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 5월 12일 포르투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이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허겁지겁 산길로 후퇴해야 했고, 따라서 모든 짐은 물론 대포까지 다 버리고 가야 했습니다.  분노한 포르투갈 민간인들에게 학살당할 것이 뻔한데도 부상병들을 버리고 감은 물론, 군자금까지 병사들에게 마구 나누어줄 상황이었습니다.  때는 이른 5월이라 차가운 비까지 계속 내려 후퇴하는 프랑스 병사들의 사기까지 축 적셔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 길 바쁜 프랑스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폰트 노바(Ponte Nova, 새 다리, 스페인어로는 Puento Nuevo)라는 이름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술트 원수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두개의 긴 대들보만 남기고 그 위를 가로지른 널판지는 다 해체된 상태의 다리였습니다.  이 다리는 프랑스군이 스페인으로 퇴각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다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백여명의 포르투갈 민병대(ordenanza)가 기세를 올리며 프랑스군에게 야유를 보내고 있었지요.  원래 영국군은 포르투갈 민병대에게 연락하여, 이 폰트 노바 다리를 완전히 끊어 버릴 것을 요청했지만, 중세 시대 때 지어진 이 유서깊은 다리가 완전 파괴되면 당장 그 일대의 포르투갈 민간인들이 생활이 당장 크게 곤란해졌으므로, 민병대는 영국군의 요청보다는 자신들의 생활을 위해 이 다리의 상면과 난간만을 뜯어낸 것이었습니다.  다리를 완전 파괴하여, 그 덕택에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전멸시키거나 항복을 받아내더라도, 영국군이 이 다리를 재건해줄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어쨌거나, 이 폭 90cm 정도의 좁은 대들보 2개만 나란히 놓인 이 다리는, 포르투갈 민병대 백여명이면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계속 비가 내려 대들보는 무척 미끄러운 상태였습니다.  포르투갈 민병대는 이 정도면 다리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폰트 노바 앞에 도착한 것이 5월 15일 낮이었는데, 이미 영국군의 척후 기병대가 프랑스군 후미에 나타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틀도 아니고 하루만 더 여기에 발이 묶이면 프랑스군은 항복하거나 옥쇄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폰트 노바입니다.  지금은 살라몬데 Salamonde 댐 건설로 수몰되어, 저 수면 30m 아래에 위치해 있답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술트 원수는 제2 군단 전체에서 가장 용감하다고 소문난 사나이를 소환했습니다.  바로 루이-에티엔 뒬롱 (Louis-Etienne Dulong) 소령이었습니다.  뒬롱 소령은 영국 작가 버나드 콘월의 나폴레옹 시대 전쟁 소설인 샤프 시리즈 중 Sharpe's Havoc 편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09년 포르투갈) -------------------


(샤프 중위의 영국군 라이플병들이 점거하고 있는 고지 위의 감시탑을 뒬롱 소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야밤에 급습합니다.  샤프 중위의 지휘 하에 영국군이 반격에 나섭니다.)


프랑스군은 폐허가 된 감시탑 앞의 석조 테라스 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한 장교가 그들에게 화가 난 듯 고함을 지르더니, 그 장교가 검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왔다.  영국군 측에서는 샤프가 앞으로 나서며 그와 검을 맞부딪히며 힘을 겨루었는데, 그는 이번에도 박치기로 상대를 공격했다.  번개불 속에 드러난 상대 장교의 얼굴을 보니 박치기 공격에 깜짝 놀라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장교도 샤프와 같은 부류 출신임이 분명해 보였다. (샤프는 런던 극빈층 고아원 출신입니다 : 역주)  그 장교도 두 손가락으로 샤프의 눈을 찌르며 샤프의 사타구니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던 것이다.  샤프는 옆으로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손에 쥔 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상대방의 턱을 강타했다.  프랑스 병사 2명이 쓰러진 장교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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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소설 속에서 샤프와 개싸움을 벌이다 얻어 터지는 장교가 뒬롱(Dulong) 소령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앙리 뒬롱(Henri Dulong) 소령으로 나오고, 제31 경보병 연대 소속으로 나오지만, 실제 이름은 루이-에티엔 뒬롱 (Louis-Etienne Dulong)이었고 이때 당시는 제32 경보병 연대 소속이었습니다.   또, 위 소설 속에서는 뒬롱 소령이 마치 주인공 샤프처럼 깡패 출신이었다가 입신양명하여 군 장교직에 오른 것과 비슷한 경력을 지닌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외과의사의 아들로서,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뒬롱 소령은 저렇게 영국군 중위에게 얻어터지고 질질 끌려나간 적은 없습니다.  작가인 버나드 콘웰도, 뒬롱 소령과 같은 장교가 자기 소설 속에서 저런 굴욕을 당하도록 만들어서 무척 미안했다고 후기에 적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의 뒬롱 소령과, 실존 인물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용기입니다.  위의 Sharpe's Havoc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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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뒬롱 소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이제 곡사포 포격의 엄호 하에, 고지 위의 영국군 라이플병들을 향해 대낮에 돌격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라이플의 긴 사정거리와 정확성 때문에 고전합니다.)


뒬롱 소령은 이제 라이플병들을 볼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곡사포탄이 프랑스 보병들의 머리 위를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고지 위에서 폭발하며 위협하는데도, 라이플병들이 그걸 무시하고 이젠 숨어있던 바위 틈에서 일어나 서서 소총을 재장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뒬롱 소령은 그의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러 저 녹색 군복을 입은 적군에게 사격하라고 명령했지만, 머스켓 소총의 총성은 미약했고 머스켓 총알은 크게 빗나가기 일쑤였다.  그에 비해 라이플 총탄은 아주 정확하게 프랑스 병사들을 노렸으므로, 병사들은 고지로 향하는 좁은 길목 위로 계속 올라가기를 꺼려했다.  

뒬롱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운만 좋다면 라이플 사격에 쓰러지지 않고 고지 위 방벽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솔선수범의 예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소리를 지르고, 검을 뽑아들고 돌격했다.  "프랑스 만세 !"  그는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


"사격 중지 !" 샤프가 외쳤다.


뒬롱을 따르는 프랑스 병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는 혼자 돌격해오고 있었고, 샤프는 그 프랑스인의 용기를 높이 사서, 그에 경의를 표하고자 앞으로 걸어나와 예식에서 하듯 그의 검을 들어 경례를 했다.  뒬롱은 그 경례를 보고는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고, 그가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샤프를 향해 돌아보고, 그도 검을 들어 경례를 한 뒤, 난폭한 동작으로 검을 다시 검집에 찔러넣으며 황제 폐하를 위해 죽기를 겁내는 그의 부하들에 대한 경멸을 드러냈다.  그는 샤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걸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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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이 불필요하고 어색한 장면은, 아마도 작가 버나드 콘월이 뒬롱 소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억지로 밀어넣은 장면 같습니다.  샤프처럼 무자비하고 인정머리없는 친구가 단순히 혼자 돌격하는 프랑스 장교를 보고 사격 중지를 외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러나 실제 뒬롱 소령이었다면, 소설 속의 이런 행동을 실제로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역사 속 실존 인물인 뒬롱 소령이 그 용기를 드높인 사건을 보면,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말 들거든요.


술트는 뒬롱 소령에게 100명의 선발된 척탄병을 맡기며, 밤까지 기다렸다가 다리를 탈취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뒬롱 소령은 그 중 단 12명의 척탄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야음을 틈타 완전한 침묵 속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비바람이 부는 때라서, 12명의 척탄병들 중 1명이 다리를 건너다 미끄러져 저 아래 급류 속에 빠질 때의 비명 소리나 다리 입구에 서있던 보초병을 뒬롱 소령 자신이 검으로 해치울 때의 소리가 묻혀버렸습니다.  이렇게 다리를 건넌 뒬롱 소령 일행은 비바람을 피해 움막에 들어가 있던 포르투갈 민병대를 급습했고, 프랑스군 수백명이 넘어온 것으로 착각한 민병대는 별 저항을 못하고 흩어져 도주해버렸습니다.


