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기구 중대의 역사적 시작이 주르당과 함께였던 것처럼, 그 몰락의 시작에도 주르당이 있었습니다.  




(주르당 원수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주르당 법 덕분인데, 그게 또 몹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무능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법안이었습니다.  즉, 그가 오스트리아군에게 참패를 겪고 그 책임을 진답시고 군에서 물러난 뒤, 정계에 입문하여 만든 법이 바로 주르당 법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주르당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가 얻은 명성은 프랑스 징병제 법안인 주르당 법(Loi Jourdan de 1798)에 의한 것일 뿐이며, 정작 그가 독일 전선에서 활약할 때 자주 참패를 겪었다고 했지요.  1795년, 프랑스 기구 제1 중대는 주르당이 사령관으로 있던 상브레-뮤즈(Sambre-et-Meuse) 방면군에 배속되었습니다.  주르당은 이 기구 중대에 대해 조롱과 의심으로 일관된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가 일생 동안 거둔 승리 중 가장 크고 결정적인 승리가 바로 플뢰뤼스 전투였고, 이 승리는 상당 부분 기구의 정찰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도 그랬습니다.  주르당에게 전입 보고하러 가던 기구 중대원들의 마음은 밝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르당은 이때 즈음해서 기구 중대에 대해 생각이 좀 바뀐 상태였습니다.  전술적 효과는 몰라도 최소한 적에 대한 심리적, 그리고 국내 정치적으로는 꽤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샹브레-뮤즈 방면군 공식 통신문에 자신의 군대 모습을 프린트할 때 그 위에 기구가 떠 있는 모습을 넣기도 했습니다.  기구 중대원들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구 중대의 최후를 가져온 것은 주르당의 편견이 아니라 그의 무능이었습니다.  다음 해인 1796년 8월 24일 독일 바이에른의 암베르크(Amberg)에서 주르당은 오스트리아군의 습격을 받고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의 지휘관이 바로 명장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주르당은 여기서 속절없이 탈탈 털려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계속 후퇴하던 주르당은 이대로 끝까지 밀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반격을 꾀했습니다.  그는 뷔르츠부르크(Wurzburg) 인근에서 마인(Main) 강에 의해 오스트리아군 사단 하나가 오스트리아군 본대와 분리된 상태임을 포착했습니다.  다수의 프랑스군으로 소수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주르당은 9월 3일 자신있게 공격을 개시했으나, 상대는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은 짙은 안개를 틈타 신속히 부교를 놓고 주르당 몰래 지원 병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주르당은 여기서 다시 한번 참패를 당하고 허겁지겁 후퇴해야 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나폴레옹이라고 할 수 있는 카알 대공입니다.  원래 세습 귀족 가문 사람들 중에 출중한 인물이 나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닌데,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입니다.)




이때 프랑스군은 약 2천의 사상자를 냈고, 추가로 7문의 대포와 함께 1천의 포로까지 오스트리아군에게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1천의 포로 중에는 기구 중대원 전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일망타진 당하여 기구 앵트레피드(L'Intrepide) 호까지 고스란히 오스트리아군에게 나포되었던 것입니다.  주르당의 삽질과 카알의 명지휘의 절묘한 조화가 빛났던 암베르크와 뷔르츠부르크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에게 매우 뜻깊은 전투였습니다.  그동안 기세등등한 프랑스 혁명군에게 계속 밀리기만 했으나, 이 전투들을 기점으로 전세가 오스트리아군 쪽으로 기울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주르당이 속절없이 후퇴하는 바람에 그 우익을 맡아 전진하던 모로(Moreau) 장군도 고립을 우려하여 후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쁜 승전에 프랑스군이 가지고 다니던 악마의 풍선 앵트레피드 호는 아주 좋은 구경거리였습니다.  이 기구는 오늘날에도 빈에 있는 히에레스게쉬히틀리헤스(Heeresgeschichtliches)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기구는 직경이 거의 10m에 달하는데, 나무로 만든 곤돌라 본체는 매우 작아서 직경이 75cm 밖에 안되고 난간 높이도 고작 1m 간신히 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구를 타고 두 명의 장교가 무려 9시간이나 플뢰뤼스 상공을 지켰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사진 속의 기구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비행체 바로 앵트레피드 호입니다.  이건 사실 복제품이고, 진품은 유리 상자 속에 넣어져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참사 속에서도 기구 중대를 재건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직 무사한, 쿠텔이 지휘하던 제2 기구 중대가 재편성된 상브레-뮤즈 방면군으로 배속된 것입니다. 상브레-뮤즈 방면군에 도착한 제2 기구 중대에게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은 정말 처절하게 무능하던 주르당이 매우 유능한 장군이던 오슈(Lazare Hoche)로 교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쁜 소식은 머리 회전이 빠르고 엄격한데다 무자비하고 유능한 군인이었던 오슈가 제2 기구 중대를 정말 풍선쟁이들로 취급하여 자신의 작전 지역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중대장 쿠텔까지 열병으로 인해 중대장직을 내놓고 후방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오슈 장군의 동상입니다.  열병으로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 분이 나폴레옹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되었을지 참 궁금할 정도로 매우 뛰어난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기구 중대의 최후는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총재 정부의 주전선은 어디까지나 독일 전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오스트리아와의 긴 전쟁을 결판낸 것은 이 독일 전선이 아니었습니다.  총재 정부는 어떤 애송이 장군의 열렬한 청원을 받아들여 제2 전선 정도의 역할을 기대하며 그 애송이를 이탈리아 전선에 파견했었는데, 그 애송이의 이름이 나폴레옹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맹활약에 힘입어 결국 오스트리아는 굴복했고, 그 결과로 맺어진 것이 1797년 레오벤(Leoben) 조약이었지요.  이 조약 후에야 비로소 지난 해에 포로가 되었던 제1 기구 중대가 프랑스로 송환될 수 있었습니다.  약 8개월 만에 프랑스로 돌아온 기구 중대원들은 여전히 최첨단 과학 특수 부대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몰락한 기구 중대를 되살릴 적임자는 기구 전문가인 쿠텔'이라며, 쿠텔을 다시 중대장으로 임명해달라는 청원을 넣었습니다.  총재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쿠텔을 대령으로, 기존 중대장이던 로몽을 소령으로 승진시키며 다시 기구 중대 지휘관으로 배치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포로 신세에서 풀려난 것은 전쟁이 끝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이들이 활약할 무대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실업자 신세가 될 뻔한 이들에게 다시 일자리를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원래 3편으로 생각했으나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주에 마지막편이 이어집니다)



Source :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L%27Intr%C3%A9pide

https://en.wikipedia.org/wiki/Observation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Fleurus_(1794)

https://en.wikipedia.org/wiki/Hot_air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military_ballooning

https://vistaballoon.com/blog/2014/10/the-history-of-ballooning/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gas-vs-hot-air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history-2

http://www.pbs.org/wgbh/nova/space/short-history-of-ballooning.html

https://web.archive.org/web/20100528025354/http://www.centennialofflight.gov/essay/Lighter_than_air/Napoleon%27s_wars/LTA3.htm

https://en.wikipedia.org/wiki/Nicolas-Jacques_Cont%C3%A9

https://en.wikipedia.org/wiki/Jean-Pierre_Blanchard

https://en.wikipedia.org/wiki/Louis-S%C3%A9bastien_Lenormand

https://en.wikisource.org/wiki/1911_Encyclop%C3%A6dia_Britannica/Cont%C3%A9,_Nicolas_Jacq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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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tarlight 2018.04.22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지가 많은 유럽에서 기구를 통한 정찰과 전장분석은 상당히 도움이 되었을텐데요. 무슨 연유로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2. 샤르빌 2018.04.22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아무리 획기적인 신기술이어도 가차없군요.. 왠지 1차대전 당시 탱크가 떠오르네요 탱크는 높은 평가를 받은덕에 많이 부족했던 성능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발전할 수 있었다던 이야깁니다..

  3. 0_- 2018.04.22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굽시니스트 작 공군만화 중에 열기구 이야기가 도입부분에 조금 나왔었는데요, http://afplay.kr/1242
    바람이야 그러려니 했었지만 "총알 한방에 무력화..." 하던 부분에서 저 시대 총 성능이 그정도로 좋았나? 싶더라고요.
    다음주 마지막편 기대하겠습니다 :D

  4. TheK2017 2018.04.22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미진진합니다. 다음 편이 기다려 집니다.

  5. 카를대공 2018.04.25 0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를 대공 볼 때마다 느끼는건데 이 양반이 나폴레옹 전쟁 마지막까지 꾸준히 참전 했으면 어땠을까,
    글런 생각이 늘 드네요.

    나폴레옹이 탈탈 털리는거야 바뀌지 않겠지만 두 명장의 리턴매치가 어떤 그리을 자아냈을까 궁금합니다.


    혁명기 프랑스엔 나폴레옹편이 아닌 장군들 중에도 유능한 사람들이 많았네요.

    모로도 그렇고 오슈도 그렇고 나폴레옹과 함께 싸웠으면 어땠을까요.

주르당의 어설픈 라임으로 조롱 받으며 파리로 돌아온 쿠텔을 맞이한 것은 서슬퍼런 국민공회 공안위원회(le Comite de salut public)였습니다.  그렇다고 공안위원회가 쿠텔을 단두대로 보낸 것은 아니었고, 정반대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공안위원회는 당시 국내외 반혁명세력과의 투쟁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으므로, 과학을 통해 구시대의 적을 무찌른다고 하면 뭐든 해줄 기세였습니다.  샤또 드 뫼동(Chateau de Meudon)에서 몇 차례의 기구 기술에 대한 테스트가 이루어진 뒤, 공안위원회는 아예 세계 최초의 공군 무기창인 항공 개발 센터(le centre de developpement aerostatique)를 창설했습니다.  여기서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하고 무엇보다 현대적인 연필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학자 콩떼(Nicolas-Jacques Conte)가 연구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이 기관에서 기구의 형태와 재질, 수소 가스 생산의 효율화 등을 연구 발전시켰습니다.  




