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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 전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2.04 이발사 vs. 원수 - 포르투(Porto) 전투 3편 (8)
  2. 2018.01.27 신문과 돈 - 포르투(Porto) 전투 2편 (13)

웰슬리의 영국군이 도우루 강 남안에서 강을 건널 방법을 못 찾고 당황하는 동안, 술트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5월 10일 도우루 강 남쪽에 있는 그리조(Grijó)라는 작은 마을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트는 비교적 여유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요 ?


그는 나름대로 안전조치를 취해놓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가 위치한 도우루 강 하구는 꽤 넓고 깊어서 사람이나 말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술트는 도우루 강 인근의 모든 바지선과 보트, 조각배들을 모조리 압류하여 북쪽 강변에 끌어다 놓은 상태였습니다.  영국군에게 날개 혹은 지느러미가 없는 이상, 도우루 강을 건너 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만 술트는 영국 해군을 걱정했습니다.  제해권은 영국에게 있으니, 당장 30km 밖 수평선 너머에 영국 프리깃함들이 호위하는 수송선들이 잔뜩 대기 중일 수도 있었습니다.  술트는 웰슬리가 선박을 이용하여 포르투 북쪽 해안 어딘가에 기습 상륙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트는 도우루 강 하구의 산토 조아오 다 포스(S. Joao da Foz) 요새에 수비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습니다.  술트는 전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며, 따라서 이젠 후퇴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정확히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짐을 싸고 있었고 이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강남에 영국군이 나타난 5월 10일 다음날인 5월 11일, 술트는 이미 짐마차와 포병대를 메르메(Julien Augustin Joseph Mermet) 장군의 1개 사단과 함께 스페인으로 후퇴시켰습니다.




(메르메 장군입니다. 원래 귀족의 아들이었고, 오슈(Hoche) 장군 밑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는 네 원수가 나폴레옹 편에 서서 군을 지휘하라고 종용했으나 그 명령을 거부하고 부르봉 왕가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강 남안에 2만이 넘는 영국군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배들을 모조리 북안에 끌어놓았다는 것만 믿고 강변에 경계 병력을 전혀 세워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일인데, 술트처럼 수많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이 이런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주민들이 프랑스군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지요.  어쩌면 그는 일부 영국군이 건너온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보트로 수십 명씩 넘어올 수 밖에 없으므로, 프랑스군이 뒤늦게 그를 알게 되더라도 신속하게 전개하여 아직 수백 명 수준일 영국군을 잽싸게 포위하고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정작 영국군은 강변에 도착한지 하루가 지나도록 정말 아무 것도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술트의 생각대로 영국군에겐 강을 건널 방법이 전혀 없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100%라는 것은 없습니다.  5월 12일 아침,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강변을 수색 중이던 워터스(John Waters) 대령에게 웬 포르투갈 이발사 하나가 다가 왔습니다.  워터스 대령은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해보니 그 이발사는 포르토 시내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프랑스군의 침공과 약탈을 피해 피난 나왔다가, 강 남쪽에 영국군이 왔다는 것을 알고 2~3인용 낚시배 하나를 저어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낚시배 하나로는 병력을 실어나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발사에겐 결정적인 소식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지 않는 강 북안에 와인 수송용 바지(barge)선 몇 척이 있는 곳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발사와 함께 워터스 대령은 그 조각배를 타고 강 북안으로 넘어갔고 실제로 바지선들과 그걸 지키고 있던 현지 주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워터스 대령과 이발사는 마침 현장에 있던 신부의 도움을 받아 그 주민들을 설득, 그 바지선들을 끌고 남안으로 끌고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을 실어날랐을 도우루 강의 와인 수송용 바지선입니다.  저 정도면 한번에 30~40명은 실어나를 수 있겠네요.  바지(barge)선이란 강이나 호수 등 파도가 잔잔한 곳에서 사용되는 평저선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돛대나 엔진이 없어 자력으로 항행하지 못하고 다른 배에게 끌려다니는 배를 말하지만 자력 항해를 하는 평저선도 바지선이라고 부릅니다.)




