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2.18 나폴레옹 시대의 병참부 이야기 (하편) (14)
  2. 2018.10.08 1810년 포르투갈 침공의 서막 - 봉쇄와 결투 (17)
2019.02.18 06:30

웰링턴은 포르투갈에 상륙하자마자 곧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적, 그리고 사회적 특수성이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었습니다 !  이는 스페인의 침공 위협 때문에라도 스페인과의 교통로를 적극 개발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의 특수성에도 기인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모두 산업과 통상의 발달이 부진했다는 점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지역간에 거래를 할 상품이 없다보니 마차가 다닐 일도 없고, 마차가 다닐 일이 없으니 넓직한 길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지역 감정이 꽤 심한 나라여서 지방 간의 인적 왕래도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더더욱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통망에 더해,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건조한 편이라서 농업 생산량이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농가들은 어지간한 농가의 창고문만 걷어차도 밀과 보리, 달걀이 쏟아져 나왔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척박한 스페인과 대비했을 때조차도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현지 조달에 의존했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쫄쫄 굶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온 지역이 이렇게 가난하다보니,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보시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이 산지이거나 메마른 지대라서, 농업에 적절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스페인은 올리브유 생산이 매우 활발한 나라입니다만, 그건 반대로 곡물 농사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지대라는 반증입니다.)




