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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에스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3.10 양측의 사정 - 탈라베라 전투 (3편) (12)
  2. 2018.02.25 계곡의 연합군 - 탈라베라(Talavera) 전투 (1편) (8)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술트를 몰아내고 기세를 탄 웰슬리의 영국군과는 달리, 쿠에스타의 스페인군, 좀 더 정확하게는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군은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인데다 무척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쿠에스타의 군대는 그해 3월 28일에 있었던 메데진(Medellin) 전투에서 빅토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1 군단과 격돌하여 총 2만2천 중에 약 7천5백의 사상자와 함께 2천에 가까운 포로를 내는 등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쿠에스타가 거느린 3만6천은 그 이후 새로 끌어모은, 애국심만 있는 신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쿠에스타의 스페인군은 빅토르의 뒤를 추격하다가 그가 세바스티아니와 합류하자 황급히 웰슬리가 자리를 잡고 있던 탈라베라로 허둥지둥 후퇴해온 상태였습니다.


웰슬리는 확실히 명장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탈라베라에 도착하자마자 일대의 지형을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다만 그의 그릇은 나폴레옹보다 확실히 훨씬 더 작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우스테를리츠의 평원을 살펴보며 어느 위치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유인하여 어떻게 적군에게 섬멸적 타격을 입힐까 구상했지요.  그에 비해, 웰슬리는 그저 어느 위치가 방어하기에 더 유리할까를 부지런히 살폈습니다.




(현재의 탈라베라 주변 지도입니다.  당시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방어선은 대략 저 포르티나 시냇물을 따라 구축되었습니다.)




보통 방어선은 강을 따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탈라베라 인근에는 유량이 꽤 풍부한 알베르체(Alberche) 강이 있었으나, 웰슬리는 여기서의 방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동쪽에서 올텐데, 불행히도 이 강의 동쪽이 고지대였고 연합군이 자리잡을 서안이 저지대였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이 자신들을 훤히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댈텐데, 그건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지요.  결국 그는 탈라베라 북쪽으로 길게 뻗은 포르티나(Portina) 시냇물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실은 이 시냇물은 너무 얕고 좁아서 방어선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웰슬리가 여기를 택한 이유는 이 시냇물 바로 동쪽에 언덕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언덕의 이름은 메데진 언덕(Cerro de Medellin)이라고 했는데, 다만 이 언덕은 웰슬리가 제일 좋아하는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어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언덕을 선호했습니다만, 불행히도 메데진 언덕은 거의 동서 방향으로 늘어진 언덕이었습니다.  다만 이 언덕 북쪽으로는 또 세구리야 산맥(Sierra de Segurilla)가 이어져 있었고 메데진 언덕과 세구리야 산맥 사이에는 좁은 협곡이 있었습니다.  이 협곡만 잘 틀어막으면 꽤 훌륭한 수비 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메데진 언덕과 탈라베라 사이의 텅빈 공간은 오히려 더 좋은 방어 조건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곳은 평탄한 평원인 대신, 그에 맞게 올리브 나무들이 울창하게 심어져 있었고 거기에 올리브 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한 돌담까지 잘 만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Talavera de La Reina, 여왕의 탈라베라)라는 이 소도시 자체도 중세 시절의 아담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근대적인 포격전에는 못 버티더라도 총격전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어진지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도 남아있는 탈라베라의 성벽 일부입니다.  탈라베라를 감싼 성벽은 사실 성벽이라기보다는 한양 도성처럼 city wall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중세에 만들어진 것이라 근대적 포격을 버틸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보병 전투에서는 여전히 훌륭한 방어벽 역할을 했습니다.)




웰슬리는 스페인군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부하인 영국군 사병들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웰슬리는 스페인군의 사병들은 물론 장교들, 심지어 쿠에스타 장군도 믿기는 커녕 경멸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는 27일 프랑스군에게 쫓기다시피 허둥지둥 탈라베라로 들어온 스페인군에게는 언덕 후사면을 이용하는 고급(?) 방어전술을 구사할 능력이 없다고 보고 상대적으로 더 견고한 위치인 남쪽 전선, 즉 메데진 언덕과 탈라베라 사이의 돌담으로 둘러싸인 올리브 밭을 맡도록 제안했습니다.  쿠에스타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약 1년 전에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안달루시아 지방에 펼쳐진 올리브 밭을 보고 그 규모가 하도 광대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저 사진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온 산과 들판이 모조리 올리브 나무로 가득하더군요.)




