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군 2개 사단을 위기에서 구출해준 것은 전선 중앙부에서처럼 영국군 자신들의 경험 부족과 무지였습니다.  페인(Fane)과 앤슨(Anson)의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군을 위협하여 방진을 이루게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협박만 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렇게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을 메데진 언덕 위의 영국군 포병대가 계속 갉아먹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총검을 촘촘히 내밀고 방진을 이룬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영국군 기병대는 겁도 없이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돌격은 기병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영국군은 용감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 기병대를 격파한 것은 프랑스군의 총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닥치고 돌격'을 감행하던 중, 선두를 달리던 영국군 기병대 제1파가 비명과 함께 한꺼번에 증발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들과 프랑스군 사이에 깊이 3m, 폭 4.5m의 깊게 움푹 파인 도랑 같은 지형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쪽에서는 교묘하게 눈에 잘 보이지 않던 이 도랑 속에 놀랍게도 영국군 기병대 제1파의 절반 정도가 빠져버렸고, 많은 병사들과 말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영국군 기병대의 멍청함을 비웃을 처지가 될까요 ?  위 그림은 1815년 워털루에서 프랑스군 기병대가 돌격하다 똑같은 운명에 처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저런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만, 빅토르 위고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에서도 저 장면을 세밀히 묘사했습니다.  덕분에 이런 그림도 그려졌지요.)




이건 정말 코미디 같기도 하고 비극 같기도 한 어이없는 사고였습니다.  제대로 된 지휘관의 기본 중 기본이 지형 숙지였는데, 메데진 언덕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점하고도 그런 도랑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영국군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 지휘부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사고로 큰 낭패를 당했을 경우, 아무리 창피하더라도 물러서서 재정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페인과 앤슨은 굴하지 않고 그대로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제대로 된 공격을 했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컸는데, 그렇게 엉망진창인 상태로 보병 방진을 공격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습니다.  영국군 기병대는 거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보기 흉하게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군이 이 틈을 타 진격을 재개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메데진 언덕에는 영국군과 스페인군 보병 사단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영국제 포탄이 계속 날아왔습니다.  게다가 이때 즈음엔 다른 방면에서의 프랑스군도 다 패퇴한 상태라는 소식이 전해졌으므로, 루팽과 빌라트도 영국군 기병대가 박살이 난 틈을 타 재빨리 후퇴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탈라베라 전투의 실질적인 마무리였습니다.



(영국 화가인 William Heath가 그린 탈라베라 전투입니다.  진 쪽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습니다.)




전투 과정은 길고 잡다했습니다만,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영국군이 스페인군과 연합하여 스페인 내부로의 침공길에 나섰는데, 그를 막으러 온 프랑스군과 탈라베라에서 마주치자 정작 공격한 측은 프랑스군이었고 영국-스페인군은 방어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공격이 좌절된 것이 결과였지요.  공격했는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곧 패배일까요 ?


