳐 주르당을 더욱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패전을 거듭했던 주르당이 명성을 떨쳤던 것은 프랑스군이 연전연패하던 혁명 초기 혼란 속에서 그래도 소중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의 1794년 네덜란드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른 플레뤼스 Fleurus 전투가 그의 대표적인 승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그의 지휘가 뛰어나서 승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상단 오른쪽에 희미하게 프랑스군의 기구가 보이실 겁니다.  플레뤼스 전투는 기구를 군사정찰용으로 사용한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특히 그는 1799년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쿠데타에 대한 반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500인 위원회에 속한 의원들을 나폴레옹의 척탄병들이 두들겨 패며 생 끌뤼(Saint Cloud) 궁에서 쫓아낸 바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주르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명성이 자자한 군인인데다 정치인이기도 했으므로, 대승적 차원에서 나폴레옹은 그를 1804년 황제 즉위와 동시에 주르당을 원수로 임명했던 것이지요.


그런 그를 나폴레옹이 중용할 리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를 이미 평정하여 별 문제가 없던 이탈리아 왕국에 군사 고문으로, 즉 한직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남쪽인 나폴리 왕국의 국왕으로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가 즉위하면서 주르당이 그 군사 고문으로 함께 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제프의 옆을 주르당이 지켰습니다.  모든 권력은 권력자의 곁에 착 달라 붙은 사람들이 쥐게 됩니다.  주르당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특히 조제프는 주르당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습니다.  조제프는 자신에게 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명성과 능력을 갖춘 진짜 인물이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당시 쟁쟁한 실력자들은 다들 나폴레옹 밑에 있기를 원했지, 바보 형 노릇을 하던 조제프의 밑으로 오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르당은 달랐지요.  그렇게 나폴레옹에게 등한시되던 두 인물 조제프와 주르당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왕국을 지배한답시고 나름 으시댈 수 있었습니다.


지방 농민들의 반란 외에는 별 문제가 없던 나폴리 왕국에서는 사실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제프가 스페인 국왕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주르당은 이번에도 조제프의 옆에 착 달라붙어 스페인까지 따라 왔는데, 스페인은 온나라가 반란에 휩싸인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주르당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겠다며 오히려 좋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에서 작전 중이던 7개의 프랑스 군단들과 그 군단장들은 명목상으로는 모두 주르당의 조언을 받는 조제프의 지휘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명목상의 이야기였습니다.  호랑이같은 군단장들은 모두 나폴레옹을 두려워하고 나폴레옹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할 뿐, 그의 바보 형 조제프는 그야먈로 바보 형 취급을 했습니다.  심지어 술트 같은 경우 아예 자신이 포르투갈 왕이 되려는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으니까요.  주르당에 대해서도 '주르당이 언제적 주르당이냐'라는 식의 무시로 일관했습니다.  당연히 조제프와 주르당은 나폴레옹의 부하들에게 분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탈라베라까지 조제프와 주르당이 직접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총동원하여 마드리드를 텅 비워둔 채 달려나온 것도 이번에야 말로 위아래 질서를 세우고 스페인 국왕의 위엄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마 있었을 것입니다.  




(빅토르 원수입니다.  그도 16살에 사병으로 입대한 주르당처럼 18살에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10년 복무 기간을 다 채우고 만기 제대하여 평범한 서민 생활을 했습니다.  역시 프랑스 대혁명 때 자원병으로 재입대하여 장교가 되었지요.  1793년 나폴레옹의 출세 계기가 된 툴롱 포위전이 승리로 끝난 뒤, 나폴레옹과 함께 장군 계급으로 승진한 사람 중에 빅토르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렝고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나폴레옹의 눈에 들게 됩니다.)   




실제로 탈라베라에 빅토르의 제1 군단과 세바스티아니의 제2 군단, 거기에 예비 기병대와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집결하자, 아무래도 3개 세력 간에 지휘 체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군사작전에서 부대마다 명령 체계가 제각각이면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될 테니까요.  나폴레옹의 부하들이 제아무리 잘 났고 전장에서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렇게 같은 천막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니 의전상 바보 형 조제프의 머리 위에 얹힌 왕관의 무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는 조제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왕 대접을 해야 했고, 자연스럽게 전체 작전의 지휘권은 조제프의 뒤에 선 주르당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외교관 생활을 오래 하여 의전에 익숙했던 세바스티아니는 몰라도 전형적인 무골이었던 빅토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갈등이 그렇쟎아도 수적으로 불리한 프랑스군의 위치를 더욱 거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갈등으로 점철된 프랑스군에 비해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혈맹답게 분위기가 좋았을까요 ?  천만에 콩떡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지요.





Source :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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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8.03.04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보 형'이란 표현이 참 재미있어서 웃고 갑니다.^_^
    언제나 수고가 많으세요!