빅토르가 이끄는 프랑스군 제1 군단 본진은 27일 오후에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알베르체 강을 건넜습니다.  빅토르의 프랑스군은 가볍게 볼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27일 낮 쿠에스타의 후퇴를 지원하러 웰슬리가 내보낸 영국군 보병 연대와 기병대는 서투르게 움직이다 서로의 거리를 필요 이상으로 떨어뜨리는 작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노련한 빅토르는 그 작고 짧은 틈은 덮쳐 영국군을 400명이라는 큰 숫자의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빅토르는 무척이나 부지런하고 투지가 넘치는 전형적인 나폴레옹의 부하였습니다.  혼쭐이 나서 물러난 영국군과 스페인군은 저녁 무렵이 되자 일단 오늘 전투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녁 7시 경 연합군의 방어선 앞에 도착한 빅토르는 스페인군의 방어선을 확인하고자 탈라베라와 메데진 언덕 사이의 올리브 밭 쪽으로 소수의 정찰 기병대를 내보냈는데, 여기서 그만 사고가 터집니다.  저 멀리 나타난 프랑스군 기병대를 보고 흥분한 스페인군이, 아직 그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더 꼴불견이었던 것은 그 일제 사격 직후 머스켓 소총을 쏜 스페인군 병사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공포에 질려 '배신이다'를 외치며 방어선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점이었습니다.  영국 측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렇게 도망친 스페인군은 탈라베라 시내까지 도망쳐 들어간 뒤 시내 술집을 습격하여 와인을 퍼마셨다고 합니다만,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여기서 도망친 스페인군은 약 2천명에 불과(?)했습니다.  작은 수는 아니지만 전체 3만4천 중 3만2천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겁에 질려 도망친 2천명은 쿠에스타가 출동시킨 스페인 기병대에 의해 곧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스페인군 전체가 어이없이 이렇게 무너졌다면 영국군의 작은 실수도 포착하던 빅토르가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겠지요.


이 사건이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빅토르는 연합군의 방어선 지형을 면밀히 관찰해 본 뒤, 웰슬리가 의도하던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탈라베라와 메데진 언덕 사이의 올리브 밭은 상당히 견고한 방어선이므로 차라리 메데진 언덕을 공격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군의 상태로 볼 때 영국군이 무너지면 스페인군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므로, 영국군이 맡은 메데진에 전력을 기울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빅토르의 모든 생각이 웰슬리가 예상했던 범주 내에 들어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빅토르는 웰슬리의 예상과는 반대로, 27일 밤 영국군이 편하게 잠을 자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빅토르에게는 서둘러야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를 독차지하고 싶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그렇다치고, 그는 경멸하던 조제프 왕과 주르당의 지휘를 받아가며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빅토르는 한밤 중에 뤼팽(Ruffin) 장군의 사단을 출동시켜 영국군 방어선 중 가장 강력한 부분이었던 메데진 언덕 정상부를 들이쳤습니다.  거길 탈취하면 영국군은 물러날 것이고, 그러면 스페인군도 물러날 것이라는 계산이었지요.  그러나 과욕은 실수를 낳는 법입니다.  게다가 평소 나폴레옹이 야간 전투를 싫어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뤼팽 사단 3개 연대 중 무려 2개 연대가 어둠 속에 길을 잃고 엉뚱한 곳을 헤맸고, 목표 지점에 제대로 접근한 것은 약 1600명 규모인 제9 경보병 연대 하나 뿐이었던 것입니다.  



(세구리야 산맥에서 내려다본 메데진 언덕입니다.)




이렇게 고작 1개 연대 병력으로 영국군 방어선 중 가장 단단한 곳을 들이친 프랑스군의 공세는 산산조각 나면서 좌절되었을까요 ?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능선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던 KGL(King's German Legion, 하노버 출신의 독일인들로 구성된 영국군) 여단을 삽시간에 격파하고 메데전 언덕 최정상부를 점령했습니다.  웰링턴이 철석같이 의지하려고 했던 메데진 언덕이 어이없이 떨어지는 순간이었고, 어쩌면 이대로 탈라베라 전투의 끝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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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비니우스 2018.03.10 1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참 신기한게 4년전에 트라팔가스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스페인군을 박살냈는데 이번엔 영국-스페인군이 프랑스군을 박살내려 하고... 7년 전쟁 직전에 있었던 동맹의 역전도 그렇고 유럽 외교는 참 다이나믹합니다 ㄷㄷ

