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약고 폭발로 인한 알메이다 요새의 갑작스러운 함락은 웰링턴을 크게 당황시킬만 했습니다.  하지만 웰링턴은 그렇게까지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생각보다 너무 일찍 함락되긴 했지만 어차피 알메이다의 함락은 예견되었던 것이고,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스페인군이 분전해준 덕분에 방어 준비는 이미 충분히 되어 있었거든요.  문제는 그 방어 준비라는 것의 본질이었습니다.


웰링턴의 방어전략은 간단했습니다.  후퇴였지요.  그는 기세등등한 프랑스군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일대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게속 후퇴했습니다.  군대가 후퇴하면서 주민들에게까지 소개령을 내리는 것은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웰링턴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식량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식량을 현지 조달하는 프랑스군의 약점은 보급이고 프랑스군이 제풀에 꺾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격 예상지에서 밀가루 한줌도 남겨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민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식량이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는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주민들에게 삶의 터전인 농토와 집을 버리고 알아서 어디로든 사라지라는 것은 웰링턴의 깔끔한 사령부 탁자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집을 버리지 않았고, 당연히 자신들이 먹을 식량도 마루바닥 밑에 감춰둔 상태였습니다.  포르투갈 농부들의 소박한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군은 그렇게 농민들이 감춰둔 식량을 찾아내는데는 도사였고, 프랑스군은 그런 식량들을 먹어치우며 계속 전진했습니다.




(알메이다에서 쿠임브라로 향하는 길입니다.  쿠임브라 서쪽에 늘어선 산맥이 보이십니까 ?  현대의 지도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위의 크게 우회하는 도로가 아래의 두 도로보다 별로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을 보면 저 산맥이 상당히 험하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손자병법에도 원정군은 보급 문제 때문에 전투를 서두를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요.  따라서 손자병법을 읽지도 않은 웰링턴이 그런 후퇴 및 초토화 전략을 생각해낸 것은 무척 칭찬할 만한 일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중국이 아니었고 러시아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좁은 포르투갈에서 언제까지고 후퇴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수도이자 주요 항구였던 리스본 북쪽 어디에선가는 프랑스군을 저지해야 했습니다.  웰링턴은 나폴레옹 못지 않은 지도 매니아였고, 그는 알메이다에서 리스본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퇴각로와 프랑스군의 추격로는 기본적으로 몬데고(Mondego) 강 계곡을 따라 서진하는 것이었는데, 몬데고 강의 북안보다는 남안의 지형이 훨씬 좋았습니다.  따라서 웰링턴은 남안의 길목 중에서 알바(Alva) 강이 몬데고 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1차 저지를 시도해야겠다고 미리 방어진지 준비를 해놓고 있었습니다.  




(지도 좌하단에 있는 도시가 쿠임브라(Coimbra)입니다.  쿠임브라 남단을 끼고 도는 강이 몬데고(Mondego) 강이고요.  언듯 봐도 상당히 거친 지형이네요.)




하지만 마세나는 적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바지저고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웰링턴이 '포르투갈 왕국 전체에서 최악의 도로'라고 평가하고 있던 몬데고 강 북쪽 경로를 택했습니다.  알메이다의 함락에도 당황하지 않았던 웰링턴도 이번에는 당황했습니다.  마세나는 대체 왜 이 경로를 택했을까요 ?  그 결정의 이유에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만 웰링턴의 당혹감 속에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는 기쁨도 가득했습니다.  특히 이 경로를 택할 경우, 중간 경유지인 대도시 쿠임브라(Coimbra) 시로 가기 위해서는 부사쿠(Buçaco, Bussaco) 능선을 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웰링턴으로 하여금 애초 전략에서 다소 어긋난 결심을 하게 합니다.  이 부사쿠 능선에서 마세나의 프랑스군과 한판 싸움을 벌이기로 한 것입니다.


애초에 피를 흘리지 않고 마세나의 침공을 저지하려 했던 웰링턴의 결심이 흔들린 것은 부사쿠의 지형이 지키는 입장에서 너무나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사쿠 능선은 몬데고 강에서부터 급경사로 시작되어 북서쪽으로 뻗은 산맥인데, 최고 높이는 560m에 달하는 꽤 높은 산맥이었습니다.  관악산이 대략 630m니까 상당한 높이지요.  높이보다 더 나쁜 것이 그 급경사였습니다.  쿠임브라로 향하는 고갯길의 최고 높이도 400m 정도로서, 남산(260m)이나 인왕산(340m)보다 더 높고, 경사도 여전히 급했습니다.  덕분에 그 고갯길은 능선을 똑바로 넘지 못하고 정상 근처에서 크게 오른쪽으로 틀어져서 비스듬히 올라가야 했습니다.  즉, 바로 좌측 위의 근거리 능선에서 적군이 빗발치듯 날려대는 총탄과 포탄을 측면에 뒤집어 쓴 채로 비스듬이 전진해야 했던 것이지요.  이런 매혹적인 능선 위에 올라서서 저 밑을 낑낑대며 기어 오르는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 마세나에게 총질을 해댈 기회를 날려버리기에는 웰링턴의 자제력이 충분치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포르투갈 방위를 책임진 전체 야전군 5만이 고스란히 다 휘하에 있는 상황에서 말이지요.




(현재의 부사쿠 능선입니다.  뭔가 궁전 같은 건물은 Palácio Hotel do Buçaco라고 19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한편, 왜 굳이 이 경로를 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부사쿠 능선 앞에 6만5천의 침공군을 이끌고 온 마세나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독일과 체코 등 다양한 지역 다양한 상황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습니다.  능선 아래에서 망원경을 뽑아든 마세나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능선 위에 옹기종기 배치된 포대들과 프랑스군을 역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영국군 장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세나의 눈에 그들은 한마디로 병정놀이에나 어울리는 풋내기 애송이들에 불과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높고 험한 능선에 방어진을 친 상대를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건너기 힘든 긴 장애물이라는 점에서 높은 능선과 강은 유사했는데, 마세나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던 적들을 여러 차례 아주 쉽게 요리한 적이 있었지요.  강이든 능선이든 그런 것을 방어선으로 삼는 것은 나폴레옹이나 마세나와 같은 명장들에게는 하책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연전연승했던 비결은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적을 분산시키고 아군을 집중시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이나 능선에 기대려는 적군은 필연적으로 그 긴 강이나 능선에 걸쳐 병력을 주욱 늘어뜨려 놓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쪽에서 기만 기동을 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미리 병력 분산시키는 셈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은 일은 이렇게 얇아진 적의 긴 방어선 중 적당한 어느 한 곳을 골라 송곳으로 구멍을 뚫듯이 집중 공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세나는 자신있게 공격 작전 계획을 하달했습니다.  그에게는 총 3개 군단이 모두 집결해 있었습니다.  레이니에(Jean Reynier)의 제2 군단, 네(Michel Ney)의 제6 군단, 그리고 쥐노(Jean-Andoche Junot)의 제8 군단이었지요.  흔히 부사쿠 전투에서 마세나가 고지에 자리잡은 영국군을 과소평가하고 무식하게시리 정면 공격을 고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자는 사냥할 때 새끼 영양 한마리도 과소평가하지 않는 법이고 마세나는 진짜 사자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폴레옹이 공통적으로 즐겨 사용하던 고전적 모루와 망치 전법을 변형해서 적용했습니다.  먼저, 레이니에가 영국군 방어선의 좌측 측면(영국군 쪽에서는 우익)을 멀찌감치 우회하여 고지를 기어오른 뒤 영국군의 측면을 찌르면, 네의 제6 군단이 영국군의 정면을 들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작전에서 필수적인 시간 동기화는 쉬웠습니다.  저 좌측 능선 위 어디선가 요란한 총성이 들리기 시작하면 네가 진격을 시작하면 되었으니까요.  그 총성이 영국군 베스 브라운 소총에서 나오는 것인지 프랑스군 샤를빌르 소총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세나는 영국군을 과소평가하기는 커녕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었습니다.  예상 외로 영국군이 억세게 저항하여 레이니에와 네의 공격을 모두 격파할 수도 있다고 보고,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쥐노의 제8 군단을 예비대로 대기시켰습니다.  




(레이니에 장군입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함께 이집트 원정에도 갔었으나 나폴레옹이 조기 귀국할 때 따라가지 못하고 므누 장군과 함께 뒤에 남겨진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나폴레옹의 심복 부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그람 전투 때 클레나우의 진격을 저지했던 로바우 섬의 포격을 지휘한 로바우 섬의 책임자였습니다.)




하지만 마세나는 쥐노의 예비대까지 실제 전투에 동원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저 능선을 따라 길게 분산되어 있을 영국군은 그 자체로 이미 패배한 셈이었으니까요.  마세나가 보기에 영국군이 가진 유일한 이점은 고지에서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프랑스군의 공격 방향에 대응하여 영국군이 서둘러 재배치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산 위는 당연히 길이 험했으니 능선을 따라 포병대와 탄약차량은 커녕 경보병 대대를 이동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나마 때마침 공격이 시작되던 9월 27일 이른 아침에 부사쿠 능선 아래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습니다.  덕분에 산 위의 영국군은 아래 쪽의 프랑스군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꼭 우연만은 아니었습니다.  근처에 몬데고 강이 흐르는 계곡 아래 쪽이니, 가을철 이른 아침에는 안개가 낄 가능성이 꽤 많았던 것이지요.  마세나는 애송이 웰링턴의 실수를 비웃으며 레이니에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마세나는 아직 웰링턴이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ussaco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bussaco.html

http://www.peninsularwar.org/bucaco.htm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석총 2018.11.12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엔 공작이 아니라 자작작위 웰링턴으로 한시점엔 백작의 작위를 받고나서였죠 살라망카에선 후작작위를 받았죠

  2. 웃자웃어 2018.11.12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에 프랑스군도 잘싸운 편이었군요.

  3. reinhardt100 2018.11.12 2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분산을 했다고 판단했을거고 단 한번의 공세로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공격을 가했을 겁니다. 틀린 건 아닙니다만 화력밀도가 예상보다 더 강했다는게 문제였을 겁니다.

    프랑스군이 총검돌격으로 적 전열을 붕괴시키는 전술로 싸우는 편임을 잘 아는 러시아군을 제외한 상대방측은 최대화력을 투사하여 프랑스군의 총검돌격을 돈좌시키는 식으로 싸웠습니다. 러시아군은 같이 총검돌격으로 맞서는 편이었으니까요. 씬 레드라인의 영국군조차도 화력으로 프랑스군의 총검돌격을 막아낼 수 없게 되어 총검돌격전이 되어버리면 그대로 쓸려나가는게 일상이었죠. 웰링턴이 대단한 건 그 화력밀도를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가장 확실하게 발현된 전투가 워털루전투이고요

  4. 카를대공 2018.11.13 1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 드디어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와 대불동맹 최고 명장이 격돌하는군요.

    그런데 혹시 나시카님 취미가 등산이신가요?산 높이를 줄줄이 꿰고 계시는걸보니 ㅎㅎ

  5. keiway 2018.11.16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주를 엄청 기대하게 만드는 마지막 문장이로군요.
    나시카님 글로 보고 싶어서 일부러 스페인 전역 관련된 내용은 찾아보지 않고 있습니다. ㅎㅎ

  6. 샤르빌 2018.11.16 1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도전쟁 때문에 마세나가 좌천당했다던데.. 그 과정을 살펴볼 수 있겠네요.. 뒤퐁도 그렇고 반도전쟁 때문에 잘 나가다 물먹은 장군이 참 많은 것 같네요..

