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건 진짜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명언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서 염치, 질서, 관용, 정의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들이 군복을 입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단치히나 기타 주요 군수 창고에 얼마나 많은 군수품이 쌓여 있든 당장 배가 고픈 군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11 경보병 연대 소속 쥬세페 벤투리니(Giuseppe Venturini)라는 피에몬테(Piemonte) 출신의 중위는 자신이 수행하는 '징발'로 인해 2~3백 가구가 당장 거지꼴이 되었다면서 마음이 아프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징발 결과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장교가 수행하는 징발은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및 징발 기술은 예술의 경지에 달한 것이어서, 다들 굶주리고 바쁜 와중에도 효율적으로 식량을 수집하고 적재적소에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빼앗기는 현지 주민들에게 영수증도 꼬박꼬박 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척박한 폴란드 현지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뒤져도 나오는 것이 거의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짜증이 난 병사들은 죄없는 폴란드 농민들의 집과 창고를 마구 때려부쉈습니다.  특히 이들은 각자의 소속 국가의 깃발 아래가 아니라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 군대의 깃발 아래 움직이는 것이다보니 몰염치가 더욱 심했습니다.  심지어 폴란드군까지도 폴란드 농민들을 마구 약탈했습니다.

제5 폴란드 기마 라이플병 연대의 18세짜리 소년 대위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자기들이 가져가는 것, 심지어 가져가기 원하는 것 이상으로 때려부쉈다.  민가에 들어가서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박살을 냈다.  창고에는 아예 불을 질렀다.  밀밭이 있을 경우, 그 한가운데로 말을 몰고 들어가 마구 짓밟으며 말에게 설익은 밀을 먹였는데, 먹이는 것 이상으로 많은 밀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이건 불과 두어 시간 뒤에는 뒤따르는 그들의 굶주린 동료들도 거기에 와서 말을 먹여야 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의미한 파괴행위였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그랑다르메가 집결하는 네만 강 서안 지역은 분명히 아군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길 가의 집들은 모두 창문이 깨지고 울타리는 장작불에 쓰느라 뜯겨졌으며, 많은 집들이 반쯤 무너져버렸습니다.  군복이 보이기만 하면 주민들이 도망치던 폴란드는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동프로이센에서는 이런 난장판에 민족적 감정까지 더해졌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는 작은 부상이든 티푸스든 어떤 군대에게나 낙오병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런 낙오병들은 동프로이센 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학살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 소속의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병사들도 습격 대상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랑다르메 병사들도 똑같은 적개심을 가지고 동프로이센 주민들을 대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예프 아빌(Jef Abbeel)이라는 병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숙영하는 마을마다 주민들의 가축을 필요 이상으로 모조리 도살하고 술과 식량을 빼앗는 것은 물론, 꽤 떨어진 인근 도시에 가서 자기들이 주문하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주민들을 내몰았습니다.  주문 품목 중 하나라도 못 구해오면 몽둥이 찜질로 교육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심하다고 주민들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주민들은 역시 또 흠씬 두들겨 맞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주민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은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슬라브인에 가깝다'라며 투덜거린 바 있습니다.  실제로 동프로이센은 독일화가 많이 진행되긴 했지만 원주민인 슬라브인들을 소수의 독일계 튜톤 기사단이 정복해서 만들어진 왕국이므로 힌덴부르크의 말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도 동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의 발상지인지라 프로이센 왕국에서 동프로이센이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컸습니다.  가령 윗그림의 1861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은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에서 열렸습니다.  이 빌헬름 1세가 어린 시절인 1806년 나폴레옹에게 쫓겨 엄마와 함께 메멜까지 도망쳐야 했던 어린 왕자가 맞습니다.  또 임마누엘 칸트도 바로 이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이지요.  지금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의 해군 도시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되었습니다.)  

 



앞서 나폴레옹이 대규모로 징집된 신병들의 숙련도에 대해 걱정하는 부하의 말에 대해 심리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이 중요하다며 일축했다는 일화를 언급했었지요.  그랬던 나폴레옹도 폴란드의 포즈난(Poznan)에 입성할 때 그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폴란드 비스툴라(Vistula) 군단을 실제로 보고는 꽤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 부대는 최근까지 스페인에 파견되어 있다가 러시아 원정을 위해 막 귀환한 상태였는데, 사상자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수의 신병들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 군단의 지휘관인 모르티에(Mortier)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너무 어리군.  내게 필요한 건 전장의 고생을 견딜 만한 병사들일세.  저렇게 어린 친구들은 야전 병원만 가득 채울 뿐이야."

