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본격 산당국(産糖國)의 꿈이 현실화되기 전에 전쟁의 물결이 닥쳤습니다.  아카르트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빌헬름 3세가 알고보니 멍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입만 살았던 강경파의 주장대로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고, 나폴레옹은 '내가 바로 나폴레옹이다'라는 것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빌헬름 3세에게 혹독하게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이 전쟁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정제소까지 집어 삼켰습니다.  1806년 밀물처럼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공장을 불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아카르트는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잠겼습니다.  사탕무 정제소가 사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온 나라가 탈탈 털렸고, 나폴레옹에게 알짜배기만 골라 영토를 절반이나 빼앗기고 덤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내야 했습니다.  프로이센에게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걸었던 러시아까지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나폴레옹과 손을 잡으면서, 프로이센은 영원히 유럽의 3류 국가로 전락하는 듯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르트의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잔치집,  누군가에게는 초상집.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의 1807년 틸지트 조약 장면입니다.)




하지만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법입니다.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멸시키고 베를린에 입성한 뒤인 1806년 11월 21일, 대륙봉쇄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영국 선박이 실어오는 영국 및 그 식민지 제품들이 유럽 대륙에 발붙이는 것이 어려워졌지요.  이에 대응하여 영국도 추밀원 명령을 통해 프랑스 및 그 동맹국 해안을 역봉쇄했는데, 그러자 나폴레옹도 질세라 더 강력한 조치인 1807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원산지가 세탁된 영국 및 그 식민지 제품들이 중립국 선박을 통해서나마 유럽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 막히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여러가지 현상과 문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부 지역의 일부 산업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영국이 시장에서 사라지면서 부흥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로 인해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특히 설탕 ! 사람을 중독시키는 음식은 많습니다만, 술이나 커피나 담배나 홍차나 김치나 치즈나 첫맛은 '뭐 이런 맛이 다 있어 ?'라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설탕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처음 한번 맛을 보자마자 모두 좋아하게 된 음식은 정말 드물었습니다.  그동안 설탕에 중독되었던 유럽인들은 설탕이 식탁에서 사라지자 그저 아쉬움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절실한 갈증과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런 중독 현상에서 오는 갈증과 욕망은 자연스럽게 아카르트의 사탕무 설탕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유럽 내 설탕 값이 치솟으면서, 다시 아카르트에게 지원이 쇄도하며 1810년 그는 작은 규모나마 다시 사탕무 설탕 정제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공장은 곧 보헤미아와 아우크스부르크 등으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아카르트라는 프로이센 사람이 무에서 설탕을 뽑아낸다는 신기한 소식은 곧 나폴레옹의 귀까지 들려왔습니다.  스스로를 대단한 학자로 여겼던 그는 곧 과학자들로 구성된 파견단을 슐레지엔으로 파견하여 아카르트의 정제소를 조사했습니다.  이들은 돌아와서 그 복제판인 작은 정제소 2개소를 파리 인근에 지었는데, 이들은 아무래도 재료 품질이나 경험치에서 부족한 면이 있었는지 상용적인 성공을 거둘 정도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 빌어먹을 영국놈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설탕을 뽑아낼 수 있다는 증거를 본 나폴레옹은 크게 흥분했습니다.  바로 다음해인 1811년 나폴레옹은 칙령을 내려 100만 프랑(현재 가치로 약 160억원)을 들여 설탕 학교를 세우고 프랑스에서도 2만8천 헥타아르의 농토를 사탕무 재배에 할당하여 대대적으로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제 새롭게 태동하는 프랑스 설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태까지 면허장 제도 및 일부 중립국을 통해 수입하던 카리브산 설탕의 수입을 1813년부터는 완전 금지했습니다.  




(1865년 런던에서 설립된 리빅 고기 수프 액기스 회사 Liebig Extract of Meat Company의 불어판 기념 엽서입니다.  다소 엉뚱하지만, 여기에 아카르트의 사탕무 설탕 정제소의 모습이 그림으로 담겨 있습니다.  아마 같은 식품 회사들의 역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시리즈물이었나 봅니다.  설명에는 Fondation de la première fabrique de sucre de betterave par Achard 즉 아카르트에 의한 최초의 사탕무 설탕 제조 공장 설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가능케 만든 아카르트에게는 어떤 금전적 혜택이 주어졌을까요 ?  당시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프랑스에 이미 특허권 제도가 도입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레종도뇌르 훈장과 함께 그에 따른 두둑한 연금이라도 주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때 당시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호되게 당한 동맹국으로서 우방국이긴 했지만, 나폴레옹에게 있어 프로이센은 어디까지나 견제 대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카르트에게 어떠한 금전적 보상도 하지 않았고, 아카르트는 계속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작 그에게 보상을 제시했던 것은 엉뚱하게도 영국 설탕 상인들이었습니다.  카리브산 설탕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만끽하던 영국의 거대 설탕 상인들은 아카르트가 사탕무로부터 설탕을 만드는 방법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폴레옹이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돈이 궁하던 아카르트에게 무려 20만 탈러(현재 가치로 약 21억원)의 금전적 보상을 제시했습니다.  훨씬 더 생산성이 좋은 카리브 해의 노예 설탕 농장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왜 사탕무 특허권을 사려 했을까요 ?  그들이 원했던 것은 특허권이나 독점 생산권이 아니라, 아카르트에게 '사탕무 실험은 대실패였다, 역시 유럽에서 설탕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발표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카리브산 설탕의 경쟁자를 없애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 카리브해의 설탕 플랜테이션은 요즘의 유전과도 같은 부의 창출원이었거든요.  17세기 말 기준이긴 합니다만, 영국령 바베이도스(Barbados)의 81 헥타아르(24.5만평)의 사탕수수 농장과 그에 딸린 정제소면 영국 본토의 백작 가문과 맞먹는 부를 쏟아낸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영국이 값싼 설탕을 카리브해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태양과 쏟아지는 비 외에도 흑인 노예 덕분이었습니다.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잔혹한 조건에서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가야 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묘사하자면, 영국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실어다 카리브해에 갈아넣으면 그것이 설탕이 되어 나오는 셈이었습니다.)  



(그런 설탕 무역의 비윤리적인 면 때문에, 영국 내에서도 자국의 설탕 상인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컸고, 설탕없이 홍차를 마시자는 운동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풍자화에서 영국 왕과 여왕이 공주들에게 '설탕 없이 차를 마시니 아주 맛이 좋구나' 라고 이야기하는데, 공주님들의 표정은 과히 좋지 못하네요.)