  2. Nocchi 2018.03.04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네요
    어느 조직이든 내부 알력(?) 을 얼마나 잘 정리하느냐가 외부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3. 석총 2018.03.04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페인의 갑질에 질려버리죠

  4. 인간늑대 2018.03.06 0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 항상 감사합지다.

  5. 샤르빌 2018.03.06 0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기 마드리드 수비대는 프랑스군인가요 스페인군인가요?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군단이었고 10만이 넘었으니까요.  그런 스페인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은 혹시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 같은 짓이 아니었을까요 ?


웰슬리도 나름 정보와 생각이 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 프랑스군의 상태는 웰슬리의 진격에 대해 그다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생 시르(St. Cyr)의 제7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동쪽의 카탈루냐 지방에 있었고, 수셰(Suchet)의 제3 군단은 그 바로 옆 아라곤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모르티에(Mortier)의 제5 군단도 마드리드 북쪽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주둔하고 있었고, 네(Ney)의 제6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갈리시아(Galicia)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Sebastiani)의 제4 군단은 마드리드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술트의 제2 군단은 웰슬리의 영국군에 의해 포르투갈에서 거지꼴로 막 쫓겨난 뒤 재정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빅토르의 제1 군단은 포르투갈 접경 지역의 구아디아나(Guadian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809년 5월말, 스페인 내 프랑스 7개 군단의 위치입니다.  전년도에 있었던 바일렌에서의 뒤퐁의 대패 덕분에, 아직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는 프랑스군이 발을 못 붙이고 있었고,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가 스페인 저항군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도 속의 붉은색 지점 표시 부분이 바로 탈라베라입니다. )




웰링턴에게 주어진 공격 루트는 크게 2가지였습니다.  도우루(Douro) 강을 따라 술트를 추격하여 마무리짓는 것과, 훨씬 남쪽인 타호(Tajo, 포르투갈어로는 테주 Tejo, 영어로는 타거스 Tagus) 강을 따라 빅토르를 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다 강을 따라 가냐고요 ?  스페인에 비해 작고 약한 포르투갈이 독립국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지대의 지형이 무척 험하여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갈 수 있는 전통적인 교통로는 저 두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들이었습니다.  특히 리스본부터 타호 강가를 따라 가면 탈라베라(Talavera)와 톨레도(Toledo)를 거쳐 마드리드 인근의 아랑후에스(Aranjuez)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타호 강과 그 주변 강역도입니다. )




