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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3.17 반보붕권 타편천하 - 탈라베라 전투 (제4편) (11)
  2. 2018.03.04 왕과 원수들 - 탈라베라 전투 (2편) (6)

프랑스군 1개 연대 약 1600명이 메데진 언덕으로 달려들 때 이 언덕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KGL 여단의 규모는 고작 1200명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야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자다 일어난 판국이라 KGL 여단은 강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세를 올린 프랑스군이 메데진 언덕의 정상 능선을 점령하고 기쁨의 함성을 올리고나자, 영국군의 진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능선 바로 너머 후사면에 영국군 2개 여단 약 3800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다가 반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2개 여단도 야습은 예상하지 못하고 능선에서 멀찍이 떨어진 뒤쪽 경사면에서 야영을 하다, 능선 너머에서 벌어진 총격전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영국군이 언덕 능선 뒤에 숨어있다가 들이칠 줄은 몰랐던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다시 언덕을 탈환하는데는 충분했습니다.




(7월 27일 밤, 프랑스군의 첫번째 공격 상황도입니다.)



이렇게 언덕 후사면에 병력을 감추어 뒀다 언덕을 힘들게 올라온 적군을 능선 정상에서 반격하는 수비 전법이 바로 웰슬리의 주특기였습니다.  알고 보면 주특기라기보다는, 이것이 웰슬리가 제대로 갈고 닦은 유일한 필살기였습니다.  웰슬리는 어디서 이런 못된 전술을 배워왔는지, 바로 1년 전 비메이루(Vimeiro) 전투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쥐노(Junot)의 프랑스군을 격파한 적이 있었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부사쿠(Bussaco) 전투 등 이후 전투에서도 똑같은 전법으로 프랑스군을 상대했고, 종국엔 워털루 전투에서 이 전술로 나폴레옹 본인까지도 격파하는 위엄을 보여주었습니다.  웰슬리는 나중에 '전투란 능선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예측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항공 정찰이 없던 시절에는 낮은 능선이라고 할지라도 그 뒤에서 어느 정도의 예비 병력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방법이 없었으므로 능선이라는 지형은 방어전에 매우 유용했습니다.  다만 이 전술은 어디까지나 수비용이었을 뿐, 결코 공격용은 아니었습니다.  웰슬리는 어떻게 그런 반쪽짜리 전술 하나만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




(제가 군대있을 때 아마 저 '권법소년'이라는 만화를 보고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아 저도 형의권의 대가가 되겠다고 형의권 교본까지 교보문고에서 샀었습니다.  아... 그 책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  책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네요.)