현지 조달이 어려우면 본국에서 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의 열악한 내륙 교통망이 발목을 잡습니다.  가뜩이나 프랑스 본토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산맥이 있는 것도 장애가 되었는데, 해안길을 통해서라도 수송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뒤부터가 진짜 고생길이었던 것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보면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별로 큰 땅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건 메르카토르 도법의 특성상 남쪽에 있는 땅이 좁아보이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64만 평방 km인 것에 비해 스페인이 50만 평방 km으로서, 스페인은 굉장히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탄한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높은 산맥과 언덕이 많은 땅이지요.  길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을 가로질러 20만 대군이 먹을 식량을 마차로 수송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도전은 스페인의 게릴라들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경우, 이베리아 땅이 반도이니만큼 그냥 해상으로 수송한 뒤 내륙으로 운송하면 훨씬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저 망할 로열 네이비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는 수탈당하는 스페인 민중들에게도 큰 비극이었지만 약탈하는 프랑스군에게도 무척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만명 단위의 대군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그 일대의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먹어치우는 것도 있지만, 그 일대의 농민들이 식량을 감추거나 떠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프랑스군은 한 곳에서 1주일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굶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유랑하는 거지떼 내지는 떼강도 신세가 된 것이지요.  군사 작전이라는 것에서 이동이 잦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압박하거나 반대로 피하기 위해서이지 굶지 않기 위해서 이동하는 군대에게는 작전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페인에 투입된 근 20만에 가까운 프랑스군 대부분은 먹을 것을 찾아 이동 중이거나, 분산되어 먹을 것을 약탈 중이거나, 혹은 신기루 같은 게릴라들의 뒤를 쫓아 산 속을 헤매면서 세월을 낭비해야 했고, 실제로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프랑스군은 그 1/4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웰링턴은 유능한 지휘관답게,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영국군이 10만 단위의 대군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군량 조달을 가장 유용한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조건은 비슷했습니다.  길이 형편 없는 것도 똑같았고,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같았습니다.  스페인의 주요 항구들이 대부분 프랑스군 손아귀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식량을 수송해올 거리는 영국 측이 훨씬 멀었습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거리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거리보다 멀었고, 그나마 영국 본토도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식량난이 심해져서 밀과 빵값이 오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식량을 포르투갈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미국과 남미, 오스만 투르크, 심지어 북아프리카 모로코 등지에서 식량을 구매하여 포르투갈로 실어날랐습니다.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실제 소설이 씌여진 순서는 아니지만) 첫번째 편인 Mr. Midmanship Hornblower는 혼블러워의 사관후보생 시절을 그린 옴니버스식 소설입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식량으로 소를 사러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 들어갔다가 전염병에 휘말려 격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참부에게 진짜 고난은 포르투갈 해변에 온갖 보급품이 잔뜩 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1808년 8월, 당시 쥐노가 점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탈환하기 위해 웰슬리가 포르투갈 마세이라(Maceira) 만에 상륙했을 때, 전에 언급한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이름의 독일 출신 병참 장교에게 주어진 임무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조수도 부하도 없이 혼자서, 그저 공책 한권을 주고는 해변 여기저기에 야적된 수많은 보급품 더미를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한 뒤 이제 내륙으로 진격할 영국군 부대를 따라 수송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우만이 그런 업무에 숙련된 병참 장교였는가 하면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이전에 하노버 군에서 몇년 장교로 복무했다가 퇴역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장부 작성 등의 업무를 좀 해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국군 소속 독일군 전투 부대인 KGL 제7 연대 소속의 평범한 장교였고, KGL 장교로서는 승진과 연금의 비전이 없다고 보고 일당 7.5 실링(현재 가치로 대략 9만5천원)의 급여를 위해 병참 장교로 자리를 옮긴 아마추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무런 지침이나 교본이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The British Commissary'(영국 병참부)라는 멋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이 한권 있었는데, 이는 메서리어(Havilland le Mesurier)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쓴 것으로서, 당시 영국군 병참부 직원들에게는 수학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책이었습니다.  메서리어는 원래 해외 무역업자였다가 프랑스 혁명정부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부터 네덜란드 방면 영국군 원정대에 딸린 병참 장교 역할을 했습니다.  1794년에서 그 다음해까지 벌어진 이 방면 전투에서 영국군은 형편없는 성과만 냈을 뿐이었지만, 정말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던 영국군 병참부는 이 난리통 속에서 그나마 나름 경험과 수완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에도 메서리어는 병참부 장교직을 사직했다 복직했다 했는데, 영국군 병참부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저 'The British Commissary'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메서리어의 'The British Commissary'입니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책입니다만, 저는 못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영국군 병참부는 초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참부는 힘만 들고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노동일을 하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만큼, 빛나는 전통이고 뭐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랑 책 한 권을 손에 든 경험 없는 병참부 장교들도 막대한 보급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실은 병참부 소속 장교들은 진짜 장교도 아니었습니다.  병참부는 군의 일부가 아니라, 재무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파견직 민간인들이었거든요.  따라서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assistant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하는 것들은 진짜 장군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말단 사병들이 경례를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민간인 정부 관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교들과 엇비슷한,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나는 군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권총과 군도와 같은 무기도 휴대했습니다.  병사들은 '저것들은 장교 비슷한 군복은 입었지만 장교가 아니며,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도망친다'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적지 않은 경우 무기를 들고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아군에게 저평가되었지만, 사실 이들의 업무는 제1선 장교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개인적인 창의성과 수완,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대포알과 머스켓 탄환에 노출된 채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할 때, 멋진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교가 부릴 수 있는 재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운이 좋은 자는 살아서 전진할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쁜 자는 대포알에 두동강이 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흙탕 길에 바퀴가 빠진 무거운 수레를 어떻게 빼낼 것인지, 수송에 3일 걸리는 건빵 자루 더미들을 어떻게 2일 안에 최전방까지 나를 것인지, 가진 돈은 50쉴링 밖에 없는데 일당 1쉴링을 요구하는 노새 30마리를 어떻게 3일 동안 빌릴 것인지 등은 그야말로 담당 직원의 역량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성공과 실패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밀가루 자루를 실은 노새들을 끌고 최전선 부대에 도착한 병참부 장교에게 주어지는 것은 '왜 이리 늦게 왔냐' '왜 보급품이 이것 밖에 없는가' 등의 핀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병참부는 체계화가 꼭 필요한, 나름대로 무척 섬세하고 정밀한 병과입니다.  가령 포르투갈을 통해 상륙하는 영국군 병사들의 행군에 대해 웰링턴이 병참감(Commissary General)인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게 보낸 지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들어있습니다.


