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서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제가 요즘 다사다난하여 책을 못 읽고 있습니다.  최소 몇 주 간은 C. S. Forester의 Lieutenant Hornblower 중에서 제가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을 발췌 번역해서 올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최고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이 책은 국내 연경사에서 '혼블로워. 2: 스페인요새를 함락하라'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제 발췌 번역본은 여러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준에서 중단될텐데, 재미있다고 생각되시면 영문판이든 한글판이든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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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eutenant Hornblower by C.S. Forester (배경 : 1801년 카리브 해 HMS Renown 선상) --------------


(부시와 혼블로워가 각각 제3, 제5 부관으로 탑승한 영국 해군의 74문짜리 전함 리나운 호(HMS Renown)는 산토 도밍고 섬의 스페인 해군 요새를 파괴하고 그 곳의 스페인 선박들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카리브해에 도착합니다.  항해 도중에 함장이 미쳐버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함장은 함장실에 연금되고 제1 부관인 버클랜드가 임시 함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지 뛰어난 지휘관이 아닌 버클랜드는 별다른 계획없이 그냥 스페인 요새의 항구로 밀고 들어가 일제 포격을 하려 합니다.)


저녁 당직(dogwatches : 원래 4시간 단위의 교대근무 시간을 4pm~8pm 사이에는 2시간짜리 2개로 쪼개는데 이걸 dogwatch라고 불렀습니다 : 역주) 시간 동안 혼블로워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듯이 머리를 숙인 채 혼자서 갑판을 왔다갔다 걸었다.  등 뒤로 맞잡은 혼블로워의 두 손이 초조하게 꿈틀거리고 배배 꼬이는 것이 부시의 눈에 들어왔다.  부시는 잠깐 의심이 들었다.  이 열정적인 젊은 장교에게 혹시 신체적 용기가 없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  그 표현은 부시의 창작품은 아니었다.  그는 그 표현이 몇 년 전 어디서인가 악담으로 사용되는 것을 들었었다.  혼블로워가 겁장이일 수도 있다고 대놓고 스스로 짐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표현을 지금 쓰는 것이 더 나았다.  부시는 그다지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겁장이라면 그는 그 인간과는 뭐든 더 같이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절반 정도 흘렀을 때 갑판을 따라 호각들이 길게 울렸다.  해병들의 북이 두두두 소리를 냈다.


"전투 준비를 위해 갑판을 치운다 !  각자 위치로 !  전투 준비 !"  ("Clear the decks for action! Hands to quarters! Clear for action!"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갑판 아래의 선실을 이루는 격벽이나 식탁 등의 가구, 짐짝 등을 모두 치워 선창에 보관합니다.  그래서 전투 준비에 clear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 역주)


부시는 전투시 자신의 위치인 하(下) 포갑판(lower gundeck)으로 내려갔다.  하 포갑판 전체와 우현의 24파운드 포 17문이 그의 지휘 책임 하에 있었고, 좌현의 포들은 그의 밑에 있는 혼블로워가 맡게 되어 있었다.  수병들은 이미 칸막이를 해체하고 방해물들을 치우고 있었다.  갑판을 따라 군의관 조수들 한 무리가 내려왔는데, 그들은 구속복(straight jacket)을 입인 채 널빤지에 묶어놓은 사람 하나를 떠매고 왔다.  구속복과 결박 끈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힘없이 꿈틀거리며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전투 준비 때문에 함장실을 치우면서 함장을 닻줄 선창(cable tier, 닻줄을 말아두는 맨 바닥 갑판, 대포알이 흘수선 아래를 뚫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선창은 상대적으로 매우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 역주)으로 내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런 북적거림 속에서도 한두 명의 수병들은 그런 함장의 몰골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부시는 재빨리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는 하 포갑판이 전투 준비 완료가 되었다는 보고를 칭찬받을 만한 시간 안에 올리고 싶었다.  혼블로워도 나타나서 부시에게 경례를 하고는 그의 함포들을 감독하며 서있었다.  이 하갑판의 대부분 구역은 석양 무렵의 어둠에 덮혀 있었다.  상갑판으로 통하는 햇치 통로들(hatchways)로 들어오는 굵은 햇빛 줄기들은 진한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진 갑판의 저 구석까지는 거의 밝혀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군함의 보이들 6명이 모래를 담은 버켓을 들고 와서 갑판 여기저기에 한주먹씩 뿌렸다.  (매끄러운 갑판 위에서 피와 물기로 인해 미끄러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 역주)  부시는 그들의 작업을 날카로운 눈으로 감독했다.  포수들이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그 모래가 꼭 잘 뿌려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각 함포 옆마다 물을 가득 채운 버켓을 놓아두었는데, 이건 포구를 청소하는 장전봉의 헝겊뭉치를 적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혹시 화재가 발생할 경우 즉각 진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주돛대의 주변에는 여분의 소화용 물통이 둥글게 놓여 있었다.  군함의 양현에 있는 통에는 화승(slow match)이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어서, 만에 하나 어느 함포의 화승간(火繩桿, linstock, 끝에 화승이 달린 막대기 : 역주)의 불이 꺼질 경우 그 함포 조장이 여기서 다시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불과 물이 준비된 셈이었다.  낮은 천정 들보에 닿을 듯 높은 군모(shako)를 쓰고 선홍색 자켓과 하얀 십자밴드를 맨 해병들이 보초 임무를 위해 갑판 위를 쿵쿵거리며 뛰어왔다.  그린우드 상병은 각 햇치 통로에 장전하고 착검까지 한 보초를 한 명씩 세웠다.  그들의 임무는 겁을 먹고 안전한 흘수선 아래 구역으로 도망치려는 사람이 없도록 인가되지 않은 어떤 사람도 햇치 통로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임시 포술장인 미스터 홉스는 조수들과 함께 잠깐 나타났다가 곧 저 아래의 화약고(magazine)로 사라졌다.  그들은 모두 가장자리 천으로 만든 슬리퍼(list slippers)를 신고 있었는데, 이는 전투가 한창일 때 어쩔 수 없이 바닥에 흩뿌려질 약간의 화약가루가 폭발할 위험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Linstock의 모습입니다.  그냥 화승막대기입니다.  이걸 대포의 점화구 즉 touchhole에 대면 대포가 발사되는 것이지요.)




* PS1 : Dogwatch라는 독특한 2시간 짜리 교대 순번을 만든 이유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2교대로 돌아가는 군함의 교대 근무에서, 이렇게 2시간 짜리 순번이 없을 경우 어느 한쪽 교대조가 계속 특정 시간대(가령 0시~4시)에 근무를 서야 하는 불공평함을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4시간 중에 모든 수병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쉴 시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 PS2 : 저 list slipper라는 단어는 19세기 문학 작품 여기저기에 나오는, 영어권 사람들로서도 약간 신기한 단어인 모양이더라구요.  List라는 것은 천의 가장자리를 뜻하는 것인데, 천의 가장자리는 실이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금 견고하게 처리가 되어 있지요.  그런 두꺼운 천으로 만든 슬리퍼를 list slipper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딱딱한 밑창을 가진 구두를 신었다가 구두 바닥과 갑판 사이에 낀 화약가루가 마찰열로 폭발할 것을 염려하는 것 같습니다.  List slipper라는 단어에 대한 토론은 아래 link를 참조하세요.


http://www.worldwidewords.org/qa/qa-lis1.htm



시간에 종속된 존재인 주제에, 인간은 항상 미래를 예측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도, 과거를 돌이켜 봄으로써 미래의 일을 조금이라도 예측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만 있다면, 당장 해볼 수 있는 것이 여러가지 있겠지요.  로또를 사도 되고, 선물시장에서 큰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고, 교통사고나 범죄를 미리 막아 소중한 생명들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당장 하고 싶은 것을 생각나는 대로 몇개 늘어놓고 보니 돈과 생명에 관계된 것들이네요.


