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놀랍게도 러시아군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네만 강을 따라 늘어선 여러 마을에 분산되어 숙영 중이었는데, 주로 사열과 분열 같은 제식 훈련만 죽어라고 했습니다.  장교들은 자기들끼리 무도회와 파티를 벌이며 시골 아가씨들과의 연애 모험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짜르 알렉산드르를 따라 빌나에 와있던 국무부 장관 쉬시코프(Aleksandr Semyonovich Shishkov)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치 적군이 수천 km 먼 곳에 떨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도 근심걱정이 없는 듯 했다.  심지어 적군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들어오지 않았다."

적군에 대한 소식은 커녕 아군인 러시아군으로부터도 아무 뉴스가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의 배치와 이동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노력도, 전쟁 발발시 어디로 진격해올지에 대한 예측 노력도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은 자기들이 주둔 중이던 그 일대 리투아니아 지역의 지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전략도 계획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긴 네만 강을 따라 뿔뿔이 분산 배치된 러시아군으로서는 만약 당장 내일이라도 프랑스군이 어느 한 곳에 집결하여 도하를 한다면 속수무책으로 돌파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이 이런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짜르 알렉산드르의 결정 장애와 오지랍이었습니다.   총사령관을 임명하지도 않고, 공격인지 수비인지도 분명히 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일임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닌 정말 어정쩡한 그의 태도 때문에 러시아군은 방향성을 잃고 뭘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가장 활발했던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참모 장교들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참모들이야말로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고 책임지는 것도 없이 그저 번쩍번쩍 화려한 군복만 차려 입은 군더더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 수록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머릿 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말이나 마구 던지는 법입니다.  그렇쟎아도 전략을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알렉산드르는 그런 아무말 대잔치 속에서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냉철한 머리와 뚝심을 가지고 전략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퓰(Karl Ludwig von Phull 혹은 Pfuel) 장군이었습니다.  이 분도 원래 프로이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 예나 전투에서 빌헬름 3세의 수석 참모로 있다가 프로이센의 참패 이후 러시아에서 살 길을 찾은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 중 하나였습니다.  비록 예나 전투에서 환상적인 참패를 빚어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전통 있는 프로이센군에서 국왕 직속 수석 참모를 할 정도였으니 실력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알렉산드르는 그에게 중장 계급을 주며 역시 자신의 참모진에 배속시켜 전략안을 짜게 했습니다.

 

(퓰 장군입니다.  러시아군이 그의 제안대로 후퇴를 시작하자 러시아군 내에서 그의 인기는 바닥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결국 모스크바까지 나폴레옹에게 함락되자, 군 내에서 저 프로이센놈을 쳐죽이라는 아우성이 터져나왔고, 결국 그는 스웨덴을 거쳐 영국까지 도망쳐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실 후퇴 작전 자체를 그의 공로(?)로 돌리는 것 자체도 여러가지 이견이 존재하는데, 1813년에 짜르 알렉산드르가 영국에 있던 퓰에게 보낸 편지에는 러시아군의 후퇴 전략을 짠 공로를 퓰에게 돌리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어이없게도 후퇴안이었습니다 !  나폴레옹과 총검을 맞대본 퓰의 눈에, 나폴레옹 쯤은 문제 없다고 큰 소리 쳐대는 러시아군은 절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정면 대결은 신속한 참패를 부를 뿐이라고 판단한 퓰은 과감한 후퇴로 프랑스군의 예봉을 누그러뜨린 뒤, 후방 깊숙한 곳 어딘가의 요새를 거점으로 프랑스군에게 반격하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후방 요새로의 후퇴만으로는 부족하며, 바그라티온의 제2 군을 측면에 남겨두었다가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의 주력인 바클레이의 제1 군을 쫓아 깊숙히 들어오면 그 후방을 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건 러시아 장교들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전략이었습니다.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거느린 러시아군이 (실제로는 러시아군이 더 적었습니다) 소중한 영토를 적에게 내주며 후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퓰이 제시하는 이유, 즉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평가는 러시아 장교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을 정하지 못하던 알렉산드르의 마음에는 일찌감치 이 전략이 꽤 솔깃하게 들렸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선진국 성공 사례였습니다.  바로 영국 웰링턴 공작이 포르투갈에서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을 이용한 초토화 전략으로 프랑스군의 백전노장 마세나를 물리쳤다는 소식은 러시아에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https://nasica1.tistory.com/210 참조)  이렇게 웰링턴이 코딱지만한 포르투갈에서도 후퇴 전략으로 성공했으니 드넓은 러시아에서는 당연히 성공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퓰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엇습니다.  무엇보다, 비록 후퇴라고는 해도 오만한 영국 귀족 웰링턴이 썼던 전략이라면 러시아군이 써도 체면이 상하는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퓰은 참모 전공자답게 세부적인 요새 구축 후보지도 뽑아놓고 있었습니다.  바로 드리사(Drissa, Drysa)였습니다.  퓰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드리사를 요새 구축 후보지로 뽑은 것은 그 곳이 빌나에서 후퇴할 때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그로 갈라지는 길 딱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군으로서는 만약 후퇴를 한다고 해도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그 이 두 도시를 모두 지킬 수 있는 곳까지만 후퇴해야 했는데, 드리사를 거점으로 방어선을 펼친다면 그 목적에 딱 맞는 위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퓰은 역시 세계적인 명장보다는 그냥 여러가지 안을 내놓는 참모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세운 전략은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 빈틈이 많았습니다.  일단 웰링턴이 포르투갈에서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으로 재미를 본 것은 포르투갈이 바다와 산맥으로 가로 막힌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처럼 드넓은 평원 지대에서 프랑스군을 요새로 저지해보겠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공성전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평화조약을 강요한다는 목표가 분명했던 나폴레옹은 드리사 요새에 부딪힐 경우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우회해서 모스크바를 들이쳤을 것입니다.  또 토헤스 베드하스 방어선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우수한 영국 공병대와 나라를 지키겠다는 포르투갈 주민들의 전폭적인 협조,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 정부의 풍부한 군자금 덕분이었습니다.  러시아군에게는 드리사에 갑자기 거창한 요새를 구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퓰의 작전 계획에 따라 1811년 말부터 드리사에는 대규모 토목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그 진척 상황은 매우 한심한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퓰의 후퇴안이나 바그라티온의 공격안이나, 모두 알렉산드르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는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계속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빨리 들이닥쳤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Karl_Ludwig_von_Phull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eksandr-Semyonovich-Shishkov
https://en.wikipedia.org/wiki/Ludwig_von_Wolzogen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ranken 2019.11.18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소전쟁 발발 직전하고 상황이 많이 비슷하네요. 당시 스탈린은 서방 및 각지의 스파이들이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단 정보를 보내옴에도 끝까지 히틀러는 미치지 않는 이상 양면전선을 열진 않을 거라고 굳게 신념을 지키는 바람에 소련군은 폴란드, 에스토니아 등 나치와의 협상으로 얻어낸 영토에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 못하고 어영부영한 상태서 바르바로사 작전당시 제대로 손 써보지도 못하고 쓸려나가죠.

    • nasica 2019.11.18 2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렉산드르의 경우가 좀더 어이없는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이 반드시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2. 푸른 2019.11.18 16: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번 글에서 기대를 하게 만들고는 첫 문장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ㅋㅋㅋㅋ

    나날이 글빨이 늘어나시네요ㅋㅋ

  3. 지나가던 2019.11.18 1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지랍->오지랖

  4. 루나미아 2019.11.18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기서 웰링턴이 생각치도 못한 기여를 ㅋㅋㅋ

  5. reinhardt100 2019.11.18 2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늦게 진격한 것이 문제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5월 중순에 바로 공격했으면 러시아 주력군을 스몰렌스크나 드라사에서 포착 후 섬멸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거든요.

    실제로 독소전쟁이나 러시아 원정 당시 소련이나 러시아측의 후퇴속도가 꽤나 느린 편이었죠. 물론 초토화작전 수행딱문에 그런게 있습니다만 특히 후자는 너무 느리다보니 오히려 나폴레옹의 판단을 흐리게 한 측면도 있습니다.

  6. 웃자웃어 2019.11.19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가 그렇다고 예비전력까지 총동원해 공세전략을 폈다간 80~90% 졌을 겁니다.

  7. 중2병 2019.11.20 0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정면승부 하자는 러시아 장교들은 200년 뒤
    유니클로 때려잡고 정면승부로 무역분쟁 하자는 분들이랑 겹쳐보이네요.

  8. 영국나치처칠 2019.11.20 0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의 결이 같은 자들 끼리는 사이좋게 지내는 법입니다.
    테베, 타타르, 프랑스남부(+ 나폴에옹가족 몰살하려던 코스시카놈들 이새귀들 히트러에게 걸렸으면 싸그리 몰살인데 운좋게도 나폴롱에게 걸려서), 일본우익 윤적윤아베토착

  9. 영국나치처칠 2019.11.20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일본은 이제와서 한국제품 불매운동한다고 하지만
    이제까지 현대자동차 일본국가적으로 1년에 10대 구매했고 ㅎㄷㄷㄷㄷㄷ
    스마트폰, 가전제품은 한국이 더 잘만드는데도 불매...
    D램도 한국이 전세계 석권하는데도 대만제품만 구해하고 한국제품 불매...
    도대체 무슨 한국제품을 이제부터 불매하겠다는 건지...

  10. 샤르빌 2019.11.20 2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대육군이랑 정면승부라니.. 정말 패기로라도 그랬다면 러시아 원정의 결과가 크게 바뀌었겠네요..

  11. 허허허 2019.11.24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보병들 짱 쎄지 않나요? 아일라우나 하일스베르크를 생각해보면, 정면대결 해도 꿀릴 게 없어 보이는데 다들 러시아군에게 승산이 없다고 보시는군요.

    러시아 군이 그래도 프러시아 군 같은 추태는 부린 적이 없는데, 싸움 제일 못 하는 프러시아 군의 장교가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상대가 될 수 없음.' 이런 말 하면 누가 안 열받나요. 저 멀리 폴란드까지 원정가서 나폴레옹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준 러시아 군인데,

    홈그라운드에서 카알 대공식 영혼의 맞짱 한 번 떴으면, 프랑스군이 이긴다 해도 서로 걸레짝이 되버려서 진격도 후퇴도 못 하고 둘 다 바닥을 뒹굴었을 것 같아요.


이미 1811년부터 러시아는 프랑스와 언제 한판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1812년 6월 경 러시아는 거의 1년 넘게 전쟁 준비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나폴레옹을 맞이할 러시아의 준비 상태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  한줄 요약하자면 머리 수만 따지면 프랑스군의 그랑다르메에 비해 그다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원래 1805년 당시 러시아의 징집 제도는 일종의 지역 차출제로서, 지역 농노들 500명 중에서 4명의 장정을 병정으로 차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차출된 운 나쁜 젊은이에게는 25년의 병역 의무가 주어졌는데, 당시엔 전화는 커녕 우편도 변변치 않았는데다 어차피 본인이나 가족이나 모두 문맹인 경우가 많아서 가족과 연락을 주고 받을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25년 간의 병역을 다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면 사실상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다 남남이 되어 있었고, 그걸 잘 아는 제대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마을에서 차출된 청년이 군대로 떠나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이 청년을 배웅했는데, 이건 사실상 일종의 장례식 같은 행사였다고 합니다.  아무도 이 청년이 살아서 가족에게 되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사정은 영국군도 비슷했습니다.  다만 영국군은 모병제라서 급여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는 점만 달랐지요.  여러 모로 영국군과 러시아군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댓글에 '궁금'님이 알려주신 러시아 징집 장정의 배웅 모습입니다.  분위기가 장례식인 이유가 다 있습니다.)

