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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oradovich4

바우첸 전투 (2) - 프랑스군보다 더 미운 러시아군 오후 1시 경에 쿼티츠(Quatitz)에 나타난 술트의 프랑스군은 이런저런 마을에 분산되어 있던 프로이센군을 쉽게 분쇄한 뒤, 니더구리쉬에 배치되어 있던 클라이스트의 작은 군단을 사정없이 몰아붙였습니다. 클라이스트는 천천히 밀려났지만 슈프레 강 건너 뵐라우와 키페른 등의 언덕들에서 쏘아대는 프로이센군의 포격 덕분에 3시간 동안이나 니더구리쉬 마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프로이센군이 슈프레 강을 건너 후퇴한 뒤에도 프랑스군은 한참 동안 그 다리를 건너지 못했는데, 역시 강 건너 언덕에서 쏟아지는 치열한 포격 때문이었습니다. 이 병목은 강 좌안의 고틀롭(Gottlobs) 언덕을 프랑스군이 장악한 뒤 거기에 중포들을 방열하여 강 건너 뵐라우 언덕의 프로이센 포병대들을 제압한 후에야 해결되었습니다. 프랑스군 보.. 2023. 4. 17.
인사가 만사 - 쿠투조프의 후임 1813년 4월 25일, 러시아군 사령부와 동행 중이던 영국군 윌슨 장군은 일지에 연합군 총사령관 쿠투조프의 병세에 대해 차가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원수께서는 적군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거리에 당도하자 아주 시의적절하게도 병석에 드러누우셨다. 아마도 이건 카멘스키 전략(Kamenski stratagem)일 것이다." 여기서 카멘스키 전략이라는 것은 제4차 대불동맹전쟁 때인 1806년 12월, 나폴레옹과 대치한 러시아군의 지휘권을 부여받은 뒤 부대를 점검해본 결과 도저히 대책이 서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령관직에서 사임한 카멘스키 백작(Mikhail Fedotovich Kamenski)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마 윌슨 장군은 사흘 뒤에 쿠투조프가 정말 죽어버리자 '어? 꾀병이 아니었어?' 라.. 2022. 8. 15.
러시아의 트라팔가 - 비아즈마(Vyazma) 전투 쿠투조프가 이런저런 욕을 많이 먹지만 나폴레옹 추격 전위대 지휘관으로 밀로라도비치(Mikhail Miloradovich)를 임명한 것은 무척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밀로라도비치는 나폴레옹보다 2살 어린 세르비아 출신의 귀족으로서, 러시아의 명장 수보로프(Alexander Suvorov) 장군이 수행했던 1799년 스위스 원정에도 참여하는 등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었고, 무엇보다 용감하기로 소문난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별명이 러시아의 뮈라(Murat)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운이 무척 좋은 편이라는 점에서도 뮈라를 쏙 빼닮았습니다. 그는 항상 자랑하기를 50번 넘는 전투 속에서 단 한번도 부상은 커녕 생채기도 입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가 결코 안.. 2021. 7. 5.
쿠투조프의 고민 - 보로디노(Borodino)로 가는 길 쿠투조프는 왜 전임자인 바클레이가 온 나라로부터 욕을 먹었고, 왜 자신이 그 후임자로 지명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궁극적으로야 나폴레옹을 무찌르는 것이었습니다만 1차 목표는 모스크바를 지키는 것이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후퇴를 했다가는 자신도 바클레이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정치적 상황은 그렇다치고, 군사적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과 엄청난 물자와 비용을 희생시켜가며 싸우는 이유는 승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승리하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싸운다는 것은 무능을 떠나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에 가까운 일입니다. 쿠투조프가 나폴레옹과 싸우려고 보니, .. 2020.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