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온 유럽이 휩쓸리게 되는 1812년 러시아 침공이라는 난리통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이 벌어지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한발짝 물러나는 얌체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러시아를 두들겨 패는 동안 떨어지는 콩고물, 즉 발칸 반도 분할에서 좀더 많은 땅을 땅을 주워먹으려 했을 뿐 뭔가 숭고하고 원대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것은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주사위 놀음이라서, 제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해도 프랑스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체는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측에 가담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의 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한 실제 이유, 즉 영토 문제도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좋든싫든 프랑스측에 가담하도록 압박했습니다.  당장 흑해로 흘러가는 도나우강 하류 지역, 그러니까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중에서 오스트리아가 자기 것이라고 침을 발라놓았던 몰도바-루마니아 방면으로 러시아군이 진격해오자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무척 초조해졌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을 위해 편성하는 야전군의 규모가 무려 40만이 넘는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자, 그 정도라면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보고 오스트리아도 1812년 3월 나폴레옹 진영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끝까지 얌체처럼 그야말로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정도인 3만의 병력을 제공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했습니다.  

스웨덴도 끝까지 어느 쪽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며 눈치를 보던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어찌 보면 북구의 스웨덴은 프랑스의 진격로와는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서 지리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꽤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당장 러시아령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언제든지 당장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였거든요.  게다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해협, 즉 외레순(Öresund, 영어로는 The Sound) 해협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는 점도 중요했습니다.  이미 프랑스 측에 붙은 덴마크의 헬싱고르(Helsingor) 요새와 스웨덴의 헬싱보리(Helsingborg) 요새 사이의 해협은 특히 좁았는데, 거리가 10km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해안포로 사용되던 36파운드 대포의 최대 사거리가 3.7km 정도였고, 유효 사거리는 고작 600~700m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요새 사이를 통과하는 영국 수송선이나 전열함이 크게 손상을 입을 염려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시 범선들의 열악한 항행 능력을 생각하면, 특히 스웨덴 군함들이 이 해협을 가로막기라도 한다면 영국 선박들로서는 상당히 부담을 느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덴마크 측의 헬싱보르그와 스웨덴 측의 헬싱보리 위치입니다.   저 해협만 틀어막으면 발트해는 사실상 호수가 됩니다.  코펜하겐이 위치한 덴마크의 큰 섬인 젤란트의 반대쪽 해협도 물론 항행은 가능합니다만, 그 쪽은 얕은 바다 등이 많아서 훨씬 항행에 불리하다고 하네요.)

 

(이건 함포로 사용되는 36 파운더 포이긴 합니다만, 해안 요새에서도 주로 이 36 파운드 포를 해안포로 썼습니다.  해안 요새에서는 좀 높은 위치인 성벽 위에 이런 대포를 놓았기 때문에 해수면에 위치한 전열함보다는 조금 더 멀리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1812년을 앞두고 스웨덴의 인기는 상종가를 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노르웨이를 주겠다며 스웨덴을 유혹했고, 나폴레옹은 핀란드를 주겠다며 호객행위를 했습니다.  우스운 점은 이 모든 땅들이 결국 남의 땅이라는 점이었지요.  당시 노르웨이는 프랑스의 굳건한 동맹국인 덴마크의 영토였고, 핀란드는 바로 몇 년 전에 알렉산드르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영토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르나 나폴레옹이나 자기 것은 내주기 싫고 상대편의 땅을 내주겠다는 공수표를 남발한 셈이었으므로, 스웨덴은 국제 외교전에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무척 냉철하게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스웨덴은 딱 적임자를 실권자로 두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국왕 카알 13세(Karl XIII)도 아니요 뿌리 깊은 스웨덴의 귀족 세력 연합체인 의회도 아닌, 바로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친척이자 전직 프랑스군 원수, 현직 스웨덴 왕세자였던 베르나도트(Bernadotte)였습니다.  

 

 

(오늘날 스웨덴 왕가의 시조이신 베르나도트, 아니 카알 15세 전하이십니다.)

 



애초에 스웨덴이 프랑스 장군이자 나폴레옹의 친척인 베르나도트를 굳이 모셔와서 왕세자로 삼은 것은 러시아에게 상실한 옛 영토 핀란드를 나폴레옹의 위세를 등에 업고 되찾아보려는 스웨덴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도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사람들만 몰랐을 뿐, 베르나도트는 애초에 나폴레옹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그래서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냉철한 두뇌로 주변 정세를 정확히 분석 파악해서인지 스웨덴의 살 길은 러시아와 넓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쪽 핀란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서쪽 노르웨이를 손에 넣는 것이라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판단이 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 붙느냐 러시아 측에 붙느냐는 고민은 베르나도트로서도 다시 한번 전체 상황을 되짚어 보게 만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때 어느 쪽에 붙느냐 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판가름지을 도박이었으니까요.  그러는 사이에 프랑스도 러시아도 애간장이 탔고, 베르나도트는 이렇게 인기가 급상승한 스웨덴의 위치를 한참 동안이나 즐겼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도트가 너무 질질 끌어서였는지 아니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스웨덴의 협조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서였는지, 베르나도트로 하여금 별다른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엘베(Elbe) 강 일대의 프랑스 동맹군을 지휘하던 다부(Davout)가 러시아 침공을 위한 사전 작전의 일환으로, 1812년 1월 발트해 남쪽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Pomerania)를 침공해버린 것입니다.  애초에 스웨덴은 이 지역을 방어할 능력도 의지도 전혀 없었으므로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무혈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르나도트는 운명이라는 듯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런 외교전에서 막차를 탄 것은 오스만 투르크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로에서 멀리 떨어진, 겉으로 봐서는 직접 개입할 여지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야말로 프랑스와 연합할 이유가 충분한 나라였고 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시까지 러시아와 계속 전쟁을 벌어고 있는 교전 국가였거든요.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나 아일라우 전투를 치를 때에도 러시아군 주력 부대의 상당수는 저 남쪽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장에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비록 지리적 위치 때문에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공동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러시아의 남쪽 국경의 전선을 계속 유지하기만 해도 나폴레옹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투르크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더라도 러시아로서는 그 넓은 전선에 적어도 수 만의 병력을 유지시키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러시아로서는 나폴레옹과의 일전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 오스만 투르크와의 교전 상태를 종식시켜야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라는 뻘짓으로 한동안 프랑스와의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프랑스편이었고 또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오스만 투르크는 마지막까지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가를 놓고 고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동안 오스만 투르크가 잃었던 많은 것들, 즉 이집트와 발칸 반도 등의 영토를 모두 회복시켜주겠다며 10만의 군대를 동원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망해가던 오스만 투르크에게 10만군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이 얼마나 허세가 가득한 인간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나폴레옹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약속보다는 당장 코 앞에서 대포를 들이대고 협박을 해대는 러시아와 영국이 더 현실적이었습니다.  영국 지중해 함대는 러시아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이스탄불을 폭격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고,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집결한 러시아군은 몰도바를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1812년 5월, 오스만 투르크는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인 프루트(Prut) 강을 경계로 하는 평화 협정을 러시아와 맺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와의 남쪽 국경에 묶여있던 대군을 북쪽으로 불러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루트 강의 위치입니다.  오늘날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외교전에서는 나폴레옹의 완승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온 유럽이 나폴레옹 편에 선 것에 비해, 러시아 편에서 함께 싸워줄 국가는 유럽 전체에서 영국과 스웨덴 정도 밖에 없었는데, 사실 스웨덴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나라였고 영국도 유럽의 반대편인 스페인에서의 공세로도 숨을 헐떡이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결코 쉽게 보지 않았습니다.  1807년 폴란드 지역에서의 작전을 통해 광활하고 삭막한 동구의 평원을 침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 뼈저리게 잘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보급 문제에 있어 기존에 없던 규모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rut
https://en.wikipedia.org/wiki/36-pounder_long_gun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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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후니74 2019.07.22 0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온 러시아 침공에 있어 시대상을 잘 알게 되었네요.

  2. 유애경 2019.07.22 0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도 프랑스도 남의땅을 가지고 스웨덴에게 호객행위...표현이 참 재미있어서 웃고 and 잘보고 갑니다.

  3. 메뚝 2019.07.22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한주 쉬었다 오셔서 더 반갑네요~

  4. 2/28일 입대 2019.07.22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파륜이 보급 준비라니!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읽을수록 빠져드는 느낌이네요♡

  5. LOL 2019.07.22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단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최근에 있었던 흥미로운 사건에 관련하여 이렇게 서양사에 해박하신 나시카님의 고견을 여쭙고자 합니다.

    베르나도트가 다시 등장해서 드리는 질문으로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인들의 핀란드 수복숙원이 민족의 잘못된 욕망이라고 평가했다고 여기서 두번째로 언급하셨습니다. 저는 上편 댓글서 이런 내용을 봤는데요.

    한국의 상황에서 자기보다 손도 안닿을만큼 강한 전범국의 역사적 사죄를 받아내려는 한국인의 의지는 여기 치이고 저기치이던 허섭스레기 스웨덴인들의 숙원과 같다고 블로그 주인장님도 여기시는지, 그리고 이 문제에서 베르나도트와 동일한 시각을 가지시는지 많이 궁금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스웨덴왕이 된 프랑스인 단원을 연재할 때는 베르나도트의 스웨덴인의 대러시아 역사숙원을 위험한 욕망이란 평가와 핀란드를 포기해야 한다는 시각을 정확하다고 묘사하셨구요

    또한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단원을 연재할땐 나폴레옹의 전략상 베이직 요소를 나시카님은 다음같이 적으셨던걸 기억합니다, 이건 제가 드리고자 싶은 질문인데 당시 그것을 나시카님은 이길 수 없는 승리를 쥐는 영웅적 행위보다 이길 수 있는 상황에만 싸워서 백전백승을 얻어낸다는 내용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만 싸운다. 최근에 있었던 재밌는 일이란게 이겁니다 바로

    최근에 sbs 방송인 원일희가 나라 구한게 의병이 아니다, 정권차원에서 이순신, 죽창가, 의병모집 운운하면서 선동술을 일삼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말을 하고 결국 짤렸습니다.

