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쟁에는 돈이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흔히 미국이 30년대의 대공황에서 빠져나온 것이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불황이 생길 때마다 네바다 사막이든 태평양 한가운데든 가상 표적을 세우고 거기에 병력과 함대를 동원해서 맹폭격을 가하지 않겠습니까 ?  결국 그렇게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이고, 미국도 전후 20년 정도 최고 세율 90% 정도의 엄청난 소득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1913-2008 기간 중 미국 소득세 최고 세율의 역사입니다.)




나폴레옹 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이든 프랑스든 모두 누군가는, 정확하게는 결국 국민 전체가 전쟁 비용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영국은 빚을 더 냈고, 프랑스는 세금을 더 걷었다"



그냥 이렇게만 놓고 보면 프랑스 측이 훨씬 더 건실한 재정 정책을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도 국채를 발행하여 전쟁 비용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신용불량의 전력 때문에 할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세금만으로 전쟁을 치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쟁에는 돈이 과다하게 많이 들어가는데, 그걸 모조리 세금으로 충당하려면 국민들에 대한 세금 부담이 너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국민들이라고 해도 세금을 4~5배로 올려버리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거든요.  자동차가 꼭 필요하긴 한데 당장 그럴 돈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  보통 카드 할부로 구입합니다.  말이 좋아서 할부지 사실은 카드사에게 비싼 이자를 내고 빚을 지는 것이지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전선의 부대들과 바다 위의 함대들, 그리고 동맹국들이 돈을 달라고 아우성칠 때는 그렇게 빚을 내야 합니다.  


대대로 유럽의 모든 정부들은 전쟁을 위해 빚을 냈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처음 설립된 중앙은행인 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Riksbank)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군자금을 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전후에 세워진 여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도 모두 전쟁 자금을 충당하거나 그로 인해 생긴 빚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도 독립전쟁으로 인한 빚을 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앙은행이라는 것의 기원은,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안정적으로 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각국 중앙은행의 설립과 연관된 전쟁들입니다.)




영국은 이미 100년도 전인 17세기 말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를 설립하여 전쟁 비용을 충당할 정도로 전쟁 금융에 매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국채 발행이 잘 되었던 것은 금융 관료들의 유능함보다는 기본적으로 영국 정부가 꼬박꼬박 채권 상환을 잘 하여 신용을 쌓아왔던데다, 결정적으로 왕실이 아닌 의회가 국채 발행과 상환을 책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정이야 언제 무슨 정변이 나서 뒤집어질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토지와 무역회사 등 주요 자산을 소유하고 있던 대주주들로 구성된 의회는 글자 그대로 주식회사 영국 그 자체였거든요.  따라서 의회가 책임지고 상환하겠다는 채권은 전쟁치고는 꽤 낮은 이자로도 잘 팔렸습니다.  덕분에 영국은 7년 전쟁의 경우 전체 전비의 51%를, 그리고 패전으로 끝난 미국 독립전쟁의 경우 81%를 국채 발행으로 메꿀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국민들의 세금 부담은 전시에도 급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영국 국채의 신용도가 괜찮았던 것은 영국 재무부에게 결정적인 여유를 주었습니다.  잠정적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여 금본위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채권 뿐만 아니라 지폐도 추가로 찍어내어 자금조달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일정 수준의 인플레를 유발시킴으로써 기존 국채 가치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이걸 인플레 세금(inflation tax)라고 합니다.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Lieutenant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1803년 영국) --------------------


(아미앵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짧은 평화가 있던 시기에, 무일푼이던 혼블로워 중위는 보직 해임 상태가 되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결국 혼블로워는 고급 장교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 4명이서 하는 카드 게임 때 부족한 머리 숫자를 채워주는, 일종의 타짜 노릇을 해서 먹고 삽니다.)


그는 혼블로워가 가슴 안주머니로 지폐를 쑤셔 넣는 것을 보았다.


패리 제독이 말했다. "예전 화폐를 다시 부활시킨다면 더 좋지 않겠소 ?  정부가 이런 지저분한 지폐를 없애고 예전의 멋진 기니 금화로 되돌아간다면 말이오."


"그거 정말 좋겠군요." 대령이 말했다.