  2. 수비니우스 2018.03.10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댓글 후열독하다가 "탈라베라를 감싼 성벽은 사실 성벽이라기보다는 한양 도성처럼 city wall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라는 부분이 훅 와닿네요. 동대문으로부터 북소문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길을 일년에 한두번씩 가는데 산세가 꽤 험해서 이거 짓느라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18.7km나 되는 이 성곽은 정작 임진왜란-이괄의 난-정묘병자호란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죠. 길이는 너무 긴데 높이는 5m정도 밖에 안되서 제대로 된 농성을 할수 없다고 본 조정이 바로 한양을 버리고 몽진했으니까요. 이럴꺼면 왜 지었을까 싶습니다. 왕도에 성벽이 없으면 모양이 빠지긴 하지만 북대문쪽을 개고생하며 지었을걸 생각하면 진짜 왜지었을까 싶어요. 근대 일본의 오사카성이나 에도성 아니면 고대 한국의 (신라가 지은) 삼년산성이나 (백제가 지은) 진주성 같이 지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3. 발음충 2018.03.11 15: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Medellin은 메데인이 정확한 발음 같습니다

    • nasica 2018.03.11 18: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에는 메데인이라고 쓰려고 했는데 (영화 '시카리오'에서 메데인이라는 단어를 자막으로 봤거든요), 혹시나 싶어 다음 site에서 확인을 해보니 제 귀에는 '메데진'이라고 들리더라구요. 일단 귀에 들리는대로 쓰자는 생각에 메데진이라고 표기했습니다.

      https://ko.forvo.com/search/Medell%C3%ADn/

  4. 발음충 2018.03.11 15: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Medellín (Spanish pronunciation: [meðeˈʝin] 인데 ʝ은 y 발음이기 때문입니다

  5. 발음충 2018.03.11 15: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데인 카르텔'이 유명합니다.

  6. reinhardt100 2018.03.11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흔히 말하는 'city wall'이라는 서구식 용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동양적으로 보면 상당히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탈라베라 성벽같은 스타일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에서의 공성전 이전, 즉, 중세식 스타일의 성벽이긴 합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는 말 그대로 전면전 수준의 회전보다는 흔히 말하는 '고정되지 않은' 휴전선의 GOP나 GP같은 전방의 소규모 기지 하나하나를 서로 치고 들어가서 탈취하면서 덤으로 노예로 쓰거나 팔아먹을 포로 및 물자 약탈에 좀더 치우쳐 있다보니 저런 스타일의 성벽들이 꽤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병만 가지고는 공성전을 한다는 건 사실상 말도 안 되니까요.

    흔히 프랑스 혁명전쟁의 만토바와 야파,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바다호스니 함부르크등의 공성전이 있긴 하지만 주 전투가 거진 다 회전화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6-17세기, 정확히는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까지는 오히려 공성전의 전성시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플랑드르와 북프랑스를 중심으로 수백개의 요새들이 건설되면서 독립하려는 네덜란드 공화국과 이를 막으려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 사이에서 거진 80년 전쟁 중반부터는 매년 공성전이 벌어졌으니까요. 당장 유명한것만 따져도 오스탕스, 브레다, 스헤르트헨보스, 그룬로, 올덴잘, 엠덴, 울리히 같은 요새들입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정면 회전을 할 수는 없던 네덜란드가 무한정의 재력을 바탕으로 에스파냐를 소모시키는 전략으로 나갔으니까요. 동시대, 베네치아 역시 동지중해의 주요 거점을 모조리 요새로 도배해버리면서 터키제국의 공세를 최대한 막아내는 방식으로 싸웠기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30년 전쟁, 1630년대 중반 신교도측, 특히 스웨덴군을 패전 직전에서 구해낸 결전수단이 연안 요새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자금지원 및 해군력에 의한 보급을 통해 가톨릭동맹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방식이었다는 겁니다. 이게 먹히면서 켐니츠니 비트슈토크 같은 전투로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얀카우등에서 야전에서의 절대우세를 확보하는데 성공. 결국 승전을 이끌어낸 방식이다보니 공성전 중심으로 전쟁의 진행방식이 한동안 이루어집니다.

