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군 2개 사단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것은 전선 중앙부에서처럼 영국군 자신들의 경험 부족과 무지였습니다.  페인(Fane)과 앤슨(Anson)의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군을 위협하여 방진을 이루게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협박만 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렇게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을 메데진 언덕 위의 영국군 포병대가 계속 갉아먹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총검을 촘촘히 내밀고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영국군 기병대는 겁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돌격은 기병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영국군은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 기병대를 격파한 것은 프랑스군의 총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닥치고 돌격'을 감행하던 중, 선두를 달리던 영국군 기병대 제1파가 비명과 함께 한꺼번에 증발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들과 프랑스군 사이에 깊이 3m, 폭 4.5m의 깊게 움푹 파인 도랑 같은 지형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쪽에서는 교묘하게 눈에 잘 보이지 않던 이 도랑 속에 놀랍게도 영국군 기병대 제1파의 절반 정도가 빠져버렸고, 많은 병사들과 말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 기병대의 멍청함을 비웃을 처지가 될까요 ?  위 그림은 1815년 워털루에서 프랑스군 기병대가 돌격하다 똑같은 운명에 처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만, 빅토르 위고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에서도 저 장면을 세밀히 묘사했습니다.  덕분에 이런 그림도 그려졌지요.)




이건 정말 코미디 같기도 하고 비극 같기도 한 어이없는 사고였습니다.  제대로 된 지휘관의 기본 중 기본이 지형 숙지였는데, 메데진 언덕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점하고도 그런 도랑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영국군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 지휘부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사고로 큰 낭패를 당했을 경우, 아무리 창피하더라도 물러서서 재정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페인과 앤슨은 굴하지 않고 그대로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제대로 된 공격을 했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컸는데, 그렇게 엉망진창인 상태로 보병 방진을 공격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습니다.  영국군 기병대는 거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보기 흉하게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군이 이 틈을 타 진격을 재개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메데진 언덕에는 영국군과 스페인군 보병 사단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영국제 포탄이 계속 날아왔습니다.  게다가 이때 즈음엔 다른 방면에서의 프랑스군도 다 패퇴한 상태라는 소식이 전해졌으므로, 루팽과 빌라트도 영국군 기병대가 박살이 난 틈을 타 재빨리 후퇴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탈라베라 전투의 실질적인 마무리였습니다.



(영국 화가인 William Heath가 그린 탈라베라 전투입니다.  진 쪽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습니다.)




전투 과정은 길고 잡다했습니다만,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영국군이 스페인군과 연합하여 스페인 내부로의 침공길에 나섰는데, 그를 막으러 온 프랑스군과 탈라베라에서 마주치자 정작 공격한 측은 프랑스군이었고 영국-스페인군은 방어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공격이 좌절된 것이 결과였지요.  공격했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곧 패배일까요 ?


빅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세 번 공격하여 다 실패했지만, 한 번 더 들이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도 컸으나 영국군도 꽤 큰 피해를 입었고, 조제프와 주르당의 약 5000 규모의 예비대는 아직 총 한 방 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제프와 주르당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세 번이나 두드렸는데 안 열리는 문은 네 번 두드린다고 열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남의 집 문 따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워두고 온 마드리드의 본진이 베네가스에게 털리게 생긴 상황이었으니, 마음이 조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조제프는 주르당의 조언대로 철수를 명령했고,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도 그 명령에 복종하여 28일 밤부터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탈라베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 노릇을 하던 빅토르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찌나 분통이 터졌는지 아무 대책없이 철수를 거부하고 29일 새벽 3시까지 그 자리를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전체 프랑스군의 2/3가 다 철수하는데 그의 제1 군단 혼자 남아있다가는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조제프와 주르당에 대한 욕설을 지껄이면서 그도 결국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 뒤에도 조제프와 주르당만 없었다면 프랑스군이 4번째 공격에서 마침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당시 전투에서의 승리란 누가 더 많은 적을 죽였는가가 아니라 누가 물러났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거든요.  영국군은 약 6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7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습니다.  전체 병력 대비 사상자 비율로 보면 영국군 측이 더 높은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간 의아한 것은 별로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스페인군도 1천2백이나 되는 사상자를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쿠에스타는 영국군이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스페인군에는 사상자가 거의 없다고 하면 스페인군의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상자를 많이 낸 것은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다는 증거로서 당시 지휘관에게 일종의 영광처럼 여겨졌습니다.  물론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 전투의 승자는 분명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건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전투를 치르는 것은 그저 지휘관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어 도시를 탈환한다든지 적의 항복을 받아낸다든지 하는 승리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탈라베라 전투는 쓰라린 희생만 있었을 뿐,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열매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드리드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과 합류하는 것이 정상적인 작전 흐름이었을텐데, 영국군은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  영국군이거든요 !  산더미 같은 염장쇠고기와 럼주가 함께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런 고기통 술통은 옮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웰슬리가 이렇게 보급품 문제로 꾸물거린 것이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웰슬리는 이때까지도 북쪽에서 술트 원수가 약 3만명 규모로 충원된 제2 군단을 끌고 자신의 후방을 끊기 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3일 뒤인 8월 1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웰슬리는 처음에 술트의 제2 군단 규모가 약 1만5천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추가로 전달된 정보에 의해 병력 규모가 3만에 달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그의 결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는 마드리드로의 진격을 재빨리 포기하고 타호 강을 따라 포르투갈 국경 너머로 후퇴해버렸습니다.  웰슬리에게는 포르투갈로부터의 보급선이 차단될 경우 발생할 문제가 극복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웰슬리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예비 탄약과 보급 물자 대부분은 물론, 탈라베라 전투에서 노획했던 십여 문의 프랑스군 대포도 모두 버리고 허둥지둥 퇴각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었다면 이렇게 빅토르-세바스티아니 군단들에 이어 술트의 군단을 각개격파할 기회가 생긴 것에 매우 기뻐하며 그의 군을 오히려 북쪽으로 진격시켜 술트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탈라베라에서 철수한 프랑스군은 원래의 철수 목적을 매우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은 빈정이 상할대로 상한 빅토르에게 뒤에 남아 웰슬리와 쿠에스타의 연합군을 감시하는 한직을 주고는,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과 함께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을 상대하러 달려갔습니다.  이들은 8월 11일, 마침내 톨레도(Toledo) 인근 알모나시드(Almonacid) 전투에서 베네가스와 만나 매우 쉽게 라 만차 군을 격파하고, 마드리드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입니다.  이 분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역할을 더 많이 했고, 사실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알모나시드 전투에서의 승리가 이 양반의 가장 큰 승리일 것입니다.  이 분은 안달루시아 침공 이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사령부를 차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혹자는 그가 알함브라 궁전의 일부를 파괴한 것을 비난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황폐화시켜놓은 알함브라를 다시 복원시킨 것이 그였다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탈라베라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2만의 영국군이 무려 4만이 넘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거의 단독으로 버텨내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후퇴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지엽적이고 전술적인 승리일 뿐, 전략적으로는 프랑스군이 모든 목표를 달성한 프랑스 측의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영국군의 스페인 침공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처럼 분산된 스페인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11월 마드리드 인근 오카냐(Ocana)의 전투에서 술트가 4만5천 규모의 스페인군을 완파한 것이 매우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이 전투 결과 스페인 중부를 완전히 장악한 프랑스군은 바일렌 전투 이후 감히 넘보지 못하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침공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웰슬리의 영국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웰슬리는 스페인 측이 '오기만 하면 식량까지 모두 공급할테니 일단 오시라'고 여러차례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 다음해인 1810년 2월말까지도 포르투갈 국경을 절대 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탈라베라에서 보니 스페인군은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더라, 그들의 협력을 기대하고 스페인으로 진격했다가는 큰일 나겠더라'는 입장을 고수했지요.  그게 꼭 틀린 평가는 아닐지 몰라도, 영국군이 스페인에게 있어 그다지 좋은 연합군이 아니었던 점은 확실했습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탈라베라 전투는 웰슬리 본인에게는 무척 뜻깊은 승리였습니다.  어쨌거나 마침내 스페인에 진격하여 프랑스 2개 군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어 경의 코로나 전투 이후 침체되었던 영국 육군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약 1달 뒤인 8월 26일, 마침내 꿈꾸던 그대로 귀족이 되어 웰링턴 자작(Viscount Wellington of Talavera and of Wellington)이 되었습니다.  약 3년 후인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드리드를 탈환한 그는 웰링턴 백작(Earl of Wellington)이 됩니다.



