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슬리의 영국군이 도우루 강 남안에서 강을 건널 방법을 못 찾고 당황하는 동안, 술트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5월 10일 도우루 강 남쪽에 있는 그리조(Grijó)라는 작은 마을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트는 비교적 여유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요 ?


그는 나름대로 안전조치를 취해놓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가 위치한 도우루 강 하구는 꽤 넓고 깊어서 사람이나 말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술트는 도우루 강 인근의 모든 바지선과 보트, 조각배들을 모조리 압류하여 북쪽 강변에 끌어다 놓은 상태였습니다.  영국군에게 날개 혹은 지느러미가 없는 이상, 도우루 강을 건너 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만 술트는 영국 해군을 걱정했습니다.  제해권은 영국에게 있으니, 당장 30km 밖 수평선 너머에 영국 프리깃함들이 호위하는 수송선들이 잔뜩 대기 중일 수도 있었습니다.  술트는 웰슬리가 선박을 이용하여 포르투 북쪽 해안 어딘가에 기습 상륙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트는 도우루 강 하구의 산토 조아오 다 포스(S. Joao da Foz) 요새에 수비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습니다.  술트는 전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며, 따라서 이젠 후퇴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정확히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짐을 싸고 있었고 이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강남에 영국군이 나타난 5월 10일 다음날인 5월 11일, 술트는 이미 짐마차와 포병대를 메르메(Julien Augustin Joseph Mermet) 장군의 1개 사단과 함께 스페인으로 후퇴시켰습니다.




(메르메 장군입니다. 원래 귀족의 아들이었고, 오슈(Hoche) 장군 밑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는 네 원수가 나폴레옹 편에 서서 군을 지휘하라고 종용했으나 그 명령을 거부하고 부르봉 왕가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강 남안에 2만이 넘는 영국군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배들을 모조리 북안에 끌어놓았다는 것만 믿고 강변에 경계 병력을 전혀 세워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일인데, 술트처럼 수많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이 이런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주민들이 프랑스군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지요.  어쩌면 그는 일부 영국군이 건너온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보트로 수십 명씩 넘어올 수 밖에 없으므로, 프랑스군이 뒤늦게 그를 알게 되더라도 신속하게 전개하여 아직 수백 명 수준일 영국군을 잽싸게 포위하고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정작 영국군은 강변에 도착한지 하루가 지나도록 정말 아무 것도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술트의 생각대로 영국군에겐 강을 건널 방법이 전혀 없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100%라는 것은 없습니다.  5월 12일 아침,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강변을 수색 중이던 워터스(John Waters) 대령에게 웬 포르투갈 이발사 하나가 다가 왔습니다.  워터스 대령은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해보니 그 이발사는 포르토 시내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프랑스군의 침공과 약탈을 피해 피난 나왔다가, 강 남쪽에 영국군이 왔다는 것을 알고 2~3인용 낚시배 하나를 저어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낚시배 하나로는 병력을 실어나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발사에겐 결정적인 소식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지 않는 강 북안에 와인 수송용 바지(barge)선 몇 척이 있는 곳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발사와 함께 워터스 대령은 그 조각배를 타고 강 북안으로 넘어갔고 실제로 바지선들과 그걸 지키고 있던 현지 주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워터스 대령과 이발사는 마침 현장에 있던 신부의 도움을 받아 그 주민들을 설득, 그 바지선들을 끌고 남안으로 끌고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을 실어날랐을 도우루 강의 와인 수송용 바지선입니다.  저 정도면 한번에 30~40명은 실어나를 수 있겠네요.  바지(barge)선이란 강이나 호수 등 파도가 잔잔한 곳에서 사용되는 평저선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돛대나 엔진이 없어 자력으로 항행하지 못하고 다른 배에게 끌려다니는 배를 말하지만 자력 항해를 하는 평저선도 바지선이라고 부릅니다.)




때는 해가 훤히 뜬 대낮이었습니다.  이들이 약 45m 정도 되는 도우루 강을 가로질러 바지선들을 끌고 가는 모습은 양쪽 강변에서 훤히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배들이 남쪽 강변에 모인 영국군들을 잔뜩 싣고 북안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강북의 프랑스군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영국군 1개 중대가 재빨리 강을 건넜고 강변에 있던 수도원 건물을 점령하고는 돌로 된 벽 뒤와 지붕, 창문 등에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프랑스군도 영국군이 도강 중이라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달려왔을 때는 이미 1개 대대 전체가 수도원에 위치를 잡은 상태였습니다.