"상륙하는 부대는 각자 4일치의 빵과 2일치의 고기를 휴대한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빵 외에, 1만 명의 3일치 빵을 수송해야 하는데, 가능하다면 노새를 이용해 날라야 한다.  각 노새에는 2개의 자루, 즉 224파운드의 짐을 실을 수 있으므로 전체를 위해서는 130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


이 계산은 꽤 합리적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배식량은 하루에 빵 1파운드였는데, 1만 명의 3일치라면 3만 파운드입니다.  224파운드를 실을 수 있는 노새를 130마리 동원한다면 224 * 130 = 29,120 파운드이므로, 1인당 0.97 파운드씩의 빵을 3일간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노새가 먹을 사료는 계산에 넣지 않았쟎습니까 ?  노새는 하루에 10파운드의 곡물을 먹어야 했고, 병사들이 3일 행군하는 것을 따라 나섰다가 다시 보급품이 쌓여있는 항구로 되돌아오려면 왕복에 6일이 걸렸으므로, 노새 1마리가 싣는 224 파운드 중 최소 60파운드의 곡물은 노새가 먹어치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130마리의 노새의 실제 수송량은 29,120 파운드가 아니라 21,320 파운드였고, 병사들은 3일간 0.97 파운드가 아닌 0.7 파운드라는 부실한 양의 빵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노새들을 이용한 보급품 수송이 정말 최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영국군 병참부도 2년 정도에 걸쳐 노새꾼들과 노새들을 고용하여 운용을 하면서 경험이 쌓여, 그 고용 및 활용, 급여 지급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잡무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은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이 이런 노새 한마리가 몇 파운드의 짐을 싣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몇 마리의 노새가 필요한지에 대해 계산하여 병참감에게 보내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편지는 오히려 반대로 병참감이 원정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형태로 보내는 것이 맞겠지요.  당시 웰링턴은 병참부 장교들과 서기들의 무능력에 대해 짜증이 잔뜩 난 상황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샤우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참 장교들이 별다른 병참 업무 경험도 없이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다보니 워낙 아는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병참부는 웰링턴 하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총사령관 웰링턴이 직접 나서서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서'라고 지목하면서, 저렇게 노새 몇 마리가 필요하다는 계산까지 세세히 해줄 정도였으니 당연히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1810년 10월부터 다음해 초까지의 대치 끝에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앞에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후퇴시킨 승리는 사전에 충분한 군량을 비축해놓은 영국군 병참부가 아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아무도 병참부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지요.  이 사실은 웰링턴 휘하 어지간한 장군들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많은 정보가 있는 것에 비해, 웰링턴 휘하의 전체 병참부 책임자였던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 대해서는 정말 정보가 없다는 것으로도 반증됩니다.  오히려 영국군 병참부의 위력과 중요성을 잘 알고 두려워했던 것은 적군인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12년 웰링턴과 대치했던 마르몽(Marmont) 원수는 나폴레옹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웰링턴은 제게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광활한 척박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마르몽은 유난히 영국군의 노새 부대에 대해 넋두리를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1811년에도 그는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에게 편지를 써서 '영국군은 노새 1만2천 마리를 이용하여 너무나 쉽게 이동한다, 그러니 내게 단 1천2백 마리라도 노새를 좀 공급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용들이 등장하는 나오미 노빅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테메레르'에 대해 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지요.  대포의 시대라고 해도 그런 거대한 용들 수백 마리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면 아마 천하무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거대한 용들에게 먹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도 일종의 용이었습니다.  그 대군을 일거에 밀어넣으면 스페인 정도야 순식간에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지요.  영국군이 소수로도 내노라하는 나폴레옹의 부하들을 차례로 꺾고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것은 바로 그 문제를 잘 해결했기 때문이었고, 그 핵심에는 영국의 병참부가 있었습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https://en.wikipedia.org/wiki/Havilland_Le_Mesurier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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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ithel 2019.02.18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샤프가 텐트 노새 계산하던게 생각나네요.
    아참, 테메레르의 작가는 나오미 노빅입니다.

  2. TheK2017 2019.02.18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하편이네요. 지금 버스에서 내려야 해서 쟁여놓았다 봐야겠네요. ^ㅇ^*

  3. 카를대공 2019.02.18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이 없다,산지,건조한 기후
    이거 남 얘기 같지가 않군요.