램버트가 말했다.  "그 놈의 육지 상어(순진한 뱃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들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모조리 상대한다오.  1기니당 23실링 6펜스를 주니, 틀림없이 실제로는 그보다 더 받을 수 있을거요."  (원래 1기니는 21실링에 해당합니다: 역주)


패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에 탁자에 내려놓았다.


"보니(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비칭:역주)는 옛날 프랑스 화폐를 부활시켰소.  보시오." 그는 말했다.  "이 금화를 나폴레옹라고 부른다오. 그 친구가 이제 종신 제1통령이니 말이오.  이 금화 한닢에 20 프랑이라오.  예전에는 우린 이걸 루이 금화(louis d'or)라고 불렀지요."


"나폴레옹, 제1통령," 대령은 호기심을 가지고 금화를 보며 읽고는, 뒷면을 돌려 읽었다. "프랑스 공화국."


------------------------------





(진정한 남자라면 모양 빠지게 지폐 같은 것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의 얼굴이 새겨진 40 프랑짜리 금화 정도는 누구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  무게 12.91g, 순도 90%입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의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빚으로는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모든 빚은 결국 누군가가 갚아야 하는 법입니다.  카드 할부로 자동차를 산 경우에 몇 년에 걸쳐 월급 절약하여 계속 갚아나가야 하는 것과 똑같이, 국가도 세금을 좀 더 걷든가 나라 살림을 좀 줄이든가 해서 국채를 결국 갚아야 합니다.  영국 정부는 감채기금(sinking fund, 장기 채무 상환을 목적으로 별도로 적립해두는 기금)을 설립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세수 잉여분을 여기에 적립함으로써 국채를 꾸준히 상환했습니다.  


영국도 마냥 빚만 낸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세금도 더 걷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이던 소(小)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소득세(income tax)를 도입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세금이란 사람 머릿수에 따라 내는 인두세와 토지 등의 재산에 따라 내는 재산세, 그리고 관세와 부가세, 소비세 등의 형태였거든요.  사람이 일을 해서 번 소득 자체에 대해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근대 유럽 사회에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소 피트가 도입한 소득세는 누진세(progressive tax)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즉 소득이 더 많을 수록 더 높은 세율의 세금이 부과되는, 꽤 현대적인 개념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60파운드 이하의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되었고, 60 파운드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0.83%부터 시작하여, 200 파운드가 넘는 소득에 대해서는 최대 10%까지 세율이 올라갔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국민들에게 부과했던 세금은 모두 단일 세율의 재산세와 소비세 등이었다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진보적인 조세 정책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의 소득세에 대한 당시의 풍자 만화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 좋아하는 국민은 없지요.)




한편, 프랑스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의회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이미 산업 혁명을 시작했던 영국과는 국가 권력 구조와 산업 구조 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달랐으니까요.  부르봉 왕정 시절, 아직 중앙은행도 없던 프랑스는 그냥 정부가 민간에게 직접 국채를 판매하는 형태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을 치렀습니다.  국가 자산 중 상당 부분을 귀족과 교회가 쥐고 있었는데 정작 그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으니 그때 쌓였던 빚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금을 늘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설프게 삼부회를 소집했다가 터진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국민공회는 몰수한 귀족과 교회의 토지 자산을 담보로 1789년 12월 5% 이자의 공채를 발행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아시냐(Assignat) 지폐가 됩니다.  즉, 처음에는 채권이었으나, 나중에는 0% 금리의 지폐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보통 돈은 태환지폐라고 해서, 금과 바꿀 수 있는 증서같은 것이었는데, 금이 없으니 금 대신 토지와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발행한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대표적인 실패작 아시냐 지폐입니다.)