(콩테는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로 간 학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넬슨에 의해 프랑스 함대가 궤멸되어 프랑스 본토와의 보급로가 완전히 끊어진 뒤에도 프랑스군이 보급품 부족으로 말라죽지 않은 것은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70% 정도는 콩테 덕분이었습니다.  콩테는 빵부터 땔감, 탄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현지에서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땅에서 기구를 띄워올리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를 '모든 것에 뛰어난 재주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프랑스로 귀환한 이후 얼마 안되어 1805년 5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이 연구기관에서의 성과를 흡족하게 여긴 공안위원회는 1794년 4월 2일,  급기야 세계 최초의 공군인 기구 중대(la Compagnie d'Aerostiers)를 창설하기에 이릅니다.  이 중대는 손재주가 좋은 20명의 사병과 2명의 상병, 병장과 상사 1명씩, 그리고 대위와 그를 보좌할 중위 1명이 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위로는 주르당에게 조롱을 당했던 화학자 쿠텔, 그리고 중위로는 쿠텔의 조수였던 로몽이 임관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첨단 기술 부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도 첨단 기술에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정찰, 신호에 의한 통신, 그리고 선전물 배포였습니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바로 정보전이었지요.




(세계 최초의 공군 비행단장이 된 쿠텔(Jean-Marie-Joseph Coutelle)입니다.  그는 사실 제대로 된 화학자는 아니었고, 샤를의 법칙으로 유명한 샤를(Jacques Alexandre César Charles)과 친했던 덕분에 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엔지니어 정도였습니다.  그가 프랑스에 남긴 공로는 하나 더 있는데, 오늘날 파리 콩코드 광장에 이집트 현지에서 가져온 3천년 묵은 오벨리스크가 서있게 된 것에 그가 간접적으로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새롭게 창설된 이 기구 중대의 사기는 매우 높았습니다.  장교들은 자신들이 만든 과학 기구를 실제 상황에 적용하여 공화국으로부터 급여를 받아가며 조국을 위해 사용한다는 점에 희열을 느꼈습니다.  사병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대에 있으면 적의 총알이나 포탄에 맞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에서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창설 직후, 이 사기충천의 부대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다소 꺼림직한 것이었습니다.  벨가에 접경 지역의 모베르쥬(Mauberge)로 가서 다름 아닌 주르당의 부대에 합류하라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난 번과는 다른 점들이 좀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주르당에게 대놓고 조롱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쿠텔이 한낱 일반 시민(citoyen)이 아니라 당당한 육군 대위(capitaine)였고, 또 지난 번처럼 현금 5만 리브르를 달랑 들고 온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인상적인 물건을 들고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기구였습니다.  이름은 앙트르프레낭(L'Entreprenant) 호로서, 영화 스타 트렉에 나오는 우주선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호와 유사한 뜻이었습니다.  "진취적, 적극적"이라는 뜻이었지요.  


기구 중대는 도착과 동시에 가열로를 만들어 수소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앙트르프레낭 호의 첫 임무 비행은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바로 6월 2일, 오스트리아군이 포격을 가해오자 그에 대한 정찰을 하기 위해 앙트르프레낭 호가 출격한 것입니다.  쿠텔은 아군 지역인 모베르쥬에서 떠오른 기구를 타고 오스트리아 및 네덜란드군의 동향을 훤히 내려다 보며 지상과 연결된 밧줄을 통해 상세한 보고서를 계속 내려보냈습니다.  기구에서 망원경을 통해 보면 거의 25km 밖의 상황까지 꽤 상세히 볼 수 있었으니 군용 정찰 활동에 있어서는 정말 꿈의 병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날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으므로, 이 날의 비행은 최초의 실전 투입으로 기록되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 측에서는 기구의 등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일이고 전쟁 규칙에 위반되는 일'이라며 프랑스군 측에게 항의하기도 했고, 앙트르프레낭 호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물론 사정거리 훨씬 밖에 있던 앙트르프레낭 호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앙트르프레낭 호의 비행은 뜻하지 않은 효과도 낳았습니다.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 장교들의 상당수는 교양 있는 신사 계급 출신이었고 따라서 기구라는 물건의 존재와 그 원리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시골 농촌 출신의 문맹자였던 오스트리아-네덜란드군 병사들은 프랑스군 상공에 난데없이 나타난 둥근 물체를 보고 '프랑스 놈들이 혁명을 하면서 성당과 신부들을 박해한다더니, 정말 악마가 프랑스 혁명군과 함께 한다'라며 겁을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전 측면에서의 효과는 곧 뒤이어 벌어질 플뢰뤼스 전투에서도 크게 발휘되었습니다.


모베르쥬에서의 작전을 끝낸 기구 중대에게 내려진 다음 명령은 샤를르루아(Charleroi)로 이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구는 어떻게 이동을 했을까요 ?  공군답게 모든 장비와 인력을 싣고 가볍게 두둥실 날아서 이동했을까요 ?  물론 아니었습니다.  요즘이라면 수소 가스를 빼서 기구를 납작하게 접은 뒤 트럭으로 실어나르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라브와지에-므니에 공법에 의해 싸고 쉽게 수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수소는 만들기 어려운 가스라서 그렇게 쉽게 버렸다가 재빨리 다시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당장 작전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안된 방법은 과학기술 부대라는 이름이 쑥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즉, 무거운 추를 매달아 고도를 낮춘 기구에 밧줄을 연결하여 둥둥 띄운 채로, 24명의 병사들이 거의 50km에 걸친 거친 벌판을 가로질러 질질 끌고 이동했습니다.




(창공을 지배하는 자랑스러운 혁명의 날개인 공화국 공군의 웅장한 이동 모습입니다.  사실 저 상황에서 굳이 지휘 장교가 칼을 뽑아들고 지휘할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비록 이렇게 공군답지 못한 모양새로 이동하긴 했지만, 쿠텔의 기구 중대는 플뢰뤼스(Fleurus)에서 군사 역사에 있어 빛나는 한 장면을 만듭니다.  1794년 6월 26일, 플뢰뤼스 전투가 벌어지던 10시간 내내 앙트르프레낭 호는 전장 상공을 지키며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지상의 프랑스군 사령부, 그러니까 주르당에게 전달했습니다.  무선은 물론 유선 전화기도 없던 시절 무엇으로 통신을 했을까요 ?  간단했습니다.  쿠텔과 함께 기구에 탑승한 사단장 모를로(Antoine Morlot) 장군이 직접 망원경을 들고 관찰한 적의 동향을 종이에 적고, 그 쪽지와 작은 추를 담은 주머니를 고정시킨 밧줄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보낸 것입니다.   물론 정말 급한 상황에서는 깃발 신호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일설에는 쪽지 주머니를 그냥 지상으로 집어던졌다는 말도 있고 심지어 밧줄을 통해 지상에서 질문을 적은 쪽지를 올려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2가지였습니다.  이 플뢰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여 오스트리아군이 벨기에를 포기하고 물러났다는 것과, 쿠텔과 모를로 장군이 적어도 9시간 이상 공중에 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 둘이서 기구에 오를 때 어떤 메뉴의 도시락을 몇 끼 분이나 싸가지고 올라갔을까 하는 것과 화장실 처리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만, 아쉽게도 거기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플뢰뤼스 전투 모습을 그린 다른 그림입니다.  물론 기구 아래에서 용맹한 말을 타고 칼을 뽑아든 채 지휘를 하고 있는 분이 주르당 장군이십니다.  아마 주르당 장군은 자신이 본의 아니게 세계 공군사에 남긴 족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2가지 외에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불확실했습니다.  과연 앙트르프레낭 호의 정찰 활동이 플뢰뤼스에서의 승리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판단은 쿠텔이나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주역이었던 주르당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르당 이 양반은 처음부터 이 괴짜 과학자들이 하는 풍선 놀음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 빛나는 승리의 공로를 당연히 미친 과학자들이 아니라 100% 자신의 공로로 가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르당의 승전 보고서에는 이 기구 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심드렁하게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적혔습니다.  하늘에 직접 떠있던 모를로 장군도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여타부타 아무 입장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공안위원회 출신으로서 전투 내내 현장에 있던 정치인이자 저명한 화학자인 귀통(Louis-Bernard Guyton de Morveau)가 플뢰뤼스 승전에 있어서 기구 정찰의 효과에 대해 극찬을 해주었습니다.  역시 과학자들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해주는 것은 같은 동업자 뿐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공계 출신이 실험실이나 공장을 떠나 정관계를 기웃거리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귀통 드 모르보입니다.  이 분이 화학사에 남기신 공로 중 최고의 것은 화합물 작명법, 즉 chemical nomenclature입니다.  가령 탄소 하나에 산소 원자 2개가 붙은 가스를 이산화탄소 carbon dioxide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다 이 분 덕택입니다.)




실은 귀통은 기구 부대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플뢰뤼스 전투가 벌어지기 3일 전인 6월 23일, 이미 기구 부대 제2 중대 창설을 위한 법안이 국민공회에서 통과되었던 것입니다.  2기의 신형 기구 에르퀼(Hercule, 헤라클레스)과 엥트레피드(L'Intrépide, 대담하다는 뜻)를 지급받은 제2 중대는 콩테(Conté)에 의해 직접 훈련을 받았습니다.  수개월에 걸쳐 훈련을 마친 제2 중대는 1795년 3월 라인 방면군(Armée du Rhin)에 배속되었습니다.  그 지휘관은 역시 전세계에게 유일하게 실전 비행 경험을 가진 기구 중대장 쿠텔이 맡았고, 중위이던 로몽이 대위로 승진하면서 제1 중대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활약하는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 스타일이었던 콩테는 기구 학교장이 되어 이 2개 중대에 배속될 병사들의 훈련을 맡았습니다.  


이 제2 기구 중대는 라인 방면군의 진격을 따라 이동하며 독일 전선인 마인츠(Mainz) 전투 및 만하임(Mannheim) 전투 등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프랑스 혁명군의 날개가 되어 전장의 하늘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을 운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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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쇼펜하우어 2018.04.15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이 글과는 상관 없지만.... 갑자기 궁금한게 있는데 프랑스가 징병제였는데 그럼 우리나라처럼 의무 복무기간이 있었나요? 있었다면 몇 년 복무하고 제대했나요?

    • nasica 2018.04.15 2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주르당 법안에 따르면 20세에서 25세까지, 그러니까 5년이 복무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전쟁을 확대해가면서 18세에서 25세, 즉 7년으로 늘어난 것 같습니다.

  2. 수비니우스 2018.04.15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터프라이즈 하면 태평양전쟁 때 대활약한 미국의 항공모함이 생각나는데 앙트르프레낭이라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프랑스 혁명기에서도 보게 되네요 ㅎㅎ 그런데 마지막 "그러나 이들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을 운명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이 제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흑흑

  3. Gg 2018.04.15 2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안위원회에서 신무기 개발 지도하는 모습은 소비에트 생각나게 하는군요
    비참한 운명 또한 비슷하게 정치적으로 ?