    15일 오후 방송된 프로그램 마지막 부분에 ‘[원일희의 직설] 반일 감정 자극이 해법은 아닙니다’라는 클로징멘트를 했다.
    원 앵커는 “1910년 국채보상운동, 1997년 IMF 금 모으기 운동 기억하자,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로 나라를 구했다, 의병 일으킬 사안이다, 동학 농민운동 때 ‘죽창가’ 불렀다. 대통령, 민정수석, 안보차장, 여당의원, 같은 맥락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원 앵커는 “청와대와 여당의 방향이 엿보인다”며 “싸움, 필요하다면 해야죠”라고 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전쟁은 이길 전쟁만 해야 한다”며 “질 싸움에 끌려 들어가는 거, 재앙”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ㄴ 이런 발언인데 질싸움은 안해야 한다, 이길 싸움만 해야한다, 이 말대로라면 나폴레옹의 기본강령과 원일희의 발언은 일치합니다. 원일희가 잘못된 말을 한 걸까요, 어떻게 보세요?

    • 돌로레스 2019.07.23 0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끼어들 깜냥은 안됩니다만...개인적으로는 역사에 공짜는 없다, 어느 나라든 민족, 종교 등의 명분하에 집단주의에 푹 쩔었다가 뼈저리게 망하는 경험이 있어야 진정한 개인주의로 진화하는구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영국, 미국 정도만 예외일까요? 아, 네덜란드가 있군요....그래도 제 예상보다는 덜하긴 합니다...제 주변에 개인주의자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제가 초등학교,중학교 다니던 시절은 이른바 독재정권 시절인데요. 그때 교과서에 전시 영국의 어느 일간지가 용감하게 당국의 보도 통제를 뚫고 영국이 지고 있거나 잘못하고 있는 사실을 보도했다가 당국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맹렬한 비난에 시달렸으나 결국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이런 내용이 실리기도 했는데...세월 무상하네요.

    • nasica 2019.07.23 08: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에도 한번 적은 바가 있었는데... 저는 제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싸움이란 일단 안 하는게 좋지만, 꼭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건 우리가 정의로운 편일 때도 아니고, 이길 수 있는 때도 아니고, 지든 이기든 싸워서 얻을 것이 있을 때이다."

      답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고로 2019.07.23 0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흠 일본이 대한제국 잡아먹고 대동아공영권 외칠때도 nasica님과 동일한 논리 펼쳤을듯요..

    • LOL 2019.07.23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nasica/의문형 종결을 하신걸 보면 알고하신 응답일거 같습니다만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응답을 받아서 감사한것하곤 별개로 말씀대로 답변으로 만족할 응답은 아닙니다,

      본질문 2가지는 구체적인데 해주신 응답은 그냥 형이상학적인 나시카님의 신좁니다, 추상적이고. 이렇게 말씀들 드리는걸 무례하다고 여기지는 말아주십시오, 이렇게 딱딱하게 표현을 하는건 응답이 의문만 더 남겨서 그렇습니다 --

      나시카님같이 준프로께서 이렇게 형이하적인 질문에 형이상으로 시같이 대답을 하셨단건 추상적이어도 이 질문에 답변으로 삼기에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셨다든가. 추상적인 심리를 생각으로 형태화하고 언어로 한번 더 구체화하면 심리, 그러니까 나시카님이 지니신 욕망하고 그걸 답변용으로 치환한 언어사이에 인지부조화가 발생, 그게 양방간 쉽게 융합이 안된단 걸로 분석하면 제 망상이겠죠?

      이 두 개 경우수중 해당되는게 전자라면 의문만 더 남긴다 드린 말처럼 새 의문이 생깁니다,
      대일분쟁을 시속의 싸움으로 보신다면 대일분쟁이 한국에 -를 상쇄해서 순이익으로 +를 남기는가, 그 +는 계측가능하고 실체적인가 아니면 표현이나 인식은 해도 실체가 없거나 아예 형체 이전에 고정된 형태가 없는 무언가인가(ex:국민감정),
      거기다가 굳이 ‘정의로운 편이 아닐 때도’라는 전제가 있다면, 그리고 적합타 여기셔서 이 시로 답변을 삼으셨다면 나시카님의 생각 속 이 문제에서 한국은 악인가, 적어도 불의하단걸 의미하나

      나폴레옹사상 베르나도트의 판단이 한국 사례에 적용이 가능할까, 동시에 나폴레옹의 강령이 적절하다면 원일희의 발언은 마찬가지로 적절한가. 의사표현을 예 아니오로 해도 될 내용이거든요. 그런데 약간 당혹스럽게 아드님까지 거론하심서 우리가 얻는게 있다면 이기지 못해도 우리가 악당이어도 싸워야한단 말씀은 들으니까 이걸 읽은 기억이 날만큼 멋지긴 합니다만 화법이 우주적인데요

    • LOL 2019.07.23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치.시사성이 내포된 질문을 게시한데 이유가 있다면 하필 스웨덴왕 베르나도트가 연관이 돼있고, 그리고 앵커 원일희 사건도 연상시키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SBS 관계 방송인이라고 부러 관계라는 형용사를 넣은건 원일희가 SBS가 아니라 SBS랑 분리경영되는 CNBC, 다시말해서 본사차원 지상파 네임드도 아니라 어느정도 쩌라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프로이센 전쟁에 불을 댕기는데 일조한 사건이 있었잖습니까, 인쇄공장 사장을 나폴레옹이 친히 잡아다 죽여서 프로이센의 국민감정을 건드린 그 사건 말씀입니다

      원일희 하차사건은 또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원일희 하차건을 꺼낸 이유기도 합니다. 경제정책실장 김수현이 뻘소릴 뻥뻥하다 3진 아웃으로 잘리고 공정위에서 그 자리로 대신 간 김상조도 대통령이랑 초근거리 관계도상에 있으면서 섣부른 소리 하다가 총리한테 입조심하라고 경고받곤 깨갱한게 이번 달 일입니다.

      그리고 민정수석이고 차기 법무장관 내정자 아니면 킹크랩으로 도장찍힌 김경수 대신 총선나갈 조국, 대통령의 총애를 쓸어가는 조국이 저런 의병, 죽창, 이적 이런 막가는 말들을 쏟아내는데, 원일희가 디스한 조국이 저렇게 파격으로는 몇갑절이나 되는 개인플레이를 하고도 당정청의 일치단결한 지원을 받는단건 이건 조국이 조국이 아니라 대통령 문재인을 대리해서 하는 발언들이란 거잖아요? 그렇죠?

      원일희는 방송인 나부랭이가 대통령이 하달하는 지령에 개기고 짤린 겁니다, 이런걸로 보면 트럼프가 저 발광을 하는데도 언로가 안막히는 미국은 확실히 민주주의 최첨단 국가입니다.

      [원일희 / 앵커 : 오늘 제가 직설의 마이크를 내려놓습니다. 일본의 경제보복, 잘못됐고 철회돼야 한다, 그러나 대응은 외교 협상이어야 한다. 문맥, 취지, 의도, 명확했음에도 의병 비하했다, 친일파다, 익명의 청와대 고위관계자 멘트까지 동원된 친일 공세는 집요했고, 어둠속 칼날과 손은 보이질 않습니다. 다르면 너 빨갱이구나, 프레임 씌우던 시절처럼 다르면 넌 친일파다, 언론에 씌운 굴레입니다.]

      ㄴ 이게 당사자 클로징 멘튼데
      청와대가 동원된 압박까지 있었다고 그대로 믿자면 왕정시대 기준 베르나도트가 말년에 언론탄압을 자행하고 나폴레옹이 인쇄소 사장을 납치해 죽인거랑 차원이 비슷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저게 저럴 급의 멘튼가, 고민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 nasica 2019.07.24 08: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LOL// 아 저런... 제가 아이에게 '정의롭지 않더라도 이익이 생기면 싸우라'고 가르친 건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편이 정의라면 이기든 지든 어떤 희생이 나더라도 무조건 싸우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다들 자신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무조건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세상에는 싸움 그칠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 돌로레스 2019.07.24 0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평소에 토 많이 달던 저지만 이 말씀 만큼은 백퍼센트 지지합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도 스스로를 정의롭게 생각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게 개인주의의 시작이죠.

  6. unit_inv 2019.07.22 2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흔히 생각하는것처럼 보급 무시하고 러시아 들어갔다가 당한게 아니라 나름 준비를 했었군요.

  7. reinhardt100 2019.07.22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담이지만 18세기부터 오스트리아는 도나우강부터 테살로니카까지 자기들이 가져야 할 영토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러시아의 국가적 사명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수복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1877년 러시아가 터키를 말 그대로 묵사발내버리고 콘스탄티노플 근방까지 진격하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나라가 오스트리아였죠. 자칫하다가 발칸에서 그대로 날아가 버릴 판이었으니까요.

