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rnblower and the Hot Spur by C.S.Forester (배경 1803년 영국 플리머스 항 외곽) ------


(작은 슬룹선 핫스퍼 호를 끌고 막 플리머스 항에 닻을 내린 혼블로워 함장은 결혼한지 얼마 안된 상태이고, 아내의 얼굴을 본 지도 몇달 된 상태입니다.  프랑스 항구를 봉쇄해야 하는 임무 특성상, 그에게는 육지에 잠깐이라도 상륙하여 아내를 볼 여가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당장은 함대 사령관의 기함에서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전갈이 온 상태라서, 식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야 하는 상태인데, 저 멀리 부두가에 자신의 아내 마리아가 와서 손수건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습니다.)


혼블로워는 지금 이 순간처럼 해군 복무가 노예 생활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그는 총사령관과 식사를 하기 위해 당장 배를 떠나야 했고, 해군의 전통인 시간 엄수는 그가 도저히 어길 수 없는 전통이었다.  게다가 지금 포어맨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미스터 부쉬로부터의 전갈입니다, 함장님.  (기함으로 떠날) 보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  부쉬에게 부탁하여 마리아에게 편지를 대신 써서 부둣가에 전달해달라고 할까 ? 그건 아니었다.  그렇게 할 경우 식사 시간에 늦을 위험이 있는데다, 마리아에게 누군가가 대신 쓴 전갈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그는 왼손잡이용 깃털펜으로 황급히 휘갈겨 써내려갔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당신을 멀리서나마 보게 되어 너무 기뻤소.  하지만 아직 조금도 시간 여유가 없구료.  나중에 좀더 길게 쓰리다.


당신의 헌신적인 남편,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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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장면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해군 장교의 생활과 모험을 그린 C.S. Forester의 역작 Hornblower 시리즈 중의 한장면입니다.  국내에서는 연경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식으로 엮은 제 1권은 별로 재미없으니 건너 뛰시고, 제 2권 'Lieutenant Hornblower'부터 보시면 좋습니다.


여기서는 해군 장교로서의 임무와 남편으로서의 개인적인 사정 사이에 치여서 어쩔 줄 몰라하는 혼블로워의 고뇌가 엿보입니다.  혼블로워는 소심한 남자지만 항상 국왕에 대한 임무를 우선으로 하지요.  하지만 윗 장면만 보고도,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혼블로워네 집안 형편이 넉넉한지 아닌지를 아실 수 있습니다.  어느 부분이 그러냐고요 ?  바로 저 왼손잡이용 깃털펜 (left-handed quill)입니다.  혼블로워는 오른손잡이거든요.




깃털펜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널리 쓰이던 펜입니다.  사실은 깃털펜은 나폴레옹 전쟁때 거의 전성기의 마지막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깃털펜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 사용된 필기구입니다.  대략 7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해서 19세기 초반까지 사용되었으니 무려 1100년 넘게 사용된 것이지요.  그리스인들이 석판과 철필, 로마인들이 갈대펜 등을 써왔지만 모두 1천년 넘게 사용된 필기구들은 아닙니다.


깃털펜은 보통 거위의 날개깃털로 만들었습니다.  날개의 큰 깃털은 그 심의 가운데가 비어 있기 때문에, 그 홈 속에 잉크를 품었다가 모세관 현상에 의해 조금씩 흘려주므로 펜으로 사용하기에 딱 좋았던 것입니다.  손에 쥐기에도 꽤 적절하고요.  무엇보다도 깃털심 특유의 탄력있으면서도 견고한 재질상, 그것으로 쓴 글씨는 날카로운 필체를 주므로 예쁜 글씨가 나왔습니다.  강철촉을 단 펜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공주에게 새장가를 가던 1810년 미국에서 특허 출원이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상당히 늦지요 ?  사실 이 강철촉 펜의 기본 원리는 깃털펜에서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그나마 이 강철촉 펜이 대량 생산된 것은 1860년대에서였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깃털펜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거위 깃털로 만들었지만, 더 비싼 것은 백조의 깃털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거위 깃털로 만든 펜이라도 가격대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날개의 깃털 그림을 보면 아시겠지만, 날개 깃털이라고 다 펜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맨 바깥 쪽의 큰 깃털들(아래 그림 1번 부분)만을 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맨 바깥 쪽에서 2번째와 3번째 깃털이 가장 좋았고, 안쪽으로 들어올 수록 그 가격이 떨어졌습니다.  왜 맨 바깥 쪽 깃털은 왜 안좋았냐고요 ?  아래 그림 보십시요.  좀 짧쟎습니까 ?