  4. 쇼펜하우어 2018.04.15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혹독했군요... 왜 목숨걸고 징병을 피하려고 했는지 알겠네요

  5. reinhardt100 2018.04.16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과학적 혁신을 가져온 신무기들이 다른 전쟁들과 달리 그렇게 많이 쓰이지 못합니다. 이유는? 각국의 재정이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전쟁에 돌입했으니까요.

    프랑스야 워낙 유명하니 제쳐놓더라도 영국만 하더라도 국가 최대 기업 중 하나인 동인도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국가가 회사 경영에 개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구제금융을 해 주는 상황이었고,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은 7년 전쟁 당시의 부채 갚는데다 중간에 터진 바이에른 대공위 계승 전쟁 때문에 그 뒷처리 하느라 정신없었죠. 러시아도 터키와의 전쟁 및 계속된 사회 불안 요소 때문에 돈 나올 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덴마크나 스웨덴,에스파냐,포르투갈도 비슷했습니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군소국가들도 자기들 먹고 살기에 바쁜 판이었으니까요.

    이런 판국에 신무기 개발할 돈 대신 기존에 개발된 무기를 대량생산하든지 아니면 노획해서 쓰는 게 더 싸게 먹힐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6. 헤메메 2018.04.19 0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0대가 '젊은'나이에 '요절'한건 아닌거같아요. 제 학교선생님이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으셔요 ㅋㅋ 나시카님 블로그엔 좋고 재밌는 글들이 많아서 좋아요. 잘 읽고 갈게요!

탈라베라 전투에서 빅토르의 복장을 터뜨린 주르당 원수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르당 원수의 몇 안되는 빛나는 승리 중 하나인 1794년 플뢰뤼스(Fleurus) 전투에 대해서도 언급했지요.  플뢰뤼스 전투 그 자체는 별 의미도 재미도 없는 전투입니다만, 이 전투는 군사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세계 최초로 공군이 활약한 전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왜 다른 나라들보다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공군이 탄생했을까요 ?  그 효과는 어땠을까요 ?  무엇보다, 왜 불세출의 군사 천재 나폴레옹은 이런 과학 병기를 활용하지 않았을까요 ?  


계몽사상이 싹튼 나라 프랑스에서는 과학자들도 많았고 일찍부터 이런저런 과학 실험들이 많이 수행되었습니다.  열기구 및 수소 기구도 그런 활동 중 하나였습니다.  혁명 전인 1783년 이미 몽골피에 형제들(Joseph-Michel, Jacques-Étienne Montgolfier)이 뜨거운 공기를 이용한 열 기구를 만들어 테스트한 일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 테스트 시연 모습입니다.  그들은 제대로 된 과학자는 아니었고, 원래 제지업자였습니다.  그들은 뜨거운 공기가 주변 공기보다 가벼워서 열기구가 위로 올라간다는 원리를 처음에는 몰랐고, 그냥 불을 피울 때 나오는 연기의 힘이 기구를 들어올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휴대용 가스 버너가 없어서 철제 난로와 장작을 싣고 날아야 했던 시절, 열기구는 체공 시간과 최대 고도에 있어 제약이 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가벼운 공기에 의해 기구가 뜬다는 원리를 그대로 활용하여, 수소 가스를 기구에 채우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785년 장-피에르 블랑샤르(Jean-Pierre Blanchard)가 1785년 1월 7일에 영국의 도버 캐슬(Dover Castle)에서 프랑스의 귄느(Guines)까지 2시간 30분 만에 기구를 타고 영불 해협을 건너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이때 사용된 기구도 열기구가 아니라 수소 기구였습니다.  물론 뜨거운 공기와는 달리 수소 가스는 일반인들이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수소를 만드는 방법은 100년도 훨씬 전인 7세기 중반에 발명된, 철에 황산을 들이붓는 것이었습니다.  황산은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재료였으므로 수소 제조 비용은 굉장히 비쌌습니다.




(블랑샤르입니다.  그는 최초로 도버 해협 통과에 성공한 이후, 미국에서도 조지 워싱턴과 존 아담스, 토마스 제퍼슨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 앞에서 기구 비행 시범을 보였고, 기구 비행사를 위한 낙하산 연구 및 제조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1793년 사고로 기구가 터질 때 낙하산을 써서 탈출에 성공하여, 인류 최초로 비행 사고에서 낙하산 탈출에 성공한 인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의 공군 총책임자로 임명된 소피 아르망(Marie Madeleine-Sophie Armant)과 결혼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1808년 헤이그에서 기구 비행 중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기구에서 추락했고, 그 부상으로 인해 1년 간의 투병 끝에 사망했습니다.  결국 그 부인인 소피도 기구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낙하산 시범을 보이는 레노르망(Louis-Sébastien Lenormand)입니다.  이 실험은 1783년 12월, 그러니까 몽골피에 형제의 첫 비행 직후에 이루어졌습니다만, 사실 레노르망은 이 낙하산이라는 물건을 기구 비행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화재가 발생한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위한 용도로 이 우산처럼 생긴 낙하산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혁명 지도부는 중산층 출신의 지식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특히 과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봉 왕가로 대표되는 특권 귀족층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지만, 프랑스를 천년간 지배해온 카톨릭 사제 계급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거든요.  덕분에 많은 카톨릭 성당들이 마굿간으로 변경되는 등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요.  혁명 지도부는 그런 종교적 순종과 대립하는 과학적 이성을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혁명 지도부에겐 당장 총칼로 싸워야 하는 적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사르데냐 등등 프랑스 이외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사실상 혁명 지도부의 적이었습니다.  


프랑스가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해도 유럽 전체와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을 깨뜨리고 탄생한 혁명군에게는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진 신무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것이 바로 수소 기구였습니다.  


군사 작전에 있어 정보의 중요성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현대전까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유럽 대륙처럼 대부분의 전투가 비교적 평탄한 곳에서 치루어진 지역에서는 별로 고지같지도 않은 언덕 하나를 차지하는 측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이 전략적으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양보한 프라첸(Pratzen) 고지의 높이는 고작 12m였습니다.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적진 관측이었습니다.  가령 1809년 바그람 전투에 출정하기 위해 쇤브룬 궁전을 나서던 나폴레옹의 짐 중에는 쇤브룬 궁전 정원사가 사용하던 사다리도 있었습니다.  2m도 안 되는 높이였지만, 그런 정원사용 사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적진 현황이 전체 작전 지휘에 엄청난 차이를 낼 수 있었습니다.  웰링턴이 즐겨 쓰던 언덕 후사면을 이용한 수비 전술의 핵심도 병력을 능선 너머에 은폐시켜 적의 관측으로부터 아군의 현황을 숨기는 것에 있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평원을 제압하는 전략적 고지, 프라첸 고지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전혀 고지처럼 보이지 않는, 12m짜리 높이의 언덕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유유히 떠있는 기구에 망원경을 든 관측병이 올라타 있다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었습니다.  과학 혁신을 중시하던 혁명 정부의 성향에 고무된 프랑스 전국의 과학자와 발명가들은 기구를 이용하는 작전에 대한 온갖 제안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대개 그렇듯이 그런 제안들 중 실질적인 것은 많지 않았고 실패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기구 활용을 위해서는 수소를 저비용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군사 기술의 극적인 발전에는 역시 미친 과학자가 필요합니다.  라브와지에는 존경받아 마땅한 화학자로서 미친 과학자와는 거리가 좀 먼 분이긴 합니다만, '내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난 뒤 눈을 깜빡거릴테니 얼마나 오래 깜빡거리는지 관찰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적어도 과학에 약간 정신이 나간분은 맞는 것 같긴 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라브와지에는 목이 잘리고 난 뒤에도 30초 정도 열심히 눈을 깜빡거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프랑스 공군 창설에 핵심이 되는 이 수소 대량 생산 기술은 이미 1784년에 발명된 바 있었습니다.  그것도 바로 프랑스 혁명 정부에 적극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소(hydrogene - 물의 생성자라는 뜻)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프랑스 과학자에 의해서요.  바로 저명한 화학자 라브와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였지요.  그는 수소 대량 생산보다는 당시 과학계의 주류를 이루던 플로지스톤(phlogiston)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이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연소란 석탄이나 기름, 나무 등 인화 물질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이 일으키는 현상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라브와지에는 이 이론을 깨기 위해 '플로지스톤에 대한 고찰'(Réflexions sur le phlogistique)이라는 책까지 썼으나, 여전히 많은 과학자들은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을 믿고 있었습니다.  라브와지에는 수학자 므니에(Jean Baptiste Meusnier)의 도움을 받아 이런 테스트를 수행했습니다.  즉, 섭씨 600도로 달군 뜨거운 총열 속으로 수증기를 불어넣었더니, 다음과 같은 반응식에 의해 총구의 다른 끝으로 가연성 기체인 수소가 생성된 것입니다.  



(라브와지에가 수행한 테스트에서 수소가 발생하는 이유는 총열의 주성분인 철과 수증기 속의 산소가 뜨거운 열 속에서 결합하며 수소가 남기 때문입니다.  라브와지에는 자랑스럽게 이 테스트 결과를 발표했으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여전히 플로지스톤 이론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793년 10월, 비싼 황산을 쓰지 않고 이 잠깐 잊혀졌던 라브와지에-므니에 방식으로 수소를 대량 생산하는 테스트가 성공리에 시연되면서 관측용 수소 기구에 대한 구상이 급진전되었습니다.  정작 라브와지에는 이 테스트에는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혁명 정부에서 그가 책임을 지고 있던 세금 징수 및 담배 판매에서의 부정 행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그 다음해인 1794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수소 생산 테스트 직후에 혁명 정부의 공안위원회는 화학자인 쿠텔(Jean-Marie-Joseph Coutelle)과 그의 조수이자 엔지니어인 로몽(Nicolas Lhomond)을 벨기에 방면을 담당하던 북부군(Armée du Nord)에 파견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맨 몸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겐 공안위원회가 지급한 5만 리브르(현재 가치로 약 5억8천 만원)의 현금이 있었습니다.  즉 현지에서 필요한 기자재를 구입한 뒤 기구를 제작하여 북부군의 작전을 지원하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북부군 사령관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이 사령관이 바로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장군이었습니다.  주르당은 기구를 이용하여 적진을 공중에서 관측해주겠다는 이 두 명의 민간인을 조롱과 비웃음으로 대했습니다.  과학자들을 대하는 군인들의 태도가 어떨 것인지 예상했던 국방부 장관이자 빼어난 수학자였던 카르노(Lazare Carnot)가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함께 보낸 소개장에는 '시민 쿠텔은 결코 협잡꾼이 아닙니다'(Citoyen Coutelle n'est pas un charlatan)라는 다소 옹색하면서도 노골적인 표현이 쓰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르당은 이들을 그야말로 협잡꾼 취급을 하며, 이런 말과 함께 그들을 잘 타일러 파리로 돌려보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공격이 임박했으니, 풍선이 아니라 보병 대대가 필요합니다."  