뒬롱 소령의 이 위업이 술트의 제2군단 전체를 구출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포르투갈 민병대의 경계 태만이 더 주요한 원인 같습니다만...)   당장 그날밤 중으로 다리를 수리한 뒤 전체 프랑스군이 다리를 건넜고, 술트는 자신이 달고 있던 레종 도뇌르 훈장을 떼어내 현장에서 뒬롱 가슴에 달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이번에는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또 다시 같은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이 폰트 다 미사헬라라는 다리는 폰트 노바와는 달리 로마 시대에 지어진, 석조 다리로서, 이번에는 대낮이었고, 또 밤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소설 속의 장면을 보시지요.





(구글에서 Ponte da Mizarela를 찾아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19세기 초에 다시 지어진 다리라고 하니까, 이 사건 이후에 다시 지어진 모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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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2개 대대가 다리를 공략하겠지만, 다리 건너편 끝에 설치된 가시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공격하는 병사들은 산산조각 날 것이 뻔해 보였다.  1.2m 높이에 두께도 그 정도 되는 이 장애물은 20여개의 가시 덤불을 서로 묶고 통나무로 눌러놓아 만든 것으로서, 돌파하기 아주 곤란한 물건이었다.  따라서 결사대(Forlorn Hope)가 제안되었다.  결사대라는 것은 동료들의 돌파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된 병사들의 무리로서, 보통 이런 자살 공격대는 방어가 철저한 적의 요새 벽에 뚫린 구멍에 투입되곤 했지만, 오늘의 공격조는 반쯤 해체된 다리의 좁은 통로를 건너야 했고, 쏟아질 머스켓 사격에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이 가시덤불 장애물을 치워야 했다.  


제31 경보병 연대의 뒬롱 소령은, 반짝거리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단 채로, 이 결사대의 지휘관으로 자원했다.  이번에는 어둠을 틈탈 수도 없었고, 또 적의 수도 훨씬 많았지만, 장갑을 끼고 가시 장애물을 치우는 혼전 속에서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검 손잡이에 달린 가죽끈을 손목에 졸라매는 그의 굳은 얼굴에서 걱정 같은 것은 엿보이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전위대를 지휘하는 루아송(Loison) 장군은 전 병사들이 강둑에 늘어서서 머스켓이든 기병총이든, 심지어 권총이라도, 포르투갈 민병대(ordenanza)에게 위협 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격으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음이 극에 달했을 때, 뒬롱은 검을 높이 들었다가 앞으로 내지르며 돌격 명령을 내렸다.


뒬롱 자신이 속한 연대의 유격 중대가 다리 위를 내달렸다.  남아있는 돌다리의 좁은 틈 사이로는 겨우 3명이 나란히 통과할 수 있었고, 뒬롱은 그중 가장 첫번째 줄에 있었다.  포르투갈 민병대는 크게 야유를 보내고는 흙으로 쌓은 엄폐물 뒤에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뒬롱은 가슴에 총을 맞았고, 그는 총알이 어제 밤의 공로로 새로 받은 훈장을 때리고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총알이 폐까지 뚫고 들어왔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에게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고함을 지르려 했으나, 숨이 가빠 소리를 지를 수 없었고, 대신 장갑을 낀 손으로 가시덤불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더 많은 병사들이 도착하여 좁은 다리 위에 빽빽히 늘어섰다.  한명은 발이 미끄러져 흰 거품이 일어나는 미사렐라(Misarella) 강의 급류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총알이 결사대 병사들의 여기저기를 강타했고, 대기는 화약 연기와 뭔가 부러지는 소리와 총탄이 핑핑 날아다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하지만 뒬롱 소령은 마침내 장애물 한 부분을 강 속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고, 병사 한명이 통과할 만한 틈을 만들어냈다.  이 틈은 함정에 빠진 프랑스 2군단 전체를 구하기에 충분할 만큼 큰 것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 틈 사이로 들어가 검을 높이 들고, 숨을 쉬려 애쓰며 입으로 피거품을 내뿜었다.  지원 대대들이 총검을 꽂은 채 다리로 달려들면서, 그의 뒤에서 엄청나게 큰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뒬롱의 결사대 중 살아남은 병사들이 가시덤불의 나머지 부분들을 치워내면서, 이미 전사한 유격병(voltigeur) 10여명의 시체를 무자비하게 다리 밑 강물 속으로 발로 차 던져 버렸다.  그들은 함성과 함께 돌격했고, 뒬롱 소령의 결사대를 저지하기 위해 총을 쏜 뒤 아직 재장전 중이던 포르투갈 민병대원들은 프랑스군이 떼거리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도주해버렸다.  수백 명의 민병대원은 프랑스 총검을 피하기 위해 서쪽 언덕을 기어 올랐다.  


뒬롱은 포르투갈 민병대가 버리고 간 가장 가까운 엄폐물 근처에 멈춰섰고, 거기서 그는 검이 손목에 연결된 가죽끈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채로 허리를 굽혔고, 피와 침이 섞여 그의 턱으로 길게 흘러내렸다.  그는 눈을 감았고, 기도를 하려고 애를 썼다.


"들 것을 가져와 !" 한 하사관이 외쳤다.  "들 것을 만들어. 의사를 찾아 !"  프랑스군 2개 대대가 포르투갈 민병대를 다리에서 쫓아냈다.  아직 포르투갈인 몇몇이 왼쪽의 높은 바위 언덕에서 얼쩡대고 있었지만, 머스켓 소총을 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그들이 그냥 자신들이 탈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뒬롱 소령이 함정의 마지막 틀을 억지로 열어젖힌 것이었고, 이제 북쪽으로 향하는 도로는 활짝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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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장면을 읽고 대체 뒬롱 소령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중상을 입은 것은 사실인 모양인데, 당시 프랑스군은 금은보화도 다 버리고 가는 마당에 설령 살 수 있다고 해도 저런 중상자를 데리고 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 더 마음에 걸렸습니다.  예, 좀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작가인 버나드 콘월은 작품 맨 끝 부분에 historical note를 적는 것으로 유명한데, 거기서 작가 자신도 이 사건 이후 뒬롱 소령의 생사 여부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작가 버나드 콘월입니다.)




그런데, 이 뒬롱 소령의 생사 여부를 구글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Sharpe's Havoc이 씌여지던 2002~2003년 당시엔 구글이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었나 보지요 ?  다음 사이트, 즉 유명한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 뒬롱 소령의 초상화가 1997년 5월 22일에 무려 $1,652,500, 우리 가격으로는 대략 18억원에 팔렸다는 상세 기록이 나와 있더군요.   1997년 가격으로 18억원이면, 지금 가격으로는 한 30억 되겠네요.


http://www.christies.com/LotFinder/lot_details.aspx?intObjectID=226156





(저 도전적인 표정 속에 뭔가 슬픔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




이 별로 손이 많이 간 것 같지 않은 단색 초상화가 무려 18억원에 팔린 것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대가인 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Ingres)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General Louis-Etienne Dulong de Rosnay의 초상입니다.  즉, 뒬롱 소령은 푸엔테 마세렐라에서 죽지 않았고, 나중에 장군까지 승진한 것입니다.  이 크리스티 경매 기록에는 앵그르가 1818년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1815년 나폴레옹 몰락 이후, 일감이 떨어져 돈이 궁했기 때문...)은 물론이고, 모델이었던 뒬롱 장군에 대해서도 상세히 씌여 있습니다.  그가 폰트 노바에서 영웅적인 활약으로 술트의 포르투갈 원정군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1818년에 그려진 것으로, 흐릿한 로마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앵그르는 이런 나폴레옹 찬양화를 많이 그렸기 때문에, 나폴레옹 몰락 직후에는 금전 사정이 급격히 안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주로 이런저런 중산층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먹고 살았고, 뒬롱 장군의 초상도 그런 이유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1840년 앵그르가 사정이 좋아진 뒤에 그린 '오달리스크' 입니다.)