  



러시아는 아우스테를리츠에서의 뼈 아픈 참패 이후, 나폴레옹과의 긴 전쟁을 예감하고 징집율을 500명 중에서 5명으로 20% 증강시켰습니다.  그 결과, 1806년부터 1811년 사이 기간에 새로 징집된 러시아군 병사의 수는 50만 명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1811년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 했으나 아직 현역 복무에 적합한 나이와 신체 조건을 가진 제대 군인 약 6만을 재입대 시켰고, 1812년에는 당장 임박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징집률을 500명 중 7명으로 한시적으로 늘렸습니다.  덕분에 1807년 아일라우 전투 때는 러시아군 전체 숫자가 50만이 채 안되었으나, 1812년 9월 경에는 무려 90만이 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땅이 넓었고 사방에 적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1812년 5월 나폴레옹의 위협에 대적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에 집결한 러시아 야전군은 바클레이 드 톨리의 제1군 약 16만과 바그라티온의 제2 군 약 6만이 전부였습니다.  저 남쪽 오스트리아와의 접경 지대에는 토르마소프(Tormasov) 장군의 제3 군 약 5만이 있었고 후방에도 2개의 예비 군단 총 11만 정도가 대기하고 있긴 했습니다.  이런 지원부대까지 다 합하면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와 맞설 러시아군 야전군은 총 39만에 달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시겠지만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선 러시아 야전군은 크게 3개로서, 북쪽부터 바클레이, 바그라티온, 토르마소프가 각각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르마소프의 부대는 나머지 부대과 광활한 핀스크(Pinsk, 혹은 Pripet) 습지로 격리되어 있어서 사실상 협동 작전은 불가능했습니다.  애초에 토르마소프의 제3 군은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와 루마니아 쪽으로부터 직접 침공해올 것에 대비한 부대였습니다.)


(핀스크(Pinsk, 혹은 Pripet) 습지는 제1,2차 세계대전 때도 주요 장애물 역할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나찌 독일군은 이 지역에서 모조리 물을 빼고 독일 주민들을 대거 이동시켜 식민지화할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윗 그림은 19세기 화가 이반 쉬시키(Ivan Shishkin)이 그린 핀스크 습지의 풍경입니다.)



이 정도면 나폴레옹에게 일방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는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공세로 나갈 수도 있을 정도의 군세였지요.  게다가 당시 러시아 측은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의 군세를 실제보다 깎아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러시아로 침공해올 그랑다르메의 병력을 20~25만으로 보았고, 바그라티온은 20만, 베니히센은 19만 정도로 보았습니다.  러시아 측에서 가장 높게 평가한 숫자도 후방의 지원부대까지 다 합해서 35만을 넘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과연 네만 강을 건너 러시아로 진격해 들어간 나폴레옹 휘하의 병력이 몇 만인가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없긴 합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실제로 네만 강을 건넌 병력의 수를 대략 40만이라고는 하지만, 아마 당시 나폴레옹은 물론 그 누구도 실제로 몇 명이나 네만 강을 건넜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만 강 서안에 집결하여 최종 점검을 할 당시, 나폴레옹은 휘하 군단장들에게 "제발 솔직하게 각 예하 부대의 정확한 병력 숫자와 군수품 준비 상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라"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나폴레옹의 요구는 끝이 없었고 그에 비해 사람과 돈과 물자는 부족해서 도저히 매뉴얼과 명령서대로 전체 부대의 편성을 완벽하게 해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장군들은 그냥 휘하 부대원의 수를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고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또 정확하게 보고하려고 해도, 당시 행정반에는 최신 데이터베이스와 고속 통신망은 커녕 전자계산기조차 없었으니 정확한 현황 파악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러시아 측에서는 후퇴 작전 따위는 애초에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여론은 러시아군이 네만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격파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이 공세를 펼쳐 먼저 폴란드를 정복하고 프로이센까지 진격한다면 프로이센은 물론 나폴레옹에게 짓눌려있던 오스트리아나 폴란드 내의 친러파들이 봉기할 것이므로 훨씬 더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아우성은 저 멀리 후방의 상트-페체르부르그나 모스크바에서 더 요란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선에서의 거리와 용기는 정비례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꼭 후방에서 편히 먹고 마시는 신사숙녀들만 공격하자고 아우성을 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총성이 울리고 옆 전우의 창자가 쏟아져 흙바닥에 뒹구는 것이 아니다보니, 최전선의 장교들도 나폴레옹 따위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며 당장 쳐들어가자고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젊은 장교들 뿐만 아니라 바그라티온도 당장 공세로 나가자고 짜르 알렉산드르에게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특히 바그라티온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접경에서 쿠투조프(Kutuzov) 장군 밑에서 복무하고 있던 러시아 해군제독 치차고프(Pavel Vasilievich Chichagov)가 내놓은 공격안에 열광했고, 알렉산드르도 거기에 상당히 혹해 있었습니다.   이 공격안에 따르면 이제 오스만 투르크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니 발칸반도를 관통하여 프랑스령 일리리아(Illyria), 즉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역을 공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쪽이 프랑스 제국의 '취약한 아랫배'라는 것이었지요.  여기를 들이치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도 들썩거릴 수 밖에 없으니 후방이 불안해진 나폴레옹은 도저히 러시아 내부로 진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도 냉정한 두뇌들은 많았습니다.  치차고프 공격안을 그대로 수행한다면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와 오스트리아가 화들짝 놀라 반-러시아 진영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이 공격안은 최종적으로 기각되었습니다. 


(치차고프 제독입니다.  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복무한 이후 20대에 영국 해군 대학에서 공부를 했는데, 거기서 Elizabeth Proby라는 영국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29세의 나이로 귀국한 그는 즉각 엘리자베스와의 결혼 승인을 요청했는데, 당시 짜르이던 파벨 1세는 "러시아에도 신부감이 넘쳤는데 웬 영국 여자?"라며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이 겁없는 청년은 난동을 부렸고 당연히 즉각 투옥되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의 패기 넘치는 사랑에는 죄가 없었는지, 그는 또 금새 석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와의 결혼도 허락을 받았고 더 나아가 해군 준장으로 승진까지 했습니다.  불행히도 엘리자베스는 1811년 사망했고, 치차고프는 베레지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빠져나가도록 해줬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1813년 이후 군을 떠나 프랑스로 가버렸고 두번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1849년 파리에서 죽었습니다.)



제1군 사령관이자 국방부 장관으로서, 실질적인 총사령관이었던 바클레이 드 톨리의 기본 계획은 무엇이었을까요 ?  그는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뒤 병상에 누운 채로 '이제 나폴레옹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러시아 내부로 깊숙이 프랑스군을 유인하여 종심이 길어지게 만든 뒤 프랑스군이 분산되고 소모되면 그때서야 결전을 벌여야 한다'라는 전략 계획서를 만든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일라우에서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군의 사정을 반영한 계획서였고, 바클레이가 1812년에도 그런 후퇴안부터 고려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도 들뜬 러시아인들처럼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가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짜르 알렉산드르는 선제 공격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는데, 이는 알렉산드르의 성격이 신중해서가 아니라 이 전쟁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촉발된 침략전이 아니라 외적의 침공으로부터 러시아의 성스러운 영토를 수호하기 위한 수호전이라는 인상을 대내외적으로 주고 싶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짜르가 그런 성향이다보니 당연히 바클레이는 그저 병력을 네만 강을 따라 주욱 펼쳐놓고 '프랑스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강을 천연 장애물로 활용하여 방어전을 펼친다'라는 소극적인 대처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수비 위주의 전략 때문에 바클레이는 주전파 러시아 장교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면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 것은 바클레이가 아니라 알렉산드르였지요.  그런데 알렉산드르는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바클레이를 총사령관으로 명확하게 임명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제1 군 사령관인데다 국방부 장관이기까지 하니까 따로 총사령관이라는 겉멋이 든 직위를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 혹은 총사령관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렇게 총사령관 임명을 빼먹은 것도 문제였는데, 더 나쁜 것은 짜르 알렉산드르가 제1 군 사령부인 빌나까지 직접 찾아와서 휘하에 온갖 참모진을 줄줄 달고 다니면서 감놔라 배놔라 참견이 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조직에서 원래 그러면 안된다는 것은 상식이었고, 알렉산드르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곧 반성하고 '앞으로는 절대 군 명령 체계에 관여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바클레이에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마차 1대에 실어야 하는 짐의 적정량에 대해서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으며 간섭을 재개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짜르가 이렇게 현장에 상주하며 참견질을 하다보니, 바클레이를 무시하고 짜르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버릇없는 장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그라티온이었습니다.  그는 수비 위주의 작전을 선호하는 바클레이를 의도적으로 투명인간 취급하고 짜르에게만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이 모든 혼란이 궁극적으로는 알렉산드르 개인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어떤 작전으로 나폴레옹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뭔가 준비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  국가 존망이 걸린 이런 중대 위기를 앞두고 설마 이렇게 우왕좌왕 하면서 시간을 까먹고 있지는 않았겠지요 ?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Pavel_Chichagov
https://en.wikipedia.org/wiki/Pinsk_Marshes
http://napoleonistyka.atspace.com/Invasion_of_Russia_1812.htm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보니666 2019.11.11 0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면서 처음 첫 댓글 달아봅니다. 이번 한주도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2. 궁금 2019.11.11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일리야 레핀이 러시아 군으로 징집된 청년을 배웅하는 가족들을 그린 그림을 보고 매우 인상깊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예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었군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eeing_off_a_recruit_(Repin).jpg

    그런데 그림을 보면서 징집당한 장정을 안아주는 사람이 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가혹한 군역을 운영하면서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징집한건가요? 궁금합니다!

    • 메뚝 2019.11.11 1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그림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참... 슬프네요.
      어머니인지 부인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 nasica 2019.11.11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림이 하도 좋아서 본문에도 집어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향 마을 사람들도 생각이란 것이 있었다면 기혼자를 저런 병역의 의무로 몰아넣지는 않겠지요.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기혼자는 병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 유애경 2019.11.12 04: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림이 궁금 했는데 마침 넣어 주셨네요!
      정말 보기만 해도 침통해지는 분위기에다25년의 복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의 슬픔은 어땠을까요...
      그와중에 함께 그려진 개의 뒷모습도 뭔가 (전체적인 분위기 탓인지 ) 침통해 보여서 조금 웃고 말았네요!


  3. 흠흠흠 2019.11.11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파르타쿠스. 마물루크. 러시아 농노... 노예들이 거칠고 힘든 삶을 살아서 그런지 전투를 잘하나 보네요.

  4. Franken 2019.11.11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수를 보니 러시아군은 훈련은 둘째치고 머스킷 같은 무기를 제대로 공급받은 상태였는지 심히 의문이 가네요. 나름 공업이 있었던 프랑스도 신병들에게 줄 머스킷 생산에 애를 먹었는데 후진국이었던 러시아가 90만정 이상의 머스킷 생산능력이 있을 리 없으니...

    • nasica 2019.11.11 2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네요. 대부분은 후방 대기소에서 죽어라고 제식 훈련과 삽질 노동만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 하이텔슈리 2019.11.11 21: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국이 퍼준 물자의 양도 장난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게 필요량을 전부 채울 수는 없었지만 큰 도움이 되는 양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 reinhardt100 2019.11.11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의외로 러시아의 당시 공업력은 서방권에서 나름 수위권이었습니다. 산업혁명에 막 접어들기 시작한 유럽에서 아직까지는 기술력차이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고 영국조차도 중공업 생산력에서 프랑스와 서로 순위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초반 러시아의 금속공업 생산량은 전체 유럽 대비 15% 이상이었는데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 비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적어도 야포는 국산화가 꽤 이루어졌고 소총 역시 상당수 자급자족했습니다.

      러시아 공업력이 급속히 약화된 시점이 1820년대말부터 1861년까지인데 1차 산업혁명을 놓치면서 후진국 이미지가 고착화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 Franken 2019.11.12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현대국가에서도 90만정은 만만치 않은 숫자인데 러시아가 공업력이 좀 있었다 한들 1년 남직한 기간 안에서 생산하는 건...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총열을 일일이 손으로 두들기고 다듬어서 만들어야 했던 당시로써는요.

    • reinhardt100 2019.11.12 0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Franken) 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러시아 공업력이 생각외로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1년 내로 90만정 전부를 생산하는건 당시로써 불가능합니다. 90만정을 당시에 전부 신형으로 생산했다면 슈페어의 기적 저리가라 수준이죠.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일단 서구권 군대 대부분이 플린트식 머스켓을 사용했기 때문에 내구도만 좋다면 몇십년전에 생산된 구형소총이라도 쥐어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습니다. 일단 원리는 거진 다 비슷했으니까요. 혁명전쟁 초창기 프랑스군이 100만 이상을 징집하는 바람에 한동안 소총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오죽 급하다보니 창을 50만 자루 생산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당시 파리 조병창의 한달 소총 생산량이 600정 하던 시절인데 막상 전쟁 돌입한 후 생산공정을 바꾸는 등의 개혁을 통해 한달만에 소총을 9천정 생산했던 일도 있습니다. 이 덕분에 소총부족이 한결 덜해진 적도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조면기를 개발한 휘트니가 당대에 유명해진 사건이 바로 1만정 소총생산 사건입니다. 미국이 막 독립하고 나서 기존 사제 사냥총(?)인 수준의 켄터키 소총류를 대체할 신형소총 1만정을 발주했는데 이 당시에는 1년만에 소총 1만정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공했습니다. 막 소개된 아담 스미스의 '분업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기에 가능했습니다.