미래를 예측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제로 많이 있었고, 또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노력이었고, 또 재산과 인명에 직접 영향이 있고, 지금도 국가적으로 많은 돈과 인력을 퍼붓지만 그다지 신통치 못한 예측을 내는 예언이 있습니다.  바로 일기 예보입니다.




(뉴질랜드 출신의 Bic Runga라는 가수가 직접 지은 'Listening for the weather'라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So I'm listening for the weather to predict the coming day

Leave all thought of expectation to the weather man

No it doesn't really matter what it is he has to say

'Cause tomorrows keep on blowing in from somewhere


정말 아름다운 가사 아닌가요 ?  멜로디도 좋고, 무엇보다 저 말레이-중국-마오리 혼혈 가수의 목소리가 정말 매혹적입니다.


전체곡 감상은 https://youtu.be/xEM7v-dh1gE 에서 하세요.)




중국이나 이집트나 고대의 달력 제작자들은 천문을 보고 계절의 변화 패턴을 꽤 정확히 측정해서 달력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따른 천체의 운동은 사실 범우주적인 질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계절 변화는 고대에도 상당히 정확한 측정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측정하려는 주된 목적은 농업 생산의 극대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경우 계절의 변화가 나일강의 범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으니까 더욱 중요했겠지요.   




(천문학에는 동서양과 종교에 상관없이 모두들 열심히였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비해 날씨의 변화는 농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못했고 (내일 폭풍이 분다고 해서 농사 짓던 거 뽑아서 옮길 수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정확한 예측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고고한 별들의 움직임이 아니라, 불안정한 대기 현상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징후를 보고 맞춰야 했으니까요.  따라서 달력 만드는 분들은 고대부터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날씨는 주로 나이든 목동들이나 어부들, 혹은 신경통이 있는 노인들이 경험으로 맞춰야 했습니다.


일기예보가 농부들에게는 그저그런 중요성만을 지녔다면, 어부나 선원들에게는 정말 생사를 판가름짓는 중요성을 지녔습니다.  바다에서, 더군다나 거친 바다에서 인간은 한낱 티끌에 불과하거든요.  정확한 일기예보가 가능하다면, 폭풍이 예상될 때 출어를 하지 않으면 되니까 많은 어부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이미 대양을 항해 중인 상선의 경우 폭풍이 예상되는 해역을 피해서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보기에는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자기가 직접 저 배위에 올라탔을 경우엔 그렇게 멋있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생사 및 많은 돈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일기예보를 위한 과학적인 노력은 컴퓨터나 인공위성 발명 전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나폴레옹 시절 당시 가장 그럴 듯한 방법은 다름 아닌 압력계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그림 다들 기억하시지요 ?)




우리가 중학교에서인가 초등학교에서인가 배웠던 것 중에 토리첼리의 수은 기압계가 있지요.  이 수은 기압계는 토리첼리가 17세기 중반에 기압 연구가 아니라 원래 '진공 상태'의 생성을 위해 고안한 것이었습니다.  그 실험 와중에, 토리첼리가 수은 기둥의 높이가 날마다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기압과 상관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기압계로 사용되게 된 것이지요.


기압과 날씨와의 상관 관계에 대해 누가 정립을 했는지는 명확치 않습니다만, 사람들은 고기압이면 날씨가 좋아지고, 저기압이면 날씨가 나빠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기예보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작은 기압계를 가지고 날씨를 비교적 과학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괴테입니다.  최근에 케이블 TV에서 젊은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된 배경을 그린 독일 영화를 봤는데 정말 재미있더군요.) 




이것을 널리 보급...이라기보다는, 독일 전역에 널리 알린 사람은 다름아닌 괴테였습니다.  괴테는 문필가, 화가, 과학자, 철학자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한 천재였습니다만, 1820년대 초에는 기압 연구에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래 그림과 같은 작고 예쁜 유리 기압계가 '괴테 기압계' 또는 '괴테 장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장치를 만든 것은 괴테가 아닌, 무명씨라고 하네요.) 




(와, 이쁜데요 ?)




이 기압계의 원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이렇게 색깔이 든 물을 집어 넣은 주전자 모양으로 생긴 유리병에서, 외부와 통하는 구멍은 좁은 주전자 부리 끝 뿐입니다.  주전자 몸체에 해당하는 큰 유리방의 위는 공기가 아니라 진공 상태입니다.  외부 기압이 높아지면 주전자 부리에 든 물이 압력을 받아 그 수위가 내려가고, 반대면 올라가지요.


이 기압계에는 보시다시피 눈금도 없고, 또 일정한 규격도 없기 때문에, 지금이 1기압 위인지 밑인지 알 방법은 없습니다.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날씨 예측에는 어느 순간의 기압 절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압이 높아지고 있는지 낮아지고 있는지, 그 변화량이 중요했거든요.  특히 그 변화 속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만약 주전자 부리 속의 수위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면, 기압이 신속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는 곧 비나 폭풍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영국 군함의 함장실에도 이런 형태의 기압계가 하나씩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군함의 함장이야말로 그런 날씨 변화에 가장 민감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요즘도 이런 액체를 이용한 가정용 기압계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토리첼리의 수은 기압계는 당연히 아니고요 (수은의 위험성 때문에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Amazon 같은 곳에서 weather glass를 검색하면 파는 곳이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괴테 기압계, 또는 weather glass라고 불리는 물건은 실내 장식용으로도 꽤 괜찮거든요.




(이것이 현재 아마존에서 팔고 있는 weather glass 입니다.  52.5 달러에 팔고 있군요.) 




하지만 이런 물이 든 유리 기압계는 건물 안이나 선박에서 사용하기엔 어떨런지 몰라도, 야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휴대하기엔 너무 불편했습니다.  가령 야전에서 작전 중인 장교나 양떼를 모는 양치기에게는 깨지기 쉽고 물이 새나가기 쉬운 이런 기압계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것이 초기의 아네로이드 기압계입니다.  Aneroid라는 단어는 정말 처음 듣는 단어군요.) 




그러다가 1843년, 루시앙 비디(Lucien Vidie )라는 프랑스 발명가가 내부가 진공 상태인 금속판의 변화와 스프링의 힘을 이용해서 기압을 눈금으로 나타내주는 장치, 즉 아네로이드 기압계(aneroid barometer)를 발명해냅니다.  이 아네로이드라는 말의 뜻은 '액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장치의 묘미는 그 눈금 바늘의 움직임을 일부러 뻑뻑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어느 순간의 절대 기압 수치보다는, 그 변화량이 날씨 변화에 중요했거든요.  그런데 매시간마다 이 기압계를 꺼내서 읽고 그 수치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압계 바늘의 움직임을 일부러 좀 뻑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늘이 당장은 움직이 않다가, 기압계를 꺼내들고 탁탁 한번 치면 비로소 바늘이 움직여서, 그 바늘이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쉽게 볼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집집마다 온도계는 혹시 있을지 몰라도, 기압계는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19세기 중후반만 해도, 이 아네로이드 기압계는 미니 기상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쥘 베른느 소설 카르파티아 성.  내용은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카르파티아 성 (Le Cahteau des Carpathes, 쥘 베른느 작, 배경 19세기 중반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지방)  ------------------


(트란실바니아의 어느 산골에서 양치기 노인과 유태인 행상이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거 말입니까 ?"  유태인은 두 손으로 온도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이건 날씨가 더운지 추운지 가르쳐주는 기계랍니다."


"흐음, 그거라면 나는 잘 알고 있지.  내가 홑옷만 입고도 땀을 흘리는지, 외투를 입어도 추운지를 보면 돼."


과학 문제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양치기에게는 물론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그럼 바늘이 달린 이 시계는 ?" 그는 아네로이드 기압계를 가리켰다.


"그건 시계가 아니라 내일 비가 올지 날씨가 갤지를 가르쳐주는 도구랍니다."


"정말 ?"


"그럼요."