아시냐라는 저 프랑스어 스펠링을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건 정부가 강제로 지정한(assigned) 돈으로서, 태생부터가 자연스러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미 파탄난 경제로 인해 돈이 궁해진 국민회의는 이듬해인 1790년부터는 애당초 몰수된 토지의 총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아시냐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하이퍼 인플레였습니다.  특히 정부가 인플레를 잡는답시고 생필품 가격 상한제를 강제하자, 생필품이 시장에서 싹 사라지고 암시장에서만 거래되는 등, 역효과에 역효과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수차례의 폭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시냐 지폐는 가뜩이나 혁명으로 어수선한 프랑스 사회를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고 7년만에 불명예스럽게 퇴장합니다.  퇴장할 때 정부는 이 지폐를 액면가의 3.33%에 해당하는 토지와 교환해줍니다.  투자 손실율 96.67%...  더군다나 투자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프랑스는 1720년대에도, 존 로 (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인이 일으킨, 미국의 부동산에 투자하는 미시시피 사(社)라는 대규모 투자 거품 사건으로 인해서 지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있었습니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은, 한줄로 요약하면 존 로가 미국 땅을 담보로 프랑스에 지폐 발권력이 있는 금융회사를 차렸다가 거품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인들은 지폐는 종이 쪼가리일 뿐 결코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었지요.  이 아시냐 지폐 사건은 프랑스에서의 지폐의 위치에 대해, '관 뚜껑에 못질을 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국채와 지폐에 대한 국민들의 신용이 이렇게 바닥을 친 상태인지라, 총재정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으로서는 부르봉 왕가나 국민공회처럼 채권이나 지폐를 찍어 재정난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영토였던 루이지애나(이름 자체가 프랑스 왕 '루이의 땅'이지요)를 미국 정부에게 매각하여 돈을 마련하기도 하고,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는 프랑스 중앙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하는 등 시장의 통화와 정부 재정을 안정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금은 복본위제(bimetallic standard)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 통치 기간 중에는 절대 새로운 지폐를 추가로 발행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한 나폴레옹의 발언으로 대표됩니다.  실제로 1800년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는 기존 정권에서 발행했던 채권에 대해 (이미 기존 채권의 가치를 크게 절하시킨 뒤이기는 했지만) 이자를, 그것도 금화나 은화로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나폴레옹은 영국처럼 감채기금을 마련하여 장기 국채의 상환을 위한 안정성을 갖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국처럼 프랑스도 국가 신용을 끌어올려, 전쟁 비용을 빚으로 충당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Bimetallic standard를 보통 복본위제라고 합니다.  금본위제와는 달리 복본위제에서는 은도 지폐의 교환 대상이 되는데, 다만 금과 은의 교환비를 정부가 지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유럽은 금의 많이 나는 대륙이 아니라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은본위제를 사용했었지요.)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할 정도로 신용을 끌어올릴 수 없었습니다.  무너지기는 쉬워도 쌓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신용이거든요.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 비용을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결코 전제군주가 아니었고 국민들의 지지에 권력의 근거를 둔 황제였습니다.  전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지나치게 올렸다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세수 확대를 위해 길거리에서 채소와 생선을 파는 가판대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광장은 물처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소금과 와인에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서민들의 가판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보다는, 곡물 시장을 중흥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더 파리에 어울리는 조치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영국과는 달리 돈을 구할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전쟁은 스스로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전쟁 배상금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부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패전국에게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1807년 프로이센을 격파한 뒤에는 무려 1억2천만 프랑을 배상금으로 요구하여 프로이센을 나락으로 빠드렸고, 1809년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뒤에는 그나마 좀 양보하여 8천5백만 프랑의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 천재에게는 매우 수지맞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좌절을 안겨준 것은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분명히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모두 무찌르고 거의 모든 영토를 정복했지만, 대체 이것들이 항복을 하지 않으니 배상금을 뜯어낼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에 막대한 돈을 퍼부었는데도 그 비용을 충당할 방법이 없다보니 나폴레옹으로서는 무척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또다른 돈줄은 이탈리아와 폴란드, 네덜란드와 독일 소공국 등 위성국가들로부터의 세금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네 양아치에게 보호비조로 돈을 바치는 것처럼 나폴레옹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중한 배상금과 세금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유럽 전체에게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늘어난 전쟁 비용으로 프랑스 국민들까지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게 되어 지지율이 떨어졌으니까요.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최종적으로 맺은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는 무려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연합국에게 물어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컬한 부분은 그 배상금은 연리 5%의 프랑스 국채로 지불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할 때는 못하던 것을, 패배 후에는 해낸(?) 것입니다.  