    다만, 공성전 중심의 전쟁 진행은 지나친 소모전이다보니 재정부담이 극심했었고 평시에도 국가예산을 꽤나 잡아먹는 형국이었습니다. 17세기 후반 공성전의 대가인 보방후작이 프랑스국경지대에 건설한 요새가 대충 300개 이상인데 이걸 초기 종심방어형태로 몇개의 선에 걸쳐 건설하고 게다가 그 많은 요새의 설계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이미 예산이 미친듯이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보방이 8각형 요새 같은 규격화된 요새형식을 선보였지만 그런거로는 너무 부족했죠.

    18세기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는 공성전이 꽤 이루어지지만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슬슬 인지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말플라크, 드냉 같은 중요한 전투는 모두 야전으로 결정되었으니까요. 결정타를 날린 것은 7년 전쟁의 로스바흐, 로이텐 같은 프리드리히 2세의 기동전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준 겁니다. 이러다보니 나폴레옹전쟁에서는 주로 기동전, 회전 중심으로 전쟁이 진행되게 된니다.

  7. JPM 2018.03.12 0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웰즐리와 나폴레옹의 그릇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 — 이기면 다 잘하는거 아닌가요? ㅋㅋㅋ) 웰즐리는 해외원정군으로써 방어만 해도 이기는 전쟁이였고 나폴레옹과 대회전을 하는 전략적 목표가 달라서 방어우선과 공격중심의 전략이 나온거 아닐까 합니다. 아 물론, 그냥 해당 포스팅에서 비교하신 것만 생각한겁니다. 쓰다보니 또 나폴레옹은 열세에서도 공격을 외쳤네요. 어려운 교지만 둘 다 한끗발 하던 분들이니 비교가 힘든거 같습니다. 뭐, 그냥 웰즐리 변호를 한번 해보았습니다. 나시카님은 나폴레옹 vs 웰즐리를 어떻게 보시는지도 사실 조금 궁금하구요.

    • nasica 2018.03.12 0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웰슬리가 나폴레옹을 꺾었지만, 나폴레옹이 해낸 것을 웰슬리는 못 했을겁니다. 가령 대전차 미사일이 상황이 맞으면 탱크를 파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전차 미사일이 탱크보다 더 우수한 무기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8. 발음충 2018.03.12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 보고 찾아봤는데 메데진에 가까운 발음이 들리는 게 제가 알고 있던 얄팍한 지식에 너무 벗어나는게 신기해서 좀더 찾아보았더니
    이런 현상이 있나 보네요

    https://en.wikipedia.org/wiki/Yeísmo
    요약하자면 ll은 원칙적으로는 y 발음인데 스페인의 다양한 사투리나 남미 지방의 상이한 발음에 따라 z로 발음되는 경우도 많이 통용된다고 하네요
    Most dialects that merge the two sounds represented by ⟨ll⟩ and ⟨y⟩ realize the remaining sound as a voiced palatal fricative [ʝ], which is similar to the ⟨y⟩ in English your, but it sometimes sounds like ⟨j⟩ in English jar, especially after /n/ or /l/ or at the beginning of a word. For example, relleno is pronounced [reˈʝeno] and conllevar is pronounced [koɲɟ͡ʝeˈβaɾ] or [koɲdʒeˈβaɾ].

    Yeísmo has always been common in much of Latin America, mainly in lowlands, and in large areas in Spain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군단이었고 10만이 넘었으니까요.  그런 스페인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은 혹시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 같은 짓이 아니었을까요 ?


웰슬리도 나름 정보와 생각이 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 프랑스군의 상태는 웰슬리의 진격에 대해 그다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생 시르(St. Cyr)의 제7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동쪽의 카탈루냐 지방에 있었고, 수셰(Suchet)의 제3 군단은 그 바로 옆 아라곤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모르티에(Mortier)의 제5 군단도 마드리드 북쪽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주둔하고 있었고, 네(Ney)의 제6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갈리시아(Galicia)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Sebastiani)의 제4 군단은 마드리드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술트의 제2 군단은 웰슬리의 영국군에 의해 포르투갈에서 거지꼴로 막 쫓겨난 뒤 재정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빅토르의 제1 군단은 포르투갈 접경 지역의 구아디아나(Guadian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809년 5월말, 스페인 내 프랑스 7개 군단의 위치입니다.  전년도에 있었던 바일렌에서의 뒤퐁의 대패 덕분에, 아직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는 프랑스군이 발을 못 붙이고 있었고,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가 스페인 저항군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도 속의 붉은색 지점 표시 부분이 바로 탈라베라입니다. )