"그래 ? 하지만 그 값이 1 크로이처 밖에 안 된다 해도 나는 필요없어." 프리크가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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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노인 프리크는 당연히 아네로이드 기압계가 필요없었습니다.  양치기로 잔뼈가 굵은 노인은 산등성이에 걸린 구름의 모습과 변화만 봐도 날씨를 짐작할 수 있을테니까요.  저 유태인 행상은 사람을 잘못 만난 거지요.


하지만 쥘 베른느(예, 80일간의 세계일주나 해저 2만리를 쓴 그 사람입니다)의 소설 속에서 나오듯이, 당시로서는 유럽의 시골 깡촌이었던 트란실바니아 촌구석까지 행상들이 시계, 온도계와 함께 기압계를 팔고 다닐 정도로, 당시로서는 꽤 인기 상품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일기예보와 관련해서는 주로 이탈리아인이나 독일인, 프랑스인들이 많은 공헌을 한 것 같습니다만, 실제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일기예보 비스무리한 것을 체계적으로 실시한 것은 영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영국 해군이었습니다.


프랜시스 보퍼트(Francis Beaufort) 경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그 선조는 원래 프랑스에서 위그노 탄압 때 아일랜드로 이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14살 때 동인도 회사의 상선에서 뱃일을 시작해서, 나폴레옹 전쟁 중에 영국 해군에 투신, 미드쉽맨을 거쳐 22살의 나이에 장교로 임관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영광의 6월 1일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고, 적 항구에 침투조를 이끌고 작은 보트를 타고 잠입해 들어가 적 군함을 탈취해 오다가 큰 부상을 입는 등, 실전 경험도 많았습니다.




(이 온화해 보이는 신사가 한때 나폴레옹의 프랑스 해군과 혈투를 벌였던 보퍼트 경입니다.)




하지만 이 양반은 기본적으로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이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학 기술에 정진했던 사람으로서, 해군 생활에서 가장 큰 업적은 남미 및 터키 등 여러 지역의 수로도/해도를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왕립 학회, 왕립 천문학회, 왕립 지리학회의 위원직을 맡아 여러 과학자들의 후견인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노년에는 제독의 지위에도 오르고, (당시 영국 해군에서는 함장직에 오른 사람은 결국 일찍 죽지만 않는다면 결국엔 무조건 제독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배쓰(Bath) 기사 작위도 받는 영예를 누립니다.


하지만 보퍼트 경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가장 큰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그 중 하나는 보퍼트 경이 바람의 세기를 표시하는 방법을 최초로 고안해서 널리 쓰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보퍼트 풍력 계급 (Beaufort Wind Force Scale)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거 중학교 때 배웠는데, 불행히도 학교 교과서에서는 보퍼트라는 이름까지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음표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바람의 방향과 그 세기를 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억들 나시는지 ?)




보퍼트 경의 이름을 역사에 남게 한 두번째 이유는 바로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라는 후배를 양성해낸 것입니다.  이 피츠로이라는 사람도 영국 해군 장교였고 (보퍼트와는 달리 태생이 귀족이었습니다) 바로 찰스 다윈을 태우고 갈라파고스 제도로의 항해를 했던 비글(HMS Beagle) 호의 함장이었습니다.  불행히도 피츠로이 함장은 자기가 초청해서 함께 항해한 과학자인 찰스 다윈이 그런 '신성모독적인' 이론을 발표한 것에 대해 크게 침통해했다고 합니다.




(이 따분하게 생긴 양반이 피츠로이입니다.  다윈은 이 사람이 가끔씩 불처럼 화를 내곤 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격이 좀 더러운 편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사람 크기 보면 짐작 가시겠지만 비글호는 유명세에 비해 매우 작은 측량선에 불과했습니다.)




피츠로이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비글 호의 함장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 사람이 일기예보의 기초를 닦았기 때문입니다.  이 삶은 보퍼트의 후원을 받아 1854년 통상 위원회의 기상 통계관(Meteorological Statist to the Board of Trade)이라는 새로운 부서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현대 영국의 기상청이 됩니다.  특히 피츠로이는 비글 호의 항해 도중에 폭풍 기압계(storm glass)라는 독특한 기압계를 고안했다고 합니다.  이 기압계는 당시 영국의 여러 항구에 공식적으로 설치되어, 폭풍이 예상될 때는 어부들이 출어하지 못하도록 하여 많은 어부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피츠로이의 storm glass입니다만, 그 과학적 원리에 대해서는 좀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기압계라는 물건이 완전히 밀봉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좀 의심스럽지요 ?) 




1859년 영국에 몰아닥친 끔찍한 폭풍의 피해를 겪은 후, 피츠로이는 날씨를 예측하는 것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날씨를 예측하는 것을 피츠로이는 "forecasting the weather"라고 불렀고, 이것이 일기예보(weather forecast)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는 19세기 중반에 발명된 전보를 통해, 영국 곳곳에 설치된 육상 관측소로부터 수집된 기상 정보를 받아 날씨를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결과 1860년 타임즈(The Times) 지에 최초로 일기예보가 발행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일기예보는 수퍼컴퓨터를 이용한 복잡한 수학적 모델링 계산을 거쳐 발표됩니다.  이런 수학적 모델에 의한 일기예보는 1922년에 루이스 리차드슨(Lewis Fry Richardson)이라는 영국 수학자가 최초로 고안되었으나,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었던 관계로 실천되지 못했고, 1955년 이후에야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집에 애들이 있다면, 괴테 기압계 같은 것 하나 정도 걸어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애들에게 과학 공부도 시키고, 예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애쓰시는 기상청 직원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일기예보도 어차피 그다지 잘 맞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요.




최근 영국이 노후된 뱅가드급 핵잠수함을 대체할 드레드노트급 핵잠수함의 건조를 발표했습니다.  그 사양을 보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 중 하나가 130명의 승조원에 1명의 의사와 3명의 요리사(chef)가 포함되어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쉐프를 3명이나 태우다니 잠수함 승조원들을 정말 잘 먹이려나 보다 싶지만, 그래봐야 영국인 조리병를 태울테니 드레드노트 승조원들은 암울한 식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 시대 때도 영국 요리는 유명했을까요 ?  예, 유명했습니다.  몇가지 관련 부분을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서양 무협지 Sharpe 시리즈에서 발췌해 보았습니다.






  

-- Sharpe's Enemy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2년, 포르투갈)  -----------------

 

프랑스군 듀브레통 대령 :

"먼저 토끼의 살을 뼈에서 발라내서 올리브유와 식초, 와인에 하루종일 재워놔야 해. 거기에다 마늘, 소금, 후추, 그리고 혹시 구할 수 있다면 노간주 열매를 한줌 집어넣으면 좋지. 피하고 간은 따로 보관했다가, 갈아서 죽처럼 만들어야 한다네." 

듀브레통 대령의 목소리에는 열정이 묻어났다.  

"하루 지난 뒤에, 발라놓은 고기를 버터와 베이컨 기름에 약하게 익혀서 갈색을 만들어놓지. 팬에다가 밀가루를 조금 넣고, 모든 것을 소스에 집어 넣는거야. 거기에 와인을 좀더 붓고, 거기에 따로 갈아두었던 피와 간을 집어넣어.  그리고나서 끓이는거야. 접시에 내놓기 직전에 올리브유를 한스푼 집어넣으면 더 맛이 좋지."

 

영국군 샤프 소령 :

"우리는 그냥 토끼를 잘라서 물에 끓이고 소금 쳐서 먹는데요."


(이 구절이 나무위키인가에 올라온 것을 봤는데, 물론 원작은 콘월 옹이지만 이렇게 짧게 축약해서 요약 번역한 건 저였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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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셀프 디스와 함께 세계적인 비웃음거리가 되는 영국 요리이지만, 최소한 영국군은 육군이든 해군이든 프랑스군보다는 더 잘 먹었습니다.   


다음은 영국 해군의 규정상 식단입니다.  


