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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2.11 나폴레옹 시대의 병참부 이야기 (중편) (8)
  2. 2019.02.04 나폴레옹 시대의 병참부 이야기 (상편) (25)



(흔히 단순한 축성 전문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분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17세기부터 2백년간 요새와 포병, 병참, 병력 운영 등 모든 전쟁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 보방(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백작입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지의 군사 요충지에 일찌기 보지 못했던 묘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당대 유럽의 군사 작전 행태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보방(Vauban)식 요새의 등장이었습니다.  대포의 발명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었던 중세식의 높고 웅장한 성벽과는 달리, 보방식 요새는 낮고 두꺼운 벽으로 된 보루(redoubt)와 쐐기 모양의 옹벽(ravelin), 그리고 대포알을 튕겨내기 위한 경사방벽(glacis) 등을 갖춘, 한마디로 방탄벽을 갖춘 요새였습니다.  이런 별모양의 보방식 요새는 17세기 프랑스의 공병 전문가 보방(Sebastien Le Prestre de Vauban, Seigneur de Vauban)에 의해 획기적으로 개선된 뒤 17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군사 작전의 형태가 군사작전의 형태가 대규모 회전보다는 요새를 둘러싼 포위전으로 변질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경사방벽이란 요새방벽을 둘러싼 해자 바로 바깥쪽에 흙으로 두툼하게 쌓아놓은 방벽이었습니다.  포위군이 요새방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쏘아대는 포탄 상당수가 이 경사방벽에 튕겨져 나갔습니다.)


(경사방벽이 포위군의 포병들에게 얼마나 미치고 환장할 방어수단인지 보여주는 구조도입니다.  포위군은 요새방벽을 대포알로 때려 무너뜨리길 원하겠지만, 요새방벽은 깊은 해자와 경사방벽으로 인해 공성포에게는 지극히 작은 표적이 되었고, 맞추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방벽 위의 수비군은 적군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고요.)



(레만 Lehman 호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한 제네바 Geneva를 둘러싼 보방식 방벽의 모습입니다.  이 지도는 1841년의 모습인데, 지금 저 방벽은 헐리고 없습니다.)




전쟁의 형태가 장기간의 포위전이 되어버리자,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이 군대의 식량 조달이었습니다.  아무리 종군상인들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고 해도, 종군 상인 몇몇에게 전부대가 먹을 밀가루와 빵을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너무 비쌌습니다.  결국 군량 중 상당부분은 주변 농가들로부터 징발을 하거나 약탈을 통해 구해야 했는데, 수만 명의 포위군이 적 요새를 둘러싸고 근처에 몇 달 버티면 그 주변 일대의 식량은 씨가 말라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식량을 더 구할 수 없으면 포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는 곧 포위전의 패배를 뜻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를 개편한 나라는 역시 유럽의 육군 강국이자 가장 많은 침공 전쟁을 치른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가장 많은 보방식 요새를 구축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적 요새를 가장 많이 공격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중반에 삼총사에 나오는 유명한 추기경이자 정치인인 마자랭(Jules Mazarin)의 부하인 국방장관 르 틀리에(Michel Le Tellier)는 근대 유럽 세계 거의 최초로 국가 차원에서 병참 업무 개혁을 손보기 시작했니다.  기존에는 각 연대장들의 재량에 따라 그때그때 제멋대로 맺어졌던 종군상인들과의 계약을 표준화하여 좀더 체계적이고 원활하게 보급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여태까지 하찮고 천하게 여기던 수송 업무에도 신경을 써서 짐수레 부대도 상설화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투 지역 인근에 보급창을 세워 군량을 미리 축적하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 르 틀리에입니다.  이 분은 리셜리외의 뒤를 이은 추기경+재상인 마자랭에게 평생 충성했고, 또 루이 14세를 꼬드겨 프랑스 내의 신교도인 위그노들을 탄압하는데도 앞장섰습니다.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르 틀리에 본인은 끝까지 잘 살았고, 아들인 루부아 Louvois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방장관직에 올랐습니다.)



(르 틀리에의 병참 개혁이 큰 도움이 되었던 1658년 덩케르크 Dinkirk 포위 작전도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스페인 및 영국 왕당파 연합군이 점거한 덩케르크를 포위 공격한 전투입니다.  결국 영불 연합군이 덩케르크를 함락시켰습니다.)