(Une attaque autrichienne est imminente, et qu'un bataillon est nécessaire, pas un ballon)  


즉, 불어로 대대를 뜻하는 바따용과 풍선을 뜻하는 발롱이라는 단어의 라임(rhyme)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조롱이었지요.  엄격히 말해서 ~용과 ~옹은 라임이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요.  과연 프랑스 공군 창설은 이렇게 주르당의 같잖은 라임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을까요 ?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L%27Intr%C3%A9pide

https://en.wikipedia.org/wiki/Observation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Fleurus_(1794)

https://en.wikipedia.org/wiki/Hot_air_balloon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military_ballooning

https://vistaballoon.com/blog/2014/10/the-history-of-ballooning/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gas-vs-hot-air

http://www.balloonfiesta.com/gas-balloons/history-2

http://www.pbs.org/wgbh/nova/space/short-history-of-ballooning.html

https://web.archive.org/web/20100528025354/http://www.centennialofflight.gov/essay/Lighter_than_air/Napoleon%27s_wars/LTA3.htm

https://en.wikipedia.org/wiki/Nicolas-Jacques_Cont%C3%A9

https://en.wikipedia.org/wiki/Jean-Pierre_Blanchard

https://en.wikipedia.org/wiki/Louis-S%C3%A9bastien_Lenormand

https://en.wikisource.org/wiki/1911_Encyclop%C3%A6dia_Britannica/Cont%C3%A9,_Nicolas_Jacques

https://fr.wikipedia.org/wiki/Compagnie_d%27a%C3%A9rostiers

https://en.wikipedia.org/wiki/Ch%C3%A2teau_de_Meudon

http://www.strangehistory.net/2011/02/06/lavoisier-b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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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스페른에슬링 2018.04.08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등!
    공군 총책임자가 소피 아르망(Marie Madeleine-Sophie Armant)이란 여성이라니 신기합니다. 그리고 주르당의 실체가 점점 까발려지네요;; 탈라베라 편 보기 전만 해도 나름 실력자인 줄 알았는데

  2. 최홍락 2018.04.08 2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부아지에의 기요틴 관련 일화는 처형 당시 입회했던 사람의 기록에 없는 내용으로 일종의 도시전설에 가깝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이때 처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라부아지에의 제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세계적인 화학회사를 설립하게 되죠.

    • nasica 2018.04.08 2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정설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지요. 그래도 무시하고 언급하지 않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이야기라 마침내 쓰고야 말았습니다.

    • 유애경 2018.04.09 0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요틴 일화, 동일 인물인지 기억은 잘 안납니다만, 비슷한 얘기를 책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목이 잘리고 난후에도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실험으로 친구(내지는 제자? 동료?)에게 잘린목에 말을 걸어주면 의식이 있다는 표현으로 눈을 깜빡이겠다고 했고 결과 몇촌가 몇십촌가 살아있었다(?)는 일화 였는데 정설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가 않은거군요.

    • reinhardt100 2018.04.11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듀퐁사 말씀하시는군요.

      이 회사 현재는 말이 화학회사지 지금은 바이오 분야를 몬샨토등의 곡물거래기업들과 같이 분할하는 수준의 기업이죠.

      듀퐁사가 대단한게 항상 100년단위로 산업의 선도주자 중 하나로 존재해왔다는 겁니다. 그것도 19세기에는 아머사의 추격, 20세기에는 I.G 파르벤과 일본 화학기업들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말입니다.

      흔히 말하는 벤처기업들이 영세하다고 하지만, 과거의 코닥, 현재의 듀퐁이나 코닝, 퀼컴, 텍사스인스투르먼트 같은 회사들이 진정한 벤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3. 웃자웃어 2018.04.10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예전에 틸지트 조약 에필로그 편에서 프로이센에서 프랑스가 징발한 금액+전쟁배상금이 프로이센의 13년치 GDP라고 하셨는데, 엘바강 서쪽 영토를 상실전 기준인가요? 아니면 상실후의 기준인가요?

    • nasica 2018.04.11 2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익후,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웃자웃어 2018.04.11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쨌든 그럼 틸지트 조약은 베르사유 조약보다 더 가혹하겠군요. 징발로 그나라의 몇년치 GDP꿀꺽+전쟁비용을 전가+영토절반을 꿀꺽하고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에 주둔하고 비용또한 프로이센에게 전가했으니.

  4. 정암 2018.04.10 14: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풀턴이 나폴레옹에게 제안했다는 증기선 일화가 생각나네요.
    증기선에 의한 최초의 대륙간 횡단(미국-영국)이 1819년에 있었다는데
    만약 나폴레옹이 증기선의 진가를 알아보고 연구개발에 매진하면서 러시아 침공하지 않고
    내실을 다졌다면 세계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수도 있었겠네요

  5. 국성야 2018.04.11 14: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담이지만 모바일 대문의 그림은 어떤 전투를 묘사한겁니까??

  6. reinhardt100 2018.04.11 1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담입니다만 혁명전쟁기 프랑스군이 무에서부터 다시 군을 재건, 확장하는데는 카르노라는 걸출한 사람이 전쟁장관으로 앉아 있었다는게 엄청난 행운이었죠. 막말로 중대 대대단위까지 인기투표수준보다야 낫지만 무능력자들이 대거 장교단에 들어온 초기 전쟁 상황에서 그래도 장교단 복구를 겉으로나마 할 수 있었던 데는 카르노를 위시한 전쟁부가 엄청난 인력 및 보급수요를 어느정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전술 및 전략적 부족을 숫자로 보충하는 식의 전쟁'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7. 카를대공 2018.04.11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뜬금 없지만 이번 편을 보니까 동서양의 세력(?) 역전에 관한 일각의 주장이 떠오르네요.

    흔히 산업혁명 이전까진 동양이 서양에 앞섰다고 하는데
    그 앞섰다는게 과연 뭘까요?

    철학?과학?물량?

    단순 물량이라면 맞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이미 산업혁명 이전에도 이런 열기구 실험 같은걸 보면 동양이 물량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뒤쳐진게 사실이라 봅니다.

    당시 유일하게 산업혁명을 성공했다는 영국을 제외하고도 이런 열기구 같은게 나온거 보면 당대 유럽과 동양의 격차는 이미 크지 않았나 싶어요.

  8. 까까님 2018.05.07 18: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양이 물량이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화나 여러 가지 면에서 서양보다 처진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그리스 로마문명은 대단했지만 중세의 암흑도 대단했으니까요
    뭐랄까... 뭘 해도 답이 없으니까 그냥 포기하고 신이 정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한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보는 기준에 따라 판단은 다를 수 있겠지만... 패러다임이라고 할까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그 패러다임의 결정권이 급속도로 서양에 귀속되버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랑스군 2개 사단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것은 전선 중앙부에서처럼 영국군 자신들의 경험 부족과 무지였습니다.  페인(Fane)과 앤슨(Anson)의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군을 위협하여 방진을 이루게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협박만 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렇게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을 메데진 언덕 위의 영국군 포병대가 계속 갉아먹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총검을 촘촘히 내밀고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영국군 기병대는 겁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돌격은 기병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영국군은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 기병대를 격파한 것은 프랑스군의 총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닥치고 돌격'을 감행하던 중, 선두를 달리던 영국군 기병대 제1파가 비명과 함께 한꺼번에 증발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들과 프랑스군 사이에 깊이 3m, 폭 4.5m의 깊게 움푹 파인 도랑 같은 지형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쪽에서는 교묘하게 눈에 잘 보이지 않던 이 도랑 속에 놀랍게도 영국군 기병대 제1파의 절반 정도가 빠져버렸고, 많은 병사들과 말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 기병대의 멍청함을 비웃을 처지가 될까요 ?  위 그림은 1815년 워털루에서 프랑스군 기병대가 돌격하다 똑같은 운명에 처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만, 빅토르 위고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에서도 저 장면을 세밀히 묘사했습니다.  덕분에 이런 그림도 그려졌지요.)




이건 정말 코미디 같기도 하고 비극 같기도 한 어이없는 사고였습니다.  제대로 된 지휘관의 기본 중 기본이 지형 숙지였는데, 메데진 언덕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점하고도 그런 도랑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영국군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 지휘부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사고로 큰 낭패를 당했을 경우, 아무리 창피하더라도 물러서서 재정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페인과 앤슨은 굴하지 않고 그대로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제대로 된 공격을 했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컸는데, 그렇게 엉망진창인 상태로 보병 방진을 공격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습니다.  영국군 기병대는 거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보기 흉하게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군이 이 틈을 타 진격을 재개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메데진 언덕에는 영국군과 스페인군 보병 사단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영국제 포탄이 계속 날아왔습니다.  게다가 이때 즈음엔 다른 방면에서의 프랑스군도 다 패퇴한 상태라는 소식이 전해졌으므로, 루팽과 빌라트도 영국군 기병대가 박살이 난 틈을 타 재빨리 후퇴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탈라베라 전투의 실질적인 마무리였습니다.



(영국 화가인 William Heath가 그린 탈라베라 전투입니다.  진 쪽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습니다.)




전투 과정은 길고 잡다했습니다만,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영국군이 스페인군과 연합하여 스페인 내부로의 침공길에 나섰는데, 그를 막으러 온 프랑스군과 탈라베라에서 마주치자 정작 공격한 측은 프랑스군이었고 영국-스페인군은 방어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공격이 좌절된 것이 결과였지요.  공격했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곧 패배일까요 ?