어떻게 생각하면 대포를 모두 잃은데다 만신창이가 되었고, 또 바로 발 뒤꿈치까지 따라잡은 술트의 뒤를 계속 추격하는 것이 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과감히 방향을 선회하여, 저 남쪽의 타호 강을 따라 진격하여 빅토르를 격파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무래도 2만 정도의 병력만으로 스페인 내부로 진격하는 것은 무척 버거운 일이었는데, 스페인 쿠에스타(Cuesta) 장군이 협동 작전을 요청해온 것입니다.  쿠에스타에게는 약 3만의 병력이 있었으니 영국군에게 이 제안은 무척이나 솔깃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상황을 보니 만약 빅토르만 성공적으로 격파한다면, 마드리드까지 일사천리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잘 하면 분산된 프랑스군의 의표를 찔러 마드리드를 기습 점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점령한 뒤 과연 마드리드를 지켜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런 승리는 큰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웰슬리는 출세욕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아일랜드 모닝턴(Earl of Mornington) 백작의 3남에 불과했으므로 철저한 장자 상속권을 따르는 영국 귀족 사회의 전통에 따라 그는 백작도 자작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자신을 아일랜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개인적 목표는 잉글랜드 내의 어느 근사한 영지에 대해 작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웰슬리는 야심찬 행군을 시작했으나, 군사작전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작전이 생각했던 것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빅토르의 군단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웰슬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조달에 의존하는 프랑스군 특성상, 빅토르가 주둔하고 있던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 지방의 구아디나아에서는 식량이 바닥났던 것입니다.  쿠에스타의 스페인군도 견제할 겸 식량도 구할 겸, 빅토르의 제1 군단은 마드리드 쪽에 좀더 가까운 탈라베라(Talvera)로 이동했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빅토르의 제1 군단은 1만9천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해, 연합군은 영국군 2만에 스페인군 3만이라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보력에서도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민간 게릴라들이 주요 도로와 시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군단 간에 전통문을 주고 받는 것도 쉽지 않았고 소규모 정찰대를 운영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빅토르를 비롯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스페인 진입을 7월 9일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68세이던 쿠에스타 장군에 대해 겁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돈키호테 같은 아집과 오만,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은 매력적인 연합군 파트너가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엉뚱한 오해가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발목을 잡습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Sevilla) 지방 정부격인 훈타(Junta)에서 영국군을 좀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웰슬리를 스페인군 전체의 통합 사령관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작 웰슬리 본인은 오직 잉글랜드 작위에만 관심이 있었던지라, 무능하고 믿을 수 없는 스페인군의 총사령관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쿠에스타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원래 영국과 스페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 해적왕 드레이크 이야기에서 짐작하시듯 아메리카 대륙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죽어라 싸우던 사이로서, 그 민족 감정은 꽤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더 큰 적 나폴레옹에 맞서기 위해 연합을 맺은 관계라고 해도, 오만하고 재수없는 영국 장군이 스페인군에게 지휘관 노릇을 하며 이래라저래라 명령질을 하는 모습은 스페인 장군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웰슬리에게 합동 작전을 펼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쿠에스타가 웰슬리에게 갑자기 퉁명스럽게 대하며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덕분에 웰슬리와 쿠에스타 사이에 구체적 합동 작전 계획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망친 것은 쿠에스타의 질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항상 산더미같은 염장 쇠고기와 럼주를 끼고 다녀야 했던 영국군의 특성 때문에 영국군의 진격은 너무 느렸습니다.  6월 8일 포르투갈 내 타호 강 계곡 지역인 아브란치스(Abrantes)에 도착한 영국군은 거의 3주간 그 지역에서 허송세월했는데, 이는 쿠에스타의 딴지 때문만은 아니었고 영국군을 위한 염장 쇠고기와 럼주 등 군량 창고를 짓고 물자를 집적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웰슬리는 6월 28일에야 아브란치스를 떠나 7월 3일에야 스페인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포르투 전투 이후 거의 2달이 지나서야 이렇게 스페인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빅토르는 영국군의 진입을 모른 채 쿠에스타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웰슬리는 여전히 빅토르의 옆구리를 기습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에는 없던 변수가 생겼습니다.  빅토르가 위치를 잡은 탈라베라는 전보다 훨씬 마드리드에 가까운 곳이었고, 더 나쁜 것은 세바스티아니의 프랑스군 제4 군단과도 더 가까와졌다는 것입니다.  웰슬리가 꿈꿨던 것은 쿠에스타와 빅토르가 서로의 멱살을 쥐고 뒹구는 사이에 살짝 다가가 빅토르의 옆구리에 연장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바스티아니가 바로 옆에 서있다면 현장 분위기가 그다지 친영국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 귀족들로 구성된 스페인군 수뇌부의 모든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네가스 장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스페인군이 제시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와 대치 중이던 베네가스(Francisco Javier Venegas) 장군의 라 만차 군(Ejército de La Mancha)이 세바스티아니를 적절히 견제하여 서쪽의 빅토르를 지원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쉬운 군사 작전이 서면 상의 작전이었습니다.  베네가스는 스페인 귀족다운 풍모와 위엄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귀족이 갖춘 것 그것 뿐이었습니다.  군사적 재능이라고는 1도 없었던 그는 이미 그 해 1월에 벌어진 우클레스(Uclés) 전투에서 고작 1만 조금 넘는 병력을 가지고 아무 상황 판단을 못 한 채 1만5천의 우세한 병력을 가진 빅토르에게 달려들었다가 1천의 사상자와 6천의 포로를 내는 참패를 겪은 바 있었습니다.  만약 스페인이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였다면,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그저 귀족의 체면을 위해 돌격했다가 1만군을 통째로 전멸시킨 베네가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철저한 귀족 중심 사회였고,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베네가스가 받은 것은 군법회의 출두명령서 대신 2만3천의 병력을 갖춘 라 만차 군 사령관 임명장이었습니다.


베네가스에게 주어진 명령은 2만 병력의 프랑스 제4 군단을 공격하여 분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섣부른 전투를 피하되 세바스티아니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빅토르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잘 대치하고 있으라는 간단한 명령이었지요.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간단한 명령조차 완수하지 못하는 신박함을 보여주었습니다.  7월 초, 마침내 웰슬리의 영국군이 탈라베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프랑스군이 조제프 왕과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다 이끌고 탈라베라로 달려갈 때, 베네가스 앞에 있던 세바스티아니도 서둘러 탈라베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뒷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베네가스에게 완전히 또다른 기회를 주었습니다.  마드리드가 바로 코 앞인데, 그의 앞을 가로 막을 인근의 프랑스군이 모조리 탈라베라로 가버린 것입니다.  베네가스는 이때 2가지 꽃놀이 패를 쥐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의 뒤를 쫓아 탈라베라로 이동한 뒤 쿠에스타 및 웰슬리와 연합하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데 일조할 수도 있었고, 또는 아예 텅 빈 마드리드로 진격하여 수도를 탈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네가스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대체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약 1달 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다른 부대들과 합동 작전을 펼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베네가스는 후퇴하라는 쿠에스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굳이 세바스티아니와 전투를 벌였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는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시고 일단은 탈라베라 전투에 집중하겠습니다.