** 200년 역사를 가진 브라질 박물관의 최근 화재를 애도하며, 쥐노의 포르투갈 침공 사건을 다룬 글을 다시 올립니다.  그 박물관 건물은 이 시건때 브라질로 도주한 포르투갈 왕가가 임시 행궁으로 삼았던 건물입니다. **



1806년, 나폴레옹이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한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하여 한숨 돌리고 있을 때, 나폴레옹에게 10월 14일 스페인 수상 고도이가 발표한 성명서 내용이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나폴레옹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습니다.  러시아의 협박과 영국의 뇌물을 받아먹은 스페인 수상 고도이가 바로 얼마전에 발표한 이 성명서는 대부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결국 그 요점은 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독일에서 나폴레옹이 패배라도 한다면 곧장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를 침공하겠다는 의도의, 공공연한 도전에 해당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으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전력을 기울여 프로이센 잔존 세력을 추격해야 하는 판국에 그럴 여유도 없었고, 또 고도이 따위의 도발은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제압하기만 하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이 나폴레옹의 명민함과 고도이의 멍청함이 잘 드러나는 대목인데, 하필 고도이가 이 성명서를 발표한 10월 14일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두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승 소식을 접한 고도이는 '아뿔싸'를 외치며 자신이 발표한 성명서를 주워담느라 허둥지둥 거렸으나, 사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거두기가 어려웠습니다.




(고도이는 단순히 운이 안 좋았던 걸까요, 국제 정세에 대한 판단력이 제로였던 것일까요 ?  하필 나폴레옹이 저렇게 예나에서 대승을 거두던 바로 그 날 나폴레옹에게 도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니...)




이런 고도이의 도발 행위에 대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아무런 질책이나 항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매우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고도이는 스스로 지은 죄를 알기에,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추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긴장 관계를 또 기가 막히게 잘 착취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트라팔가 이후 얼마 남지 않은 스페인의 잔존 해군 함대를 프랑스의 툴롱으로 이동시킬 것을 '부탁'했고, 또 프로이센에서 잡아들인 2만5천명 규모의 포로들을 '공사판에서 부려먹든 농사를 짓게 하든 맘대로 하시라'며 선물하듯 스페인으로 보내왔습니다.  사실상 이들 포로의 숙식 문제에 대한 부담을 스페인 측에 전가한 것이지요.  고도이가 이런 요구에 고분고분 따르자, 한술 더 떠서 스페인 정규 병력 중 A급 사단 1만5천명 정도를 스페인과는 아무 상관없는 저 머나먼 함부르크 지역으로 파견하여 베르나도트 지휘 하에 수비 업무를 맡도록 부탁해왔습니다.  고도이는 이에 대해서도 순순히 따르는 수 밖에 없엇습니다.  이 1만5천의 부대는 스페인에서 '북방 사단' (Division del Norte) 라고 불리는 정말 최정예 부대였고, 그 지휘관은 로마나 후작 (Marquis de la Romana, Pedro Caro y Sureda)이었습니다.  이 부대는 훗날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나름 드라마틱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외에도 대륙 봉쇄령에 따라 스페인의 각 항구를 철저히 폐쇄하라는 경제적 요구에도 굴복해야 했습니다.




(로마나는 반도 전쟁 당시 웰링턴 공작으로부터 가장 존중받던 스페인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Aubrey & Maturin 시리즈에도 등장하는데, 머투어린의 먼 친척으로서 나중에 머투어린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겨 머투어린을 갑부로 만들어줍니다.)




이렇게 멍청한 수상을 둔 덕분에 스페인의 국방력과 경제력은 크게 손상되고 있었으나, 그와는 상관없이 고도이와 카를로스 4세 부부는 자신들만의 방탕하고 화려한 생활을 즐기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고도이에게 나폴레옹이 의논할 것이 있으니 사절을 보내라는 일이 벌어집니다.  잔뜩 긴장하며 찾아간 고도이의 사절에게 나폴레옹이 내민 것은 엉뚱하게도 포르투갈을 나눠갖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운명의 퐁텐블로 궁전입니다.  왜 운명의 퐁텐블로인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이탈리아 남부의 소왕국인 에트루리아 (Etruria)가 조약을 어기고 영국군을 끌어들였으므로, 나폴레옹은 의붓아들인 외젠의 부대를 동원해 영국군을 쫓아내고 에트루리아를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에트루리아 왕이 비록 그런 죄를 저질렀지만, 그 왕비가 스페인 왕족인 마리아 루이사 (Maria Louisa)이므로, 스페인 왕가의 체면을 생각하여 에트루리아 왕족에게 에트루리아 대신 다른 영토를 하사하겠다는 것이었지요.  물론 그 영토는 프랑스 땅이 아니라 바로 포르투갈의 일부였습니다.  게다가 썩어빠진 고도이의 인간성을 꿰뚫는 제안도 덧붙였습니다.  포르투갈을 3등분하여, 북부는 마리아 루이사에게 줘서 북부 루시타니아 왕국 (Kingdom of Northern Lusitania)을 만들고, 중부는 프랑스의 통제를 받는 꼭두각시 포르투갈 왕국으로 존속시키되, 나머지 하나는 알가르베스 공국 (Principality of the Algarves)으로 만들어 고도이 개인의 영지로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이 치루어야 할 댓가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통과하여 포르투갈로 쳐들어가도록 길만 내주면 된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스페인군도 3개 사단을 동원하는 등 형식적으로 공동 작전을 펼치게 되어 있었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늉일 뿐, 실제로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프랑스군이 수행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기 구두 밑창을 혀로 핥으라고 해도 아마 따랐을 고도이로서는 굉장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합니다.  이것이 1807년 10월의 퐁텐블로 (Fontainebleau) 조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고도이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포르투갈을 침공하기 위한 프랑스 군단은 조약의 체결 여부에 상관없이 이미 스페인으로 진입한 상태였거든요.  그 부대의 지휘관은 '폭풍우' 쥐노(Jean-Andoche Junot)였습니다.




(퐁텐블로 조약에서 잠재적으로 삼등분된 포르투갈의 상상도입니다.  저 아래 분홍색 부분을 큼직하게 떼어 고도이에게 주게 되어 있었으나, 나폴레옹에게 정말 그럴 의사가 있기는 했는지 상당히 의심스러웠지요.)




원래 인맥으로 따지자면 쥐노가 나폴레옹의 첫번째 부하일 정도로, 나폴레옹과 쥐노의 관계는 무척이나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쥐노는 혁명 발발 이후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하던 대학생일 정도로, 뱃 속에 먹물이 좀 들어간 엘리트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지요.  1793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과 처음 만난 쥐노는 당시 계급이 하사관이었는데, 그렇게 나름 배운 사람이었기에 나폴레옹의 서기가 될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 툴롱 포위전에서의 유명한 잉크와 모래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용감한 인물이었습니다.




('폭풍우' 쥐노 장군입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나폴레옹의 수많은 전투 장면에서, 여러분은 쥐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거의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의 인정을 받지 못해, 주요 지휘 보직을 얻지 못했다는 이야기지요.  나폴레옹은, 특히 황제가 되기 이전의 나폴레옹은 인물 평가에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자신보다 2살 어리고 또 아주 오랜 기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쥐노에게 주요 보직을 맡기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쥐노에게 뛰어난 재능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작전 때, 로나토(Lonato) 전투에서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그때 이후로 성격이 변하여 성급하고 자제력이 떨어지는 불안정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의 말년은 정신 착란 이후 자살로 이어지는 불행한 것이었지요.  그의 별명이 폭풍우, 즉 Junot la Tempête (영어로 Tempest)라고 알려진 것도 그의 폭풍우같은 작전 때문이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정한 그의 성질머리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나폴레옹의 고참 측근으로서, 마세나나 마르몽, 란, 다부, 심지어 네 같은 인물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쥐노로서는 속이 그다지 편치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1796년 로나토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른 전투입니다만, 정작 이 전투보다는 바로 같은 날 벌어진 오쥬로의 카스틸리오네 전투가 더 극적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마침내 일개 군단의 지휘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갑자기 나폴레옹은 왜 그에게 군단 지휘권을 맡겼던 것일까요 ?  가장 큰 이유는 쥐노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에 포르투갈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포르투갈 사정에 그래도 좀 익숙한 사람을 파견하는 것이 작전면에서나 정치외교적인 면에서나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지요.  또 이렇게 쉬운 작전을 맡기면서 쥐노에게 '이번 작전을 잘 끝내면 원수 (marechal) 계급과 작위까지 주겠다' 라고 나폴레옹이 약속한 것을 보면 약간 뒤쳐지는 친구라도, 역시 옛 전우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쥐노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정리하고, 왜 나폴레옹은 쫓겨난 에트루리아 왕족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뜬금없이 발동한 것인지 살펴보시지요.  물론 나폴레옹은 그런 왕족 나부랭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머나먼 유럽 서쪽 끄트머리의 포르투갈을 침공하려한 것은 바로 영국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중립국이라고 할 만한 것은 덴마크와 포르투갈 뿐이었습니다.  그 중 덴마크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 협박에 못이겨 프-러 동맹 쪽으로 사실상 넘어오기 직전이었는데,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덴마크가 프-러 동맹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라는 첩보를 접한 영국이 선제 공격을 한 것입니다.   


7월 말, 영국은 덴마크에게 '너희를 프랑스로부터 보호해줄테니 20여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너희 함대를 우리에게 넘겨라.  우리가 잘 보관했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하면 그때 돌려주마' 라는 제안 또는 협박을 했습니다.  거의 동시에, 나폴레옹도 덴마크에게 '영국과 전쟁을 선포하라, 아니면 베르나도트가 덴마크의 남쪽 영토인 홀슈타인 (Holstein)을 들이칠 것이다' 라고 협박을 가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덴마크는 양측 모두를 거절하고 중립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래들의 싸움 속에서 새우등이 무사할 턱이 없었습니다.  실력행사를 먼저 시작한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20여척의 전함과 2만5척의 병력을 동원하여 코펜하겐을 들이쳤고, 지난 1801년 제1차 코펜하겐 전투 때와는 달리, 코펜하겐 시내의 민간인 거주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퍼붓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1807년 9월 2일부터 3일간 가해진 이 폭격에서, 코펜하겐 시내에서 수천 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간인 희생자가 195명 사망, 768명 부상이라는 대참사를 낳았습니다.  결국 덴마크는 조건부 항복을 해야했고, 덴마크 함대는 거의 고스란히 영국 해군의 수중에 넘어갔습니다.




(1807년 제2차 코펜하겐 전투 당시 영국 함대의 폭격을 받던 코펜하겐 시민들의 모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나 본격적으로 수행된 민간인 구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의 시조가 되는 사건입니다.)



(코펜하겐 폭격에는 박격포함이 동원되어 이런 carcass라는 소이탄을 포함한 각종 포탄과 로켓탄을 수천발 쏘아댔습니다.   이 carcass라는 소이탄은 큰 구멍이 군데군데 뚫린, 속이 빈 철제 케이스로 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흑색화약, 초석, 유황, 수지, 잘게 부순 유리, 섬유질, 핏치와 송진유 등을 섞어 만든 내용물을 채워넣은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영국의 해양 안보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었던 덴마크 함대가 나폴레옹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어서 목적을 달성했다고 좋아했겠습니다만, 대신 덴마크 전체는 이제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영국과 원수지간이 되어 나폴레옹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폴레옹으로서도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 되었지요.  어차피 20여척의 전함으로 영국 해군의 제해권에 도전할 수는 없었거든요.  덴마크가 반영 동맹에 제발로 들어오게 되자, 이제 유럽 대륙에서 남은, 유일하게 영국 선박에게 항구를 개방하는 나라는 포르투갈 딱 하나만 남게 된 것입니다.