Source :  British and French finance during the Napoleonic wars by Michael D. Bordo & Eugene N. White 

https://www.businessinsider.com/history-of-tax-rates

https://en.wikipedia.org/wiki/Progressive_tax

https://fr.wikipedia.org/wiki/Aspects_%C3%A9conomiques_et_logistiques_des_guerres_napol%C3%A9oniennes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Paris_(1815)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eltro 2019.01.14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2. 푸른 2019.01.14 1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이 특히 더 재밌는 글이네요ㅋㅋ

  3. 아즈라엘 2019.01.14 1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은 국채를 팔아서 전쟁비용을 충당했죠
    퍼스트어벤저스 보면 캡틴이 국채팔려고 쇼하러 다니는 장면이 나오죠

    • reinhardt100 2019.01.14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다고 보는게 좀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총 전비가 3240억 달러였는데 이 중 전시 국공채로 발행하여 충당한 비용이 약 2천억 달러 조금 넘습니다. 나머지는? 그대로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나마 미국은 나았죠. 영국만 해도 국공채 발행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고 결국에는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겨우 전쟁을 치르는 판이었고 독일은 전유럽을 쥐어짜서 전쟁을 수행했죠. 일본은 그럴 여건도 안되어서 점령지 각지의 중앙은행의 조폐기 돌린 것과 군표 발행으로 전쟁을 수행하다가 그대로 인플레로 전시경제가 개판났었으니까요.

    • 최홍락 2019.01.15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은 러일전쟁때부터 시작하여 태평양전쟁까지 카드빚 돌려막기식으로 전쟁을 벌려놔서 그 분야에 있어서 끝판왕인지도요. 러일전쟁때 채무를 80년대 되서야 다 상환했다고 하니까요.

      태평양 전쟁때 빚이 아직 남아있기도 하죠. 일본 정부의 일반회계의 부채 항목에 구 임시군사비 차입금이라는 명목으로 잡혀있는 금액이 414억엔 정도라는군요. (45년 기준 일본 국가예산이 214억엔.)

      이 방법이 재미있는게 위장거래와 분식회계를 통한 부채라는거죠. 우선 베이징을 중심으로 괴뢰정부인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중국연합준비은행권(연은권)을 발행하도록하고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이 중국연합준비은행과 각각 상대측 은행에 예금계좌를 개설합니다. 관동군이 군사비를 요구해오면,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은 보유중인 연은 명의의 일본 엔화 예금계좌에 해당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기재하고 이 예금계좌에는 앞에서 얘기한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이 입금된 것으로 기록하죠. 이를 담보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조선은행 베이징지점 명의의 연은권 예금계좌에 같은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적은 후 이에 상당하는 연은권을 찍어 군사비로 내주는 방식이죠.

      그러나 당초 이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은 실제로는 중국으로 송금되지 않은 채 조선은행과 연은의 예금계좌에 금액만 기재될 뿐인 가짜 예금이었습니다. 연은권의 발권 담보가 된 엔화 자금은 모두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고스란히 남았다가 일본 국채를 구입하는데 사용되서 다시 일본은행의 국고로 되돌아갔다. 그러니까, 일본군의 군사비 지출인데도 일본 엔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조선은행을 앞세워 무제한으로 현지통화를 발행해 군자금을 충당한 거죠. 414억엔은 그야말로 액면가치일텐데 이를 당시 기준으로 환산했으면 꽤 큰 금액이고요.

    • reinhardt100 2019.01.17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일본은 연은권, 남발권, 대은권, 조은권, 일은권, 몽강권,만은국폐 간의 대차거래를 패전 직전에 금으로 청산했다는 겁니다. 단, 제대로 깡(?)을 쳐서 발행고로 최소 당시 금액으로 수백억엔 어치를 단 십수톤의 금으로 했다는게 문제죠.

      특히 조선은행권이 심각했는데 총독부나 조선은행 간부들이 이걸 청산할 때 그냥 금으로라도 변제를 했어야 했는데 이건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냥 발행준비금이었던 일본국채를 더 매입하는 방식으로 조폐기 돌려서 증발하는 바람에 전후 인플레이션이 미친듯이 나타났죠.