 

 

(모르티에(Édouard Mortier) 원수입니다.  그의 이름은 재미있게도 프랑스어로 박격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훗날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 왕 밑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는데, 루이 필립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1835년의 폭탄 테러에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루이 필립이 그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편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다부 휘하의 제85 전열 보병 연대의 한 소령은 네만 강가에 도착할 때까지 신병의 20%를 잃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식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먼 길을 일정에 맞춰 행군을 하다보니 탈진과 질병, 소소한 부상으로 쓰러진 병사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도망병들도 많았고 심지어 자살하는 병사들도 꽤 있었습니다.  말의 경우는 더 심각했습니다.  1812년 봄은 특별히 기온이 낮았습니다.  이로 인해 곡식 뿐만 아니라 풀도 늦게 싹을 틔웠습니다.  나폴레옹이 굳이 6월 말까지 러시아 원정을 기다린 것은 말이 부족한 사료 대신 뜯어 먹을 풀이 충분히 자라길 기다린 것이었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근위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린 초지의 풀을 잘라 걷어들였는데, 그게 다 떨어지자 밀과 보리, 귀리를 걷어들여야 했는데, 그것들은 이제 막 싹이 튼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해 수확을 망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말들에게 최악의 사료를 주면서 중노동을 시키느라 말들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흔히 말 사료라고 하면 귀리나 옥수수를 떠올리는데, 의외로 말은 세심하게 사료 성분을 조정해주어야 한답니다.  가령 귀리에는 인 성분이 풍부하고 칼슘이 부족한데, 이는 말에게 필요한 비율인 칼슘:인 = 2:1과는 정반대의 비율이라서 귀리 위주로 사료를 줄 때는 반드시 석회가루 같은 것을 추가해서 칼슘 성분을 보완해줘야 한답니다.  또 옥수수 같은 경우 전분이 풍부해서 좋긴 한데 옥수수를 갈아서 준다고 해도 말은 옥수수 성분의 45% 정도 밖에 소화를 못 시킨다고 합니다.  흔히 덩치 큰 말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생존력 자체는 사람이 더 좋은 모양이에요.)  

 

 


실제로 아직 네만 강을 건너지도 않았는데 위에 언급한 이유로 죽은 말들이 꽤 많았습니다.  길가에는 그런 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그것들을 을씨년스럽게 개들과 까마귀떼가 뜯었습니다.  말들이 죽었으니 그 말들이 끌던 짐마차도 당연히 버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의붓아들 외젠 밑에 소속된 바이에른(Bayern) 장교 하나는 죽은 말과 버려진 마차의 수가 많은 것에 놀라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누구든 이 광경을 보면 전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허겁지겁 퇴각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장군들과 장교들의 임전 태세는 과거에 비해 크게 태평한 편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www.paulickreport.com/horse-care-category/which-is-which-matching-feed-ingredients-with-nutrients/

https://en.wikipedia.org/wiki/%C3%89douard_Mortier,_Duke_of_Tr%C3%A9vise

https://en.wikipedia.org/wiki/East_P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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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14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엘베강 이동의 독일어권은 8세기 말 작센족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공세부터 꾸준히 넓힌 결과입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엘베강에서 오데르 강까지 각종 변경백령들이 세워지지만 983년 벤덴족 대반란 이후 싸그리 날아가버립니다. 이 때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와 분쟁 중이서서 대응하지도 못했고요. 이후 1120년대부터 다시 시작된 동방식민운동 (Ostsiedlung)이 본격화되면서 제대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합니다. 북방의 덴마크와 스웨덴, 남부의 작센까지 서방 카톨릭권의 동부 전체가 동방 슬라브권 정복을 개시한 것인데 그 규모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군 이상으로 컸고 인력도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엘베강 이동의 뤼베크, 로스토크, 슈테틴, 단치히,리가 등 해상 보급이 용이한 하구에 게르만족 도시가 들어섰고 1140년대 이후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대규모 십자군을 구성하여 동방식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덴마크의 발데마르 대왕이 한 때 발트해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는 외젤(사레마) 및 에스토니아 북부를 스웨덴은 핀란드와 카렐리야, 라플란드를 자신들의 십자군으로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스칸디나비아와 달리 발트해 및 폴란드 지역은 초기에는 리보니아 수도회(검우기사단) 및 독일계 상인들이 정복전을 개시하지만 프루스족에 대패하면서 주도권은 우트르메르와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독일 기사단에 넘어가고 50년에 걸친 정복전이 시작됩니다. 프루스 족 및 발트해 연안 민족들 또한 헤르쿠스 만타스 등이 이끈 1274년~1281년까지의 대반란으로 저항하지만 1290년까지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전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합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 때부터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동방 러시아 공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비테니스 대공은 백러시아(현 벨라루스), 게디미나스 대공은 키예프 등 드네프르 강 연안과 붉은 러시아(현 갈리치아 및 볼히니아) 등의 루테니아 전역, 알기르다스 대공은 모스크바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 및 부크강 연안 및 흑해 일부 해안가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리투아니아는 막말로 말이 대공국이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진 제국 수준이었습니다. 이 당시 주요 전투만 해도 1362년 키예프 부근의 푸른강 전투, 1399년 제1차 폴타바(보르스클라 강) 전투 등 평균 5만 이상을 동원한 전투들이었고 생존 그 자체가 걸린 리투아니아는 계속해서 싸우면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상대편인 독일 기사단 역시 1320년대 단치히 획득 및 1346년 덴마크로부터 에스토니아 북부와 외젤과 비크 주교령을 구입하였습니다. 또한 리투아니아를 계속해서 공략해서 1382년에는 빌나우스를 사정권에 두었고 1399년에는 사모기티아 정복, 1402년에는 노이부르크 획득까지 성공해 서로는 브란덴부르크, 동으로는 에스토니아까지 발트해 남부 연안 절반을 육로로 연결한 대국으로 발전합니다.