원래부터 포르투갈과 영국의 관계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공식 우호조약인 1386년 윈저 조약부터 시작된 것일 정도로 공고하고도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이 관계는 제2차 십자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때 예루살렘으로 가던 영국군이 포르투갈 왕위를 둘러싼 내분에 개입해서 포르투갈 왕가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하지요.  특히 힘센 옆나라인 스페인의 침공 위협에 시달리던 포르투갈로서는 자신을 도와줄 힘센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영국과의 우호 관계에 더욱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즈음에 이르러서는  포르투갈은 정치 경제적으로 대영국 의존도가 심해졌습니다.  당시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류층은 대부분 자녀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친 것에 비해, 유독 포르투갈의 귀족층 자녀들은 영어부터 배울 정도였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의 주요 산업 중 하나가 영국으로 포르투갈 특산품인 포트 와인 (Port wine, Porto)을 수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포트 와인의 탄생 자체가 영국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즉, 영국까지 먼 뱃길로 수출할 때 포도주가 상하지 않도록 알코올 성분을 높이기 위해 포도주에다 비숙성 브랜디(포도 증류주)를 첨가했는데, 이것이 술고래인 영국인들의 기호에 딱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포도주가 주로 수출되던 Oporto 항구의 이름을 따서 Porto, 또는 포트 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네요.  당시 제대로 된 영국식 식사는 로스트 비프 등의 식사를 하고, 파이나 푸딩 등의 디저트를 먹은 후, 포트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는 것이 거의 정례처럼 굳어질 정도였습니다.




(영국 신사들의 필수품 포트 와인입니다.)




이런 포르투갈에게, 나폴레옹은 '영국과 단교하고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라'고 강요합니다.  포르투갈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조건이었지요.  가령 중국이 우리나라에게 '미국과 단교하라'라던가, 혹은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중국과의 교역을 중단하라'라고 요구한다면 경제적 안보적으로 우리나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대륙 봉쇄령에 끌여들여 반영국 경제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포르투갈 침공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프랑스의 요구에 대해서, 실질적인 포르투갈의 지배자였던 당시 섭정이던 조아오 4세 (Dom João VI, 영어로는 그냥 John IV)는 영국과 국교는 단절하겠으나, 영국인들을 체포하고 영국 선박과 상품을 압류할 수는 없다 정도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프랑스는 이에 대해 대사 소환이라는 초강경 대응을 합니다.




(섭정 왕자 시절의 조아오 4세입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 서쪽 끝에 붙은 나라였고, 포르투갈 침공을 위해서는 스페인을 통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닷길은 영국 해군이 막고 있었으니까요.  원래 남의 나라를 관통하여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정치외교적으로 굉장히 난처한 일입니다.  아무리 얌전히 통과한다고 해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거칠기 짝이 없는 병사들이 도보로 통과하면서 현지인들에게 피해를 안 끼칠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스페인을 사실상 통치하던 인물들이 무골충 카를로스 4세에, 탐욕과 부패로 물든 '평화의 왕자' 고도이였으니 나폴레옹으로서는 일이 이렇게 잘 풀리기도 어려웠던 것이지요.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스페인 내부로의 프랑스군 진입에 대한 동의를 얻은 나폴레옹은 이미 스페인에 진입한 쥐노에게 더욱 행군 속도를 높이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왜 나폴레옹은 무엇보다 행군 속도에 열을 올렸을까요 ?  그리고 애초에 왜 퐁텐블로 조약이 체결되기도 전에 스페인 국내로 병력을 진주시키는 초강수를 두었을까요 ?  이유는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 브라질 때문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애초에 워낙 작은 나라여서, 그 자체로는 프랑스군에게 저항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프랑스군의 침공에 대해 포르투갈 왕정이 택할 수 있는 것은 부질없이 상징적인 저항 이후 항복하는 것이든가, 아니면 바리바리 보따리를 싸서 배를 타고 대서양 건너 식민지인 브라질로 튀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포르투갈이 택할 것은 바로 후자, 즉 브라질로의 도주가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건 나폴레옹으로서는 꼭 막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을 점령하여 유럽 대륙과의 교역항을 모두 폐쇄한다고 하더라도, 영국이 브라질과 교역길을 뚫는다면 대륙 봉쇄령의 효과가 크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땅덩어리보다도, 포르투갈의 왕정 자체를 사로잡아 영국과의 단교를 강요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1800년 경의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도입니다.  특히 저 브라질은 영국이 통상길을 열려고 무척 노력하는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속도였습니다.  아무리 이삿짐이 많다고 하더라도, 아무래도 리스본에 앉아 있다가 항구로 가 배를 타는 것이, 피레네 산맥을 넘고 드넓은 스페인 평원을 가로질러 포르투갈의 방어진을 돌파하고 리스본을 점령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를테니까요.   그래도 일단 최선을 다 해봐야 했는데, 일단 프랑스군의 장기가 빠른 행군이니만큼,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쥐노의 부대가 서부 스페인 살라망카 (Salamanca)에 진입한 것은 11월 12일, 약 480km를 25일만에 주파한 셈이었습니다.  하루에 19km 약간 넘게 이동한 셈인데, 이는 당시 프랑스군의 평균 이동 거리였던 하루 25km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피레네 산맥을 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또 쥐노의 부대는 독일 무대에서 활약했던 정예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보다는 질이 많이 떨어지는 2선급 부대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습니다.  이런 속도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으로부터 쥐노가 추가 명령을 전달받은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정상적인 길이었던 알메이다 (Almeida)와 코임브라 (Coimbra)를 통과하는 320km 경로 대신 훨씬 험하지만 대신 훨씬 짧은,  알칸타라 (Alcántara)로부터 타구스 (Tagus) 계곡을 통과하는 190km 경로를 택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특히 이 경로에는 주민들이 별로 없어 현지 식량 조달이 매우 곤란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병사들은 사막에서라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다" 라며 무작정 강행군을 강요했습니다. 




(붉은색 점선이 원래의 정상적인 평탄한 길이고, 검은색 실선이 나폴레옹이 강요한 지름길입니다.  이렇게 보니 뭐 별로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아마 살라망카에서 코임브라로 가는 길이 실제로는 저렇게 직선이 아니고 많이 굽이치는 모양이었나 봅니다.)




결국 이때부터의 행군은 병사들에게는 재난이었습니다.  하필 이때부터는 늦가을의 차가운 비까지 며칠동안 계속 내려 고달픈 병사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병사들의 25%가 낙오하고, 군마의 50%가 죽어버리는 큰 희생을 치뤄야 했습니다.  이런 개고생 끝에 쥐노는 11월 19일, 드디어 포르투갈 국경을 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탄탄대로였을까요 ?  천만에 콩떡이었습니다.  스페인 도로 사정도 열악했지만, 스페인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던 포르투갈의 도로 사정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덕분에 쥐노의 부대가 11월 23일 아브란테스(Abrantes)에 진입할 때, 전체 부대의 50%만 대오를 이루고 있었고, 나머지는 낙오했거나 거지꼴로 먹을 것을 찾아 들판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아브란테스와 그 위치입니다.  포르투갈의 딱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폭풍우' 쥐노의 부대는 이렇게 거지꼴로 절뚝거리며 오고 있었으나, 정작 이들을 맞이하는 포르투갈 궁정은 발칵 뒤집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설마 공갈이겠지, 그냥 엄포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 전설적인 프랑스군이 정말로 포르투갈을 향하여 스페인을 횡단하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온 것입니다.  당시 섭정이던 조아오 왕자는 10월 20일 등 떠밀려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래도 쥐노의 부대의 진격이 멈추지 않자 11월 8일에는 포르투갈 국내의 영국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쥐노의 부대는 진격을 계속했고, 포르투갈 궁정이 깜짝 놀랄 속도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애초에 프랑스군과 싸운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군은 서류상으로는 2만명이 넘었으므로 쥐노의 2진급 프랑스군 잔존부대 1만5천명과 충분히 싸워볼 만 했으나, 스페인과 별반 차이 안 날 정도로 부패했던 귀족 출신 포르투갈 장교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병사들을 명단에만 올리고 그 보급품과 급여를 착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리스본 앞바다에 영국 소함대가 나타나 리스본 항구의 봉쇄를 선언했습니다.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으니 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조아오 섭정은 사절을 보내 쥐노의 진격을 늦추려 해보았으나, 이는 역효과를 낼 뿐이었습니다.  굴욕적인 조건에도 OK를 외치는 사절의 태도를 보고 포르투갈에게 저항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챈 쥐노가, 뭉기적 거리는 본대를 놔두고 약 1500명의 정예병만을 따로 뽑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11월 30일 리스본에 지친 몸을 이끌고 거지꼴로 나타난 이들에겐 대포 1문조차 없었고, 심지어 연이어 내리는 늦가을비에 탄약포까지 흠뻑 젖어 총 한방 제대로 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리스본 정부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프랑스군은 아무 저항 없이 리스본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쥐노의 침공을 피해 리스본 항구를 탈출하는 왕족과 귀족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두려워하던대로, 이미 조아오 섭정을 포함한 포르투갈 궁정은 모두 배편으로 항구를 빠져나간 후였습니다.  쥐노가 리스본에 입성하기 바로 하루 전날, 이들은 15척의 군함과 20여척의 수송선에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영국 함대의 호위 하에 브라질로 출항했던 것입니다.  알고보면, 아무리 포르투갈 국민들이 무기력하다고 해도, 프랑스 침공군에 대해 총 한방 쏘지 않고 완전히 무저항으로 나온 것도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습니다.  리스본 시민들은 자신들이 떠받들던 왕족들이 지들만 살겠다고 온나라 국민들을 버려두고 브라질로 탈출해버렸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대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국민들은 왕족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엇지만, 탈출한 왕족들로서도 이 탈출이 나름 아슬아슬했던 것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스피드에 전력을 기울였던 쥐노의 행군 속도에 놀란 왕족들은 온갖 귀중품이 실린 14대의 짐마차를 항구 부둣가에 내버려 둔 채로 허둥지둥 출항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쥐노는 졸지에 닭쫓던 개 신세가 된 셈이었지요.  이렇게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침공의 주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나폴레옹은 으리으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공로를 인정하여 쥐노에게 아브란테스 공작(Duc d'Abrantès)의 작위를 내려줍니다.  다만 절반의 성공이었으니 포상도 절반만 하여 원수직은 내리지 않았지요.  쥐노가 포르투갈 궁정 식구들을 놓친 댓가는 상당했습니다.  조아오 왕자와 함께 무려 1만5천명의 귀족, 대상인, 그리고 그 식솔들이 배를 타고 브라질로 탈출했는데, 이들이 바리바리 싸들고 간 화물의 대부분은 금화와 은화였습니다.  이들이 가져단 금화와 은화는 포르투갈이 보유한 전체 경화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점령한 포르투갈에서도, 다른 점령지에서처럼 돈을, 그것도 1억 프랑을 뜯어낼 것을 지시했는데, 쥐노가 포르투갈을 아무리 박박 긁어도 나폴레옹에게 보낼 돈은 커녕 자신의 부대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불할 돈조차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결국 문제는 돈이지요.  18세기 초반 스페인의 은화입니다.)