    • Hedgehog 2019.11.12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튜브에서 colonial gunsmith라는 영상에서 말하기로는 라이플 1 정을 만드는데 300인시가 든다고 하더군요... 라이플이 없는 활강총신이라고 해도 280인시는 걸렸을것 같은데....

    • Franken 2019.11.12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대로 군수창고 및 민간의 총을 긁어다가 지급한다 해도 90만정의 1/3도 충족했을지 모르겠군요. 거기다 진공포장도 없었으니 창고에서 말그대로 썪은 총기의 질이야 뻔할 뻔자겠구요. 이와 상관없이 양질의 좋은 댓글 잘 읽었습니다.

    • [][] R.F.[][] 2019.11.12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에 들었던 거라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러시아군 소속 일부 소수민족(?) 부대에서는 궁병(!)을 운용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머스킷의 연사력을 보면, 보다 양성과 숙련이 어려워서 그렇지 궁병도 나름 쓸만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

    • reinahrdt100 2019.11.12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R.F) 네 맞습니다. 칼미크 기병대가 러시아 원정 당시 투입된 적이 있습니다.

      칼미크 족은 17세기부터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볼가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했었는데 18세기 중후반 청의 중가리아 정벌 이후 비어버린 신장 서부로 일부가 탈출한 후 잔류한 오이라트 부족의 일파입니다. 이들은 현재까지 남아있기도 합니다.

  5. reinhardt100 2019.11.11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소전쟁 당시에도 프리피아트 늪지는 공격자나 방어자 모두에게 장애였지만 특히 방어자에게 엄청난 곤란을 주었죠. 독일군은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집단군 3개 및 항공군 2개를 동원했는데 그래도 주력을 어디에 두냐?가 문제였습니다. 모스크바 때문에 중부집단군이 주력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프리피야트 늪지 북쪽주변에 독일군 전체 30% 이상이 집중 배치되어 상대적으로 남서쪽에 주력이 배치된 소련군을 그대로 포위섬멸전으로 붕괴시키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에 맞서는 러시아군의 입장에서는 일단 공간을 이용한 후퇴밖에 답이 없었습니다. 러시아 주력군이 네만 강을 도하해서 프랑스군과 정면대결하면 이길 방법이 없다시피했습니다. 22만의 주력군이 강변 한 지점에 일거에 도하해서 프랑스군을 분단, 그 중 한 부분을 붕괴시켜야 확실한 승산이 보이는데 그럴 기동력은 20세기 중반, 바그라티온 작전때나 가능했으니까요. 이건 기술의 문제이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만일 러시아군이 네만강을 도하한 후 주력군이 섬멸당했다면 나폴레옹의 성격상 토르마소프의 제3군을 섬멸한 후 스몰렌스크까지 진격해서 후방의 2개 군까지 연속해서 격멸한다는 계획을 짜고 진격했을 겁니다. 다만 9월 30일까지 스몰렌스크 점령 및 러시아 주력군 완전 섬멸을 해야 러시아 평원에서의 월동이 그나마 편해지는데 과연 가능했을지? 저도 의문입니다.

    • 2월28일 입대 2019.11.13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라인하르트님 늘 감사드립니다!
      프리파야트라는 동네가, 설마 lef'tenant 프라이스와 맥밀란 대위가 기어다니던 그 동네는 아니겠죠??

      선생님 설명덕분에 Nasica님의 노고가 더 빛을 발하는군요.

    • reinhardt100 2019.11.13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프리피야트 늪지 맞습니다.

      제가 무슨 선생님입니까? 이거야 원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6. 영국나치처칠 2019.11.12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의 떵침을 놔줄 오스만의 실권자가 조세핀의 언니인데
    폴란드는 조세핀 밀어내고 내사전의 불능은 없다에게 아들을 안겨줄 백작부인을 들이미는데 이것도 러시아의 설계인걸까요?

  7. reinhardt100 2019.11.12 2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로 핸드폰으로 접속했는데 이상하게 닫혀있네요? 티스토리 가입해야 하려나요?

  8. freewizard 2019.11.13 1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역사네요ㅋㅋ 좋은 정보 감사해요

  9. kyw0277@naver.com 2019.11.13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에 댓글 남깁니다.

    이런 자세한 글들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10. Sarada 2019.11.17 1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Nasica 님이 소개해주신 혼블로워의 전투장면을 읽고 너무 인상깊어서 얼마전 10권을 전부 구해서 읽었습니다. 덕분에 출퇴근 시간에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혹시 Nasica 님이나 다른 분들이 답해주실수 있으실까 해서 글 올립니다. 2권(Nasica 님이 소개해주신 요새상륙작전이 나온 권)에서 사관들을 괴롭히던 함장이 밤에 실족하여 의식불명의 중상을 입었는데, 이 사고에 대해서 다른 장교가 "혼블로워 군이 이 사건에 대해서 더 얘기해줄 것은 없는가?"라고 반복적으로 물어봅니다. 혼블로워는 당연히 "함장님이 실수로 떨어지신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는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요. 이때 혹시 혼블로워가 무슨 짓을 한 거 일까요? 작가가 혼블로워가 이런 짓을 저짓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암시를 준 거 일까요? 너무 궁금해서 글 남겨봅니다.
    항상 Nasica 님의 좋은 글과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 nasica 2019.11.17 21: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작가가 명확하게 밝힌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C.S. Forester의 의도는 '사실 혼블로워가 사다리에서 함장을 밀었다' 라고 독자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혼블로워는 소심한 사람이긴 하지만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 자기 당번병을 놓아주는 일이라든가 무인도에서 굶어죽어가는 프랑스군 포로들에게 식량을 나눠준다든가 하는 일화들로 보아,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끔 법과 규칙을 어기는 일도 종종 저지르는 캐릭터로 보이거든요.

  11. sarada 2019.11.18 0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답변 감사합니다.
    만약 혼블로워가 정말로 손을 댔다면, 혼블로워의 성격도 굉장히 무서운 면이 있네요. 조직에 충성하지만, 조직 내부의 지나친 부조리함이 내부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부조리에 희생될 지경에 이르면, 가만히 앉아서 죽느니 과감하게 움직이는... 감탄이 나옵니다. 이걸 용기라고 해야할지, 대담함이라고 해야할지 잘은 모르겠는데, 혼블로워가 확실히 남다른 냉정함과 과감함이 있네요.
    빽도 라인도 없이 제독까지 올라간 사람은 역시 뭔가가 다르네요.
    다시한번 답변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좋은 글 부탁드려요^^

  12. sarada 2019.11.18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린다고 쑬려다가 오타났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나폴레옹의 수십만 대군이 온갖 말썽과 이야기꺼리 속에 착착 네만 강 서쪽에 집결하는 동안, 알렉산드르와 러시아군은 뭘하고 있었을까요 ?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비하여 모스크바의 성벽을 강화하고 있었을까요 ?  

일단, 로마노프 왕가의 왕궁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체르부르크(Sankt-Peterburg, Санкт-Петербу́рг)에 있었습니다.  1712년 표트르(Pyotr) 대제가 모스크바였던 수도를 상트-페체르부르크로 바꾼 것이었지요.  당시 인구수도 모스크바와 상트-페체르부르크가 각각 30~40만 정도로 비슷비슷했습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최종 목표로 삼은 것은 거기가 러시아의 수도이거나 가장 큰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역사적인 지위와 함께 모스크바의 지리적 위치가 러시아 제국의 심장부에 해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노프 왕가를 모조리 사로잡고 싶다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체르부르크로 가야 했습니다만, 거긴 제국의 북쪽 한구석에 불과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때, 로마노프 왕가 사람들도 바리바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피난을 떠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저 북쪽의 상트-페체르부르크에 있는 왕궁에서 아주 편안하게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모스크바의 위치를 보시면 왜 나폴레옹이 상트-페체르부르그가 아니라 모스크바로 향했는지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하고 안전한 상트-페체르부르크의 카잔 성모 성당(Cathedral of Our Lady of Kazan, Kazanskiy Kafedralniy Sobor)에서 1812년 4월 9일 예배를 드린 알렉산드르는 남쪽으로 길을 떠납니다.  목적지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나(Vilna, Vilnius)였습니다.  빌나에는 러시아 야전군의 총사령부가 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대치한 러시아 야전군은 크게 2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주력부대는 바클레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 장군이, 그리고 더 남쪽의 보조부대는 그루지아의 상남자 바그라티온 장군이 지휘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좀 묘한 일이긴 했습니다.  러시아는 나폴레옹이라는 대영웅이 유럽 역사 통틀어 사상 최대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기 직전이라는 백척간두의 위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를 지켜낼 군대의 우두머리가 하나는 독일계 장군이고, 다른 하나는 그루지아계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공녀와 결혼하여 러시아화된 사람이라고 치고,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독일계인 바클레이 드 톨리였습니다.

 

(상트-페체르부르그의 카잔 성모 성당입니다.  왜 하필 카잔이라는 지방 도시 이름이 붙었는지 찾아보니, 원래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는 전설 속의 성모 마리아의 성상(icon)과 관계가 있더군요.  카잔의 성모 마리아는 러시아 전체의 수호 여신에 해당하는 그런 위치라고 합니다.)

 

(모스크바에 보존된 카잔 성모 성상의 복제본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왔다는 원본은 사라졌다고 하네요.)

 



정확하게 보자면 바클레이 드 톨리는 독일계는 아니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스코틀랜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꽤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 발트 해 연안 독일계 귀족들 사이에 정착하면서 바클레이 드 톨리도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바클레이 드 톨리가 사실상의 러시아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귀족들이 전통적으로 다 그렇긴 했지만, 특히 러시아 귀족층은 교육 따위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어떤 분야든 좀 전문성이 필요하고 잉크와 펜대를 쥐어야 하는 일에는 오늘날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 지방에 정착하여 로마노프 왕가에 충성하면서 살아온 독일계 귀족들이 많이 등용되었습니다.  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군 장교직은 100% 귀족층에게만 주어졌는데 특히 독일계 귀족들의 비중이 매우 컸습니다.  가령 나폴레옹에게 사실상의 첫 패배를 안겨주었던 1807년 2월 아일라우(Eylau) 전투를 지휘했던 베니히센(Levin August von Bennigsen)은 아예 중부 독일인 하노버(Hanover)에서 태어난 독일계 귀족이었습니다.


(베니히센입니다.  그는 바클레이 드 톨리 같은 발트해 연안 지역의 독일계 귀족이 아니라, 독일 본토인 하노버에서 태어난 그냥 독일인이었습니다.  하노버 군에서 대위 계급까지 장교 경력을 쌓은 그는 28세이던 1773년에 러시아군에 '채용'되어 터키와의 전쟁 때문에 유능한 장교가 필요하던 러시아군에서 복무하게 됩니다.  5년 후인 1778년에 겨우 중령으로 승진한 것을 보면 독일 귀족 출신이라고 아주 각별한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독일계 지휘관에 대해서 러시아계 부하들이 잘 따라준다면 문제가 없었겠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았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침공이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여 반프랑스 감정이 들끓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전에 없던 민족 감정이라는 것이 새록새록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역시 외국인임에 틀림없는 독일인들이 장군이네 지휘관이네 하며 군을 통솔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군 장교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특히 언어적인 문제가 아주 컸습니다.  러시아군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프랑스 망명귀족 출신의 장교들도 꽤 많았습니다만, 적국 출신이던 이들에 대한 반발심은 오히려 없었습니다.  일단 이 프랑스 망명귀족들이 나폴레옹과 혁명 프랑스군에 대해 이를 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어 문제가 컸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스어가 귀족층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사실상의 표준어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경향은 유럽의 중심인 파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특히 강해서, 러시아 귀족들은 집집마다 프랑스 출신의 가정교사를 두었고 아이들이 가끔 집에서 러시아어로 이야기할 경우 야단을 치는 경우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러시아 장교들은 프랑스어를 매우 유창하게 할 줄 알았습니다.  1807년 나폴레옹과 틸지트(Tilsit) 회담을 하며 며칠 동안 나폴레옹과 꼭 붙어지냈던 알렉산드르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자신의 프랑스어 발음이 (코르시카 출신이었던) 나폴레옹의 프랑스어 발음보다 더 완벽했다는 것일 정도였습니다.  


