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군 2개 사단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것은 전선 중앙부에서처럼 영국군 자신들의 경험 부족과 무지였습니다.  페인(Fane)과 앤슨(Anson)의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군을 위협하여 방진을 이루게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협박만 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렇게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을 메데진 언덕 위의 영국군 포병대가 계속 갉아먹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총검을 촘촘히 내밀고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영국군 기병대는 겁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돌격은 기병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영국군은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 기병대를 격파한 것은 프랑스군의 총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닥치고 돌격'을 감행하던 중, 선두를 달리던 영국군 기병대 제1파가 비명과 함께 한꺼번에 증발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들과 프랑스군 사이에 깊이 3m, 폭 4.5m의 깊게 움푹 파인 도랑 같은 지형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쪽에서는 교묘하게 눈에 잘 보이지 않던 이 도랑 속에 놀랍게도 영국군 기병대 제1파의 절반 정도가 빠져버렸고, 많은 병사들과 말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 기병대의 멍청함을 비웃을 처지가 될까요 ?  위 그림은 1815년 워털루에서 프랑스군 기병대가 돌격하다 똑같은 운명에 처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만, 빅토르 위고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에서도 저 장면을 세밀히 묘사했습니다.  덕분에 이런 그림도 그려졌지요.)




이건 정말 코미디 같기도 하고 비극 같기도 한 어이없는 사고였습니다.  제대로 된 지휘관의 기본 중 기본이 지형 숙지였는데, 메데진 언덕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점하고도 그런 도랑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영국군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 지휘부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사고로 큰 낭패를 당했을 경우, 아무리 창피하더라도 물러서서 재정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페인과 앤슨은 굴하지 않고 그대로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제대로 된 공격을 했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컸는데, 그렇게 엉망진창인 상태로 보병 방진을 공격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습니다.  영국군 기병대는 거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보기 흉하게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군이 이 틈을 타 진격을 재개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메데진 언덕에는 영국군과 스페인군 보병 사단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영국제 포탄이 계속 날아왔습니다.  게다가 이때 즈음엔 다른 방면에서의 프랑스군도 다 패퇴한 상태라는 소식이 전해졌으므로, 루팽과 빌라트도 영국군 기병대가 박살이 난 틈을 타 재빨리 후퇴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탈라베라 전투의 실질적인 마무리였습니다.



(영국 화가인 William Heath가 그린 탈라베라 전투입니다.  진 쪽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습니다.)




전투 과정은 길고 잡다했습니다만,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영국군이 스페인군과 연합하여 스페인 내부로의 침공길에 나섰는데, 그를 막으러 온 프랑스군과 탈라베라에서 마주치자 정작 공격한 측은 프랑스군이었고 영국-스페인군은 방어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공격이 좌절된 것이 결과였지요.  공격했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곧 패배일까요 ?