* 사족 :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세바스티아니 장군과의 관계는 아래 편을 참조...


http://nasica1.tistory.com/30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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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ck 2018.04.01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탈라베라전투가 드디어 끝났군요. 후에 줄줄이 벌어질 전투에 비하면 소규모이지만 대혁명이후 유럽대륙에서 대규모 야전을 치러본 전력이 없는 영국군으로선 그나마 여러가지 면에서 좋은 경험이었겠지요?. 방어전문 장군이지만 웨즐리같은 상승장군도 건졌고 훈련만 열심히 했던 영국육군이 그나마 전투다운 전투도 치렀으니 말이죠. 어째든 탈라베라전투의 독후감을 한마디로 하면 "결과가 뭐지?" 이런 느낌이랄까?..

  2. 유애경 2018.04.02 0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상화의 세바스티아니 장군,어디서 본듯한 얼굴이다 싶어서 생각해보니 뮈라 원수랑 닮은것 같네요...(저한테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알함브라 궁전을 파괴하면서 한편으론 황폐해진 궁전을 복원시켰으니 칭찬(?)을 해줘야 하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보고 가요~~

  3. TheK2017 2018.04.02 0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글이 착착 감기네요.
    자주 와서 좋은 글 많이 읽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석총 2018.04.02 0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메이로에선 공작+원수가 되죠 웰링턴으로 한이유가 웰슬리와 모닝턴을 합친거랍니다.

  5. 수비니우스 2018.04.02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그런데 영국군 지휘부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
    동서남북 어디나 사람 사는데는 비슷비슷하군요...

  6. reinhardt100 2018.04.02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즐리가 도박을 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보급문제이기도 했지만 웰즐리마저 패하면 대륙 원정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는 게 더 큰 이유이긴 합니다. 무어-웰즐리가 연속 실패한다고 가정한다면 비전투손실만도 최소 수만 단위인데 하노버등의 병력충원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같은 내부 자원을 본국의 반전 및 러다이트 분위기 제어에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조건적인 협상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미앵조약이 그랬고요.

    다만, 안달루시아 침공을 선택했다는 것은 프랑스군으로써도 패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에스파냐 주력군을 격파한 후 바다호스의 방어선이 완비되지 않았던 영국군을 공격하는게 더 효율적이었으니까요. 다만, 여기서 문제는 보급이 문제란게 걸립니다만.

  7. 정암 2018.04.03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페인 전역 관련 글이 부족해서 늘 궁금했는데 요즘 감사히 즐겁게 글 읽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저 알함브라궁전 장식들은 사람들이 일일히 손으로 깎고 새긴건가요?
    아님 현대에 와서 기계장비로 복원한건가요?
    전자라면 후덜덜하네요;;;;
    저런 정교한 문양이 몇백년이 지나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는게 놀랍고요 @.@

  8. 카를대공 2018.04.03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 쪽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습니다.

    이 멘트 보고 깨달았는데 그동안은 확실히 프랑스측에서 그린 전투 기록화가 많았군요.
    그말인즉슨 이제부턴 슬슬 프랑스 아닌 국가에서 그린 그림이 많아지겠네요.

  9. 카를대공 2018.04.03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라망카 전투 하니 제가 재밌게 본 브레이킹 배드라는 미드가 떠오르네요.
    거기 살라망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워낙 유명한 미드라 이름 정도는 들어 보셨을텐데 강추 합니다.

  10. 줄리안 2018.06.01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체 샤프는 이런 상황에서 라이플 경보병 대위가 프랑스군의 이글을 탈환했다는 것인지...

조제프와 함께 작전 회의 중이던 프랑스 장군들에게 전해진 소식 중 하나는 주르당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술트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술트가 보내온 장계의 내용은 그의 남쪽으로의 행군 현황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진척이 주르당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소식은 조제프와 주르당이 떠나온 마드리드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술트의 소식보다 더 나빴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의 제4 군단과 대치하던 베네가스 장군의 스페인 라 만차(La Mancha) 군이 마드리드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원래 베네가스의 임무는 세바스티아니가 탈라베라에서 빅토르와 합류하지 못하도록 세바스티아니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임무에 보기 좋게 실패한 베네가스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자신과 마드리드 사이에 프랑스군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쪽 방향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던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것은 조제프와 주르당이었습니다.  그들, 정확하게는 주르당이 주장했던 것이 '며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술트가 북쪽에 나타나면 영국군은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며칠이 아니라 10일 가까이를 기다려야 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뭐 한가한 상황이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텅 비워두고 온 마드리드가 스페인 라 만차 군에게 위협받는 상황까지 겹치자, 술트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지요.  특히 빅토르나 세바스티아니가 굳이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스페인 국왕과 그의 군사 고문의 위엄을 세우겠다며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다 끌고 탈라베라로 달려온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습니다.  이 위기는 바로 조제프와 주르당 본인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라 만차 La Mancha는 마드리드 바로 남쪽 지방으로서, 원래 라 만차라는 이름은 메마른 땅이라는 뜻의 아랍어 알 만샤 Al-mansha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름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라 만차는 나름대로 비옥한 축에 속하는 지역이라,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전통적으로 곡식을 제분하기 위한 풍차가 꽤 많았습니다.  라 만차의 사나이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격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제프와 주르당은 빅토르가 주장하는 대로 공격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빅토르는 여전히 자신이 공을 독차지 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크게 4갈래로 편성되었는데, 그 중 3개 공격을 빅토르의 3개 사단이 각각 맡았고, 나머지 1개만 세바스티아니의 사단들이 맡았습니다.  어제 밤과 오늘 새벽에 영국군을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었던 루팽 사단이 메데진 언덕과 세구리야 산맥 사이의 계곡을 공격하기로 했고, 빌라트(Eugene-Casimir Villatte) 사단이 그 왼쪽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라피스(Pierre Belon Lapisse) 사단이 그 왼쪽, 그러니까 메데진 언덕 남쪽 사면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메데진 언덕의 동쪽 경사면을 그대로 들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언덕의 북쪽과 남쪽의 양갈래로 공격해들어가 남북 양쪽 사면을 협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세바스티아니 휘하에 있던 사단들은 영국군과 스페인군의 방어선이 맞닿는 연결부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의 공격은 빅토르가 요청했던 유인 공격에 불과했습니다.  즉, 세바스티아니의 사단들이 먼저 영국군 방어선 남쪽을 공격하여 소란을 일으켜주면, 빅토르의 사단들이 메데진 언덕을 집중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이 큰 그림이었습니다.