빅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세 번 공격하여 다 실패했지만, 한 번 더 들이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도 컸으나 영국군도 꽤 큰 피해를 입었고, 조제프와 주르당의 약 5000 규모의 예비대는 아직 총 한 방 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제프와 주르당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세 번이나 두드렸는데 안 열리는 문은 네 번 두드린다고 열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남의 집 문 따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워두고 온 마드리드의 본진이 베네가스에게 털리게 생긴 상황이었으니, 마음이 조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조제프는 주르당의 조언대로 철수를 명령했고,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도 그 명령에 복종하여 28일 밤부터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탈라베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 노릇을 하던 빅토르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찌나 분통이 터졌는지 아무 대책없이 철수를 거부하고 29일 새벽 3시까지 그 자리를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전체 프랑스군의 2/3가 다 철수하는데 그의 제1 군단 혼자 남아있다가는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조제프와 주르당에 대한 욕설을 지껄이면서 그도 결국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 뒤에도 조제프와 주르당만 없었다면 프랑스군이 4번째 공격에서 마침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당시 전투에서의 승리란 누가 더 많은 적을 죽였는가가 아니라 누가 물러났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거든요.  영국군은 약 6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7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습니다.  전체 병력 대비 사상자 비율로 보면 영국군 측이 더 높은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간 의아한 것은 별로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스페인군도 1천2백이나 되는 사상자를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쿠에스타는 영국군이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스페인군에는 사상자가 거의 없다고 하면 스페인군의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상자를 많이 낸 것은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다는 증거로서 당시 지휘관에게 일종의 영광처럼 여겨졌습니다.  물론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 전투의 승자는 분명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건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전투를 치르는 것은 그저 지휘관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어 도시를 탈환한다든지 적의 항복을 받아낸다든지 하는 승리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탈라베라 전투는 쓰라린 희생만 있었을 뿐,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열매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드리드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과 합류하는 것이 정상적인 작전 흐름이었을텐데, 영국군은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  영국군이거든요 !  산더미 같은 염장쇠고기와 럼주가 함께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런 고기통 술통은 옮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웰슬리가 이렇게 보급품 문제로 꾸물거린 것이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웰슬리는 이때까지도 북쪽에서 술트 원수가 약 3만명 규모로 충원된 제2 군단을 끌고 자신의 후방을 끊기 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3일 뒤인 8월 1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웰슬리는 처음에 술트의 제2 군단 규모가 약 1만5천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추가로 전달된 정보에 의해 병력 규모가 3만에 달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그의 결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는 마드리드로의 진격을 재빨리 포기하고 타호 강을 따라 포르투갈 국경 너머로 후퇴해버렸습니다.  웰슬리에게는 포르투갈로부터의 보급선이 차단될 경우 발생할 문제가 극복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웰슬리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예비 탄약과 보급 물자 대부분은 물론, 탈라베라 전투에서 노획했던 십여 문의 프랑스군 대포도 모두 버리고 허둥지둥 퇴각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었다면 이렇게 빅토르-세바스티아니 군단들에 이어 술트의 군단을 각개격파할 기회가 생긴 것에 매우 기뻐하며 그의 군을 오히려 북쪽으로 진격시켜 술트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탈라베라에서 철수한 프랑스군은 원래의 철수 목적을 매우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은 빈정이 상할대로 상한 빅토르에게 뒤에 남아 웰슬리와 쿠에스타의 연합군을 감시하는 한직을 주고는,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과 함께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을 상대하러 달려갔습니다.  이들은 8월 11일, 마침내 톨레도(Toledo) 인근 알모나시드(Almonacid) 전투에서 베네가스와 만나 매우 쉽게 라 만차 군을 격파하고, 마드리드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입니다.  이 분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역할을 더 많이 했고, 사실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알모나시드 전투에서의 승리가 이 양반의 가장 큰 승리일 것입니다.  이 분은 안달루시아 침공 이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사령부를 차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혹자는 그가 알함브라 궁전의 일부를 파괴한 것을 비난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황폐화시켜놓은 알함브라를 다시 복원시킨 것이 그였다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탈라베라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2만의 영국군이 무려 4만이 넘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거의 단독으로 버텨내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후퇴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지엽적이고 전술적인 승리일 뿐, 전략적으로는 프랑스군이 모든 목표를 달성한 프랑스 측의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영국군의 스페인 침공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처럼 분산된 스페인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11월 마드리드 인근 오카냐(Ocana)의 전투에서 술트가 4만5천 규모의 스페인군을 완파한 것이 매우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이 전투 결과 스페인 중부를 완전히 장악한 프랑스군은 바일렌 전투 이후 감히 넘보지 못하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침공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웰슬리의 영국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웰슬리는 스페인 측이 '오기만 하면 식량까지 모두 공급할테니 일단 오시라'고 여러차례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 다음해인 1810년 2월말까지도 포르투갈 국경을 절대 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탈라베라에서 보니 스페인군은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더라, 그들의 협력을 기대하고 스페인으로 진격했다가는 큰일 나겠더라'는 입장을 고수했지요.  그게 꼭 틀린 평가는 아닐지 몰라도, 영국군이 스페인에게 있어 그다지 좋은 연합군이 아니었던 점은 확실했습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탈라베라 전투는 웰슬리 본인에게는 무척 뜻깊은 승리였습니다.  어쨌거나 마침내 스페인에 진격하여 프랑스 2개 군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어 경의 코로나 전투 이후 침체되었던 영국 육군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약 1달 뒤인 8월 26일, 마침내 꿈꾸던 그대로 귀족이 되어 웰링턴 자작(Viscount Wellington of Talavera and of Wellington)이 되었습니다.  약 3년 후인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드리드를 탈환한 그는 웰링턴 백작(Earl of Wellington)이 됩니다.



* 사족 :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세바스티아니 장군과의 관계는 아래 편을 참조...


http://nasica1.tistory.com/30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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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ck 2018.04.01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탈라베라전투가 드디어 끝났군요. 후에 줄줄이 벌어질 전투에 비하면 소규모이지만 대혁명이후 유럽대륙에서 대규모 야전을 치러본 전력이 없는 영국군으로선 그나마 여러가지 면에서 좋은 경험이었겠지요?. 방어전문 장군이지만 웨즐리같은 상승장군도 건졌고 훈련만 열심히 했던 영국육군이 그나마 전투다운 전투도 치렀으니 말이죠. 어째든 탈라베라전투의 독후감을 한마디로 하면 "결과가 뭐지?" 이런 느낌이랄까?..

  2. 유애경 2018.04.02 0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상화의 세바스티아니 장군,어디서 본듯한 얼굴이다 싶어서 생각해보니 뮈라 원수랑 닮은것 같네요...(저한테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알함브라 궁전을 파괴하면서 한편으론 황폐해진 궁전을 복원시켰으니 칭찬(?)을 해줘야 하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보고 가요~~

  3. TheK2017 2018.04.02 0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글이 착착 감기네요.
    자주 와서 좋은 글 많이 읽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석총 2018.04.02 0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메이로에선 공작+원수가 되죠 웰링턴으로 한이유가 웰슬리와 모닝턴을 합친거랍니다.

  5. 수비니우스 2018.04.02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그런데 영국군 지휘부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
    동서남북 어디나 사람 사는데는 비슷비슷하군요...

  6. reinhardt100 2018.04.02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즐리가 도박을 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보급문제이기도 했지만 웰즐리마저 패하면 대륙 원정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는 게 더 큰 이유이긴 합니다. 무어-웰즐리가 연속 실패한다고 가정한다면 비전투손실만도 최소 수만 단위인데 하노버등의 병력충원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같은 내부 자원을 본국의 반전 및 러다이트 분위기 제어에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조건적인 협상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미앵조약이 그랬고요.

    다만, 안달루시아 침공을 선택했다는 것은 프랑스군으로써도 패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에스파냐 주력군을 격파한 후 바다호스의 방어선이 완비되지 않았던 영국군을 공격하는게 더 효율적이었으니까요. 다만, 여기서 문제는 보급이 문제란게 걸립니다만.

  7. 정암 2018.04.03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페인 전역 관련 글이 부족해서 늘 궁금했는데 요즘 감사히 즐겁게 글 읽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저 알함브라궁전 장식들은 사람들이 일일히 손으로 깎고 새긴건가요?
    아님 현대에 와서 기계장비로 복원한건가요?
    전자라면 후덜덜하네요;;;;
    저런 정교한 문양이 몇백년이 지나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는게 놀랍고요 @.@

  8. 카를대공 2018.04.03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 쪽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습니다.

    이 멘트 보고 깨달았는데 그동안은 확실히 프랑스측에서 그린 전투 기록화가 많았군요.
    그말인즉슨 이제부턴 슬슬 프랑스 아닌 국가에서 그린 그림이 많아지겠네요.

  9. 카를대공 2018.04.03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라망카 전투 하니 제가 재밌게 본 브레이킹 배드라는 미드가 떠오르네요.
    거기 살라망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워낙 유명한 미드라 이름 정도는 들어 보셨을텐데 강추 합니다.

  10. 줄리안 2018.06.01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체 샤프는 이런 상황에서 라이플 경보병 대위가 프랑스군의 이글을 탈환했다는 것인지...