    1410년 제1차 탄넨베르크(그룬발트) 전투가 대동방 십자군의 절정인데 이 전투에서 독일기사단이 이겼으면 현재 우랄 산맥 이서 전역은 독일민족권으로 확실히 편입되었을 정도로 북방 십자군 역사상 최대 전투였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승리하면서 50년에 걸친 재정복전이 벌어지고 1453년~1466년의 13년 전쟁으로 독일기사단이 폴란드왕국에 신종하면서 동방식민운동은 마침내 종료됩니다.

    다만, 18세기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볼가강 개발을 위해 독일계가 이주한 적은 있습니다

  2. Franken 2019.10.14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영토에 진입도 안했는데 벌써 패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군요.

  3. 루나미아 2019.10.14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보급이...

  4. 2/28일 입대 2019.10.15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군!이라는 표현이 가장 와닿네요. 조별과제가 망하듯이 원정도 초장부터 아주 막장이군요. 마치 스페인에 파견된 프랑스군마냥 필요이상의 학대까지 저지르고 있구요;;

  5. arandel 2019.10.20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나시카님의 글로 본 러시아 원정기가 기대됩니다.
    아 그리고 나시카님, 양해를 구할까 해서요.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아이티혁명에 대한 글부분에서 아이티 봉기가 부두교 술사의 예언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제 블로그에 글쓸때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다고 인용해도 될까 해서요. 나시카님의 글을 링크와 함께 인용해도 괜찮을까요?

  6. arandel 2019.10.21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그럼 저도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본 글에서 이 정보얻었다는거 밝히면서 글 쓰겠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직전이던 1805년 11월, 린츠(Linz)로부터 빈(Wien)을 향해 전진하던 란의 제5 군단은 (전투 현장에서는 언제나 그랬습니다만) 심각한 보급 부족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진흙투성이 길로 강행군을 하는데다 추운 늦가을에 노숙을 하는 것도 고달픈데, 먹을 것까지 부족하니 장교들이나 병사들이나 모두 지치고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지요.  그때 란의 개인적인 형편은 더욱 안 좋았습니다.  아팠거든요.  란은 아픈 상태에서도 부하들이 겪고 있던 보급 부족에 대해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내린 명령이 이런 것이었지요.


"어떤 병사 또는 부대라도, 약탈, 사사로운 싸움 및 위협을 하다가 적발되거나 장교를 구타할 경우 즉각 총살될 것이다.  집행 권한은 사단장이 행사한다."


이에 따라 실제로 일부 병사는 총살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약간 혼란에 빠지실 수 있겠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원래 보급이란 것이 없고 그저 현지 약탈에 의존해서 먹고 사는 것 아니었던가요 ?  그런데 느닷없이 약탈하면 총살을 하겠다니요 ?


여기서 우리는 사사로운 약탈과 징발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약탈은 영어로 pillage, 불어로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pillage(피야쥬)라고 합니다.  징발은 영어로 requisition, 불어로도 역시 réquisition(레퀴지시옹)이라고 하지요.  짐작하시다시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전해진 말입니다.  약탈이나 징발이나 군대가 주민들의 사유 재산을 강제로 가져가는 행위라서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다릅니다.  약탈은 주민들에 대한 아무 보상 없이 이루어지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에 비해서 징발은 군대가 필요에 의해 지휘관의 결정에 따라 수행하는 공식 행위이고, 그에 대해 즉각적인, 혹은 향후에 보상이 이루어집니다.