빅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세 번 공격하여 다 실패했지만, 한 번 더 들이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도 컸으나 영국군도 꽤 큰 피해를 입었고, 조제프와 주르당의 약 5000 규모의 예비대는 아직 총 한 방 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제프와 주르당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세 번이나 두드렸는데 안 열리는 문은 네 번 두드린다고 열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남의 집 문 따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워두고 온 마드리드의 본진이 베네가스에게 털리게 생긴 상황이었으니, 마음이 조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조제프는 주르당의 조언대로 철수를 명령했고,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도 그 명령에 복종하여 28일 밤부터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탈라베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 노릇을 하던 빅토르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찌나 분통이 터졌는지 아무 대책없이 철수를 거부하고 29일 새벽 3시까지 그 자리를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전체 프랑스군의 2/3가 다 철수하는데 그의 제1 군단 혼자 남아있다가는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조제프와 주르당에 대한 욕설을 지껄이면서 그도 결국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 뒤에도 조제프와 주르당만 없었다면 프랑스군이 4번째 공격에서 마침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당시 전투에서의 승리란 누가 더 많은 적을 죽였는가가 아니라 누가 물러났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거든요.  영국군은 약 6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7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습니다.  전체 병력 대비 사상자 비율로 보면 영국군 측이 더 높은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간 의아한 것은 별로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스페인군도 1천2백이나 되는 사상자를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쿠에스타는 영국군이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스페인군에는 사상자가 거의 없다고 하면 스페인군의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상자를 많이 낸 것은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다는 증거로서 당시 지휘관에게 일종의 영광처럼 여겨졌습니다.  물론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 전투의 승자는 분명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건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전투를 치르는 것은 그저 지휘관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어 도시를 탈환한다든지 적의 항복을 받아낸다든지 하는 승리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탈라베라 전투는 쓰라린 희생만 있었을 뿐,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열매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드리드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과 합류하는 것이 정상적인 작전 흐름이었을텐데, 영국군은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  영국군이거든요 !  산더미 같은 염장쇠고기와 럼주가 함께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런 고기통 술통은 옮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웰슬리가 이렇게 보급품 문제로 꾸물거린 것이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웰슬리는 이때까지도 북쪽에서 술트 원수가 약 3만명 규모로 충원된 제2 군단을 끌고 자신의 후방을 끊기 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3일 뒤인 8월 1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웰슬리는 처음에 술트의 제2 군단 규모가 약 1만5천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추가로 전달된 정보에 의해 병력 규모가 3만에 달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그의 결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는 마드리드로의 진격을 재빨리 포기하고 타호 강을 따라 포르투갈 국경 너머로 후퇴해버렸습니다.  웰슬리에게는 포르투갈로부터의 보급선이 차단될 경우 발생할 문제가 극복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웰슬리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예비 탄약과 보급 물자 대부분은 물론, 탈라베라 전투에서 노획했던 십여 문의 프랑스군 대포도 모두 버리고 허둥지둥 퇴각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었다면 이렇게 빅토르-세바스티아니 군단들에 이어 술트의 군단을 각개격파할 기회가 생긴 것에 매우 기뻐하며 그의 군을 오히려 북쪽으로 진격시켜 술트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탈라베라에서 철수한 프랑스군은 원래의 철수 목적을 매우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은 빈정이 상할대로 상한 빅토르에게 뒤에 남아 웰슬리와 쿠에스타의 연합군을 감시하는 한직을 주고는,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과 함께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을 상대하러 달려갔습니다.  이들은 8월 11일, 마침내 톨레도(Toledo) 인근 알모나시드(Almonacid) 전투에서 베네가스와 만나 매우 쉽게 라 만차 군을 격파하고, 마드리드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입니다.  이 분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역할을 더 많이 했고, 사실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알모나시드 전투에서의 승리가 이 양반의 가장 큰 승리일 것입니다.  이 분은 안달루시아 침공 이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사령부를 차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혹자는 그가 알함브라 궁전의 일부를 파괴한 것을 비난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황폐화시켜놓은 알함브라를 다시 복원시킨 것이 그였다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탈라베라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2만의 영국군이 무려 4만이 넘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거의 단독으로 버텨내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후퇴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지엽적이고 전술적인 승리일 뿐, 전략적으로는 프랑스군이 모든 목표를 달성한 프랑스 측의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영국군의 스페인 침공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처럼 분산된 스페인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11월 마드리드 인근 오카냐(Ocana)의 전투에서 술트가 4만5천 규모의 스페인군을 완파한 것이 매우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이 전투 결과 스페인 중부를 완전히 장악한 프랑스군은 바일렌 전투 이후 감히 넘보지 못하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침공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웰슬리의 영국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웰슬리는 스페인 측이 '오기만 하면 식량까지 모두 공급할테니 일단 오시라'고 여러차례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 다음해인 1810년 2월말까지도 포르투갈 국경을 절대 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탈라베라에서 보니 스페인군은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더라, 그들의 협력을 기대하고 스페인으로 진격했다가는 큰일 나겠더라'는 입장을 고수했지요.  그게 꼭 틀린 평가는 아닐지 몰라도, 영국군이 스페인에게 있어 그다지 좋은 연합군이 아니었던 점은 확실했습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탈라베라 전투는 웰슬리 본인에게는 무척 뜻깊은 승리였습니다.  어쨌거나 마침내 스페인에 진격하여 프랑스 2개 군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어 경의 코로나 전투 이후 침체되었던 영국 육군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약 1달 뒤인 8월 26일, 마침내 꿈꾸던 그대로 귀족이 되어 웰링턴 자작(Viscount Wellington of Talavera and of Wellington)이 되었습니다.  약 3년 후인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드리드를 탈환한 그는 웰링턴 백작(Earl of Wellington)이 됩니다.



* 사족 :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세바스티아니 장군과의 관계는 아래 편을 참조...


http://nasica1.tistory.com/30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block 2018.04.01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탈라베라전투가 드디어 끝났군요. 후에 줄줄이 벌어질 전투에 비하면 소규모이지만 대혁명이후 유럽대륙에서 대규모 야전을 치러본 전력이 없는 영국군으로선 그나마 여러가지 면에서 좋은 경험이었겠지요?. 방어전문 장군이지만 웨즐리같은 상승장군도 건졌고 훈련만 열심히 했던 영국육군이 그나마 전투다운 전투도 치렀으니 말이죠. 어째든 탈라베라전투의 독후감을 한마디로 하면 "결과가 뭐지?" 이런 느낌이랄까?..

  2. 유애경 2018.04.02 0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상화의 세바스티아니 장군,어디서 본듯한 얼굴이다 싶어서 생각해보니 뮈라 원수랑 닮은것 같네요...(저한테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알함브라 궁전을 파괴하면서 한편으론 황폐해진 궁전을 복원시켰으니 칭찬(?)을 해줘야 하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보고 가요~~

  3. TheK의 추천영화 2018.04.02 0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글이 착착 감기네요.
    자주 와서 좋은 글 많이 읽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석총 2018.04.02 0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메이로에선 공작+원수가 되죠 웰링턴으로 한이유가 웰슬리와 모닝턴을 합친거랍니다.

  5. 수비니우스 2018.04.02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그런데 영국군 지휘부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
    동서남북 어디나 사람 사는데는 비슷비슷하군요...