빅토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세 번 공격하여 다 실패했지만, 한 번 더 들이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도 컸으나 영국군도 꽤 큰 피해를 입었고, 조제프와 주르당의 약 5000 규모의 예비대는 아직 총 한 방 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제프와 주르당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세 번이나 두드렸는데 안 열리는 문은 네 번 두드린다고 열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남의 집 문 따고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워두고 온 마드리드의 본진이 베네가스에게 털리게 생긴 상황이었으니, 마음이 조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조제프는 주르당의 조언대로 철수를 명령했고,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도 그 명령에 복종하여 28일 밤부터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탈라베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 노릇을 하던 빅토르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찌나 분통이 터졌는지 아무 대책없이 철수를 거부하고 29일 새벽 3시까지 그 자리를 고수했습니다.  그러나 전체 프랑스군의 2/3가 다 철수하는데 그의 제1 군단 혼자 남아있다가는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조제프와 주르당에 대한 욕설을 지껄이면서 그도 결국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 뒤에도 조제프와 주르당만 없었다면 프랑스군이 4번째 공격에서 마침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당시 전투에서의 승리란 누가 더 많은 적을 죽였는가가 아니라 누가 물러났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거든요.  영국군은 약 6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7천이 넘는 사상자를 냈습니다.  전체 병력 대비 사상자 비율로 보면 영국군 측이 더 높은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간 의아한 것은 별로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던 스페인군도 1천2백이나 되는 사상자를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쿠에스타는 영국군이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스페인군에는 사상자가 거의 없다고 하면 스페인군의 체면이 구겨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상자를 많이 낸 것은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다는 증거로서 당시 지휘관에게 일종의 영광처럼 여겨졌습니다.  물론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 전투의 승자는 분명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건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전투를 치르는 것은 그저 지휘관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어 도시를 탈환한다든지 적의 항복을 받아낸다든지 하는 승리의 열매를 거두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탈라베라 전투는 쓰라린 희생만 있었을 뿐,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열매가 전혀 없었습니다.  마드리드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과 합류하는 것이 정상적인 작전 흐름이었을텐데, 영국군은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  영국군이거든요 !  산더미 같은 염장쇠고기와 럼주가 함께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런 고기통 술통은 옮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웰슬리가 이렇게 보급품 문제로 꾸물거린 것이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웰슬리는 이때까지도 북쪽에서 술트 원수가 약 3만명 규모로 충원된 제2 군단을 끌고 자신의 후방을 끊기 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3일 뒤인 8월 1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웰슬리는 처음에 술트의 제2 군단 규모가 약 1만5천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추가로 전달된 정보에 의해 병력 규모가 3만에 달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그의 결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그는 마드리드로의 진격을 재빨리 포기하고 타호 강을 따라 포르투갈 국경 너머로 후퇴해버렸습니다.  웰슬리에게는 포르투갈로부터의 보급선이 차단될 경우 발생할 문제가 극복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웰슬리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예비 탄약과 보급 물자 대부분은 물론, 탈라베라 전투에서 노획했던 십여 문의 프랑스군 대포도 모두 버리고 허둥지둥 퇴각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이었다면 이렇게 빅토르-세바스티아니 군단들에 이어 술트의 군단을 각개격파할 기회가 생긴 것에 매우 기뻐하며 그의 군을 오히려 북쪽으로 진격시켜 술트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탈라베라에서 철수한 프랑스군은 원래의 철수 목적을 매우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조제프와 주르당은 빈정이 상할대로 상한 빅토르에게 뒤에 남아 웰슬리와 쿠에스타의 연합군을 감시하는 한직을 주고는, 세바스티아니의 제4 군단과 함께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을 상대하러 달려갔습니다.  이들은 8월 11일, 마침내 톨레도(Toledo) 인근 알모나시드(Almonacid) 전투에서 베네가스와 만나 매우 쉽게 라 만차 군을 격파하고, 마드리드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 장군입니다.  이 분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역할을 더 많이 했고, 사실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알모나시드 전투에서의 승리가 이 양반의 가장 큰 승리일 것입니다.  이 분은 안달루시아 침공 이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사령부를 차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혹자는 그가 알함브라 궁전의 일부를 파괴한 것을 비난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황폐화시켜놓은 알함브라를 다시 복원시킨 것이 그였다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탈라베라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2만의 영국군이 무려 4만이 넘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거의 단독으로 버텨내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후퇴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지엽적이고 전술적인 승리일 뿐, 전략적으로는 프랑스군이 모든 목표를 달성한 프랑스 측의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영국군의 스페인 침공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베네가스의 라 만차 군처럼 분산된 스페인군을 각개격파할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11월 마드리드 인근 오카냐(Ocana)의 전투에서 술트가 4만5천 규모의 스페인군을 완파한 것이 매우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이 전투 결과 스페인 중부를 완전히 장악한 프랑스군은 바일렌 전투 이후 감히 넘보지 못하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침공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웰슬리의 영국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웰슬리는 스페인 측이 '오기만 하면 식량까지 모두 공급할테니 일단 오시라'고 여러차례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 다음해인 1810년 2월말까지도 포르투갈 국경을 절대 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탈라베라에서 보니 스페인군은 믿을 수 없는 작자들이더라, 그들의 협력을 기대하고 스페인으로 진격했다가는 큰일 나겠더라'는 입장을 고수했지요.  그게 꼭 틀린 평가는 아닐지 몰라도, 영국군이 스페인에게 있어 그다지 좋은 연합군이 아니었던 점은 확실했습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탈라베라 전투는 웰슬리 본인에게는 무척 뜻깊은 승리였습니다.  어쨌거나 마침내 스페인에 진격하여 프랑스 2개 군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어 경의 코로나 전투 이후 침체되었던 영국 육군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약 1달 뒤인 8월 26일, 마침내 꿈꾸던 그대로 귀족이 되어 웰링턴 자작(Viscount Wellington of Talavera and of Wellington)이 되었습니다.  약 3년 후인 1812년 살라망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드리드를 탈환한 그는 웰링턴 백작(Earl of Wellington)이 됩니다.



* 사족 :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과 세바스티아니 장군과의 관계는 아래 편을 참조...


http://nasica1.tistory.com/30







Source : http://lamejortierradecastilla.com/la-batalla-de-talavera-y-2-la-sangre-corre-en-la-portina/

https://www.bbc.co.uk/radio4/wellington/talavera_pop.shtml

https://en.wikipedia.org/wiki/Jean-Baptiste_Jourdan

http://www.worcestershireregiment.com/wr.php?main=inc/h_talavera

http://www.napoleon-series.org/military/battles/1809/Peninsula/talavera/c_talaveraoob.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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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ck 2018.04.01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탈라베라전투가 드디어 끝났군요. 후에 줄줄이 벌어질 전투에 비하면 소규모이지만 대혁명이후 유럽대륙에서 대규모 야전을 치러본 전력이 없는 영국군으로선 그나마 여러가지 면에서 좋은 경험이었겠지요?. 방어전문 장군이지만 웨즐리같은 상승장군도 건졌고 훈련만 열심히 했던 영국육군이 그나마 전투다운 전투도 치렀으니 말이죠. 어째든 탈라베라전투의 독후감을 한마디로 하면 "결과가 뭐지?" 이런 느낌이랄까?..

  2. 유애경 2018.04.02 0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상화의 세바스티아니 장군,어디서 본듯한 얼굴이다 싶어서 생각해보니 뮈라 원수랑 닮은것 같네요...(저한테만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알함브라 궁전을 파괴하면서 한편으론 황폐해진 궁전을 복원시켰으니 칭찬(?)을 해줘야 하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보고 가요~~

  3. TheK의 추천영화 2018.04.02 0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글이 착착 감기네요.
    자주 와서 좋은 글 많이 읽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 석총 2018.04.02 0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메이로에선 공작+원수가 되죠 웰링턴으로 한이유가 웰슬리와 모닝턴을 합친거랍니다.