물론 이런 개선은 여전히 미흡했고, 전선의 많은 부대들은 계속 약탈과 현지 징발에 의존했으며, 덕분에 프랑스군은 여전히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프랑스군의 병참 능력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우수해졌고, 이는 결국 나폴레옹의 기동전과 맞물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패하는데 큰 힘이 됩니다.  나폴레옹 기동전의 근원은 식량의 현지 조달이었는데, 이는 유능한 병참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 때는 오스트리아군도 프랑스군의 흉내를 내어 식량의 현지 조달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 병참부의 역량이 프랑스군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것이지요.  '현지 조달'이라는 것이 꼭 약탈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무자비한 약탈로 당장 먹을 것을 손에 쥔 굶주린 병사들이 자기들 몇몇끼리만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것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수집한 식량을 재빠르게 계량하고 보관하고 수송하여 넓은 곳에 분산된 아군 병력에게 효율적이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질구레한 실무 능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마 나폴레옹이 말단 병참부 서기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밀가루와 와인 항아리를 다루는 법을 일일이 가르쳤겠습니까 ?  프랑스군 병참부는 르 틀리에 시절부터 근 100년 넘게 다른 나라 군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실무 능력을 쌓아왔었고, 나폴레옹이 그 혜택을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 영국은 나폴레옹 시대 100년 전부터 유럽 대륙은 물론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미와 카리브해 등 전세계를 지역구로 활발한 침략 전쟁과 식민지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원거리에 걸친 병력과 장비, 식량과 탄약의 수송에 있어 굉장히 전문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해군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육군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그런 병참 업무의 체계화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1808년 포르투갈에 상륙한 웰링턴이 상륙 1주일 후 국방부 장관인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불평한 것이 병참 업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진격시 제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바로 병참부(Commissariat)의 체계화입니다.  이 부서는 장관님의 심각한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이 병참부는 웰링턴의 사령부에 있던 다른 지원 부서들, 즉 의무부(Medical Department), 조달부(Purveyor's Department, 이름과는 달리 병원기자재와 사망자 처리를 담당), 경리부(Paymaster-General), 자재부(Storekeeper-General, 역시 이름과는 달리 주로 장비와 텐트 등의 수송을 담당) 등과 함께 민간인으로 구성된 부서였습니다.  다만, 병참부는 다른 지원 부서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이들 부서 중에서 유일하게 그 부서장이 런던의 재무부(His Majesty’s Treasury)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웰링턴이 보낸 편지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모든 지원 부서 중에서 병참부의 업무가 군사 작전의 성패에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스본으로 선적된 건빵 한 개가 최전선의 병사의 입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전체 과정을 상세히 보살피고 추적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는 군사 작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이 나폴레옹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이 둘의 군사적 역량 차이는 누가 봐도 나폴레옹이 두 단계는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웰링턴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웰링턴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실속있는' 스타일의 지휘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웰링턴이 이렇게 병참부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원래 웰링턴이 병참 업무가 주특기였기 떄문에 그랬을까요 ?  웰링턴은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하기 전에는 인도와 덴마크에서 활약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도 이렇게 병참부를 중시했을까요 ?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웰링턴이 뜬금없이 병참부의 열성팬이 된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그 특수성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



(이번에는 좀 너무 짧군요.  분량 조절 실패로 병참부 이야기는 3부에 걸쳐 늘어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T T)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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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석총 2019.02.11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깨달았을까?

  2. 지나가던 사람 2019.02.11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삼총사에 마자랭이 나오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철가면이라면 등장할 시기이긴 합니다만... 삼총사의 악역 비슷한 포지션이면 마자랭의 전임자인 리슐리외 추기경입니다.

  3. 루나 2019.02.11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방식 요새가 전쟁 양상을 변화시키는 데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네요

  4. 수비니우스 2019.02.11 1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덕분에 프랑스의 국가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에서 뻥터졌습니다 ㅋㅋㅋㅋ

  5. 카를대공 2019.02.11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어져도 생각보다 병참 이야기가 무척 흥미진진한데요?
    역시 나시카님 글빨(?) 덕이 아닐까 합니다ㅎㅎ

    중간에 실무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요즘 들어 이쪽에 대해 많이 생각 합니다.

    언젠가부터 여기저기서 큰 그림에 대해 강조하는데 오히려 실무 능력에 대해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눈 앞에 것만 잘 해결해도 자연히 큰 그림이 잘 그려지는 경우가 많던데 이쪽을 강조하는 사람이 없는건 아쉽더군요.