  6. reinhardt100 2018.04.02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즐리가 도박을 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보급문제이기도 했지만 웰즐리마저 패하면 대륙 원정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는 게 더 큰 이유이긴 합니다. 무어-웰즐리가 연속 실패한다고 가정한다면 비전투손실만도 최소 수만 단위인데 하노버등의 병력충원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같은 내부 자원을 본국의 반전 및 러다이트 분위기 제어에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조건적인 협상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미앵조약이 그랬고요.

    다만, 안달루시아 침공을 선택했다는 것은 프랑스군으로써도 패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에스파냐 주력군을 격파한 후 바다호스의 방어선이 완비되지 않았던 영국군을 공격하는게 더 효율적이었으니까요. 다만, 여기서 문제는 보급이 문제란게 걸립니다만.

  7. 정암 2018.04.03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페인 전역 관련 글이 부족해서 늘 궁금했는데 요즘 감사히 즐겁게 글 읽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저 알함브라궁전 장식들은 사람들이 일일히 손으로 깎고 새긴건가요?
    아님 현대에 와서 기계장비로 복원한건가요?
    전자라면 후덜덜하네요;;;;
    저런 정교한 문양이 몇백년이 지나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는게 놀랍고요 @.@

  8. 카를대공 2018.04.03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 쪽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습니다.

    이 멘트 보고 깨달았는데 그동안은 확실히 프랑스측에서 그린 전투 기록화가 많았군요.
    그말인즉슨 이제부턴 슬슬 프랑스 아닌 국가에서 그린 그림이 많아지겠네요.

  9. 카를대공 2018.04.03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라망카 전투 하니 제가 재밌게 본 브레이킹 배드라는 미드가 떠오르네요.
    거기 살라망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워낙 유명한 미드라 이름 정도는 들어 보셨을텐데 강추 합니다.

  10. 줄리안 2018.06.01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체 샤프는 이런 상황에서 라이플 경보병 대위가 프랑스군의 이글을 탈환했다는 것인지...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알함브라 궁전이었는데, 실제로 본 알함브라는 그 기대치를 100%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알함브라는 약 700년 간 이슬람의 통치를 받았던 스페인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인데, 그 이름은 아랍어인 알-함라(Al-Ḥamra), 영어로 직역하면 The Red 정도로 번역됩니다.  이 궁전은 그냥 연한 황갈색이고, 주변 토양이 붉기는 하지만 이름의 기원은 이 요새를 약 9세기 경 이 장소에 맨 처음 세운 아랍 족장의 별명이 알-함라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알함브라는 10년 20년 사이에 지어진 하나의 건물이 아니고, 여러 채의 궁전과 요새, 정원이 수세기에 9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어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더 좋은 다른 글들이 많을 것이니, 여기서는 두어 가지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랍식 궁전에 분수와 오렌지 나무가 많은 것은, 이슬람 믿음에 '천국에는 샘과 미녀와 과실이 열리는 나무들이 있다'라는 말 때문에 그렇답니다.  정말 지상에 만들어 놓은 낙원이지요.)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슬람 통치 기간인 8세기~15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아랍인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정복자는 소수였고, 피지배인인 기존 스페인 주민들은 여전히 그대로 살고 있었지요.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고, 또 그대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은 세금만 내면 정복민들이 무슨 종교를 가지든 용납해주는, 꽤 너그러운 종교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슬람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면세 혜택을 줄이기 위해 개종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뜻 밖의 혜택을 받은 일파가 바로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원수들'이라는 인식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신봉하던 유럽 사회에서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었는데, 이슬람이 장악한 스페인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비야나 그라나다 등 이슬람 주요 거점 도시를 가면 꼭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거리가 있고, 세고비아 같은 도시는 유태인들 덕분에 흥하다가 기독교 세력이 다시 세고비아를 탈환한 뒤 유태인 사회가 붕괴되면서 도시 전체가 경제적 활력을 잃기도 했습니다.





(알함브라는 이렇게 정원, 요새, 아랍 궁전, 카톨릭 수도원, 그리고 르네상스식으로 새로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 등이 어우러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그 중의 꽃은 물론 아랍식 궁전인 나스르 궁전입니다.)




정복자 아랍인들이 계속 본국인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활발히 내왕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래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원정을 보냈던 아랍 왕조도 본국에서의 정변으로 교체되었고,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도 얼마가지 않아 독자적 왕국을 세우고 칼리프를 선언하면서 오히려 모로코 본국과는 경쟁 관계에 접어 들었습니다.  스페인의 코르도바 왕조의 왕족들도 자신들의 고향이 아라비아나 북아프리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간 스페인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자신들의 고향을 스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왕조에 충성하던 이슬람 교인들도 다 아랍 혈통은 아니었고, 그 중 상당수는 스페인 혈통의 이슬람인이었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이 700년 넘게, 반올림해서 천년간 스페인을 지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슬람 세력끼리의 전쟁도 많았고,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전쟁도 많았으며, 이슬람과 기독교가 합세하여 다른 이슬람 또는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일도 많았습니다.  가령 스페인의 전설적 영웅 엘 시드(El Cid)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기독교 왕을 위해 싸우다가 정치적으로 불리해지자 사라고사의 이슬람 왕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이슬람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용병이 될 정도였지요.  


