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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름 전투 에필로그 - 다시 트라헨베르크 흔히 쿨름 전투에 대해, 방담이 무분별하게 연합군의 퇴각을 추격하다 벌어진 패배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당시 드레스덴에 있었던 근위포병대의 노엘(Jean-Nicolas-Auguste Noël) 대령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 군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방담 장군에게만 물어야 할까?  사람들은 원래 그가 산 속에 남아 프로이센군의 후퇴를 저지해야 했는데, 워낙 성격이 과감했던 방담이 러시아군을 추격하여 산 밑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이런 패전을 겪었다고들 했다.  또는 그게 아니라, 방담이 토플리츠(Toplitz)까지 추격전을 벌였던 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에 부합하는 것이었을까?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한 비난을 건성으로 추격에 나섰던 구비옹 생시르(.. 2024. 6. 24.
쿨름 전투 (5) - 산 속에서는 모두가 혼란하다 적군이 계속 증강되는 가운데, 후발대로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의 본대로부터 소식이 없자 아마 방담도 슬슬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8월 30일 오전 6시 30분 경에 나폴레옹에게 보낸 방담의 보고서는 다소 횡설수설하는 내용이었는데, 그의 초조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적군은 테플리츠로 가는 길을 결연한 의지로 방어하고 있습니다.  밤 사이에 적의 병력은 증원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현 위치를 지키고 폐하의 명령을 기다릴 뿐입니다.  저는 병력을 집중시켜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려 했으나, 아직 저의 예비 포병대가 도착하지 않았으며 탄약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제23사단을 따라가버린 제 기마포병대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식량도 없습니다.  적군이 (마을들의) 모든.. 2024. 6. 3.
새로운 전쟁의 준비 (1) - 불만 가득한 연합군 기본적인 작전안이 합의되자, 러시아군은 약속대로 비트겐슈타인의 군단과 콘스탄틴 대공 휘하의 러시아 근위대와 예비대를 보헤미아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이센군도 클라이스트(Friedrich Graf Kleist von Nollendorf)의 제2 군단과 프로이센 근위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가 지휘할 북방군을 편성하기 위해 러시아는 빈칭게로더의 군단을 북으로 보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이미 북방에 주둔하고 있던 빌로의 제3 군단과 타우엔치엔의 제4 군단의 지휘권을 베르나도트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블뤼허도 프로이센 출신이 아니고 그나이제나우도 원래는 작센 출신이었지만, 나폴레옹보다 7살 연상이었던 클라이스트는 베를린 출신 전형적인 프로이센의 융커 귀족이었습니다. 다만 그 역시 명문가 출신은 아니.. 2023. 10. 16.
뤼첸 전투 (1) - 군주들의 언덕에서 흔히 장군들이 아무렇게나 구술하면 그에 따라 병사들은 밤새도록 행군을 하며 고생한다고들 하지만, 적어도 5월 1일 밤 ~ 5월 2일 새벽 비트겐슈타인에게 그건 억울한 비난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거의 한숨도 못자고 상세한 병력 이동 명령을 작성해서 각 부대에 전달했고, 자신도 나폴레옹을 빠뜨릴 함정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이동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밤 늦게까지 들어오는 최신 정보를 파악한 뒤 특유의 꼼꼼함을 살려, 각 주요 지휘관마다 부대를 어느 장소로 몇시까지 이동시키도록 세세한 명령서를 따로따로 작성했습니다. GPS나 무선통신은 커녕 항공지도나 타자기도 없던 시절, 거위 깃털과 잉크 그리고 거친 종이만으로 지휘관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두운 등불 밑.. 2022.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