요약하면, 빅토르가 하자고 하는 작전 그대로 하게 된 것입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이 이끄는 병력은 무엇을 하냐고요 ?  어떤 공격에서든 전병력을 일거에 쏟아붓는 일은 없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의 기병대 및 마드리드 수비대는 예비대로 남겨 두었다가 상황에 따라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7월 28일 오후 프랑스군의 제3차 공격의 초기 전개도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번에는 프랑스군도 긴 횡대로 전열을 짜고 공격했는데, 올리브 밭 한가운데를 뚫고 나가야 했던 레발 사단에게 긴 횡대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오후 2시반 경에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공격에 나선 것은 세바스티아니 휘하에 있던 레발(Jean Francois Leval)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그의 사단은 독일군과 네덜란드군으로 이루어진 약 4500 규모의 부대였는데, 이들의 공격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사실 의도된 바가 아니라 일종의 작은 사고였습니다.  원래 그의 공격 순서는 두번째였는데, 웰슬리가 판단한 것처럼 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인 올리브 밭을 통과하느라 그의 사단은 다른 프랑스 사단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먼저 개활지로 나와 버렸던 것입니다.  개활지 앞에는 영국군 방어선과 스페인군 방어선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었고, 거기에는 영국군이 구축해놓은 포병대 보루가 있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더 이상 공격을 늦출 수 없었던 레발 장군은 곧장 공격에 들어갔으나,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올리브 밭을 통과하느라 대오도 헝클어져 있었고 특히 영국군 포병대 보루 정면으로 쳐들어간 것이 주요 패인이었습니다.  레발 사단의 우익은 영국군을, 좌익은 스페인군을 공격했는데, 우익과 중앙이 영국군에게 격파 당해 후퇴하자, 스페인군을 상대하던 좌익도 측면 노출을 우려하여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레발 사단은 약 7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우익에서 레발 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중앙을 맡은 세바스티아니와 라피스의 공격도 시작되었습니다.  약 1만5천 규모의 프랑스군 2개 사단은 제1파와 제2파로 나뉘어 간격을 두고 공격해들어갔습니다.  이들을 상대한 것은 약 6천 규모의 영국군 셔브룩(Sherbrooke)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영국군은 특유의 침착성을 발휘하여 프랑스군 제1파가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다 45m 지점까지 다가오자 무자비한 일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파도는 지근거리에서 쏟아진 6천발의 총알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진격이 멈칫하자 셔브룩 사단은 총검 돌격을 감행했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총검 맛 보기를 사양하고 뒤돌아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역시 영국군도 아직 실전 경험이 적어서 그랬는지, 그만 침착함을 잊고 도망치는 프랑스군을 대오도 갖추지 않고 무질서하게 추격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총 8개 대대 중 6개 대대가 이렇게 신이 나서 추격에 참여했다가 그만 뒤를 이어 다가오던 프랑스군 제2파와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영국군이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고, 영국군 방어선 중앙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가 이날 전투에서 영국군의 최대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영국군에 위기가 닥치자 아까 후퇴했던 레발 사단도 다시 중앙부로 진격해왔습니다.




(전투가 한창 뜨거워질 때의 모습입니다.  영국군 중앙부 셔브룩 장군 휘하 일부 여단들이 전선을 유지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앞으로 나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진한 여단 지휘관들의 이름이 로우 Low와 렝워쓰 Lengwerth라고 되어 있는데, 저 분들의 이름은 사실 뢰브(Sigismund von Löw)와 랑베르트(Ernst von Langwerth)입니다.  저렇게 전진한 여단들은 하노버 출신들로 이루어진 KGL 여단들이고 그 지휘관들도 독일인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랑베르트 장군의 제3 여단은 큰 피해를 입어 사상자가 거의 절반에 달했고, 랑베르트 장군도 전사했습니다.)




예비대로 있던 매켄지(Alexander Randoll Mackenzie) 사단이 재빨리 세바스티아니 사단을 막아섰으나, 라피스 사단을 막아설 예비대는 아예 없었습니다.  이 위기 속에서 웰슬리는 메데진 언덕을 지키던 연대 하나를 내려보내 간신히 구멍을 메웠습니다.  이 사이 셔브룩 사단이 후퇴 및 재정비에 나섰고, 다시 방어에 투입되면서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300명의 매켄지 사단이 8000명 규모의 세바스티아니 사단을 막으려니 영국군도 피해가 컸습니다.  매켄지 장군 자신이 전사했고, 그 사단도 전체의 1/4이 넘는 63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래도 영국군의 머스켓 사격 속도는 확실히 프랑스군보다 우세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사단도 피해가 막심하여 무려 2천이 넘는 사상자를 남기고 결국 후퇴해야 했던 것입니다.  라피스 사단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이들은 영국군과 평행선으로 나란히 늘어서 정지 상태에서 총격전을 벌였는데, 서로 비슷한 사상자를 낸 뒤 후퇴한 쪽은 라피스 사단 측이었습니다.  라피스 장군이 선두에서 지휘하다 총격을 받고 전사한데다, 측면에 있던 세바스티아니 사단이 후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이나 약 1600명씩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웰슬리가 필사적으로 구멍을 틀어막는 모습입니다.  그림에서 메데진 언덕을 지키던 스튜워트(Richard Stewart) 장군의 부대가 헐레벌떡 내려가 라피스 사단을 막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덕분에, 메데진 언덕 북쪽의 계곡으로 들어오는 빌라트와 루팽의 프랑스군을 막을 부대가 부족해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밥상에 숟가락을 슬며시 올려놓으려던 중앙부의 레발 사단은 입장이 더욱 난처해졌습니다.  결국 이들은 경멸해마지 않던 스페인군 기병대의 추격을 받으며 걸음을 날살려라 도망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제프와 주르당도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이들은 약 5천 병력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훗날 이들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명색이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예비대를 가지고 뭘 하고 있었나'라는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프랑스 좌익과 중앙에서의 공격이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자, 원래의 주공이었던 전선 북쪽 끝 빌라트와 루팽 사단의 공격은 매우 어정쩡해졌습니다.  원래는 메데진 언덕을 남북 양쪽에서 둘러싸며 공격하기로 했었는데, 남쪽에서 그렇게 해줄 라피스 사단이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일단 메데진 언덕과 그 북쪽 세구리야 산맥 사이의 계곡으로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언덕 위에서 전황을 관측하던 웰슬리는 프랑스군이 자신의 방어선을 북쪽에서 우회하려는 것을 쉽게 알아챘습니다.  기병대 외에는 이 계곡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던 웰슬리는 쿠에스타 장군에게 급히 지원을 요청했고, 프랑스군의 공격선상에서 벗어나 있던 스페인군은 그에 적극적으로 응해 기병대와 보병대를 급파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빌라트와 루팽 사단이 계곡 속으로 진입했을 때는 스페인 보병만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을 뿐 영국-스페인 기병대는 시퍼런 기병도를 뽑아들고 프랑스군을 요격할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군의 밀집 보병 방진입니다.  기병대의 공격에 대해서는 견고했겠지만, 대신 포병대의 묵직한 대포알에는 세상 취약했습니다.  때문에 아군 기병이나 포병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적군의 기병과 포병의 합동 공격에 걸리면 끝장이었지요.  그림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thread/1437964/beautiful-world-napoleonics)




프랑스군은 좁은 계곡 속에서 마주친 기병대에 맞서 방진(square)를 짜야 했는데, 이건 역으로 프랑스군이 사지 속으로 제발로 들어온 형국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보병 방진을 기병대에 대해서는 매우 튼튼한 방어진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약점이 2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방진 특성상 이동이 아무래도 어렵다는 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이런 밀집 보병 대오는 포병대의 포격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메데진 언덕 꼭대기에는 영국군 포병대가 있었고, 이들은 계곡 아래 프랑스군이 방진을 짜는 것을 보고 신이 나서 대포알을 날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빌라트와 루팽의 프랑스 사단들은 이 좁은 계곡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대포밥이 될 신세였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바세쿠르트(L. A. Bassecourt)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보병 사단이 이 계곡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독안에 든 쥐 신세로 죽는 일만 남았던 프랑스군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는 사건이 연이어 터집니다.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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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딸기맛농약 2018.03.25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빠이길 바래봅니다. ㅎㅎ

  2. 베타니 2018.03.26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전투상황도가 있으니 확실히 입체적인 이해가 되네요.

  3. 무장공비 2018.03.27 0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잘보고 있습니다. 나시카님.

    [원래 라 만차라는 이름은 메마른 땅이라는 뜻의 아랍어 알 만샤 Al-mansha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름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라 만차는 나름대로 비옥한 축에 속하는 지역이라]

    뱀발을 하나 붙이자면 위 얘기는 무어인들이 포르투갈쪽으로 진출하지 않은건 그쪽 지형과 기후가 습한곳이라 별로 공략할 메리트가 없었다는 얘기와 통하는 얘기가 아닐까하네요. 습하고 눅눅한 기후에 짜증나던 무어인들에게는 아마 반가운 종류의 '메마른 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나저나 오늘도 역시 티비 드라마 뺨치는 끊기십니다... 빨리 뒷얘기 올려주세욧!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4. 몽생 2018.03.27 17: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방진을 취한 프랑스 병사라면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 다음 회로 넘어가네요^^;;
    아쉬운 마음 달래기위해 이번 회 다시 한 번 더 읽어야겠습니다.

  5. 푸른 2018.03.27 2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뭇 드라마 작가보다 훌륭한 묘사에 끊기 신공 ㄷㄷ 늘 잘보고 갑니다~

  6. 카를대공 2018.03.27 2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절단신공이 극에 달한 느낌입니다 ㅎㅎ

    제가 좋아하는 미드들이 결정적일 때 끊기는 그 느낌이네요.