아침 11시 30분, 헐레벌떡 달려온 프랑스군의 지휘관은 막시밀리앙 포이(Maximilien Foy)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술트에게 전갈을 보낸 뒤 급한 대로 3개 대대의 보병을 이끌고 달려왔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3대1의 수적 우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튼튼한 돌담이 둘러쳐진 수도원은 막강한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이 비록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미숙한 군대라고는 하지만, 막강 프랑스군에 비해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영국군은 기동성이나 전술적 유연성, 병사들의 자율성이나 인내심, 동기 부여 등 모든 면에서 있어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비해 떨어지는 군대였습니다.  보통 직업 군인인 모병제 군대가 강제로 끌려온 병사들로 이루어진 징병제 군대보다 전투력이 우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그 지휘관인 웰슬리조차 '술 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녀석들'(the scum of the earth, enlisted for drink)이라고 부를 정도로 형편없는 자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민간 사회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입대한 빈민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군에 잉글랜드 출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잉글랜드인들과 그 왕 조지 3세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아일랜드인들이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1/3은 독일인들과 스코틀랜드인으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1/3 정도만 잉글랜드인이었으나 그마저도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사회 최하층민들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사회 지배 계급이었던 장교들은 자기 부대의 병사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당근으로는 럼주를, 채찍으로는 사람 등가죽을 홀랑 벗겨놓는 무지막지한 진짜 채찍질을 휘둘러 병사들을 통제했습니다.  그런 군대에게 다양한 전술을 이해시키고 자율성 및 전술적 유연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비해 우월한 것이 있었습니다.  돈이 많다보니 전체 유럽 군대 중에서 가장 많은 실탄 사격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탄약 뿐만 아니라 머스켓 소총의 부싯돌(flint)을 아끼기 위해 사격 훈련을 할 때 실탄은 커녕 공이치기에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끼워넣고 장탄 및 격발 훈련을 하는 것이 예삿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어지간한 2선 부대들도 실탄 사격 훈련만큼은 상당히 많이 할 수 있었고, 장교들도 병사들에게 다른 것은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그저 빨리 장전해서 빨리 쏘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어차피 저 신뢰할 수 없는 병사들에게 명중률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군 병사들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전투가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실제로 포이 장군의 프랑스군이 수도원을 향해 돌격을 해보니, 빗발처럼 날아드는 영국군 머스켓 소총 세례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포이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많은 사상자만 남기고 프랑스군은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여기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국군은 계속 바지선을 통해 수십 명씩 증원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잘못 하면 스페인으로의 후퇴길이 막힐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3개 대대를 더 끌고 와서 다시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때 즈음 해서는 영국군도 2개 대대가 더 넘어와 3개 대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번에도 무의미한 희생만 낸 채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꽃중년이 막시밀리앙 포이 장군입니다.  그는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사관학교 출신의 몇 안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쥐노의 제1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고, 웰슬리와 싸운 비메이로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번 포르투 전투에서도 웰슬리와 싸워 또 부상을 입었지요.  나중에 술트의 제3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는데, 웰링턴과 싸운 부사코 전투에서 또 부상을 입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 편에 서서 웰링턴과 싸운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거기서도 부상을 당했고, 그게 평생 입은 15회의 부상 중 마지막 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젠 술트도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바삐 움직였습니다.  그는 강변 다른 곳에 모아놓은 바지선들을 지키기 위해 배치했던 부대까지 불러 들여 황급히 영국군을 상대하게 했는데. 이것이 더 나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영국군이 쳐들어온 것을 알게 된 포르투 주민들이, 프랑스군이 물러가자마자 바지선들을 몰고 강남으로 넘어와 영국군을 실어나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술트는 정신을 차렸는지 비로소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과감히 결행합니다.  