게다가 생각할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날개에는 왼쪽과 오른쪽이 있쟎습니까 ?  그 중에서도 왼쪽 날개의 깃털로 만든 펜이 더 인기가 있었습니다.  왼쪽 날개에서 나온 깃털은 오른쪽으로 약간 굽어져 있기 때문에, 오른손잡이인 사람이 쓰면 깃털이 오른쪽 바깥으로 휘게 되어 쓰기에 더 편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오른쪽 날개에서 나온 깃털은 왼쪽으로 휘었기 때문에, 오른손잡이가 그런 깃털펜을 쓰려면 긴 깃털이 얼굴쪽으로 향하게 되어 무척 성가셨습니다.  모든 거위는 왼쪽과 오른쪽 날개가 하나씩 있는 것에 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당연히 오른쪽 날개 깃털로 만든 펜은 가격이 훨씬 더 쌌습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혼블로워는 왼손잡이용 오른쪽 날개 깃털로 만든 깃털펜을 썼던 것입니다.



(깃털펜을 깎는 회계사 - Van Dijk 작) 




이런 깃털펜으로 서류를 쓰자면 필요한 것들이 꽤 많았습니다.  깃털펜의 촉 부분은 한번 깎아놓으면 약 1주일 정도 밖에 못 썼기 때문에, 자주 펜 끝을 깎아주어야 했고, 그러자면 특수한 칼 (pen-knife라고 하는 칼)이 따로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깃털펜 촉 부분을 단련해주기 위해서 뜨거운 재 속에서 저어주다가 눌러주고 다시 끓는 물에 촉 부분만 삶는 등 복잡한 처리도 해주어야 했고, 잉크를 말리기 위해 압지용 모래, 또는 작은 석탄 풍로가 서재에 있어야 했습니다.





(깃털펜을 깎는 도구 및 깃털펜 가공 후 그 촉의 모습. 사진 출처 - http://www.flick.com/~liralen/quills/quills.html )




이렇듯 깃털펜은 예쁜 글씨를 쓰는 데는 좋을지 몰라도, 야전에서 간단한 명령서를 쓸 때는 매우 부적절했습니다.  당시 군대에서는 포탄이 바로 옆에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뭔가 명령을 내릴 때는 반드시 명령 문서를 작성해서 보냈거든요.  이때는 어떤 필기구를 써야 했을까요 ?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9년 포르투갈 북부) ----------------


"호간 대위가 제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샤프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내가 다른 명령을 내리지."  크리스토퍼 대령은 마치 아주 어린 꼬마를 다루는 듯한 관대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안장 앞머리는 넓고 평평해서 종이를 올려놓고 쓸 만한 공간이 나왔고, 그는 여기에 공책을 올려놓고 연필을 꺼냈다.  바로 그때 능선 위의 붉은 꽃들이 피어있는 나무 숲에 프랑스군의 대포알이 꽂히면서 꽃잎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프랑스 놈들 벚꽃하고 전쟁을 하는구만."  크리스토퍼 대령은 가볍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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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인용된 소설의 한 구절처럼, 야전에서 사용된 것은 바로 연필(鉛筆)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연필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때 위의 크리스토퍼 대령처럼 영국군이 사용하던 연필과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연필, 그리고 독일군이 사용하던 연필은 모두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그 연필심에 있엇습니다.


연필심이라... 영국, 프랑스, 독일의 연필심 차이를 보기 전에, 잠깐 생각해보지요.  가만히 보면, 연필의 연(鉛)자는 납을 뜻합니다.  왜 납일까요 ?


