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징집된 병사들의 사기는 폴란드 내로 진입하기 전까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번에 새로 징집된 어린 병사들은 나폴레옹이 장려한 새로운 공립학교 제도 하에서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제도적으로 교육받고 성장한 아이들이다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병사들은 실질적인 혜택(?)도 꽤 쏠쏠히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원정이 이어질 때마다 프랑스 국민들은 남편과 아들들이 (금지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점령지에서 노략질해온 돈과 귀중품을 가져오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운이 좋지 않아 싸움터에서 횡재를 올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으로 난리가 난 적국의 마을과 도시에서는 꽤 값이 나가는 물품을 헐값에 사들인 뒤에 관세도 물지 않고 고향 마을로 가져와서 꽤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팔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 중 용감하거나 운이 좋은 친구들이 연금이 딸린 레종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거나 진급을 하거나 아예 장교 계급장을 받아오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생-도밍그(Saint-Domingue, 지금의 아이티) 출신의 한 크레올(Creole, 혼혈이라는 뜻이 아니라 현지 태생이라는 뜻) 병사는 다음과 같이 러시아 원정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거기서 난 무공을 세울 기회를 얻을 것이고, 훈장과 진급을 따내어 자랑스럽게 온 세상에 으시대며 보여줄 거다.  1년 안에 난 소령(chef de bataillon)이 될 거고 원정이 끝날 때 즈음엔 대령이 될 거다.  그 다음엔..."


(근위대 엽기병(Chasseurs a cheval) 대령 군복에 달린 레종도뇌르 휘장입니다.  나폴레옹 시절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약 48,000명으로서, 대부분은 군인이었습니다.  1802년 만들어진 이 훈장의 수상자들은 빠르게 늘어나서 생존 수상자 수는 1806년에 13,000명, 1814년에는 거의 2배인 25,000명에 달했습니다.)



이런 들뜬 분위기는 '철없는' 졸병 젊은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파리의 많은 상류층/부유층 젊은이들, 즉 jeunesse doree(쥬네스 도레, '금칠을 한 젊은이')들이 '빽'을 이용하여 장교로 진급을 하고 부대를 옮겼는데, 주로 멋진 군복과 겉멋 때문에 기병대로 가거나 나폴레옹과 만날 가능성이 있는 참모진으로 배속되었습니다.  이런 젊은 장교들은 한탕주의에 들뜬 졸병들보다 오히려 더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낙천적인 한탕주의는 군인들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은 역대급 규모를 자랑한 것만큼 보조 지원 인력도 많이 필요했는데, 거기에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민간인들이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원정길에서의 보급품 구매와 징발, 분배 및 수송 등을 책임지는 군 보급관(commissaire)은 비록 군복을 입고 검과 권총 등으로 무장을 하긴 했지만 본래 신분은 어디까지나 민간인이었습니다.  이런 보급관 뿐만 아니라 서기관이나 비서 등 원정군에는 행정일을 하는 민간인이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대부분은 험한 군사 원정길에는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드 생-샤망(de Saint-Chamans) 대령은 이들에 대해 이렇게 불평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야전군 행정부에는 이렇게 전쟁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보았지만 한몫 단단히 챙기기 위해 이 원정에 참여했다고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이 가득했다."

야전군에 딸린 민간인이 이런 행정 사무직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제각각 한두 명씩의 하인들을 데리고 참전했습니다.  이런 하찮은 관직의 민간인들이 그랬으니, 장교들은 어떻겠습니까 ?  모든 장교들은 최소한 1대 이상의 짐마차를 대동했습니다.  이런 마차에는 장교가 품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물건들, 즉 여분의 군복과 여분의 무기, 책과 지도, 식료품과 생활 편의품들이 실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한 명 이상의 하인이 딸려 있었고, 마차를 모는 마부도 따로 있었습니다.  

소위 중위 나부랭이들이 이 모양이었으니 장군 정도 되면 클래스가 달랐습니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다부(Davout) 원수의 제1 군단 산하 제5 사단의 지휘관은 콩팡(Compans)이라는 이름의 장군이었는데, 이 분은 결코 허영에 물든 쾌락주의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다부의 부하답게 꽤 검소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분이 개인적으로 원정에 동반한 민간인 식솔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급사장(maitre d'hotel) - 루이(Louis) 
실내 시종(valet de chambre) - 뒤발(Duval)
마부(cocher) - 보(Vaud)
시종(valet) - 시몽(Simon)과 루이(Louis)
경호원(gendarme) - 트루이예(Trouillet)
기타 하인 - 피에르(Pierre), 발렝텡(Valentin), 장비에(Janvier)
승객용 마차를 끄는 말 5마리
사람이 타는 말 6마리
짐말 30여 마리
승객용 마차 1대
짐마차 여러대

장군님께서 원정을 떠날 때 이 정도의 개인 식솔을 거느리는 것은 당시 유럽 사회에서 놀라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796년 이탈리아 원정을 떠날 때의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은 이런 호화스러운 살림살이를 끌고 다닌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조차 병사들의 빵 수프나 모닥불에 구운 감자를 얻어 먹거나 아예 쫄쫄 굶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항상 가볍게 움직이던 나폴레옹의 부하 장군들이 어쩌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장군이나 프로이센 장군과 별다를 바 없게 되어버렸을까요 ?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무엇보다 나폴레옹 본인의 잘못이 가장 컸습니다.  그는 항상 유럽 왕조들의 진짜 왕들 앞에서 코르시카 출신의 벼락 출세꾼 또는 찬탈자라는 컴플렉스가 있었고, 그 때문에라도 황제가 된 이후 부하들에게 '진짜 귀족들처럼' 호화로운 복장 및 우아한 예절과 사치스러운 살림살이를 갖추도록 장려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여관집 아들 채소 가게 아들 출신들이었던 부하들이 좀 창피했던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의 그런 장려책에 대해 마세나나 베르티에, 술트 등과 같은 부하들도 매우 기뻐하며 그런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대부분 40대였던 그의 부하 원수들은 파리에서의 우아하고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져 배에 기름도 붙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험란할 것이 뻔한 새로운 원정을 떠난다고 해서 과거처럼 더 승진할 자리도 없어 보였으므로, 이들은 그다지 열의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훗날 나폴레옹 관련 회고록을 남겨 유명해진 펭 남작(Agathon Jean Francois Fain)은 당시 나폴레옹 직속 비서이자 기록관이었는데, 그는 이때 상황에 대해 부하 장군들이 과거와는 달리 내키지 않아하는 태도로 이번 원정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나폴레옹이 꽤 놀랐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펭 남작입니다.  영국 영화배우 제임스 맥어보이와 좀 닮았네요.  그는 기록관답게 은퇴 이후 나폴레옹 관련되어 여러편의 책을 냈는데, 특히 1908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Memoires du Baron Fain, Premier Secretaire du Cabinet de l'Empereur, 즉 '황제 내각의 수석 비서관 펭 남작의 회고록'이 매우 유명했습니다.)



특히 이번 원정은 상대가 머나멀 뿐만 아니라 끔찍하게 넓은 러시아였으므로, 정말 장기간 원정이 되리라고 다들 예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들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비축품과 각종 편의시설을 챙겨가려 했습니다.  그건 중위 나부랭이부터 군단장들까지 다 일치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나폴레옹조차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꼭 나폴레옹을 비난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록 국민의 지지에 기반한 군주이긴 했지만, 어쨌건 독재자였습니다.  근본적으로 독재자의 제1 걱정거리는 권력 유지였고, 나폴레옹처럼 자주 먼 군사 원정길에 나서야 했던 독재자는 항상 권력의 중심인 권력기관, 그러니까 파리와의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원정은 목적지가 러시아였습니다.  언제나처럼 나폴레옹의 이동 사령부와 파리를 연결해줄 쾌속 파발마 네트워크가 촘촘히 연결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이번 원정에는 자신의 궁정 기관 중 핵심 인원을 아예 다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관료 인원들이 원정길에서도 정상적으로 일하고 생활하도록 하려면 필요한 살림살이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러시아 원정을 떠나는 길목인 드레스덴(Dresden)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를 포함한 자신의 동맹국 및 위성국들의 군주들을 모두 소집하여 자신의 위세를 온 유럽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나폴레옹의 행차에는 으리으리한 규모의 인원과 짐이 따라다녔습니다.