(17~18세기 영국에서 카리브해의 설탕 농장을 통해 떼돈을 번 사람들을 sugar barons 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것도 원래 밑천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장사였고, 실제로 귀족인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설탕 귀족으로는 이 그림 속 주인공인 William Beckford와 함께 James Drax, Christopher Bethell-Codrington 등이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주인공인 벡포드는 말년에 모든 재산을 잃었지만, 크리스토퍼 코드링턴 같은 경우는 하원의원직을 유지하며 거듭된 노예 폐지 법안에 집요하게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아카르트의 고결함이 가장 빛났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설탕이 부유한 상인들의 배를 불리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온 인류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탐욕스러운 영국 자본의 유혹을 거절하고, 사탕무 재배법과 설탕 제조법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폴레옹이 파견한 과학자들도 아카르트로부터 그 제조법을 그대로 배워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유럽에서의 사탕무 설탕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사탕무 설탕 생산량은 나폴레옹 재위 기간 동안에 카리브산 설탕을 압도할 만한 규모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의 농업 생산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유럽은 굶주림이 존재하던 곳이었거든요.  사탕무보다는 당장 배를 채울 밀과 감자를 키우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에 사탕무 재배에 많은 토지를 할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화학 비료 등에 의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탕무 재배와 사탕무 설탕 생산량도 크게 늘었습니다.  1840년 사탕무 설탕은 전세계 설탕 생산량의 5% 정도만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1880년 경에는 그 비율이 무려 50%로 늘어났습니다.  사탕무의 전성시대가 끝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였습니다.  유럽 대륙이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면서, 아무래도 당장 군인들을 먹일 밀과 콩, 가축 사료용 옥수수 등의 재배가 더 시급했던 것이 원인이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전세계 설탕 생산량의 20%는 사탕무 설탕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 프랑스, 미국과 독일 등에서는 사탕무 재배가 활발합니다.




(현대 전세계의 사탕무 생산량입니다.  아카르트 덕분에 추운 지방인 러시아에서도 설탕 생산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유럽의 농업과 설탕 생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아카르트는 결국 그 공로를 인정받아 행복한 말년을 보냈을까요 ?  항상 그렇지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공법을 채택한 유럽 각지에서 사탕무 설탕 정제소가 계속 늘어났지만, 유럽인들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공개한 아카르트 소유의 정제소들은 그와 반비례하여 계속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노예 노동으로 생산된 값싼 카리브산 설탕이 영국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의 사탕무 정제소들은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던 1815년, 그의 공장은 결국 파산을 선언해야 했고, 다시 6년이 지난 1821년 아카르트는 그가 사탕무 사업에 인생을 바친 슐레지엔 볼라우(Wohlau)에서 빈곤 속에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

https://en.wikipedia.org/wiki/Sugar_beet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media/File:Liebig_Company_Trading_Card_Ad_01.12.005_front.tif

https://janeaustensworld.wordpress.com/2011/03/14/cesar-picton-wealthy-merchant-and-freed-man-the-regency-era/

https://www.economist.com/node/21525808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Bethell-Codrington

1810년 이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위가 된 나폴레옹의 권력은 무소불위에 가까운 절정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도나우 강변에서 피를 쏟으며 싸운 병사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하고 엘베(Elbe) 강과 베저(Weser) 강 하구 북유럽 해안에 분산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영국과의 무역 전쟁인 대륙봉쇄령의 엄격한 집행을 위해 북부 독일의 항구 도시들을 감시하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북부 독일 해안에 이런 감시를 집중했을까요 ?


이는 북부 유럽과 남부 유럽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농업에 의존해야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 삶과 문화는 농작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북부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 문화는 지중해 연안 남부 프랑스 사람들의 것보다는 독일 사람들의 것과 더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기름입니다.  남부 프랑스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그리스처럼 올리브유를 많이 쓰는 것에 비해 북부 프랑스는 독일이나 영국처럼 버터를 많이 쓰지요.  



(최근 boredpanda.com이라는 사이트에서 게재했던 유럽의 분류 지도입니다.  이런 분류의 가장 큰 영향은 위도의 높낮이와 그에 따른 일조량의 차이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국민성이니 민족의 우수함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미미한 인간들의 개소리일 뿐이고, 우리 모두 거대한 우주 속에서 그저 바람 따라 흩날릴 뿐인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 남부는 불만투성이 속에서도 그런대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가령 미국에서 수입하던 목화솜은 아마(flax)와 나폴리산 목화솜으로 대체가 가능했습니다.  인도에서 들여오던 고급진 파란색 인디고(indigo) 염료는 좀 촌스럽지만 유럽 자생의 대청(woad)으로도 흉내를 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커피도 볶아서 가루를 낸 치커리(chicory) 뿌리로 최소한 맛과 향을 어느 정도 비슷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설탕은 좀 문제였습니다.  햇빛이 잘 내리쬐는 남부 유럽에서는 포도즙을 졸여 만든 시럽으로 설탕을 대체했습니다.  실제로 설탕을 넣지 않은 과일잼으로 인기가 있는 생달푸르(St Dalfour) 잼만 해도, 설탕 대신 포도즙과 대추야자즙을 사용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달다고 해서 다 설탕의 대체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설탕의 그 아무 향 없는 순수한 단맛은 특히 커피와 홍차, 코코아 등 마실 것에 있어 대체 불가였습니다.  



(대청이라고 불리는 woad 잎입니다.  이걸 가공하면 푸른색의 염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인디고의 그 눈부신 새파란 색깔과는 비교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인도 원산지의 콩과 식물의 잎을 원료로 하여 만드는 가공된 인디고 염료 덩어리입니다.  당시 영국의 인도 무역선들 즉 indiaman들이 실어오는 주요 귀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인디고였습니다.)



(코스트코에서 싸게 살 수 있는 생-달푸르 잼입니다.  '설탕이 들지 않은 좋은 잼'이라는 것이 특장점 중의 하나인데, 솔직히 맛은 뭐 그저 그렇습니다.  또 설탕 대신 포도 시럽을 쓴다고 건강에 더 좋은 것인지도 그닥...)




