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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첸 전투 (5) - 1806년 아우어슈테트의 여파 오전 10시에 글레이나 언덕에서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손에 쥔 네에게는 당장 2만3천의 병력이 있었고, 바로 뒤에 약 2만의 추가 병력 4개 사단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글레이나에서 프라이티츠까지의 1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그냥 걸어서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어이 없는 상황 전개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는데, 바우첸 전투가 종료된 이후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베르티에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한 것은 바로 네의 참모인 조미니였습니다. 조미니는 이 일에 대해 나폴레옹의 명령서가 클릭스(Klix)를 통해 우회하여 오느라 너무 늦게 도착한데다 작전 상황이 너무 순조로와 네가 글레이나를 너무 빨리 점령했다는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변명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확실히.. 2023. 5. 8.
바우첸을 향하여 (12) - 큰 일은 작은 실수에서 현대화된 전쟁일 수록 기술의 차이가 승패를 결정짓는다고 하지만 전쟁이란 많은 수가 적은 수를 이기는 게임이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나 현대전에 있어서나 병법의 기초는 적은 분산시키고 아군은 집결시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 전장을 휩쓴 이유도 바로 그것을 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813년 5월, 바우첸 전투를 앞둔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의 1/3 정도를 뚝 떼어 네에게 베를린 방향으로 끌고 가도록 하여 스스로를 분산시켰습니다. 그에 비해 연합군은 바우첸에 집결했습니다. 대체 나폴레옹은 왜 이런 악수를 둔 것일까요? 나폴레옹이 네의 군단들을 베를린 쪽으로 향하게 한 것은 연합군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프로이센군의 이탈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덫.. 2023. 2. 27.
러시아의 마지막 프랑스인, 네만 강을 건너다 빌나에서 코브노까지는 약 3일 행군거리였습니다. 그 기간 내내 기온은 계속 추워서 영하 30도 이하를 유지했습니다. 만약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졌다면 네만 강이 녹아서 베레지나에서처럼 임시 교량을 놓아야 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은 코브노에는 네만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으므로 굳이 날씨가 추워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당시 3일 동안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미끄러운 눈길을 걸어야 했던 병사들에게 추위는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비오네(Louis Joseph Vionnet, Vicomte de Maringone) 소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동상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손이나 손가락에서 뼈가 드러난 병사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훗날 부르봉 왕가로부터 마링고네 자.. 2021.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