 

(1812년 5월, 러시아로 향하는 길인 작센 왕국의 수도 드레스덴(Dresden)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와 황비 루도비카를 만나는 나폴레옹과 마리-루이즈입니다.  당대 최고의 영웅인 나폴레옹의 아내가 된데다 호화로운 파리의 궁정 생활에 아주 흠뻑 빠져 자아가 부풀어 오를대로 올랐던 마리-루이즈는 여기서 아버지인 프란츠 1세를 대하는 것인데도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도도하고 오만하게 굴어 많은 이들의 빈축을 샀다고 합니다.  오른쪽의 남녀는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부부입니다.)

 



나폴레옹의 원정길 살림살이는 바로 직전까지 러시아 대사였다가 돌아온 콜랭쿠르(Caulaincourt)가 마복시(Grand Ecuyer) 직을 맡아 준비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개인 화물에는 다양한 텐트와 야전 침대, 책상 및 필기류, 옷장, 은식기와 조리 기구, 식료품과 와인류, 각종 상비약 상자 등이 딸려 있었습니다.  이런 짐들의 규모는 그 수송 엔진 규모를 보면 대략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이 짐들은 약 400마리의 짐말과 40여 마리의 노새가 끌거나 실었고, 사람이 타는 말만도 130여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폴레옹의 근위대와는 별도로 순수하게 나폴레옹 개인의 종군 민간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결국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지요.  

 

(이건 파리의 군사박물관(Musee de l’Armee)에 전시된 나폴레옹의 개인 텐트 및 책상의 재현품이라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싣고 간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호화로왔을 것입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원정에서의 편한 생활을 위해 살림살이만 신경쓴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백전노장인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특히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습니다.  나폴레옹은 각 부대마다 독일어나 폴란드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장교들을 배속시키고 또 장교들에게 러시아어 수업을 받도록 독려했습니다.  어차피 러시아군 장교들은 거의 100% 모두 프랑스어를 꽤 잘 했기 때문에 러시아군과의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러시아군 부사관들이나 병사들을 포로로 잡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첩들도 러시아 서부 지역까지 쫙 풀어서 정보망을 넓히고 군수품 담당부(Depot de la Guerre)에게 동부 폴란드는 물론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주요 지역의 확대 지도를 대량 인쇄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지도는 철저히 군용으로 만들어 도로와 강, 늪지와 숲 등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나중에 보시겠습니다만 이로 인해 러시아군이 가진 러시아 지도보다 프랑스군이 가진 러시아 지도가 더 정확한, 웃기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나름대로 철저하게 침공 준비를 하는 동안, 러시아군은 과연 어떤 철통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  그게... 또 좀 그랬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Agathon_Jean_Fran%C3%A7ois_Fain
https://en.wikipedia.org/wiki/Legion_of_Honour
http://www.napoleonguide.com/legionorg.htm
https://en.wikipedia.org/wiki/Armand-Augustin-Louis_de_Caulaincourt
https://seetheworld.travelforkids.com/napoleon-bonaparte-paris-with-kids/

https://www.napoleon-histoire.com/1812-napoleon-a-dres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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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21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새는 지금 출근해서 항상 이시간대에 확인하네요.

    프랑스 혁명전쟁과 비교하셨는데 꽤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도 이미 공화정 시절 혁명군과 제국 대육군의 전투력 저하가 심각하다고 느낀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심지어 소총조차 부족해서 모리스 드 삭스 원수가 주장했던 대기병용 장창을 민간에 50만 자루나 발주할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플랑드르 전역 이후 연전연승을 거두었는데 이베리아 전역 이후 제국군에는 그런 투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상당히 말이 많았습니다. 혹자는 '혁명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앙시엥 레짐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을 위한 새로운 시대의 선봉'이라는 싸울 수 있는 이유를 명확히 제시했기 때문에 강했지만 제국군 시절에는 더 이상 그런게 없었고 상대방에게는 압제자였을 뿐이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지도문제. 프랑스군 같은 경우 이미 17세기부터 국가적 프로젝트로 정밀지도 확보에 공을 기울입니다. 루이 14세가 1660년대부터 시작한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카시니 가문이 4대 100년에 걸쳐서 만든 1/86400 축적도를 시작으로 이 시기까지 계속 전 유럽지역에 대한 지도 확보를 했으니까요. 반면 러시아군 같은 경우에는 지도에 대해 19세기 후반에서야 어느 정도 체계를 잡습니다. 이러니 러시아 원정 당시 지도 덕분에 그나마 그 병력이라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역사상 지도로 전쟁을 말아먹은 경우가 1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인데 특히 독소전쟁 시기에는 심각했습니다. 가뜩이나 1차 세계대전 후반 독일군이 획득한 제정러시아 지도 및 관계자료가 많았는데 거기에 항공정찰까지 제대로 되어 스몰렌스크까지는 독일군의 지리정보가 소련군보다 더 정확한 수준이었으니까요.

    여기서는 이야기가 없지만 대량의 위폐를 찍어낸 것도 있습니다. 이건 프랑스가 거쳐간 모든 국가에서 마찬가지였지만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접수한 곳이 바로 조폐창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조폐원판이 있었거든요. 러시아 원정 준비 당시 마음껏 약탈하게 놓아둔(?) 이유 중 하나가 나중에 가지고 있는 원판으로 지폐 찍어서 뿌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이 찍어간 루블이 최소 수천만 단위인데 이거 때문에 원정 이후 러시아 경제가 개판납니다. 프랑스군이 마구잡이로 살포한데다 정화준비는 도저히 이를 맞출 수 없었으니까요. 폴란드는 더 심각했는데 오죽하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제3차 폴란드 분할 당시 획득한 영토를 도저히 경제적으로 맡을 역량이 안 되다보니 러시아에 할양할 정도였습니다. 왜냐고요? 바르샤바 대공국의 조폐원판으로 찍어낸 러시아 원정 비용이 당시 대공국 1년 예산을 한참 뛰어넘었고 이걸 맡을 경제적 역량이 두 나라에는 없었으니까요.

  2. Franken 2019.10.21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및 부하들이 사치향락에 쓸 물품을 빼고 예전모습으로 돌아간다 해서 승률은 별 차이가 없겠지만 그래도 많이 아쉽군요. 뭐 인생 잘 살아볼려 기를 쓰고 올라간 사람들이니 쉽게 포기할리는 없지만...

  3. 흠흠흠 2019.10.21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스로 황제 자리까지 올라갔으면 열등감을 가질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면전에서 너희는 무능하고 나는 유능하다고 깔아뭉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카를대공 2019.10.21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사방팔방이 타고난 금수저들이면 자기도 모르게 쪼그라들고 컴플렉스 생기는게 사람 이치 같더군요.

      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사회적 약소계층한테 노력 안 하냐며 더 윽박지른다 하고,사회적 약자가 성공하면 자신이 속했던 그룹에 더 모질게 군다지 않습니까

      나폴레옹도 성공하고나니 세상 풍경이 다르게 보였던 거겠지요.

    • Playzone 2019.10.22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원장이 예외적이죠. 명나라 건국 이후 자기 조상을 주희로 조작하려다가 그 후손이 자기 앞에서 벌벌 떠는걸 보고 저런 서생보다 흙수저 거지 탁발승에서 황제가 된 내가 더 뛰어나지않겠냐고 때려치웠거든요.

  4. 카를대공 2019.10.21 2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클은 아닌데 요샌 맥어보이 성씨 쓰던 사람을 매커보이로 표기하더군요.

    토튼햄->토트넘처럼 이런게 표준 문법인가 봅니다.

  5. Wafflegui 2019.10.22 0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튭에 epic history라는 채널에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역과 전투만 다룬 영상이 있는데 실시간으로 부대위치가 이동하는 영상화가 수준 높아서 최근에 보고있어요. 주인장님만큼 세세한 일화와 필력은 없지만 머릿속에서 지도로 상상하는것과 달리 전투를 한눈에 볼 수 있어서 한번쯤 보시는것도 재밌겠네요.