연필을 뜻하는 영어는 pencil입니다만, 이 단어의 어원은 작은 꼬리를 뜻하는 라틴어인 pencillus에서 나온 것입니다.  납과는 무관합니다.  그리고 연필은 다들 아시다시피 흑연과 나무로 만드는 것입니다.  역시 납과는 무관합니다.  하지만 독일어로는 연필이 Bleistift 이고, 이는 '납 막대기'를 뜻합니다.  또 영어에서도 연필심은 lead, 즉 납이라고 부릅니다.  역시 연필은 뭔가 납과 상관이 있는 모양입니다.  연필심으로 쓰는 흑연에 납이라도 섞었던 것일까요 ?  다행히 그건 아닙니다. 


원래 연필의 시작은 16세기 영국이었습니다.  배로우데일(Borrowdale) 지방에서 엄청난 양의 순수 흑연광이 발견되었거든요.  이 흑연광에서 나온 흑연 덩어리는 매우 순수하고 단단해서, 분필같은 막대 형태로 잘라내어 뭔가 쓰기에 딱 좋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화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이 물질이 납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도 아직도 연필심을 lead(납)이라고 부르고, 또 우리나라 단어로도, 독일 단어로도 연필에는 납을 뜻하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흑연 덩어리는 영국의 Newcastle-upon-Tyne의 Newburn Haugh 지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배로우데일 흑연광산과 나폴레옹 전쟁은 근대적인 연필의 개발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선, 이 영국 배로우데일 지방의 흑연광은 그 양이나 순도에 있어서 유럽 최고를 자랑했습니다.  초기에는 이 흑연을 포탄을 주조하는 거푸집 안쪽에 바르는 재료로 썼는데, 전략 물자라고 해서 이 광산을 영국 왕실에서 인수했고, 외국에 수출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흑연이 포탄 거푸집 뿐만 아니라 미술용 스케치 재료로 쓰면 끝내준다는 사실이 유럽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흑연심을 나무틀 속에 넣어서 쓰는 방법을 개발했고, 곧 이어 두개의 나무판 사이에 홈을 파고 연필심을 넣은 후 접착, 절단하여 오늘날의 연필같은 형태가 개발되었습니다.


(초창기의 연필) 


 


하지만 문제는 역시 연필심이었습니다.  영국 말고 다른 지역에서도 흑연광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진행되었고, 실제로 많은 곳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만, 배로우데일산 흑연처럼 순수한 것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불순물이 섞인 흑연은 도저히 연필로 사용할 수가 없었고, 불순물을 빼내자면 부숴서 가루를 내야 했습니다.  결국 영국산 순수 자연산 연필은 계속 독점을 누렸고, 1860년대까지도 영국산 연필은 모두 자연산 흑연을 그대로 잘라 만든 심을 썼습니다.  한마디로 품질이 최고였지요.  1662년에 독일 뉴렌베르크(Nurenberg)에서 흑연 가루와 황, 안티몬을 섞어서 연필심을 만드는 방법이 만들어지기는 했습니다만, 영국의 자연산 연필심만은 못했습니다.



(자연산 연필심을 이용한 영국제 연필 제조법 - 당시 영국제 연필은 자연산 흑연 막대 모양에 맞춰 사각형이었습니다.) 




문제는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면서, 프랑스에서는 영국제이건 독일제이건 연필 수입이 딱 끊겨버렸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연필없이 전쟁할 수 있나요 ? 


프랑스에는 영국처럼 순수 자연산 흑연 광산은 없었지만, 뛰어난 인재는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군 장교이자 예술가, 엔지니어인 콩떼(Nicholas Jacques Conté, 1755년-1805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니콜라스 자크 콩떼 - 오우, 아주 인상적이신 모습이시네요.) 