기독교 세력이 진행한 스페인 재정복 전쟁, 즉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이슬람 세력의 분열 덕분에 확실한 성과를 차곡차곡 쌓았고, 13세기가 되면 어느덧 남부 그라나다 왕국을 빼고는 이베리아 반도는 대부분 기독교 세력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정복된 영토에서 차출할 수 있는 병력과 자원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라나다 왕국, 정확하게는 그라나다 토후국(Emirate of Granada)의 운명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남쪽에 찌그러진 그라나다 왕국에게, 저렇게 커다란 키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1482년부터 10년 간 이어진 그라나다 전쟁의 결과, 이슬람 에미르(Emir)인 무함마드 12세(Muhammad XII)는 알함브라 궁전을 포함한 그라나다 왕국 전체를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에게 넘기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걸린 67개 항복 조건 중 주요 내용은, 이슬람 교인들은 계속 그 종교와 사유 재산을 유지할 수 있고, 기존의 법과 질서에 따른 보호를 받게 되며, 또 원할 경우 10%의 통행세를 내면 재산을 모두 가지고 북아프리카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도, 강요에 의해 다시 기독교로 개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무함마드 12세 등 왕족들에게는 그라나다 바로 남쪽의 네바다 산맥 너머 지중해 인근 지역에 적절한 영지가 주어져 거기서 살게 되었지요.





(무함마드 12세가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에게 항복하는 장면입니다.  배경에 알함브라 궁전이 보입니다.)




무함마드 12세는 최후까지 항전할 용기는 없었던 망한 나라의 군주로서 용기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확실히 대단한 여장부였던 모양입니다.  원래 당시 항복할 때의 의례적 절차에 따르면, 패자는 승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항복하는 도시의 열쇠를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 12세의 어머니가 '절대 그런 치욕만은 참을 수 없다'라고 강경하게 버틴 덕분에 무함마드 12세는 그냥 열쇠만 바치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레온(Leon)의 주교가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로 내려옵니다.  또 당시 현장에는 인도로의 서쪽 항해 계획에 대해 승인을 받으려 이사벨라 여왕을 쫓아다니던 콜럼부스도 있었다고 합니다.  


알함브라의 항복에 얽힌 이야기 그 다음은 전설입니다.  무함마드 12세가 그에게 배정된 영지로 식솔들과 함께 그라나다 남쪽으로 넘어가는 어느 고개 정상에 이르자, 무함마드 12세는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두번 다시 못 볼, 그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그렇게 그의 눈에 들어온 궁전과 그라나다 시의 애틋한 모습에 그는 끝내 탄식을 뱉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장부이던 그의 어머니가, 요즘 같으면 남녀 성차별이라고 지탄받을 그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네가 남자답게 지키지 못한 것을 돌아다 보며 이젠 여자처럼 우는거냐 ?"







무함마드 12세가 이렇게 알함브라를 돌아본 고갯길은 Suspiro del Moro (무어인의 탄식)이라는 로맨틱한 이름이 붙였졌습니다.  이번에 알함브라에 갈 때, 일부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며 그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냥 도로 위의 한 표지판만 있더군요.  차를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고갯길에서 일부러 천천히 차를 몰며 바라다 보았지만 시야에 알함브라가 분명히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아쉽더군요.






이 무함마드 12세는 한동안 네바다 산맥 남쪽에서 살다가, 결국 당시 모로코를 통치하던 마라니드 왕조에게 탄원한 뒤 모로코로 넘어가 지금도 관광도시로 유명한 페스(Fes)에서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약 100년 뒤, 그의 자손을 페스에서 만난 어떤 스페인 여행가는 그 자손들은 빈곤 속에 살고 있더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쓸쓸한 전설 속에 탈환된 알함브라 궁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나 세비야의 알카사르 등 이슬람 궁전들을 접한 스페인 군주들은 이슬람 건축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은 이슬람 양식으로 자신의 궁정을 장식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발전된 이슬람 양식을 무데하르(Mudéjar) 양식이라고 합니다.  원래 무데하르는 아랍어로 '길들여진'이라는 뜻인데, 이슬람 축출 이후로도 스페인에 남아 이슬람 신앙을 유지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 매력에 흠뻑 빠진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궁전이 되었고, 그들은 아랍 양식을 살리면서도 일부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보수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 벽에 '알라 외에 승자는 없다' 등 근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볼 때 불온한 글귀가 벽면에 새겨진 방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그대로 놓아두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아랍어를 읽을 수 없었으니 상관없을 수도 있었겠네요.  콜럼버스가 마침내 신대륙으로의 항해를 승인 받은 것도 알함브라 궁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데하르 양식이 발전한 것은 대항해 시대로 스페인에 금은이 쏟아져 들어올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스페인의 국운이 점점 몰락하면서, 옛 이슬람 왕궁들은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고, 알함브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는 폐허가 되어 그 아름다운 파티오(patio, 건물로 둘러싸인 안마당)들에는 온갖 쓰레기더미가 가득 쌓이게 되었고, 노숙자들의 쉼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알함브라의 벽 아래에서의 판당고' 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작가는 나폴레옹 직속의 지도 제작가이자 화가 바클레르-달브 Bacler d’Albe 입니다.  아마 달브가 이때는 세바스티아니의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나 봅니다.)