  6. ㅇㅇ 2019.04.17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1. 현지조달 그러니까 약탈이 병참부의 발전과 어떻게 연관이 있나요?
    2. 보방형 요새가 나폴레옹이 보여준 화려한 야전으로 바뀌어간 이유가 무엇인가요?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분이 쓴 회고록이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영국군 작전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곧잘 인용됩니다.  이 샤우만이라는 분은 1778년 독일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난 순수 독일인으로서, 귀족 가문 출신의 신사였습니다.  영국 왕의 개인 영지이자 독립국이었던 하노버 공국의 군대에서 16세부터 21세까지 장교로 근무했던 샤우만은 원래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모르티에(Adolphe Edouard Casimir Joseph Mortier)의 1803년 하노버 점령을 계기로, 영국군 산하 왕립 독일군(The King's German Legion, KGL)에 가담하여 프랑스군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1816년 나폴레옹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 고향 하노버로 금의환향하는 KGL 병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회고록을 보면 묘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는 원래 KGL 제7 대대 소속의 장교였다가 병참부(commissariat)으로 일했습니다.  제7 대대에는 개인 사정으로 일종의 휴가를 낸 상태로요.  병참부에서는 그의 일처리 솜씨가 마음에 들었던지 병참감 대리(Acting Commisary-General)로의 승진을 제시했는데, 샤우만은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정식으로 병참부 소속으로 이직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고민합니다.  샤우만의 고민은 일종의 외인부대인 KGL 부대 소속의 장교직은 영국군 입장에서는 정규 장교직이 아닌지라, 제대 후에도 영국 정부로부터 연금(half-pay)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직업 군인의 최대 장점은 연금이었던 모양입니다.  친구들도 그렇게 권유했기 때문에, 결국 샤우만은 KGL 제7 대대에 사직서를 내고 영국군 병참부에 정식으로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운칠기삼이라고, 샤우만의 이 결정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정식으로 취업을 하고나자, 병참부에서는 말을 바꾸어 전에 제시했던 승진을 걷어들이고 샤우만이 병참감 보조 대리(Deputy-Assistant Commisary-General)라는 말단직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결정 사항을 통보했습니다.  게다가 더 나중의 일이긴 했지만 영국 의회에서는 KGL의 모든 장교들에게 영국 정규 장교들과 동일한 연금을 지급하기로 의결하여, 샤우만으로 하여금 자신의 결정에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습니다.  병참부도 군대 아니던가요 ?  왜 KGL이라는 전투부대에서 병참부라는 수송부대로 자리를 옮기는데 사직서를 제출하고 계급이 바뀌는 등의 일이 일어나야 했을까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대적인 군대와는 달리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만 해도 병참 장교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군의 보급은 군이 직접 수행하지 않았거든요.  정규군 장교가 병참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의 일입니다.  


원래 무기가 없는 군대는 존재해도 군량이 없는 군대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3일 이상 굶으면 모두 탈영해버리거나 죽어버릴테니까요.  이처럼 군대의 식량 보급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병참은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업무로 취급되어 등한시되었고 상당히 원시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모두들 번쩍이는 갑옷과 날카로운 칼을 들고 깃발을 펄럭이는 일을 하고 싶어했으며, 냄새나는 농부들로부터 밀과 보리를 사들이거나 빼앗고 소와 돼지를 몰고 다니는 것은 창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업무는 고귀한 귀족 출신 군인들이 하지 않고 천한 장사치들, 즉 민간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시적인 화승총(matchlock musket)을 들고 16세기 유럽 전장을 누비던 병사들의 식사 시간은 요즘 군대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군함에서나 육상 부대에서나, 병사들이 조를 짜서 스스로 취사를 했다는 것은 이미 다들 아실 겁니다.  문제는 그 취사 재료로 쓰일 밀가루와 콩, 고기 등을 누구에서 받느냐 하는 것인데, 이걸 민간인 군납업자에게서 샀습니다.  군에서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뿐, 식량은 그 돈으로 알아서 사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대포알이 날아다니고 기병대가 칼을 꼬나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전장에 민간인 장사꾼이 따라다녔다고요 ?  예, 돈이 된다면 그 정도의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할 장사꾼들이 많았습니다.  