  6. arandel 2019.10.22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저 약탈이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을 지지한 진짜 이유였을까요? (농담^^) 유럽 각지에서귀중품을 털어왔다면 상당했을텐데 으음...글구 보니 프랑스 혁명떄 프랑스 경제도 곤란했고 서민들도 곤궁했는데 설마 저런 식으로 메꿔졌기 때문에 좀 경제가 나아진 걸까요 .

    • Dogswellfish 2019.10.22 2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초에 프랑스가 공격적으로 나갔던게 파탄난 경제를 약탈 경제로 해결하기 위함이였음

    • nasica 2019.10.23 07: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각해보면 프랑스 혁명 이후 (초반의 아시냐 지폐 등 바보짓으로 인한 혼란 이후에) 경제 활력이 나쁘지 않았던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당시의 빈약한 산업 환경에서 결국 가장 큰 생산 수단은 역시 토지였는데, 대부분의 토지를 쥐고 있던 소수의 귀족과 교회로부터 빼앗아 다수의 부르조아 및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으니까요. 물론 그게 공산당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아니었고 유혈몰수 유상분배이긴 했습니다.

      저도 그에 대한 통계자료 등은 보지 못했는데, 언젠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좋겠네요.

    • reinhardt100 2019.10.23 0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혁명전쟁 이후 프랑스군은 어디를 가든 약탈을 하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북이탈리아 정복전에서 단 베네치아령 롬바르디아에서만 6개월만에 '공식적으로' 2천만 프랑을 무상징발했었으니까요.

      이 당시 프랑스 경제는 말 그대로 거대한 군수경제, 즉 정부지출의 극적인 팽창이 경제성장을 이끄는 한 축이 되고 있었지만 숙련된 노동력 부족이 가시화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기까지 징병된 소년 및 청년 인구가 이미 150만에 가까웠는데 문제는 주르당법과 후속법률, 각 전선에서의 병력수요 때문에 사회에 복귀하기 어려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시카님 말씀대로 농업생산력이 주된 경제생산의 한 축인 시대에 이 상황은 그대로 생산력 감퇴와 직결되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 당시 프랑스 본토나 북이탈리아 등 제국의 핵심 농업지역은 노동력 부족이 심해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침체가 시작되었다는 보고가 각 데파르트망으로부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탈레랑이나 푸셰같은 사람들이 괜히 우려한게 아닙니다. 자칫하다 경제가 아작난다는 결론이 날 수 밖에요. 게다가 중농주의의 발상지인 국가니 더욱 그 파급효과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냐, 이게 의외로 프랑스 내부의 채무관계를 해소시켜준 결과를 낳긴 합니다. 가장 유사한 사례가 1920년대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인데 양자 모두 채무자의 채무부담을 급속하게 감소시켜주었다는 겁니다. 막판에 나시카님 말씀대로 액면가 1/300 수준까지 가는 바람에 총재정부와 통령정부가 발행 초기 약속대로 교회 및 망명한 귀족 소유 토지의 소유권 이전 형식으로 상계 및 소각처리 합니다.

      유혈몰수, 이게 가장 극단화된 동네가 방데였는데 사실 남부 지역 상당수, 특히 프로방스나 랑그도크, 루시옹 같이 교황령 등 외국 제후령이 있는 지역은 방데 수준은 아니더라도 유혈이 꽤나 심각했습니다. 그러니 왕정복고 후 백색테러가 벌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자기 땅 찾으려면 뺏아간(?) 소유주를 자력구제(?)로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7. lemon 2019.10.23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참 오다가 댓글 흐리는 달랑무인지 뭐인지 보기 싫어 안 오다가 우연히 와봤는데 이제 없어졌군요 이제 자주 오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건 진짜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명언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서 염치, 질서, 관용, 정의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들이 군복을 입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단치히나 기타 주요 군수 창고에 얼마나 많은 군수품이 쌓여 있든 당장 배가 고픈 군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11 경보병 연대 소속 쥬세페 벤투리니(Giuseppe Venturini)라는 피에몬테(Piemonte) 출신의 중위는 자신이 수행하는 '징발'로 인해 2~3백 가구가 당장 거지꼴이 되었다면서 마음이 아프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징발 결과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장교가 수행하는 징발은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및 징발 기술은 예술의 경지에 달한 것이어서, 다들 굶주리고 바쁜 와중에도 효율적으로 식량을 수집하고 적재적소에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빼앗기는 현지 주민들에게 영수증도 꼬박꼬박 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척박한 폴란드 현지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뒤져도 나오는 것이 거의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짜증이 난 병사들은 죄없는 폴란드 농민들의 집과 창고를 마구 때려부쉈습니다.  특히 이들은 각자의 소속 국가의 깃발 아래가 아니라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 군대의 깃발 아래 움직이는 것이다보니 몰염치가 더욱 심했습니다.  심지어 폴란드군까지도 폴란드 농민들을 마구 약탈했습니다.

제5 폴란드 기마 라이플병 연대의 18세짜리 소년 대위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자기들이 가져가는 것, 심지어 가져가기 원하는 것 이상으로 때려부쉈다.  민가에 들어가서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박살을 냈다.  창고에는 아예 불을 질렀다.  밀밭이 있을 경우, 그 한가운데로 말을 몰고 들어가 마구 짓밟으며 말에게 설익은 밀을 먹였는데, 먹이는 것 이상으로 많은 밀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이건 불과 두어 시간 뒤에는 뒤따르는 그들의 굶주린 동료들도 거기에 와서 말을 먹여야 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의미한 파괴행위였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그랑다르메가 집결하는 네만 강 서안 지역은 분명히 아군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길 가의 집들은 모두 창문이 깨지고 울타리는 장작불에 쓰느라 뜯겨졌으며, 많은 집들이 반쯤 무너져버렸습니다.  군복이 보이기만 하면 주민들이 도망치던 폴란드는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동프로이센에서는 이런 난장판에 민족적 감정까지 더해졌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는 작은 부상이든 티푸스든 어떤 군대에게나 낙오병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런 낙오병들은 동프로이센 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학살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 소속의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병사들도 습격 대상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랑다르메 병사들도 똑같은 적개심을 가지고 동프로이센 주민들을 대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예프 아빌(Jef Abbeel)이라는 병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숙영하는 마을마다 주민들의 가축을 필요 이상으로 모조리 도살하고 술과 식량을 빼앗는 것은 물론, 꽤 떨어진 인근 도시에 가서 자기들이 주문하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주민들을 내몰았습니다.  주문 품목 중 하나라도 못 구해오면 몽둥이 찜질로 교육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심하다고 주민들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주민들은 역시 또 흠씬 두들겨 맞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주민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은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슬라브인에 가깝다'라며 투덜거린 바 있습니다.  실제로 동프로이센은 독일화가 많이 진행되긴 했지만 원주민인 슬라브인들을 소수의 독일계 튜톤 기사단이 정복해서 만들어진 왕국이므로 힌덴부르크의 말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도 동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의 발상지인지라 프로이센 왕국에서 동프로이센이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컸습니다.  가령 윗그림의 1861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은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에서 열렸습니다.  이 빌헬름 1세가 어린 시절인 1806년 나폴레옹에게 쫓겨 엄마와 함께 메멜까지 도망쳐야 했던 어린 왕자가 맞습니다.  또 임마누엘 칸트도 바로 이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이지요.  지금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의 해군 도시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되었습니다.)  

 



앞서 나폴레옹이 대규모로 징집된 신병들의 숙련도에 대해 걱정하는 부하의 말에 대해 심리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이 중요하다며 일축했다는 일화를 언급했었지요.  그랬던 나폴레옹도 폴란드의 포즈난(Poznan)에 입성할 때 그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폴란드 비스툴라(Vistula) 군단을 실제로 보고는 꽤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 부대는 최근까지 스페인에 파견되어 있다가 러시아 원정을 위해 막 귀환한 상태였는데, 사상자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수의 신병들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 군단의 지휘관인 모르티에(Mortier)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너무 어리군.  내게 필요한 건 전장의 고생을 견딜 만한 병사들일세.  저렇게 어린 친구들은 야전 병원만 가득 채울 뿐이야."