그런 알함브라가 다시 빛을 본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덕분이었습니다.  1810년 1월 28일, 본격적으로 스페인을 침공하던 프랑스군 중 일부는 마침내 그라나다 시까지 몰아닥쳤고, 그라나다 시는 2년간 프랑스군 점령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프랑스군 부대를 지휘하던 것은 오라스 세바스티아니(Horace Sebastiani) 장군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원래 오스만 투르크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꽤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외교관으로서는 능력있는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군 지휘관으로서는 영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교양있는 외교관에 가까웠던 이 사람이 그라나다에 온 것이 알함브라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점령군 지휘관이 아니었지만, 황폐화되어있던 알함브라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대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알함브라를 프랑스군 사령부로 삼고 내부를 청소했으며, 알함브라의 일부인 알카사바(Alcazaba) 요새를 보수했습니다.  그렇다고 세바스티아니가 문화재를 보존하려는 문화 애호가만은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를 군사 요새화하기 위해 일부 건물을 부수고 개조하기도 했으니까요.  게다가 알함브라 내에 자리잡고 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convento de San Francisco)은 그 내부 장식물은 물론 청동으로 된 종들까지 모두 징발당하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알함브라 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나스르 궁전(Palacios Nazaries)은 완전히 보수되어 말끔히 청소가 되어, 다시 그 분수에는 물이 흘렀고 정원에는 꽃이 심겨졌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이 근 200년 만에 다시 아름다움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에 좋은 일만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1812년 9월, 전세 악화로 프랑스군이 그라나다에서 철수하게 되자, 이들은 방어 진지를 고스란히 스페인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면서 알함브라의 일부 탑을 폭파한 것입니다.  바로 다음날 그라나다에 진입한 스페인군은 알함브라 궁전 내의 감옥에 갇혔던 스페인 포로들을 석방했고, 대신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 병사들을 쳐넣었습니다.  이 스페인군의 지휘관인 바예스테로스(Francisco Ballesteros) 장군은 이 프랑스군 포로들에게 노역을 시켜 프랑스군이 폭파한 잔해를 치우게 했습니다.  이후 알함브라는 과거 스페인의 황금 시대를 상기시키는 역사적 현장으로 관심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인과응보였는지 역사의 블랙 유머인지 모르겠으나, 징발당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의 종들은 1818년 프랑스군으로부터 노획했던 24파운드짜리 대포를 녹여서 새로 주조되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를 훼손했다고 비난하지만, 19세기에 알함브라를 여행하며 그 존재와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던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은 프랑스군 덕분에 알함브라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썼던 것입니다.





(포도주의 탑 Torre del vino 꼭대기에서 바라본 네바다 산맥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터도 아주 좋더군요.  부동산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정말 아름다왔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은 아닙니다.  오른쪽의 창문이 많은 유럽식 건물은 후세에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입니다.  나머지 왼쪽에서 중앙,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긴 건물이 나스르 궁전입니다.)



Source :  http://revistadehistoria.es/la-alhambra-tras-la-ocupacion-napoleonica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XII_of_Granada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Granada_(1491)

https://en.wikipedia.org/wiki/Alhambra

https://en.wikipedia.org/wiki/Granada_War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최홍락 2017.01.08 2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태인 얘기가 나오길래 알함브라 칙령 얘기도 나오겠거니 했는데 안나오네요.

  2. 재영 2017.01.09 1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를로스5세라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를 일컫는가요? 당대의 금수저인데 뭘 못했겠습니까만은 마지막 사진에 그 양반이 증축한 건물을 보니 솔직히 기존 궁전과는 형태가 아니라 부피(볼륨감)에서 약간 부조화스런것 같습니다. 물론 개인간에 견해차는 있을 수 있겠죠...^^;;

    • 박종필 2017.01.09 2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를 5세가 증축한 다음에 후회했다고 하네요.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던 것을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바꿔버렸네' 하고 후회했다네요.

    • 최홍락 2017.01.10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증축한 부분(카를 5세 궁전)조차 2014년에 갔을때는 보존 공사 중이라 내부가 대부분 아시바로 도배가 되어 있어 더 흉물이 되버린 듯합니다.

  3. 박종필 2017.01.09 2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때 인류 문명권 중 가장 발달된 문명을 자랑했고, 저렇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긴 이슬람권이 요즘 불안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것을 보면 참 역사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고민스러워집니다. ㅠㅠㅠ
    (물론 이슬람권도 뭉뚱그려 하나로 통칭할 순 없겠지만요.)

  4. 석공 2017.01.10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연스럽게 나폴레옹 이야기로 넘어가서~~ 살짝 기대를 했습니다. ^^*

  5. 프로이센군 2017.01.13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살면서 꼭 가보고 싶은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알함브라 궁전입니다! 이베리아의 이슬람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궁전에서 옛 무어인들의 영광과 몰락을 모두 느껴보고 싶네요. 햇빛을 받으면 궁전이 붉게 물들어 상당히 아름답다는데 Nasica님, 정말 그렇던가요??