청나라 말기 형의권의 대가로 유명했던 곽운심이라는 권법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형의권을 배우기 시작할 때 배움이 느리고 서툴러, 형의권의 기본기 중 반걸음 내딛으며 주먹을 지르는 기본기 중 기본기인 붕권만 3년 동안 연마했답니다.  그런데 워낙 철저하게 수련하다보니, 이 단순한 붕권 하나만으로 모든 상대를 꺾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반보붕권 타편천하(半步崩拳 打遍天下)라고 하지요.  웰슬리가 즐겨 썼던 이 전술을 영어로 reverse slope defense 즉 후사면 방어라고 하는데, 이는 무척 단순하고 뻔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이 단순한 전술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이 전법에 꼭 맞는 언덕을 찾아 느림보 영국군을 끌고 수없이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고, 이 전법을 쓸 수 없는 곳에서는 굴욕과 비난을 감내하고 후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에겐 이런 전술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영국군 특유의 풍부한 보급망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을 포함한 프랑스군의 기라성같은 장군들은 웰슬리의 이 얄미운 전술에 대한 효과적인 파해법을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탈라베라 전투에서 이 전술에 당한 빅토르 원수도 결국 1812년 베레지나(Beresina)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동일한 수법을 써서 효과를 봤다고 하니, 그야말로 반보붕권 타편천하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날밤의 큰 전투는 이렇게 프랑스군의 패퇴로 마무리되었지만, 호되게 놀란 영국군은 프랑스군이 어둠을 타고 또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또 그들이 비웃었던 스페인군처럼, 영국군 초병들도 겁에 질려 어둠 속에서 헛것을 보고 허위 경보를 울려 여러 차례 비상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한편, 프랑스군 측도 긴장이 팽팽했습니다.  빅토르가 우려하던 일, 즉 아직 영국군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조제프 국왕과 주르당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 본대가 도착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한밤중에 세바스티아니까지 참석한 프랑스군 수뇌부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주르당은 빅토르에게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쓰레기같은 전술을 제안했습니다.  그냥 제자리를 지키고 수비를 하며 시간을 때우자는 것이었습니다 !  세상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수비를 하다니 !  그것도 이런 야전에서, 병력 수도 비슷한 상황에서 수비라니 !  나폴레옹이 현장에 있었다면 기가 막혀 얼굴이 하얗게 질릴 만한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르당의 설명은 나름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술트의 제2 군단이 북쪽에서 탈라베라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웰슬리의 연합군과 대치한 상태로 며칠 더 버티면, 술트까지 가세하여 손쉽게 웰슬리를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전에 상황을 파악한 웰슬리가 꽁무니를 내빼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격퇴한 셈이 되니까요.  그러나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은 빅토르였습니다.  그는 전투의 목표는 적 병력의 궤멸이며, 적을 물러나게 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며 조제프 국왕이 금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군단 전체를 동원하여 영국군을 새벽에 들이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패기 앞에서 조제프는 물론이고 주르당까지도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빅토르는 새벽 무렵 두번째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빅토르의 두번째 공격도 전면적 총공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메데진 언덕만 탈취하면 영국군을 격파할 수 있다는 생각에 휘하 3개 사단 중 루팽(Ruffin)의 1개 사단 약 5천명만 동원했고, 이들을 긴 영국군 방어선 중 일부에 집중시켜 구멍을 뚫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루팽 사단의 3개 연대를 각각 긴 종대로 편성하여 3개의 송곳 형태로 다시 메데진 언덕에 돌격시켰습니다.  루팽 사단에 딸린 8문의 대포로 편성된 포병대가 사전 지원 사격을 해줬는데, 별 도움은 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에게 노출된 메데진 언덕 동쪽 사면에는 영국군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이번에도 이들은 언덕의 능선 바로 코 앞까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했습니다.  



(7월 28일 새벽의 프랑스군 제2차 전투 상황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능선 약 90m 앞까지 전진했을 때 발생했습니다.  프랑스군의 포격을 피해 능선 뒤에 숨어있던 힐(Hill) 장군 휘하 영국군 1개 사단 4천명이 긴 횡대로 일제히 튀어나와 위력적인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오르막길을 향해 헉헉거리며 올리가던 프랑스군의 3개 종대 앞 부분에 집중된 4천발의 머스켓볼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종대 앞부분에 있던 프랑스군은 대부분 쓰려졌고, 덕분에 진격이 순간적으로 멈춰버렸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은 다른 것은 몰라도 머스켓 연사 속도에서 유럽 최고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이들은 신속하게 머스켓 소총을 재장전하여 머뭇거리는 프랑스군 3개 종대의 앞부분과 옆부분에 다시 4천발의 일제 사격을 퍼부었고 프랑스군 측에서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이에 비해 프랑스군은 돌격을 위한 좁고 긴 종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므로 대응 사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국군의 thin red line과 프랑스군의 thick blue column의 충돌은 스페인 전역 내내 반복되던 일입니다.)