일 : 비스킷 1 파운드, 돼지고기 1 파운드, 완두콩 0.5 파인트, 맥주 8 파인트

월 : 비스킷 1 파운드, 오트밀 0.5 파인트, 설탕 2 온스, 버터 2 온스, 치즈 4 온스, 맥주 8 파인트

화 : 비스킷 1 파운드, 쇠고기 2 파운드, 맥주 8파인트 (또는 럼 0.5 파인트)

수 : 비스킷 1 파운드, 온두콩 0.5 파인트, 오트밀 0.5 파인트, 설탕 2 온스, 버터 2 온스, 치즈 4 온스, 맥주 8 파인트

목 : 비스킷 1 파운드, 돼지고기 1 파운드, 완두콩 0.5 파인트, 맥주 8 파인트 (또는 럼 0.5 파인트)

금 : 비스킷 1 파운드, 온두콩 0.5 파인트, 오트밀 0.5 파인트, 설탕 2 온스, 버터 2 온스, 치즈 4 온스, 맥주 8 파인트

토 : 비스킷 1 파운드, 쇠고기 2 파운드, 맥주 8 파인트







(Stephen Biesty의 "Cross-sections : Man-of-War" 라는 책에서 나온 그림입니다.  설탕과 버터는 오트밀에 넣어 먹었고, 치즈는 그냥 고기 대신 베어 먹었나 봅니다.)







(치즈는 어디에 어떻게 보관하냐고요 ?  같은 책에 나오는 저 그림 속에서, 마치 책장처럼 생긴 틀이 치즈 보관틀입니다.  아무리 치즈가 보존 식품이라고 해도, 몇개월 지나면 곰팡이 나고 상해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굳이 영국 해군 뿐 아니라, 프랑스 육군 기록에도 '끔찍한 치즈를 배급받고 아연실색했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물론 여기서 배급되는 비스킷은 설탕도 버터도 넣지 않은, 뻑뻑하기 이를 데 없고 이가 부러질 정도로 단단한 물건이었습니다.  고기도 소금을 듬뿍 써서 절여 놓은, 질기고 누린 내 나는 것이었고요.  비스킷이나 고기나, 만든지 최소 3개월, 보통 반 년에서 1년 정도 된 것들이었습니다.  비스킷에는 바구미와 그 애벌레가 득실거렸고, 고기는 너무 짰기 때문에 가뜩이나 부족한 민물 통에 반나절 이상 담가 놓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지독하게 짰습니다. 


맥주도 술 치고는 알코올 도수가 약한 편이라서 쉽게 상했습니다.  따라서 대양에 나가면 곧 맥주는 떨어졌고, 그 후에는 맥주 대신 럼주 0.5 파인트가 배급되었습니다.  이 럼주에는 물을 타서 희석해서 주었는데, 그런 규정을 만든 제독의 이름을 따서 그런 희석 럼주를 그록(grog)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병들이 진한 럼을 그대로 마시고 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럼에 물을 규정대로 타는 것이 중요했고, 따라서 그록을 배합하고 분배하는 것은 장교의 감독하에 엄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그록 배식은 영국 해군에서 계속 전통으로 이어지다가 1970년에야 폐지되었습니다.  영국 Royal Navy의 Darkest day로 기록된다고 합니다.)

  



이런 식단에 대해 현대인들은 불평할지 몰라도, 당시 해군을 구성했던 서민층들에게는 꽤나 호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매일 빵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거의 매일 고기 1 파운드와 빵 1 파운드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건 대부분의 현대 한국인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술이라니 !  매일 공짜 술을 저렇게 많이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해군의 이 배급량은 영국 육군의 경우보다 다소 열악한 편이었습니다.  규정에 따르면 영국 육군은 요일에 따른 변화 없이 그냥 매일 같은 식재료를 배급했습니다.


빵 또는 밀가루 1.5 파운드 또는 비스킷 1 파운드

쇠고기 1 파운드 또는 돼지고기 0.5 파운드

완두콩 0.25 파인트

버터 또는 치즈 1 온스

쌀 1 온스

약한 맥주 (small beer) 5 파인트 또는 와인 1 파인트 또는 럼 0.5 파인트


육군이나 해군이나, 이런 식단 규정을 보시면 채소에 대한 규정이 전혀 없다는 것을 쉽게 눈치채실 것입니다.  이는 사실 로마 군단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으로서, 당시에는 채소를 먹어야 건강하다는 개념 자체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채소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나 주로 먹었고, 중산층 이상되는 사람들은 주로 지방과 단백질,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도 육군에서는 양념이나 부재료로 이런저런 채소를 얼마든지 구할 방법이 많았으므로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망망대해에 고립된 해군이었지요.  해군에서는 당연히 비타민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이 창궐했습니다.  괴혈병의 증상은 전신의 무력감, 잇몸이 퉁퉁붓고 이빨이 빠지는 현상, 고약한 입냄새, 그리고 몇년 전에 완치된 상처가 새롭게 덧나는 현상 등이 있는데, 결국은 다 죽었습니다.  이 치료법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신선한 채소를 먹으면 금방 나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비타민 C의 존재를 몰랐고, 또 신선한 채소의 보존 방법을 몰랐으므로 장기간 대양을 항해하는 수병들의 건강은 크게 좋지 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긴 대양 항해의 경험상, 영국 선장이나 군의관들은 레몬, 라임이나 오렌지 주스를 매일 선원들에게 공급하면 괴혈병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요법은 나폴레옹 전쟁 후기에 들어서야 해군 전체에 시행되었습니다.  그렇게 영국 해군 수병들이 괴혈병으로 픽픽 쓰러지는 사이 독일 선박에서는 독일식 김치인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를 배식하면 괴혈병이 예방된다는 것을 알고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소세지와 독일 김치 사우어크라우트입니다.  사우어크라우트가 제 입맛에는 꽤 잘 맞던데요.  맛있어요.)




이런 식단 규정에서 또 이상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현대적인 군대나 학교 식단이라면 미트로프나 비프스튜 등의 음식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당시 식단에는 식자재 이름만 나와 있고 그런 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배식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군대에는 취사병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습니다.  군대에서의 모든 식사는 그냥 중대 단위로 알아서들 해먹는 것이 상식이었고, 군 지휘부에서는 오직 식재료와 취사도구의 배급만 책임졌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독립 전쟁 때나 나폴레옹 전쟁 때나,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군 병력에 대한 식량 보급은 항상 다음과 같이 쇠고기 몇 파운드, 밀가루 몇 파운드 등 재료에 대해서만 기록될 뿐, 점심은 빵과 로스트 비프, 저녁은 파스타와 치킨 등 요리 이름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당번제 식사 준비에 있어서도 영국군은 그 명성이 높았나 봅니다.  맛은 어차피 군대밥이니 그렇다고 쳐도, 조리하는 과정의 효율성은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 웰링턴 공작도 언급할 정도였습니다.  웰링턴 공작은 1812년 11월 28일 내린 명령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원정에서 프랑스군과 비교할 때, 우리 군의 조리 방식은 시설면에서나 신속성에 있어서나 개탄스럽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원인은 다른 점들과 동일하다.  군의 질서, 병사들의 행동에 대해 장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 결과 병사들에 대해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

향후 각 중대의 일부 병사들은 땔나무를 준비하고, 일부는 물을 긷고, 일부는 고기, 비스킷 등을 받아와 조리를 하도록 할당될 것이다.  이런 조치가 매일 제대로 준수되면 전처럼 식사 준비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작전의 필요성 때문에 식사할 기회를 빼앗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행군할 시간도 부족한데 병사들이 빠져가지고 저런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딩가딩가 밥을 지어 먹다니.... 이것들이 캠핑을 왔나 작전을 왔나 !!  라는 것이 웰링턴 공작의 불만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대별로 식사 준비를 할 때는 장작을 마련해오는 병사, 불피우는 병사, 물 길어오는 병사, 고기를 받아오는 병사, 빵을 받아오는 병사, 그리고 무기와 배낭을 정리하는 병사 등으로 나뉘어 활동을 했습니다.  이는 프랑스군을 따라 한 것이니, 프랑스군도 이와 비슷하게 움직였나 봅니다. 