(랑게론(Louis Alexandre Andrault de Langeron) 백작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귀족으로서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로 피난갔다가 러시아군에서 복무한 전형적인 망명귀족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프랑스군보다는 주로 투르크군과 싸웠습니다.  그는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에도 크림 반도의 오데사(Odessa) 주지사로 오래 있었고, 결국 러시아에서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상황이 그러니 프랑스 망명귀족들과 러시아 귀족 출신 장교들은 말도 잘 통하고 정치적인 이익도 딱 일치해서 정말 이야기가 잘 되었습니다.  게다가 프랑스 망명 귀족이 많아봐야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  소수인 프랑스 망명 귀족들은 당연히 러시아 장교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문제는 오히려 독일계였지요.  러시아군 내에 발트해 연안 출신 독일계 장교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프로이센 출신 장교들이 1809년 이후 대거 러시아군에 투신했습니다.  원래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프로이센군이 군축에 들어가면서 많은 프로이센 장교들이 장교직을 잃고 쫓겨난 바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나폴레옹에게 이를 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장 급여를 줄 고용주를 찾고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1809년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의 동맹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고 러시아가 군병력을 증강하면서 새롭게 경력직 장교를 많이 필요로 하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었지요.  나중에 전쟁론(Vom Kriege, 영어로는 On War)을 써서 불멸의 이름을 남긴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도 그런 프로이센 출신의 러시아 장교였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들은 같은 독일계 귀족인 부대 지휘관 직속의 참모진으로 주로 등용되었는데, 거기서 눈치도 안 보고 자기들끼리 독일어로 떠들어댔다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장교들과 이 독일계 장교들은 언어 문제 때문에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총사령관 바클레이 드 톨리에 대해서도 러시아군 장교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 분은 클라우제비츠가 아니라 당시 프로이센군의 혁신 과업을 진행 중이던 그나이제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입니다.  이 분도 나폴레옹의 압력에 의해 곧 프로이센군에서 쫓겨났고, 1812년 당시 비밀 임무를 띠고 러시아군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이 분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유명한 독일해군 전함으로 그나이제나우라는 이름을 기억할 겁니다.)

 



설마 독일계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총사령관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클레이 드 톨리는 부하 장교들 뿐만 아니라 제2군 사령관인 바그라티온으로부터도 지휘관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거의 무시당하다시피 했습니다.  대체 러시아 장교들은 왜 바클레이 드 톨리를 이렇게 무시하고 있었을까요 ?  알렉산드르가 빌나로 향한 것과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en.wikipedia.org/wiki/Saint_Petersburg
https://en.wikipedia.org/wiki/Kazan_Cathedral,_Saint_Petersburg
https://en.wikipedia.org/wiki/Our_Lady_of_Kazan
https://chekhitout.files.wordpress.com/2012/04/800px-population_development_moscow.png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reinhardt100 2019.10.28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세기 이후 블라디미르 대공위가 '하나님께서 영윈한 왕권을 부여한 류리크 왕가가 선택하신' 모스크바로 넘어간 이후, 모든 러시아인들에게는 모스크바가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위상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가장 안전한 편이었거든요. 모스크바가 심장이 된 이후 모든 외부세력이 보기에 모스크바를 점령해서 통치해야 진정한 러시아 정복이 완료된다고 생각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17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19세기 프랑스, 20세기 나치 독일 모두 모스크바를 정복 및 통치해야 러시아 정복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전쟁 계획을 짜고 실행했습니다.

    러시아의 카잔의 성모, 폴란드의 검은 마리아, 양국의 상징이 같은 동방에서 온 이콘인 것이 특징인데 양국 모두 이 성모상의 기적으로 나라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모두 17세기 때의 일인데 러시아는 대동란시대, 폴란드는 대홍수시대죠. 국가멸망 직전에 성모가 발현했다는 것으로 외세를 물리친 것입니다.

    특히 폴란드 쳉스토호바의 검은 마리아, 일명 '폴란드 왕국의 영원한 여왕'으로까지 숭배받는 성모상인데 나치 독일 점령기 및 공산주의 정권조차도 감히 이 성모는 건드리지조차 못했습니다. 건드리면 교황청까지 들고 일어날 정도로 위상이 대단했으니까요.

    카잔의 성모도 비슷한 위치였지만 1904년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우연이지만 바로 그 다음해 피의 일요일사건까지 겹치면서 러시아인들의 마음이 로마노프 황가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신께서 영원한 왕권을 거두어가셨다고 보여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쳉스토호바의 검은 마리아, 17세기 야스나 고라 수도원 공방전에서 단 400명의 수도사 및 패잔병들이 8배의 스웨덴군을 상대로 2달간 버티면서 국민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상징입니다. 1635년 이후 유럽 최강의 육군력으로 전승 불패를 자랑하던 신교도 스웨덴군이 처음으로 패전했다는 엄청난 위업을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셨다니까 가톨릭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신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는 믿음을 준 사건입니다. 나중에 폴란드에 가시면 꼭 보시면 좋다고 추천드립니다.

    • nasica 2019.10.28 0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흥미로운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19.10.28 08: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슨 말씀을요.
      요새 매일 서울에서 대전까지 출퇴근 중이라 시간이 좀 생겨서 쓸 수 있습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지금도 KTX에서 댓글 쓰고 있습니다.

    • 2/28일 입대 2019.10.30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의 시야를 넓혀주시는 댓글 저도 늘 감사하고있습니다!
      물론 nasica님께도 감사드리구요!!

    • reinhardt100 2019.10.30 2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2월 28일 입대) 서로 지식을 전파하고 수용한다는 것이 인터넷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
      부족한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2. 영국나치처칠 2019.10.28 2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각종 예언에 의하면 유럽은 이슬람에게 점령당하게 된다던데...
    이슬람은 그 성모상을 어떻게 할지...
    그리고 그 이후에 결과는 어떻게 될런지...

  3. 알키비아데스 2019.10.29 2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 전쟁사에선 독일계가 참 먹어주는 인종인거 같네요.

    4세기 이후 로마군의 주력은 독일계(게르만계열)
    중세에 먹어주던 용병은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트인데 둘다 독일계
    전열보병 전투의 교과서를 쓴건 프러시아
    나폴레옹전쟁시절 영국의 정예부대는 하노버 출신
    러시아군의 중추도 발트3국쪽 독일계
    양차대전 메인빌런은 독일
    양차대전을 정리한 미군의 주력은 독일계 미국인

    독일군이 당나라군대가 된 오늘날엔 상상이 안가는 이야기입니다

    • reinhardt100 2019.10.30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럽 중앙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전쟁이 빈번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다만, 독일의 한계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못해 19세기까지 제대로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냉전 당시에도 서방 나토군 육상전력의 주력은 미군과 서독군이었는데 당시 서독은 재래식 육군과 공군력만 따지면 미군과 소련군을 잇는 실질적인 세계 3위였죠. 동구 바르샤바 조약군의 동독군 역시 최소 25만의 병력으로 서독군 전력의 6할 이상은 항상 보유하고 있었으니 군사적 역량은 어마하죠. 이쪽 역시 조약군 최정예로 소련식 제파전술의 최선봉이었고요.

  4. Hofer 2019.10.30 1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보로프가 십 수년을 더 오래 살았더라면 과연 어떤 광경이 펼쳐졌을 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reinhardt100 2019.10.30 2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단합니다. 한 번 영혼의 대결이 벌어졌을 겁니다. 보로디노 전투가 하루만에 끝났지만 이번에는 최소 3일은 넘기는 라이프치히는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일 혈전이 되었을 겁니다. 양측이 서로 20만 이상이 동원 하였을 거고 양측 모두 포병화력을 쏟아부어 전선을 틀어막는 사이 기동력으로 돌파구를 뚫는 식의 전투 수행방식을 선호했으니 정말 우열판단이 어렵겠네요. 게다가 수보로프의 성격상 병기창이 있을 스몰렌스크 부근에서 결전을 치르려고 했을거고 상대적으로 나폴레옹의 대육군 역시 소모가 덜한 상태에서 싸울 수 있었으니까요.

  5. 루나미아 2019.10.30 2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요 길들이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는 걸 보니 왜 모스크바로 가는지 이해되네요. 나폴레옹이 지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의 전쟁처럼 지나간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더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줬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실상은 면은 커녕 선 조차도 제대로 장악한 건지 불안불안해서 이 점이 안 와닿았었네요.
    똑같이 중심부로 쳐들어가도 어떤 공격은 적의 심장부를 움켜쥔 셈이고, 어떤 공격은 포위당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자처해서 들어간 셈이 되는데 나폴레옹은 전자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후자였나봐요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는 독일 출신 할머니와 독일 출신 어머니를 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할머니는 처녀적 이름이 안할트-제릅스트(Anhalt-Zerbst) 출신의 소피(Sophie)로서 나중에 예카테리나(Екатерина) 대제로 알려진 러시아의 여황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어머니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공주였지요.  다른 유럽 왕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는 이렇게 계속 외국 특히 독일 출신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다보니 러시아 왕가는 일반 러시아 국민들은 물론 러시아 귀족들에 비해서도 서구의 발전된 문물과 사상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춥고 먼 동쪽 구석의 러시아를 서구화시키는 노력은 대개 국왕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혁신이 위주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귀족들과 국민들은 그런 서구 사상의 침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반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알렉산드르에게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스위스 출신의 공화주의자인 라 아르프(Frédéric-César de La Harpe)를 가정교사로 하여 루소 등의 프랑스 계몽사상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당연히 그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지독한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계몽사상에 젖어든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라 아르프입니다.  그는 30대를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의 가정교사로 보낸 뒤, 베른의 귀족 정권에 시달리던 고향 스위스 보(Vaud) 지방을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스위스에 헬베티카 공화국(République Helvétique)을 만들었습니다.  혁명의 폭풍 속에서 그는 추방을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그는 옛제자 알렉산드르의 도움으로 그의 고향 보 지방의 권익을 지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물려받은 전제 군주 짜르의 왕좌는 결코 절대 권력이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의 할아버지 표트르 3세(Pyotr III )는 그의 홀대에 불만을 품은 근위부대의 반란으로 황비인 예카테리나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결국 암살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파벨 1세(Pavel I) 또한 귀족 출신의 해직 장교들에 의해 아주 간단히 암살되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연이어 암살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표트르 3세나 파벨 1세나 모두 농노들의 처지를 향상시키고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공통적인 개혁 조치를 취한 바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먼 동구의 대국으로서 소수의 전근대적인 귀족들이 노예 상태의 국민들을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가령 표트르 3세의 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귀족들은 자기 농노를 죽여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나름대로의 그런 전통과 특성을 무시하고 귀족들의 이익을 해친다면, 아무리 동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짜르라고 해도 야밤에 한낱 개처럼 살해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의 평민 출신 고문 스페란스키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르를 따라 에르푸르트 회담장까지 가서 직접 나폴레옹과 환담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귀족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그는 결국 친프랑스파이자 불온사상을 가진 자로 낙인찍혀 1812년 초에 고문직에서 해직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시베리아에 유배를 간 것은 아니고, 핀란드 대학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록 알렉산드르가 서구 계몽사상으로 훈련된 개혁적 군주라고 해도 실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시골 마을 신부의 아들인 스페란스키(Mikhail Speransky)를 고문으로 등용하여 당시 계몽사상가들이 꿈꾸던 입헌 군주국으로 러시아를 탈바꿈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는 짜르가 스스로의 권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처럼 선진 교육을 받은 귀족 및 시민들이 많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당시 그 넓은 러시아에 딱 3개 있던 대학 수를 6개로 늘리는 등 교육 제도 개선에도 힘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혁은 쉽지 않았고 알렉산드르도 주변 왕족 및 귀족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런 개혁에 대한 열의는 점점 옅어져 갔습니다.  가령 스페란스키가 제시했던 의회, 즉 러시아어로 두마(дума, '생각'이라는 뜻)로 불리는 기구는 거의 1백년이 지난 뒤 노일전쟁의 패전 결과로 발생한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겪고서야 간신히 설립될 지경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러일 전쟁 패배의 여파로 들끓던 사회적 불만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포템킨 호의 반란 사건도 이때의 사건입니다.)