조제프와 함께 작전 회의 중이던 프랑스 장군들에게 전해진 소식 중 하나는 주르당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술트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술트가 보내온 장계의 내용은 그의 남쪽으로의 행군 현황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진척이 주르당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소식은 조제프와 주르당이 떠나온 마드리드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술트의 소식보다 더 나빴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의 제4 군단과 대치하던 베네가스 장군의 스페인 라 만차(La Mancha) 군이 마드리드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원래 베네가스의 임무는 세바스티아니가 탈라베라에서 빅토르와 합류하지 못하도록 세바스티아니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임무에 보기 좋게 실패한 베네가스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자신과 마드리드 사이에 프랑스군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쪽 방향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던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것은 조제프와 주르당이었습니다.  그들, 정확하게는 주르당이 주장했던 것이 '며칠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술트가 북쪽에 나타나면 영국군은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것이었는데, 이제 며칠이 아니라 10일 가까이를 기다려야 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뭐 한가한 상황이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텅 비워두고 온 마드리드가 스페인 라 만차 군에게 위협받는 상황까지 겹치자, 술트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지요.  특히 빅토르나 세바스티아니가 굳이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스페인 국왕과 그의 군사 고문의 위엄을 세우겠다며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다 끌고 탈라베라로 달려온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습니다.  이 위기는 바로 조제프와 주르당 본인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라 만차 La Mancha는 마드리드 바로 남쪽 지방으로서, 원래 라 만차라는 이름은 메마른 땅이라는 뜻의 아랍어 알 만샤 Al-mansha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름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라 만차는 나름대로 비옥한 축에 속하는 지역이라,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전통적으로 곡식을 제분하기 위한 풍차가 꽤 많았습니다.  라 만차의 사나이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격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제프와 주르당은 빅토르가 주장하는 대로 공격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빅토르는 여전히 자신이 공을 독차지 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크게 4갈래로 편성되었는데, 그 중 3개 공격을 빅토르의 3개 사단이 각각 맡았고, 나머지 1개만 세바스티아니의 사단들이 맡았습니다.  어제 밤과 오늘 새벽에 영국군을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었던 루팽 사단이 메데진 언덕과 세구리야 산맥 사이의 계곡을 공격하기로 했고, 빌라트(Eugene-Casimir Villatte) 사단이 그 왼쪽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라피스(Pierre Belon Lapisse) 사단이 그 왼쪽, 그러니까 메데진 언덕 남쪽 사면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메데진 언덕의 동쪽 경사면을 그대로 들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언덕의 북쪽과 남쪽의 양갈래로 공격해들어가 남북 양쪽 사면을 협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세바스티아니 휘하에 있던 사단들은 영국군과 스페인군의 방어선이 맞닿는 연결부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의 공격은 빅토르가 요청했던 유인 공격에 불과했습니다.  즉, 세바스티아니의 사단들이 먼저 영국군 방어선 남쪽을 공격하여 소란을 일으켜주면, 빅토르의 사단들이 메데진 언덕을 집중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이 큰 그림이었습니다.


요약하면, 빅토르가 하자고 하는 작전 그대로 하게 된 것입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이 이끄는 병력은 무엇을 하냐고요 ?  어떤 공격에서든 전병력을 일거에 쏟아붓는 일은 없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의 기병대 및 마드리드 수비대는 예비대로 남겨 두었다가 상황에 따라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7월 28일 오후 프랑스군의 제3차 공격의 초기 전개도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번에는 프랑스군도 긴 횡대로 전열을 짜고 공격했는데, 올리브 밭 한가운데를 뚫고 나가야 했던 레발 사단에게 긴 횡대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오후 2시반 경에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공격에 나선 것은 세바스티아니 휘하에 있던 레발(Jean Francois Leval)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그의 사단은 독일군과 네덜란드군으로 이루어진 약 4500 규모의 부대였는데, 이들의 공격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사실 의도된 바가 아니라 일종의 작은 사고였습니다.  원래 그의 공격 순서는 두번째였는데, 웰슬리가 판단한 것처럼 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인 올리브 밭을 통과하느라 그의 사단은 다른 프랑스 사단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먼저 개활지로 나와 버렸던 것입니다.  개활지 앞에는 영국군 방어선과 스페인군 방어선이 합류하는 지점이 있었고, 거기에는 영국군이 구축해놓은 포병대 보루가 있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더 이상 공격을 늦출 수 없었던 레발 장군은 곧장 공격에 들어갔으나,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올리브 밭을 통과하느라 대오도 헝클어져 있었고 특히 영국군 포병대 보루 정면으로 쳐들어간 것이 주요 패인이었습니다.  레발 사단의 우익은 영국군을, 좌익은 스페인군을 공격했는데, 우익과 중앙이 영국군에게 격파 당해 후퇴하자, 스페인군을 상대하던 좌익도 측면 노출을 우려하여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레발 사단은 약 7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우익에서 레발 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중앙을 맡은 세바스티아니와 라피스의 공격도 시작되었습니다.  약 1만5천 규모의 프랑스군 2개 사단은 제1파와 제2파로 나뉘어 간격을 두고 공격해들어갔습니다.  이들을 상대한 것은 약 6천 규모의 영국군 셔브룩(Sherbrooke) 장군의 사단이었습니다.  영국군은 특유의 침착성을 발휘하여 프랑스군 제1파가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다 45m 지점까지 다가오자 무자비한 일제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파도는 지근거리에서 쏟아진 6천발의 총알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진격이 멈칫하자 셔브룩 사단은 총검 돌격을 감행했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총검 맛 보기를 사양하고 뒤돌아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역시 영국군도 아직 실전 경험이 적어서 그랬는지, 그만 침착함을 잊고 도망치는 프랑스군을 대오도 갖추지 않고 무질서하게 추격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총 8개 대대 중 6개 대대가 이렇게 신이 나서 추격에 참여했다가 그만 뒤를 이어 다가오던 프랑스군 제2파와 딱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영국군이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고, 영국군 방어선 중앙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가 이날 전투에서 영국군의 최대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영국군에 위기가 닥치자 아까 후퇴했던 레발 사단도 다시 중앙부로 진격해왔습니다.




(전투가 한창 뜨거워질 때의 모습입니다.  영국군 중앙부 셔브룩 장군 휘하 일부 여단들이 전선을 유지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앞으로 나가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진한 여단 지휘관들의 이름이 로우 Low와 렝워쓰 Lengwerth라고 되어 있는데, 저 분들의 이름은 사실 뢰브(Sigismund von Löw)와 랑베르트(Ernst von Langwerth)입니다.  저렇게 전진한 여단들은 하노버 출신들로 이루어진 KGL 여단들이고 그 지휘관들도 독일인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랑베르트 장군의 제3 여단은 큰 피해를 입어 사상자가 거의 절반에 달했고, 랑베르트 장군도 전사했습니다.)




예비대로 있던 매켄지(Alexander Randoll Mackenzie) 사단이 재빨리 세바스티아니 사단을 막아섰으나, 라피스 사단을 막아설 예비대는 아예 없었습니다.  이 위기 속에서 웰슬리는 메데진 언덕을 지키던 연대 하나를 내려보내 간신히 구멍을 메웠습니다.  이 사이 셔브룩 사단이 후퇴 및 재정비에 나섰고, 다시 방어에 투입되면서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300명의 매켄지 사단이 8000명 규모의 세바스티아니 사단을 막으려니 영국군도 피해가 컸습니다.  매켄지 장군 자신이 전사했고, 그 사단도 전체의 1/4이 넘는 63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래도 영국군의 머스켓 사격 속도는 확실히 프랑스군보다 우세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사단도 피해가 막심하여 무려 2천이 넘는 사상자를 남기고 결국 후퇴해야 했던 것입니다.  라피스 사단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이들은 영국군과 평행선으로 나란히 늘어서 정지 상태에서 총격전을 벌였는데, 서로 비슷한 사상자를 낸 뒤 후퇴한 쪽은 라피스 사단 측이었습니다.  라피스 장군이 선두에서 지휘하다 총격을 받고 전사한데다, 측면에 있던 세바스티아니 사단이 후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이나 약 1600명씩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웰슬리가 필사적으로 구멍을 틀어막는 모습입니다.  그림에서 메데진 언덕을 지키던 스튜워트(Richard Stewart) 장군의 부대가 헐레벌떡 내려가 라피스 사단을 막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덕분에, 메데진 언덕 북쪽의 계곡으로 들어오는 빌라트와 루팽의 프랑스군을 막을 부대가 부족해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밥상에 숟가락을 슬며시 올려놓으려던 중앙부의 레발 사단은 입장이 더욱 난처해졌습니다.  결국 이들은 경멸해마지 않던 스페인군 기병대의 추격을 받으며 걸음을 날살려라 도망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제프와 주르당도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이들은 약 5천 병력을 예비대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훗날 이들은 나폴레옹으로부터 '명색이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예비대를 가지고 뭘 하고 있었나'라는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프랑스 좌익과 중앙에서의 공격이 이렇게 실패로 돌아가자, 원래의 주공이었던 전선 북쪽 끝 빌라트와 루팽 사단의 공격은 매우 어정쩡해졌습니다.  원래는 메데진 언덕을 남북 양쪽에서 둘러싸며 공격하기로 했었는데, 남쪽에서 그렇게 해줄 라피스 사단이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일단 메데진 언덕과 그 북쪽 세구리야 산맥 사이의 계곡으로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언덕 위에서 전황을 관측하던 웰슬리는 프랑스군이 자신의 방어선을 북쪽에서 우회하려는 것을 쉽게 알아챘습니다.  기병대 외에는 이 계곡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던 웰슬리는 쿠에스타 장군에게 급히 지원을 요청했고, 프랑스군의 공격선상에서 벗어나 있던 스페인군은 그에 적극적으로 응해 기병대와 보병대를 급파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빌라트와 루팽 사단이 계곡 속으로 진입했을 때는 스페인 보병만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을 뿐 영국-스페인 기병대는 시퍼런 기병도를 뽑아들고 프랑스군을 요격할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군의 밀집 보병 방진입니다.  기병대의 공격에 대해서는 견고했겠지만, 대신 포병대의 묵직한 대포알에는 세상 취약했습니다.  때문에 아군 기병이나 포병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적군의 기병과 포병의 합동 공격에 걸리면 끝장이었지요.  그림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thread/1437964/beautiful-world-napoleonics)




프랑스군은 좁은 계곡 속에서 마주친 기병대에 맞서 방진(square)를 짜야 했는데, 이건 역으로 프랑스군이 사지 속으로 제발로 들어온 형국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보병 방진을 기병대에 대해서는 매우 튼튼한 방어진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약점이 2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방진 특성상 이동이 아무래도 어렵다는 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이런 밀집 보병 대오는 포병대의 포격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메데진 언덕 꼭대기에는 영국군 포병대가 있었고, 이들은 계곡 아래 프랑스군이 방진을 짜는 것을 보고 신이 나서 대포알을 날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빌라트와 루팽의 프랑스 사단들은 이 좁은 계곡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대포밥이 될 신세였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바세쿠르트(L. A. Bassecourt)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보병 사단이 이 계곡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독안에 든 쥐 신세로 죽는 일만 남았던 프랑스군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는 사건이 연이어 터집니다.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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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딸기맛농약 2018.03.25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빠이길 바래봅니다. ㅎㅎ

  2. 베타니 2018.03.26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전투상황도가 있으니 확실히 입체적인 이해가 되네요.

  3. 무장공비 2018.03.27 0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잘보고 있습니다. 나시카님.