  5. 수비니우스 2018.04.02 07: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그런데 영국군 지휘부는 미숙할 뿐만 아니라 실리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바로 이어서 벌어졌습니다. "
    동서남북 어디나 사람 사는데는 비슷비슷하군요...

  6. reinhardt100 2018.04.02 0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웰즐리가 도박을 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보급문제이기도 했지만 웰즐리마저 패하면 대륙 원정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는 게 더 큰 이유이긴 합니다. 무어-웰즐리가 연속 실패한다고 가정한다면 비전투손실만도 최소 수만 단위인데 하노버등의 병력충원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같은 내부 자원을 본국의 반전 및 러다이트 분위기 제어에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조건적인 협상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미앵조약이 그랬고요.

    다만, 안달루시아 침공을 선택했다는 것은 프랑스군으로써도 패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에스파냐 주력군을 격파한 후 바다호스의 방어선이 완비되지 않았던 영국군을 공격하는게 더 효율적이었으니까요. 다만, 여기서 문제는 보급이 문제란게 걸립니다만.

  7. 정암 2018.04.03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페인 전역 관련 글이 부족해서 늘 궁금했는데 요즘 감사히 즐겁게 글 읽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데, 저 알함브라궁전 장식들은 사람들이 일일히 손으로 깎고 새긴건가요?
    아님 현대에 와서 기계장비로 복원한건가요?
    전자라면 후덜덜하네요;;;;
    저런 정교한 문양이 몇백년이 지나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는게 놀랍고요 @.@

  8. 카를대공 2018.04.03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 쪽은 그림 같은 거 그리지 않습니다.

    이 멘트 보고 깨달았는데 그동안은 확실히 프랑스측에서 그린 전투 기록화가 많았군요.
    그말인즉슨 이제부턴 슬슬 프랑스 아닌 국가에서 그린 그림이 많아지겠네요.

  9. 카를대공 2018.04.03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라망카 전투 하니 제가 재밌게 본 브레이킹 배드라는 미드가 떠오르네요.
    거기 살라망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워낙 유명한 미드라 이름 정도는 들어 보셨을텐데 강추 합니다.

  10. 줄리안 2018.06.01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체 샤프는 이런 상황에서 라이플 경보병 대위가 프랑스군의 이글을 탈환했다는 것인지...

1809년 5월 16일 폰트 다 미사헬라(Ponte da Mizarela)에서 술트의 프랑스군을 놓친 웰슬리의 영국군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1차 목표인 포르투갈 탈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성공일 뿐이었습니다.  스페인-포르투갈 접경 지역 곳곳에는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등이 이끄는 프랑스 군단들이 호시탐탐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격파하기 전에는 포르투갈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웰슬리는 정말 이들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웰슬리의 영국군은 고작 2만명 수준이었습니다.  영국군에게는 이 정도면 굉장히 큰 규모의 야전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에서는 그리 인상적인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을 점거 중이던 프랑스군은 최소 7개 군단이었고 10만이 넘었으니까요.  그런 스페인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은 혹시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 같은 짓이 아니었을까요 ?


웰슬리도 나름 정보와 생각이 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 프랑스군의 상태는 웰슬리의 진격에 대해 그다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생 시르(St. Cyr)의 제7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동쪽의 카탈루냐 지방에 있었고, 수셰(Suchet)의 제3 군단은 그 바로 옆 아라곤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모르티에(Mortier)의 제5 군단도 마드리드 북쪽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주둔하고 있었고, 네(Ney)의 제6 군단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갈리시아(Galicia)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Sebastiani)의 제4 군단은 마드리드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술트의 제2 군단은 웰슬리의 영국군에 의해 포르투갈에서 거지꼴로 막 쫓겨난 뒤 재정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빅토르의 제1 군단은 포르투갈 접경 지역의 구아디아나(Guadiana)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809년 5월말, 스페인 내 프랑스 7개 군단의 위치입니다.  전년도에 있었던 바일렌에서의 뒤퐁의 대패 덕분에, 아직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는 프랑스군이 발을 못 붙이고 있었고,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가 스페인 저항군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도 속의 붉은색 지점 표시 부분이 바로 탈라베라입니다. )




웰링턴에게 주어진 공격 루트는 크게 2가지였습니다.  도우루(Douro) 강을 따라 술트를 추격하여 마무리짓는 것과, 훨씬 남쪽인 타호(Tajo, 포르투갈어로는 테주 Tejo, 영어로는 타거스 Tagus) 강을 따라 빅토르를 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다 강을 따라 가냐고요 ?  스페인에 비해 작고 약한 포르투갈이 독립국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지대의 지형이 무척 험하여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갈 수 있는 전통적인 교통로는 저 두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들이었습니다.  특히 리스본부터 타호 강가를 따라 가면 탈라베라(Talavera)와 톨레도(Toledo)를 거쳐 마드리드 인근의 아랑후에스(Aranjuez)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타호 강과 그 주변 강역도입니다. )