이때 루팽 장군은 사격보다는 과감한 총검 돌격을 명해야 했고,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여태까지 상대했던 스페인군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긴 영국군 방어선 중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힐 장군의 오른쪽을 담당하고 있던 셔브룩(Sherbrooke) 장군의 영국군 사단이 가만히 있지 않고 튀어나와 프랑스군의 왼쪽 측면에 다시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입니다.  이렇게 전면과 좌측 2개 방면에서 공격을 받자, 프랑스군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전면의 영국군도 후퇴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돌격을 했고, 프랑스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했습니다.  현명하게도, 영국군은 언덕 아래 평원까지 그들을 추격하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측의 피해는 1300명, 영국군은 750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럽지 못한 전투 결과를 받아든 빅토르는 다소 풀이 죽은 상태로 다시 조제프 및 주르당, 세바스티아니와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은 거보라는 듯이 다시 술트를 기다리며 방어전을 펼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비해 빅토르는 조제프가 영국군과 스페인군 연결부, 즉 연합군 방어선의 중앙부를 공격해준다면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이 다시 메데진 언덕을 탈취해내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렇게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2가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둘다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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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음충 2018.03.17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빠 근데 4편 아닌가여

  2. 산골 김저자 2018.03.17 1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역사를 좋아하면서 Nasica님 펜입니다.
    무심코 반갑게 Nisica님 글을 읽으려다 익숙한 단어들이 나와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
    저는 한국형의권연구회란 곳에서 1년 6개월간 실제로 형의권을 배우고 있거든요.
    막상 배워보니 허무맹랑한 기의 운용이 아닌 과학적인 원리?로 힘을
    내는 방법(내경)을 배우는등 재밌게 배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홍보 같은데 홍보는 아니고요 ㅎㅎ
    제가 좋아하는 블로거 글에 보통 사람들 잘 모르는 형의권 얘기가 나와 깜짝 놀라고
    반가 웠습니다.
    붕권은 힘이 직선으로 뻗어서 강력하지만 실제 동작은 철권의 붕권처럼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멋?이 있습니다. 형의권 동작들이 대체로 간결하고 소박?한 멋이 있는 것 같습니다. ^..^

  3. 최홍락 2018.03.17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곡사포 몇문만 있었어도ᆢᆢ

  4. ㅇㅇ 2018.03.17 2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날 똑같은 전술에 당한다면 열기구 같은걸 써볼생각은 안했을까요?

  5. 계속 2018.03.17 2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는 적을 맞이하는 방어적인 전술에 당했다는 것은 프랑스군은 회피나 우회없이 항상 싸우러 가야하고 영국군은 전장을 골라도 될 정도로 여유로웠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웰슬리가 이겼다기보다는 그런 환경을 만든 영국이라는 국가가 이겼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6. JPM 2018.03.19 0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구석에 앉아서 읽는 입장이니 할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언덕을 기병이 함께 뛰어 올랐다면 달랐을까요? 뭐, 영국군은 보고 놀고만 있겠냐만 말이죠.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여담입니다만, 전쟁만큼 비싼 외교(?)도 없는거 같습니다. 저 영국군의 속사력과, 바다를 쥐고 흔드는 로열네이비 다 결국 £££ 아니겠습니까 ㅠ 그 돈 많은 영국도 크로노미터 살 능력이 있는 함장을 좋아했구요. 결국 저때나 지금이나 다 돈이네요. 가정을 위해 한주 고생하시는 가장여러분 = 호색한 라살의 경기병대... 인걸까요. ㅎㅎ 한주 화이팅하시고 더 재밌는 포스팅 부탁드립니당.

  7. 석총 2018.03.21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국군의 표준전술 능선에 숨기