    [원래 라 만차라는 이름은 메마른 땅이라는 뜻의 아랍어 알 만샤 Al-mansha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름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라 만차는 나름대로 비옥한 축에 속하는 지역이라]

    뱀발을 하나 붙이자면 위 얘기는 무어인들이 포르투갈쪽으로 진출하지 않은건 그쪽 지형과 기후가 습한곳이라 별로 공략할 메리트가 없었다는 얘기와 통하는 얘기가 아닐까하네요. 습하고 눅눅한 기후에 짜증나던 무어인들에게는 아마 반가운 종류의 '메마른 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나저나 오늘도 역시 티비 드라마 뺨치는 끊기십니다... 빨리 뒷얘기 올려주세욧!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4. 몽생 2018.03.27 17: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방진을 취한 프랑스 병사라면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 다음 회로 넘어가네요^^;;
    아쉬운 마음 달래기위해 이번 회 다시 한 번 더 읽어야겠습니다.

  5. 푸른 2018.03.27 2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뭇 드라마 작가보다 훌륭한 묘사에 끊기 신공 ㄷㄷ 늘 잘보고 갑니다~

  6. 카를대공 2018.03.27 2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절단신공이 극에 달한 느낌입니다 ㅎㅎ

    제가 좋아하는 미드들이 결정적일 때 끊기는 그 느낌이네요.

  7. ㄹㄷㅈ 2018.03.28 1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같은 카테고리를 만드실 생각 없나요? 묻고 싶은 것들이 여러가지 있는데 그냥 글에 달기가 좀 그렇군요.

  8. Eugen 2018.03.30 2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asica님 Sharpe시리즈의 순서가 어떻게 되고 구매는 어디서 하는지 아시나요. 요즘 나폴레옹 전쟁에 관심이 생겨서요.

    • nasica 2018.03.31 0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존에서 구매하시는 것이 가장 낫지 않겠습니까 ? 스마트폰에 킨들을 설치해서 그걸 보시는 것이 가장 편리합니다. Sharpe’s tiger 부터 Sharpe’s devil 까지의 순서는 https://en.m.wikipedia.org/wiki/Sharpe_(novel_series) 에 표로 나와 있습니다.

프랑스군 1개 연대 약 1600명이 메데진 언덕으로 달려들 때 이 언덕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KGL 여단의 규모는 고작 1200명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야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자다 일어난 판국이라 KGL 여단은 강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세를 올린 프랑스군이 메데진 언덕의 정상 능선을 점령하고 기쁨의 함성을 올리고나자, 영국군의 진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능선 바로 너머 후사면에 영국군 2개 여단 약 3800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다가 반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2개 여단도 야습은 예상하지 못하고 능선에서 멀찍이 떨어진 뒤쪽 경사면에서 야영을 하다, 능선 너머에서 벌어진 총격전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영국군이 언덕 능선 뒤에 숨어있다가 들이칠 줄은 몰랐던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다시 언덕을 탈환하는데는 충분했습니다.




(7월 27일 밤, 프랑스군의 첫번째 공격 상황도입니다.)



이렇게 언덕 후사면에 병력을 감추어 뒀다 언덕을 힘들게 올라온 적군을 능선 정상에서 반격하는 수비 전법이 바로 웰슬리의 주특기였습니다.  알고 보면 주특기라기보다는, 이것이 웰슬리가 제대로 갈고 닦은 유일한 필살기였습니다.  웰슬리는 어디서 이런 못된 전술을 배워왔는지, 바로 1년 전 비메이루(Vimeiro) 전투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쥐노(Junot)의 프랑스군을 격파한 적이 있었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부사쿠(Bussaco) 전투 등 이후 전투에서도 똑같은 전법으로 프랑스군을 상대했고, 종국엔 워털루 전투에서 이 전술로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격파하는 위엄을 보여주었습니다.  웰슬리는 나중에 '전투란 능선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예측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항공 정찰이 없던 시절에는 낮은 능선이라고 할지라도 그 뒤에서 어느 정도의 예비 병력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므로 능선이라는 지형은 방어전에 매우 유용했습니다.  다만 이 전술은 어디까지나 수비용이었을 뿐, 결코 공격용은 아니었습니다.  웰슬리는 어떻게 그런 반쪽짜리 전술 하나만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




(제가 군대있을 때 아마 저 '권법소년'이라는 만화를 보고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아 저도 형의권의 대가가 되겠다고 형의권 교본까지 교보문고에서 샀었습니다.  아... 그 책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  책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네요.)




청나라 말기 형의권의 대가로 유명했던 곽운심이라는 권법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형의권을 배우기 시작할 때 배움이 느리고 서툴러, 형의권의 기본기 중 반걸음 내딛으며 주먹을 지르는 기본기 중 기본기인 붕권만 3년 동안 연마했답니다.  그런데 워낙 철저하게 수련하다보니, 이 단순한 붕권 하나만으로 모든 상대를 꺾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반보붕권 타편천하(半步崩拳 打遍天下)라고 하지요.  웰슬리가 즐겨 썼던 이 전술을 영어로 reverse slope defense 즉 후사면 방어라고 하는데, 이는 무척 단순하고 뻔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이 단순한 전술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이 전법에 꼭 맞는 언덕을 찾아 느림보 영국군을 끌고 수없이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고, 이 전법을 쓸 수 없는 곳에서는 굴욕과 비난을 감내하고 후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에겐 이런 전술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영국군 특유의 풍부한 보급망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을 포함한 프랑스군의 기라성같은 장군들은 웰슬리의 이 얄미운 전술에 대한 효과적인 파해법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탈라베라 전투에서 이 전술에 당한 빅토르 원수도 결국 1812년 베레지나(Beresina)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동일한 수법을 써서 효과를 봤다고 하니, 그야말로 반보붕권 타편천하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날밤의 큰 전투는 이렇게 프랑스군의 패퇴로 마무리되었지만, 호되게 놀란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어둠을 타고 또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또 그들이 비웃었던 스페인군처럼, 영국군 초병들도 겁에 질려 어둠 속에서 헛것을 보고 허위 경보를 울려 여러 차례 비상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한편, 프랑스군 측도 긴장이 팽팽했습니다.  빅토르가 우려하던 일, 즉 아직 영국군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조제프 국왕과 주르당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 본대가 도착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한밤중에 세바스티아니까지 참석한 프랑스군 수뇌부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주르당은 빅토르에게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쓰레기같은 전술을 제안했습니다.  그냥 제자리를 지키고 수비를 하며 시간을 때우자는 것이었습니다 !  세상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수비를 하다니 !  그것도 이런 야전에서, 병력 수도 비슷한 상황에서 수비라니 !  나폴레옹이 현장에 있었다면 기가 막혀 얼굴이 하얗게 질릴 만한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르당의 설명은 나름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술트의 제2 군단이 북쪽에서 탈라베라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웰슬리의 연합군과 대치한 상태로 며칠 더 버티면, 술트까지 가세하여 손쉽게 웰슬리를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전에 상황을 파악한 웰슬리가 꽁무니를 내빼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격퇴한 셈이 되니까요.  그러나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은 빅토르였습니다.  그는 전투의 목표는 적 병력의 궤멸이며, 적을 물러나게 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며 조제프 국왕이 금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군단 전체를 동원하여 영국군을 새벽에 들이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패기 앞에서 조제프는 물론이고 주르당까지도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빅토르는 새벽 무렵 두번째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빅토르의 두번째 공격도 전면적 총공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데진 언덕만 탈취하면 영국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생각에 휘하 3개 사단 중 루팽(Ruffin)의 1개 사단 약 5천명만 동원했고, 이들을 긴 영국군 방어선 중 일부에 집중시켜 구멍을 뚫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루팽 사단의 3개 연대를 각각 긴 종대로 편성하여 3개의 송곳 형태로 다시 메데진 언덕에 돌격시켰습니다.  루팽 사단에 딸린 8문의 대포로 편성된 포병대가 사전 지원 사격을 해줬는데, 별 도움은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에게 노출된 메데진 언덕 동쪽 사면에는 영국군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이번에도 이들은 언덕의 능선 바로 코 앞까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했습니다.  



(7월 28일 새벽의 프랑스군 제2차 전투 상황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능선 약 90m 앞까지 전진했을 때 발생했습니다.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해 능선 뒤에 숨어있던 힐(Hill) 장군 휘하 영국군 1개 사단 4천명이 긴 횡대로 일제히 튀어나와 위력적인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오르막길을 향해 헉헉거리며 올리가던 프랑스군의 3개 종대 앞 부분에 집중된 4천발의 머스켓볼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종대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군은 대부분 쓰려졌고, 덕분에 진격이 순간적으로 멈춰버렸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은 다른 것은 몰라도 머스켓 연사 속도에서 유럽 최고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이들은 신속하게 머스켓 소총을 재장전하여 머뭇거리는 프랑스군 3개 종대의 앞부분과 옆부분에 다시 4천발의 일제 사격을 퍼부었고 프랑스군 측에서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이에 비해 프랑스군은 돌격을 위한 좁고 긴 종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므로 대응 사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국군의 thin red line과 프랑스군의 thick blue column의 충돌은 스페인 전역 내내 반복되던 일입니다.)




이때 루팽 장군은 사격보다는 과감한 총검 돌격을 명해야 했고,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여태까지 상대했던 스페인군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긴 영국군 방어선 중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힐 장군의 오른쪽을 담당하고 있던 셔브룩(Sherbrooke) 장군의 영국군 사단이 가만히 있지 않고 튀어나와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에 다시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이렇게 전면과 좌측 2개 방면에서 공격을 받자, 프랑스군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전면의 영국군도 후퇴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돌격을 했고, 프랑스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했습니다.  현명하게도, 영국군은 언덕 아래 평원까지 그들을 추격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측의 피해는 1300명, 영국군은 750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럽지 못한 전투 결과를 받아든 빅토르는 다소 풀이 죽은 상태로 다시 조제프 및 주르당, 세바스티아니와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은 거보라는 듯이 다시 술트를 기다리며 방어전을 펼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비해 빅토르는 조제프가 영국군과 스페인군 연결부, 즉 연합군 방어선의 중앙부를 공격해준다면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이 다시 메데진 언덕을 탈취해내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렇게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2가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둘다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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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음충 2018.03.17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빠 근데 4편 아닌가여

  2. 산골 김저자 2018.03.17 1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역사를 좋아하면서 Nasica님 펜입니다.
    무심코 반갑게 Nisica님 글을 읽으려다 익숙한 단어들이 나와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
    저는 한국형의권연구회란 곳에서 1년 6개월간 실제로 형의권을 배우고 있거든요.
    막상 배워보니 허무맹랑한 기의 운용이 아닌 과학적인 원리?로 힘을
    내는 방법(내경)을 배우는등 재밌게 배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홍보 같은데 홍보는 아니고요 ㅎㅎ
    제가 좋아하는 블로거 글에 보통 사람들 잘 모르는 형의권 얘기가 나와 깜짝 놀라고
    반가 웠습니다.
    붕권은 힘이 직선으로 뻗어서 강력하지만 실제 동작은 철권의 붕권처럼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멋?이 있습니다. 형의권 동작들이 대체로 간결하고 소박?한 멋이 있는 것 같습니다. ^..^

  3. 최홍락 2018.03.17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곡사포 몇문만 있었어도ᆢᆢ

  4. ㅇㅇ 2018.03.17 2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날 똑같은 전술에 당한다면 열기구 같은걸 써볼생각은 안했을까요?