    대대로 한반도의 기후나 지형이 풍요로운 땅과는 거리가 멀었죠.
    알면 알수록 왜 옆나라들에 치이고 살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 Spitfire 2019.02.26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반도가 곡창지대에 비하면 살기가 어려웠겠지만 주변국가들에 비해 풍요롭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국가들이 자주 침입을 한 것이지요. 도둑은 부잣집을 털지, 거지를 털지 않습니다.ㅎㅎ

  4. TheK2017 2019.02.18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영국이 승리한 이유가.
    역시 전쟁에선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끔 알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ㅇ^*

  5. 인간늑대 2019.02.18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6. 지나가다 2019.02.18 2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들은 항상 전투의 화려함에 주목하지만 그 뒤에서 스폿 라이트도 받지 못하고 개고생 하면서 물자를 날라주는 보급부대에는 대부분 관심이 없지요.
    사실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던지간에 영업과 같은 일선부서 직원들이 평가나 급여 및 상여에서 항상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방면 지원부서는 돈한푼 못벌고 쓰기만 한다며 갈굼당하기 일쑤인 것 같습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원부서도 항상 적정한 유지및 관리가 들어가야 될텐데 말이죠...쩝.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7. 인퀴지터 2019.02.18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한심한 책이라 나폴레옹 매니아께서 거론할줄 예상도 못했습니다. 테메레르는.

  8. 유애경 2019.02.18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식량을 바닥내고 지나가는 프랑스군 에게서 , 머문자리를 초토화 시키고 지나가는 메뚜기떼를 연상하게 되네요.


  9. reinhardt100 2019.02.19 0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저번에 한 번 언급했지만 20만 대군을 일거에 쏟아부어서 전선을 정리했어야 했다는 제 개인의 의견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복수의 보급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 제국 단독으로 하기는 어려울거고 라인동맹이나 이탈리아 왕국 등의 실질적인 속국의 여력을 모두 동원해야 가능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20만 대군을 영국군과의 전장에 투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만한 보급선 경비 병력이 또 필요하다는 것인데 사실 나시카님 말씀대로 이 정도 병력을 이베리아반도에 쏟아붓는 것은 다른 속국들을 방기하다 시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도박인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할 건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승산이 없는건 아니고 하나의 문제만 해결되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전쟁 전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베리아 전쟁을 승산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분리독립주의가 강했던 바스크,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카탈루냐등을 전방 보급을 위한 배후지역으로 확보한 후 이 지역들에서 출발하는 간선도로망을 모두 확보합니다. 이후, 카탈루냐에서는 아라곤 및 발렌시아, 바스크-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전역을 석권한 후 카탈루냐-타라코나 및 사라고사-발렌시아 축선에서는 무르시아-카르타헤나를 공략 후, 지브롤터를 고립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카디스 혹은 리스본까지 지중해 연안 및 주변 내륙 전역을 점령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북부에서 출발하는 프랑스군은 부르고스-바야돌리드-살라망카까지 1차적으로 공략한 후, 마드리드를 고립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후, 메리다를 공략, 메리다-바다호스-리스본 공략을 순차적으로 이어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갔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작전에서 전체 총병력은 프랑스군 공격군으로 24만 이상, 보급선 경비병력 최소 12만이며 이외 동맹군인 이탈리아왕국군, 라인동맹군, 스위스군 등을 합쳐 최소 10만 이상을 투입하며 작전 기간은 총3년, 동원 각종 야포 및 공성포 총 2천 문, 각 부대별 상비 비상식량을 최소 한 달분(러시아원정기 나폴레옹이 준비한 비상식량분 기준) 등의 보급역량을 갖추고 임한다는 가정하에 생각해본 겁니다.

  10. Spitfire 2019.02.19 1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베리아 반도의 척박하고 험준함을 들으니 일생의 목표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고 싶어지네요~ 저길 걸었던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지 궁금합니다.ㅎㅎ

  11. 웃자웃어 2019.02.19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급의 중요성이 입증되는 글이군요.