수도원에 쳐박혀 시시각각 증원되는 영국군을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북동쪽 스페인 방향으로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영국군은 총 2만에 가까운 병력으로서 시시각각 증원되고 있는데, 이미 어제부터 철수를 시작했던 프랑스군은 포르투 시내에 고작 1만2천 정도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미련을 두지 않고 철수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포르투 전투 상황도입니다.  저 멀리 동쪽에 머레이 장군의 사단 약 3천이 아빈타스 쪽에서 강을 건넌 것을 보실 수 있는데, 머레이 장군은 자신의 병력만으로는 후퇴하는 술트의 군단을 막아서기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는지 술트의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웰슬리도 술트 못지 않은 명석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술트가 택할 길은 후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그의 목표를 술트를 단순히 포르투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술트 군단의 격멸로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웰슬리는 미리 약 1만 규모의 영국군과 포르투갈군을 베레스포드(William Carr Beresford, 1st Viscount Beresford) 장군 지휘 하에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훨씬 더 동쪽의 도우루 강 상류로 보내 거기서 도하한 뒤 프랑스군의 퇴로를 끊도록 해놓았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도 추격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확실히 프랑스군에 비해 너무나 느렸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는 결국 술트의 군단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술트는 이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600명의 사상자와 무려 1500명의 포로를 내며 도망치듯 후퇴했습니다.  영국군의 피해는 고작 100여명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이렇게 체면이고 뭐고 아랑곳 하지 않고 서둘러 후퇴한 덕분에 프랑스군은 베레스포드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봉쇄에 걸리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 산악지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신 술트는 58문의 대포 전체와 군용 금고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부상자들도 포기해야 했지요.  산악지대로 들어갈 때는 짐마차는 모두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이때의 사건을 소재로 한 버나드 콘월(Bernard Cornwell)의 소설 Sharpe's Havoc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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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들에게는 배낭과 잡낭에서 식량과 탄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어떤 장교들은 검열을 실시하여 이번 원정에서 병사들이 얻은 약탈물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부대가 산 위로 올라가는 길 가에 은제 포크와 나이프, 촛대, 접시 등이 버려졌다.  대포와 마차, 탄약 수송차 등을 끌던 말과 황소, 노새는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두 사살했다.  짐승들은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걸을 수 없는 부상자들은 짐마차 속에 그대로 남겨졌는데, 곧 그들을 찾아와 복수를 시도할 포르투갈 민간인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 최소한의 시도는 해볼 수 있도록 머스켓 소총도 주어졌다.  술트는 군자금 금고, 즉 은화가 가득한 11개의 커다란 통을 길 가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병사들이 한줌씩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여자들은 치마를 펼쳐 한웅큼 은화를 퍼담고는 병사들과 함께 걸어갔다.  용기병과 경기병, 엽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걸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황량한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고, 그 뒤로는 와인과 포트 와인, 교회에서 약탈한 황금 십자가와 북부 포르투갈의 대저택에서 훔친 오래된 그림들이 실린 짐마차들이 버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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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술트와 프랑스군의 고생과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점령지역인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험난한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했는데, 곳곳에서 험한 협곡과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허술한 다리들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산악 지대는 포르투갈 민병대인 오르데난사(Ordenança)들이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까마득한 계곡 위에 걸린 좁고 허술한 다리 너머를 한줌의 포르투갈 민병대가 지키고 있다면 아무리 프랑스군이 대군이라고 해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의 발이 묶인 사이, 느리긴 해도 나름대로 서둘러 웰슬리의 영국군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술트와 그의 군단은 결국 이렇게 포르투갈 산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술트 군단 전체가 전멸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용감무쌍한 한 남자 덕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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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규규 2018.02.04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번째인가요? ^^