웰링턴에게 주어진 공격 루트는 크게 2가지였습니다.  도우루(Douro) 강을 따라 술트를 추격하여 마무리짓는 것과, 훨씬 남쪽인 타호(Tajo, 포르투갈어로는 테주 Tejo, 영어로는 타거스 Tagus) 강을 따라 빅토르를 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다 강을 따라 가냐고요 ?  스페인에 비해 작고 약한 포르투갈이 독립국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지대의 지형이 무척 험하여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갈 수 있는 전통적인 교통로는 저 두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들이었습니다.  특히 리스본부터 타호 강가를 따라 가면 탈라베라(Talavera)와 톨레도(Toledo)를 거쳐 마드리드 인근의 아랑후에스(Aranjuez)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타호 강과 그 주변 강역도입니다. )




어떻게 생각하면 대포를 모두 잃은데다 만신창이가 되었고, 또 바로 발 뒤꿈치까지 따라잡은 술트의 뒤를 계속 추격하는 것이 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과감히 방향을 선회하여, 저 남쪽의 타호 강을 따라 진격하여 빅토르를 격파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무래도 2만 정도의 병력만으로 스페인 내부로 진격하는 것은 무척 버거운 일이었는데, 스페인 쿠에스타(Cuesta) 장군이 협동 작전을 요청해온 것입니다.  쿠에스타에게는 약 3만의 병력이 있었으니 영국군에게 이 제안은 무척이나 솔깃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상황을 보니 만약 빅토르만 성공적으로 격파한다면, 마드리드까지 일사천리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잘 하면 분산된 프랑스군의 의표를 찔러 마드리드를 기습 점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점령한 뒤 과연 마드리드를 지켜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런 승리는 큰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웰슬리는 출세욕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아일랜드 모닝턴(Earl of Mornington) 백작의 3남에 불과했으므로 철저한 장자 상속권을 따르는 영국 귀족 사회의 전통에 따라 그는 백작도 자작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자신을 아일랜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개인적 목표는 잉글랜드 내의 어느 근사한 영지에 대해 작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웰슬리는 야심찬 행군을 시작했으나, 군사작전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작전이 생각했던 것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빅토르의 군단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웰슬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조달에 의존하는 프랑스군 특성상, 빅토르가 주둔하고 있던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 지방의 구아디나아에서는 식량이 바닥났던 것입니다.  쿠에스타의 스페인군도 견제할 겸 식량도 구할 겸, 빅토르의 제1 군단은 마드리드 쪽에 좀더 가까운 탈라베라(Talvera)로 이동했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빅토르의 제1 군단은 1만9천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해, 연합군은 영국군 2만에 스페인군 3만이라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보력에서도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민간 게릴라들이 주요 도로와 시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군단 간에 전통문을 주고 받는 것도 쉽지 않았고 소규모 정찰대를 운영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빅토르를 비롯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스페인 진입을 7월 9일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68세이던 쿠에스타 장군에 대해 겁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돈키호테 같은 아집과 오만,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은 매력적인 연합군 파트너가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엉뚱한 오해가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발목을 잡습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Sevilla) 지방 정부격인 훈타(Junta)에서 영국군을 좀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웰슬리를 스페인군 전체의 통합 사령관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작 웰슬리 본인은 오직 잉글랜드 작위에만 관심이 있었던지라, 무능하고 믿을 수 없는 스페인군의 총사령관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쿠에스타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원래 영국과 스페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 해적왕 드레이크 이야기에서 짐작하시듯 아메리카 대륙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죽어라 싸우던 사이로서, 그 민족 감정은 꽤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더 큰 적 나폴레옹에 맞서기 위해 연합을 맺은 관계라고 해도, 오만하고 재수없는 영국 장군이 스페인군에게 지휘관 노릇을 하며 이래라저래라 명령질을 하는 모습은 스페인 장군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웰슬리에게 합동 작전을 펼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쿠에스타가 웰슬리에게 갑자기 퉁명스럽게 대하며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덕분에 웰슬리와 쿠에스타 사이에 구체적 합동 작전 계획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망친 것은 쿠에스타의 질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항상 산더미같은 염장 쇠고기와 럼주를 끼고 다녀야 했던 영국군의 특성 때문에 영국군의 진격은 너무 느렸습니다.  6월 8일 포르투갈 내 타호 강 계곡 지역인 아브란치스(Abrantes)에 도착한 영국군은 거의 3주간 그 지역에서 허송세월했는데, 이는 쿠에스타의 딴지 때문만은 아니었고 영국군을 위한 염장 쇠고기와 럼주 등 군량 창고를 짓고 물자를 집적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웰슬리는 6월 28일에야 아브란치스를 떠나 7월 3일에야 스페인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포르투 전투 이후 거의 2달이 지나서야 이렇게 스페인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빅토르는 영국군의 진입을 모른 채 쿠에스타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웰슬리는 여전히 빅토르의 옆구리를 기습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에는 없던 변수가 생겼습니다.  빅토르가 위치를 잡은 탈라베라는 전보다 훨씬 마드리드에 가까운 곳이었고, 더 나쁜 것은 세바스티아니의 프랑스군 제4 군단과도 더 가까와졌다는 것입니다.  웰슬리가 꿈꿨던 것은 쿠에스타와 빅토르가 서로의 멱살을 쥐고 뒹구는 사이에 살짝 다가가 빅토르의 옆구리에 연장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바스티아니가 바로 옆에 서있다면 현장 분위기가 그다지 친영국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 귀족들로 구성된 스페인군 수뇌부의 모든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네가스 장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스페인군이 제시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와 대치 중이던 베네가스(Francisco Javier Venegas) 장군의 라 만차 군(Ejército de La Mancha)이 세바스티아니를 적절히 견제하여 서쪽의 빅토르를 지원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쉬운 군사 작전이 서면 상의 작전이었습니다.  베네가스는 스페인 귀족다운 풍모와 위엄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귀족이 갖춘 것 그것 뿐이었습니다.  군사적 재능이라고는 1도 없었던 그는 이미 그 해 1월에 벌어진 우클레스(Uclés) 전투에서 고작 1만 조금 넘는 병력을 가지고 아무 상황 판단을 못 한 채 1만5천의 우세한 병력을 가진 빅토르에게 달려들었다가 1천의 사상자와 6천의 포로를 내는 참패를 겪은 바 있었습니다.  만약 스페인이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였다면,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그저 귀족의 체면을 위해 돌격했다가 1만군을 통째로 전멸시킨 베네가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철저한 귀족 중심 사회였고,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베네가스가 받은 것은 군법회의 출두명령서 대신 2만3천의 병력을 갖춘 라 만차 군 사령관 임명장이었습니다.