  7. ㄹㄷㅈ 2018.03.28 1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같은 카테고리를 만드실 생각 없나요? 묻고 싶은 것들이 여러가지 있는데 그냥 글에 달기가 좀 그렇군요.

  8. Eugen 2018.03.30 2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 Sharpe시리즈의 순서가 어떻게 되고 구매는 어디서 하는지 아시나요. 요즘 나폴레옹 전쟁에 관심이 생겨서요.

    • nasica 2018.03.31 0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존에서 구매하시는 것이 가장 낫지 않겠습니까 ? 스마트폰에 킨들을 설치해서 그걸 보시는 것이 가장 편리합니다. Sharpe’s tiger 부터 Sharpe’s devil 까지의 순서는 https://en.m.wikipedia.org/wiki/Sharpe_(novel_series) 에 표로 나와 있습니다.

프랑스군 1개 연대 약 1600명이 메데진 언덕으로 달려들 때 이 언덕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KGL 여단의 규모는 고작 1200명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야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자다 일어난 판국이라 KGL 여단은 강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세를 올린 프랑스군이 메데진 언덕의 정상 능선을 점령하고 기쁨의 함성을 올리고나자, 영국군의 진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능선 바로 너머 후사면에 영국군 2개 여단 약 3800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다가 반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2개 여단도 야습은 예상하지 못하고 능선에서 멀찍이 떨어진 뒤쪽 경사면에서 야영을 하다, 능선 너머에서 벌어진 총격전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영국군이 언덕 능선 뒤에 숨어있다가 들이칠 줄은 몰랐던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다시 언덕을 탈환하는데는 충분했습니다.




(7월 27일 밤, 프랑스군의 첫번째 공격 상황도입니다.)



이렇게 언덕 후사면에 병력을 감추어 뒀다 언덕을 힘들게 올라온 적군을 능선 정상에서 반격하는 수비 전법이 바로 웰슬리의 주특기였습니다.  알고 보면 주특기라기보다는, 이것이 웰슬리가 제대로 갈고 닦은 유일한 필살기였습니다.  웰슬리는 어디서 이런 못된 전술을 배워왔는지, 바로 1년 전 비메이루(Vimeiro) 전투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쥐노(Junot)의 프랑스군을 격파한 적이 있었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부사쿠(Bussaco) 전투 등 이후 전투에서도 똑같은 전법으로 프랑스군을 상대했고, 종국엔 워털루 전투에서 이 전술로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격파하는 위엄을 보여주었습니다.  웰슬리는 나중에 '전투란 능선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예측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항공 정찰이 없던 시절에는 낮은 능선이라고 할지라도 그 뒤에서 어느 정도의 예비 병력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므로 능선이라는 지형은 방어전에 매우 유용했습니다.  다만 이 전술은 어디까지나 수비용이었을 뿐, 결코 공격용은 아니었습니다.  웰슬리는 어떻게 그런 반쪽짜리 전술 하나만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




(제가 군대있을 때 아마 저 '권법소년'이라는 만화를 보고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아 저도 형의권의 대가가 되겠다고 형의권 교본까지 교보문고에서 샀었습니다.  아... 그 책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  책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네요.)




청나라 말기 형의권의 대가로 유명했던 곽운심이라는 권법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형의권을 배우기 시작할 때 배움이 느리고 서툴러, 형의권의 기본기 중 반걸음 내딛으며 주먹을 지르는 기본기 중 기본기인 붕권만 3년 동안 연마했답니다.  그런데 워낙 철저하게 수련하다보니, 이 단순한 붕권 하나만으로 모든 상대를 꺾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반보붕권 타편천하(半步崩拳 打遍天下)라고 하지요.  웰슬리가 즐겨 썼던 이 전술을 영어로 reverse slope defense 즉 후사면 방어라고 하는데, 이는 무척 단순하고 뻔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이 단순한 전술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이 전법에 꼭 맞는 언덕을 찾아 느림보 영국군을 끌고 수없이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고, 이 전법을 쓸 수 없는 곳에서는 굴욕과 비난을 감내하고 후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에겐 이런 전술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영국군 특유의 풍부한 보급망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을 포함한 프랑스군의 기라성같은 장군들은 웰슬리의 이 얄미운 전술에 대한 효과적인 파해법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탈라베라 전투에서 이 전술에 당한 빅토르 원수도 결국 1812년 베레지나(Beresina)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동일한 수법을 써서 효과를 봤다고 하니, 그야말로 반보붕권 타편천하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날밤의 큰 전투는 이렇게 프랑스군의 패퇴로 마무리되었지만, 호되게 놀란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어둠을 타고 또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또 그들이 비웃었던 스페인군처럼, 영국군 초병들도 겁에 질려 어둠 속에서 헛것을 보고 허위 경보를 울려 여러 차례 비상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한편, 프랑스군 측도 긴장이 팽팽했습니다.  빅토르가 우려하던 일, 즉 아직 영국군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조제프 국왕과 주르당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 본대가 도착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한밤중에 세바스티아니까지 참석한 프랑스군 수뇌부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주르당은 빅토르에게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쓰레기같은 전술을 제안했습니다.  그냥 제자리를 지키고 수비를 하며 시간을 때우자는 것이었습니다 !  세상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수비를 하다니 !  그것도 이런 야전에서, 병력 수도 비슷한 상황에서 수비라니 !  나폴레옹이 현장에 있었다면 기가 막혀 얼굴이 하얗게 질릴 만한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르당의 설명은 나름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술트의 제2 군단이 북쪽에서 탈라베라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웰슬리의 연합군과 대치한 상태로 며칠 더 버티면, 술트까지 가세하여 손쉽게 웰슬리를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전에 상황을 파악한 웰슬리가 꽁무니를 내빼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격퇴한 셈이 되니까요.  그러나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은 빅토르였습니다.  그는 전투의 목표는 적 병력의 궤멸이며, 적을 물러나게 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며 조제프 국왕이 금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군단 전체를 동원하여 영국군을 새벽에 들이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패기 앞에서 조제프는 물론이고 주르당까지도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빅토르는 새벽 무렵 두번째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빅토르의 두번째 공격도 전면적 총공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데진 언덕만 탈취하면 영국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생각에 휘하 3개 사단 중 루팽(Ruffin)의 1개 사단 약 5천명만 동원했고, 이들을 긴 영국군 방어선 중 일부에 집중시켜 구멍을 뚫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루팽 사단의 3개 연대를 각각 긴 종대로 편성하여 3개의 송곳 형태로 다시 메데진 언덕에 돌격시켰습니다.  루팽 사단에 딸린 8문의 대포로 편성된 포병대가 사전 지원 사격을 해줬는데, 별 도움은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에게 노출된 메데진 언덕 동쪽 사면에는 영국군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이번에도 이들은 언덕의 능선 바로 코 앞까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했습니다.  



(7월 28일 새벽의 프랑스군 제2차 전투 상황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능선 약 90m 앞까지 전진했을 때 발생했습니다.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해 능선 뒤에 숨어있던 힐(Hill) 장군 휘하 영국군 1개 사단 4천명이 긴 횡대로 일제히 튀어나와 위력적인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오르막길을 향해 헉헉거리며 올리가던 프랑스군의 3개 종대 앞 부분에 집중된 4천발의 머스켓볼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종대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군은 대부분 쓰려졌고, 덕분에 진격이 순간적으로 멈춰버렸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은 다른 것은 몰라도 머스켓 연사 속도에서 유럽 최고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이들은 신속하게 머스켓 소총을 재장전하여 머뭇거리는 프랑스군 3개 종대의 앞부분과 옆부분에 다시 4천발의 일제 사격을 퍼부었고 프랑스군 측에서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이에 비해 프랑스군은 돌격을 위한 좁고 긴 종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므로 대응 사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국군의 thin red line과 프랑스군의 thick blue column의 충돌은 스페인 전역 내내 반복되던 일입니다.)