남아있는 포르투갈 귀족들과 관리들은 프랑스군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포르투갈 민중은 좀 달랐습니다.  최초의 저항은 리스본을 점령한지 얼마 안되어 쥐노가 관공서 건물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자마자 나왔습니다.  리스본 시민들이 프랑스의 삼색기가 올라간 것을 보고 작은 폭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는 기병대가 출동하여 간단히 제압했습니다만, 쥐노가 나폴레옹에게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온 나라의 민중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포르투갈의 사회 지도층이라고 할 만한 인간들이 모조리 브라질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 민중 봉기를 이끌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포르투갈이 아니라 동쪽의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곧 쥐노는 포르투갈에 갇힐 운명이었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오오 2018.09.05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첫댓글의 영광이라니! 올리시는 글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2. 올~ 2018.09.05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쉽게 1등을 놓쳤네요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3. 유애경 2018.09.06 0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희생을 강요 당하는건 항상 힘없는 서민(민중)들 이군요! 권력을 쥔 자들은 잘난척만 하다가 위급 해지면 언제든지 튀었다가 기회를 엿보면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4. 웃자웃어 2018.09.06 0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똑같은 글을 올리지 않았나요?

  5. 2018.09.06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하이텔슈리 2018.09.06 2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십중팔구 이때 싸들고간 물건 중에도 불타버린 물건이 있을거라고 생각되니 이전과 다르게 읽히는 글이네요.

  7. reinhardt100 2018.09.06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르투갈이 저렇게 배짱(?)을 부리다가 프랑스군이 밀어닥치자 브라질로 망명하면서 포르투갈 본국을 바라본 식민지의 포르투갈인들은 본국을 아주 우습게 알 정도가 되어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당장, 브라질로 포르투갈 왕실이 망명하자마자 식민지 주민들은 브라질과 포르투갈 본국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1815년에는 '포르투갈-브라질 연합왕국'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터지게 됩니다. 역대 어느 식민제국도 본국과 식민지가 완전 동등, 그것도 식민지가 본국을 합병하는 형식으로 국체가 변형된 적은 전례가 없었으니까요. 거기에 포르투갈 왕실의 내분까지 식민지 주민들이 이용하면서 브라질 자체가 아예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하는 사태까지 터지면서 포르투갈은 완벽히 3류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고 혁명까지 터지면서 국가가 개판이 나게 됩니다. 그나마, 이 개판난 포르투갈을 살린 정책이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정책이었는데 이 때문에 영국과의 관계도 꽤나 악화되었고, 20세기 초중반에는 '에스타도 노부'라는 권위주의적인 독재정권이 살라자르에 의해 설립됩니다. 말 나온김에 PIGS 국가들 중 그나마 포르투갈이 피해가 덜 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이 살라자르인데 평가가 아주 복잡하죠. 장기적인 국가운영의 청사진을 가지고 이를 실천한 유능한 학자 정치인에서 국민 절반을 바보 만든 우민화의 대표주자라고 말입니다.

    나폴레옹이 쥐노에게 택하도록 한 길을 따라 프랑스군이 19세기판 전격전을 실시했는데, 저 때 살라망카에서 리스본까지 1일 평균 10km밖에 안 갔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저 길이 악명 높았는데, 17세기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 당시 포르투갈 독립군은 저 길을 따라 진격하는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치열한 방어전을 전개하여 결국 막아낸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북부 코임브라 등의 요새지역을 돌파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여 이를 우회하는 것이 왕정복고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양측의 공통된 판단이었고, 실제로 1640년부터 곧장 이 길을 중심으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포르투갈 독립군이 저 길 방어에만 3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쏟아부었고, 반대로 에스파냐 역시 공세 및 공세적 방어를 하기 위해 카탈루냐, 아라곤, 나폴리 반란 진압과 30년 전쟁이 종전되자마자 프랑스전을 맡을 병력을 제외한 전 병력을 모조리 이 길에 쏟아부었는데 결국 돌파에 실패하면서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이 포르투갈 재독립으로 이어질 정도로 악명 높았던 겁니다. 저기 일 평균 10km 행군이라 잘 실감이 안나겠지만 평지였다면 최소 일 30km, 심지어 일 40km에 육박하는 속도였다고 보면 됩니다. 이 정도면 정말 쥐노가 강행군 한 겁니다. 19세기 판 전격전 맞은 겁니다.

  8. 석공 2018.09.07 04: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9. TheK의 추천영화 2018.09.09 0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전격전과 왕가의 도망, 심지어 댓글까지 흥미진진하니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ㅇ^*

  10. Starlight 2018.09.22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쥐노도 애썼군요. 뭔가 늘 측은한 쥐노 ㅜㅜ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군단이었고 10만이 넘었으니까요.  그런 스페인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은 혹시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 같은 짓이 아니었을까요 ?


웰슬리도 나름 정보와 생각이 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 프랑스군의 상태는 웰슬리의 진격에 대해 그다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생 시르(St. Cyr)의 제7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동쪽의 카탈루냐 지방에 있었고, 수셰(Suchet)의 제3 군단은 그 바로 옆 아라곤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모르티에(Mortier)의 제5 군단도 마드리드 북쪽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주둔하고 있었고, 네(Ney)의 제6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갈리시아(Galicia)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Sebastiani)의 제4 군단은 마드리드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술트의 제2 군단은 웰슬리의 영국군에 의해 포르투갈에서 거지꼴로 막 쫓겨난 뒤 재정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빅토르의 제1 군단은 포르투갈 접경 지역의 구아디아나(Guadian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809년 5월말, 스페인 내 프랑스 7개 군단의 위치입니다.  전년도에 있었던 바일렌에서의 뒤퐁의 대패 덕분에, 아직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는 프랑스군이 발을 못 붙이고 있었고,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가 스페인 저항군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도 속의 붉은색 지점 표시 부분이 바로 탈라베라입니다. )




웰링턴에게 주어진 공격 루트는 크게 2가지였습니다.  도우루(Douro) 강을 따라 술트를 추격하여 마무리짓는 것과, 훨씬 남쪽인 타호(Tajo, 포르투갈어로는 테주 Tejo, 영어로는 타거스 Tagus) 강을 따라 빅토르를 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다 강을 따라 가냐고요 ?  스페인에 비해 작고 약한 포르투갈이 독립국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지대의 지형이 무척 험하여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갈 수 있는 전통적인 교통로는 저 두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들이었습니다.  특히 리스본부터 타호 강가를 따라 가면 탈라베라(Talavera)와 톨레도(Toledo)를 거쳐 마드리드 인근의 아랑후에스(Aranjuez)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타호 강과 그 주변 강역도입니다. )




어떻게 생각하면 대포를 모두 잃은데다 만신창이가 되었고, 또 바로 발 뒤꿈치까지 따라잡은 술트의 뒤를 계속 추격하는 것이 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과감히 방향을 선회하여, 저 남쪽의 타호 강을 따라 진격하여 빅토르를 격파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무래도 2만 정도의 병력만으로 스페인 내부로 진격하는 것은 무척 버거운 일이었는데, 스페인 쿠에스타(Cuesta) 장군이 협동 작전을 요청해온 것입니다.  쿠에스타에게는 약 3만의 병력이 있었으니 영국군에게 이 제안은 무척이나 솔깃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상황을 보니 만약 빅토르만 성공적으로 격파한다면, 마드리드까지 일사천리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잘 하면 분산된 프랑스군의 의표를 찔러 마드리드를 기습 점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점령한 뒤 과연 마드리드를 지켜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런 승리는 큰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웰슬리는 출세욕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아일랜드 모닝턴(Earl of Mornington) 백작의 3남에 불과했으므로 철저한 장자 상속권을 따르는 영국 귀족 사회의 전통에 따라 그는 백작도 자작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자신을 아일랜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개인적 목표는 잉글랜드 내의 어느 근사한 영지에 대해 작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웰슬리는 야심찬 행군을 시작했으나, 군사작전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작전이 생각했던 것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빅토르의 군단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웰슬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조달에 의존하는 프랑스군 특성상, 빅토르가 주둔하고 있던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 지방의 구아디나아에서는 식량이 바닥났던 것입니다.  쿠에스타의 스페인군도 견제할 겸 식량도 구할 겸, 빅토르의 제1 군단은 마드리드 쪽에 좀더 가까운 탈라베라(Talvera)로 이동했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빅토르의 제1 군단은 1만9천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해, 연합군은 영국군 2만에 스페인군 3만이라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보력에서도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민간 게릴라들이 주요 도로와 시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군단 간에 전통문을 주고 받는 것도 쉽지 않았고 소규모 정찰대를 운영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빅토르를 비롯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스페인 진입을 7월 9일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68세이던 쿠에스타 장군에 대해 겁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돈키호테 같은 아집과 오만,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은 매력적인 연합군 파트너가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엉뚱한 오해가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발목을 잡습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Sevilla) 지방 정부격인 훈타(Junta)에서 영국군을 좀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웰슬리를 스페인군 전체의 통합 사령관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작 웰슬리 본인은 오직 잉글랜드 작위에만 관심이 있었던지라, 무능하고 믿을 수 없는 스페인군의 총사령관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쿠에스타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원래 영국과 스페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 해적왕 드레이크 이야기에서 짐작하시듯 아메리카 대륙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죽어라 싸우던 사이로서, 그 민족 감정은 꽤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더 큰 적 나폴레옹에 맞서기 위해 연합을 맺은 관계라고 해도, 오만하고 재수없는 영국 장군이 스페인군에게 지휘관 노릇을 하며 이래라저래라 명령질을 하는 모습은 스페인 장군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웰슬리에게 합동 작전을 펼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쿠에스타가 웰슬리에게 갑자기 퉁명스럽게 대하며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덕분에 웰슬리와 쿠에스타 사이에 구체적 합동 작전 계획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망친 것은 쿠에스타의 질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항상 산더미같은 염장 쇠고기와 럼주를 끼고 다녀야 했던 영국군의 특성 때문에 영국군의 진격은 너무 느렸습니다.  6월 8일 포르투갈 내 타호 강 계곡 지역인 아브란치스(Abrantes)에 도착한 영국군은 거의 3주간 그 지역에서 허송세월했는데, 이는 쿠에스타의 딴지 때문만은 아니었고 영국군을 위한 염장 쇠고기와 럼주 등 군량 창고를 짓고 물자를 집적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웰슬리는 6월 28일에야 아브란치스를 떠나 7월 3일에야 스페인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포르투 전투 이후 거의 2달이 지나서야 이렇게 스페인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빅토르는 영국군의 진입을 모른 채 쿠에스타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웰슬리는 여전히 빅토르의 옆구리를 기습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에는 없던 변수가 생겼습니다.  빅토르가 위치를 잡은 탈라베라는 전보다 훨씬 마드리드에 가까운 곳이었고, 더 나쁜 것은 세바스티아니의 프랑스군 제4 군단과도 더 가까와졌다는 것입니다.  웰슬리가 꿈꿨던 것은 쿠에스타와 빅토르가 서로의 멱살을 쥐고 뒹구는 사이에 살짝 다가가 빅토르의 옆구리에 연장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바스티아니가 바로 옆에 서있다면 현장 분위기가 그다지 친영국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 귀족들로 구성된 스페인군 수뇌부의 모든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네가스 장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스페인군이 제시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와 대치 중이던 베네가스(Francisco Javier Venegas) 장군의 라 만차 군(Ejército de La Mancha)이 세바스티아니를 적절히 견제하여 서쪽의 빅토르를 지원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쉬운 군사 작전이 서면 상의 작전이었습니다.  베네가스는 스페인 귀족다운 풍모와 위엄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귀족이 갖춘 것 그것 뿐이었습니다.  군사적 재능이라고는 1도 없었던 그는 이미 그 해 1월에 벌어진 우클레스(Uclés) 전투에서 고작 1만 조금 넘는 병력을 가지고 아무 상황 판단을 못 한 채 1만5천의 우세한 병력을 가진 빅토르에게 달려들었다가 1천의 사상자와 6천의 포로를 내는 참패를 겪은 바 있었습니다.  만약 스페인이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였다면,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그저 귀족의 체면을 위해 돌격했다가 1만군을 통째로 전멸시킨 베네가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철저한 귀족 중심 사회였고,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베네가스가 받은 것은 군법회의 출두명령서 대신 2만3천의 병력을 갖춘 라 만차 군 사령관 임명장이었습니다.