 

 

(모르티에(Édouard Mortier) 원수입니다.  그의 이름은 재미있게도 프랑스어로 박격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훗날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 왕 밑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는데, 루이 필립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1835년의 폭탄 테러에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루이 필립이 그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편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다부 휘하의 제85 전열 보병 연대의 한 소령은 네만 강가에 도착할 때까지 신병의 20%를 잃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식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먼 길을 일정에 맞춰 행군을 하다보니 탈진과 질병, 소소한 부상으로 쓰러진 병사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도망병들도 많았고 심지어 자살하는 병사들도 꽤 있었습니다.  말의 경우는 더 심각했습니다.  1812년 봄은 특별히 기온이 낮았습니다.  이로 인해 곡식 뿐만 아니라 풀도 늦게 싹을 틔웠습니다.  나폴레옹이 굳이 6월 말까지 러시아 원정을 기다린 것은 말이 부족한 사료 대신 뜯어 먹을 풀이 충분히 자라길 기다린 것이었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근위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린 초지의 풀을 잘라 걷어들였는데, 그게 다 떨어지자 밀과 보리, 귀리를 걷어들여야 했는데, 그것들은 이제 막 싹이 튼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해 수확을 망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말들에게 최악의 사료를 주면서 중노동을 시키느라 말들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흔히 말 사료라고 하면 귀리나 옥수수를 떠올리는데, 의외로 말은 세심하게 사료 성분을 조정해주어야 한답니다.  가령 귀리에는 인 성분이 풍부하고 칼슘이 부족한데, 이는 말에게 필요한 비율인 칼슘:인 = 2:1과는 정반대의 비율이라서 귀리 위주로 사료를 줄 때는 반드시 석회가루 같은 것을 추가해서 칼슘 성분을 보완해줘야 한답니다.  또 옥수수 같은 경우 전분이 풍부해서 좋긴 한데 옥수수를 갈아서 준다고 해도 말은 옥수수 성분의 45% 정도 밖에 소화를 못 시킨다고 합니다.  흔히 덩치 큰 말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생존력 자체는 사람이 더 좋은 모양이에요.)  

 

 


실제로 아직 네만 강을 건너지도 않았는데 위에 언급한 이유로 죽은 말들이 꽤 많았습니다.  길가에는 그런 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그것들을 을씨년스럽게 개들과 까마귀떼가 뜯었습니다.  말들이 죽었으니 그 말들이 끌던 짐마차도 당연히 버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의붓아들 외젠 밑에 소속된 바이에른(Bayern) 장교 하나는 죽은 말과 버려진 마차의 수가 많은 것에 놀라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누구든 이 광경을 보면 전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허겁지겁 퇴각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장군들과 장교들의 임전 태세는 과거에 비해 크게 태평한 편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www.paulickreport.com/horse-care-category/which-is-which-matching-feed-ingredients-with-nutrients/

https://en.wikipedia.org/wiki/%C3%89douard_Mortier,_Duke_of_Tr%C3%A9vise

https://en.wikipedia.org/wiki/East_P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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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14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엘베강 이동의 독일어권은 8세기 말 작센족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공세부터 꾸준히 넓힌 결과입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엘베강에서 오데르 강까지 각종 변경백령들이 세워지지만 983년 벤덴족 대반란 이후 싸그리 날아가버립니다. 이 때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와 분쟁 중이서서 대응하지도 못했고요. 이후 1120년대부터 다시 시작된 동방식민운동 (Ostsiedlung)이 본격화되면서 제대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합니다. 북방의 덴마크와 스웨덴, 남부의 작센까지 서방 카톨릭권의 동부 전체가 동방 슬라브권 정복을 개시한 것인데 그 규모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군 이상으로 컸고 인력도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엘베강 이동의 뤼베크, 로스토크, 슈테틴, 단치히,리가 등 해상 보급이 용이한 하구에 게르만족 도시가 들어섰고 1140년대 이후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대규모 십자군을 구성하여 동방식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덴마크의 발데마르 대왕이 한 때 발트해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는 외젤(사레마) 및 에스토니아 북부를 스웨덴은 핀란드와 카렐리야, 라플란드를 자신들의 십자군으로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스칸디나비아와 달리 발트해 및 폴란드 지역은 초기에는 리보니아 수도회(검우기사단) 및 독일계 상인들이 정복전을 개시하지만 프루스족에 대패하면서 주도권은 우트르메르와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독일 기사단에 넘어가고 50년에 걸친 정복전이 시작됩니다. 프루스 족 및 발트해 연안 민족들 또한 헤르쿠스 만타스 등이 이끈 1274년~1281년까지의 대반란으로 저항하지만 1290년까지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전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합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 때부터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동방 러시아 공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비테니스 대공은 백러시아(현 벨라루스), 게디미나스 대공은 키예프 등 드네프르 강 연안과 붉은 러시아(현 갈리치아 및 볼히니아) 등의 루테니아 전역, 알기르다스 대공은 모스크바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 및 부크강 연안 및 흑해 일부 해안가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리투아니아는 막말로 말이 대공국이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진 제국 수준이었습니다. 이 당시 주요 전투만 해도 1362년 키예프 부근의 푸른강 전투, 1399년 제1차 폴타바(보르스클라 강) 전투 등 평균 5만 이상을 동원한 전투들이었고 생존 그 자체가 걸린 리투아니아는 계속해서 싸우면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상대편인 독일 기사단 역시 1320년대 단치히 획득 및 1346년 덴마크로부터 에스토니아 북부와 외젤과 비크 주교령을 구입하였습니다. 또한 리투아니아를 계속해서 공략해서 1382년에는 빌나우스를 사정권에 두었고 1399년에는 사모기티아 정복, 1402년에는 노이부르크 획득까지 성공해 서로는 브란덴부르크, 동으로는 에스토니아까지 발트해 남부 연안 절반을 육로로 연결한 대국으로 발전합니다.

    1410년 제1차 탄넨베르크(그룬발트) 전투가 대동방 십자군의 절정인데 이 전투에서 독일기사단이 이겼으면 현재 우랄 산맥 이서 전역은 독일민족권으로 확실히 편입되었을 정도로 북방 십자군 역사상 최대 전투였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승리하면서 50년에 걸친 재정복전이 벌어지고 1453년~1466년의 13년 전쟁으로 독일기사단이 폴란드왕국에 신종하면서 동방식민운동은 마침내 종료됩니다.

    다만, 18세기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볼가강 개발을 위해 독일계가 이주한 적은 있습니다

  2. Franken 2019.10.14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영토에 진입도 안했는데 벌써 패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군요.

  3. 루나미아 2019.10.14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보급이...

  4. 2/28일 입대 2019.10.15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군!이라는 표현이 가장 와닿네요. 조별과제가 망하듯이 원정도 초장부터 아주 막장이군요. 마치 스페인에 파견된 프랑스군마냥 필요이상의 학대까지 저지르고 있구요;;

  5. arandel 2019.10.20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나시카님의 글로 본 러시아 원정기가 기대됩니다.
    아 그리고 나시카님, 양해를 구할까 해서요.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아이티혁명에 대한 글부분에서 아이티 봉기가 부두교 술사의 예언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제 블로그에 글쓸때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다고 인용해도 될까 해서요. 나시카님의 글을 링크와 함께 인용해도 괜찮을까요?

  6. arandel 2019.10.21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그럼 저도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본 글에서 이 정보얻었다는거 밝히면서 글 쓰겠습니다.

 

전에 다양한 기준으로 구별되는 유럽의 이모저모 중에서, 술의 종류로 구별되는 유럽은 크게 3조각이라는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남부 유럽은 와인, 북서부 유럽은 맥주, 북동부 유럽은 보드카입니다.

(전체 20개로 구분되는 지도의 소스는 여기 https://www.reddit.com/r/MapPorn/comments/21nt0m/20_maps_of_prejudice_in_europe_1280_x_1920 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13번 즉 맛있는 유럽과 맛없는 유럽의 구분에 공감이 갑니다.  이유는 그게 거의 5번 즉 토마토 유럽과 감자 유럽의 경계선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토마토는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이 듬뿍 포함된 천연 조미료거든요.)

