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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슬리8

19세기초 영국군과 인도군은 어떻게 싸웠나 - Sharpe's Triumph Bernard Cornwell이 지은 Sharpe 시리즈는 1799년 영국군이 인도 중부 마이소르(Mysor) 지방을 침공하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그로부터 3년 정도의 안정기를 지나, 마이소르 지방의 수도인 셰링가파탐이 영국군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인도 군주 하에서 안정화되자, 영국은 다시 더 북부의 마라타 연합이 지배하는 지역을 노립니다. 이런 식으로 영국이 인도 전체를 식민지화하는데는 무려 1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로버트 클라이브가 7년 전쟁 도중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인도에서 영국의 주도권을 확보한 것이 1757년이었으니까, 정말 오랜 세월에 걸쳐 야금야금 먹어들간 셈이지요. 인도 대륙이 정말 크긴 큰가 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인 무렵, 영국은 아직도 인도 .. 2019. 1. 17.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다 - 탈라베라 전투 (제6편) 프랑스군 2개 사단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것은 전선 중앙부에서처럼 영국군 자신들의 경험 부족과 무지였습니다. 페인(Fane)과 앤슨(Anson)의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군을 위협하여 방진을 이루게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협박만 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렇게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을 메데진 언덕 위의 영국군 포병대가 계속 갉아먹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총검을 촘촘히 내밀고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영국군 기병대는 겁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돌격은 기병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영국군은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 기병대를 격파한 것은 프랑스군의 총검이 아니었습니다... 2018. 4. 1.
혈전 - 탈라베라 전투 (제5편) 조제프와 함께 작전 회의 중이던 프랑스 장군들에게 전해진 소식 중 하나는 주르당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술트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술트가 보내온 장계의 내용은 그의 남쪽으로의 행군 현황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진척이 주르당의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소식은 조제프와 주르당이 떠나온 마드리드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술트의 소식보다 더 나빴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의 제4 군단과 대치하던 베네가스 장군의 스페인 라 만차(La Mancha) 군이 마드리드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원래 베네가스의 임무는 세바스티아니가 탈라베라에서 빅토르와 합류하지 못하도록 세바스티아니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임무에 보기 좋게 실패한 베네가스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 2018. 3. 25.
반보붕권 타편천하 - 탈라베라 전투 (제4편) 프랑스군 1개 연대 약 1600명이 메데진 언덕으로 달려들 때 이 언덕을 지키고 있던 영국군 KGL 여단의 규모는 고작 1200명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야습을 예상하지 못하고 자다 일어난 판국이라 KGL 여단은 강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세를 올린 프랑스군이 메데진 언덕의 정상 능선을 점령하고 기쁨의 함성을 올리고나자, 영국군의 진짜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능선 바로 너머 후사면에 영국군 2개 여단 약 3800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다가 반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2개 여단도 야습은 예상하지 못하고 능선에서 멀찍이 떨어진 뒤쪽 경사면에서 야영을 하다, 능선 너머에서 벌어진 총격전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영국.. 2018. 3. 17.
양측의 사정 - 탈라베라 전투 (3편)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술트를 몰아내고 기세를 탄 웰슬리의 영국군과는 달리, 쿠에스타의 스페인군, 좀 더 정확하게는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군은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인데다 무척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쿠에스타의 군대는 그해 3월 28일에 있었던 메데진(Medellin) 전투에서 빅토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제1 군단과 격돌하여 총 2만2천 중에 약 7천5백의 사상자와 함께 2천에 가까운 포로를 내는 등 사실상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쿠에스타가 거느린 3만6천은 그 이후 새로 끌어모은, 애국심만 있는 신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쿠에스타의 스페인군은 빅토르의 뒤를 추격하다가 그가 세바스티아니와 합류하자 황급히 웰슬리가 자리를 잡고 있던 탈라베라로 허둥지둥 후퇴해온 상태.. 2018. 3. 10.
계곡의 연합군 - 탈라베라(Talavera) 전투 (1편)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 2018. 2. 25.
이발사 vs. 원수 - 포르투(Porto) 전투 3편 웰슬리의 영국군이 도우루 강 남안에서 강을 건널 방법을 못 찾고 당황하는 동안, 술트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5월 10일 도우루 강 남쪽에 있는 그리조(Grijó)라는 작은 마을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트는 비교적 여유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요 ? 그는 나름대로 안전조치를 취해놓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가 위치한 도우루 강 하구는 꽤 넓고 깊어서 사람이나 말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술트는 도우루 강 인근의 모든 바지선과 보트, 조각배들을 모조리 압류하여 북쪽 강변에 끌어다 놓은 상태였습니다. 영국군에게 날개 혹은 지느러미가 없는 이상, 도우루 강을 건너 올 수는 없다고.. 2018. 2. 4.
니콜라 1세의 헛된 꿈 - 포르투(Porto) 전투 1편 1809년 초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무어 경이 이끌던 영국 원정군을 대서양으로 쫓아낸 것으로 정리가 끝났다고 생각한 유럽의 서쪽 끝 포르투갈에서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장소는 포르투갈 북쪽의 항구 도시 포르투(Porto, 영어로는 Oporto)였습니다. 당시 영국 신사들의 정찬(dinner)에서 빠질 수 없는 마지막 코스였던 포트 와인(port wine)의 이름이 바로 이 도시 이름에서 나온 것일 정도로, 포르투는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이자 대영국 와인 수출 창구로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포르투갈 침공을 노리던 술트의 프랑스 군단의 제1차 목표가 바로 이 도시였습니다. (포르투 항구는 큰 강인 도우루 Douro 강 하구에 위치합니다. 전통적으로 도우루.. 2018.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