(종군상인 하면 아마 만화영화 '에어리어 88'의 무기상인 맥코이 영감님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에도 맥코이 영감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군상인의 취급 품목은 빵과 술, 군화와 의류, 종이, 잉크 등의 잡다한 생필품류가 대부분이었고, 정작 탄약과 포탄 등 무기류의 보급은 당시에도 민간 병참부가 아니라 정부 기관인 군수위원회(Board of Ordnance)에서 담당했습니다.  빵과 럼주는 그렇다쳐도 대포와 탄약류를 민간인에게 맡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 민간인이 식량을 잔뜩 실은 마차를 끌고 전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사자떼 옆에서 돼지가 어슬렁거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난폭하고 배고픈데다 약탈과 살인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병사들이 그 마차 주인에게 공손하게 가격을 흥정한 뒤 돈을 지불하고 먹을 것을 받아갈 확률보다는, 주인을 흠씬 두들겨패고 마차 통째로 빼앗아갈 확률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러나 군대에게 식량과 기타 생활용품을 팔고 싶어하는 민간업자들을 그렇게 험하게 다룬다면 그 부대는 머지 않아 굶어죽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어떤 장사꾼도 그 부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런 일은 실제로 종종 발생했습니다.  가령 제7차 십자군을 이끌고 1249년 이집트에 상륙하여 다이에타(Damietta)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프랑스왕 루이 9세(Louis IX)도 이탈리아나 레반트 등지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가며 원정의 보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미에타 점령 이후 불시에 일어난 (사실 예정되어 있었으나 십자군 지휘부의 무지함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나일강의 범람으로 몇 개월간 진격로가 막히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술과 연회를 벌이며 지루함을 달래던 기사들이 원정 초기의 긴장감이 풀리자 상인들을 함부로 학대하고 물건을 갈취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자 하나둘씩 종군 상인들이 십자군 캠프 주변을 빠져나가버렸고, 결국 십자군은 보급에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결국 다음 해에 루이 9세가 이슬람의 포로가 되는 참패로 이어집니다.  




(이집트에서 투르크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모습입니다.  자고로 상인 세력을 함부로 건드리고 무사한 군주가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런 종군 상인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는 (비록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고골리(Nikolai Vasilievich Gogol)의 명작 소설 대장 불리바(Taras Bulba) 속에 나옵니다.  다른 지역의 카자흐 부족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터의 카자흐들이 분노하여 소란을 일으키는데, 가장 만만한 것이 장터에서 장사를 하던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카자흐들은 저주받은 족속이지만 가진 것이 많은 유태인 장사꾼들을 두들겨패고 물건과 돈을 빼앗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는데, 이때 자신의 형과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얀켈(Yankel)이라는 이름의 유태인 장사꾼이 불리바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고, 불리바는 일단 그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아래 장면은 그 소란이 가라앉은 뒤, 그 자리에서 즉각 보복 원정을 결의한 카자흐 부대들이 열을 지어 출정하는 부분입니다.




(대장 불리바는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 '너무 우크라이나적인 이야기 아니냐'라며 러시아 당국의 거센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덕분에 고골리는 1835년의 초판이 나온지 7년 뒤에 러시아 국민주의를 잔뜩 버무려넣은 개정판을 새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저도 제가 읽은 소설이 1835년판인지 1842년판인지 모르겠네요.)




대장 불리바 by 고골리 (배경 :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


불리바가 외곽 지역을 통과할 때, 아까 그가 살려준 얀켈이라는 유태인이 이미 차양까지 갖춘 가판대를 차려놓고 카자흐 기병들에게 부싯돌과 나사 드라이버, 화약 등의 온갖 군용품은 물론 빵까지 팔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정말 유태인들은 지독하구나 !" 불리바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에게 말을 몰아 다가갔다.  "이 바보, 자네 여기 앉아서 뭘 하는 건가 ?  까마귀처럼 총에 맞아 죽고 싶은 건가 ?"


얀켈은 대답 대신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두 손으로 뭔가 손짓을 하며 가까이 왔다.  "고귀하신 나으리, 부디 조용히 해주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요.  저기 카자흐 마차들 중 한대는 사실 제 것입니다요.  저는 카자흐분들께서 필요하신 온갖 물건을 가져가고 있읍지요.  어떤 유태인도 제시한 바 없는 낮은 가격으로, 카자흐분들의 원정길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제공해드릴 예정입니다요.  정말입니다, 하늘에 맹세코 진짜에요 !"