 

(저 위의 지도에서 덴마크가 보드카 지역으로 분류된 것은 좀 뜻 밖이었습니다.  저는 덴마크가 칼스버그(Carlsberg) 같은 훌륭한 맥주 브랜드를 보유한 맥주 지역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보드카 벨트를 파란색으로 표시한 윗 지도를 보면 확실히 덴마크는 보드카 지역이 아니라 맥주 지역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를 뜻하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덴마크에서도 보드카를 많이 마시긴 할 것 같아요.)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네만 강 서안에 집결하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병사들도 그 차이를 명확하게 느꼈습니다.  독일에서 폴란드로 넘어가면서 매 끼니 때마다 마시던 맥주가 보드카로 바뀌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맥주가 보드카로 바뀌었다는 점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독일을 지날 때만 해도 비록 질기더라도 고기와 감자를 맥주로 씻어넘겼는데, 폴란드에 들어오니 맛대가리 없는 보드카와 함께 주어진 음식이 기껏해야 메밀 죽이었습니다.  그나마 질이 나쁜 보드카라도 꾸준히 주어지면 다행이었는데 종종 빵을 발효시켜 만든 약알콜 음료인 크바스(kwas, kvass, 러시아어로는 квас)가 보드카 대신 주어졌습니다.  크바스의 알코올 함량은 대략 1% 정도로서, 중서부 유럽 사람들에게는 보리차나 다름없는 싸구려 스몰 비어(small beer)에 해당하는 음료였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습니다.  가난한 동네로 진입해서 먹고 마시는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크바스는 원래 빵을 발효시켜 만든 슬라브 음료로서,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및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에서도 즐겨마시는 음료입니다.  다만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명성보다는 악명이 자자한 모양입니다.  맛은 그냥 신맛이 난다고 하는데, 원래 어원인 러시아어의 квасить '크바시트'라는 단어가 시게 만든다는 뜻이랍니다.)

(러시아 식음료를 파는 온라인 몰에서의 크바스 가격입니다.  2리터 짜리 크바스가 4천원 정도네요.  운송비와 관세 등을 생각하면... 확실히 싸군요.)



제8 엽기병(Chasseur a Cheval) 연대 소속의 줄리앙 콩브(Julien Combe) 중위는 폴란드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전까지의 행군은 유람길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랑다르메(Grande Armee)의 행군길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것은 당연히 폴란드와 동(東)프로이센이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이 지역이 가난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서유럽에서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멀다보니 서유럽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물론 농업 혁명조차 제대로 전파되지 못한 것이 컸겠지요.  분명한 것은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7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북서부 유럽에 곡물을 수출하던 곡창지대였다는 것입니다.  단치히(Danzig, 즉 그단스크 Gdansk)는 그때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잉여 곡물을 북서부 유럽으로 수출하며 흥성했던 항구도시였거든요.  다만 17세기 중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의회에 만장일치제도가 도입되면서 정치적 혼란에 따른 내분과 외세 침략이 겹쳤고, 덕분에 인구 증가율도 떨어지고 곡물 생산량도 대폭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가난하던 이 지역을 더 가난하게 만든 것은 바로 다름아닌 나폴레옹 자신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 이후 폴란드 곡물 수출의 급감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윗 그림은 '곡물이 돈이 된다'라는 뜻이고 아랫 그림은 '곡물이 돈이 안된다'라는 뜻이랍니다.  두 그림에서 뭐가 다른가 유심히 보니 윗 그림에서는 바다 위에 떠있는 배에 곡물이 잔뜩 실려 있고 서유럽인들이 폴란드 귀족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아랫 그림은 정 반대네요.  여기서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단치히에 폴란드산 곡물을 실으러 온 배는 모두 네덜란드나 영국 등 외국 배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폴란드의 상공업 발전이 뒤쳐졌다는 것이지요.  이는 또 폴란드의 사회 구조가 그냥 그 상태를 고수하려 했던 소수 귀족과 다수의 배운 것 없는 농노들로 구성되어 상공업 발전이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17~18세기의 폴란드 곡물 수출량입니다.  17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엄청난 양이던 곡물 수출이 이후 뚝 떨어져서 회복을 못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폴란드인들의 열망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사람과 돈을 무자비하게 착취했습니다.  당시 바르샤바 공국은 9만5천의 병력을 이 원정에 참여시켰는데, 이는 프랑스를 제외하면 동맹군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고, 조그마한 바르샤바 공국이 부담할 수 있는 적정 병력의 2배에 가까운 숫자였습니다.  바로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댄 북부 이탈리아 왕국도 고작 4만5천 정도였으니까요.  부유하고 인구도 많은 바이에른군도 2만4천에 불과했습니다.  이 원정 때문에 바르샤바 공국은 거의 파산지경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은 1811년 말부터 아무도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1812년 6월 이후로는 군대조차 봉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몇년 전부터 시행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은 폴란드 뿐만 아니라 동프로이센 지역의 경제에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 지역은 산업 발전이 더디어 주로 곡물과 삼(hemp), 목재와 같은 농산물과 함께 탄산칼륨(potash) 같은 광물을 영국으로 수출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대륙봉쇄령이 시행되니 이런 1,2차 산업 생산물을 팔 곳이 없어져 버렸고 덕분에 많은 농지가 경작되지 않고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이라더니 그런 상황에 1811년은 보기 드문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젠 수출은 고사하고 농민들이 먹을 곡물은 물론 1812년 봄에 밭에 뿌릴 종곡조차 부족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원정 직전인 1812년 3월 말, 바르샤바 도지사의 아내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곤궁은 너무 심해서 사정이 이보다 더 악화될 수는 없을 것 같았어.  하지만 더 나빠질 수도 있더군.  아주 바닥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더 나빠졌어."

더 나빠진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미 농민들이 도토리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빵을 먹고 지붕의 초가를 헐어 가축들에게 사료로 주고 있는 마당에 수십만의 프랑스군, 이탈리아군, 독일군이 쏟아져들어와 감자와 보드카를 요구한 것입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de.wikipedia.org/wiki/Kwas
https://www.russianfoodusa.com/kvas-monasturski/
https://en.wikipedia.org/wiki/Polish%E2%80%93Lithuanian_Commonwealth#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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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anken 2019.10.07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폴란드가 곡물수출 열심히 했던 건 곡물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공산품 및 사치품 살 돈은 필요한데 변변한 수출품이 없어 농노들을 착취한 거죠. 이 쪽은 밭에 씨앗 1을 뿌리면...2를 거둘 정도로 농토도 기술도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구요. 자국민들을 이렇게 개돼지 취급했으니 폴란드란 나라가 공중분해된 것도 남탓할 게 못되는 거고요.

  2. 스티븐김 2019.10.07 1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
    개인적으로 며칠후에 폴란드 방문하는데
    나시카님 글을 참고로 잘 보고 오겠습니다~

  3. 카를대공 2019.10.07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을 오래 읽다보면 어릴적 위인전을 보며 형성된 나폴레옹의 이미지가 다 깨지는거 같습니다.
    능력을 떠나서 타국에게,심지어 본인 부하에게 하는 짓을 보면 망한게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날 잡아서 나폴레옹 개인의 인격,파렴치한 짓을 모은 글을 쓰시면 재밌는 기획이 될 것 같습니다.

  4. 웃자웃어 2019.10.07 2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인성과 능력은 별개인것 같아요.

  5. reinhardt100 2019.10.07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5세기 이후 서구권을 이메뉴얼 월러스틴의 세계경제체제 이론대로 본다면 나폴레옹 전쟁기까지 프랑스는 단 한번도 핵심부에서 탈락한 적이 없었고 영국이 17세기 말부터 핵심부에 진입하는데 성공했죠. 반면 에스파냐, 북이탈리아는 핵심부에서 반핵심부 혹은 주변부로 떨어졌고 북독일 지역은 반핵심부에서 맴돌고 있었죠. 의외로 스웨덴이 주변부에서 반핵심부로 올라가는데 성공하긴 합니다.