육군이 이렇게 식사 준비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해군도 mess라고 불리는 식사조를 짜서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보통 8명이 한조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고달프고 위험한 바다 생활에서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도둑질이나 거짓말 등의 죄목으로 식사조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일요일 함장님에게 판결을 받고 보조 포술장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것보다 대단한 불명예와 왕따를 뜻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떤 곳에서든 소속감을 느낄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잠깐, 해군에는 분명히 cook, 즉 주방장이 있었는데 이는 어찌된 일일까요 ?  당시 군함에서, cook이라는 직위는 요리를 하는 역할이 아니라, 군함 주방(galley)에서 화재를 내지 않고 제대로 요리를 하는지 관리 감독하고, 또 공용으로 쓰는 솥단지 같은 주방용품을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무로 된 군함이었으므로, 불 관리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상위 장교 식당, 즉 wardroom을 위해서는 장교들이 돈을 모아 고용한 진짜 민간인 요리사가 있었고, 또 대부분의 함장은 개인 전용의 민간인 요리사를 따로 대동했습니다.   주방장의 직위는 warrant officer, 즉 준위였습니다.   통장이(cooper), 범포장(sailmaker), 목공장(carpenter)와 같은 하급 기술 준위(junior petty officer) 신분이었는데, 다른 기술 준위와는 달리 별로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은 필요없는 직책이었지요.  대개 cook의 직위는, 실제 요리 솜씨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오래 복무한 나이 많은 모범 수병, 특히 팔다리를 전투 중에 잃은 수병에게 일종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해적 영화를 보면 요리사는 보통 의족을 한 중년 아저씨쟎습니까 ?  다 그런 이유가 있더라구요.  게다가, cook은 꽤 짭짤한 자리였다고 합니다.  수병들이 염장 고기를 삶을 때 물 위에는 당연히 기름이 뜨쟎습니까 ?  그건 관례상 다 cook의 몫으로 돌아갔다고 하네요.  일부 밧줄과 삭구에 바를 것만 빼고요.  수병들은 딱딱하고 맛없는 건빵을 이런 기름에 튀겨 먹기 위해 이런 기름도 슬쩍슬쩍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런 동물성 유지는 긴 항해를 하다보면 몇통씩 생겼는데, 어떤 항구에서건 이런 동물성 유지 한통에 약 2.5파운드 정도를 주고 샀다고 하니까, 큰 돈은 아니어도 꽤 짭짤했겠지요.  (당시 소위 연봉이 약 90파운드였습니다.)  다만 출신이나 하던 일이 그렇다 보니, 주방장은 진짜 장교들이 식사를 하는 상위 장교 식당(wardroom)이나 사관후보생(midshipman)들과 보조 항법사(master's mate), 보조 군의관(surgeon's mate) 등이 식사를 하는 하급 장교 식당(cockpit 또는 gunroom)에는 끼지 못하고, 그냥 일반 수병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신사 계급의 나으리들과 겸상을 할 처지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역시 Stephen Biesty의 "Cross-sections : Man-of-War" 라는 책에서 나온 그림입니다.  아마존에서 중고책으로 파는 것을 샀는데, 저도 잘 몰랐던 부분, 가령 저렇게 배식받은 쇠고기는 식사조 mess별로 금속제 꼬리표를 붙여 삶았다는 것도 상세하게 소개되더군요.  저 해군용 비스킷에 득실거리는 구더기 구경하세요.)




이렇게 배급된 날재료로 병사들은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까요 ?  그야 말로 제각각이었습니다.  병사들에게 좋은 오븐이나 화력 좋은 가스 레인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들은 주로 남비에 끓여 먹는 요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븐 없이 빵을 구워 먹을 수는 없었으므로, 대대에서 일괄적으로 구워서 배급되는 빵이 없다면 이들은 배급된 밀가루를 이용해 밀가루 죽을 쑤어 먹거나 요령껏 마련한 돌판이나 철판에서 얇은 전병을 구워 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족적이지만 아마추어적인 배식 제도는 로마 군단 시절부터 무려 제1차 세계대전 초기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근대적인 취사병 제도가 생긴 것은, 엄청난 장거리 곡사포들의 포탄이 끊이지 않고 떨어지던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영국군이 맛없는 영국 요리를 먹는다고 해서 프랑스군이 화려한 프랑스 요리를 먹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프랑스군의 식사는 더욱 형편 없었습니다.  흔히 나폴레옹이 '군대는 배 힘으로 행군한다' (An army marches on its stomach)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그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나폴레옹의 기본 병참 전략은 현지 조달이었으니, 병사들은 대부분의 경우 배가 고플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규정상으로도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하루 식량의 품목과 양은 부대가 어느 지역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꽤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하루에 다음과 같은 하루 배급을 받도록 되어 있었고,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영국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빵 1.5 파운드

고기 1.1 파운드

말린 채소 0.25 파운드

브랜디 0.0625 파인트

와인 0.25 파인트

식초 0.05 파인트


건조 채소가 나온다고 해서 '역시 프랑스는 영국과는 달리 영양의 균형을 생각하는 미식가의 나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여기서 건조 채소라는 것은 영국군도 자주 배식하던 말린 콩을 뜻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거든요.  1800년의 제2차 이탈리아 침공 때부터 나폴레옹 밑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던 쿠아녜(Coignet)의 회고록에도 '아마 천지창조 때 함께 창조된 것처럼 오래된 말린 콩'이 배급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와인과는 별도로 나오는 브랜디 0.0625 (1/16) 파인트에 대해서도 감탄할 수도 있습니다.  실은 저것도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다소 덜 로맨틱한 이유에서 배급되었던 것입니다.  전장에서 마시는 물은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냄새도 나고 탁한 것일 때가 많았으므로, 그런 물을 좀더 정화하기 위해 브랜디 또는 식초를 넣어서 마시라고 준 것이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브랜디의 경우는 대부분 병사들이 그냥 마셔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식초는 그렇게 물에 타서 마셨고, 아예 각 중대별 짐수레에는 그런 용도를 위한 큰 식초통이 실려 있었습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병사 1인당 배급량에는 변화가 컸습니다.  가령 1809년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한 뒤에 비엔나 시민들에게 부과한 프랑스군 1인당 배급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빵 1.33 파운드 그리고 추가로 수프에 넣을 빵 0.33 파운드

고기 1 파운드

쌀 0.125 파운드 (2 온스)

말린 채소 0.25 파운드 (4 온스)


그러나 이는 이제 비엔나 시민들의 비용으로 병사들을 먹이게 되었으므로 여태까지 먹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요구한 것이었고, 이 때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훨씬 더 적은 양의 식량만 배급되었습니다.  1811년 6월, 다른 부대들보다 훨씬 배급 사정이 좋았던 근위대의 실제 하루 배급량은 정말 참혹한 수준이었습니다.  


빵 0.8 파운드 그리고 추가로 밀가루 0.25 파운드

고기 0.6 파운드

쌀 0.0625 파운드 (1 온스)


밀가루가 배급되었던 이유는 빵을 구울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고, 그나마 스페인처럼 정말 상황이 안 좋았던 곳에서는 아예 가루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생밀 낟알이 배급되기도 했습니다.  병사들은 이런 낟알을 수프에 넣어 주린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뻔뻔스러운 나폴레옹은 아예 한술 더 떴습니다.  그는 고대 로마 군단병들처럼 병사들은 현지에서 직접 밀 낟알을 배급받고, 그것을 작은 휴대용 맷돌로 갈아 자신이 먹을 빵을 직접 구워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했지요.  