때는 해가 훤히 뜬 대낮이었습니다.  이들이 약 45m 정도 되는 도우루 강을 가로질러 바지선들을 끌고 가는 모습은 양쪽 강변에서 훤히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배들이 남쪽 강변에 모인 영국군들을 잔뜩 싣고 북안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강북의 프랑스군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영국군 1개 중대가 재빨리 강을 건넜고 강변에 있던 수도원 건물을 점령하고는 돌로 된 벽 뒤와 지붕, 창문 등에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프랑스군도 영국군이 도강 중이라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달려왔을 때는 이미 1개 대대 전체가 수도원에 위치를 잡은 상태였습니다.


아침 11시 30분, 헐레벌떡 달려온 프랑스군의 지휘관은 막시밀리앙 포이(Maximilien Foy)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술트에게 전갈을 보낸 뒤 급한 대로 3개 대대의 보병을 이끌고 달려왔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3대1의 수적 우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튼튼한 돌담이 둘러쳐진 수도원은 막강한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이 비록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미숙한 군대라고는 하지만, 막강 프랑스군에 비해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영국군은 기동성이나 전술적 유연성, 병사들의 자율성이나 인내심, 동기 부여 등 모든 면에서 있어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비해 떨어지는 군대였습니다.  보통 직업 군인인 모병제 군대가 강제로 끌려온 병사들로 이루어진 징병제 군대보다 전투력이 우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그 지휘관인 웰슬리조차 '술 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녀석들'(the scum of the earth, enlisted for drink)이라고 부를 정도로 형편없는 자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민간 사회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입대한 빈민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군에 잉글랜드 출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잉글랜드인들과 그 왕 조지 3세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아일랜드인들이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1/3은 독일인들과 스코틀랜드인으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1/3 정도만 잉글랜드인이었으나 그마저도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사회 최하층민들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사회 지배 계급이었던 장교들은 자기 부대의 병사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당근으로는 럼주를, 채찍으로는 사람 등가죽을 홀랑 벗겨놓는 무지막지한 진짜 채찍질을 휘둘러 병사들을 통제했습니다.  그런 군대에게 다양한 전술을 이해시키고 자율성 및 전술적 유연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비해 우월한 것이 있었습니다.  돈이 많다보니 전체 유럽 군대 중에서 가장 많은 실탄 사격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탄약 뿐만 아니라 머스켓 소총의 부싯돌(flint)을 아끼기 위해 사격 훈련을 할 때 실탄은 커녕 공이치기에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끼워넣고 장탄 및 격발 훈련을 하는 것이 예삿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어지간한 2선 부대들도 실탄 사격 훈련만큼은 상당히 많이 할 수 있었고, 장교들도 병사들에게 다른 것은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그저 빨리 장전해서 빨리 쏘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어차피 저 신뢰할 수 없는 병사들에게 명중률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군 병사들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전투가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실제로 포이 장군의 프랑스군이 수도원을 향해 돌격을 해보니, 빗발처럼 날아드는 영국군 머스켓 소총 세례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포이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많은 사상자만 남기고 프랑스군은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여기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국군은 계속 바지선을 통해 수십 명씩 증원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잘못 하면 스페인으로의 후퇴길이 막힐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3개 대대를 더 끌고 와서 다시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때 즈음 해서는 영국군도 2개 대대가 더 넘어와 3개 대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번에도 무의미한 희생만 낸 채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꽃중년이 막시밀리앙 포이 장군입니다.  그는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사관학교 출신의 몇 안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쥐노의 제1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고, 웰슬리와 싸운 비메이로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번 포르투 전투에서도 웰슬리와 싸워 또 부상을 입었지요.  나중에 술트의 제3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는데, 웰링턴과 싸운 부사코 전투에서 또 부상을 입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 편에 서서 웰링턴과 싸운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거기서도 부상을 당했고, 그게 평생 입은 15회의 부상 중 마지막 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젠 술트도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바삐 움직였습니다.  그는 강변 다른 곳에 모아놓은 바지선들을 지키기 위해 배치했던 부대까지 불러 들여 황급히 영국군을 상대하게 했는데. 이것이 더 나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영국군이 쳐들어온 것을 알게 된 포르투 주민들이, 프랑스군이 물러가자마자 바지선들을 몰고 강남으로 넘어와 영국군을 실어나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술트는 정신을 차렸는지 비로소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과감히 결행합니다.  