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21 06:00

하지만 본격 산당국(産糖國)의 꿈이 현실화되기 전에 전쟁의 물결이 닥쳤습니다.  아카르트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빌헬름 3세가 알고보니 멍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입만 살았던 강경파의 주장대로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고, 나폴레옹은 '내가 바로 나폴레옹이다'라는 것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빌헬름 3세에게 혹독하게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이 전쟁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정제소까지 집어 삼켰습니다.  1806년 밀물처럼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공장을 불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아카르트는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잠겼습니다.  사탕무 정제소가 사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온 나라가 탈탈 털렸고, 나폴레옹에게 알짜배기만 골라 영토를 절반이나 빼앗기고 덤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내야 했습니다.  프로이센에게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걸었던 러시아까지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나폴레옹과 손을 잡으면서, 프로이센은 영원히 유럽의 3류 국가로 전락하는 듯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르트의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잔치집,  누군가에게는 초상집.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의 1807년 틸지트 조약 장면입니다.)




하지만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법입니다.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멸시키고 베를린에 입성한 뒤인 1806년 11월 21일, 대륙봉쇄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영국 선박이 실어오는 영국 및 그 식민지 제품들이 유럽 대륙에 발붙이는 것이 어려워졌지요.  이에 대응하여 영국도 추밀원 명령을 통해 프랑스 및 그 동맹국 해안을 역봉쇄했는데, 그러자 나폴레옹도 질세라 더 강력한 조치인 1807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원산지가 세탁된 영국 및 그 식민지 제품들이 중립국 선박을 통해서나마 유럽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 막히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여러가지 현상과 문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부 지역의 일부 산업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영국이 시장에서 사라지면서 부흥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로 인해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특히 설탕 ! 사람을 중독시키는 음식은 많습니다만, 술이나 커피나 담배나 홍차나 김치나 치즈나 첫맛은 '뭐 이런 맛이 다 있어 ?'라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설탕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처음 한번 맛을 보자마자 모두 좋아하게 된 음식은 정말 드물었습니다.  그동안 설탕에 중독되었던 유럽인들은 설탕이 식탁에서 사라지자 그저 아쉬움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절실한 갈증과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런 중독 현상에서 오는 갈증과 욕망은 자연스럽게 아카르트의 사탕무 설탕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유럽 내 설탕 값이 치솟으면서, 다시 아카르트에게 지원이 쇄도하며 1810년 그는 작은 규모나마 다시 사탕무 설탕 정제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공장은 곧 보헤미아와 아우크스부르크 등으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아카르트라는 프로이센 사람이 무에서 설탕을 뽑아낸다는 신기한 소식은 곧 나폴레옹의 귀까지 들려왔습니다.  스스로를 대단한 학자로 여겼던 그는 곧 과학자들로 구성된 파견단을 슐레지엔으로 파견하여 아카르트의 정제소를 조사했습니다.  이들은 돌아와서 그 복제판인 작은 정제소 2개소를 파리 인근에 지었는데, 이들은 아무래도 재료 품질이나 경험치에서 부족한 면이 있었는지 상용적인 성공을 거둘 정도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 빌어먹을 영국놈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설탕을 뽑아낼 수 있다는 증거를 본 나폴레옹은 크게 흥분했습니다.  바로 다음해인 1811년 나폴레옹은 칙령을 내려 100만 프랑(현재 가치로 약 160억원)을 들여 설탕 학교를 세우고 프랑스에서도 2만8천 헥타아르의 농토를 사탕무 재배에 할당하여 대대적으로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제 새롭게 태동하는 프랑스 설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태까지 면허장 제도 및 일부 중립국을 통해 수입하던 카리브산 설탕의 수입을 1813년부터는 완전 금지했습니다.  