    프루트강과 드니스트르 강 사이가 현재 유럽 최빈국인 몰도바인데 여기도 꽤나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드니스트르 강과 프루트 강 사이는 평아지대라 방어선 구축이 안 되는 지역이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드니스트르 강을 국경선으로 해야 그나마 방어가 가능했는데 여기가 뚫려버리면서 더 이상 터키는 발칸에서 안정적인 방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실제로 1877년 전쟁 때 터키의 프루트 강 방어선을 개전이후 단 일주일도 못 되어 붕괴시킨 러시아군은 그대로 불가리아 프레베까지 진격할 수 있었죠. 프레베 요새 공성전이 5개월이나 끌었기에 망정이지 프레베가 일찍 낙성되었다면 정말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사태가 터질 뻔합니다.

    나폴레옹 전쟁과 60년 차이나지만 1877년 전쟁이 꽤나 중요한 이유가 이 전쟁은 터키 군사력의 척추를 말 그대로 꺾어버려 다시는 러시아를 상대로 단독으로 전면전을 걸 생각을 못 하게 만들었고 발칸이 더 이상 터키의 안마당이 아님을 누가 봐도 확실하게 했다는 겁니다.

    • 2/28일 입대 2019.07.23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오...정말 늘 댓글에서 배웁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급 궁금해진 게 있어요! 오스트리아는 도대체 뭘까요? 인종의 단위? 민족적 단위?? 대체 얼기설기 얽힌 조각보 같은 국가(?)가 어떻게 그렇게 커졌던건지...

    • Spitfire 2019.07.23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국 그렇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누가 발칸의 주인이냐를 놓고 수십년을 더 투닥투닥 하다가 큰 일이 터지고 말았지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왕가가 유럽의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사실 민족이나 인종이 지금처럼 국가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지요. 왕가나 귀족이 전쟁, 외교, 결혼, 상속으로 일정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 영토였으니까요. 다양한 민족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하로 지내다가, 30년 전쟁 터지면서 한번 분열되고 민족주의가 생기면서 너덜너덜해졌지요.

      나시카님이 영국 해군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 이미 언급하셨지만, 영국 선원은 ‘영국인’이 아니라 단지 ‘영국해군에서 근무하는 자’입니다. 물론 그렇게 바다밥 먹으면서 영어 배우고, 운이 좋아 그동안 모은 돈으로 영국령 어딘가 정착하면 영국인이 되는거지요. 그당시에 무슨 영주권이나 비자가 있지도 않았다 보니...

    • reinhardt100 2019.07.24 2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답변 드렸어야했는데 Spitfire님이 다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한테 배울게 별로 없는데 좋게 봐주시니 고맙네요.

  8. Spitfire 2019.07.22 2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웨덴이 핀란드를 얻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 없었던건 베르나도트를 왕으로 추대해서였다기보단, 폴타바 이후로 북방의 패권이 러시아로 넘어가는 바람에 스웨덴의 국력으로 러시아를 침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베르나도트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누구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면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그정도 사리판단은 하지요. 물론 그런 사리판단을 전혀 못하거나 단순히 분위기와 감정만으로 정확한 판단을 무시할 경우에 닥쳤던 끔찍한 결과도 역사에 무수히 많긴 합니다만...

  9. 고로 2019.07.23 0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와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는데.. 에르도안이 이슬람신앙과 반미정신 등에 엎고 이번에 러시아랑 손을 잡으니... 결과가 궁금함..

    • 터키는 강하다 2019.07.23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러시아와 터키가 친해진 것처럼 보여도 러시아가 계속 아르메니아를 후원하고,터키가 계속 아제르바이잔을 후원하는 이상 결국은 양국이 서로 적대할수밖에는 없다고 봅니다.시리아 내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일시적으로 협력한다고 봐야지요.시리아와 맞닿아있는 터키 동부는 쿠르드족 극좌 테러단체 쿠르디스탄 노동당의 봉기와 IS,알 카에다 등의 이슬람 테러분자들의 침투로 시리아랑 별 차이 없는 수준입니다.시리아 사태 초기부터 반정부군을 지원한 대가긴 한데,아무튼 치안이 굉장히 악화되었지요. 에르도안이 정말로 친러로 가고 싶다고 해도 터키는 그게 가능한 나라가 아닙니다.우리나라보다 영토도 훨씬 넒고,이슬람교도 국가답게 젊은 인구도 많은데다가 NATO에서 미국 다음가는 대군을 가지고 있으니 강해보여도, 내실은 훨씬 작은데다가 고령화되고 있는 극동의 대한민국만도 못해요.터키 군대는 한국군과 규모와 질적 측면에서 비슷한데 터키 경제는 규모에서 유럽이나 일본은커녕 우리나라만 못합니다.따라서 그 거대한 군대를 운영하려면 미국의 원조가 반드시 필요하죠.미국과 결정적으로 척을 지게 되면 당장 터키가 자랑하는 군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겁니다. 뭐 사실 에르도안도 표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자 코스프레하는 세속주의자에 가까운지라 터키의 호메이니는 결코 되지 못할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싸움인 대륙 봉쇄령으로 인한 영국의 곤경이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곡물 가격은 대륙 봉쇄령 이후 60%나 치솟았고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표면적으로는 잘 되고 있었습니다.  1805년 5110만 파운드이던 수출액이 1808년에는 4970만으로 떨어지더니 1810년에는 다시 6220만 파운드로 늘어났거든요.  이는 유럽 대륙으로의 수출이 막히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밀수 등을 통해 여전히 유럽에도 많은 상품을 팔고 있었지요.  그러나 1810년 중순 이후 나폴레옹의 밀수 단속이 강화된데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 특성상 대금의 상당 부분을 현금 대신 원자재나 채권을 받아야 했던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는 돈은 부족한데 유럽 대륙의 전쟁 자금은 금화나 은화로 된 경화로 지급해야 했으니, 아무리 영국이 부자 나라라고 해도 돈이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1809년 한 해에만 무려 4420만 파운드를 전비로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의심쩍은 지폐만 넘쳐날 뿐 경화가 부족해지자 영국에서는 극심한 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재기가 발생하여 더욱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에 빠진데다, 금본위제 재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은행들도 재무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1811년에는 금융 불안정과 함께 수출액도 4390만 파운드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유럽 대륙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당시 영국처럼 산업과 금융이 발달한 나라가 없었으니, 그 타격은 당연히 영국이 가장 크게 입었습니다.  




('템즈 강에서의 선적'이라는 Samuel Scott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승기가 막 보이려는 시기인 1810년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의 방향을 확 돌려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과의 공공연한 무역 재개 및 나폴레옹에 대한 사실상의 도전장이었거든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이미 다룬 내용입니다만, 기억 전환을 위해 잠깐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서는 영국을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나름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상품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인지라 유럽 각국은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고 밀수를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다스리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도 '면허제'라는 이름 하에 몇몇 상인들에게 영국 상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해안가를 아예 프랑스 영토로 병합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네덜란드 및 발트해에 면한 함부르크(Hamburg), 브레멘(Bremen), 뤼벡(Lubeck) 등 북서부 독일 소공국들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영토는 사상 최대로 확장되었고, 영국의 재정난이 더 심해지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대륙 봉쇄령의 이런 강압적인 실행은 영국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고통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동맹국들의 불신과 반발심도 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의 체면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르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다스리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국까지 병합해버린 것은 당시 유럽 대륙의 양대 세력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싸늘한 적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아, 프랑스가 이토록 크고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이런 병합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의 적국인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올덴부르크의 병합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제시했습니다.  즉, 2년 전 알렉산드르와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던 회담 장소였던 에르푸르트(Erfurt)를 보상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모욕으로 받아들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보상안을 거부했고,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 황제 칙령(ukase)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칙령은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크게 2가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1)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높은 관세를 부과

2) 중립국 선박의 상품이 "명확히" 영국산이 아닌 경우 러시아 항구에 입항 허용


이는 대표적인 프랑스 상품을 배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상품에 대해 환영하는 초대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냥 허술하게라도 가짜 서류만 만들어 제출하면 되었으니까요.  아는 나폴레옹의 패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장이었고 이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도발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의식 과잉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렉산드르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리 여동생이 가엾다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


당연히 그런 결정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다른 요소들이 관여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역시 폴란드와 영국이었습니다.