수도원에 쳐박혀 시시각각 증원되는 영국군을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북동쪽 스페인 방향으로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영국군은 총 2만에 가까운 병력으로서 시시각각 증원되고 있는데, 이미 어제부터 철수를 시작했던 프랑스군은 포르투 시내에 고작 1만2천 정도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미련을 두지 않고 철수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포르투 전투 상황도입니다.  저 멀리 동쪽에 머레이 장군의 사단 약 3천이 아빈타스 쪽에서 강을 건넌 것을 보실 수 있는데, 머레이 장군은 자신의 병력만으로는 후퇴하는 술트의 군단을 막아서기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는지 술트의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웰슬리도 술트 못지 않은 명석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술트가 택할 길은 후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그의 목표를 술트를 단순히 포르투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술트 군단의 격멸로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웰슬리는 미리 약 1만 규모의 영국군과 포르투갈군을 베레스포드(William Carr Beresford, 1st Viscount Beresford) 장군 지휘 하에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훨씬 더 동쪽의 도우루 강 상류로 보내 거기서 도하한 뒤 프랑스군의 퇴로를 끊도록 해놓았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도 추격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확실히 프랑스군에 비해 너무나 느렸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는 결국 술트의 군단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술트는 이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600명의 사상자와 무려 1500명의 포로를 내며 도망치듯 후퇴했습니다.  영국군의 피해는 고작 100여명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이렇게 체면이고 뭐고 아랑곳 하지 않고 서둘러 후퇴한 덕분에 프랑스군은 베레스포드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봉쇄에 걸리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 산악지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신 술트는 58문의 대포 전체와 군용 금고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부상자들도 포기해야 했지요.  산악지대로 들어갈 때는 짐마차는 모두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이때의 사건을 소재로 한 버나드 콘월(Bernard Cornwell)의 소설 Sharpe's Havoc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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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들에게는 배낭과 잡낭에서 식량과 탄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어떤 장교들은 검열을 실시하여 이번 원정에서 병사들이 얻은 약탈물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부대가 산 위로 올라가는 길 가에 은제 포크와 나이프, 촛대, 접시 등이 버려졌다.  대포와 마차, 탄약 수송차 등을 끌던 말과 황소, 노새는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두 사살했다.  짐승들은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걸을 수 없는 부상자들은 짐마차 속에 그대로 남겨졌는데, 곧 그들을 찾아와 복수를 시도할 포르투갈 민간인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 최소한의 시도는 해볼 수 있도록 머스켓 소총도 주어졌다.  술트는 군자금 금고, 즉 은화가 가득한 11개의 커다란 통을 길 가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병사들이 한줌씩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여자들은 치마를 펼쳐 한웅큼 은화를 퍼담고는 병사들과 함께 걸어갔다.  용기병과 경기병, 엽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걸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황량한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고, 그 뒤로는 와인과 포트 와인, 교회에서 약탈한 황금 십자가와 북부 포르투갈의 대저택에서 훔친 오래된 그림들이 실린 짐마차들이 버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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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술트와 프랑스군의 고생과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점령지역인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험난한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했는데, 곳곳에서 험한 협곡과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허술한 다리들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산악 지대는 포르투갈 민병대인 오르데난사(Ordenança)들이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까마득한 계곡 위에 걸린 좁고 허술한 다리 너머를 한줌의 포르투갈 민병대가 지키고 있다면 아무리 프랑스군이 대군이라고 해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의 발이 묶인 사이, 느리긴 해도 나름대로 서둘러 웰슬리의 영국군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술트와 그의 군단은 결국 이렇게 포르투갈 산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술트 군단 전체가 전멸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용감무쌍한 한 남자 덕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1808년 9월, 비메이로(Vimeiro) 전투에서 쥐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도 어이없는 신트라(Sintra) 협상으로 쥐노와 그의 군단을 안전하게 프랑스로 호송해보낸 사건 덕분에 영국으로 소환되었던 영국군 지휘관들 중 하나였던 웰슬리는, 그 협상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지휘권을 부여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웰슬리는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오기 위해 여기저기에 줄을 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영국은 돈 들어가는 싸움질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과 영국 사이에 바다가 있고 로열 네이비가 그 위에 떠 있는 이상 당장 침공 받을 염려가 없는데, 구태여 위험한 유럽 대륙으로 기어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무어 경이 이끄는 원정군이 한번 들어갔다가 개박살이 나서 거지꼴로 돌아온 마당에, 실패를 되풀이할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두가지 이유 때문에 영국은 결국 포르투갈에 원정군을 추가 파견하기로 합니다.  신문과 돈이었습니다.  