(1865년 런던에서 설립된 리빅 고기 수프 액기스 회사 Liebig Extract of Meat Company의 불어판 기념 엽서입니다.  다소 엉뚱하지만, 여기에 아카르트의 사탕무 설탕 정제소의 모습이 그림으로 담겨 있습니다.  아마 같은 식품 회사들의 역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시리즈물이었나 봅니다.  설명에는 Fondation de la première fabrique de sucre de betterave par Achard 즉 아카르트에 의한 최초의 사탕무 설탕 제조 공장 설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가능케 만든 아카르트에게는 어떤 금전적 혜택이 주어졌을까요 ?  당시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프랑스에 이미 특허권 제도가 도입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레종도뇌르 훈장과 함께 그에 따른 두둑한 연금이라도 주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때 당시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호되게 당한 동맹국으로서 우방국이긴 했지만, 나폴레옹에게 있어 프로이센은 어디까지나 견제 대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카르트에게 어떠한 금전적 보상도 하지 않았고, 아카르트는 계속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작 그에게 보상을 제시했던 것은 엉뚱하게도 영국 설탕 상인들이었습니다.  카리브산 설탕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만끽하던 영국의 거대 설탕 상인들은 아카르트가 사탕무로부터 설탕을 만드는 방법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폴레옹이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돈이 궁하던 아카르트에게 무려 20만 탈러(현재 가치로 약 21억원)의 금전적 보상을 제시했습니다.  훨씬 더 생산성이 좋은 카리브 해의 노예 설탕 농장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왜 사탕무 특허권을 사려 했을까요 ?  그들이 원했던 것은 특허권이나 독점 생산권이 아니라, 아카르트에게 '사탕무 실험은 대실패였다, 역시 유럽에서 설탕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발표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카리브산 설탕의 경쟁자를 없애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 카리브해의 설탕 플랜테이션은 요즘의 유전과도 같은 부의 창출원이었거든요.  17세기 말 기준이긴 합니다만, 영국령 바베이도스(Barbados)의 81 헥타아르(24.5만평)의 사탕수수 농장과 그에 딸린 정제소면 영국 본토의 백작 가문과 맞먹는 부를 쏟아낸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영국이 값싼 설탕을 카리브해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태양과 쏟아지는 비 외에도 흑인 노예 덕분이었습니다.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잔혹한 조건에서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가야 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묘사하자면, 영국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실어다 카리브해에 갈아넣으면 그것이 설탕이 되어 나오는 셈이었습니다.)  



(그런 설탕 무역의 비윤리적인 면 때문에, 영국 내에서도 자국의 설탕 상인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컸고, 설탕없이 홍차를 마시자는 운동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풍자화에서 영국 왕과 여왕이 공주들에게 '설탕 없이 차를 마시니 아주 맛이 좋구나' 라고 이야기하는데, 공주님들의 표정은 과히 좋지 못하네요.)



(17~18세기 영국에서 카리브해의 설탕 농장을 통해 떼돈을 번 사람들을 sugar barons 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것도 원래 밑천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장사였고, 실제로 귀족인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설탕 귀족으로는 이 그림 속 주인공인 William Beckford와 함께 James Drax, Christopher Bethell-Codrington 등이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주인공인 벡포드는 말년에 모든 재산을 잃었지만, 크리스토퍼 코드링턴 같은 경우는 하원의원직을 유지하며 거듭된 노예 폐지 법안에 집요하게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아카르트의 고결함이 가장 빛났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설탕이 부유한 상인들의 배를 불리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온 인류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탐욕스러운 영국 자본의 유혹을 거절하고, 사탕무 재배법과 설탕 제조법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폴레옹이 파견한 과학자들도 아카르트로부터 그 제조법을 그대로 배워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유럽에서의 사탕무 설탕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사탕무 설탕 생산량은 나폴레옹 재위 기간 동안에 카리브산 설탕을 압도할 만한 규모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의 농업 생산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유럽은 굶주림이 존재하던 곳이었거든요.  사탕무보다는 당장 배를 채울 밀과 감자를 키우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에 사탕무 재배에 많은 토지를 할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화학 비료 등에 의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탕무 재배와 사탕무 설탕 생산량도 크게 늘었습니다.  1840년 사탕무 설탕은 전세계 설탕 생산량의 5% 정도만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1880년 경에는 그 비율이 무려 50%로 늘어났습니다.  사탕무의 전성시대가 끝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였습니다.  유럽 대륙이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면서, 아무래도 당장 군인들을 먹일 밀과 콩, 가축 사료용 옥수수 등의 재배가 더 시급했던 것이 원인이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전세계 설탕 생산량의 20%는 사탕무 설탕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 프랑스, 미국과 독일 등에서는 사탕무 재배가 활발합니다.




(현대 전세계의 사탕무 생산량입니다.  아카르트 덕분에 추운 지방인 러시아에서도 설탕 생산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유럽의 농업과 설탕 생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아카르트는 결국 그 공로를 인정받아 행복한 말년을 보냈을까요 ?  항상 그렇지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공법을 채택한 유럽 각지에서 사탕무 설탕 정제소가 계속 늘어났지만, 유럽인들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공개한 아카르트 소유의 정제소들은 그와 반비례하여 계속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노예 노동으로 생산된 값싼 카리브산 설탕이 영국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의 사탕무 정제소들은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던 1815년, 그의 공장은 결국 파산을 선언해야 했고, 다시 6년이 지난 1821년 아카르트는 그가 사탕무 사업에 인생을 바친 슐레지엔 볼라우(Wohlau)에서 빈곤 속에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

https://en.wikipedia.org/wiki/Sugar_beet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media/File:Liebig_Company_Trading_Card_Ad_01.12.005_front.tif

https://janeaustensworld.wordpress.com/2011/03/14/cesar-picton-wealthy-merchant-and-freed-man-the-regency-era/

https://www.economist.com/node/21525808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Bethell-Codrington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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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푸냐옹 2018.05.21 0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나시카님의 글 감사히 잘보고 있습니다
    매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모바일 정보창고 2018.05.21 1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날씨가 엄청 좋네요. ^^
    멋진 하루 되세요~