그나마 남부 유럽에서는 어렵게나마 이런 식으로 대체재를 구할 수 있었으나, 북부 유럽에서는 그마저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불만족스러운 대체재의 가격마저 비쌌던 발트해 연안의 북유럽 지역에서는 영국과의 밀무역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친인척인 네덜란드 왕 루이나 베스트팔렌 왕 제롬은 형 나폴레옹으로부터 밀무역 단속을 전쟁처럼 삼엄하게 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인 부하들과 자주 접촉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동생들은 형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밀무역을 은연 중에 눈감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국에 대한 나폴레옹의 무역 전쟁은 조금씩 패배로 뒷걸음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설탕은 무역 액수에 있어서나 상징적인 면에 있어서나 매우 중요했습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동물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돈이 많아도 또 아무리 학식이 많아도 결국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18세기 말 19세기 초반의 유럽은 이미 설탕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이건 특히 영국에서 심했습니다.  영국은 홍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였거든요.  


17세기 중반에 중국에서 녹차 형태로 맨 처음 차가 들어왔을 때는 차에 설탕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수십년이 흐르는 사이 어느덧 홍차에는 설탕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누가 어떤 사건을 통해 홍차에 설탕을 넣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주도적인 설이 없습니다.  일부 설에 따르면 그건 영국 선원들 영향이라고 합니다.  즉, 인도에서는 설탕 종주국답게 홍차에 설탕을 넣어서 마셨는데, 영국 선원들이 그런 습관을 배워서 영국으로 가져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국 선원들이 럼주나 진, 맥주 등을 두고 과연 홍차 같은 것을 마셨을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심이 남습니다.  확실한 것은 17세기 말엽에는 이미 유럽 대부분에서는 홍차에 설탕을 넣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홍차 뿐만 아니었습니다.  17세기부터 중산층 이상의 영국인들의 식생활에서 설탕은 뺄 수 없는 요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1603년 영국을 방문한 스페인 파견단 일행이 영국인들이 후식 뿐만 아니라 메인 코스의 고기 요리에도, 심지어 와인에도 설탕을 듬뿍 쓰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다른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이나 프랑스 등 유럽 대륙에서는 설탕을 그렇게까지 많이 소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지요.  




(점박이개 즉 spotted dog 또는 spotted dick이라고 불린 푸딩입니다.  삶아서 만드는 푸딩이라 오븐을 쓰기 어려운 군함에서 특히 즐겨 만들어 먹던 영국 해군의 디저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탕을 잘 먹지 않던 스페인인들이나 프랑스인들도 설탕을 대량으로 써야만 했습니다.  바로 후식과 커피 때문이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설탕 값은 1파운드에 약 6펜스 정도로 싸졌습니다.  이는 현재가치로 약 6000원 정도로서, 당시 우표값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파운드당 약 1200원 정도에 비해서는 크게 비싼 것이지만 중세 시대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싸진 것이었습니다.  중세 시절에는 파이 껍질에 덜덜 떨면서 아껴가며 뿌리던 것을 이젠 아예 파이 껍질을 반죽할 때 듬뿍 넣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17세기 들어서면 빈곤층이 아닌 이상 하루 식사 중 최소한 한번은 푸딩이든 파이든 타르트든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 후식이 식탁에 올라와야 했습니다.  달콤한 후식이 없는 식사는 당연히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 다른 오락거리가 별로 없어 손님을 초대한 식사를 자주 즐기던 중산층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체면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가 초연된 짐머만 커피하우스입니다.  라이프치히에 있었는데, 1943년 연합군의 대공습 때 파괴되었습니다.)




게다가 커피가 있었습니다.  1735년 짐머만 커피하우스(Zimmermannsches Kaffeehaus)에서 초연된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커피 칸타타(독일어 원제는 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 조용, 떠들지 마셈 이라고 합니다)에서도 아버지 쉴렌드리언(Schlendrian)이 딸 리쉔(Lieschen)의 커피 중독을 한탄했듯이, 이미 유럽은 커피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소비되던 커피는 설탕과 마찬가지로 주로 카리브해에서 노예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주요 유통 경로가 영국 해군에 의해 끊긴 뒤에도, 처음 유럽에 소개될 때처럼 이집트와 오스만 투르크를 통해 들어오던 북아프리카산 커피가 여전히 유통되었습니다.  그런 진짜 커피를 마실 형편이 안 되는 서민층에서는 치커리 뿌리라도 볶아 우려냈고, 그마저도 구할 형편이 안되는 집에서는 빵가루를 시커멓게 태운 뒤 가루를 내어 우려낸 것을 커피 대신 마셨습니다.  그런 어이없는 대용 커피라도 꼭 마시고 싶었을까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게 태운 곡식을 물에 우려내어 마시는 습관은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숭늉이나 보리차가 다 그런 것이지요.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대용 커피에도 설탕은 넣었다는 것입니다.  



(치커리 식물의 모양새입니다.)



(치커리 뿌리로 만든 대용 커피입니다.  이때 뿐만 아니라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나 제1, 2차 세계대전 등 전쟁 때마다 치커리 뿌리로 만든 대용 커피는 군인들과 민간인들 모두로부터 사랑(?)받았습니다. )




당시 커피와 설탕은 비싼 수입품으로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 먹을 수 있는 것이었을텐데, 과연 서민층까지 그렇게 커피와 설탕에 중독된 상태였을까요 ?  예, 그랬습니다.  1663년 독일 여행가 소머펠트(Gustav Sommerfeldt)가 남긴 기록을 보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가 포로로 잡혀 남게 된 투르크인들이 커피와 설탕으로 음료를 만들어 팔아 돈을 벌고 있더라'는 소식을 신기하다는 듯이 남겼는데, 그로부터 불과 130년 정도 지난 사이에 유럽은 이미 커피와 설탕에 중독된 상태였습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뒤 나일강을 따라 카이로를 향해 행군할 때, 프랑스 병사들이 배를 곪지는 않았습니다.  풍요로운 곡창지대인 나일강변 곳곳에는 밀과 콩, 양파가 잔뜩 쌓여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대군에게 빵을 먹이기에는 밀가루를 낼 맷돌이 부족했던 상황이라, 병사들은 빵을 먹지 못하고 삶은 콩만 질리도록 먹어야 했습니다.  병사들의 불만이 쌓여가자, 나폴레옹은 '카이로에만 가면 너희들이 꿈꾸던 모든 빵을 다 얻을 수 있다' 라고 연설을 했습니다.  그러나 '고작 빵을 찾아온 거라면 뭐하러 프랑스에서 이집트까지 온 거냐'라고 병사들이 비아냥거리자, 다음번 연설에서는 '카이로에만 가면 고기와 와인, 설탕과 커피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라고 메뉴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 이집트는 홍해 쪽에서 수입된 모카 커피를 지중해 쪽으로 유통하는 주요 경로로서, 이집트의 수입원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그 관세였거든요.  저 나폴레옹의 연설이 뜻하는 바는 최소한 일반 사병들조차 커피를 알고 있었고, 또 커피에는 설탕을 넣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설탕을 꽤 자주 먹었다는 기록은 다른 곳에서도 나옵니다.  1806년 프로이센과 예나(Jena) 전투를 벌이기 직전, 프랑스군은 인근 창고에서 구한 많은 양의 설탕과 와인으로 10월 중순의 쌀쌀한 밤에 달콤한 뱅쇼(vin chaud)를 끓여 마셨습니다.  또 몇 년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 근처에서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 희생된 프랑스 병사들의 집단 매장지가 발굴되었습니다. 치과 의사들이 거기서 발굴된에서 유골의 치아를 검사해보니, 일부 병사들의 치아는 당시 평균 이상으로 충치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고달픈 야전 생활 중에도 생각보다는 자주 설탕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사실이지요.  