  4. 웃자웃어 2019.01.14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의 군대가 외국에서 징발한 물자들의 액수로만 따지면 7억프랑은 가볍게 뛰어넘지 않나요? 배상금 액수가 꽤 관대하네요.

    • reinhardt100 2019.01.14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기 직전 프랑스의 이탈리아방면군이 베네치아의 본토 속주에서 징발할 수 있다고 예측한 금액이 매달 평균 100만 프랑 이상이었다고 하고 실제로 캄포포르미오 조약 이후 구 베네치아 공화국령에서 뽑아낸 금액이 정화만 최소 1천만 프랑 단위였다고 합니다.

      7억 프랑으로 집계된 것들 중 일부는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미술품류 등을 반환하는 것이었던데다가 혁명 이전에 프랑스 영토였던 알자스의 란다우같은 도시들의 할양까지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정화로 지불할 부분은 꽤 줄어듭니다. 결정적으로 왜 국채로 받았냐면 각국이 프랑스 정치권에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것을 노리고 국채로 수령한 것도 있습니다. 복고된 부르봉 왕정도 이걸 인지하고 있어서 서둘러서 배상금을 변제하죠. 다만, 상당수 배상금으로 지급된 국채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반출되지는 않고 그대로 파리와 리옹의 금융시장에서 거래됩니다.

  5. 웃자웃어 2019.01.14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저는 세금과 배상금 말고도 무지비한 징발또한 유럽에서 미움을 받은 원인이라고 봅니다.

  6. 웃자웃어 2019.01.14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꿔말하자면 위의 내용은 프랑스가 국채발행을 하고싶어도 하지 못해 세금을 올렸단 거군요.

  7. 달콤아빠 2019.01.15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재미있게 잘읽고 공감드리고 갑니다.

  8. 펱로스 2019.01.15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한테는 이 부분이 제일 무시무시하네요.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

    국가가 국민 상대로 할수있는 장난질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완전 조삼모사 네요.

    • raa 2019.01.16 0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몇년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도 고환율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대놓고 하고 있었죠. 약간 다른 건 국민들의 돈을 대기업들에게 퍼주는 방향이었다는거..

  9. 수비니우스 2019.01.15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 "
    저는 이 부분이 제일 인상 깊네요. 쉽게 외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10. TheK의 추천영화 2019.01.16 1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선생님의 명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ㅇ^*

  11. Eugen 2019.01.16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건 다 좋은데 미국이 왜 전쟁으로 경기부양을 하지 않느냐에 대해선 제가 할 말이 있는데요. 전쟁이란게 생산이 아닌 순수한 소비이기 때문에 전쟁해봤자 정치적,지리적,군사적,외교적 이득이 생기지 않는 이상 하지 않는게 더 낫습니다. 만약에 전쟁해서 불황을 탈출하고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다면 2008년 경제위기때 오바마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을 철수하려했을까요?그리고 왜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철군을 하려는 것인가 생각해봐요.

    • Eugen 2019.01.16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사람과 달리 저는 전쟁이 비인도적이라서 하지 말아야한다는 사람이 아니고 전쟁을 하면 손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병사한명 만드는데 10개월의 임신기간 20년의 양육기간이 있고 사람 한 명 초중고 대학교육을 마치면 1억 이상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귀한 교육받은 병사가 전쟁때문에 불구가 되거나 죽으면 엄청난 손해가 아닐까요?

  12. Eugen 2019.01.16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으로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다면 세계대전은 몇번이고 더 낫겠죠.

  13. Eugen 2019.01.16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정부부채규모로 볼때 뉴딜로 인한 정부지출액수보다 2차대전으로 발생한 지출이 5배는 더 많다고 본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뉴딜해서 대공황을 탈출했는지 세계대전때문인지는(세계대전 중 생산을 아예 안한건아니니까) 쉽게 생각가능할 만한 주제가 아닌 것같습니다.