이때 루팽 장군은 사격보다는 과감한 총검 돌격을 명해야 했고,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여태까지 상대했던 스페인군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긴 영국군 방어선 중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힐 장군의 오른쪽을 담당하고 있던 셔브룩(Sherbrooke) 장군의 영국군 사단이 가만히 있지 않고 튀어나와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에 다시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이렇게 전면과 좌측 2개 방면에서 공격을 받자, 프랑스군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전면의 영국군도 후퇴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돌격을 했고, 프랑스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했습니다.  현명하게도, 영국군은 언덕 아래 평원까지 그들을 추격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측의 피해는 1300명, 영국군은 750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럽지 못한 전투 결과를 받아든 빅토르는 다소 풀이 죽은 상태로 다시 조제프 및 주르당, 세바스티아니와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은 거보라는 듯이 다시 술트를 기다리며 방어전을 펼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비해 빅토르는 조제프가 영국군과 스페인군 연결부, 즉 연합군 방어선의 중앙부를 공격해준다면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이 다시 메데진 언덕을 탈취해내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렇게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2가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둘다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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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음충 2018.03.17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빠 근데 4편 아닌가여

  2. 산골 김저자 2018.03.17 1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역사를 좋아하면서 Nasica님 펜입니다.
    무심코 반갑게 Nisica님 글을 읽으려다 익숙한 단어들이 나와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
    저는 한국형의권연구회란 곳에서 1년 6개월간 실제로 형의권을 배우고 있거든요.
    막상 배워보니 허무맹랑한 기의 운용이 아닌 과학적인 원리?로 힘을
    내는 방법(내경)을 배우는등 재밌게 배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홍보 같은데 홍보는 아니고요 ㅎㅎ
    제가 좋아하는 블로거 글에 보통 사람들 잘 모르는 형의권 얘기가 나와 깜짝 놀라고
    반가 웠습니다.
    붕권은 힘이 직선으로 뻗어서 강력하지만 실제 동작은 철권의 붕권처럼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멋?이 있습니다. 형의권 동작들이 대체로 간결하고 소박?한 멋이 있는 것 같습니다. ^..^

  3. 최홍락 2018.03.17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곡사포 몇문만 있었어도ᆢᆢ

  4. ㅇㅇ 2018.03.17 2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날 똑같은 전술에 당한다면 열기구 같은걸 써볼생각은 안했을까요?

  5. 계속 2018.03.17 2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는 적을 맞이하는 방어적인 전술에 당했다는 것은 프랑스군은 회피나 우회없이 항상 싸우러 가야하고 영국군은 전장을 골라도 될 정도로 여유로웠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웰슬리가 이겼다기보다는 그런 환경을 만든 영국이라는 국가가 이겼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6. JPM 2018.03.19 0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구석에 앉아서 읽는 입장이니 할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언덕을 기병이 함께 뛰어 올랐다면 달랐을까요? 뭐, 영국군은 보고 놀고만 있겠냐만 말이죠.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여담입니다만, 전쟁만큼 비싼 외교(?)도 없는거 같습니다. 저 영국군의 속사력과, 바다를 쥐고 흔드는 로열네이비 다 결국 £££ 아니겠습니까 ㅠ 그 돈 많은 영국도 크로노미터 살 능력이 있는 함장을 좋아했구요. 결국 저때나 지금이나 다 돈이네요. 가정을 위해 한주 고생하시는 가장여러분 = 호색한 라살의 경기병대... 인걸까요. ㅎㅎ 한주 화이팅하시고 더 재밌는 포스팅 부탁드립니당.

  7. 석총 2018.03.21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군의 표준전술 능선에 숨기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술트를 몰아내고 기세를 탄 웰슬리의 영국군과는 달리, 쿠에스타의 스페인군, 좀 더 정확하게는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군은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인데다 무척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쿠에스타의 군대는 그해 3월 28일에 있었던 메데진(Medellin) 전투에서 빅토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1 군단과 격돌하여 총 2만2천 중에 약 7천5백의 사상자와 함께 2천에 가까운 포로를 내는 등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쿠에스타가 거느린 3만6천은 그 이후 새로 끌어모은, 애국심만 있는 신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쿠에스타의 스페인군은 빅토르의 뒤를 추격하다가 그가 세바스티아니와 합류하자 황급히 웰슬리가 자리를 잡고 있던 탈라베라로 허둥지둥 후퇴해온 상태였습니다.


웰슬리는 확실히 명장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탈라베라에 도착하자마자 일대의 지형을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다만 그의 그릇은 나폴레옹보다 확실히 훨씬 더 작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우스테를리츠의 평원을 살펴보며 어느 위치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유인하여 어떻게 적군에게 섬멸적 타격을 입힐까 구상했지요.  그에 비해, 웰슬리는 그저 어느 위치가 방어하기에 더 유리할까를 부지런히 살폈습니다.




(현재의 탈라베라 주변 지도입니다.  당시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방어선은 대략 저 포르티나 시냇물을 따라 구축되었습니다.)




보통 방어선은 강을 따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탈라베라 인근에는 유량이 꽤 풍부한 알베르체(Alberche) 강이 있었으나, 웰슬리는 여기서의 방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동쪽에서 올텐데, 불행히도 이 강의 동쪽이 고지대였고 연합군이 자리잡을 서안이 저지대였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자신들을 훤히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댈텐데, 그건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지요.  결국 그는 탈라베라 북쪽으로 길게 뻗은 포르티나(Portina) 시냇물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실은 이 시냇물은 너무 얕고 좁아서 방어선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웰슬리가 여기를 택한 이유는 이 시냇물 바로 동쪽에 언덕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언덕의 이름은 메데진 언덕(Cerro de Medellin)이라고 했는데, 다만 이 언덕은 웰슬리가 제일 좋아하는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어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언덕을 선호했습니다만, 불행히도 메데진 언덕은 거의 동서 방향으로 늘어진 언덕이었습니다.  다만 이 언덕 북쪽으로는 또 세구리야 산맥(Sierra de Segurilla)가 이어져 있었고 메데진 언덕과 세구리야 산맥 사이에는 좁은 협곡이 있었습니다.  이 협곡만 잘 틀어막으면 꽤 훌륭한 수비 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메데진 언덕과 탈라베라 사이의 텅빈 공간은 오히려 더 좋은 방어 조건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곳은 평탄한 평원인 대신, 그에 맞게 올리브 나무들이 울창하게 심어져 있었고 거기에 올리브 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한 돌담까지 잘 만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Talavera de La Reina, 여왕의 탈라베라)라는 이 소도시 자체도 중세 시절의 아담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근대적인 포격전에는 못 버티더라도 총격전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어진지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도 남아있는 탈라베라의 성벽 일부입니다.  탈라베라를 감싼 성벽은 사실 성벽이라기보다는 한양 도성처럼 city wall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중세에 만들어진 것이라 근대적 포격을 버틸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보병 전투에서는 여전히 훌륭한 방어벽 역할을 했습니다.)




웰슬리는 스페인군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부하인 영국군 사병들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웰슬리는 스페인군의 사병들은 물론 장교들, 심지어 쿠에스타 장군도 믿기는 커녕 경멸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는 27일 프랑스군에게 쫓기다시피 허둥지둥 탈라베라로 들어온 스페인군에게는 언덕 후사면을 이용하는 고급(?) 방어전술을 구사할 능력이 없다고 보고 상대적으로 더 견고한 위치인 남쪽 전선, 즉 메데진 언덕과 탈라베라 사이의 돌담으로 둘러싸인 올리브 밭을 맡도록 제안했습니다.  쿠에스타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약 1년 전에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안달루시아 지방에 펼쳐진 올리브 밭을 보고 그 규모가 하도 광대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저 사진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온 산과 들판이 모조리 올리브 나무로 가득하더군요.)