 



그렇게 서구 사회에 긍정적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프랑스 시민 계급을 대표하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폴레옹의 앙기앵 공작 납치 사법 살인이라는 비도덕적 범죄 행위를 보고는 기대만큼 큰 실망을 하여 반-나폴레옹파로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제3차 대불동맹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나폴레옹의 손에 참담한 패배의 맛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렉산드르는 젊은 낭만파 몽상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1807년 틸지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대인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는 나폴레옹의 매력에 젖어든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첨벙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역시 낭만파 몽상가이자 지략가였던 나폴레옹이 제시한 프랑스와 러시아가 힘을 합해 유럽을 양분하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인도까지 점령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도 전율했습니다.  그 결과, 분명히 바로 직전까지 영국의 금융 지원을 받으며 피튀기게 싸우던 적수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여태까지의 돈 줄이자 중요 경제 파트너였던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틸지트 회담에서 알렉산드르는 무엇보다 남쪽의 숙적 오스만 투르크가 차지했던 발칸 반도 등지를 빼앗기를 원했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가 얻은 것은 핀란드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오스만 투르크는 영국의 근동 지방 전략에 저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동맹이었고 또 나폴레옹이 구워삶아야 하는 다른 강국인 오스트리아도 오스만 투르크의 땅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얻은 것에 비해 영국과 척을 진 대가는 컸습니다.  러시아는 토지 귀족의 나라였고, 토지 귀족의 돈벌이는 자신의 장원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영국제 공산품을 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호기 있게 맺은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 토지 귀족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곧장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물론 불만 세력들은 모양새 없게 '돈벌이가 안된다'라는 것을 나폴레옹과의 동맹 반대 이유로 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은 신이 내려주신 왕위를 뺴앗은 찬탈자이고 불온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야만인이므로, 동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로마노프 왕조는 그 코르시카놈과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정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짜르 알렉산드르의 모후인 마리아 페오도로브나(Maria Feodorovna)까지 나서서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출석하지 말라고 종용할 지경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둘러싼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야밤에 칼로 찔러 죽인 자들이 가득찬 왕궁에서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도 나폴레옹이 결코 자신과 유럽을 공유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어디까지나 전제 왕정의 군주였지, 결코 낭만적인 친구들로 둘러싸인 젊은 독일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기반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을 독립 폴란드 왕국으로 부활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오스만 투르크의 분할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메테르니히가 빚어낸 가짜 뉴스였습니다.  


이유야 어쨌건, 1810년 12월 31일 발표된 짜르의 칙령은 프랑스산 제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하고, 반대로 영국 상품에 대해서는 입항 허가를 내주는 내용이었고, 이를 계기로 나폴레옹와 알렉산드르 사이의 전쟁은 거의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사실 이건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제 벌어질 전쟁은 유럽 산업화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영국 시민 계급과 프랑스 시민 계급의 싸움이었습니다.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된데다 강력한 로열 네이비를 보유한 영국과 싸울 방법이 궁했던 프랑스가 꺼내든 대륙 봉쇄령이라는 무역 전쟁은 결국 동방의 대국 러시아를 싸움판에 끌어들였고, 결국 영국 대신 러시아가 프랑스를 상대로 대리전을 치르게 된 것이었지요.  

자신의 전쟁에 제3자를 끌어들인 것은 영국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도 혼자서 러시아와 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가 굴복시킨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의 위성국가들에게 병력과 물자, 자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럽 거의 전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거대한 전쟁에 휩쓸려야 했습니다.  과연 이 전쟁을 바라보는 유럽인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요 ?  물론 대부분은 황제가 또 전쟁을 한다면서 불만이었습니다만, 지식인들 대부분은 이 전쟁을 계기로 유럽의 근대화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의 점령군 뒤에는 예외없이 무자비한 병참장교와 세관원들이 따라와 점령지의 고혈을 짜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나폴레옹의 정복지에는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계승한 헌법과 나폴레옹 법전도 항상 따라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군이 이례적으로 잔혹하게 난동을 부렸던 스페인에서조차,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이 세운 허수아비 왕 조제프의 정권이 기존 부르봉 왕정보다 스페인을 훨씬 더 근대화시켰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최소한 헌법이 제정되었고, 중세시절부터 계속 내려오던 고문으로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도 폐지되었으니까요.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망한 뒤 스페인 종교재판은 다시 부활했다가 1834년에야 간신히 폐지되었습니다.  괴테 등 당대의 지성인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일주의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나폴레옹이 동방으로 끌고 갈 그랑다르메(Grande Armee)의 전진과 함께, 신분제 폐지와 천부인권 등의 계몽사상이 저 동방까지 전달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종교재판 = 이단심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와 나무가지, 그리고 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Yo, Say Love"를 선창하시는데 이들은 떼창으로 "No Mercy"를 외쳤군요.)

 



이제 유럽은 누가 영국과 러시아 편에 설 것이고 누가 프랑스 편에 설 것인지, 과연 중립이란 것이 가능할지 외교적인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I_of_Russia
https://en.wikipedia.org/wiki/Mikhail_Speransky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0_- 2019.07.01 0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주일의 시작을 새 글과 함께! 매번 포스팅이 월요일 6시 30분이네요.
    주말동안 글 정리 해 놓으시고 월요일 새벽 포스팅 예약 걸어놓으시는 건가 보군요?
    잘 보고 갑니다 :)

  2. 보니666 2019.07.01 1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항상 좋은글 너무 잘 읽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점을 여쭤보고 싶은데, 나시카님께서 보시기에는 결국 나폴레옹의 패망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지난 글에서 1810년의 나폴레옹은 더이상 전쟁을 개인적으로 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1.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까지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는 대륙봉쇄령 포기와 영국정복을 완전 포기한다는 뜻이고...유럽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를 만만하게 여기고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위해 다시 침략했을 것 같고...그렇게 되어도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까지 대륙봉쇄령에 강제로 다시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더라도...결국에는, 언젠가는, 코르시카 촌놈 출신이자 전쟁의 승리로 권력을 유지했던 황제인 나폴레옹은...전쟁으로 패망할 운명이었는가요?

    3. 결국 전쟁의 승리로 벼락출세한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고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죽는...해피엔딩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인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나시카님의 생각이 정말 궁금합니다. 고견 부탁드려요~^^

    • nasica 2019.07.01 19: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그렇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끝까지 회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러시아와 전쟁 회피는 결국 대륙봉쇄령의 붕괴로 이어졌겠습니다만, 그래도 나폴레옹 정권은 유지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자신은 없습니다.


      2. 만약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승리하여 러시아까지 대륙봉쇄령에 강제로 다시 참여시키는 데 성공했더라도...결국에는, 언젠가는, 코르시카 촌놈 출신이자 전쟁의 승리로 권력을 유지했던 황제인 나폴레옹은...전쟁으로 패망할 운명이었는가요?

      --> 러시아가 굴복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인 불만은 터져나왔을 것이고, 그때문에 전쟁이 반복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총칼은 절대 황금을 이기지 못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3. 결국 전쟁의 승리로 벼락출세한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새로운 왕조를 창시하고 제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죽는...해피엔딩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인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 저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습니다. 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요 ? 고매한 왕가의 선조도 따지고 보면 힘깨나 쓰는 조폭단 두목일 뿐입니다.

  3. 푸른 2019.07.01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종일관 진지한 글이다가, 마지막에 "yo, say love"하는 예수님과 "No nercy~"하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드시네요ㅋㅋ 그 장면을 상상할수록 웃음이 나오네요ㅋㅋㅋ

  4. 최홍락 2019.07.01 1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서구 사상에 관용적인 왕과 그렇지 못한 귀족들의 구도로 보기에는 당시 18세기 러시아 상류사회의 언어가 프랑스어었다는 사실과는 배치가 되는 듯 합니다. 표트르1세의 친서구정책도 한몫했지만 그래서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1635년 언어 표준을 만들고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창설한 이래 프랑스어는 통일된 표준이라는 개념이 발생한 첫 언어라는 인식이 러시아 상류사회에 널리 퍼졌거든요. 프랑스어가 서서히 라틴어를 몰아내고 외교가에서 널리 쓰인것도 이를 반영한 것이고요. 프랑스 대혁명 직후 프랑스를 탈출한 프랑스 귀족을 불러 과외교사로 삼는 러시아 귀족들 덕분에 프랑스 망명귀족들의 인기가 치솟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나마 러시아의 것을 지키고 러시아어를 쓰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가 되서야 가능해진 일이라고 합니다. 일반 민중들이 러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귀족들을 백안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할정도로 말이지요.

    2. 러시아의 황제와 귀족 간의 대립은 미국의 남북전쟁의 배경과 유사하게 경제적인 갈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8세기 들어 영국과 러시아 간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래 러시아의 대외교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영국의 해군력을 뒷받침하는 아마, 철광석, 석탄 그리고 러시아의 농노들이 생산하는 밀이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 영국은 면직물을 포함한 귀족들의 사치품을 수출했죠. 문제는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러시아의 제조업자들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불공정무역이 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앨리자베타 여제부터 알렉산드르 2세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황실은 농노제를 없애고 농노들을 공장의 노동자로 변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지요. 그리고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관세율을 높이고 영국에 치중한 무역루트를 다변화시키려고도 하고요. 물론 농토를 가진 지주 계층들은 반발하게 되는데, 이들은 기존 제도의 유지, 자유무역의 고수를 주장하게 되고요. 마치 남북 전쟁 전의 북부와 남부처럼 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은 북부가 전쟁을 통해 남부를 제압한 반면, 러시아는 황제(파벨1세의 죽음에는 그의 교역 다변화 정책이라는 배경도 존재합니다.)가 암살되는 등 저항이 상당히 거셌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제품의 수요처로서 영국을 대신할 수 있었다면 대륙봉쇄령이 의외로 오래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고 이는 러시아 왕실과 귀족 모두 프랑스에 적대적으로 변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3. 스페란스키가 평민 출신의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황제의 최측근인 것과는 별개로 그의 정책이 러시아에 미친 영향은 그다지ᆢ 앞에서 언급한 교역 다변화 정책의 일환으로 1811년 중립국 무역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여 미국과의 교역 확대를 시도했으나 이는 결론적으로 미국을 통해 우회하여 영국과의 무역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되어 나폴레옹의 진노를 사서 러시아 원정을 촉발하게 되지요. 그가 친프랑스파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외교 상태를 가져온 정책의 책임을 물을 사람이 필요했던 상황이 스페란스키의 고문 해촉이 된 것이고요.

    스페란스키는 나중에 니콜라이1세 (알렉산드르1세의 동생으로 형 다음 왕위를 계승합니다.)에 의해 재기용되는데 이때 러시아의 법전을 재정비하게 됩니다. 이는 일정한 규범 없이 수행 되어온 국가 통치 질서에 명확한 기준과 원칙을 제공함으로써, 법에 의한 국정 운영을 가능케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광무개혁의 러시아 버전. 즉, 그 질서의 목포가 전제정 및 기존 봉건질서를 강화한 것이라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근대적인 기술 투자, 교육제도, 화페 통일 등이 이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화되 러시아의 군사력은 유럽의 헌병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유럽에서 불거진 각종 혁명을 진압하는데 쓰이고 맙니다.

  5. 궁금한 사람 2019.07.01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알렉산드르의 아버지 파벨 1세의 사망원인은 뭔가요?

    어디서는 목이 졸려 죽었다
    어디서는 칼에 찔려 죽었다
    어디서는 금속상자에 맞아죽었다 하는 데 정확한 사인을 명시한 곳은 없네요

    죽은 건 확실한 거 같은데..

  6. 백군파 2019.07.01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통치에 긍정적인 점이 많았다는건 알고 있었지만,스페인 지식인들까지 거기에 동의할줄은 상상도 못했네요.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 군대에 쓴맛을 본 이후 프랑스식으로 군제개혁을 해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것처럼,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의 침공 전에 정편과 개편을 통한 근대화를 추진한 적이 없나요?

    • 수비니우스 2019.07.01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이부분 관해서 아는게 없는데 추측으로는 웬지 없었을것 같네요. 오스트리아하고 프로이센이 본진을 몇번 탈탈 털리고서야 프랑스식으로 개혁했던걸 생각하면, 러시아 원정 전에는 본진이 당한 적은 없고 원정 때 모스크바는 함락됐지만 이후에 승리를 거듭했으니까 원정 전후로 딱히 개혁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을것 같습니다. 러시아 근대화 추진이 크림전쟁때 털린 뒤지 않나요?? 언제 들어도 좋은 나시카님의 자세한 설명이 기다려집니다.