(와인에 오렌지 등의 과일 조각과 설탕, 향료 등을 넣고 가볍게 덥힌 뱅쇼 vin chaud 입니다.  글자 그대로 따뜻한 와인이지요.  물론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저렇게 계피 스틱까지 꽂은 예쁜 잔으로 뱅쇼를 마시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유럽인들은 설탕 없이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시장의 수요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공급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 대금은 나폴레옹에겐 피와 같았던 금화와 은화의 형태로 고스란히 가증스러운 영국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이건 요즘 현대 미국이 그 막강한 군사력과 경찰력을 가지고도 중남미산 마약과의 싸움에서 조금씩 계속 패배하는 것과 유사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설탕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뭔가를 해야 했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영국과의 전쟁은 필패가 뻔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총검이나 대포로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리브해의 사탕수수를 어떻게든 유럽 내에서 길러내지 못하는 한 나폴레옹에게는 승산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폴레옹이 불굴의 의지를 가진 천재라고 해도 프랑스에서 사탕수수를 키워낼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인간은 뭔가 방법을 찾아냅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To be continued




Source : Sugar: A Bittersweet History By Elizabeth Abbott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ttps://fr.wikipedia.org/wiki/Caf%C3%A9#/media/File:Cafeine_consommation.png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coffee

https://fr.wikipedia.org/wiki/Caf%C3%A9

https://en.wikipedia.org/wiki/Jerzy_Franciszek_Kulczycki

https://en.wikipedia.org/wiki/Liebig%27s_Extract_of_Meat_Company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

https://www.boredpanda.com/maps-atlas-of-prejudice-yanko-tsvetkov/

https://yumuniverse.com/meet-roasted-chicory-root-a-health-boosting-caffeine-free-coffee-alternative/

https://en.wikipedia.org/wiki/Chicory

https://en.wikipedia.org/wiki/Isatis_tinctoria

https://www.stdalfour.com.au/products/fruit-spreads

지난편에서 르클레르의 원정 함대가 1802년 1월말, 생 도밍그 인근 사마나 만에 집결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 원정대의 임무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나폴레옹이 르클레르에게 준 임무는 생 도밍그를 다시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 밑으로 복귀시키라는 다소 고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요 ?  투쌩을 죽이라는 말인가요 ?  왜요 ?  투쌩은 한번도 프랑스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거나, 반항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무슨 명분으로 투쌩을 잡아들이나요 ?  사실 이 원정대의 목적은 생 도밍그의 반란 노예들과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공식적인 임무는 새로운 주지사(Captain general)의 안전한 부임이었지요.  나폴레옹은 투쌩과 구태여 툭탁거리며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화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굳이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탄약과 무기를 소모시킬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는 몇 년 전부터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투쌩의 두 아들을 이 원정대에 포함시켜 투쌩에게 프랑스 중앙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즉, 투쌩의 아들들을 인질로 잡아두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명백히 한 것입니다.


흔히들 오해하시는 것 중 하나가, 나폴레옹이 생 도밍그에 다시 노예제를 부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인데, 나폴레옹은 적어도 드러내놓고 그렇게 명령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나폴레옹은 현지에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흑인 장교들의 직위를 박탈하라는 명령은 분명히 내렸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꼭 노예제를 부활시키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서, 나폴레옹이 흑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흑인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생 도밍그의 설탕 생산이 제대로만 돌아간다면, 노예제든 임금 노동제건 상관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또한 그는 이런 조건들을 관철시키려면, 현지 흑인 군대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2만 명이 넘는 병력과 전열함만 해도 35척인 대함대를 동원했던 것이지요.  또한 나폴레옹은 단순히 무력만으로 생 도밍그를 장악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생 도밍그 내부의 갈등과 분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투쌩에 의해 프랑스로 쫓겨와있던 뮬래토 장군인 리고 (Andre Rigaud)와 그의 뮬래토 부대도 이 원정대에 포함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들이 현지 뮬래토 엘리트들을 규합하여 투쌩의 권력 기반을 잠식하기를 바랬습니다.





(트레빌 제독은 그다지 잘 알려진 제독은 아닙니다만, 미국독립 전쟁에도 참전했고, 특히 1801년 8월 두차례에 걸쳐 불로뉴 항구를 습격한 넬슨의 소함대를 (비록 육상에서 반격하기는 했지만) 격퇴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은 7척의 배를 잃었고 44명 전사, 126명 부상에 3명의 포로를낸 것에 비해, 프랑스 측은 1척의 배를 나포당하고 8명 전사, 12명 실종, 34명 부상으로서, 기록으로만 보면 프랑스의 승리라고 할만 했습니다.)





(불로뉴 항구 습격 사건입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잃은 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놀라셨을 겁니다.  사실 그렇게 잃은 것들은 대개 이런 대형 보트였지요.)



르클레르의 원정 함대는 하나의 대선단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함대는 조유즈(Villaret de Joyeuse) 제독 지휘 하에 브레스트(Brest)에서, 어떤 함대는 트레빌 (Louis-René Levassor de Latouche Tréville) 제독 지휘 하에 로슈포르(Rochefort)에서, 또 그 외에도 강톰(Ganteaume) 제독과 리느와(Linois) 제독이 각각 함대를 이끌고 약간씩 시차를 두고 출발했지요.  원래 계획은 이들이 히스파니올라 섬 동쪽, 그러니까 스페인 식민지 쪽인 도미니카 북동쪽 해안의 사마나(Samana) 만에서 집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강톰과 리느와의 함대가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르클레르는 결정을 내려야 했지요. 