어떻게 생각하면 대포를 모두 잃은데다 만신창이가 되었고, 또 바로 발 뒤꿈치까지 따라잡은 술트의 뒤를 계속 추격하는 것이 상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웰슬리는 과감히 방향을 선회하여, 저 남쪽의 타호 강을 따라 진격하여 빅토르를 격파하기로 합니다.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무래도 2만 정도의 병력만으로 스페인 내부로 진격하는 것은 무척 버거운 일이었는데, 스페인 쿠에스타(Cuesta) 장군이 협동 작전을 요청해온 것입니다.  쿠에스타에게는 약 3만의 병력이 있었으니 영국군에게 이 제안은 무척이나 솔깃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상황을 보니 만약 빅토르만 성공적으로 격파한다면, 마드리드까지 일사천리로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잘 하면 분산된 프랑스군의 의표를 찔러 마드리드를 기습 점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점령한 뒤 과연 마드리드를 지켜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그래도 그런 승리는 큰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웰슬리는 출세욕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한 아일랜드 모닝턴(Earl of Mornington) 백작의 3남에 불과했으므로 철저한 장자 상속권을 따르는 영국 귀족 사회의 전통에 따라 그는 백작도 자작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도 자신을 아일랜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개인적 목표는 잉글랜드 내의 어느 근사한 영지에 대해 작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웰슬리는 야심찬 행군을 시작했으나, 군사작전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작전이 생각했던 것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빅토르의 군단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웰슬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현지 조달에 의존하는 프랑스군 특성상, 빅토르가 주둔하고 있던 에스트레마두라(Estremadura) 지방의 구아디나아에서는 식량이 바닥났던 것입니다.  쿠에스타의 스페인군도 견제할 겸 식량도 구할 겸, 빅토르의 제1 군단은 마드리드 쪽에 좀더 가까운 탈라베라(Talvera)로 이동했습니다.


여전히 상황은 영국-스페인 연합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빅토르의 제1 군단은 1만9천 정도에 불과한 것에 비해, 연합군은 영국군 2만에 스페인군 3만이라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정보력에서도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민간 게릴라들이 주요 도로와 시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군단 간에 전통문을 주고 받는 것도 쉽지 않았고 소규모 정찰대를 운영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빅토르를 비롯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스페인 진입을 7월 9일까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68세이던 쿠에스타 장군에 대해 겁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돈키호테 같은 아집과 오만, 그리고 외국인 혐오증은 매력적인 연합군 파트너가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엉뚱한 오해가 영국-스페인 연합군의 발목을 잡습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인 세비야(Sevilla) 지방 정부격인 훈타(Junta)에서 영국군을 좀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웰슬리를 스페인군 전체의 통합 사령관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작 웰슬리 본인은 오직 잉글랜드 작위에만 관심이 있었던지라, 무능하고 믿을 수 없는 스페인군의 총사령관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쿠에스타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원래 영국과 스페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 해적왕 드레이크 이야기에서 짐작하시듯 아메리카 대륙과 네덜란드 등지에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죽어라 싸우던 사이로서, 그 민족 감정은 꽤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더 큰 적 나폴레옹에 맞서기 위해 연합을 맺은 관계라고 해도, 오만하고 재수없는 영국 장군이 스페인군에게 지휘관 노릇을 하며 이래라저래라 명령질을 하는 모습은 스페인 장군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웰슬리에게 합동 작전을 펼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쿠에스타가 웰슬리에게 갑자기 퉁명스럽게 대하며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덕분에 웰슬리와 쿠에스타 사이에 구체적 합동 작전 계획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망친 것은 쿠에스타의 질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항상 산더미같은 염장 쇠고기와 럼주를 끼고 다녀야 했던 영국군의 특성 때문에 영국군의 진격은 너무 느렸습니다.  6월 8일 포르투갈 내 타호 강 계곡 지역인 아브란치스(Abrantes)에 도착한 영국군은 거의 3주간 그 지역에서 허송세월했는데, 이는 쿠에스타의 딴지 때문만은 아니었고 영국군을 위한 염장 쇠고기와 럼주 등 군량 창고를 짓고 물자를 집적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웰슬리는 6월 28일에야 아브란치스를 떠나 7월 3일에야 스페인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렇게 포르투 전투 이후 거의 2달이 지나서야 이렇게 스페인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빅토르는 영국군의 진입을 모른 채 쿠에스타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웰슬리는 여전히 빅토르의 옆구리를 기습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에는 없던 변수가 생겼습니다.  빅토르가 위치를 잡은 탈라베라는 전보다 훨씬 마드리드에 가까운 곳이었고, 더 나쁜 것은 세바스티아니의 프랑스군 제4 군단과도 더 가까와졌다는 것입니다.  웰슬리가 꿈꿨던 것은 쿠에스타와 빅토르가 서로의 멱살을 쥐고 뒹구는 사이에 살짝 다가가 빅토르의 옆구리에 연장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바스티아니가 바로 옆에 서있다면 현장 분위기가 그다지 친영국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 귀족들로 구성된 스페인군 수뇌부의 모든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베네가스 장군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스페인군이 제시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와 대치 중이던 베네가스(Francisco Javier Venegas) 장군의 라 만차 군(Ejército de La Mancha)이 세바스티아니를 적절히 견제하여 서쪽의 빅토르를 지원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쉬운 군사 작전이 서면 상의 작전이었습니다.  베네가스는 스페인 귀족다운 풍모와 위엄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귀족이 갖춘 것 그것 뿐이었습니다.  군사적 재능이라고는 1도 없었던 그는 이미 그 해 1월에 벌어진 우클레스(Uclés) 전투에서 고작 1만 조금 넘는 병력을 가지고 아무 상황 판단을 못 한 채 1만5천의 우세한 병력을 가진 빅토르에게 달려들었다가 1천의 사상자와 6천의 포로를 내는 참패를 겪은 바 있었습니다.  만약 스페인이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였다면,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그저 귀족의 체면을 위해 돌격했다가 1만군을 통째로 전멸시킨 베네가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철저한 귀족 중심 사회였고,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베네가스가 받은 것은 군법회의 출두명령서 대신 2만3천의 병력을 갖춘 라 만차 군 사령관 임명장이었습니다.