이렇게 베네가스가 삽질을 해주는 덕분에 프랑스군은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뿐만 아니라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그의 보좌관 주르당(Jourdan) 원수가 이끄는 마드리드 수비대 및 2개 용기병 사단 총 1만1천까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탈라베라에서의 힘의 균형은 영국-스페인 연합군 5만5천에 프랑스군 4만6천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된 셈이었으나 여전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 분명한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영국-스페인은 불신과 반목으로 얼룩진 어설픈 연합군이었습니다.  스페인 국왕 조제프가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단일 정예군과의 대결에서는 불리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또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Tagu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co_Javier_Venega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mona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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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몽키D루피 2018.02.25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처음으로 1등~! ^0^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2. reinhardt100 2018.02.2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빅토르가 후퇴한 엑스트라마두라 지역은 전통적으로 에스파냐 농촌 지역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편인 지역입니다. 16세기 신대륙을 정복한 콩키스타도르 (라)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인것만 해도 이미 드러나니까요.

    이베리아 반도 지역 자체가 프랑스군이 주전장으로 싸워왔던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 폴란드보다도 사실 더 빈곤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는 적어도 개별 가구에서는 약탈할게 있었고, 폴란드 같은 경우는 추워서 그렇지, 적어도 보급선이 끊길 우려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이베리아 반도는 수자원이 현재와 마찬가지로 꽤나 부족해서 농업생산력이 낮은데다가 메스타라는 목양조합의 영향까지 겹치면서 농민들의 삶은 완전 박살난 수준이 되었으니까요. 에스파냐 왕실 역시 이걸 도저히 묵과할 수는 없었고, 신대륙의 식민지가 독립하기 전 국가예산의 상당수를 신대륙에서 오는 정화준비 수송선단에 의존했고, '페닌술라에스'라 하여 에스파냐 본토 출신들을 의도적으로 우대, 신대륙으로 보내려고도 노력하긴 합니다.

    웰링턴이 술트를 추격하지 못한데는 지형상, 교통편상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탄약소모가 있었습니다. 염장쇠고기같은거야 극단적으로 보면 길가는(?) 소 한 마리 잡아서 먹으면 되지만 탄약은 그게 안 되었으니까요. 특히 영국군이 자랑하는 '씬 레드라인'의 탄막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탄약이 미친듯이 들어갔는데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는 그 많은 탄약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방법이 없었고 전쟁 내내 본국에서 조달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총검의 원조국가답게 17세기 네덜란드 전쟁 당시부터 이미 총검돌격전이 되면 막을 군대가 없다고 할 정도인 프랑스군과의 총검돌격전을 어떻게든 막으려면 더욱 탄약이 중요했죠. 이러다보니 진격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nasica 2018.02.25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18.02.25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웰링턴이 그토록 공명에 집착한 이유가 형이었던 동인도회사의 인도 총독인 웰즐리 후작의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사실, 웰링턴이 워털루 전투의 승장이라는 명성에 가려서 그렇지 형 웰즐리 후작이 미친 영향은 훨씬 큽니다. 최초의 귀족 출신 총독으로써 전임자이던 동인도회사 사원 출신이던 헤이스팅스의 업적을 '(이후의 오클랜드와 아머스트 같은) 무모한 확장정책으로 말아먹지 않고서' 인도 제패에 시동을 걸었다는 겁니다. 웰즐리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귀족들에 대한 의구심을 어느 정도 걷고 콘월리스 등의 후임 귀족출신 총독들도 계속해서 선임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웰즐리 후작이 현대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매관매직이 판치던 영국에 '공정한 시험에 의한 (능력주의에 근거한)선발'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동인도회사 사원 및 인도통치에 소요되는 행정관 및 장교들을 다수의 학원 및 사관학교를 통해 모집, 충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는 당시 임원진의 사원입사 추천권을 정면으로 건드리면서 의회 내 인도족과 회사내 해운족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되어 정책 자체가 폐지되지만 1853년의 추밀원령에 의한 제국고등문관시험제도 정비가 시작되면서 이후에 결실을 맺게 됩니다.

    • 카를대공 2018.03.04 0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렇게 보니 형제가 위인이네요.
      그것도 둘 다 영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엄청 크구요.

  3. 에로준 2018.02.25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글과 좋은 댓글 입니다.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4. 석총 2018.02.28 1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웰링턴은 웰슬리와 모닝턴의 스펠링을 합친거죠
    사실 귀족의 차남이 작위를 받으면 분가하는게 원칙이고 귀족명을 모닝턴과 성인 웰슬리를 합쳐서 웰링턴이 되었죠

  5. BACCANO 2018.03.08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네가스 무능함의 끝판왕이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