 


이 양반은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까지 가서, 아부키르 해전 이후 프랑스로부터의 보급이 딱 끊긴 이후 프랑스군의 현지 기계 제작 전문가로 활약한 분입니다.  나폴레옹은 콩떼를 "아라비아 사막 한 가운데서도 프랑스의 예술혼을 꽃피울 수 있는 취향과 깊은 이해, 그리고 천재성을 가진 보편적 인물"이라고 평했습니다.  콩떼는 예술가말고도 재주가 많아서 프랑스 최초의 공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기구지요.  콩떼는 기구를 포격 제어 및 적진 정찰용으로 쓸 것을 주창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수소 가스의 제조 및 가스 주머니의 처리 방법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기구 부대) 


 


특히 콩떼는 이집트 카이로에 기구를 띄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의 목표 중 하나가 "문명의 발상지에 문명을 되돌려 준다"는 약간 믿어지지 않는 낭만적 이유도 있었거든요.  아무튼 그런 활동 중의 하나로, 프랑스의 과학 문명을 과시하기 위해 1798년에 카이로에서 수많은 이집트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구를 띄웠는데, 불행히도 첫번째 기구는 불에 타버려 이집트인들에게 "저건 하늘로부터 적진에 화공(火攻)을 가하는 무기인 모양"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주는 결과를 내버렸습니다.  두번째 기구는 좀더 컸고 10만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공적으로 하늘에 떴습니다만, 그 광경을 직접 본 이집트의 지식인인 알 자바르티(Al Jabarti)가 나중에 쓴 글에 "프랑스인들이 띄운 기구라는 것은 축제 때 카이로의 노예들이 띄우던 연 같은 것으로서, 저걸 타고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다는 건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라는 평가가 내려진 것으로 보아, 프랑스의 과학기술력을 이집트에 과시한다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암만 봐도 이집트인들이 프랑스 문명에 감탄하기 보다는,  프랑스 학자들이 이집트 문명에 감탄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


 


하지만 콩떼가 1795년, 현대식 연필심을 개발한 공로는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영국이나 독일로부터의 연필심 수입이 끊겨 고생하던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의 카르노(Lazare Carnot) 장군이 연필심을 개발해달라는 요청을 받은지 며칠만에, 콩떼는 흑연 가루에 찰흙을 섞어 구워서 단단하면서도 쓰기 좋은 연필심을 만들어냅니다.  또 연필심의 딱딱함도 이 과정 중에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고요.  덕분에 나폴레옹의 장교들도 영국군이 쓰는 자연산 연필심 못지 않게 훌륭한 연필을 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연필심은 (심지어 영국에서도) 바로 이 콩떼가 개발한 방법대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구워서 만든 둥근 연필심을 이용한 연필 제조법 - 오늘날의 것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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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8.05.03 1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문명의 발상지에 문명을 되돌려준다'
    정말 그럴듯한 명분이네요(웃음)!

  2. 대지의 2018.05.04 1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먼저 쓰신 글이신지 싶기도 하지만, 독립적으로도 글이 읽힐 수 있도록 이전에 다룬 내용도 요약해서 쓰시는 걸 보면 참 정성어린 열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ㅎㅎ
    문명의 근간이 되고 문명을 지배하는 언어를 다룰 도구가 보편화될 수 있게 한 점에서, 나폴레옹의 포부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도 좋군요 ㅎㅎ

  3. 정암 2018.05.16 1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걸 배우고 갑니다^^
    전쟁사도 좋지만 이런 생활사도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알수 있어 좋네요

주르당의 어설픈 라임으로 조롱 받으며 파리로 돌아온 쿠텔을 맞이한 것은 서슬퍼런 국민공회 공안위원회(le Comite de salut public)였습니다.  그렇다고 공안위원회가 쿠텔을 단두대로 보낸 것은 아니었고, 정반대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공안위원회는 당시 국내외 반혁명세력과의 투쟁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으므로, 과학을 통해 구시대의 적을 무찌른다고 하면 뭐든 해줄 기세였습니다.  샤또 드 뫼동(Chateau de Meudon)에서 몇 차례의 기구 기술에 대한 테스트가 이루어진 뒤, 공안위원회는 아예 세계 최초의 공군 무기창인 항공 개발 센터(le centre de developpement aerostatique)를 창설했습니다.  여기서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하고 무엇보다 현대적인 연필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학자 콩떼(Nicolas-Jacques Conte)가 연구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이 기관에서 기구의 형태와 재질, 수소 가스 생산의 효율화 등을 연구 발전시켰습니다.  