1809년 7월 27일, 탈라베라에 모인 프랑스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제1 군단장 빅토르 원수, 제4 군단장 세바스티아니 장군, 그리고 조제프 국왕을 보좌하는 주르당 원수의 3명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총사령관은 조제프 국왕 본인이었습니다만, 아무도 그에게서 전략이나 지휘를 기대하지는 않았지요.  세 명의 장군들 중에서 가장 전투 경험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빅토르 원수였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원수가 아니었으므로 계급도 낮았지만, 사실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및 행정 관료라고 할 수 있었지요.  문제는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 원수였습니다.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주르당은 16살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전했고,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도 복무하는 등 험한 곳을 돌아다닌 뒤, 서인도제도에서 얻은 말라리아로 건강을 해친 채 귀국했습니다.  결국 건강 문제로 제대를 한 그는 고향인 리모쥬에서 잡화점을 하는 등 평범한 서민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제대한 지 5년 뒤 터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주르당은 당시 47세로서 장군으로서는 한창 나이였고, 빅토르보다는 2년 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국민개병제를 법제화하여 프랑스군을 유럽 최강으로 만들어준 징집제의 창시자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징집제는 흔히 주르당 법(Loi Jourdan de 1798)으로 불릴 정도로 그의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나폴레옹의 대관식 때 원수로 임명된 원년 원수 그룹 멤버가 되었지요.  그에 비해 빅토르는 3년 뒤인 1807년 당시 제1 군단장이던 베르나도트의 부상으로 인해 임시 군단장이 되었다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맹활약을 한 덕분에 간신히 원수가 되었지요.


하지만 선임자가 꼭 능력치가 더 높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르당이나 빅토르나 모두 대혁명 이전에 사병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한 뒤, 대혁명 발발 뒤에 자원병으로 다시 입대하여 장교로 선발된 뒤 승승장구하여 장군 계급까지 승진한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주르당은 알고 보면 명성에 비해 그다지 뛰어난 전과는 별로 없는 군인이었습니다.  가령 1796년 모로가 중앙을, 나폴레옹이 우익인 이탈리아 방면을 맡을 때 주르당은 좌익을 맡아 바이에른 방면을 공략했는데, 당시 나폴레옹만 성공했을 뿐 독일 지역에서의 공세는 카알 대공에게 분쇄되었습니다.  그때 모로까지 후퇴하게 된 원인이 바로 주르당이었습니다.  암베르크(Amberg) 전투에서 주르당이 카알 대공에게 철저히 패배했기 때문에 모로의 측면이 노출되어 부득이하게 모로도 후퇴했던 것이지요.  그때 패배의 책임을 지고 주르당은 군문에서 물러나 정치에 입문했는데, 그때 만든 것이 1798년의 주르당 법이었습니다.  1799년 그는 다시 군에 기용되어 다시 라인 방면군을 맡았지만, 이번에도 다시 카알 대공에게 패배하며 체면을 구긴 바 있었습니다.  그때도 책임을 지고 지휘권을 부하에게 넘기고는 물러났는데, 그 부하가 바로 나폴레옹 군문에서 2인자라 할 수 있는 마세나였습니다.  마세나는 주르당이 이끌던 바로 그 군대를 넘겨 받아 눈부신 활약을 펼쳐 주르당을 더욱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패전을 거듭했던 주르당이 명성을 떨쳤던 것은 프랑스군이 연전연패하던 혁명 초기 혼란 속에서 그래도 소중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의 1794년 네덜란드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른 플레뤼스 Fleurus 전투가 그의 대표적인 승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그의 지휘가 뛰어나서 승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상단 오른쪽에 희미하게 프랑스군의 기구가 보이실 겁니다.  플레뤼스 전투는 기구를 군사정찰용으로 사용한 최초의 전투였습니다.)




특히 그는 1799년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쿠데타에 대한 반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500인 위원회에 속한 의원들을 나폴레옹의 척탄병들이 두들겨 패며 생 끌뤼(Saint Cloud) 궁에서 쫓아낸 바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주르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명성이 자자한 군인인데다 정치인이기도 했으므로, 대승적 차원에서 나폴레옹은 그를 1804년 황제 즉위와 동시에 주르당을 원수로 임명했던 것이지요.