    문제는 러시아와 폴란드, 리투아니아 같은 동유럽권인데 이들 지역은 주변부에서도 상당히 위치기 안 좋았죠. 러시아는 그나마 주물, 아마 등에서 나름대로 생산력을 유지했지만 폴란드 리투아니아에는 정말 있는게 농산물뿐일 정도엿습니다. 왜 이 판국이 되었냐? 바로 막장 농노제도 한 몫하고 무엇보다도 크림한국의 인간 사냥 때문이기도 합니다. 크림 타타르인들의 백인 노예 사냥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16~18세기 동안 약 200만의 노예를 잡아갔다고 할 정도였고 가장 극심했던 16세기 말~17세기 후반까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국경지대는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하는 막장 지역이 되어버립니다. 이들의 노예 사냥에 끌려가 노예로 되느니 차라리 막장 농노제가 더 낫다고 농노들이 생각할 지경이 되었으니 국가 전체 발전이 될 리가 없었죠.

    그리고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곡물 수출이 개판이 난 이유 중 하나가 주요 곡물 수입지역이던 네덜란드, 북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지역의 경제가 엉망이 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북이탈리아는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 제일의 공업력을 자랑했지만 전자는 프랑스, 잉글랜드, 후자는 터키 제국과의 전면전과 이에 따른 경제 붕괴로 핵심부에서 탈락, 반핵심부 혹은 주변부로 떨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에스파냐는 17세기 내내 전쟁에서 연전연패한 데다가 신대륙 개척이 정체를 맞이한 여파까지 겹쳐 내내 경제가 개판나버렸죠. 게다가 그 판국에 무어인 수십만을 모조리 쫒아내는 자폭(?)까지 저질러버려 경제가 파탄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카를로스 2세 치하 에스파냐 궁정에 있는건 오직 채무문서 뿐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들 지역들의 곡물 수요를 충족해주던 곳이 폴란드 리투아니아였는데 이들이 수입대체(?)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경제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대동란시대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모스크바 점령까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러시아를 무자비하게 약탈해서 싹쓸어버린 귀금속 및 영지를 무자비하게 수탈해서 단치히에서 곡물 팔아 벌어들인 돈 덕분에 전쟁을 할 수 있었죠. 이 전쟁이 과소평가되서 그렇지 말 그대로 북쪽으로는 카렐리아,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남부까지 말 그대로 독소전쟁와 맞먹는 전역, 아니 동쪽의 투시노까지 포함해야 하니 더 넓은 전쟁터를 자랑합니다.

    • 검정필 2019.10.11 0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님도 글을 한번 써보시는건 어떤가요? 가끔은 님의 댓글을 읽기 위해 글들을 다시보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10.11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고야. 제가 그 정도 실력이 되질 않습니다. 그저 댓글로 간신히 다는 수준에서 할 수 있어서요.

      제가 쓰는 댓글들이 상당히 긴 편이라 보기 쉽지 않은데..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단 프랑스나 폴란드는 물론, 나폴레옹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이나 바덴, 뷔르템베르크, 작센 등 독일 출신 병사들은 나폴레옹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원래 독일은 신구교간의 종교 차이도 있고 해서 남북간 지역 감정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남부 독일 출신들은 딱히 프랑스인들을 매우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프랑스에 대한 미움보다는 프로이센에 대한 혐오감이 더 심했습니다.  반면에 주로 헤센(Hessen)과 옛 프로이센 영토로 새로 편성된 베스트팔렌 왕국 병사들, 즉 북부 독일 출신의 병사들은 이렇게 프랑스군에 편입되어 전쟁터로 나갈 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1812년 1월, 베스트팔렌의 총리는 전쟁 준비에 대해 프랑스의 외무장관 마레(Maret)에게 보고하는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우려했습니다.

"병사들의 충성심은 믿을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오히려 먼 타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더 싫어합니다.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전쟁 초기에 그들의 그런 감정이 일으킬 말썽은 주로 대규모 탈영의 형태로 나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옛 프로이센 영토 출신의 독일인들의 감정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현직 프로이센 병사들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을 혐오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적이 패배한다는 것은 프로이센에게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싸움에서 자신들이 피를 흘려가며 나폴레옹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조차 반란이나 대규모 탈영같은 저항 행위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는 크게 2가지 때문이었는데, 하나는 '야만스러운 러시아인들을 유럽 무대에서 완전히 쫓아내버린다'라는 나폴레옹의 빅 픽처가 중서부 유럽 출신 병사들에게 어느 정도 공감을 샀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군인의 긍지' 때문이었습니다.  프로이센 경기병대의 지텐(Ziethen)이라는 대령이 어느 폴란드 장교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싸울 전쟁은 프로이센의 국익과 상충한다는 것을 잘 안다오.  그래도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몸이 산산조각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옆에서 싸울거요."

베스트팔렌이나 프로이센 출신보다 더 대규모 탈영이 우려되는 부대는 나폴레옹의 매제 뮈라(Murat)가 꽤 오래 다스린 이탈리아 남부 지방 '나폴리 왕국'군이었습니다.  이미 그때도 이탈리아는 남북간의 격차 및 지역 감정이 꽤 심했나 봅니다.  나폴레옹이 직접 국왕으로 있던 북부 이탈리아 지방의 '이탈리아 왕국'군은 매우 우수한 부대로 인정받았고 병사들이나 장교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고대 로마 제국의 진정한 후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나폴리 왕국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프랑스 지휘관들이 '군인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도 이렇게 억지로 머릿수만 잔뜩 채운 군대가 최고의 전쟁 기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확실히 전쟁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병대원들의 상당수가 말도 제대로 탈 줄 모르는 미숙련 기수라는 것을 보고하는 부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병대 4만을 편성할 때 그렇게 많은 기병대원들이 모두 훌륭한 기수일 수는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아.  내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숫자가 적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야.  적군은 스파이든 소문이든 신문 기사이든 무슨 방법으로든 내게 기병대가 4만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

 

(요즘 운전을 할 줄 아는 젊은이들 수자보다 당시에 말을 탈 줄 아는 젊은이들 수자가 훨씬 더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새로 징집된 기병들 중 상당수는 칼춤을 추기는 커녕 그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만 있어도 다행이었습니다.  이런 미숙련 기병들이 당장 만들어내는 문제는 안장 밑의 상처(saddle sore)였습니다.   말을 제대로 돌볼 줄도 모르고 말 위에서 제대로 자세를 잡지도 못한 채로 장시간 말을 탔으니, 기병의 엉덩이도 아팠지만 말도 안장에 쓸려 등에 저런 상처와 부종 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처와 부종을 제때 돌봐주지 않으면 결국 피도 나고 곪아서 더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적군에게나 아군에게나 사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바로 나폴레옹 본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참모로 배속되었던 독일 출신 장교인 폰 펑크(Karl von Funck)에 따르면 이랬습니다.

"자신들이 무적이라는 믿음 자체가 그들을 무적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되든 결국 끝에는 그들이 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적군의 사기가 제풀에 꺾이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제9 폴란드 창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던 독일 장교인 폰 베델(Count von Wedel) 중위도 나폴레옹의 존재 자체가 마법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적었습니다.

"이 원정에 참여하는 나라들 중 3/4은 이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과는 정면으로 이해가 충돌되는 관계에 있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들은 러시아가 이기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지만 실제로 위험이 닥치자 마치 다들 자기 집을 지키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싸웠다.  황제에 대한 각자의 개인적인 감정들이 전에는 어떤 것이었든간에,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재능과 판단에는 모두가 확신을 가졌다.  그의 위대함이 뿜어내는 아우라에는 나도 저절로 감화가 되어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열정과 경외의 감정을 담아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 !'를 외쳤다."