  2. 유애경 2018.02.05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용감무쌍한 한 남자는 누구일까요!
    다음글이 엄청 기다려지네요!!!

  3. 석총 2018.02.05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글에 언급된 그분?

  4. 안타레스 2018.02.05 1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수를 쫓아낸데 막대한 공헌을 세운 이발사에게 포상같은게 주어졌는가요?

  5. reinhardt100 2018.02.05 2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트의 경우, 일단 영국함대 때문에 도우루 강 남안에 신경쓰기 쉽지 않았던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전술하신 대로 영국함대가 어느 방향에다 육상군을 상륙시킬지에 대하여 도저히 답이 없었으니까요. 즉, 영국군 주력은 네덜란드나 다른 전장들 처럼 함대가 적 주력 근처에 직접 육상군을 상륙시킬 것이고 여차하면 화력지원 및 철수지원을 하기 용이한 해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합니다. 특히 웰즐리 이전의 영국군 주력의 상륙방식은 거의 항상 함대의 화력지원이 보장되는 해안가였지 포르투같은 해안포로 공격받기 좋은 지역은 아니었다는 것 또한 일종의 고정관념같이 여겨졌을 겁니다.

    여담으로 도우루 강은 745년 이슬람 영주들간의 내전이 시작되면서 갈리시아 및 도우루강 북안에서 이슬람군이 철수한 뒤부터 1030년 후우마이야조 붕괴시점까지 아스투리아스왕국과 그 방계국가들(갈리시아,레온,카스티야)간의 국경선으로 기능합니다. 이 당시 도우루강 연안에는 다수의 거점 요새가 세워졌고 이를 바탕으로 북부의 기독교 국가들이 끊임없이 남진을 하면서 강 전체가 전장터가 됩니다.

  6. 넬슨 2018.02.20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감무쌍한 전투란 빅토르 원수?

1809년 초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무어 경이 이끌던 영국 원정군을 대서양으로 쫓아낸 것으로 정리가 끝났다고 생각한 유럽의 서쪽 끝 포르투갈에서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장소는 포르투갈 북쪽의 항구 도시 포르투(Porto, 영어로는 Oporto)였습니다.  당시 영국 신사들의 정찬(dinner)에서 빠질 수 없는 마지막 코스였던 포트 와인(port wine)의 이름이 바로 이 도시 이름에서 나온 것일 정도로, 포르투는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이자 대영국 와인 수출 창구로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포르투갈 침공을 노리던 술트의 프랑스 군단의 제1차 목표가 바로 이 도시였습니다.



(포르투 항구는 큰 강인 도우루 Douro 강 하구에 위치합니다.  전통적으로 도우루 강가의 포도 농장에서 빚은 포트 와인은 이런 배에 실려 도우루 강을 따라 포르투에 집산된 뒤, 영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포트 와인은 먼 항해에도 와인이 상하지 않도록 증류 와인을 좀 첨가하여 보통 와인보다 좀더 알콜 도수가 높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포르투에서 영국까지는 고작 1~2주 밖에 걸리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 증류 와인이 첨가된 것은 그냥 술고래 영국인들 입맛에 맞도록 하기 위한 것인 것 같습니다.)




지난 1월 16일 스페인 코루냐(Coruña) 전투에서 무어 장군의 영국군을 바다로 쫓아낸 뒤, 술트는 4일 만인 1월 20일 코루냐를 함락시켰고, 다시 그로부터 1주일 뒤 스페인 제1인의 군항 페롤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여기서 얻은 막대한 영국군의 비축 군수품을 이용하여 군단을 재정비한 뒤 술트는 거의 2달 만인 3월 28일 포르투 앞에 나타났습니다.  포르투갈 정복을 시작하는데 술트는 거의 2달을 소모한 셈이었지요.  페롤 점령 이후 너무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만, 페롤에서 포르투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도 무려 300km가 넘고, 당시 군대의 전진 속도로는 빨라도 15일이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술트 군단은 직선으로 이동해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포르투갈 정규군과 시민들은 강이나 협곡 등의 천연 장애물이 있는 곳곳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프랑스군의 진격을 훼방놓았으므로, 술트는 해안선을 따라 편하게 진격하지 못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선을 넘나들며 지그재그로 진격해야 했습니다.



(페롤에서 포르투까지의 거리입니다.)