  6. 청명 2017.05.09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작년 겨울에 가족여행으로 갔던 알함브라 궁의
    아름답던 모습이 떠오르네요ᆞ
    저흰 단체 관광이라 아침 일찍 갔었는데
    키높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우리 일행의 길다란 그림자가 펼쳐진 장면이나
    마악 동이 틀 무렵이라 아들들과 성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발그래한 얼굴로 나왔던거ᆞᆞ
    후궁들의 방 천장에 에머랄드색으로 빛나던 돌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ᆞ
    나시카님 덕분에 알함브라 궁과 무어인들의
    연원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짧은 스페인 여행기

잡상 2017. 1. 6. 00:16 Posted by nasica

어제 돌아왔습니다.  제가 먹고 마시고 돈 쓰고 다녔다고 자랑하는 여행기를 재미있게 보실 분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아, 스페인 여행기를 최대한 짧게 정리해서 올립니다.  굳이 올리는 이유는 스페인 여행하실 분들 참고하시라는 것도 있고, 먼 훗날 저도 과거 회상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저희 집의 브레인은 (다른 대부분의 집도 그러리라 믿습니다만) 와이프이고, 모든 계획은 와이프가 짰습니다.


12/24  마드리드 도착

12/25  세고비아(로마 수도교 있는 곳)으로 당일치기 버스 여행, 저녁에 마드리드로 귀환

12/26  마드리드에서 아침에 고속열차로 출발, 점심 경에 세비야 도착, 알카사르(Alcazar) 궁전 구경

12/27  세비야 대성당 구경, 에스파냐 광장(일명 김태희 광장) 구경

12/28  렌트카로 카디즈 출발, 점심 먹고 잠깐 구경 후 다시 론다로 출발, 저녁 경에 도착, 누에보 다리 구경

12/29  누에보 다리 다시 구경, 렌트카로 출발, 그라나다 도착, 렌트카 반납

12/30  그라나다 대성당 구경 후 알함브라 궁전 구경, 밤 비행기로 바르셀로나 도착

12/31  점심 경에 일어나 FC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캄프누 구경, 이어서 카사 바트요 구경

1/1  유로자전거 나라 안내팀에 끼어 가우디 투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구엘 공원 관람)

1/2  바르셀로나 근교의 몬세라트 수도원 당일치기 철도 여행, 저녁에 바르셀로나 귀환

1/3  바르셀로나 시내 구경 뒤 귀국행 비행기


전체 평을 하자면, 괜찮았습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카디즈, 그리고 몬세라트는 다소 실망스러웠고, 나머지는 다 괜찮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고비아와 세비야, 그라나다는 매우 좋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말 멋졌던 3가지 순간을 꼽으라면 다음 3가지를 꼽겠습니다.


- 세고비아 로마 수도교 언덕에 올라 아래에 펼쳐진 평원과 수도교를 내려다보던 순간

-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의 "처녀들의 파티오"(Patio de las Doncellas)에 처음 들어서던 순간

-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의 "포도주의 탑"(Torre del Vino) 꼭대기에 올라 저 멀리 네바다 산맥이 눈에 들어오던 순간


이번 여행에서 구경을 하면서 몇가지 느끼거나 배우게 된 점이 있습니다.  


- 스페인 사람들이 아침 식사로 흔히 말하듯이 츄러스와 핫초코를 먹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토스트와 커피를 먹는답니다.

-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의 대로변에는 제가 어릴 적 서울 달동네 뒷골목처럼 개똥이 많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 스페인의 유명 쌀 요리인 빠에야는 먹을 만 하긴 합니다만, 매우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쌀 요리의 최고봉은 게살 볶음밥입니다.

-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 나오기 전에 나오는 빵은 '안먹겠다'라고 거절하면 빼주는데, 그러지 않으면 빵 1개당 1유로(약 1260원)이 부과됩니다.  

- 결국 스페인에서 볼 만한 것들은 대부분 아랍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스페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은 제가 보기엔 그냥 그랬습니다.

- 스페인에서는 가로수로 오렌지 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는데, 이는 과일 열리는 나무를 좋아하는 아랍인들이 오렌지 향기를 좋아해서 스페인에 널리 퍼뜨린 것이라고 합니다.  

- 스페인은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아서, 거리의 오렌지나무에는 잎사귀도 푸르고 오렌지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잔디도 파랗습니다.

- 반면, 여름에 스페인 여행은 안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겨울에도 저런데, 여름에는 정말 사람이 튀겨질 것 같습니다.



이런 간단한 점들 외에, 별도로 정리하고 싶은 내용이 몇가지 있습니다.  이건 시간이 닿는 대로, 다음 4회에 걸쳐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1)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새로 만들어진 '고난의 벽면'에서 본 빌라도의 조각

2) 세비야 에스파냐 광장의 벽면에서 본 마드리드, 히로나를 대표하는 타일 벽화

3) 알함브라 궁전에 얽힌 무함마드 12세의 눈물 이야기와 프랑스군 이야기 

4) 카탈루냐의 독립 운동



나머지는 그냥 사진으로 때우겠습니다.  