 

나폴레옹을 멀리서 쳐다보기만 해도 이런 감정이 치솟는데, 나폴레옹이 자기에게 말이라도 걸어준 적이 있다면, 혹은 나폴레옹이 자기와 같은 솥단지에서 수프를 먹었다면,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습니다.  피에몬테(Piemonte) 출신의 칼로소(Calosso)라는 이탈리아인 기병 장교는 나폴레옹이 사열을 하다가 그의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아마도 나폴레옹의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몇마디를 건네는 영광을 누리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날 그 사건 이전에는 난 그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을 존경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열정으로 그에게 내 목숨을 바쳤다.  그 점에 있어서 난 딱 한가지가 후회스러웠는데, 그건 황제께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저 멀리서 보고만 있어도 자기가 쥔 머스켓 소총이 7.62mm 기관총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 !)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 측에서도 인정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나 봅니다.  한 러시아 장교에 따르면 당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나폴레옹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던 정신적 지배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며, 적이건 아군이건 마치 어떤 요술처럼 그의 이름 자체에서 무한정의 힘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합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물론, 이탈리군이나 독일군이나 원주둔지를 떠나 네만 강 서쪽으로의 행군길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각 부대는 통과하는 지역의 지형에 따라 어떤 경우는 하루에 15km, 어떤 경우엔 35km까지도 주파했습니다.  다년간의 원정 경험을 가진 프랑스군 병참부의 일처리는 매우 뛰어나서, 각 부대에게는 어느 날짜에 출발해서 언제까지 어디에 도착해야 하는지의 일정표가 상세히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주어진 날짜에 주어진 도시나 마을에 도착해야 했고, 도착하면 정해진 절차와 체계화된 서류 작업을 통해 숙소를 배정 받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반 시민들의 집에 각 가정의 사정에 따라 병사들을 2~3명씩 혹은 5~6명씩 숙영(billeting)시켰지요.  병사들의 식량은 계약된 종군 상인들에 의해 미리 준비되어 있다가 각 부대의 부사관 등이 전표를 들고오면 지급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꽤 체계적이었습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잇는 알프스의 고갯길인 브레너패스(Brennerpass) 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순조롭다보니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엘바(Elba) 섬 출신의 체사레 데 로지에(Cesare de Laugier)라는 군인의 기록에 따르면 브레너(Brenner) 고갯길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쪽으로 넘어가는 행군은 마치 명랑하고 즐거운 군사 행렬 같았다고 합니다.  작센 출신의 폰 미어하임(von Meerheimb) 중위에 따르면 그는 고향 땅을 떠나게 되어 처음에는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슬퍼했지만, 일단 행군 대열에 합류해보니 부대 전체 분위기는 흥겹고 가벼운 농담이 넘쳐났으며, 심지어 들르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만난 아가씨들과의 짧은 연애도 꽤 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낙천적 분위기는 폴란드에 진입하자 싹 바뀌었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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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9.09.23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 뿐만이 아니겠지만 이기기 위해선 심리전도 역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것 같네요.

    • nasica 2019.09.23 07: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는 나폴레옹이 필요 이상의 대군을 모은 진짜 이유도 실제로 러시아를 침공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정도의 대군을 모으면 러시아가 겁을 먹고 미리 굴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전쟁은 결국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저는 믿는데, 나폴레옹도 결국은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유애경 2019.09.23 0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천재,영웅 등으로 미화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완벽할수는 없었겠지요!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2. 아나는평범한사람이었구나 2019.09.23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행복한 한주 되세요~

  3. Vladimir 2019.09.23 0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때도 러시아인들은 유럽인들에게 '위협' 내지는 준 야만족 취급을 받았나보군요.독소전쟁때 가장 극단적으로 배출된 유럽인의 러시아인 혐오는 바로 지금 이 순간도 돈바스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규군의 일부이자 네오나치 집단인 아조프 대대 등이 표출하고 있답니다.

    • 2월28일 입대 2019.09.24 2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격하게 동의합니다. 영국이 이끄는 서유럽 세력과 러시아의 갈등은 세대를 뛰어넘는 전통(?)인 것 같습니다. 러시아가 서유럽이나 중근동으로 진출할 때면 어느때고 앵글로색슨들이 막았고, 길이 막혀 동방으로 진출하려면 앵글로색슨의 수하(?)들에게 막혔죠. 크리미아에서 해밀턴 요새까지 그 갈등구조는 아마 사람들의 인식구조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4. 샤르빌 2019.09.23 0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존재 자체가 사기진작 효과가 있다니.. 갑자기 토탈워 게임이 연상되네요ㅋㅋ

    • 2월28일 입대 2019.09.24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 머리 위에 별이 어찌나 찬란하게 많이 뜨던지요 ㅎㅎㅎ부대가 망가지면 파리가 아니라, 아작시오에 스폰되는 것도 소소하게 웃겼어요

  5. Franken 2019.09.23 1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출생연도 등 의외로 공통점이 많은데 즉흥적이었던 히틀러완 달리 나폴레옹은 전쟁의 신답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하고 갔군요.

    러시아와 안 싸우는 게 답이란 건 나폴레옹 본인 역시 잘 인지하고 있었겠지만 어차피 유럽대륙을 완전 재패할려면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했으니 전쟁은 불가피였죠.

  6. 이타카 2019.09.23 14: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부 유럽ㅜㅜㅜ

  7. 냠냠 2019.09.23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밋게 보고있어요!! 질문이 있어요 : 젊은이들 ‘수자’?? 제 담임선생님도 그렇게 쓰시던데 원래 옛날엔 그런 맞춤법이었나요?

    • nasica 2019.09.23 2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으억 아니요, 솔직히 기억이 안납니다. 요즘 맞춤법이 바뀌어 여러가지가 변한 것은 맞는데 그 중에 제가 극혐으로 여기는 것이 단어 붙여쓸 때 사이 시옷 쓰는 것입니다.
      가령 소고기 뭇국 같은 거요. (저 때는 쇠고기 무우국이었지요.) 그런데 한자어끼리 붙여쓸 때는 사이 시옷이 없어도 된다고 하길래, 숫자가 아니라 수자가 요즘 맞는 맞춤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군요.

    • 2월28일 입대 2019.09.24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cia님의 설명대로, 명사들로 이루어진 합성어의 사이에 'ㅅ'이 낑겨들어가는 것을 '사이시옷 현상'이라고 합니다.

      끔찍하리만큼 많은 예외가 존재하지만, 기본적인 룰은 보통 1) 두 명사의 결합이 있을 것 그리고 2) 그 두 명사중의 하나는 최소한 순우리말일 것 입니다.
      따라서, 수자는 수(數)와 자(字)가 결합되었으므로 사이시옷이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만....

      국립국어원에서는 '곳간, 셋방, 숫자, 찻간, 툇간, 횟수' 이 6가지의 합성어에 대해 예외를 인정합니다. 즉, 순 우리말이 없어도 사이시옷을 쓰는 것입니다.

  8. ㅇㅇ 2019.09.23 1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분위기가 바로 나폴레옹에게 사실을 바로 볼수 있는 눈을 빼앗아 갔다고 감히 말하고 싶네요. 모든 권력자들은 주변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합니다

  9. 웃자웃어 2019.09.23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은 러시아 원정은 하지 말아야 했었네요.

  10. 하하하하 2019.09.23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대로 저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가서 웰링턴을 때려잡았어야

  11. 차라리 2019.09.24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로 어느정도 진격한 시점에서, 보급선 유지가 가능은 한 선에서 떨거지 부대를 세워놓고 소수 정예로만 휘젓는 방식으로 러시아에 피해를 입히는 걸 반복했음 어땠을지...
    결전을 피하고 몇몇 주요 도시만 점령하고 대규모 유격전으로 피난 간 짜르와 귀족들이 지치게 만들면 러시아 쪽에서 서쪽으로 진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싶네요
    요즘처럼 총력전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니 러시아 권력층이 피난생활을 그리 오래 감내하진 못했을 것 같습니다

  12. 2월28일 입대 2019.09.24 2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저도 저게 가장 궁금했어요! 집단탈영이나 반란문제요. 나폴레옹의 카리스마는 인정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외국인'부대의 통제가 보장됬는지...왜 작은 단위로 나눠서 믿을 수 있는 순수(?) 그랑다르메에 낑겨넣는 방식은 쓰이지 않았을까요?


1812년 5월18일, 아직 폴란드 푸오츠크(Płock)에 있던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viceroi)인 외젠 보아르네(Eugène de Beauharnais)가 당시 임신 중이었던 부인 아우구스타(Auguste Amalie Ludovika Georgia von Bayern)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실제로 발발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는 거 아시오 ?  사람들 말로는 전쟁이 일어날 턱이 없다고 하오.  이유는 양측 모두 전쟁으로 얻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라오.  결국 협상으로 이 상황이 종결될 것이라고 다들 말하고 있소."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 아우구스타입니다.   외젠과의 결혼은 순수하게 정략적으로 맺어진 것이었으나, 외젠이나 아우구스타나 서로를 정말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도 외젠은 처가댁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살았습니다.)