원래 뒬롱 드 로즈네는 1780년 프랑스 동부 시골인 로즈네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보다 11살 정도 어린 셈이지요.  그는 1798년 18살의 나이로 처음에는 외무성에 잠깐 몸을 담았다가, 1년 만인 1799년에 장교로 군에 입대합니다.  역시 당시에는 출세의 야망이 있는 건강한 젊은이에게는 군대가 최고의 직장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수완이 좋았는지 1년만에 중위를 거쳐 대위까지 승진합니다.  그러나 소령 진급에는 다소 시간이 걸려, 1807년에야 승진을 합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809년, 즉 위 소설 속 배경이 되는 포르투(Porto) 작전 직후에는 대령으로 진급을 했더군요.  그러니까 술트가 자신과 제2군단을 구해낸 영웅을 잊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1800년부터 1807년 사이에는 여러가지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는데, 그 사이에 뒬롱의 활약은 별로 없었을까요 ?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는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도 참전했었고, 이때 큰 부상을 입어 평생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  저 초상화를 자세히 보시면, 오른팔이 슬링에 걸려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즉, 1809년 포르투갈에서 술트의 제2 군단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넘어 돌격할 때, 그는 이미 한 쪽 팔은 못쓰는 불구의 몸이었고, 검은 왼손으로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트가 그에게 결사대의 지휘를, 그것도 2번이나 맡긴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용감한 사나이였는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1810년에 이루어진 그의 건강진단서를 보면, 그의 몸에는 13군데의 큰 상처가 있었고, 모두 평생 큰 고통을 주는 상처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폰트 다 미사헬라에서 입은 것이겠네요.


뒬롱 소령이 폰트 다 미사헬라에서 입은 상처가 어디에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웹사이트에 따르면 그는 이때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또, 이때 쓰러진 그를 어떻게든 데리고 가기 위해 (다른 부상병들은 버리고 가더라도 낭만적인 프랑스인들이 아니더라도 이런 영웅을 그렇게 버리고 갈 리는 없지요) 사단장이 들 것을 만들어, 각 연대에서 가장 신체 조건이 좋은 척탄병들이 번갈아가며 그의 들 것을 운반하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속했던 연대의 척탄병들이 우리의 영웅을 다른 연대에게 맡길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하고, 자기들끼리 떠매고 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또 그의 소속 연대가 32연대가 아니라 15연대라고 되어 있네요...)


1813년에, 그는 자작으로 봉해지면서 장군이 되었는데, 그때 그는 나폴레옹의 신참 근위대(Jeune Garde)에서 복무해줄 것을 요청받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불구가 된 사람들을 보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자신의 주변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은 병사나 장군이 있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사람을 신참 근위대 지휘관으로 삼은 것은, 이 고참 장교의 용기에 대한 대단한 칭송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쨌거나 뒬롱 장군은 1815년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 때, 나폴레옹을 따르지 않고 부르봉 왕가를 섬기는 것을 택했습니다.  부르봉 왕가는 이미 혼이 단단히 난 상태였기 때문에, 군 장교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안절부절하는 상태였던지라, 뒬롱 장군과 같은 저명한 장군의 비위를 맞추고자 뒬롱을 백작에 봉하고 루이 18세의 근위대 부지휘관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는 나중에 샤를 10세의 즉위식에도 참여했고, 생 루이(Saint Louis) 훈장도 받고, 왕실 인사(gentilhomme de la Chambre du Roi)로도 인정받을 정도로 출세를 거듭했습니다.





(샤를 10세의 즉위식 광경입니다.  뒬롱 장군을 찾아 BoA요.  저는 포기.)




그러나 역시 용감한 군인의 최후는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1828년, 그는 자살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아닌, 평생 그를 괴롭혔던 수만은 전투 부상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불과 48세의 나이였으니, 정말 용감한 늙은 군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Source : Sharpe’s Havoc by Bernard Cornwell

https://fr.wikipedia.org/wiki/Louis_%C3%89tienne_Dulong_de_Rosnay

https://gw.geneanet.org/dorsner?lang=fr&p=louis+etienne&n=dulong+de+rosnay

http://thenapoleonicwargamer.blogspot.kr/2010/07/general-louis-etienne-dulong-de-rosnay.html

http://histoiresdenosfamilles.fr/cahiers_ba/cahier_2_chap3.html

https://en.wikipedia.org/wiki/Ponte_da_Mizar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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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홍락 2018.02.10 2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슷한 일이 100여년후 중국 사천성에서 반복되는 듯 하네요.ㅎ

    • nasica 2018.02.11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공내전 때 일인가요? 저는 그쪽은 잘 몰라서...

    • reinhardt100 2018.02.11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정교 전투 말씀이시군요.

      대장정 직전, '1-4차 초공작전의 실패'라는 실적을 명백히 무시한 오토 브라운과 공산당중앙위원회는 당시 막 제기되었던 스베친이나 트리안다필로프등의 소련식(마르크스적)군사학을 무분별하다 싶을 정도로 맹종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결국 5차 초공 작전에서 강서소비에트등 그나마 있던 기반을 싹 다 날려버리면서 유랑 무장집단화 되어버립니다. 준의회의에서 모택동 지도노선이 채택, 겨우 장국도와 하룡의 홍4방면군과의 합류를 결정하면서 와해 직전 분위기를 추스립니다. 합류 직전에 최대 도하 장애물이었던 대도하의 현수교인 노정교에서 지문과 똑같은(?) 전투가 벌어집니다.

      사실, 노정교 도하전이 대단히 중요했던 이유가 노정교를 도하하지 못하면 70년전 태평천국군 잔당과 똑같은 말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수신과 그 휘하 군단이 사천 정복에 나섰다가 청군의 반격 및 추격에 의해 노정교 근방에서 포위, 전멸된 전례가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노정교를 우회하면 추가 이동거리가 2천km였는데 이건 그냥 홍1방면군 붕괴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모택동,주은래,주덕 등의 홍1방면군은 귀주성을 약탈한 후, 사천방면으로 북상, 군벌들 간의 분열로 틈이 많았던 사천 북부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장국도와 하룡의 홍4방면군과 합류하지만, 장국도에 의해 섬서성 대신 사천성 공략으로 전략적 목표가 바뀌면서 국민당군 및 군벌군과 정면대결을 하고 그대로 박살나면서 오히려 모택동 지도노선은 더 확고해집니다. 모택동은 오히려 자기 주장대로 하면서 신화적인 지도력을 가지면서 공산당에서 확고부동한 1인자로 등극하면서 대약진운동 이전까지는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 최홍락 2018.02.11 2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그 노정교 전투 맞습니다. 예전에 이 일화를 접했을때 다리 상판만 제거하고 다리 기본구조는 남겨놓은 것을 보고 군벌들이 군 기강이 헤이하고 상대인 홍군을 가볍게 여겨 홍군에 결정적인 생존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했는데 nasica님의 포르투칼 민병대가 자신의 생활을 위해 똑같이 행동했던 얘기를 보니 그들도 그만한 사정이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P.s. 뒬롱 장군 이야기는 예전에 한번 다뤘던 얘기인데 그때 좋은 일화를 소개해주셨지요.

      "용감한 조종사도 있고, 늙은 조종사도 있다. 그러나 용감한 늙은 조종사라는 건 없다." 이 말은 나이가 들면 용기가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나치게 용감한 조종사는 젊은 나이에 일찍 죽기 마련이라는 뜻이더라는ᆢ

    • reinhardt100 2018.02.11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정교 상판만 떼 버린 이유가 이 다리 소유권 문제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18세기에 처음 가설할 때 워낙 돈을 여기저기 끌어다 써서 함부로 철거했다가는 재가설시 비용부담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노정교의 경우, 차마고도와의 연결까지 겹쳐서 대상들의 무역손실까지 겹치니 군벌들 입장에서는 상판철거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는거도 고려해야 합니다.