    • 최홍락 2019.07.01 2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스페란스키의 개혁이 반쪽짜리라고 평한 것과 연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요. 인적 자원 측면에 있어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귀족과 관리의 자녀들로 제한됐고 법률학교와 기술전문학교 등 중등교육기관은 꽤 늘었으나, 초등학교가 없었던 관계로 농민 내지 농노의 자녀들이 부모와 마찬가지로 문맹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군대나 산업이나 전술 내지 기술을 소화해낼 수 있는 실력있는 하사관이나 초급장교들이 충분한 숫자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됬던거죠. 시위 진압이나 약탈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동시대의 서구 국가의 정규군과 상대하는건 역부족이지 않았나 싶네요. 여기에 기술력이 뒷받침이 안되다보니 크림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도 도입했던 강선식 야포 대신 청동제 활강포를 쓸 정도였던 것도 한몫을 했고ᆢ

    • nasica 2019.07.02 1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딱히 뚜렷한 것은 없었다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1810~1812년 사이 드 톨리(de Tolly)와 볼콘스키(Volkonskii) 등의 주도 하에 프랑스식 편제를 도입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만, 나폴레옹의 군단 편제처럼 획기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 최홍락 2019.07.04 0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볼콘스키 공작이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의 안드레이 볼콘스키의 모티브가 된 농민공작 세르게이 볼콘스키가 맞는지요?

    • nasica 2019.07.04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최홍락// 말씀하시는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당시 계급이 아직 대위인가 그래서 아닐 것이고, 이 양반이 그 양반일 겁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yotr_Mikhailovich_Volkonsky

  7. 웃자웃어 2019.07.02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그런데 나폴레옹이 아일라우 전투를 통해 광활한 동유럽에서는 자신의 전술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는데도 쳐들어간 이유가 뭐죠?

    • nasica 2019.07.02 19: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그때 경험을 되살려 엄청난 군수품을 준비하고 치중대를 편성했습니다. 문제는 그 당시 기술로는 그런 대군에게 장기간 군수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지요. 특히 한가지, 꼭 필요하지만 전혀 준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다다음번에 본편으로 다루겠습니다.

  8. 중산 2019.07.02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재밌게 구독하고있습니다. 나시카님 혹시 괜찮다면 나시카님의 글을 퍼가도 될까요? 출저는 꼭 명시해 놓겠습니다

  9. 웃자웃어 2019.07.14 16: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러시아가 절대왕정체제의 전제군주정 이라곤 해도 귀족 여러명 족치는건 가능해도 귀족집단 전체를 족치는건 불가능하단겁니까?

    • nasica 2019.07.14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그게 그때그때 달랐겠지요. 확실한 것은 알렉산드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귀족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폴란드는 아침거리일 뿐이다... 러시아가 저녁을 먹을 곳은 어디일까 ?"
-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이후 당시 영국 의회 의원이었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점점 서쪽을 밀고 나오는 러시아에 대해 한 말

"이 꼬마는 자기 모순의 매듭덩어리 같구먼."
- 전제 군주 집안에 태어난 왕자로서, 스위스 출신 가정교사에게서 계몽사상으로 교육을 받은 어린 손자 알렉산드르를 보고 예카테리나 대제가 평한 말

"난 무책임한 게으름뱅이이고 진실된 생각과 말,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  난 이기적 사람인데 그 주된 이유는 허영심 때문이다."
- 1789년, 당시 12살이던 알렉산드르가 적은 일기 중에서   

"내 계획은 와이프와 함께 라인 강변에 정착하여, 평범한 사람으로서 친구들과 함께 자연 철학을 공부하며 행복을 찾는 것이다."
- 1796년 당시 19세이던 왕자 알렉산드르가 친구에게 한 말

"이 황태자가 성당에 들어갈 때보니 자기 할아버지를 살해한 자들이 앞장서서 들어가고, 황태자를 둘러싼 자들은 자기 아버지를 시해한 자들이고, 황태자를 시해할 준비가 된 자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더군요."
- 알렉산드르의 비자발적 묵인 하에 아버지 파벨 1세가 암살된 이후 알렉산드르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어느 프랑스 망명 귀족의 편지 중에서

"제 아버지를 암살한 귀족들을 처벌하지 않고 여전히 고위직에 두고 있는 러시아 짜르가 이런 비난을 하다니 매우 희한한 일이다."  
 - 1804년 앙기엥(Enghien) 공작을 납치하여 사법살인한 나폴레옹의 행위를 알렉산드르가 맹비난하자 그에 대해 대외적으로 발표한 프랑스 외무부의 반응.  알렉산드르는 괜히 나섰다며 크게 후회했다고 전해짐.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보다 짜르 알렉산드르 개인이 훨씬 더 철저히 패배했다."   
-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 프랑스 외교관 Joseph de Maistre의 편지에서    


"완전히 새로운 체제가 현재까지의 체제를 교체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나폴레옹 황제와 직접 만나 담판 짓는다면 그런 체제에 대해 매우 쉽게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 1807년 틸지트(Tilsit) 회담 직전 프랑스 측에 보낸 알렉산드르의 편지 중에서

 



"내가 보나파르트와 단 둘이서 마주 앉아 하루에 몇 시간씩 대화를 하며 며칠을 보냈다는 것을 상상해보거라.  정말 꿈 같은 일이 아니냐 ?"
- 1807년 틸지트 회담 이후 여동생 예카테리나에게 보낸 알렉산드르의 편지 중에서

"폐하, 조심하소서 !  선황 폐하의 전철을 밟을까 두렵사옵니다."  
- 틸지트 회담 이후 어느 알렉산드르의 심복 중 하나가

"폐하와의 동맹, 특히 영국과의 전쟁은 이 나라에서의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 자체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건 마치 완전한 개종과 같은 수준의 일입니다."
- 틸지트 회담의 결과로 러시아의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이루어진 뒤 상트 페체르부르그 주재 프랑스 대사가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군과 프랑스군, 그리고 일부 오스트리아군으로 이루어진 5만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하여 아시아로 출정한다면, 단지 유프라테스 강까지만 진격해도 영국은 벌벌 떨며 대륙의 발 밑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 1808년 2월 알렉산드르에게 보낸 나폴레옹의 편지 중에서

"이게 바로 틸지트에서 사용되는 언어야 !"
- 위의 나폴레옹의 편지를 읽으며 흥분한 알렉산드르가 내뱉은 찬탄

"알렉산드르, 너의 몰락을 스스로 자초해서는 안 된다 !  백성들의 존경은 잃기는 쉽지만 되찾기는 어렵단다.  그 회의에 참석한다면 넌 그걸 잃을 것이고 결국 제국을 잃고 가족들도 파멸시킬 거란다."
- 1808년 9월 나폴레옹이 소집한 에르푸르트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려는 알렉산드르에게 보낸 모후의 편지 

"우리가 공공연하게 군비를 확충하고 무장 병력을 과시하거나, 요란하게 나폴레옹를 비난하는 것은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는 오로지 심오한 침묵 속에서만 준비를 해야 합니다."
- 위의 모후의 편지에 대한 알렉산드르의 답장

"나폴레옹은 내가 그저 바보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오래 웃는 법이지. (중략) 유럽은 우리 둘이 공존할 수 있을 정도로 넓지 않단다.  둘 중 하나는 조만간 무릎을 꿇어야 할 거야."
- 위의 편지와 함께 따로 여동생 예카테리나에게 보낸 알렉산드르의 답장

 

"두 황제는 서로의 조치에 대해 비교적 만족한 상태로 헤어졌다.  그러나 기저에는 서로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었다."

- 에르푸르트 조약 직후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 콜랭쿠르의 관측

"유럽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폐하 뿐입니다.  폐하께서 그러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폴레옹에게 반기를 드시는 것입니다."
- 에르푸르트 조약 기간 중 알렉산드르와 몰래 접촉한 프랑스 전직 외무장관 탈레랑이 알렉산드르에게 한 말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reinhardt100 2019.06.17 0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파벨 1세가 장기집권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습니다. 파벨 1세가 흔히 암군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엘리자베타 여제 이후 모순에 가득차던 농노제의 위험성을 가장 먼저 인식하고 급진적으로라도 개혁하려고 했던 군주였죠. 주 7일 중 4~7일을 귀족의 토지에서 일하는 수준의 막장 농노제를 건드려버린 것만으로도 이미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죽고 난 후 아들인 알렉산드르 1세는 외치에 집중하여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자로써 죽을 때까지 확실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내정은 바뀐거 없었고 제정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조 또한 긴 몰락의 세월을 걷게 됩니다.

  2. 00 2019.06.17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족들이 천상외교를 하던 당대론 애매하되 현대 기준에서 탈레랑은 매국노가 확실하군요.

  3. 유애경 2019.06.17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세때 친구에게 한 말과 대관식에 참가한 프랑스 망명귀족의 편지에서 어찌보면 알렉산드르도 시대의 피해자(?) 였을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황가의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후계자로 태어났을뿐 진정으로 그길을 원했을까...

  4. 수비니우스 2019.06.17 1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가 공공연하게 군비를 확충하고 무장 병력을 과시하거나, 요란하게 나폴레옹를 비난하는 것은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는 오로지 심오한 침묵 속에서만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말이 인상깊네요.

  5. 까까님 2019.07.05 1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에 웃는 놈이 젤 오래 웃는다
    남들은 내가 찐따인 줄 알지만 어디 두고봐라
    불곰 같이 생긴 여우라고 해야 하려나요

  6. 샤르빌 2019.07.23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의 탈레랑이 한 말이 의미심장하네요.. 원래 나폴레옹 라인이 아니었나..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싸움인 대륙 봉쇄령으로 인한 영국의 곤경이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곡물 가격은 대륙 봉쇄령 이후 60%나 치솟았고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표면적으로는 잘 되고 있었습니다.  1805년 5110만 파운드이던 수출액이 1808년에는 4970만으로 떨어지더니 1810년에는 다시 6220만 파운드로 늘어났거든요.  이는 유럽 대륙으로의 수출이 막히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밀수 등을 통해 여전히 유럽에도 많은 상품을 팔고 있었지요.  그러나 1810년 중순 이후 나폴레옹의 밀수 단속이 강화된데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 특성상 대금의 상당 부분을 현금 대신 원자재나 채권을 받아야 했던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는 돈은 부족한데 유럽 대륙의 전쟁 자금은 금화나 은화로 된 경화로 지급해야 했으니, 아무리 영국이 부자 나라라고 해도 돈이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1809년 한 해에만 무려 4420만 파운드를 전비로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의심쩍은 지폐만 넘쳐날 뿐 경화가 부족해지자 영국에서는 극심한 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재기가 발생하여 더욱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에 빠진데다, 금본위제 재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은행들도 재무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1811년에는 금융 불안정과 함께 수출액도 4390만 파운드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유럽 대륙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당시 영국처럼 산업과 금융이 발달한 나라가 없었으니, 그 타격은 당연히 영국이 가장 크게 입었습니다.  




('템즈 강에서의 선적'이라는 Samuel Scott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승기가 막 보이려는 시기인 1810년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의 방향을 확 돌려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과의 공공연한 무역 재개 및 나폴레옹에 대한 사실상의 도전장이었거든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이미 다룬 내용입니다만, 기억 전환을 위해 잠깐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서는 영국을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나름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상품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인지라 유럽 각국은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고 밀수를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다스리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도 '면허제'라는 이름 하에 몇몇 상인들에게 영국 상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해안가를 아예 프랑스 영토로 병합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네덜란드 및 발트해에 면한 함부르크(Hamburg), 브레멘(Bremen), 뤼벡(Lubeck) 등 북서부 독일 소공국들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영토는 사상 최대로 확장되었고, 영국의 재정난이 더 심해지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대륙 봉쇄령의 이런 강압적인 실행은 영국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고통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동맹국들의 불신과 반발심도 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의 체면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르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다스리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국까지 병합해버린 것은 당시 유럽 대륙의 양대 세력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싸늘한 적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아, 프랑스가 이토록 크고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이런 병합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의 적국인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올덴부르크의 병합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제시했습니다.  즉, 2년 전 알렉산드르와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던 회담 장소였던 에르푸르트(Erfurt)를 보상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모욕으로 받아들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보상안을 거부했고,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 황제 칙령(ukase)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칙령은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크게 2가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1)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높은 관세를 부과

2) 중립국 선박의 상품이 "명확히" 영국산이 아닌 경우 러시아 항구에 입항 허용


이는 대표적인 프랑스 상품을 배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상품에 대해 환영하는 초대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냥 허술하게라도 가짜 서류만 만들어 제출하면 되었으니까요.  아는 나폴레옹의 패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장이었고 이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도발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의식 과잉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렉산드르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리 여동생이 가엾다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


당연히 그런 결정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다른 요소들이 관여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역시 폴란드와 영국이었습니다.