베네가스에게 주어진 명령은 2만 병력의 프랑스 제4 군단을 공격하여 분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섣부른 전투를 피하되 세바스티아니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빅토르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잘 대치하고 있으라는 간단한 명령이었지요.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간단한 명령조차 완수하지 못하는 신박함을 보여주었습니다.  7월 초, 마침내 웰슬리의 영국군이 탈라베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프랑스군이 조제프 왕과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다 이끌고 탈라베라로 달려갈 때, 베네가스 앞에 있던 세바스티아니도 서둘러 탈라베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뒷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베네가스에게 완전히 또다른 기회를 주었습니다.  마드리드가 바로 코 앞인데, 그의 앞을 가로 막을 인근의 프랑스군이 모조리 탈라베라로 가버린 것입니다.  베네가스는 이때 2가지 꽃놀이 패를 쥐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의 뒤를 쫓아 탈라베라로 이동한 뒤 쿠에스타 및 웰슬리와 연합하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데 일조할 수도 있었고, 또는 아예 텅 빈 마드리드로 진격하여 수도를 탈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네가스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대체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약 1달 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다른 부대들과 합동 작전을 펼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베네가스는 후퇴하라는 쿠에스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굳이 세바스티아니와 전투를 벌였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는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시고 일단은 탈라베라 전투에 집중하겠습니다.