빅토르가 이끄는 프랑스군 제1 군단 본진은 27일 오후에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알베르체 강을 건넜습니다.  빅토르의 프랑스군은 가볍게 볼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27일 낮 쿠에스타의 후퇴를 지원하러 웰슬리가 내보낸 영국군 보병 연대와 기병대는 서투르게 움직이다 서로의 거리를 필요 이상으로 떨어뜨리는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노련한 빅토르는 그 작고 짧은 틈은 덮쳐 영국군을 400명이라는 큰 숫자의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빅토르는 무척이나 부지런하고 투지가 넘치는 전형적인 나폴레옹의 부하였습니다.  혼쭐이 나서 물러난 영국군과 스페인군은 저녁 무렵이 되자 일단 오늘 전투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녁 7시 경 연합군의 방어선 앞에 도착한 빅토르는 스페인군의 방어선을 확인하고자 탈라베라와 메데진 언덕 사이의 올리브 밭 쪽으로 소수의 정찰 기병대를 내보냈는데, 여기서 그만 사고가 터집니다.  저 멀리 나타난 프랑스군 기병대를 보고 흥분한 스페인군이, 아직 그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더 꼴불견이었던 것은 그 일제 사격 직후 머스켓 소총을 쏜 스페인군 병사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공포에 질려 '배신이다'를 외치며 방어선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점이었습니다.  영국 측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렇게 도망친 스페인군은 탈라베라 시내까지 도망쳐 들어간 뒤 시내 술집을 습격하여 와인을 퍼마셨다고 합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여기서 도망친 스페인군은 약 2천명에 불과(?)했습니다.  작은 수는 아니지만 전체 3만4천 중 3만2천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겁에 질려 도망친 2천명은 쿠에스타가 출동시킨 스페인 기병대에 의해 곧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스페인군 전체가 어이없이 이렇게 무너졌다면 영국군의 작은 실수도 포착하던 빅토르가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겠지요.


이 사건이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빅토르는 연합군의 방어선 지형을 면밀히 관찰해 본 뒤, 웰슬리가 의도하던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탈라베라와 메데진 언덕 사이의 올리브 밭은 상당히 견고한 방어선이므로 차라리 메데진 언덕을 공격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군의 상태로 볼 때 영국군이 무너지면 스페인군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므로, 영국군이 맡은 메데진에 전력을 기울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빅토르의 모든 생각이 웰슬리가 예상했던 범주 내에 들어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빅토르는 웰슬리의 예상과는 반대로, 27일 밤 영국군이 편하게 잠을 자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빅토르에게는 서둘러야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를 독차지하고 싶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그렇다치고, 그는 경멸하던 조제프 왕과 주르당의 지휘를 받아가며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빅토르는 한밤 중에 뤼팽(Ruffin) 장군의 사단을 출동시켜 영국군 방어선 중 가장 강력한 부분이었던 메데진 언덕 정상부를 들이쳤습니다.  거길 탈취하면 영국군은 물러날 것이고, 그러면 스페인군도 물러날 것이라는 계산이었지요.  그러나 과욕은 실수를 낳는 법입니다.  게다가 평소 나폴레옹이 야간 전투를 싫어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뤼팽 사단 3개 연대 중 무려 2개 연대가 어둠 속에 길을 잃고 엉뚱한 곳을 헤맸고, 목표 지점에 제대로 접근한 것은 약 1600명 규모인 제9 경보병 연대 하나 뿐이었던 것입니다.  



(세구리야 산맥에서 내려다본 메데진 언덕입니다.)




이렇게 고작 1개 연대 병력으로 영국군 방어선 중 가장 단단한 곳을 들이친 프랑스군의 공세는 산산조각 나면서 좌절되었을까요 ?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능선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던 KGL(King's German Legion, 하노버 출신의 독일인들로 구성된 영국군) 여단을 삽시간에 격파하고 메데전 언덕 최정상부를 점령했습니다.  웰링턴이 철석같이 의지하려고 했던 메데진 언덕이 어이없이 떨어지는 순간이었고, 어쩌면 이대로 탈라베라 전투의 끝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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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비니우스 2018.03.10 1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참 신기한게 4년전에 트라팔가스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스페인군을 박살냈는데 이번엔 영국-스페인군이 프랑스군을 박살내려 하고... 7년 전쟁 직전에 있었던 동맹의 역전도 그렇고 유럽 외교는 참 다이나믹합니다 ㄷㄷ

  2. 수비니우스 2018.03.10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댓글 후열독하다가 "탈라베라를 감싼 성벽은 사실 성벽이라기보다는 한양 도성처럼 city wall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라는 부분이 훅 와닿네요. 동대문으로부터 북소문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길을 일년에 한두번씩 가는데 산세가 꽤 험해서 이거 짓느라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18.7km나 되는 이 성곽은 정작 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병자호란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죠. 길이는 너무 긴데 높이는 5m정도 밖에 안되서 제대로 된 농성을 할수 없다고 본 조정이 바로 한양을 버리고 몽진했으니까요. 이럴꺼면 왜 지었을까 싶습니다. 왕도에 성벽이 없으면 모양이 빠지긴 하지만 북대문쪽을 개고생하며 지었을걸 생각하면 진짜 왜지었을까 싶어요. 근대 일본의 오사카성이나 에도성 아니면 고대 한국의 (신라가 지은) 삼년산성이나 (백제가 지은) 진주성 같이 지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3. 발음충 2018.03.11 15: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Medellin은 메데인이 정확한 발음 같습니다

    • nasica 2018.03.11 18: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에는 메데인이라고 쓰려고 했는데 (영화 '시카리오'에서 메데인이라는 단어를 자막으로 봤거든요), 혹시나 싶어 다음 site에서 확인을 해보니 제 귀에는 '메데진'이라고 들리더라구요. 일단 귀에 들리는대로 쓰자는 생각에 메데진이라고 표기했습니다.

      https://ko.forvo.com/search/Medell%C3%ADn/

  4. 발음충 2018.03.11 15: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Medellín (Spanish pronunciation: [meðeˈʝin] 인데 ʝ은 y 발음이기 때문입니다

  5. 발음충 2018.03.11 15: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데인 카르텔'이 유명합니다.

  6. reinhardt100 2018.03.11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흔히 말하는 'city wall'이라는 서구식 용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동양적으로 보면 상당히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탈라베라 성벽같은 스타일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에서의 공성전 이전, 즉, 중세식 스타일의 성벽이긴 합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는 말 그대로 전면전 수준의 회전보다는 흔히 말하는 '고정되지 않은' 휴전선의 GOP나 GP같은 전방의 소규모 기지 하나하나를 서로 치고 들어가서 탈취하면서 덤으로 노예로 쓰거나 팔아먹을 포로 및 물자 약탈에 좀더 치우쳐 있다보니 저런 스타일의 성벽들이 꽤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병만 가지고는 공성전을 한다는 건 사실상 말도 안 되니까요.

    흔히 프랑스 혁명전쟁의 만토바와 야파,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바다호스니 함부르크등의 공성전이 있긴 하지만 주 전투가 거진 다 회전화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6-17세기, 정확히는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까지는 오히려 공성전의 전성시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플랑드르와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수백개의 요새들이 건설되면서 독립하려는 네덜란드 공화국과 이를 막으려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 사이에서 거진 80년 전쟁 중반부터는 매년 공성전이 벌어졌으니까요. 당장 유명한것만 따져도 오스탕스, 브레다, 스헤르트헨보스, 그룬로, 올덴잘, 엠덴, 울리히 같은 요새들입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정면 회전을 할 수는 없던 네덜란드가 무한정의 재력을 바탕으로 에스파냐를 소모시키는 전략으로 나갔으니까요. 동시대, 베네치아 역시 동지중해의 주요 거점을 모조리 요새로 도배해버리면서 터키제국의 공세를 최대한 막아내는 방식으로 싸웠기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30년 전쟁, 1630년대 중반 신교도측, 특히 스웨덴군을 패전 직전에서 구해낸 결전수단이 연안 요새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자금지원 및 해군력에 의한 보급을 통해 가톨릭동맹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방식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먹히면서 켐니츠니 비트슈토크 같은 전투로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얀카우등에서 야전에서의 절대우세를 확보하는데 성공. 결국 승전을 이끌어낸 방식이다보니 공성전 중심으로 전쟁의 진행방식이 한동안 이루어집니다.

    다만, 공성전 중심의 전쟁 진행은 지나친 소모전이다보니 재정부담이 극심했었고 평시에도 국가예산을 꽤나 잡아먹는 형국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 공성전의 대가인 보방후작이 프랑스국경지대에 건설한 요새가 대충 300개 이상인데 이걸 초기 종심방어형태로 몇개의 선에 걸쳐 건설하고 게다가 그 많은 요새의 설계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이미 예산이 미친듯이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보방이 8각형 요새 같은 규격화된 요새형식을 선보였지만 그런거로는 너무 부족했죠.