베네가스에게 주어진 명령은 2만 병력의 프랑스 제4 군단을 공격하여 분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섣부른 전투를 피하되 세바스티아니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빅토르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잘 대치하고 있으라는 간단한 명령이었지요.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간단한 명령조차 완수하지 못하는 신박함을 보여주었습니다.  7월 초, 마침내 웰슬리의 영국군이 탈라베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프랑스군이 조제프 왕과 마드리드 수비대까지 다 이끌고 탈라베라로 달려갈 때, 베네가스 앞에 있던 세바스티아니도 서둘러 탈라베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베네가스는 그 뒷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베네가스에게 완전히 또다른 기회를 주었습니다.  마드리드가 바로 코 앞인데, 그의 앞을 가로 막을 인근의 프랑스군이 모조리 탈라베라로 가버린 것입니다.  베네가스는 이때 2가지 꽃놀이 패를 쥐고 있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의 뒤를 쫓아 탈라베라로 이동한 뒤 쿠에스타 및 웰슬리와 연합하여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데 일조할 수도 있었고, 또는 아예 텅 빈 마드리드로 진격하여 수도를 탈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네가스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대체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약 1달 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다른 부대들과 합동 작전을 펼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베네가스는 후퇴하라는 쿠에스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굳이 세바스티아니와 전투를 벌였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는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시고 일단은 탈라베라 전투에 집중하겠습니다.


이렇게 베네가스가 삽질을 해주는 덕분에 프랑스군은 빅토르와 세바스티아니 뿐만 아니라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그의 보좌관 주르당(Jourdan) 원수가 이끄는 마드리드 수비대 및 2개 용기병 사단 총 1만1천까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탈라베라에서의 힘의 균형은 영국-스페인 연합군 5만5천에 프랑스군 4만6천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된 셈이었으나 여전히 영국-스페인 연합군이 분명한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영국-스페인은 불신과 반목으로 얼룩진 어설픈 연합군이었습니다.  스페인 국왕 조제프가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단일 정예군과의 대결에서는 불리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또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Tagus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battles_talavera.html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ampaign_talavera.html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alavera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co_Javier_Venega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monac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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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몽키D루피 2018.02.25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처음으로 1등~! ^0^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2. reinhardt100 2018.02.2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빅토르가 후퇴한 엑스트라마두라 지역은 전통적으로 에스파냐 농촌 지역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편인 지역입니다. 16세기 신대륙을 정복한 콩키스타도르 (라)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인것만 해도 이미 드러나니까요.

    이베리아 반도 지역 자체가 프랑스군이 주전장으로 싸워왔던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 폴란드보다도 사실 더 빈곤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탈리아나 독일, 이집트는 적어도 개별 가구에서는 약탈할게 있었고, 폴란드 같은 경우는 추워서 그렇지, 적어도 보급선이 끊길 우려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이베리아 반도는 수자원이 현재와 마찬가지로 꽤나 부족해서 농업생산력이 낮은데다가 메스타라는 목양조합의 영향까지 겹치면서 농민들의 삶은 완전 박살난 수준이 되었으니까요. 에스파냐 왕실 역시 이걸 도저히 묵과할 수는 없었고, 신대륙의 식민지가 독립하기 전 국가예산의 상당수를 신대륙에서 오는 정화준비 수송선단에 의존했고, '페닌술라에스'라 하여 에스파냐 본토 출신들을 의도적으로 우대, 신대륙으로 보내려고도 노력하긴 합니다.

    웰링턴이 술트를 추격하지 못한데는 지형상, 교통편상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탄약소모가 있었습니다. 염장쇠고기같은거야 극단적으로 보면 길가는(?) 소 한 마리 잡아서 먹으면 되지만 탄약은 그게 안 되었으니까요. 특히 영국군이 자랑하는 '씬 레드라인'의 탄막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탄약이 미친듯이 들어갔는데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는 그 많은 탄약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방법이 없었고 전쟁 내내 본국에서 조달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총검의 원조국가답게 17세기 네덜란드 전쟁 당시부터 이미 총검돌격전이 되면 막을 군대가 없다고 할 정도인 프랑스군과의 총검돌격전을 어떻게든 막으려면 더욱 탄약이 중요했죠. 이러다보니 진격속도가 느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nasica 2018.02.25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 reinhardt100 2018.02.25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웰링턴이 그토록 공명에 집착한 이유가 형이었던 동인도회사의 인도 총독인 웰즐리 후작의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사실, 웰링턴이 워털루 전투의 승장이라는 명성에 가려서 그렇지 형 웰즐리 후작이 미친 영향은 훨씬 큽니다. 최초의 귀족 출신 총독으로써 전임자이던 동인도회사 사원 출신이던 헤이스팅스의 업적을 '(이후의 오클랜드와 아머스트 같은) 무모한 확장정책으로 말아먹지 않고서' 인도 제패에 시동을 걸었다는 겁니다. 웰즐리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귀족들에 대한 의구심을 어느 정도 걷고 콘월리스 등의 후임 귀족출신 총독들도 계속해서 선임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웰즐리 후작이 현대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매관매직이 판치던 영국에 '공정한 시험에 의한 (능력주의에 근거한)선발'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동인도회사 사원 및 인도통치에 소요되는 행정관 및 장교들을 다수의 학원 및 사관학교를 통해 모집, 충격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는 당시 임원진의 사원입사 추천권을 정면으로 건드리면서 의회 내 인도족과 회사내 해운족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되어 정책 자체가 폐지되지만 1853년의 추밀원령에 의한 제국고등문관시험제도 정비가 시작되면서 이후에 결실을 맺게 됩니다.