베네가스에게 주어진 명령은 2만 병력의 프랑스 제4 군단을 공격하여 분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섣부른 전투를 피하되 세바스티아니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빅토르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잘 대치하고 있으라는 간단한 명령이었지요.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간단한 명령조차 완수하지 못하는 신박함을 보여주었습니다.  7월 초, 마침내 웰슬리의 영국군이 탈라베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프랑스군이 조제프 왕과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다 이끌고 탈라베라로 달려갈 때, 베네가스 앞에 있던 세바스티아니도 서둘러 탈라베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뒷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베네가스에게 완전히 또다른 기회를 주었습니다.  마드리드가 바로 코 앞인데, 그의 앞을 가로 막을 인근의 프랑스군이 모조리 탈라베라로 가버린 것입니다.  베네가스는 이때 2가지 꽃놀이 패를 쥐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의 뒤를 쫓아 탈라베라로 이동한 뒤 쿠에스타 및 웰슬리와 연합하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데 일조할 수도 있었고, 또는 아예 텅 빈 마드리드로 진격하여 수도를 탈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네가스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대체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약 1달 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다른 부대들과 합동 작전을 펼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베네가스는 후퇴하라는 쿠에스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굳이 세바스티아니와 전투를 벌였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는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시고 일단은 탈라베라 전투에 집중하겠습니다.


이렇게 베네가스가 삽질을 해주는 덕분에 프랑스군은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뿐만 아니라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그의 보좌관 주르당(Jourdan) 원수가 이끄는 마드리드 수비대 및 2개 용기병 사단 총 1만1천까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탈라베라에서의 힘의 균형은 영국-스페인 연합군 5만5천에 프랑스군 4만6천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된 셈이었으나 여전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 분명한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영국-스페인은 불신과 반목으로 얼룩진 어설픈 연합군이었습니다.  스페인 국왕 조제프가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단일 정예군과의 대결에서는 불리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또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Tagu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co_Javier_Venega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monacid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몽키D루피 2018.02.25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처음으로 1등~! ^0^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2. reinhardt100 2018.02.2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빅토르가 후퇴한 엑스트라마두라 지역은 전통적으로 에스파냐 농촌 지역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편인 지역입니다. 16세기 신대륙을 정복한 콩키스타도르 (라)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인것만 해도 이미 드러나니까요.

    이베리아 반도 지역 자체가 프랑스군이 주전장으로 싸워왔던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 폴란드보다도 사실 더 빈곤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는 적어도 개별 가구에서는 약탈할게 있었고, 폴란드 같은 경우는 추워서 그렇지, 적어도 보급선이 끊길 우려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이베리아 반도는 수자원이 현재와 마찬가지로 꽤나 부족해서 농업생산력이 낮은데다가 메스타라는 목양조합의 영향까지 겹치면서 농민들의 삶은 완전 박살난 수준이 되었으니까요. 에스파냐 왕실 역시 이걸 도저히 묵과할 수는 없었고, 신대륙의 식민지가 독립하기 전 국가예산의 상당수를 신대륙에서 오는 정화준비 수송선단에 의존했고, '페닌술라에스'라 하여 에스파냐 본토 출신들을 의도적으로 우대, 신대륙으로 보내려고도 노력하긴 합니다.

    웰링턴이 술트를 추격하지 못한데는 지형상, 교통편상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탄약소모가 있었습니다. 염장쇠고기같은거야 극단적으로 보면 길가는(?) 소 한 마리 잡아서 먹으면 되지만 탄약은 그게 안 되었으니까요. 특히 영국군이 자랑하는 '씬 레드라인'의 탄막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탄약이 미친듯이 들어갔는데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는 그 많은 탄약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방법이 없었고 전쟁 내내 본국에서 조달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총검의 원조국가답게 17세기 네덜란드 전쟁 당시부터 이미 총검돌격전이 되면 막을 군대가 없다고 할 정도인 프랑스군과의 총검돌격전을 어떻게든 막으려면 더욱 탄약이 중요했죠. 이러다보니 진격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nasica 2018.02.25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18.02.25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웰링턴이 그토록 공명에 집착한 이유가 형이었던 동인도회사의 인도 총독인 웰즐리 후작의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사실, 웰링턴이 워털루 전투의 승장이라는 명성에 가려서 그렇지 형 웰즐리 후작이 미친 영향은 훨씬 큽니다. 최초의 귀족 출신 총독으로써 전임자이던 동인도회사 사원 출신이던 헤이스팅스의 업적을 '(이후의 오클랜드와 아머스트 같은) 무모한 확장정책으로 말아먹지 않고서' 인도 제패에 시동을 걸었다는 겁니다. 웰즐리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귀족들에 대한 의구심을 어느 정도 걷고 콘월리스 등의 후임 귀족출신 총독들도 계속해서 선임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웰즐리 후작이 현대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매관매직이 판치던 영국에 '공정한 시험에 의한 (능력주의에 근거한)선발'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동인도회사 사원 및 인도통치에 소요되는 행정관 및 장교들을 다수의 학원 및 사관학교를 통해 모집, 충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는 당시 임원진의 사원입사 추천권을 정면으로 건드리면서 의회 내 인도족과 회사내 해운족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되어 정책 자체가 폐지되지만 1853년의 추밀원령에 의한 제국고등문관시험제도 정비가 시작되면서 이후에 결실을 맺게 됩니다.

    • 카를대공 2018.03.04 0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렇게 보니 형제가 위인이네요.
      그것도 둘 다 영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엄청 크구요.

  3. 에로준 2018.02.25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글과 좋은 댓글 입니다.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4. 석총 2018.02.28 1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웰링턴은 웰슬리와 모닝턴의 스펠링을 합친거죠
    사실 귀족의 차남이 작위를 받으면 분가하는게 원칙이고 귀족명을 모닝턴과 성인 웰슬리를 합쳐서 웰링턴이 되었죠

  5. BACCANO 2018.03.08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네가스 무능함의 끝판왕이네요 ㅋㅋㅋ

1809년 5월 12일 포르투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이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허겁지겁 산길로 후퇴해야 했고, 따라서 모든 짐은 물론 대포까지 다 버리고 가야 했습니다.  분노한 포르투갈 민간인들에게 학살당할 것이 뻔한데도 부상병들을 버리고 감은 물론, 군자금까지 병사들에게 마구 나누어줄 상황이었습니다.  때는 이른 5월이라 차가운 비까지 계속 내려 후퇴하는 프랑스 병사들의 사기까지 축 적셔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 길 바쁜 프랑스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폰트 노바(Ponte Nova, 새 다리, 스페인어로는 Puento Nuevo)라는 이름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술트 원수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두개의 긴 대들보만 남기고 그 위를 가로지른 널판지는 다 해체된 상태의 다리였습니다.  이 다리는 프랑스군이 스페인으로 퇴각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다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백여명의 포르투갈 민병대(ordenanza)가 기세를 올리며 프랑스군에게 야유를 보내고 있었지요.  원래 영국군은 포르투갈 민병대에게 연락하여, 이 폰트 노바 다리를 완전히 끊어 버릴 것을 요청했지만, 중세 시대 때 지어진 이 유서깊은 다리가 완전 파괴되면 당장 그 일대의 포르투갈 민간인들이 생활이 당장 크게 곤란해졌으므로, 민병대는 영국군의 요청보다는 자신들의 생활을 위해 이 다리의 상면과 난간만을 뜯어낸 것이었습니다.  다리를 완전 파괴하여, 그 덕택에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전멸시키거나 항복을 받아내더라도, 영국군이 이 다리를 재건해줄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어쨌거나, 이 폭 90cm 정도의 좁은 대들보 2개만 나란히 놓인 이 다리는, 포르투갈 민병대 백여명이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계속 비가 내려 대들보는 무척 미끄러운 상태였습니다.  포르투갈 민병대는 이 정도면 다리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폰트 노바 앞에 도착한 것이 5월 15일 낮이었는데, 이미 영국군의 척후 기병대가 프랑스군 후미에 나타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틀도 아니고 하루만 더 여기에 발이 묶이면 프랑스군은 항복하거나 옥쇄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폰트 노바입니다.  지금은 살라몬데 Salamonde 댐 건설로 수몰되어, 저 수면 30m 아래에 위치해 있답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술트 원수는 제2 군단 전체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소문난 사나이를 소환했습니다.  바로 루이-에티엔 뒬롱 (Louis-Etienne Dulong) 소령이었습니다.  뒬롱 소령은 영국 작가 버나드 콘월의 나폴레옹 시대 전쟁 소설인 샤프 시리즈 중 Sharpe's Havoc 편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9년 포르투갈) -------------------


(샤프 중위의 영국군 라이플병들이 점거하고 있는 고지 위의 감시탑을 뒬롱 소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야밤에 급습합니다.  샤프 중위의 지휘 하에 영국군이 반격에 나섭니다.)


프랑스군은 폐허가 된 감시탑 앞의 석조 테라스 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한 장교가 그들에게 화가 난 듯 고함을 지르더니, 그 장교가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왔다.  영국군 측에서는 샤프가 앞으로 나서며 그와 검을 맞부딪히며 힘을 겨루었는데, 그는 이번에도 박치기로 상대를 공격했다.  번개불 속에 드러난 상대 장교의 얼굴을 보니 박치기 공격에 깜짝 놀라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장교도 샤프와 같은 부류 출신임이 분명해 보였다. (샤프는 런던 극빈층 고아원 출신입니다 : 역주)  그 장교도 두 손가락으로 샤프의 눈을 찌르며 샤프의 사타구니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던 것이다.  샤프는 옆으로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손에 쥔 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상대방의 턱을 강타했다.  프랑스 병사 2명이 쓰러진 장교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


위 소설 속에서 샤프와 개싸움을 벌이다 얻어 터지는 장교가 뒬롱(Dulong) 소령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앙리 뒬롱(Henri Dulong) 소령으로 나오고, 제31 경보병 연대 소속으로 나오지만, 실제 이름은 루이-에티엔 뒬롱 (Louis-Etienne Dulong)이었고 이때 당시는 제32 경보병 연대 소속이었습니다.   또, 위 소설 속에서는 뒬롱 소령이 마치 주인공 샤프처럼 깡패 출신이었다가 입신양명하여 군 장교직에 오른 것과 비슷한 경력을 지닌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외과의사의 아들로서,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뒬롱 소령은 저렇게 영국군 중위에게 얻어터지고 질질 끌려나간 적은 없습니다.  작가인 버나드 콘웰도, 뒬롱 소령과 같은 장교가 자기 소설 속에서 저런 굴욕을 당하도록 만들어서 무척 미안했다고 후기에 적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의 뒬롱 소령과, 실존 인물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용기입니다.  위의 Sharpe's Havoc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



(뒬롱 소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제 곡사포 포격의 엄호 하에, 고지 위의 영국군 라이플병들을 향해 대낮에 돌격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라이플의 긴 사정거리와 정확성 때문에 고전합니다.)