  12. 리틀락 2019.03.08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은 경제력으로 하는거군요. 그렇게 무역을 중시했던 영국이 브렉시트 하는걸 보면 웃음이 납니다 ㅋㅋㅋ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자들이 경제관념은 바닥이네요

2018.10.08 06:30

여태까지 1810년에 있었던 이런저런 사건들, 즉 나폴레옹의 새장가, 사탕무 설탕 공장의 건설, 베르나도트의 스웨덴 왕세자 책봉 등을 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1810년은 피와 화약 연기로 점철되었던 황제 나폴레옹의 나날 중 드물게 평화로운 시절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비교적 그랬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1810년 들어 스페인 민중들의 대프랑스 항쟁은 그 기세가 더 격렬해졌습니다.  이는 반나폴레옹 봉기가 곳곳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은 정반대로서, 웰링턴의 영국군이 탈라베라(Talavera) 전투 이후 포르투갈로 물러가자 무능력한 스페인 봉기군은 차근차근 프랑스군에게 격파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면 스페인 민중들은 용기를 잃고 굴복할 만도 할텐데, 왜 오히려 더 격렬하게 저항을 했을까요 ?


상황은 나폴레옹이 본의 아니게 더 악화시켰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1810년 나폴레옹은 저항을 그치지 않는 스페인에 대해 질려버린 상태였습니다.  스페인 국왕이자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가 파리에 파견한 외무장관인 산타페 공작 아산사(Miguel José de Azanza, duque de Santa Fe)가 나폴레옹의 튈르리 궁을 찾았을 때, 그에게 들이밀어진 것은 조제프의 퇴위 조서 초안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 보고 거기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할 셈이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동생 루이를 국왕으로 앉혀 놓았던 네덜란드를, 나폴레옹은 1810년 7월 실제로 침공하여 루이를 강제 폐위시키고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시켜버립니다.  그는 스페인에 대해서도 왕정을 아예 폐지해버리고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해버릴 계획었습니다.  


문제는 그 계획안 문서를 가지고 마드리드로 가던 연락 장교가 스페인 게릴라들에게 요격당해 살해되고 아직 암호화 되지 않았던 시절의 그 문서가 게릴라들을 거쳐 영국 손에 들어가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영국은 그 문서를 친절하게 스페인어로 번역까지 해서 곳곳에 뿌려댔고, 이는 그렇쟎아도 프랑스에 대해 이를 갈던 스페인 민중들을 더욱 들끓게 했습니다.  