      흔히, 중원대전을 기준으로 전후 군벌들의 재정조달은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만주의 경우, 장작림과 휘하 군벌이 양찬 등의 곡물상들과 은행들로부터 대두수출의 안전 보장등과 연결해서 만철과 연계, 재정조달을 했습니다. 반면 동부의 연안 지역은 무역 통제 및 상해지역에서의 금융을 통해 조달하였고, 산서의 염석산은 무기제조 및 판매 등 군수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채권 발행 및 지폐발권 등으로 조달했습니다. 서북군벌의 경우에는 신강등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및 중앙아시아, 소련과의 육상 무역으로, 운남이나 양광지역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와의 육.해상 무역 등으로 어떻게든 재원을 마련했습니다. 문제는 사천인데, 사천이 유독 단일군벌로 통일이 되지 못한 이유가 각 군벌별로 확실한 재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천의 잠재력 치고는 굉장히 군벌이 빈약한(?) 편이었다는 게 대장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2. 석총 2018.02.11 1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그분

  3. 쇼펜하우어 2018.02.11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궁금한데 이런 역사적 지식을 어떻게 다 아시는거죠? 서양사 전공하셨나요? 어디서 이런 지식을 쌓으셨나요?

    • nasica 2018.02.11 2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끼적인 것은 지식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책 두어권과 인터넷질 좀 하면 다 나오는 내용인걸요.

    • 쇼펜하우어 2018.02.12 2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데 영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도 할 줄 아시나 보네요 참고 사이트 보니 대단하시네요

    • nasica 2018.02.13 0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딩 수준의 불어일 뿐이고요, 구글 번역기 씁니다. 불한은 못 봐줄 수준이지만 불영 번역은 꽤 쓸 만 하거든요.

  4. 이부프로펜 2018.02.16 0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때는 제대로된 진통제도 없었던 시절이니... 불과 100년전만해도 지금같은 의약품은 꿈도 못꿨을테니 현대에 태어난 걸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이 도우루 강 남안에서 강을 건널 방법을 못 찾고 당황하는 동안, 술트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5월 10일 도우루 강 남쪽에 있는 그리조(Grijó)라는 작은 마을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트는 비교적 여유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었을까요 ?


그는 나름대로 안전조치를 취해놓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가 위치한 도우루 강 하구는 꽤 넓고 깊어서 사람이나 말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술트는 도우루 강 인근의 모든 바지선과 보트, 조각배들을 모조리 압류하여 북쪽 강변에 끌어다 놓은 상태였습니다.  영국군에게 날개 혹은 지느러미가 없는 이상, 도우루 강을 건너 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만 술트는 영국 해군을 걱정했습니다.  제해권은 영국에게 있으니, 당장 30km 밖 수평선 너머에 영국 프리깃함들이 호위하는 수송선들이 잔뜩 대기 중일 수도 있었습니다.  술트는 웰슬리가 선박을 이용하여 포르투 북쪽 해안 어딘가에 기습 상륙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트는 도우루 강 하구의 산토 조아오 다 포스(S. Joao da Foz) 요새에 수비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습니다.  술트는 전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며, 따라서 이젠 후퇴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정확히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짐을 싸고 있었고 이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강남에 영국군이 나타난 5월 10일 다음날인 5월 11일, 술트는 이미 짐마차와 포병대를 메르메(Julien Augustin Joseph Mermet) 장군의 1개 사단과 함께 스페인으로 후퇴시켰습니다.




(메르메 장군입니다. 원래 귀족의 아들이었고, 오슈(Hoche) 장군 밑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는 네 원수가 나폴레옹 편에 서서 군을 지휘하라고 종용했으나 그 명령을 거부하고 부르봉 왕가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강 남안에 2만이 넘는 영국군이 득실거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배들을 모조리 북안에 끌어놓았다는 것만 믿고 강변에 경계 병력을 전혀 세워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일인데, 술트처럼 수많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이 이런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주민들이 프랑스군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지요.  어쩌면 그는 일부 영국군이 건너온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보트로 수십 명씩 넘어올 수 밖에 없으므로, 프랑스군이 뒤늦게 그를 알게 되더라도 신속하게 전개하여 아직 수백 명 수준일 영국군을 잽싸게 포위하고 섬멸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정작 영국군은 강변에 도착한지 하루가 지나도록 정말 아무 것도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었습니다.  정말 술트의 생각대로 영국군에겐 강을 건널 방법이 전혀 없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100%라는 것은 없습니다.  5월 12일 아침,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강변을 수색 중이던 워터스(John Waters) 대령에게 웬 포르투갈 이발사 하나가 다가 왔습니다.  워터스 대령은 포르투갈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해보니 그 이발사는 포르토 시내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프랑스군의 침공과 약탈을 피해 피난 나왔다가, 강 남쪽에 영국군이 왔다는 것을 알고 2~3인용 낚시배 하나를 저어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낚시배 하나로는 병력을 실어나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발사에겐 결정적인 소식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지키고 있지 않는 강 북안에 와인 수송용 바지(barge)선 몇 척이 있는 곳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발사와 함께 워터스 대령은 그 조각배를 타고 강 북안으로 넘어갔고 실제로 바지선들과 그걸 지키고 있던 현지 주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워터스 대령과 이발사는 마침 현장에 있던 신부의 도움을 받아 그 주민들을 설득, 그 바지선들을 끌고 남안으로 끌고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을 실어날랐을 도우루 강의 와인 수송용 바지선입니다.  저 정도면 한번에 30~40명은 실어나를 수 있겠네요.  바지(barge)선이란 강이나 호수 등 파도가 잔잔한 곳에서 사용되는 평저선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돛대나 엔진이 없어 자력으로 항행하지 못하고 다른 배에게 끌려다니는 배를 말하지만 자력 항해를 하는 평저선도 바지선이라고 부릅니다.)




때는 해가 훤히 뜬 대낮이었습니다.  이들이 약 45m 정도 되는 도우루 강을 가로질러 바지선들을 끌고 가는 모습은 양쪽 강변에서 훤히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배들이 남쪽 강변에 모인 영국군들을 잔뜩 싣고 북안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강북의 프랑스군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영국군 1개 중대가 재빨리 강을 건넜고 강변에 있던 수도원 건물을 점령하고는 돌로 된 벽 뒤와 지붕, 창문 등에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프랑스군도 영국군이 도강 중이라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달려왔을 때는 이미 1개 대대 전체가 수도원에 위치를 잡은 상태였습니다.


아침 11시 30분, 헐레벌떡 달려온 프랑스군의 지휘관은 막시밀리앙 포이(Maximilien Foy)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술트에게 전갈을 보낸 뒤 급한 대로 3개 대대의 보병을 이끌고 달려왔습니다.  프랑스군에게는 3대1의 수적 우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튼튼한 돌담이 둘러쳐진 수도원은 막강한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게다가 영국군이 비록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미숙한 군대라고는 하지만, 막강 프랑스군에 비해 잘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영국군은 기동성이나 전술적 유연성, 병사들의 자율성이나 인내심, 동기 부여 등 모든 면에서 있어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비해 떨어지는 군대였습니다.  보통 직업 군인인 모병제 군대가 강제로 끌려온 병사들로 이루어진 징병제 군대보다 전투력이 우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그 지휘관인 웰슬리조차 '술 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녀석들'(the scum of the earth, enlisted for drink)이라고 부를 정도로 형편없는 자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민간 사회에서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최후의 수단으로 입대한 빈민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국군에 잉글랜드 출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잉글랜드인들과 그 왕 조지 3세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아일랜드인들이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1/3은 독일인들과 스코틀랜드인으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1/3 정도만 잉글랜드인이었으나 그마저도 애국심과는 거리가 먼 사회 최하층민들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사회 지배 계급이었던 장교들은 자기 부대의 병사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당근으로는 럼주를, 채찍으로는 사람 등가죽을 홀랑 벗겨놓는 무지막지한 진짜 채찍질을 휘둘러 병사들을 통제했습니다.  그런 군대에게 다양한 전술을 이해시키고 자율성 및 전술적 유연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은 프랑스군에 비해 우월한 것이 있었습니다.  돈이 많다보니 전체 유럽 군대 중에서 가장 많은 실탄 사격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탄약 뿐만 아니라 머스켓 소총의 부싯돌(flint)을 아끼기 위해 사격 훈련을 할 때 실탄은 커녕 공이치기에 부싯돌 대신 나무조각을 끼워넣고 장탄 및 격발 훈련을 하는 것이 예삿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군은 어지간한 2선 부대들도 실탄 사격 훈련만큼은 상당히 많이 할 수 있었고, 장교들도 병사들에게 다른 것은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그저 빨리 장전해서 빨리 쏘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어차피 저 신뢰할 수 없는 병사들에게 명중률은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군 병사들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전투가 바로 수비전이었습니다.  