    • 카를대공 2018.03.04 0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렇게 보니 형제가 위인이네요.
      그것도 둘 다 영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엄청 크구요.

  3. 에로준 2018.02.25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글과 좋은 댓글 입니다.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4. 석총 2018.02.28 1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웰링턴은 웰슬리와 모닝턴의 스펠링을 합친거죠
    사실 귀족의 차남이 작위를 받으면 분가하는게 원칙이고 귀족명을 모닝턴과 성인 웰슬리를 합쳐서 웰링턴이 되었죠

  5. BACCANO 2018.03.08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베네가스 무능함의 끝판왕이네요 ㅋㅋㅋ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알함브라 궁전이었는데, 실제로 본 알함브라는 그 기대치를 100%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알함브라는 약 700년 간 이슬람의 통치를 받았던 스페인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인데, 그 이름은 아랍어인 알-함라(Al-Ḥamra), 영어로 직역하면 The Red 정도로 번역됩니다.  이 궁전은 그냥 연한 황갈색이고, 주변 토양이 붉기는 하지만 이름의 기원은 이 요새를 약 9세기 경 이 장소에 맨 처음 세운 아랍 족장의 별명이 알-함라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알함브라는 10년 20년 사이에 지어진 하나의 건물이 아니고, 여러 채의 궁전과 요새, 정원이 수세기에 9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지어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성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더 좋은 다른 글들이 많을 것이니, 여기서는 두어 가지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랍식 궁전에 분수와 오렌지 나무가 많은 것은, 이슬람 믿음에 '천국에는 샘과 미녀와 과실이 열리는 나무들이 있다'라는 말 때문에 그렇답니다.  정말 지상에 만들어 놓은 낙원이지요.) 




아랍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슬람 통치 기간인 8세기~15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아랍인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정복자는 소수였고, 피지배인인 기존 스페인 주민들은 여전히 그대로 살고 있었지요.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고, 또 그대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은 세금만 내면 정복민들이 무슨 종교를 가지든 용납해주는, 꽤 너그러운 종교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슬람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면세 혜택을 줄이기 위해 개종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뜻 밖의 혜택을 받은 일파가 바로 유태인들이었습니다.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살해한 원수들'이라는 인식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신봉하던 유럽 사회에서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었는데, 이슬람이 장악한 스페인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비야나 그라나다 등 이슬람 주요 거점 도시를 가면 꼭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거리가 있고, 세고비아 같은 도시는 유태인들 덕분에 흥하다가 기독교 세력이 다시 세고비아를 탈환한 뒤 유태인 사회가 붕괴되면서 도시 전체가 경제적 활력을 잃기도 했습니다.





(알함브라는 이렇게 정원, 요새, 아랍 궁전, 카톨릭 수도원, 그리고 르네상스식으로 새로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 등이 어우러진 건물 복합체입니다.  그 중의 꽃은 물론 아랍식 궁전인 나스르 궁전입니다.)




정복자 아랍인들이 계속 본국인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활발히 내왕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원래 북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원정을 보냈던 아랍 왕조도 본국에서의 정변으로 교체되었고,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도 얼마가지 않아 독자적 왕국을 세우고 칼리프를 선언하면서 오히려 모로코 본국과는 경쟁 관계에 접어 들었습니다.  스페인의 코르도바 왕조의 왕족들도 자신들의 고향이 아라비아나 북아프리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백년 간 스페인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자신들의 고향을 스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왕조에 충성하던 이슬람 교인들도 다 아랍 혈통은 아니었고, 그 중 상당수는 스페인 혈통의 이슬람인이었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이 700년 넘게, 반올림해서 천년간 스페인을 지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슬람 세력끼리의 전쟁도 많았고,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전쟁도 많았으며, 이슬람과 기독교가 합세하여 다른 이슬람 또는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일도 많았습니다.  가령 스페인의 전설적 영웅 엘 시드(El Cid)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기독교 왕을 위해 싸우다가 정치적으로 불리해지자 사라고사의 이슬람 왕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이슬람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 세력과 싸우는 용병이 될 정도였지요.  


