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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4

쿨름 전투 (7) - 방담과 짜르 쿨름 전투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방담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요?  방담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최후까지 전방의 러시아군을 막아내던 포병대를 지휘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병사들을 지휘하느라 결국 프로이센군을 뚫고 포위망을 빠져나간 1만여 명의 무리 속에는 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코삭 기병들에게 사로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프랑스측의 기록에 따르면 짜르 앞에 끌려간 그는 알렉산드르로부터 약탈을 일삼는 불한당이라는 꾸짖음을 듣자, '난 최소한 지 애비를 죽인 자식이라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라고 말대꾸를 했다고 합니다.(쿨름 전투에서 코삭 기병들에게 사로잡히는 방담의 모습입니다.) 이건 거친 성격 탓에 술트와 제롬 보나파르트 등 자신의 상관들과 끊임없이 알력을 빚던 방담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 그.. 2024. 6. 17.
"문송합니다" - 낙오된 자들의 운명 메이야르(Jean Pierre Maillard)라는 스위스 제2 연대의 하사관은 10월 18일 폴로츠크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어느 수도원에 차려진 임시 병원에서 다른 수백 명의 부상병들과 함께 수용되었습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던 그랑다르메는 메이야르를 포함한 그 수백의 부상병들에게 의료 처치는 커녕 물과 빵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월 20일 프랑스군이 물러나고 러시아군이 그 수도원을 접수했을 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상병들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는 대신 누워있는 부상병들을 약탈하기 바빴습니다. 러시아군은 가진 것이 별로 없던 메이야르로부터도 군복 소매에 붙은 하사관 계급장을 뜯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러시아군들은 양반이었습니다. 며칠 뒤 .. 2021. 12. 27.
연애 편지와 엄마 - 포로들의 운명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가 이렇게 식량 부족과 추위로 부서져 내리면서 당연히 많은 낙오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의 글을 보시면서 낙오병이라는 단어는 많이 보셨지만 탈영병이라는 표현이 별로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랑다르메 중에서도 지배층에 속하는 프랑스군은 그렇다치고, 끌려온 것이나 다름 없는 독일군이나 네덜란드군, 이탈리아군 중에는 쫄쫄 굶다 못해 그냥 탈영해서 스스로 러시아군으로 넘어간 병사들이 많지 않았을까요 ?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러시아군이었고, 이렇게 포로가 된 이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아직 제네바 조약 같은 포로에 대한 국제 협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때였습니다만, 대신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귀족 내지는 .. 2021. 7. 26.
나폴레옹 시대의 포로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포로가 (당연히) 많이 생겼습니다. 동양적, 특히 일본식 사고 방식에서는 싸움에 졌는데 죽지 않고 생포되어 목숨을 구하는 것이 굉장히 치욕적인 일로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럽에서는 싸우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항복하는 것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항복이라는 것은 그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적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항복에는 조건부 항복과 무조건 항복이 있었는데, 일단의 부대가 전장에서, 혹은 지키던 도시나 마을에서 더 이상 싸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될 경우 적과 조건부 항복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가장 유리한 항복 조건이란 지키고 있던 장소를 적에게 넘겨주는 대신, 항복하는 부대가 .. 2018.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