 

 


실제로 중서부 유럽의 프랑스나 독일,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이 볼 때 황량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머나먼 러시아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가난하고 낙후된 나라에 쳐들어가서 얻을 것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먼 나라인데다 너무 넓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쳐들어온다면 맞서 싸우겠으나, 굳이 그 먼 곳으로 쳐들어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소문이 돈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궁극적 목표야 러시아를 다시 대륙봉쇄령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지만, 나폴레옹 본인조차 이번 전쟁의 전술적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큰 전투 두어번이면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공략해야 할지는 본인도 몰랐습니다.  나폴레옹은 한번은 스몰렌스크(Smolensk)를 점령하고 겨울을 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다음 번에는 모스크바야말로 러시아 제국의 진정한 수도이므로 여름이 끝나기 전에 거기를 점령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 본인부터 오락가락하는 판국이니 누가 보더라도 이번 전쟁은 목표가 없는 늪 같아 보였습니다.

 

 

(스몰렌스크까지의 거리도 사실 가까운 편은 아니지만 모스크바까지 가는 것은 더욱 멀었습니다.  당시 비교적 쾌속으로 행군하던 프랑스군도 하루 25km 정도가 평균이었으니, 스몰렌스크까지 가는 것도 전투가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와도 대략 29일 걸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네만(Nieman) 강 서안으로 집결하라는 나폴레옹의 소집 명령을 받은 프랑스 및 동맹국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과연 어떤 기분으로 고향을 떠났을까요 ?  아마 즐거운 마음으로 군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남의 나라 전쟁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나폴레옹이 그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채 길을 떠났습니다.  이들에겐 네만(Nieman) 강 서쪽 어딘가였을 최종 집결지의 위치와 집결 목표일은 물론 몇월 며칠에는 어느 마을에, 몇월 며칠에는 어느 도시에 도착하라는 매우 상세한 중간 일정표까지 주어졌습니다만, 정작 어느 나라를 치기 위해서 간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황실 근위대 소속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이라는 사람도 폴란드에 도착하고 나서도 편지에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풀릴지 알 방법이 없다.  뭔가 낌새가 보이는 것도 없고 상상력을 자극한 아무 단서가 없으며, 열정을 불러일으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소문은 자자했습니다.  원래 지휘부가 비밀을 엄격하게 지킬 수록 아랫것들의 상상력은 나래를 펼치게 되어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치러 간다는 소문이 가장 유력했지만 그럴 리가 없고 모든 것은 인도에 쳐들어가기 위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짜고치는 고스톱이라는 소문도 파다했습니다.  

푸제(Pouget) 장군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인들과 연합하여 러시아 제국의 광활한 사막을 지나 영국놈들의 소유인 인도를 공격하러 간다고 생각했다."

세계 지리에 어두웠던 어떤 병사는 이 소문을 잘못 알아듣고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어서 동네 사람들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를 통해 영국으로 진격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더 배운 것이 있고 이성적인 병사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소문은 더욱 그럴싸 해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가 비밀 협약을 맺고 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기로 했으며, 먼저 투르크의 유럽-아시아 영토를 정복한 뒤에야 인도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습니다.  이 소문은 워낙 그럴 듯하여, 심지어 알렉산드르에게 직접 제출된 스파이들의 첩보 보고서에도 '나폴레옹의 진짜 목적은 러시아를 짧고 거센 공격으로 굴복시킨 뒤 그대로 러시아군 10만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뒤 이어서 이집트를 공략하고, 최종적으로는 벵갈을 침공하는 것'이라고 적힐 정도였습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어쩌면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의 의중이 그럴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야콥 발터(Jakob Walter)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석공이 원래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에 최초로 징집되어 폴란드 전역에서 복무한 이후 소집과 소집 해제를 반복하다가 1812년 다시 소집되어 러시아로 향했습니다.  러시아로 갈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고, 티푸스에 걸렸으나 다행히 살아남아 회고록도 썼습니다.)

 

 


좀더 스케일이 작은 소문도 있었습니다.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출신의 야콥 발터(Jakb Walter) 일병이 들은 소문은 방향이 정반대였습니다.  그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발트 해변 어딘가의 큰 항구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 병사들에게는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병사들의 편지나 기록들은 꽤 낭만적인 전망을 그린 것도 많았습니다.


"이 모든 소문은 사실 내겐 별 상관이 없다.  우리가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혹은 그냥 가운데로 쭉 가든 뭔 상관이겠는가 ?  내가 진짜 세상 속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중요하다."

"내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 거의 모두가 군대에 모여있었다.  그들은 이미 영광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그냥 있으면 세상의 짐짝 신세인 내가, 그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수줍게 손을 모은 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  난 그때 18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는 '대인도 제도' 혹은 어쩌면 '에집(Egippe)'으로 간다고 해요.  사실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어요.  저는 우리가 세상 끝까지 가봤으면 해요."

이런 태평한 상상력과 그 해 연말 그들이 처할 운명을 비교해보면 상당히 한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태어난 동네에서 10km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뜨기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영국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 인도라는 곳이 섬인지 육지인지, 러시아와 이집트 사이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하고 들뜬 모험처럼 느껴진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근거없는 소문들과 억측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정 대상이 러시아라는 것은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 중 절반 정도는 프랑스 출신이 아닌 폴란드,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다양한 국가 출신이었고 심지어 스페인 출신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병사들과 폴란드 병사들은 워낙 나폴레옹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으니 그렇다치고, 다른 나라 출신들은 러시아 원정길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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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멜무지로 2019.09.16 0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낙천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그 뒤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워 보이네요

  2. starlight 2019.09.16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를 종속시켜 식민지나 위성국으로 두기엔 현실적으로 불가하고, 결국엔 다시 한번 승리해서 (틸지트에서처럼) 프랑스 패권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삼으려 한 것 같습니다. 전략적이기보단 다분히 감정적이고 사사로운 자존심도 반영된 계획이었다 봅니다.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인원과 물자를 투입한 것치곤 확실한 손익 계산이 없다는게, 너무 많은 승리와 성공으로 허황되고 무능력해지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세계관을 반증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3. 빛둥 2019.09.16 17: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군의 보급도 없고, (폴타바 전투때처럼) 상대 반란세력의 도움도 없고, (아무리 끌어모았어도) 현대적 보급수단도 부족하고, 거대한 대륙 한 가운데의 상대 수도로 무작정 들어가다니... 아무리 후세사람들이 역사를 다 알고 있어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폴레옹이 너무 무모했습니다.

    "쎄게 한 대 얻어 맞으면(한판 회전에서 크게 지면), 숙이겠지."라는 마음 말고는 해석되지가 않네요. 나폴레옹이 계속 성공가도만 달려왔던 게 결국은 파국을 부른 것.

    그나저나 당시 알렉산드르는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에 있었겠죠? 그 쪽으로는 아예 나폴레옹 군대가 접근도 안 했네요. 어차피 발틱해가 영국의 수중에 있으니, 페테르스부르크 공략은 힘들고, 설사 공략에 성공해도 러시아 왕실을 잡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4. 루나미아 2019.09.17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로로 인도를 공격한다는, 현실적으로 매우 힘들어보이는 발상이 은근 흔했나 보네요. 하긴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례도 있으니까요.

  5. 푸른 2019.09.18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원정을 앞두고 돈 소문이나 병사들의 상상이 되게 귀엽고 웃기네요 ㅋㅋ

    그러면서도 당시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도 러시아원정이 오스만이나 이집트 침공보다 더 예상못할 일이었다는게, 앞으로 있을 원정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네요...

  6. 무명씨13 2019.09.19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의 글을 특히 황제의 러시아 원정 준비 과정 및 실패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이후 발생한 크림전쟁에서 황제가 겪는 고통을 러시아 군대가 그대로 맛보며 허물어져 갔다는데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 땅에서 뭘 배우고 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