(조유즈 제독입니다.  그의 활동이 이후 별로 없었던 이유는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그가 함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단 병력 수송이 끝나고 난 이후에는 그런 대함대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지요.)



아마 여러분은 초강대국인 프랑스의 대원정군에 맞선 노예 출신의 어중이떠중이 흑인들로 구성된 군대의 운명은 뻔한 것이라고들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르클레르 자신은 본인의 처지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했습니다.  당시 생 도밍그의 흑인 정규군은 약 2만명으로서, 프랑스 원정군과 거의 비슷한 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아직 집결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고, 상당수가 아직 대서양을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또한, 당시엔 아직 상륙 주정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상륙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만약 흑인 부대들이 주요 항구와 해안을 굳게 지키고 있다면 성공적인 상륙전이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흑인 부대들은 이미 주요 요충지를 지키는 유리한 입장인 것에 비해, 자신들은 낯선 열대의 섬에 상륙하여 공격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또 막연히 흑인 부대들이 무장이 빈약할 것이라고들 생각하시겠지만, 실은 이들도 모두 제대로 된 플린트락 머스켓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고 많지는 않지만 포병대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런 무기와 탄약들은 어디서 났던 것일까요 ?  생 도밍그에 주둔했던 프랑스 식민지 수비대의 장비들이나 백인 농장주들의 무기를 빼앗거나 넘겨받은 것도 있었습니다만, 특히 미국에서 들여온 무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는 꽤 노련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투쌩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2년전 뮬래토들의 장군인 리고와 싸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존 아담스 (John Adams)에게 프랑스가 향후 북미 지역에 세력 확장을 꾀할 때 생 도밍그를 기지로 쓰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무기 지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 무기들 덕택에 생 도밍그 흑인 부대의 무장 수준은 그다지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포병대가 숫자나 숙련도 면에서 크게 열세이긴 했지만, 생 도밍그 흑인 병사들은 최근 많은 전투를 치루었으므로 전투 훈련도 잘 되어 있는 편이었지요.  무엇보다도, 이들은 어중이떠중이 게릴라 부대나 민병대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정규 상비군 병사들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장교 조직도 갖추고 있었고요.  생각해보면 40만 정도되는 생 도밍그에 상비군만 무려 2만이라고 하면, 인구 대비 병사 비율이 5%로서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우리나라도 겨우 1.5%이고, 심지어 북한도 약 3% 수준인데 말입니다.  투쌩은 이제 막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생 도밍그가 영국이건 스페인이건 또는 본국 프랑스이건 유럽 세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런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제2대 대통령인 존 아담스입니다.  생 도밍그의 반란 사건은 미국에도 당연히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아담스로서도 어떤 방향으로든, 생 도밍그에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 했습니다.  가장 큰 영향은 뒤에 말씀드릴 루이지애나 매각 조약이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생 도밍그에서 도망쳐 온 프랑스계 주민들로 인해 남동부 해안에 프랑스 계통의 크레올 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있습니다.  특히 이들이 데리고 온 노예들이 혹시 미국내 노예들에게 반란의 불씨를 번지게 하지 않을까 하고 미국 노예주들은 매우 긴장했었지요.)



하지만 바로 이 제대로 된 정규군 조직이 투쌩의 몰락을 부르게 됩니다.  이런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습니다.  전 인구의 5%를 병사로 만들자면, 그들에게 (우리나라 군대처럼 애들 과자값이 아닌) 최소한 농장 노동자만큼의 급료를 줘야했고, 장교들에게는 더 많이 줘야 했습니다.  게다가 탄약이나 무기를 미국에서 계속 사와야 했지요.  하지만 최근 10년간 피로 얼룩진 노예 반란 탓에, 한때 그토록 많은 부를 낳아주었던 사탕수수 농장이나 설탕 공장 등은 완전히 피폐되어 있었으므로, 생 도밍그의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직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투쌩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즉, 전직 노예들을 원래 소속되었던 농장으로 돌려보내 강제로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효율적인 농장 경영을 위해, 자메이카나 뉴 오올리언즈 등으로 도망쳤던 백인 농장주들을 다시 불러들여 그 전직 노예들을 관리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흑인 농부들은 노예로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급료를 받는 농장 노동자로서 일하는 것이었지만, 그 원수같던 백인 농장주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농장으로 내몰려 뙤약볕 밑에서 힘든 사탕수수 농사를 지어야 했던 흑인들은 이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원래 사탕수수 농사는 커피 농사 등에 비해 몹시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자메이카에서 돈을 벌어오려면 역시 사탕수수가 가장 적합했으므로 투쌩은 사탕수수 농사를 강요했습니다.  이런 강제 조치는 1801년 10월, 즉 프랑스 원정대 도착 직전에 투쌩의 조카인 모이즈(Moïse) 장군 주도하의 무장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잔혹한 무력으로 진압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사마나 만에 프랑스 함대가 나타났을 때, 투쌩의 정치적 입지는 많이 흔들리는 편이었습니다.  사실 생 도밍그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신식 머스켓 소총보다는 자유를 향한 흑인들의 열망과 단결이 어쩌면 더 중요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라를 지키는데는 국민들의 단합이 더 중요할까요 이런 머스켓 소총이 더 중요할까요 ?  글쎄요... 정답은 둘다 !)



르클레르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십분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에게는 있지만 투쌩은 가지지 못한 것이 2가지 있었는데, 그것들은 생 도밍그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아주 좋은 무기가 되었습니다.