  3. 투팍아마르 2018.05.21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해군 봉쇄하에 유럽대륙에서 사탕수수 대신 시도한 사탕무우 농사는 실패라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아닌것 같네요. 어째든 이 아카르트라는 분은 인격에 있어서도 고귀한분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4. franken 2018.05.21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일담이 참으로 가슴아프군요.

  5. zxc 2018.05.22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고귀한 인품과 신념을 가진 사람은 빈곤속에 사는것같네요..

  6. 몽생 2018.05.23 2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경제적으로도 성공했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2018.05.14 07:25

1776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프로이센 왕립 과학 학회(Königlich-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의 회원이 된 프로이센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아카르트(Franz Karl Achard)였습니다.  이름을 보면 순수 독일인 같지 않다고 느끼실 수 있는데, 제대로 보신 것입니다.  아카르트라는 집안은 원래 프랑스에서는 아샤르라고 발음되던 위그노(Huguenot, 프랑스 내의 개신교도) 집안으로서, 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렇게 전도 유망한 이공계 인재는 대기업에 입사를 하든 스타트업 기업을 창업하여 주식으로 대박을 터뜨렸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학회 회원이 되었다는 것이 출세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청년은 평민 목사의 아들로서, 귀족 위주로 돌아가던 프로이센 사회에서는 그저 좀 잘 나가는 땜쟁이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카르트의 초상화입니다.  근사한 유채화로 된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을 것을 보면 이 분의 최후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학회 회원이 된지 불과 6년 만에 후원인격이었던 학자 마르그라프(Andreas Sigismund Marggraf)의 사망 뒤 그 뒤를 이어 학회 내 물리학 분과의 감독관이 될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마르그라프도 그렇고 아카르트도 그렇습니다만, 정작 이 분들의 이름은 현대의 물리학이나 화학 교과서에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당시 유럽의 선진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과학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나 달턴(John Dalton), 라브와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와 앙페르(André-Marie Ampère) 등 요즘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장식하는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이 트럭 분량으로 쏟아져 나오던 것에 비해 프로이센의 과학 기술은 약간 초라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라면 훔볼트(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von Humboldt)가 있었습니다만, 훔볼트의 성장은 아버지가 군 장교라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을 대부로 둘 정도로 비교적 유복했던 살림살이 덕분이 컸습니다.  그는 남북 아메리카를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당대 유럽 최고의 지리학자가 되었으니까요.   그나마 이 양반이 그렇게 유명해진 것도 미국 등 해외가 먼저였고, 훔볼트가 프로이센 왕립 과학 학회의 회원이 된 것은 그의 나이 36세였던 1805년이 되어서였습니다.