타라스 불리바는 유태인들의 장삿속에 질려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캠프를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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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도 전쟁터를 누비며 적이든 아군이든 군대에게 물건을 팔려고 위험을 무릅쓰는 유태인 장사꾼들의 이야기는 꽤 나옵니다.  나폴레옹이 무척 고전했던 1807년 2월 아일라우(Eylau) 전투 직후,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비참한 상태였던 프랑스군을 구원한 것은 놀랍게도 바르샤바 출신의 어떤 유태인 장사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태인답게, 돈을 벌려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해야 하며, 또 프랑스군처럼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군대를 상대로 돈을 벌려면 빵이 아니라 술을 팔아야 한다고 판단을 했나 봅니다.  전투 바로 다음날인 2월 9일 정오 즈음,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장군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를 때, 기적처럼 이 유태인 상인이 4통(tun)의 브랜디를 실은 마차들을 몰고 아일라우에 나타났습니다.  Tun이라는 큰 발효통은 대략 252 갤론을 담는다고 하니까, 리터로 환산하면 이날 아일라우에 배달된 브랜디는 무려 3800 리터가 넘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약 5만5천명이라고 하면 일인당 70ml씩 돌아갈 정도로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이때 이 브랜디가 없었다면 엄동설한에 수천 명의 부상병들이 그대로 얼어죽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나폴레옹의 패전이나 다름없었던 아일라우 전투의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다섯번째 남자는 뭔가 짐승 가죽을 안장 밑에 깔고 등을 보인 채 기병도를 뽑아들고 있습니다.  이 쾌남아가 누구이겠습니까 ?  예, 물론 당대 유럽 제1의 기병 뮈라입니다.  당시엔 베르크-클레브스(Berg-Cleves) 대공이었다가 다음 해에 나폴리 국왕에 등극하지요.  이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프랑스군을 하드캐리로 구해낸 장본인이라고 하면 약간 과장된 말이긴 합니다만 뮈라가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민간 종군 상인들의 존재는 부대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부대 지휘관은 종군 상인들이 안심하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뭔가 유인 장치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독점 면허제였습니다.  부대 지휘관은 몇몇 상인들과 독점 계약을 맺고 안전통행증(safe conduct, passport)을 발부했습니다.  그래야 부대 병사들이 으슥한 숲길에서 그런 종군 상인의 짐마차를 만나더라도 그 상인 얼굴 또는 그 상인이 제시하는 안전통행증을 보고 보호해주거나, 최소한 약탈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는 반대로 다른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사방 10리 이내에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황량한 전장에서 병사들이 먹을 것을 구할 유일한 구매처가 이 독점권을 가진 종군 상인의 수송마차인데, 정상적인 상인이라면 그런 절대적인 이점을 120% 활용하려고 들 것이고, 그런 경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뻔했거든요.  한여름 설악산 꼭대기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1개에 5천원이 비싼 가격이 아닌 것과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어떤 선에서 적정 가격이 형성되었을 것 같긴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전쟁터는 큰 마을이나 도시 근처였으니 먹을 것을 구할 곳이 상인의 수송마차 뿐인 경우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아무리 면허장이 있는 종군 상인이라고 해도 당장 3일을 굶어 살기가 등등한 중무장 병사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 같거든요. 




(함락된 마을에서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14세기의 그림입니다.  당시 전쟁은 영주들과 용병들의 사업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와중에 불쌍한 농노들과 시민들만 죽어났습니다.)




이런 주먹구구식의 병참이 다소나마 체계화된 형태로 발전한 것은 17세기 들어서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참의 발전 원인은 역시 이 시기에 나온 중대한 기술 혁신에 있었습니다.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원래 한편으로 끝내려던 포스팅이었는데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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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늘누리 2019.02.04 2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잘 보고 갑니다.

  2. 용가리 2019.02.05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옷 기다리던 글이네요. 다음 화가 엄청나게 기다려집니다.

  3. ㅇㅇ 2019.02.05 1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시대 글을 읽으면서 상당히 궁금했던 내용인데 설 연휴에도 쉬지 않고 올려주시니 매우 고맙습니다.

    전근대 시절에 상인들의 행렬이 군대와 함께 다닌건 알고 있었는데 따로 병참이 군대의 영역에 들어선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군요.

    제 삼촌이 군수특기로 지금은 장군진급까지 하셨지만 사실 보병과 같은 주류특기보다 진급에서 밀려 고생하셨는데 군수분야가 왜 군에서 비주류 특기인지 알것 같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02.05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국시대 말기 도요토미 정권이 의외로 간과되긴 합니다만 군수분야 출신들이 야전분야보다 더 잘 나가서 문제가 된 경우입니다.