1) 중앙 정부의 권위

누가 뭐래도 르클레르와 그의 원정대는 투쌩이 충성을 맹세한 프랑스 중앙 정부가 파견한 정식 관원들이었습니다.  투쌩은 물론이고, 특히 투쌩의 부하 장교들도 그들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특히 투쌩의 전직 노예 출신 부하 장교들은 자신들의 지위, 심지어 자유조차도 실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중앙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들은 다시 사탕수수 밭의 검둥이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마음 속으로는 프랑스 중앙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바라고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 기동력

전에 나폴레옹이 리볼리 전투에서 부족한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을 내선이동의 잇점을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지요.  투쌩의 병력들은 히스파니올라 섬을 지키고 있고, 르클레르는 그 섬을 침공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투쌩이 그 전선의 안쪽에, 르클레르는 바깥 쪽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동성의 잇점은 투쌩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빠져 있었지요.  히스파니올라 섬은 이탈리아 리볼리와는 달리 빽빽한 밀림과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섬이었고, 따라서 투쌩은 (히스파니올라는 실상 꽤 넓은 섬이었으므로) 여러 해안 요충지에 분산된 부하들과의 교신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르클레르의 병력은 함대에 분승하고 있었으므로, 바람만 괜찮다면 오히려 투쌩보다 기동성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르클레르는 이 두가지 점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그는 섬의 요충지 여러 곳을 동시에 들이치면서, 이를 침공이 아닌 중앙 정부의 권력 인수 인계로 포장을 합니다.  즉 케르베르소(Kerverseau) 장군의 함대는 동쪽의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에 나타났고, 부데 (Jean Boudet) 장군은 트레빌 제독의 함대와 함께 산 도밍그의 신흥 수도인 포르토 프랭스(Port-au-Prince, 지금도 아이티의 수도지요)에 나타났습니다.  동시에 자신과 조유즈 제독의 함대는 산 도밍그 최대 도시이자 예전 수도인 캅 프랑셰 (Cap Francais, 프랑스 곶이라는 뜻입니다만, 지금은 이름을 캅 아이시앵 Cap-Haitien, 즉 아이티 곶으로 바꾸었습니다)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흑인과 뮬래토들을 미워하기로 유명했던 로샹보(Donatien-Marie-Joseph de Vimeur, vicomte de Rochambeau) 장군은 캅 프랑셰 약간 동쪽의 요충지인 포르 리베르떼 (Fort Liberte)를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프랑스군의 움직임에 대해 투쌩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  사실 프랑스 함대가 사마나 만에 정박했을 때 이미 투쌩은 그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각지를 지키고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만약 프랑스 함대가 흑인 부대장을 불러 회담을 요청하면 반드시 그에 응할 것을 명하고, 혹시 회담 요청이 없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회담 요청을 하라고 했습니다.  르클레르의 예상대로, 말만 잘 통할 것 같다면 투쌩은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에 정면 도전할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아무 대화 없이 그냥 상륙을 시도한다면 맞서 싸우지 말고 도시와 농장을 불태우고 산 속으로 후퇴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일설에는 후퇴하기 전에 생 도밍그의 백인들을 학살하라는 지시도 했다고 합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건 투쌩답지 않은 조치라서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투쌩의 기본적인 전략은 프랑스 중앙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영국군이 그랬던 것처럼 황열병에 의해 프랑스군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산속에서 기다린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좋은 계획이었습니다.  딱 한가지만 빼고요.  바로 부하들에 대한 통신과 장악력이었지요.





(훗날 앙리 1세로 아이티 국왕으로 즉위한 크리스토프입니다.  그의 자손은 계속 아이티의 권력계에 남았고, 그의 손자도 아이티 대통령직에 오릅니다.)



1802년 2월 3일 캅 프랑셰 항구에 나타나 상륙 허가를 요청하는 르클레르에 대해, 그곳을 지키던 흑인 장군 크리스토프 (Henri Christophe)는 투쌩의 지시대로 협상 전에는 상륙을 허가할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그러나 2월 5일 바로 옆 동네인 포르 리베르떼 (Fort Liberte)에 로샹보가 갑자기 상륙하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크리스토프는 투쌩의 계획대로 시가지와 농장들에 불을 지르고는 산 쪽으로 퇴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산토 도밍고를 지키고 있던 투쌩의 동생 폴 루베르튀르 (Paul Louverture)는 가짜 편지에 속아 순순히 프랑스군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협력했고, 남쪽의 포르토 프랭스를 지키던 라플륌(Laplume)도 부데(Budet) 장군에게 항복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주요 도시와 마을에서도 교전 회피, 초토화 작전 이후 후퇴라는 대전략을 따르지 않고, 격렬한 저항전이 펼쳐지거나 그냥 프랑스군을 받아들이는 모습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역시 최근 투쌩의 강압적인 정책에 반발하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또 일부 흑인 장교들이 프랑스 중앙 정부의 권위에 굴복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르클레르는 '모든 흑인들의 자유와 기존 직위, 재산과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주겠다'라고 선언을 했으니, 그런 르클레르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흑인 지휘관들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데살린은 대체 투쌩이 이런 인물을 부하로 거느렸다는 점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포악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상륙 초기에 르클레르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프랑스군은 당시 전황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40만의 흑인으로 가득찬 섬에 불과 1만 몇 천 되는 병력으로 상륙했으니 그럴만도 했겠지요.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사정 때문에, 불과 10일 만에 프랑스군은 주요 항구와 도시, 주요 경작지들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르클레르 본인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성공이었지요.  한편 투쌩은 자신의 충복인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 훗날 아이티의 왕이 됩니다)와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 훗날 아이티의 황제가 됩니다)와 함께, 불과 수천 명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북부 산악지대에 숨어 있었지요.  르클레르는 이런 초기의 성공을 투쌩에게도 적용하고자 그의 두 아들을 투쌩에게 보내주며 '항복하면 투쌩을 르클레르의 대리인으로 임명하고 그의 장군직과 재산 등을 모두 인정해주겠다'는 나폴레옹의 편지까지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투쌩은 르클레르의 제안을 거절했지요.  아무리 그 말이 달콤하다고 할지라도, 정말 선의로 왔다면 저렇게 전함과 2만이 넘는 병력을 끌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러는 사이에 강톰 제독과 리느와 제독이 이끄는 함대들이 도착하여 병력이 증원되자, 르클레르는 2월 17일, 투쌩을 잡기 위해 토끼몰이식의 광대한 작전을 시작합니다.  로샹보가 포르-리베르떼로부터  남서쪽 방향의 생-미셀 (Saint Michel)로 밀어붙였고, 또 아르디(Hardy) 장군이 카프 프랑셰로부터 남쪽의 마르멜라드(Marmelade)로, 데푸르노(Desfourneaux) 장군이 플레상스(Plaisance)로 진격했습니다.  동시에 윔베르(Humbert) 장군이 포르 데 페 (Port-de-Paix)에 상륙하여 트롸-리비에르(Trois-Rivières) 협곡으로 진격했고, 남쪽에서는 부데 장군이 뽀르또 프랭스에서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사방에서 투쌩의 저항 세력을 위협하여 그들을 중서부 해안인 고나이브(Les Gonaïves) 지역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계획이 잘 먹혀들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은 병력의 우위보다도, 르클레르 측이 바다를 통해 손쉽게 통신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한 것이었지요.





(상륙 이후 프랑스군의 진격 방향입니다.)