(콩테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로 간 학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넬슨에 의해 프랑스 함대가 궤멸되어 프랑스 본토와의 보급로가 완전히 끊어진 뒤에도 프랑스군이 보급품 부족으로 말라죽지 않은 것은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70% 정도는 콩테 덕분이었습니다.  콩테는 빵부터 땔감, 탄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현지에서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서 기구를 띄워올리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를 '모든 것에 뛰어난 재주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프랑스로 귀환한 이후 얼마 안되어 1805년 5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이 연구기관에서의 성과를 흡족하게 여긴 공안위원회는 1794년 4월 2일,  급기야 세계 최초의 공군인 기구 중대(la Compagnie d'Aerostiers)를 창설하기에 이릅니다.  이 중대는 손재주가 좋은 20명의 사병과 2명의 상병, 병장과 상사 1명씩, 그리고 대위와 그를 보좌할 중위 1명이 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위로는 주르당에게 조롱을 당했던 화학자 쿠텔, 그리고 중위로는 쿠텔의 조수였던 로몽이 임관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첨단 기술 부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도 첨단 기술에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정찰, 신호에 의한 통신, 그리고 선전물 배포였습니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바로 정보전이었지요.




(세계 최초의 공군 비행단장이 된 쿠텔(Jean-Marie-Joseph Coutelle)입니다.  그는 사실 제대로 된 화학자는 아니었고, 샤를의 법칙으로 유명한 샤를(Jacques Alexandre César Charles)과 친했던 덕분에 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엔지니어 정도였습니다.  그가 프랑스에 남긴 공로는 하나 더 있는데, 오늘날 파리 콩코드 광장에 이집트 현지에서 가져온 3천년 묵은 오벨리스크가 서있게 된 것에 그가 간접적으로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새롭게 창설된 이 기구 중대의 사기는 매우 높았습니다.  장교들은 자신들이 만든 과학 기구를 실제 상황에 적용하여 공화국으로부터 급여를 받아가며 조국을 위해 사용한다는 점에 희열을 느꼈습니다.  사병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대에 있으면 적의 총알이나 포탄에 맞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에서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창설 직후, 이 사기충천의 부대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다소 꺼림직한 것이었습니다.  벨가에 접경 지역의 모베르쥬(Mauberge)로 가서 다름 아닌 주르당의 부대에 합류하라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난 번과는 다른 점들이 좀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주르당에게 대놓고 조롱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쿠텔이 한낱 일반 시민(citoyen)이 아니라 당당한 육군 대위(capitaine)였고, 또 지난 번처럼 현금 5만 리브르를 달랑 들고 온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인상적인 물건을 들고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기구였습니다.  이름은 앙트르프레낭(L'Entreprenant) 호로서, 영화 스타 트렉에 나오는 우주선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호와 유사한 뜻이었습니다.  "진취적, 적극적"이라는 뜻이었지요.  


기구 중대는 도착과 동시에 가열로를 만들어 수소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앙트르프레낭 호의 첫 임무 비행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바로 6월 2일, 오스트리아군이 포격을 가해오자 그에 대한 정찰을 하기 위해 앙트르프레낭 호가 출격한 것입니다.  쿠텔은 아군 지역인 모베르쥬에서 떠오른 기구를 타고 오스트리아 및 네덜란드군의 동향을 훤히 내려다 보며 지상과 연결된 밧줄을 통해 상세한 보고서를 계속 내려보냈습니다.  기구에서 망원경을 통해 보면 거의 25km 밖의 상황까지 꽤 상세히 볼 수 있었으니 군용 정찰 활동에 있어서는 정말 꿈의 병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날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으므로, 이 날의 비행은 최초의 실전 투입으로 기록되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 측에서는 기구의 등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일이고 전쟁 규칙에 위반되는 일'이라며 프랑스군 측에게 항의하기도 했고, 앙트르프레낭 호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물론 사정거리 훨씬 밖에 있던 앙트르프레낭 호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앙트르프레낭 호의 비행은 뜻하지 않은 효과도 낳았습니다.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 장교들의 상당수는 교양 있는 신사 계급 출신이었고 따라서 기구라는 물건의 존재와 그 원리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시골 농촌 출신의 문맹자였던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 병사들은 프랑스군 상공에 난데없이 나타난 둥근 물체를 보고 '프랑스 놈들이 혁명을 하면서 성당과 신부들을 박해한다더니, 정말 악마가 프랑스 혁명군과 함께 한다'라며 겁을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전 측면에서의 효과는 곧 뒤이어 벌어질 플뢰뤼스 전투에서도 크게 발휘되었습니다.