(산타페 공작 아산사입니다.  그는 군인 출신의 외교관으로서, 1790년대 후반에는 멕시코 총독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 정권에 협력했고 조제프는 그를 산타페 공작에 봉했습니다만,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뻔 했습니다.  부르봉 왕가의 복귀와 함께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는 조제프가 프랑스로 도주할 때 함께 프랑스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1826년 빈곤 속에서 외롭게 죽었습니다.  친일파, 아니 친불파에게 알맞는 최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그런 문서 유출 때문에 나폴레옹이 조제프를 루이처럼 폐위 시키는 것을 주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발표를 하려면 스페인 전역을 손에 넣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하찮은 스페인 따위가 프랑스의 그랑 다르메에 대해 이렇게 질기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저주스러운 영국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트라팔가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넬슨에게 궤멸된 이후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이 된 영국에 대해, 나폴레옹은 더 큰 규모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륙 봉쇄령이었지요.  그런데 이 대륙 봉쇄령은 좀처럼 승기가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습니다.  명색이 위성국가라는 것들이 나폴레옹의 빅 픽처에 협력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돈에 눈이 멀어 영국 상품을 사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이 취한 조치는 더 강력한 그물망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과의 밀무역을 가장 활발하게 벌이던 네덜란드와 옛 한자 동맹 지역들, 즉 북부 독일 해안 지대의 소공국들의 정권을 폐위시켜 버리고 모두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켜버린 것이지요.   1810년은 나폴레옹 제국이 가장 넓어진 해이기도 합니다만, 그 배경은 영국과의 경제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초조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스페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 과격한 해결책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문제를 낳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엔 별로 대단치 않게 여겼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이것이 결국 그의 제국 전체를 몰락시키는 단초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그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일방적으로 쫓아낸 소공국들 중에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작령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올덴부르크 공작의 작은 아들이 바로 러시아 짜르 알렉산드르 1세가 애지중지하던 여동생 예카테리나(Ekaterina Pavlovna) 공주의 남편 게오르그(Georg of Oldenburg)였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르는 여러차례에 걸친 편지를 통해 자신의 매제에 대한 폭압적인 강탈 조치를 항의했으나 나폴레옹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어쩌면 이건 나폴레옹이 지나치게 오만하여 무심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가 지나치게 졸장부처럼 옹졸하게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억들 하시겠습니다만 2년 전인 1808년 에르푸르트 회담에서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에게 여동생을 자신의 새 신부로 달라고 은근히 메시지를 던졌으나, 알렉산드르는 오히려 그 아끼는 여동생을 볼썽 사나울 정도로 서둘러 다른 귀족에게 시집 보내버린 적이 있었지요.  그때 그 여동생이 바로 예카테리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큰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식으로 앙갚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에르푸르트 회담 때만 해도 세상 둘도 없는 친구 사이 같았던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이 점점 심해졌고, 이는 결국 1812년 러시아 침공과 그에 따른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대체 예카테리나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이 난리가 났는가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다시 보여드립니다.  두 그림 모두 동일 인물인데, 글쎄요, 아래 그림을 그린 화가는 아마 능지처참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어느 쪽이 더 실물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려 했던 웰링턴의 영국군도 마냥 룰루랄라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에 있어서 영국의 기본적 전략은 크게 2가지 방향 사이에서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캐닝(George Canning)이 주도하는 대륙내 동맹국에 대한 보조금 위주의 전략이었고, 다른 하나는 캐슬레이(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가 과감히 밀어붙인 직접 대륙으로 원정군을 파견하는 것이었습니다.  1806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 및 시실리 섬으로의 원정이나, 1809년 네덜란드로의 월체런(Walcheren) 원정,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원정 등이 그 대표적인 원정들인데, 이것들은 1805년부터 1809년까지 캐슬레이가 국방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 and the Colonies)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결과가 다 신통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폴리 왕국에 대한 원정은 1806년 가에타(Gaeta) 포위전의 패전과 함께 결국 뮈라(Joachim Murat)를 나폴리 왕으로 만들어주면서 끝나버렸고, 이베리아 원정도 무어(John Moore) 경이 1809년 1월 코루냐(Corunna) 전투에서 전사하며 간신히 영국군 대부분이 탈출시킨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1809년 월체런 원정도 사실상 참패로 끝나버렸지요.  이로 인해 영국 내에서는 대체 영국 육군은 뭐하는 종자들인가에 대한 비난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외무장관 조지 캐닝입니다.  이 양반이 보조금 위주의 전략을 썼다고 해서 결코 평화주의자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1807년 덴마크 해군 함대를 보관해주겠다며 덴마크를 침공한 것도 이 양반이 주도한 작전이었습니다.)



(국방장관 캐슬레이 자작입니다.  외모로 보면 대머리 캐닝과의 대결에서 완승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나폴레옹 전쟁 내내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으나, 이후 비엔나 회담에서 유럽 대륙이 반동 체제로 회귀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여러가지 우클릭 정책을 옹호하여 크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가령 피털루 학살 관련해서도 욕을 잔뜩 먹었지요.)