(자신들과 군마들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있는 프랑스 병사들입니다.  나폴레옹 자신도 '감자가 밭에 없는 계절에 작전을 펼치는 것은 병사들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라고 할 만큼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의존도는 높았습니다.)



보상이라고요 ?  설마 주민들에게서 빵이나 밀가루, 와인 같은 것을 가져올 때 돈을 주고 사오는 것인가요 ?  예 맞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현장에서 즉각 돈을 지불하고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용도로 각 연대에는 민간인 신분인 병참 장교(commissariat)가 할당되어 금화나 은화를 담은 튼튼한 돈 궤짝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할 경우의 이야기였고, 대부분의 부대들은 현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돈 궤짝 속에 든 돈은 병사들의 급료를 주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거든요. 


결국 대부분의 징발 댓가는 병참 장교가 무성의하게 쓱쓱 휘갈려 써준 징발 영수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액수보다는 주로 징발된 물품이나 서비스의 물량이 적혀 있었습니다.  가령 밀가루 몇백 파운드, 와인 몇 통, 옷감 몇 평방 미터, 구리솥 몇 개 뭐 그런 식이었지요.  이런 영수증은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 시장 가격으로 징발 대상자에게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아마 제 값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징발 대상이 된 주민들은 그에 대한 원망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징발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본인이 남긴 편지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러시아와 제3차 대불동맹전쟁을 준비 중이던 1805년 9월 22일, 북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으로 있던 양아들 외젠(Eugene)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엄마가 데려온 새 아빠를 만나보니 나폴레옹이었다는 행운의 소년 외젠 보아르네입니다.  그는 나폴레옹 패망 후에도, 나폴레옹 덕에 얻은 장인어른인 바이에른 국왕 덕분에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한 곳에 집결한 8만 대군을 먹이기 위해서는 지방민들로부터 밀과 와인, 사료, 귀리, 밀짚을 징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야.  우린 군 편성도 잘 되어 있고 파리로부터의 자금 조달도 용이한 프랑스령 알사스(Alsace)에서도 이 조치를 취해야 했지.  모든 물자의 가격이, 준비해둔 거액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올라버렸거든.  우리가 훨씬 이전부터 물자 집적소를 준비해 둔 곳에서는 징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 밖의 곳에서는 징발은 필수조치였어.  오스트리아군도 독일과 베네치아에서 징발을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대군을 먹일 방법이 없었겠지.  그런 징발에 대해 지방민들은 적절한 가격을 지불받을 것이야."


즉, 나폴레옹은 정상적인 군수품 구매 계약이 가능한 경우에도, 때로는 강제로 물품 구매가를 깎기 위해 징발을 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대규모 작전 수행 준비 중이거나 한창 전쟁 중에는 모든 물자의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각 부대들이 장기간 원정에 대비해 미친 듯이 물자를 사모을테니, 공급이 뻔한데 수요가 많아지면 물가가 오르는 것이 당연하니까요.  그래서 그런 가격을 강제로 통제하기 위해 구매보다는 일부러 징발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중에 보상을 받는다고 해도 징발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크게 반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나폴레옹은 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민중은 툴툴거리기 마련이지만, 그 불평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단다.  오스트리아군도 같은 주민들에게 비슷한 규모로 징발을 했고,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더 많이 했다.  게다가, 주민들은 만약 징발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군대가 무력으로 물자를 빼앗아 갈 것이므로 상황이 더 안 좋아질거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


이런 징발은 자국 영토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적국 영토에서도 마찬가지 원칙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즉, 적국 마을에서 보급품을 조달한다는 것이 산적처럼 무자비하게 주민들로부터 사유 재산을 강탈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참 장교의 꼼꼼한 물품 확인 및 영수증 발행 작업 하에, 나름 조직적으로 징발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단지 신사다운 전쟁을 수행한다는 측면 뿐만 아니라, 군 전체의 효율적인 보급과 작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적국 마을을 점령한 병사들이 장교들의 지휘가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배고픔 혹은 사사로운 욕심에 따라 주민들을 약탈한다고 하면, 그렇게 빼앗은 빵이며 감자, 와인 등을 옆 부대 병사들과 사이 좋게 나누어 먹겠습니까 ?  절대 그럴 리 없지요.  아마 직접 약탈에 참가한 병사들끼리 배터지게 먹고 취하도록 마실 것입니다.  금화나 은접시 같은 값나가는 물건은 장교들 몰래 배낭 속에 숨겨질 것이고요.  그런 식으로 무질서한 약탈이 일어나면 절대 전체 병력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일부 운 좋은 병사들의 무절제한 낭비로 이어져 식량의 균등하고 효율적인 분배가 불가능할테니까요.  또한 그런 약탈은 피점령 주민들의 저항과 반란으로 이어져 괜히 불필요한 유혈 사태만 불러오기 쉽상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징발 활동은 반드시 체계적으로, 장교의 감독 하에 이루어져야 했지요.