투쌩의 병력은 여기저기서 고립되어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크레따-피에로(Crête-à-Pierrot) 요새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면서 거기에 비축해두었던 무기와 탄약을 상실한 것이 큰 타격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투쌩에게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과거 영국군과 싸울 때도 이런 상황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르클레르의 위협은 당시 영국군과의 전쟁과는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해안가의 도시들과 경작지를 점유하는 것으로 만족했으나, 이번 르클레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목적은 투쌩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으므로, 집요한 추격이 산속까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흑인 부대를 공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유혹으로 꼬여냈습니다.  이는 영국군과의 전쟁에서는 없었던 일이었지요.  특히 이미 항복했던 라플륌이나 모레파(Jacques Maurepas) 등의 흑인 장교들을 르클레르가 상당히 우대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쫓기는 흑인 병사들, 특히 장교들에게는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투쌩의 결정적인 패인이 되었습니다.  먼저 크리스토프가 항복을 했고, 곧 이어 데살린도 프랑스군에게 투항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홀로 남은 투쌩도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도 결국 르클레르에게 항복해야 했지요.


5월 6일, 투쌩은 잔여 부대를 이끌고 이제 프랑스군의 본거지가 된 캅 프랑셰로 걸어들어가 르클레르와 회담 후 정식으로 항복했습니다.  조건은 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투쌩은 장군으로서 직위를 모두 인정받았고 앞으로도 그에 따른 예우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그가 소유하고 있던 에너리(Ennery) 지역의 농장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일부 직속 경호 병력을 제외하고는 실제 권력은 모두 양도해야 했고,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집니다.  그에 비해 크리스토프와 데살린은 항복 이후에도 흑인 병력들에 대한 지휘권을 맡아서 현역 장교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르클레르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사실 르클레르가 받은 명령은 흑인 부대들을 모두 해체하고 그 장교들도 모두 퇴역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만, 현장에서 보니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프랑스군만큼이나 수가 많은 흑인 병사들을 당장 해산시켜 농장 노동자로 돌려보내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생 도밍그의 전투는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규모의 산적화된 흑인들이 아직도 각지에서 프랑스인들을 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현실과 타협하여 일부 흑인 장교들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그 병력을 자신의 휘하에서 운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었지요.





(색칠된 부분이 황열병 발생 지역입니다.  저쪽 동네에 갈 때는 반드시 황열병 백신을 맞고 가셔야 합니다.  그림에서 보시다시피 원래 황열병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따라 온 병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드디어 그 무서운 손님이 프랑스군의 병영을 방문했습니다.  바로 황열병, 그분이셨지요.  한 1~2주 만에 곳곳에서 병사들이 쓰러져갔습니다.  이 황열병이라는 것은 사실 걸리기만 하면 100% 다 죽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열병 바이러스를 가진 모기가 사람을 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황열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었고, 모기 침 속에 어느 농도 이상의 바이러스가 축적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또 황열병이 발병을 한다고 해도, 그 중에서 약 15% 정도의 사람만 구토와 고열에 시달리다 그 중 반이 죽음에 이르는, 진짜 황열병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나머지 85%는 그냥 열병을 앓다가 낫는 정도로서, 이들은 실제로는 황열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였습니다.  아무튼 이 황열병이 프랑스군을 덮치자, 병사들이 정말 신속하게 죽어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계속 황열병 바이러스에 노출되었던 흑인들보다 이제 막 프랑스에서 도착한 원정군이 황열병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르클레르는 크게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는 황열병의 창궐까지는 몰라도, 이를 틈타 흑인 반란군들이 극성을 부리며 습격을 해오는 상황 뒤에는 투쌩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은 나폴레옹으로부터 흑인들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으니,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결국 투쌩을 잡아들여야만 했겠지요.  그는 투쌩을 체포하는 명분으로, 투쌩이 썼다는 2통의 편지를 제시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프랑스군의 황열병 상태를 잘 주시할 것과, 르클레르의 건강이 나빠지면 거사를 개시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투쌩은 그런 편지를 썼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만, 사실 그 필체나 맞춤법이 틀린 것, 무엇보다 그 문맥 속에 흐르는 기백과 정신은 누가 봐도 투쌩이 쓴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사실이야 어찌되었건 이를 명분으로, 르클레르는 투쌩을 체포하기로 합니다.





(투쌩의 초상화는 사실 모두 엉터리입니다.  아무도 투쌩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사람은 없고, 그냥 생김새 이야기를 대충 듣고 그린 것이라네요.)




투쌩의 체포는 프랑스군으로서는 다소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혹시 투쌩의 농장으로 병력을 보내 체포하려다가 투쌩이 다시 산악 지방으로 도주하여 게릴라 전투를 지휘하게 될까봐, 초소 배치 문제를 논의하자는 핑계로 투쌩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던 브뤼네(Brunet) 장군의 사령부로 투쌩을 초청했습니다.  투쌩과 만나 처음에는 다정하게 포옹으로 인사해야 했던 브뤼네 장군은 입장이 난처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회의 도중에 갑자기 브뤼네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무장 병사들이 방에 난입하여 투쌩을 포박했습니다.  이런 식의 비겁한 속임수로 투쌩을 체포한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데, 프랑스군이 투쌩을 신사로 인정하지 않았거나, 프랑스군 자신이 신사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요.  아무래도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투쌩의 언행이나 그의 작전 능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감시한 프랑스측 인사들이 기록한 체포된 투쌩의 말들을 보면 정말 투쌩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합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투쌩은 몸집이 왜소한 편이었으나, 그의 기지와 언변, 그리고 신비감을 동반한 카리스마에 대해서는 프랑스측 인사들도 모두들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잡혀온 투쌩을 맞이한 어느 프랑스 장교가 '하, 드디어 널 잡았구나, 투쌩 ?' 하고 놀리자)


"그래, 너희들이 내 머리를 잡았지.  하지만 내 꼬리는 못 잡았어."


(그를 프랑스로 호송한 사바리(Savary) 장군이 '이젠 검둥이 나폴레옹 역할을 못하게 생겼군, 안그런가 ?' 하고 놀리자)


"나를 제거하는 것은 생 도밍그 자유의 줄기를 자르는 것에 불과하다.  자유의 나무는 다시 자랄 것이다.  그 뿌리는 깊고 넓으니까."