뒬롱 소령은 이제 라이플병들을 볼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곡사포탄이 프랑스 보병들의 머리 위를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고지 위에서 폭발하며 위협하는데도, 라이플병들이 그걸 무시하고 이젠 숨어있던 바위 틈에서 일어나 서서 소총을 재장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뒬롱 소령은 그의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러 저 녹색 군복을 입은 적군에게 사격하라고 명령했지만, 머스켓 소총의 총성은 미약했고 머스켓 총알은 크게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에 비해 라이플 총탄은 아주 정확하게 프랑스 병사들을 노렸으므로, 병사들은 고지로 향하는 좁은 길목 위로 계속 올라가기를 꺼려했다.  

뒬롱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운만 좋다면 라이플 사격에 쓰러지지 않고 고지 위 방벽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솔선수범의 예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소리를 지르고, 검을 뽑아들고 돌격했다.  "프랑스 만세 !"  그는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


"사격 중지 !" 샤프가 외쳤다.


뒬롱을 따르는 프랑스 병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는 혼자 돌격해오고 있었고, 샤프는 그 프랑스인의 용기를 높이 사서, 그에 경의를 표하고자 앞으로 걸어나와 예식에서 하듯 그의 검을 들어 경례를 했다.  뒬롱은 그 경례를 보고는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고, 그가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샤프를 향해 돌아보고, 그도 검을 들어 경례를 한 뒤, 난폭한 동작으로 검을 다시 검집에 찔러넣으며 황제 폐하를 위해 죽기를 겁내는 그의 부하들에 대한 경멸을 드러냈다.  그는 샤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걸어 내려갔다.


---------------------------------------------------------------------------------------------


소설 속의 이 불필요하고 어색한 장면은, 아마도 작가 버나드 콘월이 뒬롱 소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억지로 밀어넣은 장면 같습니다.  샤프처럼 무자비하고 인정머리없는 친구가 단순히 혼자 돌격하는 프랑스 장교를 보고 사격 중지를 외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러나 실제 뒬롱 소령이었다면, 소설 속의 이런 행동을 실제로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역사 속 실존 인물인 뒬롱 소령이 그 용기를 드높인 사건을 보면,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말 들거든요.


술트는 뒬롱 소령에게 100명의 선발된 척탄병을 맡기며, 밤까지 기다렸다가 다리를 탈취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뒬롱 소령은 그 중 단 12명의 척탄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야음을 틈타 완전한 침묵 속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비바람이 부는 때라서, 12명의 척탄병들 중 1명이 다리를 건너다 미끄러져 저 아래 급류 속에 빠질 때의 비명 소리나 다리 입구에 서있던 보초병을 뒬롱 소령 자신이 검으로 해치울 때의 소리가 묻혀버렸습니다.  이렇게 다리를 건넌 뒬롱 소령 일행은 비바람을 피해 움막에 들어가 있던 포르투갈 민병대를 급습했고, 프랑스군 수백명이 넘어온 것으로 착각한 민병대는 별 저항을 못하고 흩어져 도주해버렸습니다.


뒬롱 소령의 이 위업이 술트의 제2군단 전체를 구출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포르투갈 민병대의 경계 태만이 더 주요한 원인 같습니다만...)   당장 그날밤 중으로 다리를 수리한 뒤 전체 프랑스군이 다리를 건넜고, 술트는 자신이 달고 있던 레종 도뇌르 훈장을 떼어내 현장에서 뒬롱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이번에는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또 다시 같은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 폰트 다 미사헬라라는 다리는 폰트 노바와는 달리 로마 시대에 지어진, 석조 다리로서, 이번에는 대낮이었고, 또 밤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소설 속의 장면을 보시지요.





(구글에서 Ponte da Mizarela를 찾아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19세기 초에 다시 지어진 다리라고 하니까, 이 사건 이후에 다시 지어진 모야입니다.)



----------------------------------------------------------------------------------------------


보병 2개 대대가 다리를 공략하겠지만, 다리 건너편 끝에 설치된 가시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공격하는 병사들은 산산조각 날 것이 뻔해 보였다.  1.2m 높이에 두께도 그 정도 되는 이 장애물은 20여개의 가시 덤불을 서로 묶고 통나무로 눌러놓아 만든 것으로서, 돌파하기 아주 곤란한 물건이었다.  따라서 결사대(Forlorn Hope)가 제안되었다.  결사대라는 것은 동료들의 돌파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된 병사들의 무리로서, 보통 이런 자살 공격대는 방어가 철저한 적의 요새 벽에 뚫린 구멍에 투입되곤 했지만, 오늘의 공격조는 반쯤 해체된 다리의 좁은 통로를 건너야 했고, 쏟아질 머스켓 사격에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이 가시덤불 장애물을 치워야 했다.  


제31 경보병 연대의 뒬롱 소령은, 반짝거리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단 채로, 이 결사대의 지휘관으로 자원했다.  이번에는 어둠을 틈탈 수도 없었고, 또 적의 수도 훨씬 많았지만, 장갑을 끼고 가시 장애물을 치우는 혼전 속에서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검 손잡이에 달린 가죽끈을 손목에 졸라매는 그의 굳은 얼굴에서 걱정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전위대를 지휘하는 루아송(Loison) 장군은 전 병사들이 강둑에 늘어서서 머스켓이든 기병총이든, 심지어 권총이라도, 포르투갈 민병대(ordenanza)에게 위협 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격으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음이 극에 달했을 때, 뒬롱은 검을 높이 들었다가 앞으로 내지르며 돌격 명령을 내렸다.


뒬롱 자신이 속한 연대의 유격 중대가 다리 위를 내달렸다.  남아있는 돌다리의 좁은 틈 사이로는 겨우 3명이 나란히 통과할 수 있었고, 뒬롱은 그중 가장 첫번째 줄에 있었다.  포르투갈 민병대는 크게 야유를 보내고는 흙으로 쌓은 엄폐물 뒤에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뒬롱은 가슴에 총을 맞았고, 그는 총알이 어제 밤의 공로로 새로 받은 훈장을 때리고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총알이 폐까지 뚫고 들어왔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에게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고함을 지르려 했으나, 숨이 가빠 소리를 지를 수 없었고, 대신 장갑을 낀 손으로 가시덤불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더 많은 병사들이 도착하여 좁은 다리 위에 빽빽히 늘어섰다.  한명은 발이 미끄러져 흰 거품이 일어나는 미사렐라(Misarella) 강의 급류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총알이 결사대 병사들의 여기저기를 강타했고, 대기는 화약 연기와 뭔가 부러지는 소리와 총탄이 핑핑 날아다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하지만 뒬롱 소령은 마침내 장애물 한 부분을 강 속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고, 병사 한명이 통과할 만한 틈을 만들어냈다.  이 틈은 함정에 빠진 프랑스 2군단 전체를 구하기에 충분할 만큼 큰 것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 틈 사이로 들어가 검을 높이 들고, 숨을 쉬려 애쓰며 입으로 피거품을 내뿜었다.  지원 대대들이 총검을 꽂은 채 다리로 달려들면서, 그의 뒤에서 엄청나게 큰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뒬롱의 결사대 중 살아남은 병사들이 가시덤불의 나머지 부분들을 치워내면서, 이미 전사한 유격병(voltigeur) 10여명의 시체를 무자비하게 다리 밑 강물 속으로 발로 차 던져 버렸다.  그들은 함성과 함께 돌격했고, 뒬롱 소령의 결사대를 저지하기 위해 총을 쏜 뒤 아직 재장전 중이던 포르투갈 민병대원들은 프랑스군이 떼거리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도주해버렸다.  수백 명의 민병대원은 프랑스 총검을 피하기 위해 서쪽 언덕을 기어 올랐다.  


뒬롱은 포르투갈 민병대가 버리고 간 가장 가까운 엄폐물 근처에 멈춰섰고, 거기서 그는 검이 손목에 연결된 가죽끈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채로 허리를 굽혔고, 피와 침이 섞여 그의 턱으로 길게 흘러내렸다.  그는 눈을 감았고, 기도를 하려고 애를 썼다.


"들 것을 가져와 !" 한 하사관이 외쳤다.  "들 것을 만들어. 의사를 찾아 !"  프랑스군 2개 대대가 포르투갈 민병대를 다리에서 쫓아냈다.  아직 포르투갈인 몇몇이 왼쪽의 높은 바위 언덕에서 얼쩡대고 있었지만, 머스켓 소총을 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그들이 그냥 자신들이 탈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뒬롱 소령이 함정의 마지막 틀을 억지로 열어젖힌 것이었고, 이제 북쪽으로 향하는 도로는 활짝 열려 있었다.


-----------------------------------------------------------------------------------------------


저는 이 장면을 읽고 대체 뒬롱 소령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중상을 입은 것은 사실인 모양인데, 당시 프랑스군은 금은보화도 다 버리고 가는 마당에 설령 살 수 있다고 해도 저런 중상자를 데리고 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 더 마음에 걸렸습니다.  예, 좀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가인 버나드 콘월은 작품 맨 끝 부분에 historical note를 적는 것으로 유명한데, 거기서 작가 자신도 이 사건 이후 뒬롱 소령의 생사 여부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작가 버나드 콘월입니다.)




그런데, 이 뒬롱 소령의 생사 여부를 구글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Sharpe's Havoc이 씌여지던 2002~2003년 당시엔 구글이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었나 보지요 ?  다음 사이트, 즉 유명한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 뒬롱 소령의 초상화가 1997년 5월 22일에 무려 $1,652,500, 우리 가격으로는 대략 18억원에 팔렸다는 상세 기록이 나와 있더군요.   1997년 가격으로 18억원이면, 지금 가격으로는 한 30억 되겠네요.


http://www.christies.com/LotFinder/lot_details.aspx?intObjectID=226156





(저 도전적인 표정 속에 뭔가 슬픔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




이 별로 손이 많이 간 것 같지 않은 단색 초상화가 무려 18억원에 팔린 것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대가인 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Ingres)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General Louis-Etienne Dulong de Rosnay의 초상입니다.  즉, 뒬롱 소령은 푸엔테 마세렐라에서 죽지 않았고, 나중에 장군까지 승진한 것입니다.  이 크리스티 경매 기록에는 앵그르가 1818년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1815년 나폴레옹 몰락 이후, 일감이 떨어져 돈이 궁했기 때문...)은 물론이고, 모델이었던 뒬롱 장군에 대해서도 상세히 씌여 있습니다.  그가 폰트 노바에서 영웅적인 활약으로 술트의 포르투갈 원정군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818년에 그려진 것으로, 흐릿한 로마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앵그르는 이런 나폴레옹 찬양화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나폴레옹 몰락 직후에는 금전 사정이 급격히 안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주로 이런저런 중산층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먹고 살았고, 뒬롱 장군의 초상도 그런 이유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1840년 앵그르가 사정이 좋아진 뒤에 그린 '오달리스크' 입니다.)