그렇다면 과연 그렇게 피같은 곡식과 와인, 말과 수레를 빼앗긴 주민들에게 던져진 프랑스군의 징발 영수증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  전쟁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 시골 농민들이 손에 그런 영수증을 들고 머나먼 파리의 육군성으로 찾아와 번쩍이는 금화를 받아갔을까요 ?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기 마을 반경 10마일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던 19세기 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eBay에 올라온 1809년 오스트리아 문서입니다.  가격은 3장 모두 해서 $276.10로서, 생각보다는 비싸지 않네요.  여기 올라온 것은 복제품일까요 ?  그렇다면 생각보다는 너무 비싸고요.)



그런 징발 영수증의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문서를 구글링하다가 찾았습니다.  화려한 캘리그래피로 쓰여져 알파벳도 알아보기 힘든 이 독일어 문서는 180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이 바그람(Wagram) 전투에 의해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된 뒤 맺어진 평화 협상 문서 중 일부로 보입니다.  독일어로 된 것을 보면 아마 오스트리아 측에서 작성한 것 같은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Das kaiserliche fraenzoesische Gouvernement hat eine neue Requisition..."   (프랑스 제국 정부는 새로 징발을 한다...)


그 밑으로 나오는 것은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에서 가져가는 물품과 그 물량을 적은 것입니다.  밀, 밀짚, 브랜디, 식초 등등이지요.  이건 다소 뜻 밖입니다.  나폴레옹은 항상 전쟁 비용을 패전국에 막대한 배상금 형태로 전가시켰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일종의 보호무역주의자라서, 전쟁 승리 후 패전국으로부터 상품 형태로 배상금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은 1809년 9월,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오스트리아 쇤브룬(Schonbrunn) 궁전에서 당시 프랑스 내무부 장관이던 푸셰(Fouche)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며 투덜거렸습니다.  "해당 부서에서 일을 제대로 했다면 짐이 비엔나로 밀고 들어온 전과를 활용하여 프랑스의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이 더 많은 직물과 도자기 등의 상품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도록 독려했을 걸세.  이전에 그런 상품들은 오스트리아에게 엄청난 관세를, 가령 직물만 하더라도 무려 60%의 관세를 내고 있었네.  당연히 나의 승리를 이용하여 거의 무관세로 비엔나의 창고들이 터질 정도로 프랑스 상품을 판매해야 하네.  그런데 관련 부서에서는 생각도 없고 행동도 없군."  이렇듯, 그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현금, 그것도 가능하면 금이나 은으로 된 경화(specie)였습니다.  그런 그가 밀가루나 브랜디 같은 상품을 배상금으로 받아올 리가 없었습니다.


이건 제 추론입니다만, 프랑스군이 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징발 형태로 가져간 그런 보급품 물자에 대해 위의 문서와 같은 형태로 정산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오스트리아 관리들은 전국 곳곳에서 프랑스군이 물자를 가져가고 발행한 징발 영수증을 모아오고, 나폴레옹은 그것들에 대해 전쟁 배상금 일부를 변제해주는 형식으로 정산을 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물자를 강탈당한 주민들에게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어떤 보상을 해주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패전국에 대해서야 이런 식으로 처리가 될 수 있겠지만, 중립국이나 동맹국은 어땠을까요 ?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가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제4차 동맹전쟁에서나 제5차 동맹전쟁에서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편에서 싸운 바이에른 등의 동맹국에게는 새로운 영토나 노획품 공여 등으로 두둑한 보상을 해주었으니, 그런 밀가루와 와인, 식초 등의 사소한 물품 대금은 거기에 묻어 처리했을 것입니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가끔 정말 산골 오지에 남겨진 징발 영수증은 정말 처리가 안 되고 남아 있다가 먼 훗날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바로 스위스 알프스 산골의 작은 마을 부르-생-피에르(Bourg-Saint-Pierre)의 경우입니다.  1984년에 프랑스 미테랑 (Francois Mitterrand) 대통령이 스위스를 국빈으로 방문할 때, 뜻하지 않게 이 마을 대표가 나폴레옹의 180년 묵은 징발 영수증을 들고 미테랑을 찾아온 것이지요.  1800년 5월, 나폴레옹이 제2차 이탈리아 침공을 위해 알프스를 넘을 때 이 마을에서 구리 솥과 수천 그루의 통나무 등 물품과 용역을 징발하면서 남겨둔 영수증이었지요.  당시 금액은 약 4만5천 프랑(지금 가치로 약 6억5천만원)으로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습니다.  가령 당시 하루 노임을 3프랑, 현재 가치로는 약 5만원으로 계산했더군요.  그런데 이것이 180년 동안 차곡차곡 이자에 이자를 붙여 계산하니 2천만 스위스 프랑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미테랑의 내각 수석이었던 콜리아르(Jean-Claude Colliard)가 이 마을을 찾아 기념 동판과 함께 원금만 현금으로 지불했다고 합니다.  이자에 대해서는 입을 닦았고요.  