  5. 계속 2018.03.17 2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는 적을 맞이하는 방어적인 전술에 당했다는 것은 프랑스군은 회피나 우회없이 항상 싸우러 가야하고 영국군은 전장을 골라도 될 정도로 여유로웠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웰슬리가 이겼다기보다는 그런 환경을 만든 영국이라는 국가가 이겼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6. JPM 2018.03.19 0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구석에 앉아서 읽는 입장이니 할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언덕을 기병이 함께 뛰어 올랐다면 달랐을까요? 뭐, 영국군은 보고 놀고만 있겠냐만 말이죠.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여담입니다만, 전쟁만큼 비싼 외교(?)도 없는거 같습니다. 저 영국군의 속사력과, 바다를 쥐고 흔드는 로열네이비 다 결국 £££ 아니겠습니까 ㅠ 그 돈 많은 영국도 크로노미터 살 능력이 있는 함장을 좋아했구요. 결국 저때나 지금이나 다 돈이네요. 가정을 위해 한주 고생하시는 가장여러분 = 호색한 라살의 경기병대... 인걸까요. ㅎㅎ 한주 화이팅하시고 더 재밌는 포스팅 부탁드립니당.

  7. 석총 2018.03.21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군의 표준전술 능선에 숨기

1809년 7월 27일, 탈라베라에 모인 프랑스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제1 군단장 빅토르 원수, 제4 군단장 세바스티아니 장군, 그리고 조제프 국왕을 보좌하는 주르당 원수의 3명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총사령관은 조제프 국왕 본인이었습니다만, 아무도 그에게서 전략이나 지휘를 기대하지는 않았지요.  세 명의 장군들 중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빅토르 원수였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원수가 아니었으므로 계급도 낮았지만, 사실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및 행정 관료라고 할 수 있었지요.  문제는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원수였습니다.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주르당은 16살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고,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도 복무하는 등 험한 곳을 돌아다닌 뒤, 서인도제도에서 얻은 말라리아로 건강을 해친 채 귀국했습니다.  결국 건강 문제로 제대를 한 그는 고향인 리모쥬에서 잡화점을 하는 등 평범한 서민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제대한 지 5년 뒤 터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주르당은 당시 47세로서 장군으로서는 한창 나이였고, 빅토르보다는 2년 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국민개병제를 법제화하여 프랑스군을 유럽 최강으로 만들어준 징집제의 창시자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징집제는 흔히 주르당 법(Loi Jourdan de 1798)으로 불릴 정도로 그의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나폴레옹의 대관식 때 원수로 임명된 원년 원수 그룹 멤버가 되었지요.  그에 비해 빅토르는 3년 뒤인 1807년 당시 제1 군단장이던 베르나도트의 부상으로 인해 임시 군단장이 되었다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맹활약을 한 덕분에 간신히 원수가 되었지요.


하지만 선임자가 꼭 능력치가 더 높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르당이나 빅토르나 모두 대혁명 이전에 사병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한 뒤, 대혁명 발발 뒤에 자원병으로 다시 입대하여 장교로 선발된 뒤 승승장구하여 장군 계급까지 승진한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주르당은 알고 보면 명성에 비해 그다지 뛰어난 전과는 별로 없는 군인이었습니다.  가령 1796년 모로가 중앙을, 나폴레옹이 우익인 이탈리아 방면을 맡을 때 주르당은 좌익을 맡아 바이에른 방면을 공략했는데, 당시 나폴레옹만 성공했을 뿐 독일 지역에서의 공세는 카알 대공에게 분쇄되었습니다.  그때 모로까지 후퇴하게 된 원인이 바로 주르당이었습니다.  암베르크(Amberg) 전투에서 주르당이 카알 대공에게 철저히 패배했기 때문에 모로의 측면이 노출되어 부득이하게 모로도 후퇴했던 것이지요.  그때 패배의 책임을 지고 주르당은 군문에서 물러나 정치에 입문했는데, 그때 만든 것이 1798년의 주르당 법이었습니다.  1799년 그는 다시 군에 기용되어 다시 라인 방면군을 맡았지만, 이번에도 다시 카알 대공에게 패배하며 체면을 구긴 바 있었습니다.  그때도 책임을 지고 지휘권을 부하에게 넘기고는 물러났는데, 그 부하가 바로 나폴레옹 군문에서 2인자라 할 수 있는 마세나였습니다.  마세나는 주르당이 이끌던 바로 그 군대를 넘겨 받아 눈부신 활약을 펼쳐 주르당을 더욱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패전을 거듭했던 주르당이 명성을 떨쳤던 것은 프랑스군이 연전연패하던 혁명 초기 혼란 속에서 그래도 소중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의 1794년 네덜란드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른 플레뤼스 Fleurus 전투가 그의 대표적인 승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그의 지휘가 뛰어나서 승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상단 오른쪽에 희미하게 프랑스군의 기구가 보이실 겁니다.  플레뤼스 전투는 기구를 군사정찰용으로 사용한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특히 그는 1799년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쿠데타에 대한 반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500인 위원회에 속한 의원들을 나폴레옹의 척탄병들이 두들겨 패며 생 끌뤼(Saint Cloud) 궁에서 쫓아낸 바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주르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명성이 자자한 군인인데다 정치인이기도 했으므로, 대승적 차원에서 나폴레옹은 그를 1804년 황제 즉위와 동시에 주르당을 원수로 임명했던 것이지요.


그런 그를 나폴레옹이 중용할 리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를 이미 평정하여 별 문제가 없던 이탈리아 왕국에 군사 고문으로, 즉 한직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남쪽인 나폴리 왕국의 국왕으로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가 즉위하면서 주르당이 그 군사 고문으로 함께 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제프의 옆을 주르당이 지켰습니다.  모든 권력은 권력자의 곁에 착 달라 붙은 사람들이 쥐게 됩니다.  주르당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특히 조제프는 주르당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습니다.  조제프는 자신에게 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명성과 능력을 갖춘 진짜 인물이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당시 쟁쟁한 실력자들은 다들 나폴레옹 밑에 있기를 원했지, 바보 형 노릇을 하던 조제프의 밑으로 오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르당은 달랐지요.  그렇게 나폴레옹에게 등한시되던 두 인물 조제프와 주르당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왕국을 지배한답시고 나름 으시댈 수 있었습니다.


지방 농민들의 반란 외에는 별 문제가 없던 나폴리 왕국에서는 사실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제프가 스페인 국왕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주르당은 이번에도 조제프의 옆에 착 달라붙어 스페인까지 따라 왔는데, 스페인은 온나라가 반란에 휩싸인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주르당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겠다며 오히려 좋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에서 작전 중이던 7개의 프랑스 군단들과 그 군단장들은 명목상으로는 모두 주르당의 조언을 받는 조제프의 지휘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명목상의 이야기였습니다.  호랑이같은 군단장들은 모두 나폴레옹을 두려워하고 나폴레옹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할 뿐, 그의 바보 형 조제프는 그야먈로 바보 형 취급을 했습니다.  심지어 술트 같은 경우 아예 자신이 포르투갈 왕이 되려는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으니까요.  주르당에 대해서도 '주르당이 언제적 주르당이냐'라는 식의 무시로 일관했습니다.  당연히 조제프와 주르당은 나폴레옹의 부하들에게 분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탈라베라까지 조제프와 주르당이 직접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총동원하여 마드리드를 텅 비워둔 채 달려나온 것도 이번에야 말로 위아래 질서를 세우고 스페인 국왕의 위엄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마 있었을 것입니다.  




(빅토르 원수입니다.  그도 16살에 사병으로 입대한 주르당처럼 18살에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10년 복무 기간을 다 채우고 만기 제대하여 평범한 서민 생활을 했습니다.  역시 프랑스 대혁명 때 자원병으로 재입대하여 장교가 되었지요.  1793년 나폴레옹의 출세 계기가 된 툴롱 포위전이 승리로 끝난 뒤, 나폴레옹과 함께 장군 계급으로 승진한 사람 중에 빅토르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렝고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나폴레옹의 눈에 들게 됩니다.)   




실제로 탈라베라에 빅토르의 제1 군단과 세바스티아니의 제2 군단, 거기에 예비 기병대와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집결하자, 아무래도 3개 세력 간에 지휘 체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군사작전에서 부대마다 명령 체계가 제각각이면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될 테니까요.  나폴레옹의 부하들이 제아무리 잘 났고 전장에서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렇게 같은 천막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니 의전상 바보 형 조제프의 머리 위에 얹힌 왕관의 무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는 조제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왕 대접을 해야 했고, 자연스럽게 전체 작전의 지휘권은 조제프의 뒤에 선 주르당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외교관 생활을 오래 하여 의전에 익숙했던 세바스티아니는 몰라도 전형적인 무골이었던 빅토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갈등이 그렇쟎아도 수적으로 불리한 프랑스군의 위치를 더욱 거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갈등으로 점철된 프랑스군에 비해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혈맹답게 분위기가 좋았을까요 ?  천만에 콩떡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지요.





Source :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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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8.03.04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보 형'이란 표현이 참 재미있어서 웃고 갑니다.^_^
    언제나 수고가 많으세요!

  2. Nocchi 2018.03.04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네요
    어느 조직이든 내부 알력(?) 을 얼마나 잘 정리하느냐가 외부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3. 석총 2018.03.04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페인의 갑질에 질려버리죠

  4. 인간늑대 2018.03.06 0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 항상 감사합지다.

  5. 샤르빌 2018.03.06 0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기 마드리드 수비대는 프랑스군인가요 스페인군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