원래 뒬롱 드 로즈네는 1780년 프랑스 동부 시골인 로즈네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보다 11살 정도 어린 셈이지요.  그는 1798년 18살의 나이로 처음에는 외무성에 잠깐 몸을 담았다가, 1년 만인 1799년에 장교로 군에 입대합니다.  역시 당시에는 출세의 야망이 있는 건강한 젊은이에게는 군대가 최고의 직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수완이 좋았는지 1년만에 중위를 거쳐 대위까지 승진합니다.  그러나 소령 진급에는 다소 시간이 걸려, 1807년에야 승진을 합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809년, 즉 위 소설 속 배경이 되는 포르투(Porto) 작전 직후에는 대령으로 진급을 했더군요.  그러니까 술트가 자신과 제2군단을 구해낸 영웅을 잊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1800년부터 1807년 사이에는 여러가지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는데, 그 사이에 뒬롱의 활약은 별로 없었을까요 ?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도 참전했었고, 이때 큰 부상을 입어 평생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  저 초상화를 자세히 보시면, 오른팔이 슬링에 걸려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즉, 1809년 포르투갈에서 술트의 제2 군단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넘어 돌격할 때, 그는 이미 한 쪽 팔은 못쓰는 불구의 몸이었고, 검은 왼손으로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트가 그에게 결사대의 지휘를, 그것도 2번이나 맡긴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용감한 사나이였는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1810년에 이루어진 그의 건강진단서를 보면, 그의 몸에는 13군데의 큰 상처가 있었고, 모두 평생 큰 고통을 주는 상처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폰트 다 미사헬라에서 입은 것이겠네요.


뒬롱 소령이 폰트 다 미사헬라에서 입은 상처가 어디에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웹사이트에 따르면 그는 이때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또, 이때 쓰러진 그를 어떻게든 데리고 가기 위해 (다른 부상병들은 버리고 가더라도 낭만적인 프랑스인들이 아니더라도 이런 영웅을 그렇게 버리고 갈 리는 없지요) 사단장이 들 것을 만들어, 각 연대에서 가장 신체 조건이 좋은 척탄병들이 번갈아가며 그의 들 것을 운반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속했던 연대의 척탄병들이 우리의 영웅을 다른 연대에게 맡길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하고, 자기들끼리 떠매고 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또 그의 소속 연대가 32연대가 아니라 15연대라고 되어 있네요...)


1813년에, 그는 자작으로 봉해지면서 장군이 되었는데, 그때 그는 나폴레옹의 신참 근위대(Jeune Garde)에서 복무해줄 것을 요청받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된 사람들을 보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자신의 주변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병사나 장군이 있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사람을 신참 근위대 지휘관으로 삼은 것은, 이 고참 장교의 용기에 대한 대단한 칭송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쨌거나 뒬롱 장군은 1815년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 때, 나폴레옹을 따르지 않고 부르봉 왕가를 섬기는 것을 택했습니다.  부르봉 왕가는 이미 혼이 단단히 난 상태였기 때문에, 군 장교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안절부절하는 상태였던지라, 뒬롱 장군과 같은 저명한 장군의 비위를 맞추고자 뒬롱을 백작에 봉하고 루이 18세의 근위대 부지휘관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는 나중에 샤를 10세의 즉위식에도 참여했고, 생 루이(Saint Louis) 훈장도 받고, 왕실 인사(gentilhomme de la Chambre du Roi)로도 인정받을 정도로 출세를 거듭했습니다.





(샤를 10세의 즉위식 광경입니다.  뒬롱 장군을 찾아 BoA요.  저는 포기.)




그러나 역시 용감한 군인의 최후는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1828년, 그는 자살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아닌, 평생 그를 괴롭혔던 수만은 전투 부상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불과 48세의 나이였으니, 정말 용감한 늙은 군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Source :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https://fr.wikipedia.org/wiki/Louis_%C3%89tienne_Dulong_de_Rosnay

https://gw.geneanet.org/dorsner?lang=fr&p=louis+etienne&n=dulong+de+rosnay

http://thenapoleonicwargamer.blogspot.kr/2010/07/general-louis-etienne-dulong-de-rosnay.html

http://histoiresdenosfamilles.fr/cahiers_ba/cahier_2_chap3.html

https://en.wikipedia.org/wiki/Ponte_da_Mizarel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최홍락 2018.02.10 2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슷한 일이 100여년후 중국 사천성에서 반복되는 듯 하네요.ㅎ

    • nasica 2018.02.11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공내전 때 일인가요? 저는 그쪽은 잘 몰라서...

    • reinhardt100 2018.02.11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정교 전투 말씀이시군요.

      대장정 직전, '1-4차 초공작전의 실패'라는 실적을 명백히 무시한 오토 브라운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당시 막 제기되었던 스베친이나 트리안다필로프등의 소련식(마르크스적)군사학을 무분별하다 싶을 정도로 맹종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결국 5차 초공 작전에서 강서소비에트등 그나마 있던 기반을 싹 다 날려버리면서 유랑 무장집단화 되어버립니다. 준의회의에서 모택동 지도노선이 채택, 겨우 장국도와 하룡의 홍4방면군과의 합류를 결정하면서 와해 직전 분위기를 추스립니다. 합류 직전에 최대 도하 장애물이었던 대도하의 현수교인 노정교에서 지문과 똑같은(?) 전투가 벌어집니다.

      사실, 노정교 도하전이 대단히 중요했던 이유가 노정교를 도하하지 못하면 70년전 태평천국군 잔당과 똑같은 말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수신과 그 휘하 군단이 사천 정복에 나섰다가 청군의 반격 및 추격에 의해 노정교 근방에서 포위, 전멸된 전례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노정교를 우회하면 추가 이동거리가 2천km였는데 이건 그냥 홍1방면군 붕괴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모택동,주은래,주덕 등의 홍1방면군은 귀주성을 약탈한 후, 사천방면으로 북상, 군벌들 간의 분열로 틈이 많았던 사천 북부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장국도와 하룡의 홍4방면군과 합류하지만, 장국도에 의해 섬서성 대신 사천성 공략으로 전략적 목표가 바뀌면서 국민당군 및 군벌군과 정면대결을 하고 그대로 박살나면서 오히려 모택동 지도노선은 더 확고해집니다. 모택동은 오히려 자기 주장대로 하면서 신화적인 지도력을 가지면서 공산당에서 확고부동한 1인자로 등극하면서 대약진운동 이전까지는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 최홍락 2018.02.11 2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그 노정교 전투 맞습니다. 예전에 이 일화를 접했을때 다리 상판만 제거하고 다리 기본구조는 남겨놓은 것을 보고 군벌들이 군 기강이 헤이하고 상대인 홍군을 가볍게 여겨 홍군에 결정적인 생존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했는데 nasica님의 포르투칼 민병대가 자신의 생활을 위해 똑같이 행동했던 얘기를 보니 그들도 그만한 사정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P.s. 뒬롱 장군 이야기는 예전에 한번 다뤘던 얘기인데 그때 좋은 일화를 소개해주셨지요.

      "용감한 조종사도 있고, 늙은 조종사도 있다. 그러나 용감한 늙은 조종사라는 건 없다." 이 말은 나이가 들면 용기가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나치게 용감한 조종사는 젊은 나이에 일찍 죽기 마련이라는 뜻이더라는ᆢ

    • reinhardt100 2018.02.11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정교 상판만 떼 버린 이유가 이 다리 소유권 문제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18세기에 처음 가설할 때 워낙 돈을 여기저기 끌어다 써서 함부로 철거했다가는 재가설시 비용부담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노정교의 경우, 차마고도와의 연결까지 겹쳐서 대상들의 무역손실까지 겹치니 군벌들 입장에서는 상판철거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는거도 고려해야 합니다.

      흔히, 중원대전을 기준으로 전후 군벌들의 재정조달은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만주의 경우, 장작림과 휘하 군벌이 양찬 등의 곡물상들과 은행들로부터 대두수출의 안전 보장등과 연결해서 만철과 연계, 재정조달을 했습니다. 반면 동부의 연안 지역은 무역 통제 및 상해지역에서의 금융을 통해 조달하였고, 산서의 염석산은 무기제조 및 판매 등 군수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채권 발행 및 지폐발권 등으로 조달했습니다. 서북군벌의 경우에는 신강등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및 중앙아시아, 소련과의 육상 무역으로, 운남이나 양광지역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와의 육.해상 무역 등으로 어떻게든 재원을 마련했습니다. 문제는 사천인데, 사천이 유독 단일군벌로 통일이 되지 못한 이유가 각 군벌별로 확실한 재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천의 잠재력 치고는 굉장히 군벌이 빈약한(?) 편이었다는 게 대장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2. 석총 2018.02.11 1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그분

  3. 쇼펜하우어 2018.02.11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궁금한데 이런 역사적 지식을 어떻게 다 아시는거죠? 서양사 전공하셨나요? 어디서 이런 지식을 쌓으셨나요?

    • nasica 2018.02.11 2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끼적인 것은 지식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책 두어권과 인터넷질 좀 하면 다 나오는 내용인걸요.

    • 쇼펜하우어 2018.02.12 2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영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도 할 줄 아시나 보네요 참고 사이트 보니 대단하시네요

    • nasica 2018.02.13 0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딩 수준의 불어일 뿐이고요, 구글 번역기 씁니다. 불한은 못 봐줄 수준이지만 불영 번역은 꽤 쓸 만 하거든요.

  4. 이부프로펜 2018.02.16 0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때는 제대로된 진통제도 없었던 시절이니... 불과 100년전만해도 지금같은 의약품은 꿈도 못꿨을테니 현대에 태어난 걸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대사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폴레옹의 아들에게 바친 '로마 왕'(Roi de Rome)이라는 칭호는 단지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나폴레옹에게 공치사로서만 넘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미 로마는 나폴레옹의 손아귀에 넘어온 상태였습니다.  


로마 및 그 주변은 원래 세속 군주로서의 로마 교황이 가지는 교황국(the Papal States)에 속하는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 눈 앞에는 고양이는 커녕 생쥐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비오 7세(Pius VII)는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다 소용없었습니다.  이미 1809년 5월 17일, 나폴레옹은 빈에서 칙령을 내려 로마 교황의 세속 군주로서의 자격을 박탈한다고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당연히 비오 7세는 거부했지만, 뮈라가 파견한 프랑스군을 막을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교황에게는 영적인 지도자로서 휘두를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파문이었지요.



(비오 7세입니다.  비오 7세의 전임자인 비오 6세가 나폴레옹에게 시달리다 죽을 정도였으니, 비오 7세는 일평생 나폴레옹에게 시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폴레옹을 언제나 '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을 안 듣는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들'이라고 했다는군요.)