특히 월체런 원정의 실패는 외무장관 캐닝과 국방장관 캐슬레이 사이에 심각한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의 부당한 간섭 또는 부실한 전략 비전 등으로 작전을 망쳤다고 비난해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갈등은 아직 월체런에 비실비실한 영국군이 상당수 남아 있던 1809년 9월, 이 둘 사이의 결투로 이어집니다.  둘 다 군인은 아니었고 특히 캐닝은 이 결투 이전에는 총을 한번도 쏘아본 적 없을 정도로 순한 사람이었는데, 캐슬레이의 도전에 캐닝은 꼬리를 말아넣을 수가 없어서 응한 것이지요.  결국 캐닝의 탄환은 저 멀리 빗나갔고 캐슬레이의 탄환은 캐닝의 넓적다리에 명중하는 정도로 이 결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성이 자자하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장관들이 서로 총질을 해댄 이 결투 사건에 대해 비난이 들끓었고, 결국 이 둘은 모두 사임을 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영국군 원정대는 본국에서의 지지 발판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웰링턴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캐닝의 후임은 웰링턴의 형 리처드 웰슬리(Richard Wellesley, 1st Marquess Wellesley)가 맡게 되었습니다.  안 좋게 흘러가던 상황이 역전되어 웰링턴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생긴 셈이었지요.  과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웰슬리 후작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웰링턴의 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특히 대륙 봉쇄령에 의해 영국의 무역 상황이 갈 수록 안 좋아지는 상황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한 무역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을 내각에 설득하여 이베리아 원정대에 점차 병력을 증강하도록 했습니다.  웰링턴이 탈라베라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허겁지겁 포르투갈로 후퇴해야 했던 이유는 술트의 측면 위협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프랑스군보다 영국군 병력이 너무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웰링턴은 힐(Rowland Hill, 1st Viscount Hill) 장군이 영국에서 데리고 온 증원군을 받아 거의 5만에 가까운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5만이면 병력수가 부족했던 영국 육군에서는 물론 엄청난 대군이었고, 프랑스 그랑 다르메에서조차도 거의 1개 군(armee) 수준의 큰 병력이었습니다. 




(롤랜드 힐 장군입니다.  그는 롤리사 전투와 비메이루 전투 때부터 웰링턴을 따라 종군했고, 나중에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부질없이 저항하던 황실 근위대에게 항복을 권유한 것도 롤랜드 힐 장군이라고 합니다.)




한편, 나폴레옹도 그냥 대륙 봉쇄령이 계획대로 작용하여 영국 중앙은행의 지하 금고에서 마지막 기니 금화 한닢까지 다 털려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곳곳은 여전히 반란군 손에 있었고, 특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전체가 스페인군 수중에 있는 상태였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안달루시아 정복보다 오히려 포르투갈에 웅크리고 앉은 웰링턴의 영국군을 격파하는 것이 스페인 완전 정복에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트(Soult)로 하여금 안달루시아를 치게 하고는, 네(Ney), 쥐노(Junot), 레이니에(Reynier)의 3개 군단을 모아 포르투갈로 진격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서류상으로는 8만, 실제로는 약 5만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3개 군단장을 통솔할 포르투갈 원정군 사령관으로 자신의 휘하에 있는 지휘관 중 최고의 능력자를 임명하여 그 무게를 더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나폴레옹 제국의 제2인자, 바로 위풍당당 마세나(Andre Massena)였습니다.  


여태까지 웰링턴이 상대했던 프랑스군 지휘관은 누가 봐도 1진이라고는 할 수 없던 쥐노, 주르당, 세바스티아니, 빅토르 정도였습니다.  (술트와의 제2차 포르투 전투는 제대로 된 대결이라고 하긴 곤란했지요.)  하지만 마세나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1진급 지휘관으로서 나폴레옹의 오른팔격 원수였고, 다부는 물론 전사해버린 장 란보다도 더 뛰어난 지휘관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과연 웰링턴은 마세나를 상대로 해서도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요 ?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Miguel_Jos%C3%A9_de_Azanza,_Duke_of_Santa_Fe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Stewart,_Viscount_Castlereagh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Canning

https://en.wikipedia.org/wiki/Richard_Wellesley,_1st_Marquess_Wellesley

https://en.wikipedia.org/wiki/Walcheren_Campaign

https://en.wikipedia.org/wiki/Rowland_Hill,_1st_Viscount_Hill

https://en.wikipedia.org/wiki/Duke_George_of_Oldenburg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Gaeta_(1806)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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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티븐 2018.10.08 0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일 새글이 언제 올라오나 기다렸는데
    막상 올라오니 편하게 읽는 제가 미안할 정도입니다.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

  2. reinhardt100 2018.10.08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사실상 나폴레옹 전쟁의 둉부전선급이 되버린 시기가 1810년 이후인데 이 때 러시아 전선이 훨씬 더 양호했을 정도로 전쟁이 잔혹해졌죠.