  14. 석총 2019.01.23 1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영국은 과두정에 가까운 체제였죠

생 도밍그의 혼란과 살육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아름답고 풍요로운 유럽 대륙으로 잠시 되돌아 오도록 하지요.  나폴레옹은 이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기억들 하실려나 모르겠습닉다만, 1800년 12월의 호헨린덴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적어도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 본인은 자신을 향한 암살 음모 등으로 무척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긴 했었지요.  아무튼 당시 아직도 프랑스와 군사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던 나라는 영국이 유일했습니다.  그러던 1801년 2월, 영국에서 중요한 사건 하나가 일어납니다.  바로 영국 수상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의 사임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은 1759년 생으로서 나폴레옹보다는 10살 많았습니다.  그는 1783년 24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수상이 되었고 재무부 장관도 겸임하면서 근대 세계 최초로 소득세를 도입하는 등, 많은 화제를 낳은 인물이었습니다.  가장 큰 화제거리는 불행히도 나폴레옹의 아우스테를리츠 승전 소식을 듣고 쇼크사한 사건이었지요...)



원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나폴리 왕국보다는 영국과 러시아가 유럽 정치 외교 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나라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당시 몰타 섬을 둘러싸고 영국과 대립각을 세우던 파벨 1세가 암살됨으로써 약간 맥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1세도 일단은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려 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위협하는 유일한 외국 세력은 바로 영국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영국이 나폴레옹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대단한 상대였지요.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영국 침공은 도저히 불가능이라고 결론을 내렸었고, 그래서 이집트에서 돌아와 브뤼메르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곧장 영국 외무 장관 그렌빌 경(William Grenville, 1st Baron Grenville)에게 화평 제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기지 못할 상대와는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는 나폴레옹의 계산이었지요.  그러나 이 화평 제의는 제안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단번에 거절되었는데, 그렇게 거절한 사람이 바로 대불 강경파이자 영국왕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영국 수상 피트 (William Pitt the Younger)였습니다.  피트의 견해에 따르면, 저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는 영국에게 엄청난 위협이 될 초강력 대륙 세력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좀 힘들더라도 초장에 밀어붙여 그 싹을 잘라버려야 했지요.  비록 그것이 영국 혼자만의 외롭고 힘든 싸움일지라 해도 말이지요.  결국 피트가 수상으로 있는 한 프랑스는 영국과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바다를 통한 통상 및 해외 진출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초록색 부분이 당시 프랑스가 넘겨 받은 루이지애나 땅덩어리입니다.  다만 당시 조약에서는 루이지애나라는 명칭만 씌여있었고 정확한 경계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서, 훗날 그 땅을 다시 넘겨받은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갈등의 소지를 남겨 놓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1800년 10월의 산 일데폰소 조약 (Treaty of San Ildefonso)으로 더욱 안타까운 것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주로 이탈리아의 부르봉 왕가의 운명을 두고 체결한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을 부르봉 왕가를 위한 영토로 양보받는 대신, 6척의 74문짜리 전함들과 함께, 저 멀리 북미 대륙의 루이지애나 지방을 프랑스에게 양보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왜 미국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양보하나요 ?  당시 루이지애나는 아직 미국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보면 상상할 수 있듯이, 원래 루이 14세의 땅으로서, 프랑스가 식민지로 개척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북미 대륙에서 영국에게 패배하여 북미 대륙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스페인에게 빼앗겼던 곳이었지요.  지금은 루이지애나 주가 멕시코 만에 붙은 작은 땅덩어리이지만, 당시 루이지애나라고 불리던 땅은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는 물론, 오클라호마, 미주리, 캔자스, 아이오와, 네브라스카, 와이오밍, 몬태나 등등 사실상 지금의 미국 중앙부를 다 차지하는 엄청나게 넓은 땅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산 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하던 당사자들도 이 땅이 대체 얼마나 넓은 땅인지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산 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한 당시 스페인 국왕 샤를 4세, 스페인 식으로는 카를로스 4세입니다.  이 양반은 그 아들 페르난도와 함께 스페인을 말아먹은 대표적인 혼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안다고 한들 뭔 소용이었겠습니까 ?  영국 해군이 대서양을 틀어막고 있으니 바다 건너 땅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당시 나폴레옹의 정부를 압박하던 재정 파탄과 맞물려 더욱 아쉬움을 더했습니다.  게다가 한때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40%를 생산하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 생 도밍그의 '사실상의 상실'도 못내 아까운 일이었지요.  이 모든 것이 다 빌어먹을 영국 해군 때문이었습니다.  