(영국군 총사령관인 요크 공작 프레더릭 왕자입니다.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연전연패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지휘관을 실력이 아니라 세습 신분에 따라 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육군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육군과는 달리 매관매직의 전통이 없었습니다.)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은 당시 국왕 조지 3세(George III)의 둘째 아들이자 섭정공의 동생이었던 요크 공작 프레더릭(Prince Frederick, Duke of York and Albany)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고, 둘째 이하는 군에 입대한다는 전통을 따라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령 계급으로 군에 입대한 그는 하노버의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2년 만에 소장, 다시 2년 만에 중장 계급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전체 영국군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업적은 별로 없었던 그는 그래도 이런저런 개혁안을 채택하면서 영국 육군의 발전에 이바지하는가 싶었는데, 그만 대형 사고에 휘말립니다.  그의 정부였던 평민 출신 미녀 메어리 앤 클라크(Mary Anne Clarke)가 그의 비호 아래 영국 육군 장교직을 팔아먹었다는 스캔달이 1809년 3월 15일에 터진 것입니다.  




(메어리 앤 클라크는 18살의 나이에 클라크라는 사람과 결혼했으나, 남편 사업이 잘 안되어 파산하자 곧장 이혼, 이후 사교계에 뛰어들어 그 미모와 교양을 바탕으로 요크 공작의 눈에 든 여자였습니다.  스캔달이 터지던 시점의 나이는 33세였습니다.)




원래 영국 육군 장교직은 공식적으로도 돈을 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매관매직 제도(purchase system)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건 일종의 사교 클럽 회원권처럼 장교단끼리 사고 팔아 비슷한 계급의 신사들만 장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필터링 장치일 뿐, 특정 개인의 주머니를 채우고자 운영되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요크 공작이 정부인 클라크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제공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자, 대신 그런 매관매직 관련한 뇌물을 받을 수 있도록 눈감아 주었다는 비난이 영국 언론과 시민 사회를 들끓게 했습니다.  결국 이 스캔달이 터져나온 뒤 10여 일만에 요크 공작은 총사령관직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비난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요크 공작 개인 차원이 문제가 아니라 왕정, 그리고 더 나아가 귀족 위주의 영국 지배 구조를 뒤흔드는 스캔달로 번질 태세였습니다.  