서방 진출을 국가 정책으로 삼는 러시아에게 있어 폴란드는 서쪽에 확보한 소중한 발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샤바 공국은, 아무리 독립국이 아니라 작센 왕의 개인 영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러시아에게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조그마한 공국에 불과할지라도 폴란드인들의 독립 정권이 있다는 것은 러시아령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서 꽤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람 전투의 결과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혹시라도 폴란드가 정식으로 독립 왕국으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러시아에게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이런 불안감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영리하게도 부지런히 조장했습니다.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를 비밀리에 이간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의 패망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당시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를 빼앗고 싶어 했는데, 그 강력한 경쟁자가 러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관계라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의 맹약인 틸지트(Tilsit) 조약을 깨뜨리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폴란드를 수단으로 정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한다'라는 소문을 빈과 바르샤바에 꾸준히 퍼뜨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810년판 가짜 뉴스였던 셈인데, 메테르니히의 비밀 선동에 홀딱 넘어간 순진한 폴란드인들은 독립 열망에 부풀었고, 바르샤바 신문들은 독립이라는 희망찬 뉴스를 꾸준히 찍어댔습니다.  이런 상황은 빈과 바르샤바에 있던 러시아인들에 의해 그대로 알렉산드르에게 들어갔고, 그의 우려와 분노는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 쿠라킨(Alexander Borisovich Kurakin, Александр Борисович Куракин)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아 '다이아몬드 대공'으로 불렸던 쿠라킨 대사입니다.  그는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코스별로 차례차례 서빙되는 러시아식 정찬 방식(service à la russe)을 프랑스에 전해 오늘날의 프랑스 코스 요리를 완성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을 막아보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화를 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로 작년 오스트리아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즉각 병력을 파견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쳐부수어야 했습니다.  그런 편의를 바라고 나폴레옹은 폴란드 애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폴란드 독립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핀란드까지 러시아에게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모두 잊고 러시아는 교활하게도 러시아령 폴란드 인근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분쇄하자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침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건 황제들끼리 우정을 나눈 동맹국의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꾹 참고 우방국 대우를 해주었더니 나폴레옹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폴란드 독립에 대해 항의해온다 ?  이런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에 대해 공손하게 대응할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처가집인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의 획책 하에 끊임없이 러시아군의 이동 및 요새 강화에 대해 나폴레옹에게 고자질을 하며 이런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과 이런 험악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알렉산드르는 각지의 요새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 것은 역시 폴란드 건이 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교황을 잡아가둔 나폴레옹의 폭거가 독실한 카톨릭인 폴란드 국민들에게 공분을 샀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더 많은 자치권과 좀더 관대한 헌법을 약속하며 폴란드인들에게 18세기때처럼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는 것이 폴란드에게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바르샤바에 그가 심어둔 밀사들은 바르샤바의 분위기를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왔습니다.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결국 폴란드에게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접한 알렉산드르는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국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폴란드인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역시 메테르니히의 획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냄새나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외교관인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Prince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입니다.  가짜 뉴스를 정치 외교에 활용하는데 있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르에게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폴란드 외에도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지요.  그것은 물론 영국, 좀더 정확하게는 영국과의 무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드넓은 평원을 가진 대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홍차와 설탕, 면직물, 비단, 강철 등의 물품을 수입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남아도는 자국산 밀과 아마 등의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 뿐이었는데, 원래 그 가장 큰 고객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때문에 영국과의 교역이 막히자 러시아의 귀족들은 돈줄이 막혔고, 그 불만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정권을 위태롭게 할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드로서는 그런 불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나폴레옹이 여동생 시댁인 올덴부르크를 제멋대로 병합해버리고 (이건 가짜 뉴스에 의한 오해였지만) 폴란드까지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810년 12월 31일, 그는 나폴레옹의 따귀를 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칙령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1811년 4월 2일자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쟁은 발발할 것이오.  나와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그를 막기 위해 노력하거나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익이 아무리 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오.  난 이런 상황을 자주 보았고, 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쟁이 발발할 거라는 것은 마치 오페라의 줄거리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뻔한 이야기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바로 영국이오."


이제 나폴레옹의 제국은 몰락을 향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들어갑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istory of the Expedition to Russia Undertaken by the Emperor Napoleon  by Philippe-Paul Comte de Segur

https://www.britannica.com/event/Napoleonic-Wars/The-Continental-System-and-the-blockade-1807-11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04/16/the-port-of-london-in-the-18th-centur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Kura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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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까님 2019.01.28 0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짜뉴스가 힘을 갖는 건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빙판길에 출근 잘 하시고 곧 설인데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십시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석총 2019.01.28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헬게이트가 열리는 군요

  3. 웃자웃어 2019.01.28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도 이미 러시아 본토로 깊숙히 진군하면 패배할수밖에 없단걸 아일라우 전투때 알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러시아에 쳐들어 갔을까요?

    • 하이텔슈리 2019.01.28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은 러시아 본토 깊숙히 진군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쳐들어가서 빨리 러시아 주력을 격파하고 차르를 협상장으로 불러내 굴복시키려는 게 전쟁의 목적이었죠. 문제는 러시아군이 안싸우고 계속 도망치고 이걸 쫓아가다보니 모스크바까지 가버린 것일 뿐이에요. 모스크바 함락 시점에서 이미 나폴레옹의 계획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시점이었던 거죠.

    • 다부 2019.01.30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러시아를 육로로 직공하는 건 위험하니
      발트해안 도시들을 동원해서 리보니아에 해상보급망을 설치하고
      리보니아의 거점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노린다는 계책을 나폴레옹에게 건의를 했는데,

      나폴레옹이 "그런 성가시고 시간 걸리는 방법 아니라도 내 작전술로 간단히 쳐 없앨 수 있어"
      라고 판단해서 바로 육로로 직공했죠.

      나폴레옹은 천재지만 자신의 재능을 너무 과신해서 일이 잘 못 되었을 때를 대비하지 않고
      작전술에 너무 의존함으로서 원정에 실패했죠.
      만약에 루이 니콜라 다부의 계책대로 신중하게 러시아를 리보니아에서 압박하는 작전을 썼다면
      당시 러시아도 상황이 어려웠던 만큼 "보급문제가 해결된 대육군"을 상대로 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보로디노 전투때에도 루이 니콜라 다부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우회기동해서 쳐야 된다고 건의했는데 역시 나폴레옹에게 묵살당했죠.
      이 때에도 나폴레옹이 루이 니콜라 다부의 건의대로 했다면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죠.

    • 웃자웃어 2019.01.30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이텔슐리님, 애초에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도 비슷한 전술을 썼는데도 러시아군에게 고전했습니다. 폴란드에서도 크게 고전했는데, 그보다 더 광활한 러시아라면 얼마나 더 고전하겠습니까? 그걸 모를리가 없는데도 러시아를 공격했고, 현지조달을 바탕으로 하는 전술을 유지했다는것 자체가 미친짓이죠.

  4. 카를대공 2019.01.28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나폴레옹 전쟁의 절정(?)인 러시아 원정의 길이 시작되는군요.
    예나 전투 때부터 그랬습니다만,전성기에 비해 한물 간 판단력의 나폴레옹이 어떻게 그려질지 흥미진진 합니다.

  5. 안드레이 2019.01.29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테르니히의 활약이 돋보이네요 비스마르크도 그렇고 역시 외교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은 후세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이 가능한가 신기하기만 합니다

  6. nashorn 2019.01.30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마지막..

  7. 샤르빌 2019.01.30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막연하게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홧김에 전쟁이 터진줄 알았더니 역시 온갖 원인과 전조로 전운이 감돌고 있었네요.. 메테르니히의 공작과 폴란드 문제..

  8. starlight 2019.02.02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러시아 원정은 그 역사가 만약이 없다라는
    명확한 반증이죠. 2000km가 넘는 전역을 보급도 수송도
    병력 충원도 지연되고 끊어지고 소멸되고,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통신도 분절되고 병력 통제도 안되고, 자연사하듯 군마는 끊임없이 고꾸라지고, 병력들은 이탈하고 와해되고 이질에 쓰러지고 전투에서 소모되고,
    눈발에 얼어 동상으로 죽고 탈진과 아사로 학살아닌 학살같은 참상이죠. 아비규환입니다.

  9. 알키비아데스 2019.02.08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헨리 키신저가 메테르니히 숭상할만 하네요



모든 전쟁에는 돈이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흔히 미국이 30년대의 대공황에서 빠져나온 것이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불황이 생길 때마다 네바다 사막이든 태평양 한가운데든 가상 표적을 세우고 거기에 병력과 함대를 동원해서 맹폭격을 가하지 않겠습니까 ?  결국 그렇게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이고, 미국도 전후 20년 정도 최고 세율 90% 정도의 엄청난 소득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1913-2008 기간 중 미국 소득세 최고 세율의 역사입니다.)




나폴레옹 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이든 프랑스든 모두 누군가는, 정확하게는 결국 국민 전체가 전쟁 비용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영국은 빚을 더 냈고, 프랑스는 세금을 더 걷었다"



그냥 이렇게만 놓고 보면 프랑스 측이 훨씬 더 건실한 재정 정책을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도 국채를 발행하여 전쟁 비용을 처리하고 싶었으나 신용불량의 전력 때문에 할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세금만으로 전쟁을 치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쟁에는 돈이 과다하게 많이 들어가는데, 그걸 모조리 세금으로 충당하려면 국민들에 대한 세금 부담이 너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국민들이라고 해도 세금을 4~5배로 올려버리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거든요.  자동차가 꼭 필요하긴 한데 당장 그럴 돈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  보통 카드 할부로 구입합니다.  말이 좋아서 할부지 사실은 카드사에게 비싼 이자를 내고 빚을 지는 것이지요.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전선의 부대들과 바다 위의 함대들, 그리고 동맹국들이 돈을 달라고 아우성칠 때는 그렇게 빚을 내야 합니다.  


대대로 유럽의 모든 정부들은 전쟁을 위해 빚을 냈습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처음 설립된 중앙은행인 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Riksbank)도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군자금을 빌리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전후에 세워진 여러 유럽 국가들의 중앙은행들도 모두 전쟁 자금을 충당하거나 그로 인해 생긴 빚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도 독립전쟁으로 인한 빚을 처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지요.  이렇게 중앙은행이라는 것의 기원은,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안정적으로 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각국 중앙은행의 설립과 연관된 전쟁들입니다.)