(나폴레옹이 184년 전에 진 빚을 현대 프랑스 정부가 갚았다는 훈훈한 (?)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자는 안 갚았다는 조롱조의 구절로 끝맺는군요.)



적국이 아니라 주로 동맹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작전을 펼쳤던 영국군의 경우는 좀더 문제가 까다로왔습니다.  자기 정부의 말도 믿지 않는 현지 주민들에게 뭐라고 적혀 있는지도 모를 영어로 된 징발 영수증을 줘봐야 순순히 식량을 내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과 싸우기 위해서는 현지 주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영국군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식량을 징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징발 영수증이 즉각적으로 현금화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보여주기 위해 영국은 나름 애를 많이 썼습니다.  즉, 본국에서 국채 발행으로 돈을 모은 뒤, 그 돈을 인도 등 전세계에서 긁어모은 금화로 바꿔 선박 편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지속적으로 보낸 것입니다.  이렇게 주조된 금화는 아예 군용 기니화(military guinea)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영국이 주조한 마지막 기니화였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어지는 항로에는 영국 화물선을 약탈하려는 프랑스 사략선(privateer)들이 우글거렸으니까요.  이들 중 일부라도 프랑스 사략선에게 나포될 경우 잃어버리는 금화도 아깝지만, 그 액수만큼 프랑스의 군사력을 키워주는 셈이었습니다.  당시 금화 및 은화는 요즘의 석유 못지 않은 필수 전쟁 물자였거든요.




(1813년에 주조된 소위 'Military Guinea' 금화입니다.)



당시 영국군 재무관이었던 헤리즈(John Charles Herries)가 1811년~1815년 사이에 웰링턴의 원정군, 그리고 대륙 동맹국을 위한 보조금으로 지출한 금화 및 은화는 425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금 1g을 대략 5만원으로 계산하면, 이는 무려 13조원이 넘는 거금입니다.  생산력이나 인구, 금융 규모가 요즘과는 크게 차이나는 당시의 대영제국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때 어쩔 수 없이 영국 정부가 손을 벌렸던 것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 쪽이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륙 곳곳에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군과 싸우는 영국군의 군자금을 영국과 말타, 스페인과 시실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은행까지 거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스페인 현지의 웰링턴에게 공급했습니다.  





(웰링턴의 군자금을 책임지고 있던 병참 총감(Commissary-General)이던 헤리즈 John Charles Herries 입니다.  웰링턴이 한창 반도 전쟁을 수행하던 1810년대에는 기껏 해야 30대 초반이었을텐데... 대단하네요.)



1813년 말이 되어 이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침공을 시작한 웰링턴은 여태까지와는 좀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고지식하고 배가 불렀던 프랑스 농민들은 낯선 영국 기니 금화를 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항상 현지 주민의 지지 확보를 중요시했던 웰링턴은 그에 따라 프랑스 농민들에게 징발 댓가로 지불할 프랑스 금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는 그 어려운 요구조건도 훌륭하게 수행해 냈습니다.  네덜란드에 가서 프랑스 금화 및 은화를 사들인 뒤 선박 편으로 스페인으로 보낸 것이지요.  물론 이런 금융 거래에는 막대한 이윤이 따랐고,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 전쟁 금융을 통해 큰 부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웰링턴이 평펑 써대던 징발 영수증 및 군수품 구매 계약서를 로스차일드는 스페인 현지에서 헐값에 대량으로 매입하여 런던으로 가져온 뒤 제값을 받아 냈습니다.   훗날인 1834년 로스차일드는 벅스턴 경(Sir Thomas Powell Buxton)에게 말하길 "그 거래가 자신의 일생 중 최고의 비즈니스였다"라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네이썬 로스차일드 Nathan Mayer Rothschild 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태인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거대한 부를 이룬 것은 웰링턴의 전쟁 자금 금융을 사실상 대리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렇게 엄청난 돈을 버는 사람들이 꼭 생깁니다.  하지만 전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행위이고, 병사들은 고통과 죽음 속에 신음하게 됩니다.  이렇게 큰 돈이 오가는 와중에도 정작 병사들은 굶기 마련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로 이번 편을 마무리하지요.  