(피트의 사임을 풍자한 당시 만화입니다.  피트는 당시 전쟁과 중과세에 지친 국민들로부터 상당히 미움을 받고 있었지요.)



그런데 1801년 2월, 영국 수상 피트가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피트의 사임은 나폴레옹과는 전혀 무관한 영국 국내 정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피트는 아일랜드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대부분이 카톨릭 교도인 아일랜드인들에게 좀더 유화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톨릭교도 해방령 (Catholic Emancipation)'을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왕 조지 3세는 자신이 즉위할 때 맹세한 내용, 즉 영국 국교회를 수호하겠다는 맹세에 어긋난다며 이를 거부했고, 이것이 피트의 사임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이 가톨릭교도 해방령은 1829년에 가서야 웰링턴 공작에 의해 통과됩니다.)  그리고 새 수상으로는 피트의 친구였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대불 온건파였던 헨리 애딩턴이 취임했습니다.  사실 애딩턴 자신은 국왕과 피트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고 또 수상 직위를 거절했지만, 피트의 추천에 의해 거의 억지로 수상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애딩턴 수상의 위엄서린 모습입니다.  그의 취임은 피트와의 우정이 깃든 멋진 것이었으나, 그의 퇴임은 피트와의 갈등에 의한 보기 흉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애딩턴은 거의 취임과 동시에 나폴레옹에게 평화 회담을 다시 시작하자고 연락을 보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사실 전쟁은 프랑스에게만 괴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나 스페인, 오스트리아같은 굵직한 시장을 잃어버린 영국 경제도 휘청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요.  결정적으로 전쟁, 특히 해군은 돈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금태환을 거부할 정도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게다가 하늘도 무심한지 2년 연속으로 흉작이 들어 식량난까지 가중된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전쟁 비용을 대느라 소득세(income tax)라는 당시로서는 듣도보도 못하던 새로운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던 영국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할 지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프랑스와의 평화 조약이었지요.  나폴레옹은 이를 120% 활용했습니다.  '아하 이것들이 우리만큼 어쩌면 우리보다 더 급했구나' 싶었던 나폴레옹은 평화 조약을 체결할 듯 말 듯 영국의 애간장을 태우면서 밀땅 놀이를 즐겼고, 결국 1801년 9월 30일, 예비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양국 국민들의 환호와 축하 속에 공식적으로 공표합니다.  이것이 정식 조약으로 체결된 것이 바로 1802년 3월 25일의 아미엥 조약(Treaty of Amiens)입니다. 





(아미엥 조약을 풍자한 당시 영국 만화입니다.  제목은 the meeting of Britannia & Citizen Francois 입니다.  영국이 여자에요.)



이 아미엥 조약은 해외 진출을 노리고 있던 나폴레옹에게는 그야말로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아메리카로 프랑스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었고, 그러자면 먼저 그 기지로서 생 도밍그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무엇보다도 생 도밍그는 다시 잘 가꾸면 황금알을 낳아주는 캐쉬 카우 (cash cow)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생 도밍그를 장악하고 있는 투쌩 그 뭐라드라 하는 검둥이 노예를 손봐줄 필요가 있었지요.  나폴레옹은 이제 영국 해군의 봉쇄가 풀린 대서양으로 생 도밍그 원정대를 내보냅니다.  그 원정대의 규모는 약 2만명의 수병을 제외하고도 지상군만 대략 2만명으로서, 약 3만 5천의 병력을 동원했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보다는 약간 작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시 인구 6백만에 면적도 광대한 이집트를 정복하는데 3만 5천이 필요했으니, 손바닥만한 면적에 총 인구도 40만명을 조금 넘는 생 도밍그를 정복하는데 2만명을 동원했다면 굉장히 많은 병력을 투입한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실어나르는 함대의 규모도 굉장했습니다.  1801년 12월 14일에 최초로 출발한 선발대는 35척의 전열함에 21척의 프리깃이 포함되었고, 여기에 약 8천의 지상군이 탑승해 있었습니다.   맙소사, 35척의 전열함이라니 !  트라팔가 해전에 동원된 영국 함대의 전열함이 겨우 33척이었는데요 !  거기에다 다음해 2월까지 몇차례 함대가 추가로 파견되어 더 많은 병력을  생 도밍그로 실어날랐지요.  다만 이 원정대는 철저하게 2진급 부대로만 꾸며졌습니다.  일부 프랑스 사단에 덧붙여 투쌩에게 쫓겨난 뮬래토 장군인 리고 (André Rigaud)를 주축으로 한 뮬래토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고, 네덜란드 사단과 폴란드 사단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총지휘관에는 나폴레옹의 매제, 즉 폴린 보나파르트(Pauline Bonaparte)의 남편인 르클레르(Charles Victoire Emmanuel Leclerc)가 임명되었지요. 