영국은 이미 100년도 전인 17세기 말에 영란은행(Bank of England)를 설립하여 전쟁 비용을 충당할 정도로 전쟁 금융에 매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국채 발행이 잘 되었던 것은 금융 관료들의 유능함보다는 기본적으로 영국 정부가 꼬박꼬박 채권 상환을 잘 하여 신용을 쌓아왔던데다, 결정적으로 왕실이 아닌 의회가 국채 발행과 상환을 책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정이야 언제 무슨 정변이 나서 뒤집어질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토지와 무역회사 등 주요 자산을 소유하고 있던 대주주들로 구성된 의회는 글자 그대로 주식회사 영국 그 자체였거든요.  따라서 의회가 책임지고 상환하겠다는 채권은 전쟁치고는 꽤 낮은 이자로도 잘 팔렸습니다.  덕분에 영국은 7년 전쟁의 경우 전체 전비의 51%를, 그리고 패전으로 끝난 미국 독립전쟁의 경우 81%를 국채 발행으로 메꿀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국민들의 세금 부담은 전시에도 급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영국 국채의 신용도가 괜찮았던 것은 영국 재무부에게 결정적인 여유를 주었습니다.  잠정적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여 금본위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채권 뿐만 아니라 지폐도 추가로 찍어내어 자금조달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일정 수준의 인플레를 유발시킴으로써 기존 국채 가치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이걸 인플레 세금(inflation tax)라고 합니다.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Lieutenant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1803년 영국) --------------------


(아미앵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짧은 평화가 있던 시기에, 무일푼이던 혼블로워 중위는 보직 해임 상태가 되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결국 혼블로워는 고급 장교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 4명이서 하는 카드 게임 때 부족한 머리 숫자를 채워주는, 일종의 타짜 노릇을 해서 먹고 삽니다.)


그는 혼블로워가 가슴 안주머니로 지폐를 쑤셔 넣는 것을 보았다.


패리 제독이 말했다. "예전 화폐를 다시 부활시킨다면 더 좋지 않겠소 ?  정부가 이런 지저분한 지폐를 없애고 예전의 멋진 기니 금화로 되돌아간다면 말이오."


"그거 정말 좋겠군요." 대령이 말했다.


램버트가 말했다.  "그 놈의 육지 상어(순진한 뱃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들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모조리 상대한다오.  1기니당 23실링 6펜스를 주니, 틀림없이 실제로는 그보다 더 받을 수 있을거요."  (원래 1기니는 21실링에 해당합니다: 역주)


패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에 탁자에 내려놓았다.


"보니(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비칭:역주)는 옛날 프랑스 화폐를 부활시켰소.  보시오." 그는 말했다.  "이 금화를 나폴레옹라고 부른다오. 그 친구가 이제 종신 제1통령이니 말이오.  이 금화 한닢에 20 프랑이라오.  예전에는 우린 이걸 루이 금화(louis d'or)라고 불렀지요."


"나폴레옹, 제1통령," 대령은 호기심을 가지고 금화를 보며 읽고는, 뒷면을 돌려 읽었다. "프랑스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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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남자라면 모양 빠지게 지폐 같은 것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폴레옹의 얼굴이 새겨진 40 프랑짜리 금화 정도는 누구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  무게 12.91g, 순도 90%입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의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빚으로는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모든 빚은 결국 누군가가 갚아야 하는 법입니다.  카드 할부로 자동차를 산 경우에 몇 년에 걸쳐 월급 절약하여 계속 갚아나가야 하는 것과 똑같이, 국가도 세금을 좀 더 걷든가 나라 살림을 좀 줄이든가 해서 국채를 결국 갚아야 합니다.  영국 정부는 감채기금(sinking fund, 장기 채무 상환을 목적으로 별도로 적립해두는 기금)을 설립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세수 잉여분을 여기에 적립함으로써 국채를 꾸준히 상환했습니다.  


영국도 마냥 빚만 낸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세금도 더 걷었습니다.  당시 영국 수상이던 소(小) 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소득세(income tax)를 도입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세금이란 사람 머릿수에 따라 내는 인두세와 토지 등의 재산에 따라 내는 재산세, 그리고 관세와 부가세, 소비세 등의 형태였거든요.  사람이 일을 해서 번 소득 자체에 대해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근대 유럽 사회에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소 피트가 도입한 소득세는 누진세(progressive tax)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 합니다.  즉 소득이 더 많을 수록 더 높은 세율의 세금이 부과되는, 꽤 현대적인 개념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60파운드 이하의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되었고, 60 파운드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0.83%부터 시작하여, 200 파운드가 넘는 소득에 대해서는 최대 10%까지 세율이 올라갔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국민들에게 부과했던 세금은 모두 단일 세율의 재산세와 소비세 등이었다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진보적인 조세 정책이었습니다.  




(피트 수상의 소득세에 대한 당시의 풍자 만화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 좋아하는 국민은 없지요.)




한편, 프랑스에서는 상황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의회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이미 산업 혁명을 시작했던 영국과는 국가 권력 구조와 산업 구조 뿐만 아니라 역사까지 달랐으니까요.  부르봉 왕정 시절, 아직 중앙은행도 없던 프랑스는 그냥 정부가 민간에게 직접 국채를 판매하는 형태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을 치렀습니다.  국가 자산 중 상당 부분을 귀족과 교회가 쥐고 있었는데 정작 그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으니 그때 쌓였던 빚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세금을 늘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설프게 삼부회를 소집했다가 터진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국민공회는 몰수한 귀족과 교회의 토지 자산을 담보로 1789년 12월 5% 이자의 공채를 발행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아시냐(Assignat) 지폐가 됩니다.  즉, 처음에는 채권이었으나, 나중에는 0% 금리의 지폐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보통 돈은 태환지폐라고 해서, 금과 바꿀 수 있는 증서같은 것이었는데, 금이 없으니 금 대신 토지와 바꿀 수 있는 증서를 발행한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대표적인 실패작 아시냐 지폐입니다.)




아시냐라는 저 프랑스어 스펠링을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저건 정부가 강제로 지정한(assigned) 돈으로서, 태생부터가 자연스러운 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미 파탄난 경제로 인해 돈이 궁해진 국민회의는 이듬해인 1790년부터는 애당초 몰수된 토지의 총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아시냐 지폐를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하이퍼 인플레였습니다.  특히 정부가 인플레를 잡는답시고 생필품 가격 상한제를 강제하자, 생필품이 시장에서 싹 사라지고 암시장에서만 거래되는 등, 역효과에 역효과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수차례의 폭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시냐 지폐는 가뜩이나 혁명으로 어수선한 프랑스 사회를 경제적으로 다시 한번 뒤흔들어놓고 7년만에 불명예스럽게 퇴장합니다.  퇴장할 때 정부는 이 지폐를 액면가의 3.33%에 해당하는 토지와 교환해줍니다.  투자 손실율 96.67%...  더군다나 투자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프랑스는 1720년대에도, 존 로 (John Law)라는 스코틀랜드인이 일으킨, 미국의 부동산에 투자하는 미시시피 사(社)라는 대규모 투자 거품 사건으로 인해서 지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있었습니다.  미시시피 거품 사건은, 한줄로 요약하면 존 로가 미국 땅을 담보로 프랑스에 지폐 발권력이 있는 금융회사를 차렸다가 거품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인들은 지폐는 종이 쪼가리일 뿐 결코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었지요.  이 아시냐 지폐 사건은 프랑스에서의 지폐의 위치에 대해, '관 뚜껑에 못질을 한'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국채와 지폐에 대한 국민들의 신용이 이렇게 바닥을 친 상태인지라, 총재정부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으로서는 부르봉 왕가나 국민공회처럼 채권이나 지폐를 찍어 재정난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프랑스 영토였던 루이지애나(이름 자체가 프랑스 왕 '루이의 땅'이지요)를 미국 정부에게 매각하여 돈을 마련하기도 하고,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는 프랑스 중앙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하는 등 시장의 통화와 정부 재정을 안정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금은 복본위제(bimetallic standard)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내 통치 기간 중에는 절대 새로운 지폐를 추가로 발행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한 나폴레옹의 발언으로 대표됩니다.  실제로 1800년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는 기존 정권에서 발행했던 채권에 대해 (이미 기존 채권의 가치를 크게 절하시킨 뒤이기는 했지만) 이자를, 그것도 금화나 은화로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함께 나폴레옹은 영국처럼 감채기금을 마련하여 장기 국채의 상환을 위한 안정성을 갖추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국처럼 프랑스도 국가 신용을 끌어올려, 전쟁 비용을 빚으로 충당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Bimetallic standard를 보통 복본위제라고 합니다.  금본위제와는 달리 복본위제에서는 은도 지폐의 교환 대상이 되는데, 다만 금과 은의 교환비를 정부가 지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유럽은 금의 많이 나는 대륙이 아니라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은본위제를 사용했었지요.)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할 정도로 신용을 끌어올릴 수 없었습니다.  무너지기는 쉬워도 쌓기는 어려운 것이 바로 신용이거든요.  결국 나폴레옹은 전쟁 비용을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결코 전제군주가 아니었고 국민들의 지지에 권력의 근거를 둔 황제였습니다.  전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지나치게 올렸다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세수 확대를 위해 길거리에서 채소와 생선을 파는 가판대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광장은 물처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소금과 와인에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서민들의 가판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보다는, 곡물 시장을 중흥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더 파리에 어울리는 조치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영국과는 달리 돈을 구할 다른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전쟁은 스스로 비용을 충당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전쟁 배상금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부터,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패전국에게 무거운 전쟁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1807년 프로이센을 격파한 뒤에는 무려 1억2천만 프랑을 배상금으로 요구하여 프로이센을 나락으로 빠드렸고, 1809년 오스트리아를 패배시킨 뒤에는 그나마 좀 양보하여 8천5백만 프랑의 배상금을 뜯어냈습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 천재에게는 매우 수지맞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좌절을 안겨준 것은 바로 스페인이었습니다.  분명히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모두 무찌르고 거의 모든 영토를 정복했지만, 대체 이것들이 항복을 하지 않으니 배상금을 뜯어낼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에서의 전쟁에 막대한 돈을 퍼부었는데도 그 비용을 충당할 방법이 없다보니 나폴레옹으로서는 무척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또다른 돈줄은 이탈리아와 폴란드, 네덜란드와 독일 소공국 등 위성국가들로부터의 세금이었습니다.  이들은 동네 양아치에게 보호비조로 돈을 바치는 것처럼 나폴레옹에게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과중한 배상금과 세금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유럽 전체에게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늘어난 전쟁 비용으로 프랑스 국민들까지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게 되어 지지율이 떨어졌으니까요.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최종적으로 맺은 파리 조약에서, 프랑스는 무려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연합국에게 물어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컬한 부분은 그 배상금은 연리 5%의 프랑스 국채로 지불했다는 것이었지요.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할 때는 못하던 것을, 패배 후에는 해낸(?) 것입니다.  