실제로 포이 장군의 프랑스군이 수도원을 향해 돌격을 해보니, 빗발처럼 날아드는 영국군 머스켓 소총 세례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포이 자신도 부상을 입은 채 많은 사상자만 남기고 프랑스군은 물러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여기서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국군은 계속 바지선을 통해 수십 명씩 증원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잘못 하면 스페인으로의 후퇴길이 막힐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3개 대대를 더 끌고 와서 다시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때 즈음 해서는 영국군도 2개 대대가 더 넘어와 3개 대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번에도 무의미한 희생만 낸 채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꽃중년이 막시밀리앙 포이 장군입니다.  그는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사관학교 출신의 몇 안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쥐노의 제1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고, 웰슬리와 싸운 비메이로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번 포르투 전투에서도 웰슬리와 싸워 또 부상을 입었지요.  나중에 술트의 제3차 포르투갈 침공 때도 참전했는데, 웰링턴과 싸운 부사코 전투에서 또 부상을 입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나폴레옹 편에 서서 웰링턴과 싸운 워털루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거기서도 부상을 당했고, 그게 평생 입은 15회의 부상 중 마지막 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젠 술트도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바삐 움직였습니다.  그는 강변 다른 곳에 모아놓은 바지선들을 지키기 위해 배치했던 부대까지 불러 들여 황급히 영국군을 상대하게 했는데. 이것이 더 나쁜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영국군이 쳐들어온 것을 알게 된 포르투 주민들이, 프랑스군이 물러가자마자 바지선들을 몰고 강남으로 넘어와 영국군을 실어나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술트는 정신을 차렸는지 비로소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과감히 결행합니다.  수도원에 쳐박혀 시시각각 증원되는 영국군을 아랑곳하지 않고, 즉각 북동쪽 스페인 방향으로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영국군은 총 2만에 가까운 병력으로서 시시각각 증원되고 있는데, 이미 어제부터 철수를 시작했던 프랑스군은 포르투 시내에 고작 1만2천 정도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미련을 두지 않고 철수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포르투 전투 상황도입니다.  저 멀리 동쪽에 머레이 장군의 사단 약 3천이 아빈타스 쪽에서 강을 건넌 것을 보실 수 있는데, 머레이 장군은 자신의 병력만으로는 후퇴하는 술트의 군단을 막아서기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는지 술트의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웰슬리도 술트 못지 않은 명석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술트가 택할 길은 후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그의 목표를 술트를 단순히 포르투에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술트 군단의 격멸로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웰슬리는 미리 약 1만 규모의 영국군과 포르투갈군을 베레스포드(William Carr Beresford, 1st Viscount Beresford) 장군 지휘 하에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훨씬 더 동쪽의 도우루 강 상류로 보내 거기서 도하한 뒤 프랑스군의 퇴로를 끊도록 해놓았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도 추격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확실히 프랑스군에 비해 너무나 느렸습니다.  웰슬리의 본대는 결국 술트의 군단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술트는 이 제2차 포르투 전투에서 600명의 사상자와 무려 1500명의 포로를 내며 도망치듯 후퇴했습니다.  영국군의 피해는 고작 100여명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술트가 이렇게 체면이고 뭐고 아랑곳 하지 않고 서둘러 후퇴한 덕분에 프랑스군은 베레스포드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의 봉쇄에 걸리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 산악지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신 술트는 58문의 대포 전체와 군용 금고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부상자들도 포기해야 했지요.  산악지대로 들어갈 때는 짐마차는 모두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이때의 사건을 소재로 한 버나드 콘월(Bernard Cornwell)의 소설 Sharpe's Havoc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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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들에게는 배낭과 잡낭에서 식량과 탄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어떤 장교들은 검열을 실시하여 이번 원정에서 병사들이 얻은 약탈물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부대가 산 위로 올라가는 길 가에 은제 포크와 나이프, 촛대, 접시 등이 버려졌다.  대포와 마차, 탄약 수송차 등을 끌던 말과 황소, 노새는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두 사살했다.  짐승들은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걸을 수 없는 부상자들은 짐마차 속에 그대로 남겨졌는데, 곧 그들을 찾아와 복수를 시도할 포르투갈 민간인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 최소한의 시도는 해볼 수 있도록 머스켓 소총도 주어졌다.  술트는 군자금 금고, 즉 은화가 가득한 11개의 커다란 통을 길 가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병사들이 한줌씩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여자들은 치마를 펼쳐 한웅큼 은화를 퍼담고는 병사들과 함께 걸어갔다.  용기병과 경기병, 엽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말을 끌고 걸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황량한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고, 그 뒤로는 와인과 포트 와인, 교회에서 약탈한 황금 십자가와 북부 포르투갈의 대저택에서 훔친 오래된 그림들이 실린 짐마차들이 버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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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술트와 프랑스군의 고생과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점령지역인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험난한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했는데, 곳곳에서 험한 협곡과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허술한 다리들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산악 지대는 포르투갈 민병대인 오르데난사(Ordenança)들이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까마득한 계곡 위에 걸린 좁고 허술한 다리 너머를 한줌의 포르투갈 민병대가 지키고 있다면 아무리 프랑스군이 대군이라고 해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군의 발이 묶인 사이, 느리긴 해도 나름대로 서둘러 웰슬리의 영국군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술트와 그의 군단은 결국 이렇게 포르투갈 산골짜기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을까요 ?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술트 군단 전체가 전멸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용감무쌍한 한 남자 덕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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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규규 2018.02.04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번째인가요? ^^

  2. 유애경 2018.02.05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용감무쌍한 한 남자는 누구일까요!
    다음글이 엄청 기다려지네요!!!

  3. 석총 2018.02.05 1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글에 언급된 그분?

  4. 안타레스 2018.02.05 19: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수를 쫓아낸데 막대한 공헌을 세운 이발사에게 포상같은게 주어졌는가요?

  5. reinhardt100 2018.02.05 2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트의 경우, 일단 영국함대 때문에 도우루 강 남안에 신경쓰기 쉽지 않았던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전술하신 대로 영국함대가 어느 방향에다 육상군을 상륙시킬지에 대하여 도저히 답이 없었으니까요. 즉, 영국군 주력은 네덜란드나 다른 전장들 처럼 함대가 적 주력 근처에 직접 육상군을 상륙시킬 것이고 여차하면 화력지원 및 철수지원을 하기 용이한 해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합니다. 특히 웰즐리 이전의 영국군 주력의 상륙방식은 거의 항상 함대의 화력지원이 보장되는 해안가였지 포르투같은 해안포로 공격받기 좋은 지역은 아니었다는 것 또한 일종의 고정관념같이 여겨졌을 겁니다.

    여담으로 도우루 강은 745년 이슬람 영주들간의 내전이 시작되면서 갈리시아 및 도우루강 북안에서 이슬람군이 철수한 뒤부터 1030년 후우마이야조 붕괴시점까지 아스투리아스왕국과 그 방계국가들(갈리시아,레온,카스티야)간의 국경선으로 기능합니다. 이 당시 도우루강 연안에는 다수의 거점 요새가 세워졌고 이를 바탕으로 북부의 기독교 국가들이 끊임없이 남진을 하면서 강 전체가 전장터가 됩니다.