(세비야 대성당의 뒷마당에서 본 벽면입니다.  겨울인데도 오렌지가 주렁주렁...)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의 '처녀들의 파티오'입니다.  이 궁전에서 올랜도 블룸 주연의 '킹덤오브헤븐' 영화 중 예루살렘 궁정 장면을 찍었답니다.  원래는 여기 바닥이 대리석으로 덮혀 있었는데, 나중에 역사학적으로 조사를 해보니 그건 나중에 바뀐 것이고 원래 알카사르의 바닥은 대리석이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원상 복구한답시고 대리석을 걷어냈는데,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영화 촬영을 위해 요청해서 결국 다시 대리석을 깔았답니다. )







(알카사르 궁전 내의 '대사들의 방'에 걸린 초상화 중, 제가 알아볼만 한 얼굴이 2명 있더군요.  하나는 희대의 혼군 페르난도 7세이고, 그건 이상할 바가 없으나, 나머지 하나는 뜻 밖에도 사진에 보이는 프랑스 오를레앙 왕가의 왕 루이 필립입니다.  왜 이 사람이 스페인 왕궁에 사진이 걸려 있는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 아들과 스페인 이사벨라 2세의 여동생이 결혼을 한 인연이 있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나중에 비교해보니 프랑스에 있는 루이 필립의 잘 알려진 초상화와는 자세나 배경 등이 약간 다릅니다.)
 




(알함브라 내의 나스르 궁전의 아름다운 천정과 벽면 장식입니다.  정말 감탄이 나왔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의 일부인, 알카사바 요새의 한 건물인 토레 데 비노(Torre de vino), 즉 포도주의 탑에 바라본 네바다 산맥(Sierra Nevada)입니다.  저는 미국 말고 스페인에도 네바다 산맥이 있는 줄 여기서 처음 알았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의 정원인, 헤네랄리페(Generalife) 중 일부입니다.  저는 제네럴 라이프를 그냥 스페인식으로 읽은 것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고 원래 아랍어로 '건축가의 정원'이라는 뜻이라는군요.)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내부입니다.  저는 가우디 가우디 하면서 떠받느는 것을 잘 이해를 못 합니다만, 이 건물은 정말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건물에 대한 혹평도 많더군요.)





(빠에야 Paella 입니다.  이탈리아 리조또와는 달리 끈기가 없는 길쭉한 쌀로 만듭니다.  너무 짜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소금은 조금만'이라는 스페인어도 배워갔습니다만, 의외로 그런 말 안 해도 별로 안 짜던데요 ?)




(명성이 자자한 염장 대구 바칼라오 bacalao 요리입니다.  그런데 먹어보니 의외로 역시 안 짜고 부드러운 것이... 그냥 생대구로 만든 것처럼 느껴지던데요 ?  우리 가족이 평소에 짜게 먹는 것일까요 ?  맛있었습니다만 가격은 18유로가 넘어서... 비쌌습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술안주 요리, 타파스입니다.  Tapa라는 것은 원래 와인잔이나 맥주잔에 먼지를 막기 위해 씌워두던 작은 접시를 뜻하는데, 거기에 안주를 조금 얹어 팔았던 것에서 타파스 요리가 발달했다고 합니다.  맨 아래쪽의 생선 같은 것은 소금에 절인 생 앤초비인데, 의외로 비린내도 별로 없고 괜찮았습니다.  비린내는 우리나라 멸치볶음 정도였어요.)





(이건 나름 호화롭게 먹은 아침식사였습니다.  저 빵위에 발린 주황색 페이스트는... 뭔가 토마토로 만든 것 같기는 한데 아직도 정확한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오른쪽 빵 위에 얹힌 것은 유명한 스페인의 생 햄인 하몽입니다.)






(그라나다의 라만차라는 바에서 점심 대신 먹은 타파스 요리입니다.  오른쪽 요리는 염장 대구를 익히지 않고 삶은 감자, 양파와 함께 내놓은 것인데, 비린내 전혀 없이 꽤 맛있었습니다.)






(이 우울한 기내식은 바르셀로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환승해서 돌아올 때 KLM 항공에서 준 저녁 식사입니다.  저는 제가 고려항공 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또 의외로 맛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게일 2017.01.06 0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물들이 예쁘네요 저런건물에서 살면살맛날텐데요ㅋㅋ

  2. mip 2017.01.06 0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고려항공이라고 해도 무방한 비주얼이었네요 ㅋㅋㅋㅋ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셨다니 다행입니다

  3. 정암 2017.01.06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알함브라 나스르 궁전의 천장과 벽면 장식은 과연 저걸 사람이 했을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하죠,,,
    2. 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보고나서 그제야 가우디의 위대함을 깨달았는데 요즘 짓는 부분은 옛날처럼 돌을 하나하나 다듬고 쌓는 것이 아닌
    철골과 콘크리트 방식이어서 좀 실망했습니다.
    그렇게 지으면서도 앞으로 완공에 몇십년 더 걸릴거라고 떠벌리는게 웬지 기획된 상술 같은 느낌이 드네요,,
    3. 저도 빠에야는 별로더군요. 하지만 타파스 종류는 기억이 계속 나고 음식은 전반적으로 괜챦죠
    4. 자랑질도 좋으니 여행후기 계속 올려주세요~^^