Source :  British and French finance during the Napoleonic wars by Michael D. Bordo & Eugene N. White 

https://www.businessinsider.com/history-of-tax-rates

https://en.wikipedia.org/wiki/Progressive_tax

https://fr.wikipedia.org/wiki/Aspects_%C3%A9conomiques_et_logistiques_des_guerres_napol%C3%A9oniennes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Paris_(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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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eltro 2019.01.14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2. 푸른 2019.01.14 1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이 특히 더 재밌는 글이네요ㅋㅋ

  3. 아즈라엘 2019.01.14 1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국은 국채를 팔아서 전쟁비용을 충당했죠
    퍼스트어벤저스 보면 캡틴이 국채팔려고 쇼하러 다니는 장면이 나오죠

    • reinhardt100 2019.01.14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다고 보는게 좀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총 전비가 3240억 달러였는데 이 중 전시 국공채로 발행하여 충당한 비용이 약 2천억 달러 조금 넘습니다. 나머지는? 그대로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나마 미국은 나았죠. 영국만 해도 국공채 발행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고 결국에는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겨우 전쟁을 치르는 판이었고 독일은 전유럽을 쥐어짜서 전쟁을 수행했죠. 일본은 그럴 여건도 안되어서 점령지 각지의 중앙은행의 조폐기 돌린 것과 군표 발행으로 전쟁을 수행하다가 그대로 인플레로 전시경제가 개판났었으니까요.

    • 최홍락 2019.01.15 06: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은 러일전쟁때부터 시작하여 태평양전쟁까지 카드빚 돌려막기식으로 전쟁을 벌려놔서 그 분야에 있어서 끝판왕인지도요. 러일전쟁때 채무를 80년대 되서야 다 상환했다고 하니까요.

      태평양 전쟁때 빚이 아직 남아있기도 하죠. 일본 정부의 일반회계의 부채 항목에 구 임시군사비 차입금이라는 명목으로 잡혀있는 금액이 414억엔 정도라는군요. (45년 기준 일본 국가예산이 214억엔.)

      이 방법이 재미있는게 위장거래와 분식회계를 통한 부채라는거죠. 우선 베이징을 중심으로 괴뢰정부인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중국연합준비은행권(연은권)을 발행하도록하고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이 중국연합준비은행과 각각 상대측 은행에 예금계좌를 개설합니다. 관동군이 군사비를 요구해오면, 조선은행 베이징지점은 보유중인 연은 명의의 일본 엔화 예금계좌에 해당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기재하고 이 예금계좌에는 앞에서 얘기한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이 입금된 것으로 기록하죠. 이를 담보로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조선은행 베이징지점 명의의 연은권 예금계좌에 같은 금액을 지출한 것으로 적은 후 이에 상당하는 연은권을 찍어 군사비로 내주는 방식이죠.

      그러나 당초 이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한 엔화 자금은 실제로는 중국으로 송금되지 않은 채 조선은행과 연은의 예금계좌에 금액만 기재될 뿐인 가짜 예금이었습니다. 연은권의 발권 담보가 된 엔화 자금은 모두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고스란히 남았다가 일본 국채를 구입하는데 사용되서 다시 일본은행의 국고로 되돌아갔다. 그러니까, 일본군의 군사비 지출인데도 일본 엔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조선은행을 앞세워 무제한으로 현지통화를 발행해 군자금을 충당한 거죠. 414억엔은 그야말로 액면가치일텐데 이를 당시 기준으로 환산했으면 꽤 큰 금액이고요.

    • reinhardt100 2019.01.17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일본은 연은권, 남발권, 대은권, 조은권, 일은권, 몽강권,만은국폐 간의 대차거래를 패전 직전에 금으로 청산했다는 겁니다. 단, 제대로 깡(?)을 쳐서 발행고로 최소 당시 금액으로 수백억엔 어치를 단 십수톤의 금으로 했다는게 문제죠.

      특히 조선은행권이 심각했는데 총독부나 조선은행 간부들이 이걸 청산할 때 그냥 금으로라도 변제를 했어야 했는데 이건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냥 발행준비금이었던 일본국채를 더 매입하는 방식으로 조폐기 돌려서 증발하는 바람에 전후 인플레이션이 미친듯이 나타났죠.

  4. 웃자웃어 2019.01.14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의 군대가 외국에서 징발한 물자들의 액수로만 따지면 7억프랑은 가볍게 뛰어넘지 않나요? 배상금 액수가 꽤 관대하네요.

    • reinhardt100 2019.01.14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하기 직전 프랑스의 이탈리아방면군이 베네치아의 본토 속주에서 징발할 수 있다고 예측한 금액이 매달 평균 100만 프랑 이상이었다고 하고 실제로 캄포포르미오 조약 이후 구 베네치아 공화국령에서 뽑아낸 금액이 정화만 최소 1천만 프랑 단위였다고 합니다.

      7억 프랑으로 집계된 것들 중 일부는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미술품류 등을 반환하는 것이었던데다가 혁명 이전에 프랑스 영토였던 알자스의 란다우같은 도시들의 할양까지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정화로 지불할 부분은 꽤 줄어듭니다. 결정적으로 왜 국채로 받았냐면 각국이 프랑스 정치권에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것을 노리고 국채로 수령한 것도 있습니다. 복고된 부르봉 왕정도 이걸 인지하고 있어서 서둘러서 배상금을 변제하죠. 다만, 상당수 배상금으로 지급된 국채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반출되지는 않고 그대로 파리와 리옹의 금융시장에서 거래됩니다.

  5. 웃자웃어 2019.01.14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저는 세금과 배상금 말고도 무지비한 징발또한 유럽에서 미움을 받은 원인이라고 봅니다.

  6. 웃자웃어 2019.01.14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꿔말하자면 위의 내용은 프랑스가 국채발행을 하고싶어도 하지 못해 세금을 올렸단 거군요.

  7. 달콤아빠 2019.01.15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재미있게 잘읽고 공감드리고 갑니다.

  8. 펱로스 2019.01.15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한테는 이 부분이 제일 무시무시하네요.

    '국민에게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통화 팽창을 통해 지폐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비용을 국민들이 부담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

    국가가 국민 상대로 할수있는 장난질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완전 조삼모사 네요.

    • raa 2019.01.16 0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몇년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도 고환율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대놓고 하고 있었죠. 약간 다른 건 국민들의 돈을 대기업들에게 퍼주는 방향이었다는거..

  9. 수비니우스 2019.01.15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전쟁하느라 쓴 돈은 누군가 갚아야 하는 법 "
    저는 이 부분이 제일 인상 깊네요. 쉽게 외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10. TheK2017 2019.01.16 1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선생님의 명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ㅇ^*

  11. Eugen 2019.01.16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건 다 좋은데 미국이 왜 전쟁으로 경기부양을 하지 않느냐에 대해선 제가 할 말이 있는데요. 전쟁이란게 생산이 아닌 순수한 소비이기 때문에 전쟁해봤자 정치적,지리적,군사적,외교적 이득이 생기지 않는 이상 하지 않는게 더 낫습니다. 만약에 전쟁해서 불황을 탈출하고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다면 2008년 경제위기때 오바마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을 철수하려했을까요?그리고 왜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에서 철군을 하려는 것인가 생각해봐요.

    • Eugen 2019.01.16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사람과 달리 저는 전쟁이 비인도적이라서 하지 말아야한다는 사람이 아니고 전쟁을 하면 손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병사한명 만드는데 10개월의 임신기간 20년의 양육기간이 있고 사람 한 명 초중고 대학교육을 마치면 1억 이상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귀한 교육받은 병사가 전쟁때문에 불구가 되거나 죽으면 엄청난 손해가 아닐까요?

  12. Eugen 2019.01.16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으로 경기를 부양시킬 수 있다면 세계대전은 몇번이고 더 낫겠죠.

  13. Eugen 2019.01.16 1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정부부채규모로 볼때 뉴딜로 인한 정부지출액수보다 2차대전으로 발생한 지출이 5배는 더 많다고 본 적이 있습니다. 결론은 뉴딜해서 대공황을 탈출했는지 세계대전때문인지는(세계대전 중 생산을 아예 안한건아니니까) 쉽게 생각가능할 만한 주제가 아닌 것같습니다.