    18세기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는 공성전이 꽤 이루어지지만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슬슬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말플라크, 드냉 같은 중요한 전투는 모두 야전으로 결정되었으니까요. 결정타를 날린 것은 7년 전쟁의 로스바흐, 로이텐 같은 프리드리히 2세의 기동전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준 겁니다. 이러다보니 나폴레옹전쟁에서는 주로 기동전, 회전 중심으로 전쟁이 진행되게 된니다.

  7. JPM 2018.03.12 0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웰즐리와 나폴레옹의 그릇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 — 이기면 다 잘하는거 아닌가요? ㅋㅋㅋ) 웰즐리는 해외원정군으로써 방어만 해도 이기는 전쟁이였고 나폴레옹과 대회전을 하는 전략적 목표가 달라서 방어우선과 공격중심의 전략이 나온거 아닐까 합니다. 아 물론, 그냥 해당 포스팅에서 비교하신 것만 생각한겁니다. 쓰다보니 또 나폴레옹은 열세에서도 공격을 외쳤네요. 어려운 교지만 둘 다 한끗발 하던 분들이니 비교가 힘든거 같습니다. 뭐, 그냥 웰즐리 변호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나시카님은 나폴레옹 vs 웰즐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도 사실 조금 궁금하구요.

    • nasica 2018.03.12 0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웰슬리가 나폴레옹을 꺾었지만, 나폴레옹이 해낸 것을 웰슬리는 못 했을겁니다. 가령 대전차 미사일이 상황이 맞으면 탱크를 파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전차 미사일이 탱크보다 더 우수한 무기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8. 발음충 2018.03.12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 보고 찾아봤는데 메데진에 가까운 발음이 들리는 게 제가 알고 있던 얄팍한 지식에 너무 벗어나는게 신기해서 좀더 찾아보았더니
    이런 현상이 있나 보네요

    https://en.wikipedia.org/wiki/Yeísmo
    요약하자면 ll은 원칙적으로는 y 발음인데 스페인의 다양한 사투리나 남미 지방의 상이한 발음에 따라 z로 발음되는 경우도 많이 통용된다고 하네요
    Most dialects that merge the two sounds represented by ⟨ll⟩ and ⟨y⟩ realize the remaining sound as a voiced palatal fricative [ʝ], which is similar to the ⟨y⟩ in English your, but it sometimes sounds like ⟨j⟩ in English jar, especially after /n/ or /l/ or at the beginning of a word. For example, relleno is pronounced [reˈʝeno] and conllevar is pronounced [koɲɟ͡ʝeˈβaɾ] or [koɲdʒeˈβaɾ].

    Yeísmo has always been common in much of Latin America, mainly in lowlands, and in large areas in Spain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군단이었고 10만이 넘었으니까요.  그런 스페인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은 혹시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 같은 짓이 아니었을까요 ?


웰슬리도 나름 정보와 생각이 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 프랑스군의 상태는 웰슬리의 진격에 대해 그다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생 시르(St. Cyr)의 제7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동쪽의 카탈루냐 지방에 있었고, 수셰(Suchet)의 제3 군단은 그 바로 옆 아라곤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모르티에(Mortier)의 제5 군단도 마드리드 북쪽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주둔하고 있었고, 네(Ney)의 제6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갈리시아(Galicia)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Sebastiani)의 제4 군단은 마드리드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술트의 제2 군단은 웰슬리의 영국군에 의해 포르투갈에서 거지꼴로 막 쫓겨난 뒤 재정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빅토르의 제1 군단은 포르투갈 접경 지역의 구아디아나(Guadian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809년 5월말, 스페인 내 프랑스 7개 군단의 위치입니다.  전년도에 있었던 바일렌에서의 뒤퐁의 대패 덕분에, 아직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는 프랑스군이 발을 못 붙이고 있었고,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가 스페인 저항군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도 속의 붉은색 지점 표시 부분이 바로 탈라베라입니다. )




웰링턴에게 주어진 공격 루트는 크게 2가지였습니다.  도우루(Douro) 강을 따라 술트를 추격하여 마무리짓는 것과, 훨씬 남쪽인 타호(Tajo, 포르투갈어로는 테주 Tejo, 영어로는 타거스 Tagus) 강을 따라 빅토르를 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다 강을 따라 가냐고요 ?  스페인에 비해 작고 약한 포르투갈이 독립국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지대의 지형이 무척 험하여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갈 수 있는 전통적인 교통로는 저 두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들이었습니다.  특히 리스본부터 타호 강가를 따라 가면 탈라베라(Talavera)와 톨레도(Toledo)를 거쳐 마드리드 인근의 아랑후에스(Aranjuez)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타호 강과 그 주변 강역도입니다. )




어떻게 생각하면 대포를 모두 잃은데다 만신창이가 되었고, 또 바로 발 뒤꿈치까지 따라잡은 술트의 뒤를 계속 추격하는 것이 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과감히 방향을 선회하여, 저 남쪽의 타호 강을 따라 진격하여 빅토르를 격파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무래도 2만 정도의 병력만으로 스페인 내부로 진격하는 것은 무척 버거운 일이었는데, 스페인 쿠에스타(Cuesta) 장군이 협동 작전을 요청해온 것입니다.  쿠에스타에게는 약 3만의 병력이 있었으니 영국군에게 이 제안은 무척이나 솔깃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상황을 보니 만약 빅토르만 성공적으로 격파한다면, 마드리드까지 일사천리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잘 하면 분산된 프랑스군의 의표를 찔러 마드리드를 기습 점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점령한 뒤 과연 마드리드를 지켜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런 승리는 큰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웰슬리는 출세욕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아일랜드 모닝턴(Earl of Mornington) 백작의 3남에 불과했으므로 철저한 장자 상속권을 따르는 영국 귀족 사회의 전통에 따라 그는 백작도 자작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자신을 아일랜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개인적 목표는 잉글랜드 내의 어느 근사한 영지에 대해 작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웰슬리는 야심찬 행군을 시작했으나, 군사작전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작전이 생각했던 것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빅토르의 군단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웰슬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조달에 의존하는 프랑스군 특성상, 빅토르가 주둔하고 있던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 지방의 구아디나아에서는 식량이 바닥났던 것입니다.  쿠에스타의 스페인군도 견제할 겸 식량도 구할 겸, 빅토르의 제1 군단은 마드리드 쪽에 좀더 가까운 탈라베라(Talvera)로 이동했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빅토르의 제1 군단은 1만9천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해, 연합군은 영국군 2만에 스페인군 3만이라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보력에서도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민간 게릴라들이 주요 도로와 시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군단 간에 전통문을 주고 받는 것도 쉽지 않았고 소규모 정찰대를 운영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빅토르를 비롯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스페인 진입을 7월 9일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68세이던 쿠에스타 장군에 대해 겁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돈키호테 같은 아집과 오만,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은 매력적인 연합군 파트너가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엉뚱한 오해가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발목을 잡습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Sevilla) 지방 정부격인 훈타(Junta)에서 영국군을 좀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웰슬리를 스페인군 전체의 통합 사령관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작 웰슬리 본인은 오직 잉글랜드 작위에만 관심이 있었던지라, 무능하고 믿을 수 없는 스페인군의 총사령관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쿠에스타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원래 영국과 스페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 해적왕 드레이크 이야기에서 짐작하시듯 아메리카 대륙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죽어라 싸우던 사이로서, 그 민족 감정은 꽤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더 큰 적 나폴레옹에 맞서기 위해 연합을 맺은 관계라고 해도, 오만하고 재수없는 영국 장군이 스페인군에게 지휘관 노릇을 하며 이래라저래라 명령질을 하는 모습은 스페인 장군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웰슬리에게 합동 작전을 펼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쿠에스타가 웰슬리에게 갑자기 퉁명스럽게 대하며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덕분에 웰슬리와 쿠에스타 사이에 구체적 합동 작전 계획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망친 것은 쿠에스타의 질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항상 산더미같은 염장 쇠고기와 럼주를 끼고 다녀야 했던 영국군의 특성 때문에 영국군의 진격은 너무 느렸습니다.  6월 8일 포르투갈 내 타호 강 계곡 지역인 아브란치스(Abrantes)에 도착한 영국군은 거의 3주간 그 지역에서 허송세월했는데, 이는 쿠에스타의 딴지 때문만은 아니었고 영국군을 위한 염장 쇠고기와 럼주 등 군량 창고를 짓고 물자를 집적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웰슬리는 6월 28일에야 아브란치스를 떠나 7월 3일에야 스페인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포르투 전투 이후 거의 2달이 지나서야 이렇게 스페인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빅토르는 영국군의 진입을 모른 채 쿠에스타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웰슬리는 여전히 빅토르의 옆구리를 기습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에는 없던 변수가 생겼습니다.  빅토르가 위치를 잡은 탈라베라는 전보다 훨씬 마드리드에 가까운 곳이었고, 더 나쁜 것은 세바스티아니의 프랑스군 제4 군단과도 더 가까와졌다는 것입니다.  웰슬리가 꿈꿨던 것은 쿠에스타와 빅토르가 서로의 멱살을 쥐고 뒹구는 사이에 살짝 다가가 빅토르의 옆구리에 연장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바스티아니가 바로 옆에 서있다면 현장 분위기가 그다지 친영국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 귀족들로 구성된 스페인군 수뇌부의 모든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네가스 장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스페인군이 제시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와 대치 중이던 베네가스(Francisco Javier Venegas) 장군의 라 만차 군(Ejército de La Mancha)이 세바스티아니를 적절히 견제하여 서쪽의 빅토르를 지원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쉬운 군사 작전이 서면 상의 작전이었습니다.  베네가스는 스페인 귀족다운 풍모와 위엄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귀족이 갖춘 것 그것 뿐이었습니다.  군사적 재능이라고는 1도 없었던 그는 이미 그 해 1월에 벌어진 우클레스(Uclés) 전투에서 고작 1만 조금 넘는 병력을 가지고 아무 상황 판단을 못 한 채 1만5천의 우세한 병력을 가진 빅토르에게 달려들었다가 1천의 사상자와 6천의 포로를 내는 참패를 겪은 바 있었습니다.  만약 스페인이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였다면,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그저 귀족의 체면을 위해 돌격했다가 1만군을 통째로 전멸시킨 베네가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철저한 귀족 중심 사회였고,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베네가스가 받은 것은 군법회의 출두명령서 대신 2만3천의 병력을 갖춘 라 만차 군 사령관 임명장이었습니다.