기독교 세력이 진행한 스페인 재정복 전쟁, 즉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이슬람 세력의 분열 덕분에 확실한 성과를 차곡차곡 쌓았고, 13세기가 되면 어느덧 남부 그라나다 왕국을 빼고는 이베리아 반도는 대부분 기독교 세력으로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정복된 영토에서 차출할 수 있는 병력과 자원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으므로, 그라나다 왕국, 정확하게는 그라나다 토후국(Emirate of Granada)의 운명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남쪽에 찌그러진 그라나다 왕국에게, 저렇게 커다란 키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이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1482년부터 10년 간 이어진 그라나다 전쟁의 결과, 이슬람 에미르(Emir)인 무함마드 12세(Muhammad XII)는 알함브라 궁전을 포함한 그라나다 왕국 전체를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에게 넘기고 항복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걸린 67개 항복 조건 중 주요 내용은, 이슬람 교인들은 계속 그 종교와 사유 재산을 유지할 수 있고, 기존의 법과 질서에 따른 보호를 받게 되며, 또 원할 경우 10%의 통행세를 내면 재산을 모두 가지고 북아프리카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도, 강요에 의해 다시 기독교로 개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무함마드 12세 등 왕족들에게는 그라나다 바로 남쪽의 네바다 산맥 너머 지중해 인근 지역에 적절한 영지가 주어져 거기서 살게 되었지요.





(무함마드 12세가 이사벨라-페르난도 부부에게 항복하는 장면입니다.  배경에 알함브라 궁전이 보입니다.)




무함마드 12세는 최후까지 항전할 용기는 없었던 망한 나라의 군주로서 용기가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확실히 대단한 여장부였던 모양입니다.  원래 당시 항복할 때의 의례적 절차에 따르면, 패자는 승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항복하는 도시의 열쇠를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 12세의 어머니가 '절대 그런 치욕만은 참을 수 없다'라고 강경하게 버틴 덕분에 무함마드 12세는 그냥 열쇠만 바치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 현장에 있었던 레온(Leon)의 주교가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로 내려옵니다.  또 당시 현장에는 인도로의 서쪽 항해 계획에 대해 승인을 받으려 이사벨라 여왕을 쫓아다니던 콜럼부스도 있었다고 합니다.  


알함브라의 항복에 얽힌 이야기 그 다음은 전설입니다.  무함마드 12세가 그에게 배정된 영지로 식솔들과 함께 그라나다 남쪽으로 넘어가는 어느 고개 정상에 이르자, 무함마드 12세는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두번 다시 못 볼, 그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그렇게 그의 눈에 들어온 궁전과 그라나다 시의 애틋한 모습에 그는 끝내 탄식을 뱉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장부이던 그의 어머니가, 요즘 같으면 남녀 성차별이라고 지탄받을 그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네가 남자답게 지키지 못한 것을 돌아다 보며 이젠 여자처럼 우는거냐 ?"







무함마드 12세가 이렇게 알함브라를 돌아본 고갯길은 Suspiro del Moro (무어인의 탄식)이라는 로맨틱한 이름이 붙였졌습니다.  이번에 알함브라에 갈 때, 일부러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며 그 곳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냥 도로 위의 한 표지판만 있더군요.  차를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고갯길에서 일부러 천천히 차를 몰며 바라다 보았지만 시야에 알함브라가 분명히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아쉽더군요.






이 무함마드 12세는 한동안 네바다 산맥 남쪽에서 살다가, 결국 당시 모로코를 통치하던 마라니드 왕조에게 탄원한 뒤 모로코로 넘어가 지금도 관광도시로 유명한 페스(Fes)에서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약 100년 뒤, 그의 자손을 페스에서 만난 어떤 스페인 여행가는 그 자손들은 빈곤 속에 살고 있더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쓸쓸한 전설 속에 탈환된 알함브라 궁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나 세비야의 알카사르 등 이슬람 궁전들을 접한 스페인 군주들은 이슬람 건축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은 이슬람 양식으로 자신의 궁정을 장식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발전된 이슬람 양식을 무데하르(Mudéjar) 양식이라고 합니다.  원래 무데하르는 아랍어로 '길들여진'이라는 뜻인데, 이슬람 축출 이후로도 스페인에 남아 이슬람 신앙을 유지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 매력에 흠뻑 빠진 이사벨라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궁전이 되었고, 그들은 아랍 양식을 살리면서도 일부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보수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 벽에 '알라 외에 승자는 없다' 등 근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볼 때 불온한 글귀가 벽면에 새겨진 방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그대로 놓아두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아랍어를 읽을 수 없었으니 상관없을 수도 있었겠네요.  콜럼버스가 마침내 신대륙으로의 항해를 승인 받은 것도 알함브라 궁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데하르 양식이 발전한 것은 대항해 시대로 스페인에 금은이 쏟아져 들어올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스페인의 국운이 점점 몰락하면서, 옛 이슬람 왕궁들은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고, 알함브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는 폐허가 되어 그 아름다운 파티오(patio, 건물로 둘러싸인 안마당)들에는 온갖 쓰레기더미가 가득 쌓이게 되었고, 노숙자들의 쉼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알함브라의 벽 아래에서의 판당고' 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작가는 나폴레옹 직속의 지도 제작가이자 화가 바클레르-달브 Bacler d’Albe 입니다.  아마 달브가 이때는 세바스티아니의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나 봅니다.)