  14. 석총 2019.01.23 1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영국은 과두정에 가까운 체제였죠

마늘을 사랑한 영국인 리처드 샤프

잡상 2018.09.13 06:30 Posted by nasica

오래 전에 차두리 선수가 아직 현역일 때 프랑크푸르트에서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이 신문에 났었습니다.  그때 아주 인상적인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여기서 적응하려면 독일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한국 음식은 잘 먹지 않는다.  마늘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다음날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뭐가 미안하지요 ?  마늘 냄새가 나는 것이 미안한거지요.  제가 다른 곳에서 듣기로도, 유학생이 주말에 한국 음식 해먹고 가면 서양애들은 귀신처럼 냄새로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양애들은 대개 마늘 냄새를 무척이나 싫어하지요.





(이것이 바로 드래곤 브레스보다 더 무섭다는 갈릭 브레스)




이렇게 마늘 냄새가 그 다음날까지 나는 것은 이유가 있답니다.  Allyl methyl sulfide(AMS, 황화 알릴 메틸)이라는 물질이 마늘 냄새의 주성분인데, 이 성분은 사람 몸에서 분해가 되지 않고 그대로 혈액까지 흡수가 된답니다.  그 혈액이 돌고 돌아 폐를 통해 숨결로 나오고, 또 땀에도 섞여 나오기 때문에, 마늘 냄새에 예민한 서양것들은 우리가 마늘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1~2일 뒤까지도 우리 몸에서 마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합니다.


실은 이런 '카더라' 통신도 들은 바 있어요.  즉, 잘게 다진 마늘즙을 갓난아이의 발바닥에 발라놓고 몇시간 지난 뒤에 아이의 숨결을 맡아보면, 희미하게 마늘냄새가 난다는 거지요.  얇은 아이의 피부를 AMS가 뚫고 들어가 혈액에 섞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총각 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신기하게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나도 아이를 낳으면 한번 테스트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차마 우리 아이에게는 그딴 짓 못하겠더라고요.  (그럼 남의 아이에게는...??)


그런데 마늘 냄새가 촌스러운가요 ?  솔직히 약간 촌스럽긴 합니다.  기분 좋은 향수는 아니쟎아요.  하지만 음식에 들어가면 정말 좋은 맛을 내주는 것도 맞지요.  저도 마늘 좋아합니다.  모든 찌개, 볶음, 나물 등에는 마늘을 꼭 넣고, 특히 스파게티를 만들 때는 듬뿍듬뿍 집어 넣습니다.  심지어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만들 때도요.  


하지만 서양인들은 정말 마늘 냄새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동양을 싸잡아 멸시할 때 마늘 냄새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가령 어떤 인터넷 사이트를 보니 (http://www.bible-history.com/isbe/G/GARLIC ), '마늘은 동양(Orient) 전지역에서 많이 재배한다... 그 불쾌하고 (disagreeable) 구석까지 스며드는 (penetrating) 악취는 동양인들의 집이나 그 입냄새에서 뚜렷하게 느껴진다' 라고 표현을 해놓았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동양에 대한 혐오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사이트가 성경 공부하는 사이트인데도 그런 멸시적 표현을 쓴다는 것은 좀 씁쓸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도 마늘을 많이 드셨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마늘을 드셨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직접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다음과 같이 민수기 11장 5절에 이집트에서 먹던 마늘을 그리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그 다음 구절은 불경스럽게도 하나님이 직접 주신 음식인 '만나' 밖에 없다고 투덜거리는 내용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인 만나보다는 이집트에서 먹던 마늘 들어간 음식들이 더 맛있었나 봅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시는 동안, 유대인들은 'ㅆㅂ 마늘은'이라며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 중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하도 말을 안들어서 속을 많이 썩히셨다고...)




이 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절에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을 가리켜 '마늘 냄새 나는 유대인들' 이라며 멸시했다고 합니다.  즉 당시의 유대인이었던 예수님도 마늘을 즐겨 드셔서 입냄새에서 마늘 냄새가 나셨을 것이라는 거지요.


진짜 우스운 것은 그렇게 유대인들에게서 마늘 냄새가 난다고 경멸하던 로마인들의 후손인 이탈리아인들이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마늘을 많이 먹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유럽에서는 스페인이 제일 많이 마늘을 소비한다고 하더군요.)  


마늘의 위대함은 마늘의 세계 정복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늘은 원래 중서부 아시아 쪽이 원산지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쌓는 인부들에게 주어지는 식단에 마늘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이미 중동 지방에 퍼져 있었고, 곧 로마제국에 상륙, 지중해 지역을 완전 장악합니다.  이어서 유럽인들의 대항해 시대에 (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했지요) 아프리카와 중남미 아메리카로 퍼져 나가, 그 지역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양념이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는 BC 130~120 경에, 장건이 서역 탐험의 결과로 중국에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즉, 마늘은 상륙하는 즉시 현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지요.


잠깐, 그런데 우리나라는 반만년 전의 건국 설화에서조차 등장할 정도로 마늘의 본고장 아니었던가요 ?  그런데 중국에 마늘이 도입된 것이 고작 기원전 2세기라면... 우리나라에는 언제 마늘이 도입되었을까요 ?  그리고 단군신화에 나온 마늘은 뭘까요 ?  





(이거 그럼 중국산 마늘이야 ?)




사실 단군 신화에 나온 것은 (어차피 삼국유사는 한문으로 씌여져 있으니까) 마늘이 아니라 달래라고 합니다.  즉 산이라는 한자는 원래 달래를 가리키는 글자였는데, 나중에 마늘이 도입된 이후로는 마늘을 대산, 달래를 소산으로 구분해서 불렀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우리는 그를 여전히 쑥과 마늘이라고 알고 있지요.  이는 마늘이 우리나라를 그만큼 철저히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외국 Q&A site를 보다보니, 어느 나라가 마늘을 제일 많이 먹느냐는 질문에, 답변이 '한국과 스페인'이라고 달린 것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답변자가 토를 달기를, 아마도 스페인은 유럽 지역만 봤을 때 그렇다는 것 같고, 세계 최고는 단연 한국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마늘이 유일하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북유럽 쪽이지요.  여기서 북유럽이라 함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뿐만 아니라, 덴마크, 영국, 독일 등 게르만 족속들이 사는 곳을 뜻합니다.  영국과 독일의 후예들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도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얘들은 후각이 무척이나 예민한 것 같아요.  그래서 마늘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이 영화는 작가인 마이클 크라이튼도 만족한다고 했습니다만... 망했습니다.  제작비도 못건졌다고 합니다..)




예전에 읽은 소설 중에, '시체를 먹는 자들'이라는, 일종의 역사(...라기보다는 판타지) 소설이 있습니다.  작가는 무려 쥐라기 공원을 썼던 마이클 크라이튼이고, 90년대 후반에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13번째 전사'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도 되었습니다.  소설 원제는 'Eaters of the Dead: The Manuscript of Ibn Fadlan Relating His Experiences with the Northmen in A.D. 922'으로서, 부제를 번역하면 '서기 922년 이븐 파들란이 노르만인들과 경험했던 사건의 기록' 정도가 되겠습니다.  소설 줄거리는 아랍인 학자가 어찌어찌하여 러시아 쪽에서 바이킹들과 합류하게 되어 지내다가, 당시 바이킹 마을을 주기적으로 습격하던 네안데르탈인들과 혈투를 벌이는 내용입니다.  



(영화는 그저 그랬으나, 소설은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주석이 하도 사실처럼 달려 있어서 처음에는 진짜 역사책인줄 알고 읽었는데, 알고보니 주석조차도 소설의 일부더군요.)




여기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진짜 바이킹 풍속 중에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바이킹 전사가 전투 중에 배에 상처를 입을 때의 처리 방식입니다.  그렇게 다친 전사에게는 먼저 양파 수프를 먹인다는 거에요.  그렇게 양파 수프를 먹인 뒤, 상처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아서, 양파 냄새가 나면 그 전사는 가망이 없는 것으로 포기하고, 냄새가 안나면 살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내장 기관이 상했는지 여부를 보는 것이지요.  제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어차피 양파를 끓여서 국을 만들면 양파 냄새가 거의 사라질텐데, 그것도 피비린내나는 좁은 상처 틈 사이로 과연 양파 냄새가 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북유럽인들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나 보지요 ?  사실이라고 하면 정말 개코가 따로 없네요.


아무튼 북유럽인들은 마늘 넣은 음식을 정말 싫어들 합니다.  아예 안먹는 것은 아니고요, 갈릭 브레드나 치킨 키에프 (마늘 버터를 넣은 닭요리) 정도를 먹는다고 하네요.




(갈릭 버터를 주 양념으로 쓰는 닭요리, 치킨 키에프)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2년 포르투갈) -------------------


(신임으로 포르투갈 전선에 파견된 영국군 매튜즈 소위가 술에 취해 반쯤 맛이 간 프라이스 중위를 만납니다.)


그 중위는 어정쩡하게 미소를 짓더니 돌아서서는 토하기 시작했다.  


'오, 젠장 !'  그 중위는 숨쉬는 것이 힘들어 보였으나 다시 힘들여 똑바로 서서, 소위를 향해 돌아섰다.  


'친구, 정말 미안하네.  이 빌어먹을 포르투갈 사람들은 모든 것에 마늘을 넣는구만.  난 해롤드 프라이스라네.'


프라이스 중위는 군모를 벗고는 머리를 문질렀다.  '미안하네만 자네 이름을 내가 놓친 것 같은데...?'


'매튜즈입니다.'