(르클레르 장군의 초상화입니다.  나폴레옹보다 3살 어렸던 그는 꽤 미남이었고, 그래서 폴린과의 결혼전 스캔달이 났던 것 같습니다.)



이 르클레르라는 장군에 대해서는 사실 그 이전에 별로 언급된 바가 없었지요.  그는 1793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을 최초로 만났습니다만, 그 이후에는 라인 방면군에서 주로 복무했고 1797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폴레옹 밑에서 싸웠습니다.  그는 카스틸오네 전투와 리볼리 전투에 참전했고, 이때 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항복 조약이었던 레오벤(Leoben) 조약에 참여했다가 돌아온 이후, 나폴레옹의 제안에 따라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과 결혼했지요.  이후 그는 모로 밑에서 라인 방면군에서 복무하면서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그 이후에는 역시 모로 밑에서 그 유명한 호헨린덴 전투에 참전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름 괜찮은 군 경력을 쌓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생 도밍그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뽑힌 것은 확실히 나폴레옹의 매제라는 사적인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아, 저 X두가 보이는 의상은... 폴린의 과감함을 엿보게 합니다.  폴린의 자유분방함에 대해서는 정말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이야기도 있지요.  그녀가 어느 화가의 스튜디오에서 모델이 되어 주었는데, 문제는 나체 모델이었다는 것이었고, 더 나쁜 것은 나폴레옹이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노발대발하자, 폴린은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괜찮아요, 스튜디오가 아주 따뜻하던 걸요." )



폴린과 르클레르의 결혼에 대해서는 이 둘이 소파에서 '붙어먹는' 장면을 나폴레옹이 목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폴레옹이 결혼을 시켰다는 설이 있지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폴린이 나폴레옹의 여동생들 중에서는 가장 미모가 뛰어나서, 성적으로 꽤 문란한 생활을 한 것은 맞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폴린은 마르세이유의 지사였던 스타니슬라스 (Louis-Marie Stanislas Fréron)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원래 이 스타니슬라스는 1793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과 연을 맺은 사람으로서, 나폴레옹은 원래 이 남자에게 여동생 폴린을 소개시켜주었고 결혼도 시키려 하였으나, 어머니 레티지아가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된 바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1797년에도 마음이 스타니슬라스에게 있었으나, 오빠의 강권에 따라 르클레르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폴린은 결혼 이후에도 성적으로 상당히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하네요.


생 도밍그로 원정대 총사령관직을 맡게 된 것은 르클레르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승진이기도 했습니다만, 반대로 큰 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생 도밍그는 황열병의 본고장이었으니까요.  어찌 되었건 르클레르는 폴린과 어린 아들도 이 원정대에 함께 데려갑니다.  폴린 본인도 남편이 생 도밍그의 주지사가 되어 자신과 함께 떠나는 것에 대해 나름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르클레르와 폴린을 태우고 1801년 12월 중순 출항한 프랑스 함대는 약 6주 후인 1802년 1월말, 드디어 생 도밍그 인근 해역에 집결합니다.   과연 유럽 대륙을 제패한 프랑스 정예병들과 생 도밍그의 태양 아래서 단련된 노예 출신의 검은 병사들의 충돌 결과는 어땠을까요 ?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유애경 2017.10.14 1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벌써 새글이...!
    잘보고 갑니다.

  2. 에어메딕 2017.10.16 2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 본 글이지만 다시 보니 더 이해가 잘되네요. 늘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출퇴근길의 비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