서방 진출을 국가 정책으로 삼는 러시아에게 있어 폴란드는 서쪽에 확보한 소중한 발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샤바 공국은, 아무리 독립국이 아니라 작센 왕의 개인 영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러시아에게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조그마한 공국에 불과할지라도 폴란드인들의 독립 정권이 있다는 것은 러시아령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서 꽤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람 전투의 결과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혹시라도 폴란드가 정식으로 독립 왕국으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러시아에게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이런 불안감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영리하게도 부지런히 조장했습니다.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를 비밀리에 이간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의 패망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당시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를 빼앗고 싶어 했는데, 그 강력한 경쟁자가 러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관계라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의 맹약인 틸지트(Tilsit) 조약을 깨뜨리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폴란드를 수단으로 정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한다'라는 소문을 빈과 바르샤바에 꾸준히 퍼뜨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810년판 가짜 뉴스였던 셈인데, 메테르니히의 비밀 선동에 홀딱 넘어간 순진한 폴란드인들은 독립 열망에 부풀었고, 바르샤바 신문들은 독립이라는 희망찬 뉴스를 꾸준히 찍어댔습니다.  이런 상황은 빈과 바르샤바에 있던 러시아인들에 의해 그대로 알렉산드르에게 들어갔고, 그의 우려와 분노는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 쿠라킨(Alexander Borisovich Kurakin, Александр Борисович Куракин)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아 '다이아몬드 대공'으로 불렸던 쿠라킨 대사입니다.  그는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코스별로 차례차례 서빙되는 러시아식 정찬 방식(service à la russe)을 프랑스에 전해 오늘날의 프랑스 코스 요리를 완성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을 막아보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화를 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로 작년 오스트리아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즉각 병력을 파견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쳐부수어야 했습니다.  그런 편의를 바라고 나폴레옹은 폴란드 애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폴란드 독립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핀란드까지 러시아에게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모두 잊고 러시아는 교활하게도 러시아령 폴란드 인근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분쇄하자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침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건 황제들끼리 우정을 나눈 동맹국의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꾹 참고 우방국 대우를 해주었더니 나폴레옹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폴란드 독립에 대해 항의해온다 ?  이런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에 대해 공손하게 대응할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처가집인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의 획책 하에 끊임없이 러시아군의 이동 및 요새 강화에 대해 나폴레옹에게 고자질을 하며 이런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과 이런 험악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알렉산드르는 각지의 요새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 것은 역시 폴란드 건이 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교황을 잡아가둔 나폴레옹의 폭거가 독실한 카톨릭인 폴란드 국민들에게 공분을 샀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더 많은 자치권과 좀더 관대한 헌법을 약속하며 폴란드인들에게 18세기때처럼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는 것이 폴란드에게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바르샤바에 그가 심어둔 밀사들은 바르샤바의 분위기를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왔습니다.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결국 폴란드에게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접한 알렉산드르는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국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폴란드인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역시 메테르니히의 획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냄새나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외교관인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Prince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입니다.  가짜 뉴스를 정치 외교에 활용하는데 있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르에게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폴란드 외에도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지요.  그것은 물론 영국, 좀더 정확하게는 영국과의 무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드넓은 평원을 가진 대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홍차와 설탕, 면직물, 비단, 강철 등의 물품을 수입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남아도는 자국산 밀과 아마 등의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 뿐이었는데, 원래 그 가장 큰 고객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때문에 영국과의 교역이 막히자 러시아의 귀족들은 돈줄이 막혔고, 그 불만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정권을 위태롭게 할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드로서는 그런 불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나폴레옹이 여동생 시댁인 올덴부르크를 제멋대로 병합해버리고 (이건 가짜 뉴스에 의한 오해였지만) 폴란드까지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810년 12월 31일, 그는 나폴레옹의 따귀를 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칙령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1811년 4월 2일자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쟁은 발발할 것이오.  나와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그를 막기 위해 노력하거나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익이 아무리 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오.  난 이런 상황을 자주 보았고, 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쟁이 발발할 거라는 것은 마치 오페라의 줄거리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뻔한 이야기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바로 영국이오."


이제 나폴레옹의 제국은 몰락을 향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들어갑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istory of the Expedition to Russia Undertaken by the Emperor Napoleon  by Philippe-Paul Comte de Segur

https://www.britannica.com/event/Napoleonic-Wars/The-Continental-System-and-the-blockade-1807-11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04/16/the-port-of-london-in-the-18th-centur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Kurakin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까까님 2019.01.28 0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짜뉴스가 힘을 갖는 건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빙판길에 출근 잘 하시고 곧 설인데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십시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석총 2019.01.28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헬게이트가 열리는 군요

  3. 웃자웃어 2019.01.28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도 이미 러시아 본토로 깊숙히 진군하면 패배할수밖에 없단걸 아일라우 전투때 알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러시아에 쳐들어 갔을까요?

    • 하이텔슈리 2019.01.28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은 러시아 본토 깊숙히 진군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쳐들어가서 빨리 러시아 주력을 격파하고 차르를 협상장으로 불러내 굴복시키려는 게 전쟁의 목적이었죠. 문제는 러시아군이 안싸우고 계속 도망치고 이걸 쫓아가다보니 모스크바까지 가버린 것일 뿐이에요. 모스크바 함락 시점에서 이미 나폴레옹의 계획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시점이었던 거죠.

    • 다부 2019.01.30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러시아를 육로로 직공하는 건 위험하니
      발트해안 도시들을 동원해서 리보니아에 해상보급망을 설치하고
      리보니아의 거점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노린다는 계책을 나폴레옹에게 건의를 했는데,

      나폴레옹이 "그런 성가시고 시간 걸리는 방법 아니라도 내 작전술로 간단히 쳐 없앨 수 있어"
      라고 판단해서 바로 육로로 직공했죠.

      나폴레옹은 천재지만 자신의 재능을 너무 과신해서 일이 잘 못 되었을 때를 대비하지 않고
      작전술에 너무 의존함으로서 원정에 실패했죠.
      만약에 루이 니콜라 다부의 계책대로 신중하게 러시아를 리보니아에서 압박하는 작전을 썼다면
      당시 러시아도 상황이 어려웠던 만큼 "보급문제가 해결된 대육군"을 상대로 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보로디노 전투때에도 루이 니콜라 다부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우회기동해서 쳐야 된다고 건의했는데 역시 나폴레옹에게 묵살당했죠.
      이 때에도 나폴레옹이 루이 니콜라 다부의 건의대로 했다면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죠.

    • 웃자웃어 2019.01.30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이텔슐리님, 애초에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도 비슷한 전술을 썼는데도 러시아군에게 고전했습니다. 폴란드에서도 크게 고전했는데, 그보다 더 광활한 러시아라면 얼마나 더 고전하겠습니까? 그걸 모를리가 없는데도 러시아를 공격했고, 현지조달을 바탕으로 하는 전술을 유지했다는것 자체가 미친짓이죠.

  4. 카를대공 2019.01.28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나폴레옹 전쟁의 절정(?)인 러시아 원정의 길이 시작되는군요.
    예나 전투 때부터 그랬습니다만,전성기에 비해 한물 간 판단력의 나폴레옹이 어떻게 그려질지 흥미진진 합니다.

  5. 안드레이 2019.01.29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테르니히의 활약이 돋보이네요 비스마르크도 그렇고 역시 외교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은 후세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이 가능한가 신기하기만 합니다

  6. nashorn 2019.01.30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마지막..

  7. 샤르빌 2019.01.30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막연하게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홧김에 전쟁이 터진줄 알았더니 역시 온갖 원인과 전조로 전운이 감돌고 있었네요.. 메테르니히의 공작과 폴란드 문제..

  8. starlight 2019.02.02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러시아 원정은 그 역사가 만약이 없다라는
    명확한 반증이죠. 2000km가 넘는 전역을 보급도 수송도
    병력 충원도 지연되고 끊어지고 소멸되고,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통신도 분절되고 병력 통제도 안되고, 자연사하듯 군마는 끊임없이 고꾸라지고, 병력들은 이탈하고 와해되고 이질에 쓰러지고 전투에서 소모되고,
    눈발에 얼어 동상으로 죽고 탈진과 아사로 학살아닌 학살같은 참상이죠. 아비규환입니다.

  9. 알키비아데스 2019.02.08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헨리 키신저가 메테르니히 숭상할만 하네요

성공한 남자가 이혼을 하는 이유는 조강지처와의 성격 차이나 식어버린 애정 문제가 아닙니다.  이유는 단 하나, 새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세핀과의 이혼이 공식 발표되기 한 달 전,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인 콜랭쿠르는 본국으로부터 지시문을 받습니다.  나폴레옹과 로마노프 가문과의 혼인을 추진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상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둘째 여동생, 안나(Anna Pavlovna)였습니다.  안나는 당시 14세로서 사실 결혼하기는 너무 이른 나이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생일이 1월이었으므로 불과 몇 달 뒤면 15세가 되었고, 15세면 당시로서는 혼인이 불가능한 나이도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과 무려 26세 차이가 나는 이 어린 소녀에게 혼인 의사를 밝힌 것이지요.





(안나 파블로브나입니다.  이 초상화는 1813년에 그려진 것으로, 이 그림 속의 나이는 18세입니다.  안나는 결국 오렌지공 빌헬름과 결혼하여 나폴레옹 몰락 이후 새로 태어난 네덜란드 왕국의 왕비가 됩니다.)




이건 굉장히 민감하고 까다로운 문제였습니다.  이미 지난 1808년 9월~10월의 에르푸르트(Erfurt) 회담에서, 나폴레옹은 짜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넌지시 그의 첫번째 여동생 예카테리나(Ekaterina Pavlovna)와의 혼사에 대해 의향을 물은 바 있었습니다.  언니 예카테리나(Ekaterina Pavlovna)는 알렉산드르가 가장 좋아하는 여동생으로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끼는 동생이자 로마노프 왕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처녀였습니다.  이 황녀와의 혼인에 대한 알렉산드르의 대한 답변은 회담 직후에 행동으로 나왔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다소 점잖지 못할 정도로 서둘러' 이 여동생을 사촌 관계인 올덴부르크 공작 게오르그(Duke George of Oldenburg)에게 시집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혼사를 논의한다 ?  이건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만약 러시아가 다시 한번 거절한다면 그건 가뜩이나 위태롭게 유지되던 프랑스-러시아의 동맹에 결정타를 먹이는 외교 참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성공하기만 한다면 틸지트(Tilsit) 조약으로 맺어진 두 황제의 결속을 혈연 관계로까지 굳게 만드는 쾌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콜랭쿠르는 매우 유능한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의 의사를 넌지시 러시아 궁정에 흘렸고, 그 반응을 떠보았습니다.  




(아르망 콜랭쿠르입니다.  그는 콜랭쿠르 후작 가문 태생으로서 진짜 귀족이었고, 때문에 혁명군에서 복무했는데도 반혁명파로 의심받아 대혁명 때 억울하게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매우 유능하고 성실한 군인이자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에게 끝까지 충성했지만 그냥 맹목적인 충성만 바치는 것은 아니라서 러시아 침공에는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르로부터도 높이 평가를 받았고, 워털루 전투 이후 체포 및 숙청 대상에 오르기도 했으나, 알렉산드르의 요청으로 그 살생부에서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까지 로마노프 황가와의 혼인을 원했던 이유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러시아가 당대 유럽 최강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틸지트 회담에서도 드러났지만, 나폴레옹의 빅 픽처는 유럽 대륙의 질서를 프랑스와 러시아가 양분하여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왕 새장가를 간다면, 유럽 최강의 가문을 자기 아들의 외가집으로 만드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러한 제안을 접한 알렉산드르도 난처한 처지였습니다.  그에게도 나폴레옹과의 연합은 무척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당대 제1의 권력자이자 영웅인 나폴레옹과 척을 지고 싶겠습니까 ?  더구나 알렉산드르가 러시아의 숙원인 남방으로의 확장,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여 발칸 반도로 세를 넓히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협조가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틸지트에서 나폴레옹이 약속한 달콤한 열매는 핀란드 외에는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젊고 멍청한 짜르가 노련한 나폴레옹에게 휘둘려 이익은 보지 못하고 착취만 당한다는 비웃음을 사는 것은 알렉산드르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 귀족들과 국민들은 대부분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이 컸습니다.  원래 러시아 민중은 독일이건 프랑스건 외국인이라면 다 싫어했으므로 그런 성향이 이해가 가는 일이었습니다만, 귀족들은 왜 나폴레옹을 싫어했을까요 ?  대부분의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정도로 프랑스 문화를 동경했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도 단순했습니다.  돈이었지요.  러시아 토지 귀족들의 돈 줄은 자신의 농노들이 생산한 잉여 농산물을 영국으로 수출하는 것이었는데,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영국과의 교역이 끊기면서 입는 금전적 피해가 컸습니다.  