  6. 넬슨 2018.02.20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감무쌍한 전투란 빅토르 원수?

1808년 9월, 비메이로(Vimeiro) 전투에서 쥐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도 어이없는 신트라(Sintra) 협상으로 쥐노와 그의 군단을 안전하게 프랑스로 호송해보낸 사건 덕분에 영국으로 소환되었던 영국군 지휘관들 중 하나였던 웰슬리는, 그 협상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지휘권을 부여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웰슬리는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오기 위해 여기저기에 줄을 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영국은 돈 들어가는 싸움질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과 영국 사이에 바다가 있고 로열 네이비가 그 위에 떠 있는 이상 당장 침공 받을 염려가 없는데, 구태여 위험한 유럽 대륙으로 기어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무어 경이 이끄는 원정군이 한번 들어갔다가 개박살이 나서 거지꼴로 돌아온 마당에, 실패를 되풀이할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두가지 이유 때문에 영국은 결국 포르투갈에 원정군을 추가 파견하기로 합니다.  신문과 돈이었습니다.  




(영국군 총사령관인 요크 공작 프레더릭 왕자입니다.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연전연패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지휘관을 실력이 아니라 세습 신분에 따라 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육군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은 육군과는 달리 매관매직의 전통이 없었습니다.)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은 당시 국왕 조지 3세(George III)의 둘째 아들이자 섭정공의 동생이었던 요크 공작 프레더릭(Prince Frederick, Duke of York and Albany)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고, 둘째 이하는 군에 입대한다는 전통을 따라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령 계급으로 군에 입대한 그는 하노버의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2년 만에 소장, 다시 2년 만에 중장 계급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전체 영국군 총사령관(Commander in Chief)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업적은 별로 없었던 그는 그래도 이런저런 개혁안을 채택하면서 영국 육군의 발전에 이바지하는가 싶었는데, 그만 대형 사고에 휘말립니다.  그의 정부였던 평민 출신 미녀 메어리 앤 클라크(Mary Anne Clarke)가 그의 비호 아래 영국 육군 장교직을 팔아먹었다는 스캔달이 1809년 3월 15일에 터진 것입니다.  




(메어리 앤 클라크는 18살의 나이에 클라크라는 사람과 결혼했으나, 남편 사업이 잘 안되어 파산하자 곧장 이혼, 이후 사교계에 뛰어들어 그 미모와 교양을 바탕으로 요크 공작의 눈에 든 여자였습니다.  스캔달이 터지던 시점의 나이는 33세였습니다.)




원래 영국 육군 장교직은 공식적으로도 돈을 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매관매직 제도(purchase system)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건 일종의 사교 클럽 회원권처럼 장교단끼리 사고 팔아 비슷한 계급의 신사들만 장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필터링 장치일 뿐, 특정 개인의 주머니를 채우고자 운영되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요크 공작이 정부인 클라크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제공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자, 대신 그런 매관매직 관련한 뇌물을 받을 수 있도록 눈감아 주었다는 비난이 영국 언론과 시민 사회를 들끓게 했습니다.  결국 이 스캔달이 터져나온 뒤 10여 일만에 요크 공작은 총사령관직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비난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요크 공작 개인 차원이 문제가 아니라 왕정, 그리고 더 나아가 귀족 위주의 영국 지배 구조를 뒤흔드는 스캔달로 번질 태세였습니다.  




(그래도 영국이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 비해 훨씬 근대화된 나라였다는 점은 이 만화를 통해서도 나옵니다.  언론의 자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 만화는 Isaac Cruikshank라는 만화가의 작품이고, 여기서 메어리 클라크는 현대판 키르케로 나와 요크 공작의 망토를 입고 사람들에게 행운과 승진 등을 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돈 문제도 있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막 제5차 대불동맹전쟁을 터뜨리기 직전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영국에게 몸빵으로 도와줄 것이 아니라면 전쟁 자금으로 5백만 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1조2천7백억원)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전쟁을 패배로 마무리한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에게 바쳐야 했던 전쟁 배상금이 8천5백만 굴덴(현재 가치로 약 6300억원)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영국이 돈이 많다고 해도 이건 너무 과중한 액수였습니다.  오스트리아를 부추겨 나폴레옹에게 싸움을 걸려면 5백만 파운드를 내던가, 아니면 아일랜드인들과 스코틀랜드인, 그리고 하노버 독일인들로 구성된 영국 육군을 동원하여 몸빵을 해줘야 했습니다.




(캐슬레이 자작 로버트 스튜어트입니다.  그는 메테르니히와 함께 비엔나 체제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렇게 신문과 돈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전쟁성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 and the Colonies) 캐슬레이 경(Robert Stewart, Viscount Castlereagh)에게 작전 계획서 하나가 날아듭니다.  작성자는 아서 웰슬리였고, 그 내용을 한줄 요약하면 포르투갈의 산악 지대를 방어선으로 삼으면 프랑스군으로부터 리스본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문서에서 캐슬레이 경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1년간의 예상 작전 비용이었습니다.  1백만 파운드(약 2천5백억원)라고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캐슬레이 경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습니다.  무려 4백만 파운드를 절약하면서 요크 공작 스캔달로 달아오른 언론의 관심을 다시 나라 밖으로 돌릴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곧 포르투갈 원정대가 결정되었고, 그 총지휘관으로는 아서 웰슬리가 지명되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그의 형인 웰슬리 후작(Richard Colley Wellesley)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큰 역할을 했지요.  흔히 영국 해군에 비해 영국 육군이 너무나 무능한 모습을 보였던 이유 중 하나로 뽑히는 것이 바로 영국 육군의 매관매직 제도입니다만, 가끔 예외가 생기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일입니다.  귀족 위주로 돌아가느라 형편없었던 영국 육군에 생긴 예외는 바로 아서 웰슬리였습니다.




(리스본에서 포르투까지의 거리는 페롤에서 포르투까지의 거리와 거의 똑같습니다.)




확실히 웰슬리는 기존의 영국군 지휘관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4월 22일 배에서 내리자마자 진격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어디로요 ?  당연히 포르투였지요.  그가 포르투가 면한 도우루(Douro)  강 남안에 나타난 것이 5월 10일이니 불과 18일만에 무려 300km가 넘는 거리를 진격한 것입니다.  불과 3일 간의 준비하고 하루 평균 20km씩 15일을 행군한 셈인데, 실제로는 준비 기간이 더 길었고 행군은 더 빨랐습니다.  마지막 단계 120km는 불과 4일만에 주파했으니까요.  이건 프랑스군 기준으로 볼 때도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과는 달리 술트의 프랑스군은 몹시 지치고 재정비가 절실한 상태였다고는 해도, 비슷한 거리인 페롤에서 포르투로의 진격에, 술트는 무려 2달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영국군스럽지 않은 쾌속 행군을 마친 웰슬리를 기다리는 것은 건곤일척의 싸움을 위해 포진한 술트 원수, 영국식으로 킹 니콜라스(King Nicolas)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넘실넘실 깊고 푸른 물이 흐르는 드넓은 도우루 강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우루 강 남안에는 정말 신기하게도 조각배는 커녕 나무통 하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웰슬리와 그의 영국군은 여기서 그만 어이없이 발이 묶이는 듯 했습니다.  영국군에게 동쪽에서 귀인이 찾아온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Source :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virtual/c_Oporto.html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_Frederick,_Duke_of_York_and_Albany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Stewart,_Viscount_Castlereagh

https://en.wikipedia.org/wiki/Mary_Anne_Clar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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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웅진 2018.01.27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니까... 스탈린이 랜드리스를 더 해주든가 제2전선을 형성해달라고 하니까...
    "랜드리스를 더 해주기는 어렵고, 그 대신 노르망디에 상륙한다!"는 결정을 내려버린...
    대영제국이라고 하지만 20세기의 패권자인 미합중국에 비하면 이미 국력이 딸렸군요.