술트의 진격은 당시로서는 꽤 빠른 것이었는데, 프랑스군의 기동을 보면 당시 프랑스군의 전형적인 전략 목표를 보여줍니다.  프랑스군은 오로지 돈과 물자가 몰려 있는 도시 정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측면이건 후방이건 적대적인 주민들의 저항을 차근차근 분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우회하여 쾌속으로 도시를 향해 내달렸습니다.  이건 프랑스군의 운영이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 아니라 노획한 금은과 물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나름대로 효과적인 전략이었으나 분명히 뒤탈이 예상되는 것이었고, 실제로 술트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술트 군단 약 2만1천이 3월 29일 포르투 시 북방에 나타나자, 포르투갈 측은 무려 2만4천을 동원하여 시 북쪽에 방어선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 중 제대로 무장을 갖춘 정규군은 불과 4천5백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1만의 민병대(Ordenanças, 영어로는 Ordinances)에 농기구와 사냥총을 들고 자발적으로 나선 1만의 시민들에 불과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용기만 있을 뿐이었던 오합지졸 포르투갈군은 와르르 무너져내려 무려 8천이 넘는 전사자와 수천의 포로를 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군도 시내에서까지도 나름 용맹하게 저항하여 프랑스군 사상자도 2천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제1차 포르투 전투의 상황도입니다.  꽤 큰 강인 도우루 강 북안에 위치한 포르투는 애초에 북쪽에서 내려오는 강력한 프랑스군으로부터 사수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르투갈 정규군과 민간인들은 용감하게 저항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군은 다른 지역에서는 잘 벌이지 않던 짓을 저지릅니다.  전투에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참여한 것을 보고, 또 군대가 무너졌는데도 시내 골목 곳곳에서 시민들이 무장 저항을 하는 것을 보고 시민들에게까지 무지막지한 무력행사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전투 및 도시 함락 때, 포르투 시민들은 숫자가 파악되지 않은 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의 잔혹한 폭력에 놀란 시민들이 도시 남쪽으로 이어진 부교를 통해 도시를 탈출하려고 몰리는 바람에, 이 다리가 붕괴되어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부교 붕괴는 프랑스군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결국 프랑스군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프랑스군이 이렇게 난폭하게 굴지 않았고, 따라서 도시가 함락되어도 시민들이 겁에 질려 탈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나온 이유도 결국은 포르투갈 민간인들이 저항에 참여했기 때문이니까, 무조건 프랑스군이 절대악이라고 할 수만도 없습니다.  이래저래, 결국 나쁜 것은 전쟁 그 자체인 것이지요.




(프랑스 측에서 그린 제1차 포르투 전투 전쟁화입니다.  술트 오른쪽 아래에, 사망한 엄마의 품으로부터 아기를 구조하는 프랑스 병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도 도우루 강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와, 그 다리로 탈출하는 포르투 주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저런 기둥이 있는 다리가 아니라 부교였고, 아마 프랑스군이 저렇게 포르투갈 주민들의 아기를 구출했는지 여부도 저 다리 묘사처럼 부정확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유혈 사태를 일으키며 포르투를 장악하여 많은 물자와 돈, 군수품을 획득한 술트는 의외로 남진을 하지 않고 여기서 눌러 앉아 시간을 때웠습니다.  1차 목표를 달성하여 배가 불렀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에는 다른 문제도 개입되었다고 합니다.  이 다른 문제란 이제 개인적 탐욕이 부풀어 오를대로 부풀어 오른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들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술트는 포르투갈의 왕이 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군 사이에서 술트 원수는 "Le Roi Nicolas", 즉 니콜라 왕으로 불리우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해서 술트는 나폴레옹의 형제들이나 뮈라처럼 왕족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습니다.  이제 스페인을 가로질러 만만하고 조그마한데다 기존 왕족들이 모조리 브라질로 도망가버린 무주공산 포르투갈 왕국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자 정말 니콜라 술트 원수가 니콜라 1세가 될 가능성이 손에 잡힐 정도로 커진 것입니다.  




(프랑스어판 위키피디아에 올라온 술트의 초상화입니다.  많이 알려진 초상화와는 또 약간 좀 다른 모습이네요.  술트의 이름은 Jean-de-Dieu Soult로서, 니콜라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니콜라 1세냐고요 ?  그의 출생 증명서에는 이름이 장이라고 되어 있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의 first name이 Nicolas라고 알고 있었답니다.  이건 다부의 스펠링이 Davoust냐 Davout냐처럼 당사자만 확실히 알고 있을 사실이지요.)



하지만 니콜라 1세의 꿈은 요원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프랑스군 병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르 롸 니콜라"라는 별명은 결코 존경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병사들은 비아냥의 뜻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었고,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는 장교들도 만약 정말 술트가 스스로 니콜라 1세를 선포할 경우 황제를 위해 반란을 일으킬 기세였습니다.  술트는 그냥 싸움질에 소질이 있는 유능한 야전 지휘관에 불과했을 뿐 결코 나폴레옹이 아니었으며, 부하들의 신망을 얻어 충성심을 끌어내는 그런 대인물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무엇보다, 술트 자신이 나폴레옹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폴레옹 허락없이 스스로 니콜라 1세가 될 경우 뒷감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트는 뻔뻔스럽게도 심복들을 동원하여 포르투갈 주민들로 하여금 '술트를 왕으로 삼자'라고 공작을 펼쳤으나, 이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습니다.  포르투에 입성할 때 그토록 많은 민간인을 살상해놓고 그런 공작을 펼치다니, 현실 감각이 떨어진 것이지요.