아무리 러시아 짜르가 나폴레옹과는 달리 국민들의 지지 여부와는 무관한 전제 군주정이라고 해도, 온 나라가 싫어하는 나폴레옹과 사돈관계가 되는 것에는 압박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알렉산드르와 안나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이 결혼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아직 15세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딸을 머나먼 타국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더군다나 신랑이 40대 코르시카 촌놈이라니 !  알렉산드르는 어머니의 반대를 핑계삼아 뚜렷한 입장 표명을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에 밀당이 벌어지는 사이 난리가 난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쇤브룬 궁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궁정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간의 혼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나파르트 가문과 로마노프 가문이 양분하는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 결혼이 그대로 성사된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미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진 프로이센의 호헨촐레른 가문처럼 될 것이 뻔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측도 기민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로마노프 대신 자신들과 혼인을 해달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거절당하면 정말 그 망신은 수습이 안 될 지경일테니까요.  


움직인 것은 노련한 메테르니히(Metternich)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측과 선이 닿는 사람과의 모호한 대화를 통해 프란츠 황제의 딸 마리아 루이자(Maria Louisa, 프랑스식으로는 Marie Louise)와 나폴레옹의 결혼 가능성을 넌지시 프랑스 측에 전달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전략은 브랜드 가치였습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보다는, 대대로 유럽 중앙 무대에서 명예와 권위를 쌓아온 합스부르크 왕조가 나폴레옹과 그 아들의 미래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호소였지요.  이건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까놓고 보면 러시아는 까마득히 먼 동방의 나라였고, 단지 머릿수가 많아 군대 머리 수가 많을 뿐 유럽의 후진국에 불과했습니다.  로마노프라는 이름은 유럽 귀족 세계에서 존경과 경외보다는 두려움과 경멸을 자아내는 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황후 마리 루이즈입니다.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 제라르의 그림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인들로부터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그냥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 때문에 말수가 적었을 뿐, 매우 상냥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유사시 나폴레옹에게 실질적 군사적 도움을 줄 친구로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중 택일하라면 그것 또한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머릿수는 러시아보다 오스트리아가 더 적었으나 그 질적 문제에 있어서는 오스트리아군이 결코 프랑스군보다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번 전쟁을 통해 나폴레옹이 직접 경험한 바 있었지요.  무엇보다, 러시아는 이역만리 저 동방 진흙밭 너머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당장 영국 또는 프로이센과 전쟁이 벌어지거나 이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 먼 곳의 러시아군 10만보다는 가까운 오스트리아군 5만이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알렉산드르의 지연되는 반응을 나폴레옹은 사실상의 거절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미 간접적으로 예카테리나에 대한 청혼을 거절당한 입장에서, 그 동생 안나까지 거절당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처럼 자의식 강한 사람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러시아와의 혼인 동맹이 자신의 이익에 가장 부합된다고 판단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혼인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측근들을 소집하여 러시아냐 오스트리아냐를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뮈라와 푸셰, 캉바세레스는 러시아와의 혼인에 표를 던졌으나 마레(Hugues-Bernard Maret, duc de Bassano)가 주도하고 탈레랑도 가세한 다수파는 오스트리아를 택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으로서도 태도가 모호했던 러시아보다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오스트리아를 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결론짓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음해인 1810년 1월,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을 결심합니다.  





(바사노 백작 마레입니다.  그는 전문 법률가였으나 혁명 와중에 외무부에서 일하면서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무척 뛰어난 관료였던 그는 나폴레옹의 재혼 1년 후인 1811년 샹파니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이 됩니다.)   




원래 결혼이란 사랑하는 남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건 지극히 현대적인 개념이고, 당시로서는 결혼하는 당사자들, 특히 여성의 의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조차 측근들에게 '나는 (아들을 낳아줄) 자궁과 결혼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새 아내가 될 마리 루이즈 본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정작 마리 루이즈가 자신과 나폴레옹의 결혼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이미 파리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인 슈바르첸베르크(Karl Philipp, Fürst zu Schwarzenberg) 대공이 1810년 2월 7일, 결혼 계약서에 서명한 뒤의 일이었습니다.





(메테르니히의 뒤를 이어 파리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가 된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입니다.  그는 울름 포위전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을 따라 탈출한 기병대의 일원이었고, 러시아 대사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바그람 전투에도 참전했던 그는 나중에 연합군의 고참 지휘관으로서 1813년 드레스덴 전투에 참전하여 다시 나폴레옹의 손에 참패를 겪기도 합니다.)




마리 루이즈에게 이건 정말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을 통해 팽창하는 가문의 공주답게 다른 왕가의 왕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전형적인 합스부르크의 딸이었습니다.  그런 그녀는 당연히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을 철저히 증오하도록 키워졌습니다.  뭐 딱히 증오를 가르칠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침공 때문에 두번이나 피난을 떠나며 공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생고생을 해야 했던 마리는 이미 나폴레옹을 무슨 괴물이나 도깨비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바로 그 나폴레옹과 결혼을 해야 한다니 !  당시 그녀는 불과 18살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당시로서는 결혼 적령기의 나이이긴 했습니다만, 20대 꽃미남은 커녕 이제 40대에 접어든 통통한 중년 아저씨와의 결혼은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합스부르크의 공주다운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영어와 불어,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에 라틴어까지 할 줄 알았는데, 가문의 필요상 어느 나라로 시집을 가든 준비된 왕비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합스부르크의 공주는 상대가 누구이든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는 기꺼이 그 아내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제 오스트리아의 외무부 장관이 된 메테르니히가 그녀에게 나폴레옹과의 결혼을 통보하면서 그 결혼에 동의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제 의무가 제게 시키는 것만 바란답니다."


마리 루이즈의 말 그대로였습니다.  18세 젊은 처녀가 무엇을 바라고 어떻게 느끼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관련국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는 중요했지요.  빈 시민들은 이를 경사로 받아들였습니다.  빈을 점령했던 프랑스군은 규율있게 행동했고 또 빈 시민들도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사실 양국 대중들은 서로를 미워할 이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이번 결혼으로 최소한 프랑스와 더 전쟁을 벌일 일은 없게 되었다며 크게 기뻐했습니다.  무엇보다, 유럽 제일의 권력자가 자기 나라의 사위가 된 것처럼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생페체르부르크에서는 감정이 엇갈렸습니다.  귀족들과 국민들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은 대륙봉쇄령과 동일시 되었는데, 최소한 그 지긋지긋한 인간과 인척 관계까지는 맺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짜르 알렉산드르는 격분했습니다.  온통 반프랑스 분위기인 나라에서 자기 하나만 나폴레옹을 믿고 친프랑스 정책을 폈는데, 답변이 늦는다는 이유로 대뜸 합스부르크 가문과 혼인을 해버리다니 자신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대사인 콜랭쿠르는 알렉산드르의 기분을 달래주느라 한창 애를 썼습니다만, 이 결혼이 틸지트 조약에서 그려진 나폴레옹의 빅 픽처에 큰 균열을 만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은 이 결혼에 대해 꽤 흡족해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마리 루이즈가 곰보이든 뚱보이든 전혀 개의치 않았으나, 순종적이고 품위있는데다, 결정적으로 어리고 브랜드 가치가 좋은 이 합스부르크 공주를 애지중지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조세핀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하게 될 정도였지요.   게다가 아스페른-에슬링에서 전사한 절친 란의 1주년 추모식 행사에 '오스트리아 출신 황후를 배려하기 위해서' 불참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나중에는 너무 순종적고 내성적이라 조세핀의 정열과 활달함이 아쉽다는 소리도 함께 하여 마리 루이즈의 격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 국민들의 감정이었는데, 오스트리아 공주님이 자신들의 황후 마마가 된 것에 대해 프랑스 대중의 감정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마리 앙뚜아네트로 대표되는 앙시앵 레짐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나폴레옹은 앙뚜아네트가 거쳤던 결혼 의식을 그대로 벤치마크했습니다.  그는 앙뚜아네트가 프랑스에 시집올 때의 코스 그대로 마리 루이즈의 여행길을 짜도록 했고, 신부를 국경선에서 오스트리아 측으로부터 인수받을 때도 앙뚜아네트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고국의 모든 것을 두고 오도록 현장에 가설한 천막에서 속옷까지 다 프랑스제로 갈아입고 오도록 했습니다.  이런 의전은 자신의 황권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되살린 것이었습니다만,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통치가 부르봉 왕조의 전제정으로 퇴화하는 것 아닌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커스틴 던스트가 주연한 2006년도 영화 '마리 앙뚜아네트' 입니다.  최근에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것을 잠깐 봤는데,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갈 때 애완견을 포함한 오스트리아의 모든 것을 다 두고 가야 한다면서 프랑스 측에서 나온 귀부인이 앙뚜아네트를 벌거벗기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실제로도 그랬답니다.  영화는 재미없어서 도중에 채널 돌렸습니다.)




어쨌거나 합스부르크라는 브랜드 가치는 그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파리는 결혼 축하 행사와 축포로 떠들썩했고, 일단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나폴레옹을 가장 흡족하게 했던 것은 오스트리아 대사 슈바르첸베르크 대공의 건배사였습니다.  그는 잔을 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로마 왕(Roi de Rome)을 위해"라고 외친 것입니다.  로마 왕이라는 것은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황태자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칭호였습니다.  영국에서 왕세자를 웨일즈 왕자(Prince of Wales)로 부르거나 조선 왕조에서 세자를 동궁(東宮)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지요.  오스트리아 대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폴레옹 2세에게 그 칭호를 바침으로써 나폴레옹이 그토록 원하던 것, 즉 대포와 총검이 아닌 전통과 권위에 의한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고 여기게 해준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허황된 꿈에 불과했습니다.  나폴레옹 제국은 이미 몰락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Marie_Louise,_Duchess_of_Parma

https://en.wikipedia.org/wiki/Armand-Augustin-Louis_de_Caulaincourt

https://en.wikipedia.org/wiki/Anna_Pavlovna_of_Russia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투팍아마르 2017.12.17 2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의 혼사는 짜르 알렉산드르에게는 한마디로 계륵과 같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나저나 본인이 두번씩이나 거절했으면서 나중에 열받는건 무슨 심보인가요?...ㅋ

  2. 보니666 2017.12.18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2등. 영광입니다~~^^

  3. ㅇㅇ 2017.12.18 0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등 찍어봅니다 ㅎㅎ

  4. 유애경 2017.12.18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란의 일주년 추모식에도 불참할 정도로 루이즈의 눈치를 살폈다니, 말로가 어찌됐던 그렇게 공을 들여 로마왕을 얻었으니 일단목표는 달성한 셈인가...

    저 영화, 확실히 재미 없었어요^_^.
    내용보다는 화려한 비쥬얼(배경이나 소품등)에 중점을 둔 영화라는것 같던데...

    잘보고 갑니다~

  5. ㅋㅋ 2017.12.18 1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 나폴레옹은 두 번이나 자신을 배신한 오스트리아와 결혼했는지 의아하군요 결국 또 배신 당하지 않았습니까 나폴레옹도 나중에 이를 굉장히 후회했죠 왜 그랬던걸까요?

  6. 까르르 2017.12.19 18: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거 바그라티온 이야기에서 빌헬름과 결혼한 것은 언니인 예카테리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어느쪽이 맞는 것인지요?

  7. 에어메딕 2018.01.05 05: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늘 재밌는 글이네요. 잘 읽고 있습니다. 담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