  2. 안타레스 2018.01.27 1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등입니다. 중요한건 아니지만 궁금해서 질문 올립니다. 전쟁성장관의 이름이 캐슬리그로 읽히는가요? 다른 문헌에는 캐슬레이라고 부르던데 어느 발음이 맞는지 아시는분 답글 부탁합니다..^^

  3. ㅇㅇ 2018.01.28 0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부터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영국이 프랑스 국방비의 몇배나 되는 군비를 보조금으로 유럽에 뿌렸다고하는데 혹시 어느정도인지 아시나요? 오스트리아가 요구한 금액보니까 장난이 아닌거같은데

    • nasica 2018.01.28 0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에 썼던 글에 관련 표가 있습니다. 1809년만 해도 840만 파운드, 절정기인 1813년에는 무려 2740만 파운드를 보조금으로 썼네요. http://blog.daum.net/nasica/6862630

  4. 박종필 2018.01.28 1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지 3세는 별명이 '농부 조지'라고 불릴정도로 시골 농부처럼 근면하고 성실하고 선량해서 여자관계도 왕비 이외에 정부나 사생아를 두지 않았던 완벽한 남자였는데 어찌된 노릇인지 그 아들들은 완전 망나니 방탕아들이더라고요. ㅋㅋㅋ
    아들이 9명이나 되는데 정상적인 결혼생활헌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ㅋㅋㅋ

  5. 석총 2018.01.28 1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마 요크공은 군제개혁을 열심히했죠 당시 영국 조지3세는 정신착란에 의해서 섭정공이 대리청정을 했죠

  6. 석총 2018.01.28 1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다음은 보이네요 동맹군의 등장 영포동맹은 아편전쟁시 마카오를 영국군이 거점으로 사용할정도죠

  7. 카를대공 2018.01.28 15: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캐슬레이 자작 얼굴은 처음 보는데 미남이었군요.
    이 분도 당대 왕족,귀족들처럼 미화된 초상화인 걸까요?

  8. 검불 2018.01.28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kalnaf.egloos.com/2904661

    본문에서는 짧게 언급되었지만 다른 블로그에서 본 요크 대공의 개혁에 관한 포스팅입니다.

    비록 야전 사령관으로서는 실패했으며 개인적인 처신도 바람직함과는 동떨어졌지만 그의 개혁이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아마 웰링턴 공작의 연전연승 역시 영국 육군의 '시스템' 자체가 효율적으로 개혁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테니 말입니다.

  9. 글쎄요 2018.01.29 0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크공작에 대해 첨언하자면
    통일된 규격의 훈련교범의 전군배치화 및 이행.
    매관매직에 대한 통제
    이 두가지가 업적인 사람이죠.
    요크공작에 대한 분노가 컸던 것은 이 두 가지로 달달 볶아대던 사람이 매관매직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고요.
    (이전에는 제한없이 현질하던 것이 이 사람때 들어와서는 현질을 하더라도 일정기간이상 의무복무를 해야 다음 계급으로 현질할수 있도록 바뀝니다. 추가적으로 상관으로부터의 평가도 필요해비구요)

    사람의 인격과 능력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는 사람이죠

1809년 초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무어 경이 이끌던 영국 원정군을 대서양으로 쫓아낸 것으로 정리가 끝났다고 생각한 유럽의 서쪽 끝 포르투갈에서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장소는 포르투갈 북쪽의 항구 도시 포르투(Porto, 영어로는 Oporto)였습니다.  당시 영국 신사들의 정찬(dinner)에서 빠질 수 없는 마지막 코스였던 포트 와인(port wine)의 이름이 바로 이 도시 이름에서 나온 것일 정도로, 포르투는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이자 대영국 와인 수출 창구로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당연히 포르투갈 침공을 노리던 술트의 프랑스 군단의 제1차 목표가 바로 이 도시였습니다.



(포르투 항구는 큰 강인 도우루 Douro 강 하구에 위치합니다.  전통적으로 도우루 강가의 포도 농장에서 빚은 포트 와인은 이런 배에 실려 도우루 강을 따라 포르투에 집산된 뒤, 영국으로 수출되었습니다.  포트 와인은 먼 항해에도 와인이 상하지 않도록 증류 와인을 좀 첨가하여 보통 와인보다 좀더 알콜 도수가 높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포르투에서 영국까지는 고작 1~2주 밖에 걸리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 증류 와인이 첨가된 것은 그냥 술고래 영국인들 입맛에 맞도록 하기 위한 것인 것 같습니다.)




지난 1월 16일 스페인 코루냐(Coruña) 전투에서 무어 장군의 영국군을 바다로 쫓아낸 뒤, 술트는 4일 만인 1월 20일 코루냐를 함락시켰고, 다시 그로부터 1주일 뒤 스페인 제1인의 군항 페롤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여기서 얻은 막대한 영국군의 비축 군수품을 이용하여 군단을 재정비한 뒤 술트는 거의 2달 만인 3월 28일 포르투 앞에 나타났습니다.  포르투갈 정복을 시작하는데 술트는 거의 2달을 소모한 셈이었지요.  페롤 점령 이후 너무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만, 페롤에서 포르투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도 무려 300km가 넘고, 당시 군대의 전진 속도로는 빨라도 15일이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술트 군단은 직선으로 이동해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포르투갈 정규군과 시민들은 강이나 협곡 등의 천연 장애물이 있는 곳곳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프랑스군의 진격을 훼방놓았으므로, 술트는 해안선을 따라 편하게 진격하지 못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선을 넘나들며 지그재그로 진격해야 했습니다.



(페롤에서 포르투까지의 거리입니다.)



술트의 진격은 당시로서는 꽤 빠른 것이었는데, 프랑스군의 기동을 보면 당시 프랑스군의 전형적인 전략 목표를 보여줍니다.  프랑스군은 오로지 돈과 물자가 몰려 있는 도시 정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측면이건 후방이건 적대적인 주민들의 저항을 차근차근 분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우회하여 쾌속으로 도시를 향해 내달렸습니다.  이건 프랑스군의 운영이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 아니라 노획한 금은과 물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나름대로 효과적인 전략이었으나 분명히 뒤탈이 예상되는 것이었고, 실제로 술트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술트 군단 약 2만1천이 3월 29일 포르투 시 북방에 나타나자, 포르투갈 측은 무려 2만4천을 동원하여 시 북쪽에 방어선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 중 제대로 무장을 갖춘 정규군은 불과 4천5백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1만의 민병대(Ordenanças, 영어로는 Ordinances)에 농기구와 사냥총을 들고 자발적으로 나선 1만의 시민들에 불과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용기만 있을 뿐이었던 오합지졸 포르투갈군은 와르르 무너져내려 무려 8천이 넘는 전사자와 수천의 포로를 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군도 시내에서까지도 나름 용맹하게 저항하여 프랑스군 사상자도 2천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제1차 포르투 전투의 상황도입니다.  꽤 큰 강인 도우루 강 북안에 위치한 포르투는 애초에 북쪽에서 내려오는 강력한 프랑스군으로부터 사수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르투갈 정규군과 민간인들은 용감하게 저항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군은 다른 지역에서는 잘 벌이지 않던 짓을 저지릅니다.  전투에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참여한 것을 보고, 또 군대가 무너졌는데도 시내 골목 곳곳에서 시민들이 무장 저항을 하는 것을 보고 시민들에게까지 무지막지한 무력행사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전투 및 도시 함락 때, 포르투 시민들은 숫자가 파악되지 않은 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의 잔혹한 폭력에 놀란 시민들이 도시 남쪽으로 이어진 부교를 통해 도시를 탈출하려고 몰리는 바람에, 이 다리가 붕괴되어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부교 붕괴는 프랑스군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결국 프랑스군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프랑스군이 이렇게 난폭하게 굴지 않았고, 따라서 도시가 함락되어도 시민들이 겁에 질려 탈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나온 이유도 결국은 포르투갈 민간인들이 저항에 참여했기 때문이니까, 무조건 프랑스군이 절대악이라고 할 수만도 없습니다.  이래저래, 결국 나쁜 것은 전쟁 그 자체인 것이지요.