(그래도 영국이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 비해 훨씬 근대화된 나라였다는 점은 이 만화를 통해서도 나옵니다.  언론의 자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만화는 Isaac Cruikshank라는 만화가의 작품이고, 여기서 메어리 클라크는 현대판 키르케로 나와 요크 공작의 망토를 입고 사람들에게 행운과 승진 등을 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돈 문제도 있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막 제5차 대불동맹전쟁을 터뜨리기 직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영국에게 몸빵으로 도와줄 것이 아니라면 전쟁 자금으로 5백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1조2천7백억원)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전쟁을 패배로 마무리한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에게 바쳐야 했던 전쟁 배상금이 8천5백만 굴덴(현재 가치로 약 6300억원)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영국이 돈이 많다고 해도 이건 너무 과중한 액수였습니다.  오스트리아를 부추겨 나폴레옹에게 싸움을 걸려면 5백만 파운드를 내던가, 아니면 아일랜드인들과 스코틀랜드인, 그리고 하노버 독일인들로 구성된 영국 육군을 동원하여 몸빵을 해줘야 했습니다.




(캐슬레이 자작 로버트 스튜어트입니다.  그는 메테르니히와 함께 비엔나 체제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신문과 돈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전쟁성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 and the Colonies) 캐슬레이 경(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에게 작전 계획서 하나가 날아듭니다.  작성자는 아서 웰슬리였고, 그 내용을 한줄 요약하면 포르투갈의 산악 지대를 방어선으로 삼으면 프랑스군으로부터 리스본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서에서 캐슬레이 경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1년간의 예상 작전 비용이었습니다.  1백만 파운드(약 2천5백억원)라고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캐슬레이 경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습니다.  무려 4백만 파운드를 절약하면서 요크 공작 스캔달로 달아오른 언론의 관심을 다시 나라 밖으로 돌릴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곧 포르투갈 원정대가 결정되었고, 그 총지휘관으로는 아서 웰슬리가 지명되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그의 형인 웰슬리 후작(Richard Colley Wellesley)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큰 역할을 했지요.  흔히 영국 해군에 비해 영국 육군이 너무나 무능한 모습을 보였던 이유 중 하나로 뽑히는 것이 바로 영국 육군의 매관매직 제도입니다만, 가끔 예외가 생기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일입니다.  귀족 위주로 돌아가느라 형편없었던 영국 육군에 생긴 예외는 바로 아서 웰슬리였습니다.




(리스본에서 포르투까지의 거리는 페롤에서 포르투까지의 거리와 거의 똑같습니다.)




확실히 웰슬리는 기존의 영국군 지휘관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4월 22일 배에서 내리자마자 진격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어디로요 ?  당연히 포르투였지요.  그가 포르투가 면한 도우루(Douro)  강 남안에 나타난 것이 5월 10일이니 불과 18일만에 무려 300km가 넘는 거리를 진격한 것입니다.  불과 3일 간의 준비하고 하루 평균 20km씩 15일을 행군한 셈인데, 실제로는 준비 기간이 더 길었고 행군은 더 빨랐습니다.  마지막 단계 120km는 불과 4일만에 주파했으니까요.  이건 프랑스군 기준으로 볼 때도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과는 달리 술트의 프랑스군은 몹시 지치고 재정비가 절실한 상태였다고는 해도, 비슷한 거리인 페롤에서 포르투로의 진격에, 술트는 무려 2달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영국군스럽지 않은 쾌속 행군을 마친 웰슬리를 기다리는 것은 건곤일척의 싸움을 위해 포진한 술트 원수, 영국식으로 킹 니콜라스(King Nicolas)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넘실넘실 깊고 푸른 물이 흐르는 드넓은 도우루 강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우루 강 남안에는 정말 신기하게도 조각배는 커녕 나무통 하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웰슬리와 그의 영국군은 여기서 그만 어이없이 발이 묶이는 듯 했습니다.  영국군에게 동쪽에서 귀인이 찾아온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Source :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virtual/c_Oporto.html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_Frederick,_Duke_of_York_and_Albany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Stewart,_Viscount_Castlereagh

https://en.wikipedia.org/wiki/Mary_Anne_Clar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