모베르쥬에서의 작전을 끝낸 기구 중대에게 내려진 다음 명령은 샤를르루아(Charleroi)로 이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구는 어떻게 이동을 했을까요 ?  공군답게 모든 장비와 인력을 싣고 가볍게 두둥실 날아서 이동했을까요 ?  물론 아니었습니다.  요즘이라면 수소 가스를 빼서 기구를 납작하게 접은 뒤 트럭으로 실어나르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라브와지에-므니에 공법에 의해 싸고 쉽게 수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수소는 만들기 어려운 가스라서 그렇게 쉽게 버렸다가 재빨리 다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당장 작전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안된 방법은 과학기술 부대라는 이름이 쑥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즉, 무거운 추를 매달아 고도를 낮춘 기구에 밧줄을 연결하여 둥둥 띄운 채로, 24명의 병사들이 거의 50km에 걸친 거친 벌판을 가로질러 질질 끌고 이동했습니다.




(창공을 지배하는 자랑스러운 혁명의 날개인 공화국 공군의 웅장한 이동 모습입니다.  사실 저 상황에서 굳이 지휘 장교가 칼을 뽑아들고 지휘할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비록 이렇게 공군답지 못한 모양새로 이동하긴 했지만, 쿠텔의 기구 중대는 플뢰뤼스(Fleurus)에서 군사 역사에 있어 빛나는 한 장면을 만듭니다.  1794년 6월 26일, 플뢰뤼스 전투가 벌어지던 10시간 내내 앙트르프레낭 호는 전장 상공을 지키며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지상의 프랑스군 사령부, 그러니까 주르당에게 전달했습니다.  무선은 물론 유선 전화기도 없던 시절 무엇으로 통신을 했을까요 ?  간단했습니다.  쿠텔과 함께 기구에 탑승한 사단장 모를로(Antoine Morlot) 장군이 직접 망원경을 들고 관찰한 적의 동향을 종이에 적고, 그 쪽지와 작은 추를 담은 주머니를 고정시킨 밧줄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보낸 것입니다.   물론 정말 급한 상황에서는 깃발 신호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일설에는 쪽지 주머니를 그냥 지상으로 집어던졌다는 말도 있고 심지어 밧줄을 통해 지상에서 질문을 적은 쪽지를 올려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2가지였습니다.  이 플뢰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여 오스트리아군이 벨기에를 포기하고 물러났다는 것과, 쿠텔과 모를로 장군이 적어도 9시간 이상 공중에 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 둘이서 기구에 오를 때 어떤 메뉴의 도시락을 몇 끼 분이나 싸가지고 올라갔을까 하는 것과 화장실 처리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만, 아쉽게도 거기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플뢰뤼스 전투 모습을 그린 다른 그림입니다.  물론 기구 아래에서 용맹한 말을 타고 칼을 뽑아든 채 지휘를 하고 있는 분이 주르당 장군이십니다.  아마 주르당 장군은 자신이 본의 아니게 세계 공군사에 남긴 족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2가지 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과연 앙트르프레낭 호의 정찰 활동이 플뢰뤼스에서의 승리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판단은 쿠텔이나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주역이었던 주르당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르당 이 양반은 처음부터 이 괴짜 과학자들이 하는 풍선 놀음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 빛나는 승리의 공로를 당연히 미친 과학자들이 아니라 100% 자신의 공로로 가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르당의 승전 보고서에는 이 기구 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심드렁하게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적혔습니다.  하늘에 직접 떠있던 모를로 장군도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여타부타 아무 입장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안위원회 출신으로서 전투 내내 현장에 있던 정치인이자 저명한 화학자인 귀통(Louis-Bernard Guyton de Morveau)가 플뢰뤼스 승전에 있어서 기구 정찰의 효과에 대해 극찬을 해주었습니다.  역시 과학자들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해주는 것은 같은 동업자 뿐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공계 출신이 실험실이나 공장을 떠나 정관계를 기웃거리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귀통 드 모르보입니다.  이 분이 화학사에 남기신 공로 중 최고의 것은 화합물 작명법, 즉 chemical nomenclature입니다.  가령 탄소 하나에 산소 원자 2개가 붙은 가스를 이산화탄소 carbon dioxide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다 이 분 덕택입니다.)