그런 알함브라가 다시 빛을 본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덕분이었습니다.  1810년 1월 28일, 본격적으로 스페인을 침공하던 프랑스군 중 일부는 마침내 그라나다 시까지 몰아닥쳤고, 그라나다 시는 2년간 프랑스군 점령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프랑스군 부대를 지휘하던 것은 오라스 세바스티아니(Horace Sebastiani) 장군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원래 오스만 투르크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꽤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외교관으로서는 능력있는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군 지휘관으로서는 영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교양있는 외교관에 가까웠던 이 사람이 그라나다에 온 것이 알함브라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세바스티아니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점령군 지휘관이 아니었지만, 황폐화되어있던 알함브라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대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알함브라를 프랑스군 사령부로 삼고 내부를 청소했으며, 알함브라의 일부인 알카사바(Alcazaba) 요새를 보수했습니다.  그렇다고 세바스티아니가 문화재를 보존하려는 문화 애호가만은 아니었습니다.  알함브라를 군사 요새화하기 위해 일부 건물을 부수고 개조하기도 했으니까요.  게다가 알함브라 내에 자리잡고 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convento de San Francisco)은 그 내부 장식물은 물론 청동으로 된 종들까지 모두 징발당하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알함브라 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나스르 궁전(Palacios Nazaries)은 완전히 보수되어 말끔히 청소가 되어, 다시 그 분수에는 물이 흘렀고 정원에는 꽃이 심겨졌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이 근 200년 만에 다시 아름다움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에 좋은 일만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1812년 9월, 전세 악화로 프랑스군이 그라나다에서 철수하게 되자, 이들은 방어 진지를 고스란히 스페인군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면서 알함브라의 일부 탑을 폭파한 것입니다.  바로 다음날 그라나다에 진입한 스페인군은 알함브라 궁전 내의 감옥에 갇혔던 스페인 포로들을 석방했고, 대신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 병사들을 쳐넣었습니다.  이 스페인군의 지휘관인 바예스테로스(Francisco Ballesteros) 장군은 이 프랑스군 포로들에게 노역을 시켜 프랑스군이 폭파한 잔해를 치우게 했습니다.  이후 알함브라는 과거 스페인의 황금 시대를 상기시키는 역사적 현장으로 관심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인과응보였는지 역사의 블랙 유머인지 모르겠으나, 징발당했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의 종들은 1818년 프랑스군으로부터 노획했던 24파운드짜리 대포를 녹여서 새로 주조되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알함브라를 훼손했다고 비난하지만, 19세기에 알함브라를 여행하며 그 존재와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던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은 프랑스군 덕분에 알함브라가 세상에 알려졌다고 썼던 것입니다.





(포도주의 탑 Torre del vino 꼭대기에서 바라본 네바다 산맥입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터도 아주 좋더군요.  부동산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정말 아름다왔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은 아닙니다.  오른쪽의 창문이 많은 유럽식 건물은 후세에 지어진 카를로스 5세 궁전입니다.  나머지 왼쪽에서 중앙, 그리고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긴 건물이 나스르 궁전입니다.)



Source :  http://revistadehistoria.es/la-alhambra-tras-la-ocupacion-napoleonica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_XII_of_Granada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Granada_(1491)

https://en.wikipedia.org/wiki/Alhambra

https://en.wikipedia.org/wiki/Granada_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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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홍락 2017.01.08 2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태인 얘기가 나오길래 알함브라 칙령 얘기도 나오겠거니 했는데 안나오네요.

  2. 재영 2017.01.09 1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를로스5세라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5세를 일컫는가요? 당대의 금수저인데 뭘 못했겠습니까만은 마지막 사진에 그 양반이 증축한 건물을 보니 솔직히 기존 궁전과는 형태가 아니라 부피(볼륨감)에서 약간 부조화스런것 같습니다. 물론 개인간에 견해차는 있을 수 있겠죠...^^;;

    • 박종필 2017.01.09 2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를 5세가 증축한 다음에 후회했다고 하네요.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던 것을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바꿔버렸네' 하고 후회했다네요.

    • 최홍락 2017.01.10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증축한 부분(카를 5세 궁전)조차 2014년에 갔을때는 보존 공사 중이라 내부가 대부분 아시바로 도배가 되어 있어 더 흉물이 되버린 듯합니다.

  3. 박종필 2017.01.09 2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때 인류 문명권 중 가장 발달된 문명을 자랑했고, 저렇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긴 이슬람권이 요즘 불안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것을 보면 참 역사란 무엇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고민스러워집니다. ㅠㅠㅠ
    (물론 이슬람권도 뭉뚱그려 하나로 통칭할 순 없겠지만요.)

  4. 석공 2017.01.10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연스럽게 나폴레옹 이야기로 넘어가서~~ 살짝 기대를 했습니다. ^^*

  5. 프로이센군 2017.01.13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살면서 꼭 가보고 싶은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알함브라 궁전입니다! 이베리아의 이슬람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궁전에서 옛 무어인들의 영광과 몰락을 모두 느껴보고 싶네요. 햇빛을 받으면 궁전이 붉게 물들어 상당히 아름답다는데 Nasica님, 정말 그렇던가요??

  6. 청명 2017.05.09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작년 겨울에 가족여행으로 갔던 알함브라 궁의
    아름답던 모습이 떠오르네요ᆞ
    저흰 단체 관광이라 아침 일찍 갔었는데
    키높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우리 일행의 길다란 그림자가 펼쳐진 장면이나
    마악 동이 틀 무렵이라 아들들과 성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발그래한 얼굴로 나왔던거ᆞᆞ
    후궁들의 방 천장에 에머랄드색으로 빛나던 돌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ᆞ
    나시카님 덕분에 알함브라 궁과 무어인들의
    연원에 대해 알게 되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