    다른 댓글에 달았지만 영국은 내부 사정이 꽤나 심각했고 이 때문에 병력 상당수가 본국 및 아일랜드 치안유지에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1810년 웰링턴 원정군이 정말 마지막 기회였는데 이 윈정군마저 실패하면 더 이상 대륙으로의 무력 투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국민 모두 인지하고 있었고 프랑스와의 어느 정도 양보하는 화해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다시 한 번 2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해 직접 에스파냐 원정을 단행했다면 무슨 수를 써도 웰링턴의 원정군이 이긴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야전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그나마 가능한 방법이 해안가 요새방어선에 들어가는건데 5만의 병력이 나중에 웰링턴이 구축한 방어선에 들어가 아크레 공성전 시즌 2를 찍겠다고 해도 20만 이상의 병력으로 포위 및 공성전을 진행했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아무리 무한정의 해상 탄약보급으로 탄막을 펼치더라도 20만 병력의 공성포탄의 탄막에 밀릴건 뻔한 결론이었습니다.실제로 서구 군사학상 10만 이상의 공성전은 크림전쟁의 세바스토폴 공성전인데 이때 나폴레옹이 직접 원정을 감행했다면 여기서 볼 수 있었을 겁니다.

    • nasica 2018.10.08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나폴레옹이 결코 판단 착오 또는 게으름 때문에 1810년 스페인에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을 하지 않은 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용이 나오는 판타지 나폴레옹 전쟁 소설 “테메레르”에서는 청나라에서 파견한 대규모 용부대가 나폴레옹의 용부대를 격파하고 1812년 러시아를 구원하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거기서도 청나라 원군이 도중에 돌아가는 이유가 명확하게 나옵니다.

      “이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척박한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 reinhardt100 2018.10.08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척박해도 보급을 하게 만들었어야 했고 이 보급망을 바탕으로 직접 원정을 단행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20만 대군의 보급이 어렵지만 원정에서 이기면 영국과의 전쟁을 끝냴 수 있으니까요.

      한 번 나중에 시간나면 나폴레옹의 20만 대군 원정을 가정하고 보급계획을 짜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지도 궁금해집니다.

    • 최홍락 2018.10.08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전 스페인에 발묶일 경우 주변국들의 상황이 우려되서 20만명을 장기간 빼내는건 위험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캐치하셨네요.

  3. 키스세븐 2018.10.08 0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가 매우 특이해요. 유럽 문화/역사 이야기가 가득이네요. 여러 글을 읽다가 가요. 재미있었어요!

  4. keiway 2018.10.08 1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랫만의 나폴레옹 시대 글이로군요.
    항상 응원합니다.

  5. 소화낭자 2018.10.08 2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다 지칠 뻔 했습니다....
    ㅎㅎㅎㅎ 정말 감사합니다

  6. 웃자웃어 2018.10.08 2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슬슬 러시아 원정이 다가오는군요.

  7. 유애경 2018.10.08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카테리나 공주의 초상화, 어쩜 동일인물인데 저렇게 다르게 그려졌을까요!

  8. 석총 2018.10.08 2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테란 디펜스를 뚫지 못하는 프랑스

  9. 머대긘 2018.10.09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캐닝은 총을 한발밖에 쏘지 못했다죠? 그는 '두발'이 없었으니까요.

  10. Playzone 2018.10.10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이 가장 실수한 건 분수에도 맞지않은 야심가였던 동생 카롤린을 등에 업은 뮈라를 스페인으로 보낸게 아닐까 싶네요. 무능한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꼭두각시로만 삼은채로 막후정치를 했다면 그의 위장을 더 쓰리게 했던 이베리아 전역이 저정도로 격화되진 않았을거 같습니다.

  11. 석공 2018.10.10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