그런 그를 나폴레옹이 중용할 리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를 이미 평정하여 별 문제가 없던 이탈리아 왕국에 군사 고문으로, 즉 한직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남쪽인 나폴리 왕국의 국왕으로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가 즉위하면서 주르당이 그 군사 고문으로 함께 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제프의 옆을 주르당이 지켰습니다.  모든 권력은 권력자의 곁에 착 달라 붙은 사람들이 쥐게 됩니다.  주르당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특히 조제프는 주르당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습니다.  조제프는 자신에게 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명성과 능력을 갖춘 진짜 인물이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당시 쟁쟁한 실력자들은 다들 나폴레옹 밑에 있기를 원했지, 바보 형 노릇을 하던 조제프의 밑으로 오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르당은 달랐지요.  그렇게 나폴레옹에게 등한시되던 두 인물 조제프와 주르당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왕국을 지배한답시고 나름 으시댈 수 있었습니다.


지방 농민들의 반란 외에는 별 문제가 없던 나폴리 왕국에서는 사실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제프가 스페인 국왕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주르당은 이번에도 조제프의 옆에 착 달라붙어 스페인까지 따라 왔는데, 스페인은 온나라가 반란에 휩싸인 험악한 분위기였습니다.  주르당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겠다며 오히려 좋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에서 작전 중이던 7개의 프랑스 군단들과 그 군단장들은 명목상으로는 모두 주르당의 조언을 받는 조제프의 지휘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명목상의 이야기였습니다.  호랑이같은 군단장들은 모두 나폴레옹을 두려워하고 나폴레옹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할 뿐, 그의 바보 형 조제프는 그야먈로 바보 형 취급을 했습니다.  심지어 술트 같은 경우 아예 자신이 포르투갈 왕이 되려는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으니까요.  주르당에 대해서도 '주르당이 언제적 주르당이냐'라는 식의 무시로 일관했습니다.  당연히 조제프와 주르당은 나폴레옹의 부하들에게 분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탈라베라까지 조제프와 주르당이 직접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총동원하여 마드리드를 텅 비워둔 채 달려나온 것도 이번에야 말로 위아래 질서를 세우고 스페인 국왕의 위엄을 보여주려는 것도 아마 있었을 것입니다.  




(빅토르 원수입니다.  그도 16살에 사병으로 입대한 주르당처럼 18살에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10년 복무 기간을 다 채우고 만기 제대하여 평범한 서민 생활을 했습니다.  역시 프랑스 대혁명 때 자원병으로 재입대하여 장교가 되었지요.  1793년 나폴레옹의 출세 계기가 된 툴롱 포위전이 승리로 끝난 뒤, 나폴레옹과 함께 장군 계급으로 승진한 사람 중에 빅토르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렝고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나폴레옹의 눈에 들게 됩니다.)   




실제로 탈라베라에 빅토르의 제1 군단과 세바스티아니의 제2 군단, 거기에 예비 기병대와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집결하자, 아무래도 3개 세력 간에 지휘 체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군사작전에서 부대마다 명령 체계가 제각각이면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될 테니까요.  나폴레옹의 부하들이 제아무리 잘 났고 전장에서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렇게 같은 천막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니 의전상 바보 형 조제프의 머리 위에 얹힌 왕관의 무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는 조제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왕 대접을 해야 했고, 자연스럽게 전체 작전의 지휘권은 조제프의 뒤에 선 주르당에게 돌아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외교관 생활을 오래 하여 의전에 익숙했던 세바스티아니는 몰라도 전형적인 무골이었던 빅토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갈등이 그렇쟎아도 수적으로 불리한 프랑스군의 위치를 더욱 거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갈등으로 점철된 프랑스군에 비해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혈맹답게 분위기가 좋았을까요 ?  천만에 콩떡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지요.





Source :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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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8.03.04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보 형'이란 표현이 참 재미있어서 웃고 갑니다.^_^
    언제나 수고가 많으세요!

  2. Nocchi 2018.03.04 0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네요
    어느 조직이든 내부 알력(?) 을 얼마나 잘 정리하느냐가 외부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3. 석총 2018.03.04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페인의 갑질에 질려버리죠

  4. 인간늑대 2018.03.06 0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 항상 감사합지다.

  5. 샤르빌 2018.03.06 0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기 마드리드 수비대는 프랑스군인가요 스페인군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