(훔볼트에 대해서 저는 중고등학교 때 해류에 대해서 배울 때 그 이름을 들었습니다.  전에 EBS 특집 방송을 보니, 이 분의 위대함은 해류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더군요.  당대 학계의 수퍼스타급 인물이셨습니다.  유익한 여행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프로이센의 과학 기술 토대가 부족했지만, 그래도 아카르트가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에도 과학자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프로이센의 걸물인 프리드리히 대왕 덕분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저 전쟁질에만 뛰어난 군인 왕은 아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1740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베를린의 프로이센 왕립 과학 학회를 다시 오픈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helm I)는 '예산만 낭비할 뿐 명성은 런던이나 파리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학회를 폐쇄한 바 있었거든요.  덕분에 칸트나 오일러(Leonhard Euler) 같은 학자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 정도의 명성은 없었지만, 아카르트도 말년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총애를 받던 젊은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2주일에 한 번 대왕을 직접 알현하고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다만 눈에 띌 만한 대단한 업적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업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독일 풍토에 적합한 담배 농사법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었고, 그 덕분에 연간 500 탈러(thaler)의 연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500 탈러의 가치가 궁금하실텐데, 당시 1 탈러는 은 14분의 1 쾰른 마르크(Cologne Mark, 1 쾰른 마르크는 233.856g)의 무게를 가지는 은화였습니다.  은의 가치로 환산해보면, 대략 1만600원 정도입니다.  그냥 1 탈러 = 1만원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500 탈러라고 해도, 대단한 거금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비슷한 시기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통용되던 탈러(Thaler) 은화입니다.  미국의 달러화 이름도, 비록 스페인 돈 이름을 거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영웅은 현자를 아끼고 존중하지요.  병석에서 볼테르를 처음으로 영접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입니다.  볼테르는 당대 유럽 전체의 수퍼스타였지요.  볼테르는 편지에서 프리드리히를 '나의 트라야누스 황제'라고 불렀고 프리드리히는 볼테르를 '나의 소크라테스여'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닭살 돋는 편지들의 끝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볼테르는 프리드리히의 궁정에서 염치없는 식객 노릇을 꽤 오래 했고, 볼테르가 마침내 떠날 때 프리드리히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카르트의 진가는 프르드리히 대왕이 서거한 지 3년 후인 1789년부터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순수 과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종목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사탕무였지요.  그의 스승이자 후원자 격이었던 마르그라프는 1747년 경에 사탕무(sugar beet)에도 설탕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밝힌 바 있었고, 거기서 설탕을 뽑아내는 공법에 대해서도 연구한 바 있었습니다.  아카르트는 설탕을 척박한 독일 땅에서도 생산하고자 하는 무척 실용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설탕은 공격적인 해외 침공과 비인간적인 노예 노동을 통해 카리브 해에 설탕 농장을 구축한 영국과 프랑스가 휘어잡고 있는 하얀 황금이었습니다.  유럽의 후발 주자였던 프로이센은 이들로부터 비싼 가격에 설탕을 사먹는 수 밖에 없었고, 프로이센 농민들과 공장 노동자들이 땀흘려 번 돈은, 노예 노동으로 생산된 설탕을 사는데 헛되이 소비되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생 도밍그(아이티)에 흑인 반란이 일어나면서 유럽 대륙의 설탕 공급은 그야말로 영국에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아카르트의 노력은 베를린 근처 그의 농장에서 여러가지 식물을 재배하는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설탕 함량이 높았던 것은 역시 사탕무였고, 그는 여러가지 사탕무 종자에 다양한 비료를 줘가며 재배를 계속 했습니다.  사탕무는 열대 기후에서는 잘 자라지 않고, 북유럽 기후에서 오히려 높은 당도를 내는 식물이었습니다.  도중에 그의 농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쫄딱 망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슐레지엔으로 거점을 옮겨 연구(...라 쓰고 농사라고 읽습니다)를 계속 했습니다.


그는 곧 성과를 냈습니다.  여기에는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과학자(...라 쓰고 농부라고 읽습니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나폴레옹에게 털리는 그 사람 맞습니다)의 후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국왕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1801년 그는 슐레지엔의 쿠네른(Kunern)에 세계 최초의 사탕무 정제 공장을 세웠습니다.  바로 다음 해 이 공장에서는 400톤의 사탕무를 가공하여 16톤의 설탕을 생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독일 땅에서 설탕이 나온다 !  이건 마치 북한 땅에 석유가 난다는 것과 거의 동일한 충격이었습니다.  구미가 당긴 빌헬름 3세의 지원에 힘입어 아카르트의 제자들은 프로이센 여기저기에 사탕무 정제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산유국, 아니 산당국(産糖國)의 꿈이 손에 닿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von_Humboldt

https://en.wikipedia.org/wiki/Sugar_beet

https://en.wikipedia.org/wiki/Prussian_Academy_of_Sciences

https://en.wikipedia.org/wiki/Frederick_the_Great

https://en.wikipedia.org/wiki/Prussian_Academy_of_Sciences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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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산이아닌가벼 2018.05.14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한에도 석유가 있더라...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중국에서 서해안을 탐사하다보니 기름이 있더라라는 말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사탕무로 설탕을 뽑아낸느 것을 보니 마치 석탄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노력꾼들의 모습이 비치네요.

    아주 특수한 상황을 빼고는 경제성이란 아주 중요한 요소고 결국... 이 성과는 히틀러가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2. 박종필 2018.05.14 1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테르는 유럽학계의 슈퍼스타이면서 키보드 워리어에 독설가였죠. 전제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진 요즘말로 하면 '♫♫♬♬ 좌빨' 취급받았죠.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대왕은 비록 오래같이 있진 못했지만 그와 우정을 유지한 거 보면 참 희한하죠. ㅋㅋㅋ

    • nasica 2018.05.14 2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 식충이 색희 당장 쫓아내!" 라기엔 이미 벌여놓은 것도 많고 보는 눈도 너무 많아서... 체면이라는게 뭔지 참 ㅋ

  3. ㅇㅇ 2018.05.14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비록 충돌이 있어서 볼테르가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편지는 보내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틀린건가요?

  4. franken 2018.05.15 0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탕무에서 설탕 뽑는 건 문제없어졌지만 사탕무 대량 재배에서 사단이 난 모양이군요. 개인적으로 이 좋은 작물 왜 한국선 안 기르는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