실은 귀통은 기구 부대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플뢰뤼스 전투가 벌어지기 3일 전인 6월 23일, 이미 기구 부대 제2 중대 창설을 위한 법안이 국민공회에서 통과되었던 것입니다.  2기의 신형 기구 에르퀼(Hercule, 헤라클레스)과 엥트레피드(L'Intrépide, 대담하다는 뜻)를 지급받은 제2 중대는 콩테(Conté)에 의해 직접 훈련을 받았습니다.  수개월에 걸쳐 훈련을 마친 제2 중대는 1795년 3월 라인 방면군(Armée du Rhin)에 배속되었습니다.  그 지휘관은 역시 전세계에게 유일하게 실전 비행 경험을 가진 기구 중대장 쿠텔이 맡았고, 중위이던 로몽이 대위로 승진하면서 제1 중대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활약하는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 스타일이었던 콩테는 기구 학교장이 되어 이 2개 중대에 배속될 병사들의 훈련을 맡았습니다.  


이 제2 기구 중대는 라인 방면군의 진격을 따라 이동하며 독일 전선인 마인츠(Mainz) 전투 및 만하임(Mannheim) 전투 등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프랑스 혁명군의 날개가 되어 전장의 하늘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을 운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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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쇼펜하우어 2018.04.15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이 글과는 상관 없지만.... 갑자기 궁금한게 있는데 프랑스가 징병제였는데 그럼 우리나라처럼 의무 복무기간이 있었나요? 있었다면 몇 년 복무하고 제대했나요?

    • nasica 2018.04.15 2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르당 법안에 따르면 20세에서 25세까지, 그러니까 5년이 복무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전쟁을 확대해가면서 18세에서 25세, 즉 7년으로 늘어난 것 같습니다.

  2. 수비니우스 2018.04.15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터프라이즈 하면 태평양전쟁 때 대활약한 미국의 항공모함이 생각나는데 앙트르프레낭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프랑스 혁명기에서도 보게 되네요 ㅎㅎ 그런데 마지막 "그러나 이들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을 운명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이 제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흑흑

  3. Gg 2018.04.15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안위원회에서 신무기 개발 지도하는 모습은 소비에트 생각나게 하는군요
    비참한 운명 또한 비슷하게 정치적으로 ?

  4. 쇼펜하우어 2018.04.15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혹독했군요... 왜 목숨걸고 징병을 피하려고 했는지 알겠네요

  5. reinhardt100 2018.04.16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과학적 혁신을 가져온 신무기들이 다른 전쟁들과 달리 그렇게 많이 쓰이지 못합니다. 이유는? 각국의 재정이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했으니까요.

    프랑스야 워낙 유명하니 제쳐놓더라도 영국만 하더라도 국가 최대 기업 중 하나인 동인도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국가가 회사 경영에 개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구제금융을 해 주는 상황이었고,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은 7년 전쟁 당시의 부채 갚는데다 중간에 터진 바이에른 대공위 계승 전쟁 때문에 그 뒷처리 하느라 정신없었죠. 러시아도 터키와의 전쟁 및 계속된 사회 불안 요소 때문에 돈 나올 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덴마크나 스웨덴,에스파냐,포르투갈도 비슷했습니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군소국가들도 자기들 먹고 살기에 바쁜 판이었으니까요.

    이런 판국에 신무기 개발할 돈 대신 기존에 개발된 무기를 대량생산하든지 아니면 노획해서 쓰는 게 더 싸게 먹힐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6. 헤메메 2018.04.19 0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0대가 '젊은'나이에 '요절'한건 아닌거같아요. 제 학교선생님이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으셔요 ㅋㅋ 나시카님 블로그엔 좋고 재밌는 글들이 많아서 좋아요. 잘 읽고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