물론 영국군도 규정된 배식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영국군 사병의 급료는 기본 하루 1실링 즉 12펜스였는데, 저런 배식에 대해 무려 그 절반인 6펜스를 공제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보급 상황이 좋지 않아 규정된 배식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도 급여에서 배식 공제는 꼬박꼬박 이루어졌습니다.  또 원래 살코기로 공급되어야 하는 염장 고기가 비계나 연골, 힘줄 등 먹기 싫은 부위로 잔뜩 채워져 공급되는 일도 많았고요.  물론 그 와중에 뇌물이 오가고 누군가는 돈을 벌었겠지요.  


그런 부당함은 프랑스군에도 매우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의 통치도 결국은 독재 권력인지라 그의 묵인 하에 많은 부정이 동반되었고, 그의 군납업자들은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에 보급되는 빵과 비스킷은 병사용 등급으로 구워져 보급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질이 나쁜 귀리 가루를 잔뜩 섞고, 대충 구워 대충 공급을 하다 보니, 맛이 나쁜 것은 둘째 치고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핀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예 배급되는 빵이 전체적으로 파란 색을 띠기도 했다지요.   위에서 언급한 쿠아녜의 회고록에도 하루 종일 굶은 뒤 겨우 받은 배급 빵이 곰팡이 투성이여서 무척 실망했다는 이갸기가 나옵니다만, 그나마 며칠 뒤에는 아예 빵 배급이 끊겨 버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JE SUIS NÉ À DRUYES LES BELLES FONTAINES EN 1776, LE 16 AOÛT... 

CAPITAINE JEAN-ROCH COIGNET  

나는 1776년 8월 16일 드뤼에-레-벨-퐁텐느에서 태어났다...   대위 장-로끄 쿠아녜

쿠아녜의 회고록이 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병사들이 고생과 부상,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는 동안 그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보는 자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런 자들일 수록 자신이나 자신의 아들들은 병역 의무에서 이런저런 수를 써서 빠지거나 아주 편하고 안전한 보직에서 특혜를 보고, 또 그럴 수록 전쟁불사를 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입보수나 방산 비리가 빨리 없어졌으면 합니다.   




출처 : Cross-sections : Man-of-War, Stephen Biesty

http://www.95th-rifles.co.uk/research/rations/

https://collections.nlm.nih.gov/ext/dw/101567907/PDF/101567907.pdf

http://regimentalrogue.tripod.com/blog/index.blog?topic_id=1129008

https://www.scribd.com/document/158382516/Historical-Review-of-the-Load-of-the-Foot-soldier

https://en.wikipedia.org/wiki/Royal_Navy_ranks,_rates,_and_uniforms_of_the_18th_and_19th_centuries

http://navymuseum.co.nz/history-of-the-warrant-officer-rank/

나폴레옹 시대의 해전

나폴레옹의 시대 2016.10.20 22:35 Posted by nasica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함대라고 하면  16세기 말의 스페인 무적 함대 또는 20세기 초의 러시아 발틱 함대 정도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역시 스페인 무적 함대가 더 유명하겠지요.  결론적으로는 이 두 함대 모두 기대와는 달리 풍비박산이 났습니다만, 사실 당시에도 그 '기대'는 현실감이 없는 지배층의 기대였고, 실제 항해를 떠나는 두 함대 실무자들의 마음은 매우 무거웠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준비 상태가 엉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개럿 매팅리의 '아르마다'입니다.   한글판도 있고, 저는 한글판으로 읽었습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  퓰리처 상도 받은 명작입니다.)

 


아뭏든, 당시 개박살이 난 스페인 무적 함대의 경과를 그린 개럿 매팅리의 '아르마다'라는 책을 읽어보면, 스페인 함대가 진 이유가 결코 영국군의 대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기 전에는, 단거리포만으로 무장하고 실제 전투의 결판은 전통적 방식인 칼과 피스톨로 끝내려는 스페인 함대에 대해, 영국 함대는 단병접전을 피하고 장거리포로 무장했기 때문에 영국이 이겼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의 장거리포가 스페인 함대를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 포격으로 침몰한 스페인 배는 없었습니다.  심각한 파손을 입은 배도 없었고요.  가장 큰 타격은 영국군의 화공선(fire ship)에서 비롯되었고, 더 큰 타격은 폭풍과 기아 때문이더군요.  당시 영국군 함대가 보유하고 있던 컬버린 포 등으로는, 아무리 명중을 시켜도 나무로 만든 군함을 격침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영국 함대 지휘관 중의 하나였던 호킨스 경은 '조국을 침공하는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지 못하고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다가' 화약과 포탄이 다 떨어져서 전투조차 불가능해진 영국군 함대를 보고 "이것이 다 우리 탓이지 누굴 탓하겠는가"하면서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영국 해군도 더 큰 구경의 대포를 매우 근접한 거리에서 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8세기말, 19세기초의 군함들은 분명히 아르마다 시절인 16세기 군함들에 비해 훨씬 더 날렵한 디자인과 육중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만, 기본적인 무기 체계가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해전에서도, 상호간의 포격의 결과로 침몰하는 군함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넬슨 제독의 함대입니다.  당시 군함들은 매우 복잡한 밧줄 구조물로 엮어 놓은 아름다운 목공예품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당시 영국 해군은 주로 파도가 아래 방향으로 물결칠때 발포했고, 프랑스나 스페인 해군은 파도가 윗 방향으로 물결칠때 발포하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영국 해군의 목적은, 적함의 본체를 타격하여 적의 포병들을 무력화시키고 갑판 위의 적병들을 쓸어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너무 낮게 조준을 하는 경우에도, (마치 돌로 물수제비 뜨는 것처럼) 포탄이 물 위를 퉁퉁 튀겨서 적함을 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좀더 명중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넬슨 제독의 기함 빅토리 호의 포열 갑판의 모습입니다.  포병들이 가득찬 이 공간에 쇳덩어리 roundshot이 두꺼운 나무 벽을 뚫고 나무 파편들과 함께 날아들어오면 그야말로 끔찍한 피바다가 일어났습니다.)







(저렇게 돛대에 수도 없이 묶여있는 밧줄들은 단순히 선원들이 기어오를 수 있도록 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돛대라는 물건은 배의 용골에 못을 박아 고정한 물건이 아니라, 저 밧줄들에 의해 지탱되는 물건입니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전투 중 돛대가 쓰러지는 것은 대포알에 돛대가 부러지는 경우보다는, 저 밧줄들이 끊겼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 프랑스나 스페인 해군은, 주로 막대기 탄이나 쇠사슬탄 (그림참조)을 발사하여, 적의 마스트나 가로돛대, 돛 등을 망가뜨리는 것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좀 높게 쏘아야 했지요.  사실 이런 방식도 나름대로의 잇점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배는 본체보다도 돛대가 훨씬 면적이 컸기 때문에, 이 부분을 노리고 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습니다.  조준이 다소 낮게 된 경우에도, 갑판 위의 적병들을 쓸어버릴 수도 있었고, 또 돛대나 가로돛대에 명중했다면, 거기에서 떨어지는 나무파편이나 도르레 뭉치에 갑판 위의 적병들을 다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적의 돛대를 망가뜨리고 나면, 적함은 거의 움직일 수도 없고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으므로, 적함의 이물이나 고물 방향으로 접근하여 이쪽편의 broadside (옆면의 포문을 통해 퍼붓는 일제 사격)로 적함을 긁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영어식 표현도 rake(긁는다)라고 합니다.  이 rake가 무서운 것은, 당시 군함들의 구조상, 주포는 모두 옆면을 향하고 있고 고물이나 이물에는 변변한 포가 없었으므로, 이쪽은 지근거리에서 적에게 포탄을 마음껏 퍼부울 수 있는데 반해, 상대편은 반격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Raking fire, 즉 종사입니다.  일제 포격 한방으로 많은 적병을 쓸어 버릴 수 있었으므로 갈퀴로 긁는다는 뜻의 rake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당시 전투에 의한 사상자는 (요즘도 그렇지만) 대부분 대포알에 직접 맞은 직격탄보다는 대부분 파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포는 폭발탄을 쏘는 것이 아니고 속이 쇠로 꽉 찬 roundshot을 쏘았기 때문에, 파편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목숨을 노렸던 파편은 모두 나무 파편이었습니다.  대포알에 맞아 부서지는 돛대나 두꺼운 목판은 날카로운 파편을 수없이 튀게 만들었고, 여기에 맞으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특히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돛대나 가로대 등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전투 준비가 시작되면, 꼭 행해지는 작업 중의 하나가, 갑판 위의 병사들 머리 위에 큰 그물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파편들을 막자는 것이었지요.