프랑스 점령군이 로마를 점거하고 교황의 지배권을 몰수한다고 발표한 6월 10일 밤, 교황은 나폴레옹과 그 추종자들을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문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건 과거 카노사의 굴욕을 이끌어낼 정도로 카톨릭 세계에서는 매우 무시무시한 처벌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11세기가 아니라 19세기였습니다.  비오 7세는 '이 파문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것이며 이 파문이 육신의 공격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라고 소심하게 덧붙였습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교황이 누굴 파문하건말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으니까요.  이미 프랑스 내에서의 카톨릭 교회에 대한 인사권은 모두 나폴레옹에게 넘어간 뒤였거든요.  레미제라블 제1장을 보면,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선물한 미리엘 주교가 우연히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고 그 짧은 만남에서 나폴레옹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주교로 승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미 정교협약(Concordat)에서 그렇게 협의가 되었기 떄문에 교황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카톨릭 신부를 임명하고 해임했던 것이지요.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 좀 더 정확하게는 조세핀과의 이혼은 나폴레옹과 로마 사이에 더 심각한 갈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카톨릭에서 이혼은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모세도 허락했던 이혼을 예수님께서는 '시대가 바뀌었다'라시며 명시적으로 금지하셨으니까요.  이혼 문제 때문에 영국이 카톨릭에서 떨어져나와 영국 국교회를 따로 세울 정도였지요.  나폴레옹은 권력자답게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했는데, 이미 로마에서 체포되어 사보나(Savona) 등지를 전전하며 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비오 7세는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식에는 무엄하게도 추기경들이 모두 불참하여 나폴레옹을 격분시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덕분에 비오 7세의 비서였던 콘살비(Consalvi) 추기경을 포함한 13명의 추기경들이 모두 파면되어 유럽 여기저기에서 빈곤 속의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콘살비 추기경입니다.  나폴레옹이 그를 파리로 산 채로 잡아오게 한 뒤 직접 만난 자리에서 '연금 3만 프랑을 줄 테니 자신에게 협력하라'고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랭스로 귀양을 갔다고 합니다.  그는 나폴레옹 폐위 때까지 빈곤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김에, 나폴레옹은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원래 교황의 소유였던 로마와 그 주변 영토는 이미 나폴레옹이 왕으로 있는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된 상태였습니다만, 1810년 2월에 아예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켜 버린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그렇게 한 이유는 바로 나폴레옹의 미래의 황태자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에게 로마 왕이라는 작위를 주려면 로마가 프랑스 영토인 것이 모양새가 좋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제국은 날로 넓어지고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나폴레옹에게는 골치거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트라팔가 해전 이후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Blocus Continental)을 통한 영국 말려죽이기에 들어갔었지요.  그런데 이게 그렇게 잘 돌아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영국도 대륙과의 통상이 약 50% 정도 줄어 고통을 겪고는 있었습니다만, 영국은 대신 제해권을 바탕으로 미국과 남아메리카에 대한 통상을 증가시켜 버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중립국 상선과 밀무역을 통해 대륙과 여전히 50%의 통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대륙봉쇄령 하에서도 영국의 연간 통상액은 무려 2천5백만 스털링 파운드(sterling pound)에 달했습니다.  현재 가치로 우리 돈 6조3천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습니다.  1809년 쇤브룬 조약에서 결정된 오스트리아의 전쟁 배상금이 8천5백만 굴덴, 현재 가치로 6300억원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당시 영국이 얼마나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굽시니스트 굽본좌가 justoon.co.kr에서 수요일에 연재 중인 웹툰 '한중일 이웃나라 흥망사'에서 다룬 영국 산업혁명 과정입니다.  출처  http://www.justoon.co.kr/content/home/09qh02k1cc6e/viewer/09rf2ms1bbd7 )




하지만 1810년 당시 가장 많은 밀무역을 하던 곳은 네덜란드와 독일 북부 한자 동맹 도시들이었습니다.  과거부터 대서양을 통한 무역이 활발했던 그 도시들의 번영은 전적으로 해외 무역에 의존한 바가 컸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와 영국 간의 무역 전쟁으로 인해 영국과는 물론이고 아메리카 대륙과의 통상마저 어렵게 되자, 이 상인들의 도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결코 정부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시들어 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 길을 찾지요.  이 도시들은 그 살 길로 밀무역을 택했고, 도시의 번영과 무관할 수 없는 공무원들은 그런 밀무역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친동생이자 네덜란드 왕이었던 루이 보나파르트조차도 펄펄 뛰는 형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번영을 위해 그런 밀무역을 어느 정도 용인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네덜란드와 독일 항구를 통해 들어온 영국 제품들은 유럽 전역에서 아주 잘 팔렸습니다.  워낙 값이 싸고 질이 좋았거든요.  심지어 프랑스군의 군복도 영국산 직물로 만들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요.  


뿐만 아니었습니다.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은 나폴레옹에게 유서 깊은 합스부르크라는 근사한 브랜드를 가져다 주었지만, 반대로 러시아의 분노도 갖다 주었습니다.  1810년부터 러시아는 대륙 봉쇄령에서 사실상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과의 교역이 끊겨 경제가 어려워지자, 짜르 알렉산드르로서도 더 이상 국내의 불만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던 상태였는데,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가 혼인 관계를 맺자 더 이상 강력한 항구 단속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얄미운 중립국, 특히 미국 국적의 상선들이 영국산 제품을 유럽으로 실어나르는 것도 얄미웠지만, 러시아의 항구로는 아예 영국 화물선들이 활발하게 화물을 실어날랐습니다.  


이런 통상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당장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의 산업 생산성은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던 영국의 공업력을 당해낼 수 없었으니까요.  그는 영국의 통상을 격멸하기 위해서, 당장 손에 닿는 영국부터 때려잡기로 합니다.  즉, 쥐노가 정복했다가 영국군이 탈환하여 주둔하고 있는 포르투갈을 재정복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한 노력은 이미 1809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그람 전투 준비에 한창이던 1809년 6월 중순,  나폴레옹은 술트와 네, 그리고 모르티에의 군단(corps)들을 하나로 합쳐 약 5~6만 병력의 하나의 군(armee)을 편성하도록 했습니다.  이 포르투갈 방면군의 목적은 단 하나, 영국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대군의 지휘관으로 그 3명의 군단장 중 가장 선임자였던 술트를 지명하며, 절대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움직이지 말고 반드시 한덩어리로 뭉쳐서 전진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내륙 교통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포르투갈 지형의 특성상 부대간의 통신을 유지할 방법은 그것 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여러 모로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먼저, 현지 조달에 의존하는 프랑스군의 특성상, 그리고 척박한 포르투갈-스페인 특성상 그런 대군이 한 곳에 집결하여 한꺼번에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그게 가능했는데, 그건 수천마리씩 동원 가능했던 막강한 노새 수송 부대 덕분이었습니다.  가난한 프랑스군은 그런 호사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또, 이베리아 반도는 영국산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가난하고 내륙 수송망이 한심한 수준이었던 이 지역은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영국산 제품을 대량으로 수입하기보다는, 오히려 와인이나 올리브유 정도를 수출하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의 명령은 완전히 잘못된 정보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모르고 있었으나, 무어 경의 영국군을 축출하고 정비를 마친 술트 군단은 이미 포르투갈 북부의 주요 항구도시인 오포르토(Oporto)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잔혹한 약탈로 쑥대밭을 만든 뒤였습니다.  거기까지였다면 좋았겠으나, 이야기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만의 영국군을 끌고 포르투갈로 돌아온 웰슬리(Arthur Wellesley) 장군이 방심하고 있던 오포르토의 술트를 기습, 프랑스군을 산산조각내버린 뒤였던 것입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Pope_Pius_VII

https://en.wikipedia.org/wiki/Continental_System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mip 2018.01.07 2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영국의 통상을 격멸하기 위해서, 당장 손에 닿는 영국부터 때려잡기로 합니다.

    이 부분 표현이 너무 맛깔나고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2. 카를대공 2018.01.08 0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는 영국의 통상을 격멸하기 위해서, 당장 손에 닿는 영국부터 때려잡기로 합니다

    이 부분 보고 과연 나폴레옹답다,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 그다운 판단이라 생각 했는데
    이거 패착이었군요;;

  3. reinhardt100 2018.01.08 0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운 글이 나왔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털링 파운드'라는 것은 이 당시에는 '영란은행이 직접 발행한 파운드'에 한정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스코틀랜드나 웨일스, 아일랜드가 모두 자체 파운드화를 발행하고 있었으니까요. 즉, 이 당시 집계된 무역량은 '스털링 파운드로 합계된 가공된 수치'라는 것입니다. 특히, 1800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합병은 사실 파운드화 가치 유지를 위한 정화준비를 마음껏 쓰려고 했을 정도로 이 당시 영국은 급박한 상황이긴 했습니다.

    미국과 남미, 인도등 아시아와의 통상 확대로 영국이 대륙봉쇄령에 맞서긴 했지만, 각 지역에 대해 영국이 한 짓은 급하다고 해도 욕먹기 딱 좋은 짓이었죠. 미국을 상대로는 '영란은행이 발행한 것이 아닌 아일랜드나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 발행한 파운드화 지폐나 주면서 무역을 해서 대금 지불 자체에 대한 의지가 있기나 한 것인지?'하는 태도로 일관해서 뉴잉글랜드 지역의 여론을 한껏 격앙시켰습니다. 남미의 에스파냐 혹은 포르투칼 식민지에 대해서는 아예 대놓고 영국산 공업제품을 있는대로 뿌려댔고, 게다가 식민지 상층부에 대하여 독립해서 우리와 직접 교역하면 너네가 본국 눈치 볼거 없이 마음껏 하층민들과 노예들을 쥐어짤 수 있다고 충동질하는 '동맹국들 등 뒤에 총질'하기도 했습니다.

    인도와 동남아, 일본에서는 날강도 수준이었죠. 인도에서 동인도회사가 정부에서 대부를 받는 상황에서도 무리해가면서까지 인도의 토후국, 네덜란드령 자바 및 말레이, 몰루카군도 정벌에 열을 올린 이유가 '각 토후국이 저장해놓은 정화준비용 지금,지은을 확보, 본국 정부에 대하여 우리에게 대부를 해주지 않으면 확보한 정화를 본국에 운송해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 위함도 있었고 덤으로 노스법안이 발안된 1784년도에 이미 논의가 시작된 대중,대인도무역 독점권도 유지하려는 발악적 성격도 있었습니다. 본국 정부도 동인도회사의 이 따위 억지(?)에 대해 비위를 맞추어주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대놓고 네덜란드 데지마를 공격하려했다가 막부에 찍힌 적도 있으니까요.

  4. 유애경 2018.01.08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을 안듣는 아들이지만 그래도 아들이다'
    「종교인」으로서의 무한한 자비심과 사랑 이었을까요? 아님 「종교인」으로서의 대외적인 명분이나 허세같은 거였을까요?(웃음)

    재밌게 보고 갑니다.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5. 수비니우스 2018.01.08 12: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양질의 글을 블로그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D
    " 영국군은 그게 가능했는데, 그건 수천마리씩 동원 가능했던 막강한 노새 수송 부대 덕분이었습니다. " ...역시 전쟁은 돈이죠 ㄷㄷㄷ

  6. unik519 2018.01.09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에 비하면 그 프랑스조차 빈곤한 군대를 가진 나라가 되어버리니 역시 돈만으로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없지만, 돈 없이는 강한 군대를 만들기가 또한 힘들군요ㅠ
    늘 좋은 글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7. sarada 2018.01.09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본문내용과 직접 상관은 없은데 나폴레옹의 문양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질문 드려도 될까요?

    나폴레옹 황제의 가문 문장은 꿀벌인데요. 보통 가문, 왕가의 상징, 문양은 사자, 호랑이, 독수리 같은 맹수를 쓰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왜 꿀벌을 자신의 상징 문양으로 삼았던 건가요? 꿀벌이 존경, 위험, 힘 같은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여서 그게 좀 의아해서요. 구글에서 "Napoleon bee" 로 검색해봐도 딱히 이유는 잘 못 찾겠네요.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꿀벌과 무슨 연관이 있거나(예를 들어서 나폴레옹 집안이 양봉을 했다던지..) 아니면 당시에는 꿀벌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뭔가 달랐던 건가요?

    궁금한데 검색을 해봐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나시카님에게 물어봐 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nasica 2018.01.09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꿀벌은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문장으로서 풍요와 근면을 상징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조의 문장인 백합보다 더 오래되고 더 뜻깊은 것을 찾다가 학자들의 권고에 따라 꿀벌을 택했답니다.

    • sarada 2018.01.10 1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감사합니다. 궁금했던 내용인데 알게 되서 너무 즐겁네요.

      저는 혼자 머리속으로 소년 나폴레옹이 코르시카 섬에서 양봉을 하면서 "내가 나중에 황제가 되면 이 꿀벌을 내 상징으로 삼아야지" 라고 다짐하는 훈훈한 광경을 상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재미있는 글 부탁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8. 넬슨 2018.02.20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당시 영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었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