      흔히 말하는 세키가하라 전투란게 군수분야 담당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야전분야를 담당한 오와리 국 출신의 도요토미 가신단의 분쟁적 성격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터진 측면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도요토미 정권은 야전출신들보다 군관료, 그것도 군수담당 관료들의 발언권이 워낙 막강한 특이한 경우라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 최홍락 2019.02.06 09:0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는 군수담당이 이시다 미쓰나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일이 그지경까지 갔을까 했을 정도로 이시다가 적을 많이 만들어놓는 바람에ᆢ이걸 군수담당 라인 대 야전 라인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이시다파와 반 이시다파의 대결이라고 봐야겠지요.

    • 수비니우스 2019.02.10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요토미 정권의 야전출신들: 도요토미 히데나가(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츠구(히데요시의 조카), 시즈가타카의 칠본창(주로 오와리 국 출신들), 쿠로다 칸베이(주요 모사)
      도요토미 정권의 군관료(특히 군수담당):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타니 요시츠구

      히데나가는 도요토미의 일본통일 직후 사망, 히데츠구는 히데요시가 늦둥이한테 정권 물려주겠다고 제거당하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조선침략의 선봉으로 일본을 떠나거나 크게 안키워지고, 칸베이는 히데요시한테 견제당하는 등의 일이 있어서였지 딱히 군수담당의 발언권이 셌던것 같지는 않은데요

      정작 도요토미 이후 도쿠가와도 통일 이후 야전출신보다 군관료를 더 중시했고.

  4. 0_- 2019.02.05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내는 설인가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뭐 다 아시리라 봅니다만, 고골(Гоголь) 의 불바(Ъульба) 입니다. ь는 묵음이지요.
    고골리(ゴーゴリ, 고-고리)니 불리바(ブーリバ, 부-리바)니는 전부 일어중역에서 온 오류입니다...
    http://minumsa.com/booklife/20572/

    그런데, 북쪽 동네도 저 희한한 표기는 똑같나 봅니다? "문화어: 니꼴라이 고골리"라고 버젓이 씌여 있네요.
    https://ko.wikipedia.org/wiki/%EB%8B%88%EC%BD%9C%EB%9D%BC%EC%9D%B4_%EA%B3%A0%EA%B3%A8

    • reinhardt100 2019.02.05 2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작품의 원래 배경이 <1594~1596년 셰몬 날레바이코 반란>입니다. 흔히, 1646년 흐미엘니츠키의 코사크 대반란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 반란도 사실 만만치 않았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에 소속된 코사크들이 사실상 최초로 연방을 탈퇴하려는 시초로 일어난 날레바이코 반란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어 버렸는데 이 반란 당시 연방 입장에서 다행스럽게도 러시아와 터키 제국은 각각 스웨덴과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에 돌입해서 날레바이코 반란을 지원할 수가 없었죠. 이 반란동안 우크라이나는 개판났었죠. 이 반란이 실패한 후 폴란드는 '코사크들이 날뛸 외부 전역'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하게되었고 이 덕분에 코사크들이 대동란시기의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진격해서 엄청난 약탈을 벌입니다.

      불리바 영화가 1962년 헐리우드 판이 있고 2008년 러시아판이 있습니다. 둘다 비교해보시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 nasica 2019.02.06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 !

  5. 칸몬드 2019.02.05 1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6. reinhardt100 2019.02.05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도 기해년 신년에 하시는 일 다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좋은 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7. ㅋㅋ 2019.02.05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답! 병조림이요!

  8. 맥테비쉬 소프 병장 2019.02.06 0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어리어 88 !!!

  9. 2/28일 입대 2019.02.06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받으십시오! 작년보다 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기술혁신이라니 두근두근하네요ㅎㅎ17세기 스타일의 엑셀이라도 발명된걸까요

  10. Spitfire 2019.02.07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배움으로 가득한 글은 따로 답글을 안쓰는데, 생각해보니 설 인사도 안드렸더군요~ 나시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항상 유익한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11. 펱로스 2019.02.08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에서

    정의로운 투쟁이든 교활한 정쟁이든

    결국 우리네 먹고사는 생활에서 멀리 떨어질수 없음을 배워갑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오래 전부터 꿈꿔오시던 일들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12. TheK2017 2019.02.08 2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추천 꾸욱!~ 하고 다음 글을 기다립니다! ^ㅇ^*

  13. 웃자웃어 2019.02.09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작 러시아 원정 당시의 프랑스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