  4. 규민이 2017.01.06 16: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예전에 갔었던 코스와 거의 비슷하게 가셨었네요.
    2010년에 큰맘 먹고 와이프랑 2주간 스페인을 일주 했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1박 - 갑작스런 마드리드 공항 파업으로 ^^;;) - 마드리드 (2박) & 톨레도 - 세비야 (2박) - 론다 (1박) - 네르하 (1박) - 그라나다 (2박) - 바르셀로나 (4박)
    지금도 그 때 여행 얘기를 가끔 합니다.
    여행이란게 좋은게 불현듯 생활 속에 툭 튀어 나오거든요. 좋았던 기억, 힘들었던 순간들이 지금은 모두 추억으로 남아 있네요.
    여행 사진이 더 있으시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5. 민족의 십일조 2017.01.06 16: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동양인이라고 무시당하거나 불쾌한 경험은 안하셨는지요? 저희 회사 여자 동료 분은 연말에 스페인 갔었는데 그런 경험을 했다고 하네요, 서방인보다 빨리 요청한 bill지를 더 늦게 준다든지? 영어로 질문하니까 못 알아듣는 척 한다든지? 영어로 질문했는데 스페인어로 답변해 줬다든지? 이 분은 다시 스페인은 안갈거라고 합니다. 반면 포루투갈도 갔었는데 거기는 친절했다고 하네요.

    • nasica 2017.01.07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행히 제가 경험한 스페인 사람들은 다 친절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나 이상한 사람들은 다 있기 마련이지요.

  6. 출장중년 2017.01.06 2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우디는 정말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가우디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더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빠에야는 정말 실망했습니다. 정말 맛없음. 차라리 게살 볶음밥이 100배 나음.

  7. 뱀장수 2017.01.07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렌시아 여자와 결혼해서 발렌시아와 한국을 오가며 사는 사람입니다.
    마눌님 친척중에 빠에야만 평생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빠에야에 있어선 다른 한국인들보다 조금 경험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뭐, 주인장님도 다 아실 내용입니다만.

    사실 발렌시아 자치주 외의 지역에서 빠에야 드시는 건 그닥 권할만한 것이 못되고요,
    그것도 잘 하는 집들('나무주걱 훈장' 받은...) 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평생 갈일없는 발렌시아 변두리에 있죠.
    (그런곳은 네비게이션에도 안뜨니 소개가 없으면 이방인은 아예 못찾아가죠)
    원래 발렌시아 파에야에 고기는 토끼고기나 닭고기만 들어갑니다. 쌀도 저렇게 퉁퉁 뿔어서 내지 않고요...
    그래서야 그냥 다른 아로스 요리와 다를바가 없지요.

    미각이라는게 사람마다 다 다른 법이지만, 저 또한 첫 빠에야를 발렌시아 외에서 먹은 기억이 있는지라
    괜히 구질구질 변명을 해 보았습니다. 스페인은 우리나라처럼 전주비빔밥을 경주에서 먹으나 전주에서 먹으나 똑같은
    맛이 나는 나라가 아니라서요, 발렌시아, 그것도 잘하는 집이 아니면 정말 수준 이하의 빠에야가 나옵니다.

    좋은글에 뻘리플달아서 죄송합니다. 여행기와 좋은 사진들 감사히 보았습니다^^

    • nasica 2017.01.07 16: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와 발렌시아 빠에야 부심이 느껴집니다 ㅋ 유로자전거나라 가이드분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먹은 빠에야 중 상당수는 그냥 '냉동 빠에야' 녹인 것이더군요. 그런 식당에 냉동 빠에야를 공급하는 업체가 많답니다.

  8. ian 2017.01.07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녀오셨군요. 저도 재작년 포르투갈과 스페인 다녀왔는데 스페인에선 나시카님과 거의 비슷한 코스로 다녀왔습니다. 조금 아쉬운건 스페인북부를 못 다녀온것이랑 포르투갈에서 체류가 좀 짧았다는거네요.
    이 글을 쓴것은 이제 다녀오셨으니 다시금 열심히 글을 써주십사하는 압력입니다 ㅎㅎ

  9. ryanH 2017.01.07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드리드 해군 박물관 가셨으면 좋았을텐데.. 볼거 많더군요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187514-d244281-Reviews-Naval_Museum-Madrid.html

  10. change 2017.01.10 0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생을 쌀과 함께, 밥이 곧 쌀인 우리에게 쌀요리가 아주 맛있는 일품요리가 되기엔 한계가 있을 듯 하기도 합니다. ㅎㅎ

  11. 야거 2017.01.10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극히 화려한 알함브라 보다 코르도바 사원이 가장 좋았습니다

  12. 도라에몽 2017.01.19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몽 맛있나요? 먹어보고싶다

  13. 찰리 2017.02.23 1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빵에 발라먹는 주황색 소스는 간 토마토와 올리브오일입니다. 투박한 스페인빵으로 만든 토스트에 올리브기름과 소금 뿌려 커피와 먹으면 참 맛있던데 다른 곳에선 볼 수가 없네요 .. 다음 블로그 때부터 참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