(프랑스 측에서 그린 제1차 포르투 전투 전쟁화입니다.  술트 오른쪽 아래에, 사망한 엄마의 품으로부터 아기를 구조하는 프랑스 병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 속에도 도우루 강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와, 그 다리로 탈출하는 포르투 주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저런 기둥이 있는 다리가 아니라 부교였고, 아마 프랑스군이 저렇게 포르투갈 주민들의 아기를 구출했는지 여부도 저 다리 묘사처럼 부정확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유혈 사태를 일으키며 포르투를 장악하여 많은 물자와 돈, 군수품을 획득한 술트는 의외로 남진을 하지 않고 여기서 눌러 앉아 시간을 때웠습니다.  1차 목표를 달성하여 배가 불렀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에는 다른 문제도 개입되었다고 합니다.  이 다른 문제란 이제 개인적 탐욕이 부풀어 오를대로 부풀어 오른 나폴레옹의 부하 원수들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술트는 포르투갈의 왕이 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군 사이에서 술트 원수는 "Le Roi Nicolas", 즉 니콜라 왕으로 불리우고 있었습니다.  그 즈음해서 술트는 나폴레옹의 형제들이나 뮈라처럼 왕족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습니다.  이제 스페인을 가로질러 만만하고 조그마한데다 기존 왕족들이 모조리 브라질로 도망가버린 무주공산 포르투갈 왕국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자 정말 니콜라 술트 원수가 니콜라 1세가 될 가능성이 손에 잡힐 정도로 커진 것입니다.  




(프랑스어판 위키피디아에 올라온 술트의 초상화입니다.  많이 알려진 초상화와는 또 약간 좀 다른 모습이네요.  술트의 이름은 Jean-de-Dieu Soult로서, 니콜라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니콜라 1세냐고요 ?  그의 출생 증명서에는 이름이 장이라고 되어 있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의 first name이 Nicolas라고 알고 있었답니다.  이건 다부의 스펠링이 Davoust냐 Davout냐처럼 당사자만 확실히 알고 있을 사실이지요.)



하지만 니콜라 1세의 꿈은 요원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프랑스군 병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르 롸 니콜라"라는 별명은 결코 존경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병사들은 비아냥의 뜻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었고,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는 장교들도 만약 정말 술트가 스스로 니콜라 1세를 선포할 경우 황제를 위해 반란을 일으킬 기세였습니다.  술트는 그냥 싸움질에 소질이 있는 유능한 야전 지휘관에 불과했을 뿐 결코 나폴레옹이 아니었으며, 부하들의 신망을 얻어 충성심을 끌어내는 그런 대인물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무엇보다, 술트 자신이 나폴레옹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폴레옹 허락없이 스스로 니콜라 1세가 될 경우 뒷감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트는 뻔뻔스럽게도 심복들을 동원하여 포르투갈 주민들로 하여금 '술트를 왕으로 삼자'라고 공작을 펼쳤으나, 이건 시간 낭비에 불과했습니다.  포르투에 입성할 때 그토록 많은 민간인을 살상해놓고 그런 공작을 펼치다니, 현실 감각이 떨어진 것이지요.


오히려 더 전격적으로 리스본 공략에 나서서 실제로 리스본 정복에 성공했다면 나폴레옹이 술트를 왕으로 임명해줄 가능성이 눈곱만큼이나마 더 높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트가 리스본으로 진격하지 않은 것에는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영국군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주변은 온통 적대 게릴라 세력이 둘러싸고 있어, 보충병력을 충원받기도 어려웠고 스페인 주둔 프랑스군과 파발문을 주고 받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술트는 남진은 커녕 오히려 스페인으로의 탈출을 슬슬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후퇴는 자랑할 일이 아니었으므로, 술트는 부유한 도시 포르투를 샅샅이 훑어 먹으며 꾸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니콜라 1세의 꿈을 산산조각 낼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809년 4월 22일, 바로 7년전 프랑스 해군 건조창에서 만들어진 40문짜리 대형 프리깃함 쉬르베이양뜨(Surveillante) 호가 리스본에 입항했습니다.  그러나 이 배에는 프랑스의 삼색기 대신 영국 깃발이 걸려있었고, 이름도 영국식으로 서베일런트라고 발음되었습니다.  이 배는 진수된지 1년 만에 영국 해군에게 나포되어 그 프랑스식 이름 그대로 영국 해군에 취역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군함이 아서 웰슬리(Arthur Wellesley)를 태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Porto

https://en.wikipedia.org/wiki/Jean-de-Dieu_Soult

https://fr.wikipedia.org/wiki/Jean-de-Dieu_Soult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Battle_of_Porto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frigate_Surveillante_(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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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종필 2018.01.21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강철 공작 (iron duke) 등장이네요

  2. 안타레스 2018.01.21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아서 웨즐리의 본격적인 등장인가요?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3. 장웅진 2018.01.21 2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서 웰즐리 : 소관에게 양고기 구이를 양보하시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니콜라 1세

  4. 아스페른에슬링 2018.01.21 2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작년 3월인가 다음블로그를 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아껴가며 조금씩 읽다보니 최근에야 연재분량을 따라잡았습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5. reinhardt100 2018.01.24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르투갈 와인이 도수를 높인 이유는 프랑스 와인과의 생존경쟁 때문이긴 합니다. 1688-1697의 9년 전쟁 당시, 잉글랜드는 프랑스와의 무역이 끊기면서 어쩔 수 없이 포르투갈산 와인만 주야장천 마실 수 밖에 없었죠. 전쟁 후? 그냥 운송비 적게 드는 프랑스 와인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포르투갈 와인은 잉글랜드 시장에서 고사되기 직전 상황까지 몰립니다. 아직 브라질의 금광이 본격적 터지기 직전이고 식민지도 거의 다 거덜나서 경제를 전적으로 잉글랜드에 의존하던 상태였으니까요. 이 상황에서 잉글랜드인들의 기호를 맞추어 프랑스산과의 차별을 꾀하는 건 당연했을 겁니다.

    • 최홍락 2018.01.25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9년전쟁의 영향으로 포르투칼산 와인이 반사이익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후에 프랑스 와인의 시장 복귀로 포르투칼 와인이 고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포르투칼산 와인은 이후에도 잉글랜드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데 이는 1704년 체결된 메수엔 조약이라는 세계 최초의 FTA 협정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영국산 공산품과 포르투칼산 와인 사이의 관세장벽을 대폭 낮춘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포르투칼산 와인이 영국 와인 수입량의 2/3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이덕분에 리카르도가 비교우위 이론을 설명할 때 영국산 면직물과 포르투칼산 와인을 예로 들기도 하지요.

      프랑스 와인이 영국 시장에서 강세를 다시 회복한것도 자유무역협정 덕분이지요. 나폴레옹 3세 시절 체결된 콥든 슈발리에 협정의 영향으로 영국의 프랑스산 와인 수입이 2배 증가했거든요. 이전에 프랑스 대혁명 전에 체결된 영불간 자유무역협정인 이든 조약의 경우 대혁명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지만 콥든 슈발리에 협정은 1862년 체결후 30년간 지속되었는데 이게 프랑스 와인의 강세의 결정적 원인이 된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nasica 2018.01.25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분 모두 귀한 댓글 고맙습니다.

  6. 수비니우스 2018.01.26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영국인들은 알콜도수가 좀더 높은 와인이 일반 와인보다 좀더 맛있다고 본걸까요... 알콜도수가 맛에 그렇게 중요한것 같진 않은데 ㅎㅎ 취하는걸 더 좋아한걸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