이렇게 베네가스가 삽질을 해주는 덕분에 프랑스군은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뿐만 아니라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그의 보좌관 주르당(Jourdan) 원수가 이끄는 마드리드 수비대 및 2개 용기병 사단 총 1만1천까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탈라베라에서의 힘의 균형은 영국-스페인 연합군 5만5천에 프랑스군 4만6천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된 셈이었으나 여전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 분명한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영국-스페인은 불신과 반목으로 얼룩진 어설픈 연합군이었습니다.  스페인 국왕 조제프가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단일 정예군과의 대결에서는 불리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또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Tagu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co_Javier_Venega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mona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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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몽키D루피 2018.02.25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처음으로 1등~! ^0^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2. reinhardt100 2018.02.2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빅토르가 후퇴한 엑스트라마두라 지역은 전통적으로 에스파냐 농촌 지역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편인 지역입니다. 16세기 신대륙을 정복한 콩키스타도르 (라)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인것만 해도 이미 드러나니까요.

    이베리아 반도 지역 자체가 프랑스군이 주전장으로 싸워왔던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 폴란드보다도 사실 더 빈곤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는 적어도 개별 가구에서는 약탈할게 있었고, 폴란드 같은 경우는 추워서 그렇지, 적어도 보급선이 끊길 우려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이베리아 반도는 수자원이 현재와 마찬가지로 꽤나 부족해서 농업생산력이 낮은데다가 메스타라는 목양조합의 영향까지 겹치면서 농민들의 삶은 완전 박살난 수준이 되었으니까요. 에스파냐 왕실 역시 이걸 도저히 묵과할 수는 없었고, 신대륙의 식민지가 독립하기 전 국가예산의 상당수를 신대륙에서 오는 정화준비 수송선단에 의존했고, '페닌술라에스'라 하여 에스파냐 본토 출신들을 의도적으로 우대, 신대륙으로 보내려고도 노력하긴 합니다.

    웰링턴이 술트를 추격하지 못한데는 지형상, 교통편상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탄약소모가 있었습니다. 염장쇠고기같은거야 극단적으로 보면 길가는(?) 소 한 마리 잡아서 먹으면 되지만 탄약은 그게 안 되었으니까요. 특히 영국군이 자랑하는 '씬 레드라인'의 탄막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탄약이 미친듯이 들어갔는데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는 그 많은 탄약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방법이 없었고 전쟁 내내 본국에서 조달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총검의 원조국가답게 17세기 네덜란드 전쟁 당시부터 이미 총검돌격전이 되면 막을 군대가 없다고 할 정도인 프랑스군과의 총검돌격전을 어떻게든 막으려면 더욱 탄약이 중요했죠. 이러다보니 진격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nasica 2018.02.25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18.02.25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웰링턴이 그토록 공명에 집착한 이유가 형이었던 동인도회사의 인도 총독인 웰즐리 후작의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사실, 웰링턴이 워털루 전투의 승장이라는 명성에 가려서 그렇지 형 웰즐리 후작이 미친 영향은 훨씬 큽니다. 최초의 귀족 출신 총독으로써 전임자이던 동인도회사 사원 출신이던 헤이스팅스의 업적을 '(이후의 오클랜드와 아머스트 같은) 무모한 확장정책으로 말아먹지 않고서' 인도 제패에 시동을 걸었다는 겁니다. 웰즐리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귀족들에 대한 의구심을 어느 정도 걷고 콘월리스 등의 후임 귀족출신 총독들도 계속해서 선임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웰즐리 후작이 현대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매관매직이 판치던 영국에 '공정한 시험에 의한 (능력주의에 근거한)선발'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동인도회사 사원 및 인도통치에 소요되는 행정관 및 장교들을 다수의 학원 및 사관학교를 통해 모집, 충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는 당시 임원진의 사원입사 추천권을 정면으로 건드리면서 의회 내 인도족과 회사내 해운족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되어 정책 자체가 폐지되지만 1853년의 추밀원령에 의한 제국고등문관시험제도 정비가 시작되면서 이후에 결실을 맺게 됩니다.

    • 카를대공 2018.03.04 0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렇게 보니 형제가 위인이네요.
      그것도 둘 다 영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엄청 크구요.

  3. 에로준 2018.02.25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글과 좋은 댓글 입니다.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4. 석총 2018.02.28 1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웰링턴은 웰슬리와 모닝턴의 스펠링을 합친거죠
    사실 귀족의 차남이 작위를 받으면 분가하는게 원칙이고 귀족명을 모닝턴과 성인 웰슬리를 합쳐서 웰링턴이 되었죠

  5. BACCANO 2018.03.08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네가스 무능함의 끝판왕이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