'매튜즈라, 매튜즈.'  프라이스는 마치 그 이름이 뭔가 중요한 걸 뜻하는 것처럼 되뇌이더니, 다시 위장이 들먹이는지 숨을 참았다가, 경련이 멎은 뒤에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용서하게, 매튜즈.  아마 오늘 아침에는 내 위장이 좀 민감한가봐.  어, 내 짐작에, 혹시 내게 5파운드를 꿔주면 자네에게 폐가 될까 ? 그냥 하루 이틀이면 돼.  기니 금화로 주면 더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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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래서 북유럽 쪽이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남유럽 쪽 사람들을 얕잡아 마늘 냄새나는 것들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특히 영국인들은 원래 프랑스와 사이가 좋지 않아, 프랑스인들을 이런저런 경멸적 표현으로 많이 부르는데, 대표적인 것이 frogs (프랑스라는 단어와 발음이 어울리기도 하고, 또 프랑스인들이 개구리도 먹는다고 이렇게 부르나 봅니다), snail-eaters (달팽이도 먹는다고 이렇게 부르지요) 정도입니다.  그런데 마늘 냄새나는 것들 (garlic-reeker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도 저건 못 먹을 것 같습니다... 저도 보기보단 비위가 약해요.)




Sharpe's Revenge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4년 프랑스 남부) -------------------


네언 장군의 유일하게 원통해하는 것은, 그가 여단 지휘를 맡은 이후 아직 그럴싸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그에게 더 일찍 여단을 주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군 하고 멍청한 웰링턴 공작이 후회하게 만들어 줄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젠장, 리처드, 이젠 남은 전쟁이 별로 없지 않나. 난 저 마늘 냄새 나는 것들에게 한방 먹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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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자랑하는 요리 중 하나가 에스카르고(Escargot), 즉 달팽이인데, 깔끔한 척하는 영국인들이 질겁을 하는 요리지요.  특히 이 요리는 마늘 버터(garlic butter)로 간을 맞추게 되어 있습니다.  달팽이에 마늘이라... 달팽이의 비린내를 없애는 데는 효과가 좋을 것 같은데, 영국인들은 더욱 질겁하겠군요.


일본인들도 한국인들을 경멸할 때, 마늘 냄새가 난다고 욕합니다.  실은 일본도 마늘을 많이 먹는 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압도적으로 더 많이 먹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일본인들은 양념보다는 음식의 원재료 맛을 그대로 음미하는 것을 더 즐기기 때문에, 마늘이 요리에 많이 쓰이는 편이 아니지요.  대표적인 예가 생선회인데, 그건 정말 날재료를 거의 그대로 먹는 것이다보니, 이건 요리라고 하기도 좀 애매하지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생선회조자도 된장과 함께 마늘을 넣고 쌈을 싸서 먹으니, 정말 우리나라의 마늘 사랑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이든 스칸디나비아 쪽이든, 마늘을 쓰지 않는 나라의 요리는 정말 개판으로 소문이 자자합니다.  반면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요리로 소문난 국가는 다들 마늘을 많이 소비하지요.  아무리 봐도 일식보다는 한식이 더 맛있는 것도 마늘 덕분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영국인들로부터 마늘 냄새 난다고 비웃음을 산다는 프랑스 사람들조차도 이탈리아나 스페인 사람들에게 '마늘 냄새 난다'라고 욕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본 인도 영화 '굿모닝 맨하탄' (원제는 English Vinglish)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잠깐 뉴욕을 방문한 인도 중산층 주부인 여주인공이 현지에서 만난 프랑스인 요리사와 이야기를 하며 난 이탈리아 음식과 프랑스 음식을 구별 못하겠다고 하니까, 프랑스인 요리사가 '프랑스 요리에서는 이탈리아 요리처럼 마늘을 많이 쓰지 않는다'라고 비웃듯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이 영화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저 인도 여배우 최근에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와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Rest in peace...)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3년 스페인) -------------------


(프랑스군의 포로가 된 영국군 샤프 소령을 프랑스군 장교들이 접대하고 있습니다.)


샤프는 몽브렁 소령이 이번 봄엔 비가 많이 왔었고, 스페인치고는 이번 여름엔 비가 잦은 편이라고 말하는 것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또 이 가스파초(gazpacho, 스페인의 토마토 수프)가 맛있다고 해주었다.  몽브렁은 샤프의 입맛에 맞기에는 마늘이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았나 염려된다고 했으나, 샤프는 자신의 입맛에 마늘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고, 몽브렁은 그런 미각이 정말 현명한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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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식 차가운 토마토 수프인 가스파초입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샤프 소령은, 그냥 공치사로 마늘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늘을 좋아합니다.  샤프 소령은 나폴레옹 전쟁 내내 죽은 프랑스 병사들의 시체에서 프랑스산 마늘 소시지를 노략질해 먹다가, 마늘에 맛을 들인 것으로 나오지요.  비록 영국인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지만, 그를 극복하고 마늘을 사랑하게된 리처드 샤프 소령에게 따뜻한 환영의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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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까님 2018.09.13 0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싸 1등
    몇년 만에 처음이네요
    선감상 후리플인데 죄송합니다

  2. ㅈㅅ 2018.09.13 0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경 공부 사이트니까 그런 멸시적 표현이 쓰인 거겠죠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랑 로마인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네요

  3. 아서 2018.09.13 0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달팽이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맛있더군요.초록색 소스에 찍어먹으면 더 맛있습니다.헤이 츄라이 츄라이!

  4. 뱀장수 2018.09.13 0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페인사람과 결혼하고 식문화를 대충 보니까 사람들이 마늘을 많이 먹기는 한데 이 동네도 마늘냄새 자체는 썩 좋아하지 않는것 같아요. 소파 데 아호나 감바스 알 아히요 같은 것들도 막 그렇게 마늘향이 진동하지는 않고요. 보통은 고기구울때 마늘편 몇조각 집어넣는 정도? 그러고 보니 스페인에선 레스토랑 개업할때 환기시설에 굉장히 공들인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습니다.

  5. 2018.09.13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소화낭자 2018.09.13 15: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몇년간 구독중인 데요 재탕아닌 새글안지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7. 석공 2018.09.13 2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

  8. 유애경 2018.09.14 0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단군신화의 마늘이 사실은 달래 였었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9. 갸아아앍 2018.09.16 1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늘 냄새가 뭐 그닥 좋진 않긴 하죠 그렇다고 음식에 없으면 허전하고요

  10. ㅁㄴㅇㄹ 2018.09.17 2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유럽쪽은 취향도 취향이지만 기후대가 맞지 않아 마늘이 익숙하지 않게되어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11. 뱀장수 2018.09.18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 새글 삭제하셨네요
    아침에 재밌게 읽었는뎅

  12. 까까님 2018.09.18 0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옥향천국맛 두리안을 가지고 과일의 왕이니 하면서 양념의 제왕 마늘을 까다니 ㅎㅎ
    그냥 지역감정 같은 것이 인종차별로 발전한 것 같습니다
    유럽도 마늘 안먹는 북쪽으로 갈수록 키나 덩치가 커지다 보니 남북간에 서로 까대기 할 소재로 활용된 거 아닌가 싶어요
    펄 벅의 대지를 보면 비슷한 대목이 나오죠
    가뭄이 들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자 왕룽 일가는 강남으로 피난을 가서 거렁뱅이 생활을 합니다
    그때 키빼기는 쥐뿔만한 인종들이 맛나고 향기로운 음식을 먹으며 마늘냄새 난다고 화북 피난민들을 멸시하는 강남 사람들을 보고 왕룽이 '난 돌아갈 땅이 있다' 하며 이를 가는 장면도 있구요
    나중에 첩으로 들인 렌화가 마늘냄새 난다고 잠자리를 거부하자 일부러 마늘냄새 풍기면서 덥치는 장면도 있구요
    작가가 서양사람이지만 현지화 100점이었다고 하니...
    유럽하고는 경제사정이나 남북이 역전되있긴 합니다만 동서를 막론하고 차별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온 것 같네요

  13. 찰싹이 2019.02.24 0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에서는 정말 마늘요리를 거의 먹지 않는 편이긴 합니다. 슈퍼에서도 마늘을 팔지않는 경우가 많고 이탈리안 요리를 위해 퓨레 형태로 된 마늘을 큰 슈퍼에서 팔긴 하나 이마저도 냄새를 맡아보면 마늘향이 거의 나지 않지요. 저는 초중고 시절을 사립학교 기숙사에서 보냈는데 10여년의 기간동안 학교식사에서 마늘이 들어간 요리를 먹어본 기억이 없네요.
    그 냄새 또한 심하긴 한것이 마늘에 거부감이 없는 아랍계 학생들이 케밥에 갈릭소스를 뿌려서 시켜먹고 난 다음에는 그 아이들 근처만 가도 불쾌한 마늘 냄새가 2,3일동안 나더군요. 이는 모든 음식에 마늘이 들어가는 한국사람들은 이해 못하지만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냄새가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저도 영국에 있다가 1년만에 한국에 가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특유의 마늘을 먹은 이들에게서 나는 꼬릿꼬릿한
    체취가 진동하는걸 느끼곤 했습니다. 입국심사관에게도, 편의점 직원에게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온통 그 냄새가 진동하고 가족을 만나도 부모님에게서 그 꼬릿한 마늘냄새가 났지요. 그게 상당히 힘들었는데 그걸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도 마늘을 먹는 것이더군요. 한국에 와서 마늘을 먹기 시작하면 2,3일내로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서 꼬릿꼬릿한 마늘냄새를 맡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저한테도 그런 마늘냄새가 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