1807년 폴란드 땅에서 러시아군과 싸우던 때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종인 콩스탕(Louis Constant Wairy)이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행진하는 병사들 옆을 말을 타고 지나치고 있었답니다.  프랑스 병사들은 현지에서 먹을 것을 구하다보니, 재빨리 폴란드 현지어를 몇 마디씩 배운 상태였는데, 그 중 한명이 용감하게도 황제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Papa, kleba !"  (아빠, 빵이요 !)


그러자 뜻 밖에도 나폴레옹도 폴란드어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Nie ma !"  (없다 !  There is none !)


이 말에 병사들은 빵 터져서 크게 웃고는 더 이상 배고프다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콩스탕에게는 약간 쑥스럽게도, 폴란드어로 빵은 클레바 kleba가 아니라 흘렙 chleb이라고 합니다.)





출처 :  


Margaret S. Chrisawn.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Contributions in Military Studies) (Kindle Locations 1698-1704). Kindle Edition.

Heckscher, Eli F.  The Continental System: An Economic Interpretation

http://www.ebay.com/itm/1809-Napoleon-Austria-Napoleonic-France-Requisition-Documents-48901-/371711363946?hash=item568bb94b6a:g:x2kAAOSwHoFXsnoH

http://www.npr.org/sections/thesalt/2015/06/18/414614705/appetite-for-war-what-napoleon-and-his-men-ate-on-the-march

https://books.google.co.kr/books?id=zq8GhdLeK_kC&pg=PA115&lpg=PA115&dq=requisition+napoleon+war&source=bl&ots=4DKmy7f1pY&sig=QpxPMR2WgfRmpe7r8NDbXXYLnNU&hl=ko&sa=X&ved=0ahUKEwicz_T7gMrPAhWCipQKHTVCAT4Q6AEISDAK#v=onepage&q=requisition%20napoleon%20war&f=false

https://books.google.co.kr/books?id=PS4CVCq-70sC&pg=PT56&lpg=PT56&dq=wellington+france+gold+money&source=bl&ots=Y87Pmfkw8V&sig=n0XCX_P2qArtLtgicDcBnyA3hCg&hl=en&sa=X&ved=0ahUKEwjWxZGL8szPAhWCpZQKHWU6BAUQ6AEIJTAA#v=onepage&q=wellington%20france%20gold%20money&f=false

https://en.wikipedia.org/wiki/Nathan_Mayer_Rothschild 

https://www.the-saleroom.com/en-gb/auction-catalogues/spink/catalogue-id-srspi10011/lot-a905b379-2ad3-45f2-900d-a3f800fbadff

https://en.wikipedia.org/wiki/John_Charles_Her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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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남변 2016.10.11 0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에는 이자채권의 소멸시효가 없나보군요. 우리나라 법 같으면 시효에 걸려서 원금 및 이에 대한 몇년분 이자만 지급하도록 판결이 나올 것 입니다. 진짜 유럽 법이 저런거라면 오히려 비합리적이네요. 현실적으로 프랑스 측은 어차피 다 갚을수가 없을테니 징발당한 사람의 후손이 이자를 전혀 받지 못하는 찝찝한 결과가 나와버릴 수밖에...

    • ian 2016.10.12 0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구소련 붕괴후 러시아가 새로 국채발행시에 과거 재정러시아 발행채권을 상환한 사례가 있습니다.

    • 수비니우스 2016.10.19 15: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전 세대의 일을 왜 후손인 우리가 갚아야 하는가 하고 말이에요. 2007년에 신동아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진짜로 그렇게 인터뷰하던데요. 후손들이 조상들로부터 받은 것이 있으니 저런 빚도 갚아줘야죠.

  3. boribob 2016.10.11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추천 버튼 없는건 안타깝네염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4. 연습장 2016.10.11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 집에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확실히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로스차일드의 모습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물론 현대에까지 유태인과 프리메이슨과 관련된 각종 음모론이 넘쳐나게 된 원인은 확실히 제공한것 같군요

  5. 유애경 2016.10.12 07: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전 축하합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발판으로하는 것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잘보고 갑니다.