베네가스에게 주어진 명령은 2만 병력의 프랑스 제4 군단을 공격하여 분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섣부른 전투를 피하되 세바스티아니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빅토르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잘 대치하고 있으라는 간단한 명령이었지요.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간단한 명령조차 완수하지 못하는 신박함을 보여주었습니다.  7월 초, 마침내 웰슬리의 영국군이 탈라베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프랑스군이 조제프 왕과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다 이끌고 탈라베라로 달려갈 때, 베네가스 앞에 있던 세바스티아니도 서둘러 탈라베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뒷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베네가스에게 완전히 또다른 기회를 주었습니다.  마드리드가 바로 코 앞인데, 그의 앞을 가로 막을 인근의 프랑스군이 모조리 탈라베라로 가버린 것입니다.  베네가스는 이때 2가지 꽃놀이 패를 쥐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의 뒤를 쫓아 탈라베라로 이동한 뒤 쿠에스타 및 웰슬리와 연합하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데 일조할 수도 있었고, 또는 아예 텅 빈 마드리드로 진격하여 수도를 탈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네가스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대체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약 1달 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다른 부대들과 합동 작전을 펼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베네가스는 후퇴하라는 쿠에스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굳이 세바스티아니와 전투를 벌였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는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시고 일단은 탈라베라 전투에 집중하겠습니다.


이렇게 베네가스가 삽질을 해주는 덕분에 프랑스군은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뿐만 아니라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그의 보좌관 주르당(Jourdan) 원수가 이끄는 마드리드 수비대 및 2개 용기병 사단 총 1만1천까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탈라베라에서의 힘의 균형은 영국-스페인 연합군 5만5천에 프랑스군 4만6천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된 셈이었으나 여전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 분명한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영국-스페인은 불신과 반목으로 얼룩진 어설픈 연합군이었습니다.  스페인 국왕 조제프가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단일 정예군과의 대결에서는 불리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또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Tagu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co_Javier_Venega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mona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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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몽키D루피 2018.02.25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처음으로 1등~! ^0^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2. reinhardt100 2018.02.2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빅토르가 후퇴한 엑스트라마두라 지역은 전통적으로 에스파냐 농촌 지역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편인 지역입니다. 16세기 신대륙을 정복한 콩키스타도르 (라)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인것만 해도 이미 드러나니까요.

    이베리아 반도 지역 자체가 프랑스군이 주전장으로 싸워왔던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 폴란드보다도 사실 더 빈곤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는 적어도 개별 가구에서는 약탈할게 있었고, 폴란드 같은 경우는 추워서 그렇지, 적어도 보급선이 끊길 우려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이베리아 반도는 수자원이 현재와 마찬가지로 꽤나 부족해서 농업생산력이 낮은데다가 메스타라는 목양조합의 영향까지 겹치면서 농민들의 삶은 완전 박살난 수준이 되었으니까요. 에스파냐 왕실 역시 이걸 도저히 묵과할 수는 없었고, 신대륙의 식민지가 독립하기 전 국가예산의 상당수를 신대륙에서 오는 정화준비 수송선단에 의존했고, '페닌술라에스'라 하여 에스파냐 본토 출신들을 의도적으로 우대, 신대륙으로 보내려고도 노력하긴 합니다.

    웰링턴이 술트를 추격하지 못한데는 지형상, 교통편상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탄약소모가 있었습니다. 염장쇠고기같은거야 극단적으로 보면 길가는(?) 소 한 마리 잡아서 먹으면 되지만 탄약은 그게 안 되었으니까요. 특히 영국군이 자랑하는 '씬 레드라인'의 탄막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탄약이 미친듯이 들어갔는데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는 그 많은 탄약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방법이 없었고 전쟁 내내 본국에서 조달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총검의 원조국가답게 17세기 네덜란드 전쟁 당시부터 이미 총검돌격전이 되면 막을 군대가 없다고 할 정도인 프랑스군과의 총검돌격전을 어떻게든 막으려면 더욱 탄약이 중요했죠. 이러다보니 진격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nasica 2018.02.25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18.02.25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웰링턴이 그토록 공명에 집착한 이유가 형이었던 동인도회사의 인도 총독인 웰즐리 후작의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사실, 웰링턴이 워털루 전투의 승장이라는 명성에 가려서 그렇지 형 웰즐리 후작이 미친 영향은 훨씬 큽니다. 최초의 귀족 출신 총독으로써 전임자이던 동인도회사 사원 출신이던 헤이스팅스의 업적을 '(이후의 오클랜드와 아머스트 같은) 무모한 확장정책으로 말아먹지 않고서' 인도 제패에 시동을 걸었다는 겁니다. 웰즐리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귀족들에 대한 의구심을 어느 정도 걷고 콘월리스 등의 후임 귀족출신 총독들도 계속해서 선임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웰즐리 후작이 현대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매관매직이 판치던 영국에 '공정한 시험에 의한 (능력주의에 근거한)선발'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동인도회사 사원 및 인도통치에 소요되는 행정관 및 장교들을 다수의 학원 및 사관학교를 통해 모집, 충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는 당시 임원진의 사원입사 추천권을 정면으로 건드리면서 의회 내 인도족과 회사내 해운족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되어 정책 자체가 폐지되지만 1853년의 추밀원령에 의한 제국고등문관시험제도 정비가 시작되면서 이후에 결실을 맺게 됩니다.

    • 카를대공 2018.03.04 0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렇게 보니 형제가 위인이네요.
      그것도 둘 다 영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엄청 크구요.

  3. 에로준 2018.02.25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글과 좋은 댓글 입니다.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4. 석총 2018.02.28 1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웰링턴은 웰슬리와 모닝턴의 스펠링을 합친거죠
    사실 귀족의 차남이 작위를 받으면 분가하는게 원칙이고 귀족명을 모닝턴과 성인 웰슬리를 합쳐서 웰링턴이 되었죠

  5. BACCANO 2018.03.08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네가스 무능함의 끝판왕이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