물론 당시에도 폭발탄은 있었습니다만, 특히 해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당시 폭발탄은 모두 곡사포로 발사했는데, 움직이는 군함을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곡사포를 발사하여 명중시키는 것은 당시 기술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는 당시 배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임무를 띄고 있던 해병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해병들의 소총은 육군이 사용하는 것보다 오히려 약간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고장이 훨씬 적게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육군에서는 종종 사용되는 라이플 소총은 사용할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배 위에서 적함을 향해서 조준 사격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일부 해병들은 돛대 위의 망루에 올라가서 거기서 적함을 내려다보며 사격을 했는데, 그렇게 높은 망루는 파도의 움직임에 따른 흔들림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회전 포(swivel gun)라고 하는, 꼭 오늘날의 탱크 해치에 장착하는 50구경 기관총처럼 생긴 작은 대포를 망루에 장착해두고 거기서 포도탄을 내리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그림이 swivel gun입니다.)

 



다만, 넬슨 제독은 그렇게 망루에서 총을 쏠 경우, 발사할 때 튀어나오는 wadding(화약 마개)으로 인해 돛에 불이 붙을 수 있다는 이유로 망루에서 총을 쏘는 것은 금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발생한 화재가 보고된 바는 없고, 결국 넬슨 자신은 프랑스군이 아마도 망루에서 쏜 듯한 총탄에 맞아 최후를 맞게 됩니다.

 






(넬슨 피격 장면입니다.  실제 상황은 그림보다 훨씬 더 안 좋아서, 서 있는 수병보다는 쓰러진 수병들이 훨씬 더 많았고, 거의 패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위험한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  바로 갑판 위였습니다.  특히 함장과 고급 장교들, 그리고 조타수가 있는 quarterdeck, 즉 후갑판이 제일 위험했습니다.  앞서 말한 회전포도 그  quarterdeck을 노렸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해병 한명이 하갑판으로 통하는 햇치를 지키고 서있게 되는데, 이유는 겁을 집어먹은 수병들이 갑판 아래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  Orlop deck이라고 부르는, 즉 가장 배 밑에 있는 수면 아래에 위치한 갑판이었습니다.  당시 포탄 특성상, 수면 아래 깊숙한 부분은 절대 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포탄은 수면을 튕겨나가 물수제비를 뜨게 되거나, 또는 물 속으로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두꺼운 목재를 뚫기에는 힘이 너무 약해졌습니다.  부상병을 치료(...라기보다는 팔다리를 자르는 것이 보통이었던)하기 위한 군위관은 전투가 벌어지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당시 군함에는 군인들 뿐만 아니라, 해외로 파견나가는 정부 관료나 그 가족같은 민간인이 타고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민간인들은, 전투가 벌어져도 사실 목숨 걱정을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두 orlop deck이나, forepeak 같은 수면 아래 깊숙한 공간으로 내려갔거든요.  다만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은 그런 구석진 공간에 우글거리는 바퀴벌레 및 쥐떼들과 친하게 지내야 했겠지요.

 


 




(뒤쪽의 다소 높은 갑판이 quarterdeck.  살기를 바라는 자는 전투 중 이 곳을 피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맨 뒤쪽의 가장 높고 작은 갑판은 poop deck이라고 불렸습니다.)


 


요즘 군함이야 레이더 성능이 곧 그 군함의 성능과 맞먹을 정도로, 먼저 적을 탐지하는 것이 중요했고, 또 그에 맞서 스텔스 기능에 대한 연구도 활발합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레이더도 없고, 또 레이더가 있어라도 어차피 장거리 미사일이 없었으므로 별 쓸 모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당시 군함끼리 전투에서 보이지 않는 군함으로부터 급작스럽게 기습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군함이라는 것이, 반드시 투명 군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아군 또는 중립국 군함인 줄 알았다거나, 또는 민간 상선인 줄 알았다가 지근거리에 와서야 적함인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도 낭패입니다.  당시에는 그러한 점을 이용한 전술이 아주 흔하게 활용되었습니다.  즉, 깃발을 자국기가 아닌, 엉뚱한 국가의 깃발을 내다는 것이지요.

 

이게 불법 아니냐고요 ?  대개는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첫번째 발포를 시작하기 전에 진짜 자국기를 내걸기만 하면, 그건 정당한 위장 전술(ruse de guerre)로 인정받았습니다.  보통 해적 영화보면 해적선이 마지막 순간에야 해골이 그려진 해적기를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게 다 적법한 (어차피 해적인데 적법 불법을 따지나 ?) 전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군함들은, 단독 항해시에 미확인 선박을 만나면, 어떤 깃발을 올리고 접근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일단 가짜든 진짜든 깃발을 올리고 접근을 합니다.  가령 저쪽이 프랑스 깃발과 펜던트를 날리고 있다면, 일단 이쪽도 프랑스 깃발과 페넌트를 올리고 접근했다고 치지요.  이쪽도 프랑스 군함이라고 선언을 했다면, 그 다음 차례는 저쪽이 'private signal', 즉 비밀 신호를 보냅니다.  물론 깃발 신호로요.  이건 현대 전투기에서의 IFF (If Friendly or Foe, 피아식별) 장치 같은 것이지요.  이 깃발 신호에는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으므로, 우물쭈물하면서 최대한 접근하다가 결국 영국 깃발을 내걸고 '꽈광' 발포를 하는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정확한 정보는 전투에서건 상거래에서건, 엄청난 가치를 지닙니다.  일단 군사 행동에서는 공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군함이 중요한 연락 문서를 가지고 홀로 인도양을 항해 중인 프랑스 프리깃 함이라면, 저렇게 발견된 미확인 선박이 영국군의 74문짜리 전열함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적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당장 침로를 변경하여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것이 장땡이겠지요.  또, 상황이 반대라서 이쪽이 공격을 하려는 입장이라고 해도, 가능한한 미리 전투 준비를 해두고 있는 것이 유리합니다. 

 

여기서 전투 준비라 함은, 'clear for action'을 말합니다.  Clear for action 이라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작업입니다. 

 


1. 먼저 갑판 아래에 있는 선실들을 구분하는 나무 벽들을 모두 떼어내서, 간판 아래를 넓은 하나의 공간으로 변형시킵니다.  이래야 대포 사격 및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일반 장교들은 물론 함장의 가구나 서류, 소지품같은 것들은 모두 하갑판 창고로 쳐박히게 됩니다.







(선원들을 위한 별도의 선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렇게 선원들이 식사하는 저 공간은 바로 포열 갑판이었고, 그림 왼쪽에 보이는 것처럼 대포 사이사이의 공간의 접이식 식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전투 시에는 저런 잡다한 기물들은 모두 떼어내 선창으로 내려보냈습니다.)


 

2. 수병들의 침구인 해먹 말아둔 것을 꺼내어 난간 등에 고정시켜 둡니다.  진지 구축시의 모래주머니 쌓아둔 것과 같은 방탄 효과를 냅니다.  또, 포격에 맞아 떨어질 삭구나 가로활대 등으로부터 갑판 위의 수병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그물막을 펼쳐 고정합니다.

 

3. 주방(galley)의 불을 끕니다.  재수없게 적의 포탄이 주방 아궁이를 때릴 경우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 시간이 있다면 clear for action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염장 쇠고기를 삶아두는 것이 좋겠지요.  치열한 포격전 중에도 수병들이 원기를 찾을 수 있도록 약간의 음식과 물을 준비해두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대개는 찬 음식이었지요.