  6. Mavs 2016.10.12 1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시절과 지금은 국제법이 많이 달라졌는데 제1제정 당시의 부채를 현재의 공화국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지는 의문이군요. 그냥 서비스로 원금만 갚아준거 같은데요.

  7. 정암 2016.10.12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으로 이사를 축하드립니다^^

  8. feel96 2016.10.12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 축하드립니다! 늘 잘 보고 있습니다^^

  9. Gale 2016.10.12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갑니다!

  10. 오리앙 2016.10.13 1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 축하드립니다. 지난 몇 년간 좋은 글 감사했습니다.

  11. 뽀또 2016.10.14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 마련 축하드립니다.
    징발이라...총 칼 든 군대에게 징발시 거부할 배짱은 없겠지요.
    보상은 어느정도로 되었는지 평균치가 궁금해요 ㅎㅎ

  12. 에그-egg 2016.10.16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을 마련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새집 마련하신 기념으로 재미있는 글을 올리셨군요. ㅎㅎ
    앞으로도 자주 찾아뵐께요. :)

  13. 이보트 2016.10.16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집이 아주 깔끔하네요. 축하드립니다.

  14. 달마 2016.10.19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15. 라인하르트 2016.10.20 0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 1806년 프로이센이 처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답이 안 나올 정도로 국가재정에 구멍이 나서 결국 바그람 전투 이후 패전 처리에서 프랑스 군이 징발했던 물자에 대한 처리를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전쟁 피해가 적던 헝가리에서 대량으로 물자을 반 강제로 징발해서 당장 급한 불은 끄는 수준이었지만, 이 때문에 가뜩이나 반 합스부르크 분위기가 강하던 헝가리인들이 반발이 더 심해집니다.

    영국같은 경우에도 대프랑스 동맹국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는데 보유하고 있던 경화 상당수를 쏟아부은 결과, 경화준비용 지금(지은) 보유량이 거의 바닥날 지경이 되다 본국에서 한 동안 불태환 지폐를 발행해서 썼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사실, 영란은행이 가장 위험했던 시기는 프랑스 제국 시절이 아니라 1795-1797년, 즉 프랑스 공화국군이 네덜란드, 베네치아 공화국을 멸망시키면서 암스테르담의 은행가와 베네치아의 은행가 전부를 털어 버리면서 이들 은행들에 보관되었던 영국 내 자본 상당수가 묶이면서 일종의 금융공황이 발생했던 시기입니다. 이 때, 스미스와 멜서스, 리카도 사이의 경제학의 석학 중 하나인 헨리 손턴이 크게 활약하기도 합니다.

  16. 까마구 2016.10.20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하셨으니 축하 댓글은 하나 남겨야죠... 티스토리 이사를 축하드립니다... 근데, 이제 노안이라 본문은 그럭저럭 보이는데, 댓글은 너무 작아요...ㅜㅜ

  17. 흉갑 2016.10.23 1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이해가 안되서 그런데 승리했을때는 징발한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나요?

  18. 삽질랜드 2016.12.08 0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당시의 현지 징발을 약탈에 가까운 행위로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거래하고 보상도 하는군요. 저는 저렇게 보급 수송도 없이 무계획적인 현지 징발을 하면 정작 중요한 때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의문이기도 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이 최소한의 식량과 은자만 가지고 조선에 들어와 조선 사람들로부터 식량과 은자를 교환하려다 이런 거래 방식 등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 사람들의 거부로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 약탈로 겨우 식량을 확보하다가 요동의 상인들을 통해 식량을 수송해 와서 보급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했다고 하는데 상업이 발달한 국가들은 어느 정도 이런 방식이 익숙했나 봅니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이동 중인 군대의 현지 징발 외에는 후방에서는 따로 아무런 보급 물자 지원이라던가, 보급로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없었던 것인가요? 아, 뭐 화약이나 예비 화기, 군복 등, 전투나 축조 등에 필요한 건 후방에서 보급될 수밖에 없겠지만 식량 같은 건 결국 무조건 현지 징발이었던 건가요?

  19. 2018.03.25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 유수 2018.03.25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하지만; 답신을 주신것 같은데 제가 티스토리 가입이 안되어 있어서인지 비댓덧글로 말씀을 드리고도 정작 저는 답변해주신것을 보지 못합니다;; 링크를 써놔서 홍보가 될까봐 비댓을 했는데 번거로우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21. 유수 2018.03.26 0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양하신다면 안타깝지만 어쩔수가 없네요. ㅠㅠ

    괜찮으시다면 글을 퍼가는 것이라도 허락을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당연히 글의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