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ène de Beauharnais2 바이에른의 배신 (6) - 외젠의 결혼 (상) 프랑스가 독일을 프랑스에 위협적이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일권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두 축으로 자잘하게 분열되어 있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건 나폴레옹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자잘한 독일 국가들 중 가장 덩치가 컸던 바이에른을 친프랑스 성향으로 굳히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노골적인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는 몽겔라스가 조종하는 막시밀리안 1세가 바이에른 선제후가 된 것은 나폴레옹에게도 매우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나폴레옹이 가부장적인 지중해성 남자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당시는 이제 막 19세기로 접어든 시대였고 그 시대 유럽에서는 동맹을 굳히는 단단한 수단으로 지배 가문끼리의 정략 결혼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2024. 9. 16. 뤼첸 전투 (9) - 외젠(Eugène)과 오이겐(Eugen)의 대결 베르트랑이 서쪽에서 힘겹게 스타지들 마을로 접근하고 있을 때, 나폴레옹이 있던 카야 마을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4시 경에 도착한 러시아 예비군단의 일부 병력들이 전장에 투입되면서 프로이센군이 기세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하던 나폴레옹은 4시 반 경에 예비대로 있던 신참 근위대(Jeune Garde) 제1 여단을 투입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전술에서는 예비대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예비대는 최후까지 아껴두었다가 이제 전세를 뒤집거나 돌파구를 마련할 때 투입하면 효과가 만점이었거든요.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곰가죽 모자를 쓴 근위대 제1 여단이 라뉘즈(Pierre Lanusse)의 지휘 하에 진격을 시작하자 그 뒤를 따라 네의 제3 군단 병사들도 진격을 시작했고, 이들은 오랜 전투.. 2022. 10. 31.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