오히려 더 전격적으로 리스본 공략에 나서서 실제로 리스본 정복에 성공했다면 나폴레옹이 술트를 왕으로 임명해줄 가능성이 눈곱만큼이나마 더 높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트가 리스본으로 진격하지 않은 것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영국군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주변은 온통 적대 게릴라 세력이 둘러싸고 있어, 보충병력을 충원받기도 어려웠고 스페인 주둔 프랑스군과 파발문을 주고 받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술트는 남진은 커녕 오히려 스페인으로의 탈출을 슬슬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후퇴는 자랑할 일이 아니었으므로, 술트는 부유한 도시 포르투를 샅샅이 훑어 먹으며 꾸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니콜라 1세의 꿈을 산산조각 낼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809년 4월 22일, 바로 7년전 프랑스 해군 건조창에서 만들어진 40문짜리 대형 프리깃함 쉬르베이양뜨(Surveillante) 호가 리스본에 입항했습니다.  그러나 이 배에는 프랑스의 삼색기 대신 영국 깃발이 걸려있었고, 이름도 영국식으로 서베일런트라고 발음되었습니다.  이 배는 진수된지 1년 만에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어 그 프랑스식 이름 그대로 영국 해군에 취역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군함이 아서 웰슬리(Arthur Wellesley)를 태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Porto

https://en.wikipedia.org/wiki/Jean-de-Dieu_Soult

https://fr.wikipedia.org/wiki/Jean-de-Dieu_Soult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Battle_of_Porto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frigate_Surveillante_(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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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종필 2018.01.21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강철 공작 (iron duke) 등장이네요

  2. 안타레스 2018.01.21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아서 웨즐리의 본격적인 등장인가요?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3. 장웅진 2018.01.21 2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서 웰즐리 : 소관에게 양고기 구이를 양보하시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니콜라 1세

  4. 아스페른에슬링 2018.01.21 2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작년 3월인가 다음블로그를 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아껴가며 조금씩 읽다보니 최근에야 연재분량을 따라잡았습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5. reinhardt100 2018.01.24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르투갈 와인이 도수를 높인 이유는 프랑스 와인과의 생존경쟁 때문이긴 합니다. 1688-1697의 9년 전쟁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의 무역이 끊기면서 어쩔 수 없이 포르투갈산 와인만 주야장천 마실 수 밖에 없었죠. 전쟁 후? 그냥 운송비 적게 드는 프랑스 와인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포르투갈 와인은 잉글랜드 시장에서 고사되기 직전 상황까지 몰립니다. 아직 브라질의 금광이 본격적 터지기 직전이고 식민지도 거의 다 거덜나서 경제를 전적으로 잉글랜드에 의존하던 상태였으니까요. 이 상황에서 잉글랜드인들의 기호를 맞추어 프랑스산과의 차별을 꾀하는 건 당연했을 겁니다.

    • 최홍락 2018.01.25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9년전쟁의 영향으로 포르투칼산 와인이 반사이익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후에 프랑스 와인의 시장 복귀로 포르투칼 와인이 고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포르투칼산 와인은 이후에도 잉글랜드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데 이는 1704년 체결된 메수엔 조약이라는 세계 최초의 FTA 협정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영국산 공산품과 포르투칼산 와인 사이의 관세장벽을 대폭 낮춘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포르투칼산 와인이 영국 와인 수입량의 2/3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이덕분에 리카르도가 비교우위 이론을 설명할 때 영국산 면직물과 포르투칼산 와인을 예로 들기도 하지요.

      프랑스 와인이 영국 시장에서 강세를 다시 회복한것도 자유무역협정 덕분이지요. 나폴레옹 3세 시절 체결된 콥든 슈발리에 협정의 영향으로 영국의 프랑스산 와인 수입이 2배 증가했거든요. 이전에 프랑스 대혁명 전에 체결된 영불간 자유무역협정인 이든 조약의 경우 대혁명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지만 콥든 슈발리에 협정은 1862년 체결후 30년간 지속되었는데 이게 프랑스 와인의 강세의 결정적 원인이 된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nasica 2018.01.25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분 모두 귀한 댓글 고맙습니다.

  6. 수비니우스 2018.01.26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영국인들은 알콜도수가 좀더 높은 와인이 일반 와인보다 좀더 맛있다고 본걸까요... 알콜도수가 맛에 그렇게 중요한것 같진 않은데 ㅎㅎ 취하는걸 더 좋아한걸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