 

4. 탄약고에서 적절한 숫자의 포탄과 화약을 날라오고, 포격에 필요한 슬로우 맷치 (slow match, 천천히 타는 도화선) 및 포구를 식히는데 쓸 물통 등을 준비합니다.  또 포구를 막아두었던 마개도 뽑고, 핸드 스파이크 등 대포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이런저런 도구들을 가져다 둡니다.  또 화재가 날 때에 대비하여 소방용 물통도 채워둡니다.  시간이 충분하면, 대개 벌겋게 녹이 슬어있을 포탄의 표면을 정으로 쪼아서 녹을 벗겨냅니다.  그래야 명중률이 좋아지거든요.






(이건 텍사스 오스틴의 군사 박물관에 전시된 18세기 후반 ~ 19세기 초반 함포의 모습입니다.  저런 나무 물통 하나하나가 포격에 꼭 필요한 주요 장비였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저렇게 깔끔하진 않았겠지요.)



 

5. 이런저런 준비가 다 되면, 각자 지정된 전투 위치로 가서 사격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군의관은 선창 바닥 근처의 응급실(cockpit)에 칼과 톱, 붕대 등을 갖다놓고 기다립니다. 

 


이런 준비들은 대개 상대 군함이 사정거리 내로 접근하기 전에 다 마칠 수 있습니다.  한 30분 걸릴까요 ?  어쨌거나 조금이라도 먼저 전투 태세에 들어가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고, 특히 깜깜한 야밤 중이라서, 적함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라면, 그야말로 앉아서 눈뜨고 당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당시의 전투 양상은 대략 아래와 같았습니다.



1. 양쪽 함대가 서서히 접근합니다.  


이때, 적함대와 안싸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면 도망을 쳐야 하는데, 이럴 경우 바람을 등지고 있는 함대가 훨씬 유리합니다. 도망을 칠지, 교전을 할지 마음대로 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양쪽이 서로 다른 진영으로 격돌하여 뒤엉킵니다.

 

학익진 같은 것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합니다만, 이때의 함대 진영은 상황에 따라 제각각이었습니다.  가령,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에서 썼던 전법은 이열 종대로 길게 늘어선 함대가 적 함대를 수직으로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적함대를 양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이열 종대로 쳐들어가면, 적함대를 돌파할 때까지는 적의 broadside 공격을 받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일단 적함의 이물과 고물 사이에 뛰어들면 저항할 수 없는 적함을 '긁어'줄 수 있었으므로 그다지 나쁜 전술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먼거리에서 쏘아대는 broadside는 그리 명중률이나 파괴력이 대단치 않았으므로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사실 트라팔가에서도, 모든 군함들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쳐들어간 것이 아니고, 각 함선의 사정에 따라 제각각 전투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함대의 제독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각 함의 함장들이 제대로 해주기를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트라팔가 전투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의 횡대에 돌진하는 영국 함대입니다.  2열 종대로 이렇게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3. 상호간에 무자비한 근접 포격을 주고 받습니다.


좀 먼 거리에서는 roundshot이나 chainshot 등을 쏘아대다가, 정말 바로 옆으로 다가오게 되면 grapeshot을 쏘았습니다.  이건 일종의 산탄 같은 것으로, 적함의 갑판 위의 전투원들을 피떡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또 갑판 아래의 대포에서는 계속해서 roundshot을 퍼부어서, 적함의 대포를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슬탄의 제대로 된 용도입니다...  끔찍하지요 ?)




4. 해전의 영원한 로망 - boarding


글자 그대로 총칼로 무장한채  적함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미리 적함에 뛰어들 전투원들을 선발해 두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들을 boarding party라고 불렀습니다.  당연히 붉은 코트를 입은 해병들이 선두에 섰고, 원거리 전투에서는 포수 노릇을 하던 선원들도 권총이나 칼(cutlass)로 무장시켜 전투원으로 썼습니다.  보통의 전투는 이렇게 백병전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함상에서의 백병전입니다.  아무 옷이나 대충 입고 싸우는 수병들 중 마치 육군처럼 머스켓 소총을 들고 군모까지 쓴 병사들은 해병, 즉 marine입니다.  원래 해병대의 기원은 저렇게 함상에서의 백병전 담당 전문병이었습니다.  해병들은 저렇게 멋은 있을지 몰라도 거추장스러운 군복을 입어야 했던 대신, 이런저런 뱃일에서는 면제되었습니다.)




5. 항복 


가끔씩은, 백병전 없이 포격전만으로도 항복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의 피해가 너무 커서,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면 당시의 함장들은 주저하지 않고 항복을 했습니다.  '침몰하는 군함의 함장은 배와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없던 말이었습니다.  일단 나무로 만든 군함은 아무리 구멍이 뚫려도 잘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또, 정당한 상태에서, 즉 선원들의 사상자가 너무 많은 경우 항복하는 것은 전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대체로 사상자가 얼마나 되면 항복하는 것이 보통이었을까요 ?  여기에는 좋은 예가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프리깃함 레안더 (HMS Leander) 호는 넬슨 제독의 지휘하에 나일강 전투에도 참전하는 등 맹활약을 하다가, 넬슨의 명령에 따라 지브롤터로 되돌아 가던 중이었습니다.  크레타 섬 부근을 지나갈 때 자신보다 더 큰, 프랑스의 대형 전함 제네로(Le Généreux) 호를 맞닥뜨리게 되어, 전투를 벌입니다.  레안더 호의  톰슨 함장은, 총 300명의 선원 중 92명이 죽거나 다치게 되자, 항복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포로 교환으로 풀려나서 본국에 돌아오자, 항복의 이유에 대해 형식상의 군법 재판을 거친 뒤에, 명예로운 항복이었다는 판결을 받고 무죄 방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리한 상황에서도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됩니다.  C.S. Forester의 연작 소설 혼블로워 7편 'Flying Colors'는 바로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레안더 호과 제네로 호의 전투 모습입니다.  전면이 제네로이고, 저 뒤쪽에 박살이 난 전함이 레안더입니다.)



 

항복한 장교들은 적군으로부터도 거의 예외없이 모두 상당히 명예로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승리한 함장은 항복한 적 함장을 당연히 식사에 초대해서 대접해야만 했습니다.  또 항복한 적함에 민간인, 특히 부녀자가 타고 있을 경우 이들은 각별한 보호를 받았고, 또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본국으로 되돌려보내졌습니다.  항복한 장교들조차도, 가석방 문서에 서명만 하면 적함 내부나 적국 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고 (물론 돈이 있을 경우에는) 상당히 호화로운 생활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 많은 경우 포로 교환 조치에 따라 본국으로 귀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포로 교환에 '가불'도 있었습니다.  즉, 가령 프랑스가 영국군 포로를 많이 잡아두고 있는데, 영국군 측에서는 대신 풀어줄 프랑스군 포로가 없다면, 양쪽 다 난감했습니다.  포로들이야 당연히 난감했을 것이고, 영국측도 자기 장교들을 못 돌려받으니 난감했겠지만, 프랑스측은 왜 난감했을까요 ?  포로들은 하는 일 없이 계속 먹고 마시는데다가, 장교 포로들의 경우는 가끔씩 식사에 초대를 하는 등 상당히 예의를 차려주어야 했습니다.  정말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적절한 포로 교환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절대 프랑스와의 전쟁에 복무하지 않겠다' 라는 선서를 받고는 그냥 풀어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로 '가불'입니다.




출처 : 아르마다 - 개럿 매팅리


Patrick O'Brian's Navy - The illustrated Companion to Jack Aubrey's World - editor Richard O'Neill


British Napoleonic Ship-of-the-Line  - Angus Konstam


http://www.icollector.com/Naval-chain-shot-12-pounder-early-1800s-rare_i17425677

http://www.keyword-suggestions.com/Y2hhaW4gc2hvdA/

http://www.bbc.co.uk/history/interactive/animations/trafalgar/index_embed.s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