(그의 14살짜리 아들이 사슬에 묶여 끌려온 투쌩을 보고 울며 그의 품에 안기자)


"내 아들은 울어서는 안된다.  내 아들이라면 불행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고, 또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멋진 말들을 할 수 있으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겠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 자체에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프랑스로 잡혀간 투쌩은 쥐라(Jurat) 산맥의 포르 드 죽(Fort de Joux)의 차가운 감방에서 방치되어 있다가, 약 1년도 안되어 백인들의 속임수에 대한 분노와 울분 속에서 폐렴과 뇌졸증으로 인해 1803년 4월 7일 사망하고 맙니다.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나폴레옹에게 누군가가 '그 프랑스에게 배신을 당해 감방에서 죽은 투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자 나폴레옹은 그저 '불쌍한 검둥이 노예 하나가 죽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확실히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투쌩이 숨을 거둔 포르 드 죽 성채입니다.)



한편, 투쌩을 비겁한 수로 잡아들인 르클레르도 두발 쭉 뻗고 쉴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투쌩을 잡아들인 것에 더해, 농장 노동자로 일하던 흑인들로부터 무기를 수거해 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산속의 흑인들 뿐만 아니라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들조차도 공공연한 반란에 가담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생 도밍그에 노예 해방 선언을 했던 프랑스인 관료 손쏘낙스(Sonthonax)가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투쌩을 도와 흑인 병사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면서 만약 백인들이 다시 이 무기들을 거두어들이려 한다면, 그건 너희들을 다시 노예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예언아닌 예언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르클레르는 이제 그의 부하가 된 크리스토프와 데살린 등 과거 투쌩의 흑인 부하 장군들을 동원하여 이런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흑인들끼리도 이해 관계와 질투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원수지간이 많았거든요.  이 와중에 블레어(Charles Belair)나 모레파(Jacques Maurepas), 폴 루베르튀르(Paul Louverture) 등 과거 투쌩의 부하 장교들이 많이 희생됩니다.  특히 난폭한 성격이었던 데살린은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과거의 동료들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타는 이웃 섬이자 같은 프랑스 식민지인 과달루프(Guadeloupe)에서 날아옵니다.  과거 호엔린덴에서 영웅적인 전과를 보여주었던 리슈팡스(Antoine Richepanse)가 본국의 훈령에 따라 과달루프에 다시 노예제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이 소식이 생 도밍그에 도착하자 생 도밍그는 거의 공공연한 반란에 빠져듭니다.  노예제의 부활이 곧 생 도밍그에서도 선언될 것이라는 것이 쉽게 예상되었고, 이는 생 도밍그의 흑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소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슈팡스는 호헨린덴에서의 활약이 빛을 잃을 정도로 무자비한 통치를 과달루프에서 펼쳤습니다.  천벌을 받았는지 그도 황열병에 걸려 죽었지요.  모두 22명의 프랑스 장군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모기에 물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르클레르는 광적이다 싶을 정도로 잔혹하게 흑인 토벌에 나섭니다.  전에도 언급되었습니다만, etouffoir(질식)라는 이름의 일종의 가스선을 만들어 유황 연기로 흑인들을 대량으로 질식사시킨 것도 이 때의 일입니다.  이때 르클레르가 본국의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르클레르가 거의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이제 내게 남은 수단이라고는 공포 밖에 없으니, 그걸 쓰겠습니다."


"산속의 흑인들은 남자건 여자건 12살 이하의 아이들을 빼고는 모두 죽여야 합니다.  평야 지대의 흑인들도 절반은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르클레르는 끝까지 노예제를 생 도밍그에 다시 선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럴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흑인들이 공연히 오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때가 무르익기 전에는 노예제를 다시 선포할 생각하지 마십시요... 정부의 선포에 따라 제 후계자가 노예제를 수립할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제가 흑인들을 달래기 위해 전에 그토록 많은 약속과 선언을 했는데, 이제 와서 제가 과거 약속을 깰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 이런 내용들도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데살린과 크리스토프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그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는지, 또 나폴레옹이 확실히 돈 문제에는 인색했다는 점도 드러납니다.  


"아직까지는 데살린은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안 하고 있었으나, 이제 생각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그를 체포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아직 형식적으로나마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흑인 병사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프에게는 그나마 좀더 믿음이 갑니다.  하지만 이들을 체포하려한다면 동시에 둘다 잡아야만 합니다."


"약속하신 1만2천의 증원 병력 중 현재까지 겨우 6,723명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곧장 전투에 투입했는데, 이젠 모조리 죽어버렸습니다.  내 위치는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손실은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한 달 전 도착한 증원군은 이미 모두 다 죽었습니다.  현재 바다를 건너오는 증원 병력 외에도 1만 명을 더 보내주십시요.  그리고 약속 어음 말고 현금으로 2백만 프랑도 함께 보내주십시요.  제가 돈 이야기를 꺼내면 제1통령께서는 답장을 안하시더군요.  제 입장이 되어 보십시요... 저는 이 섬을 떠날 것을 심각하게 고려 중입니다.  생 도밍그를 유지하려면 정예병력 7만 명을 현지에 유지해야 합니다."





(생 도밍그에서의 전투는 양측 모두 야만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는 잔인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백인 군대의 군모가 꽤 특이하지요 ?  맞습니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아니라 폴란드군입니다.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해방시켜줄 것으로 기대하며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웠던 폴란드군에 대해, 나폴레옹은 조국의 해방 대신 보답으로 낭만적인 카리브해 여행권을 끊어주었습니다.  강대국에 의존하는 독립운동은 항상 끝이 좋지 않습니다.)



8월이 되어 전황이 나빠지자 르클레르는 현지에 와있던 폴린과 그의 아들 데르미드(Dermide Louis Napoleon)를 프랑스로 돌려보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여기서는 조세핀처럼 군림한다, 여기서는 내가 1인자다'라며 일종의 왕비 생활을 즐기던 폴린은 '품위 유지비로 10만 프랑을 주기 전에는 프랑스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땡깡을 부려 그렇쟎아도 기진맥진한 르클레르의 복장을 터지게 했습니다.  10만 프랑이면 현재 가치로 약 12억 정도의 돈인데, 르클레르가 본국 노벨라라(Novellara) 인근에 가지고 있던 부동산 가격이 고작 16만 프랑이었므로, 르클레르에게는 그런 큰 돈이 있을리 없었습니다.  남편이 돈을 내놓지 못하자 폴린은 그냥 남기로 합니다.  문제는 폴린의 방종한 생활은 여기서도 이어져, 여러 명의 애인을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말단 병사 몇 명과도 대담한 정사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날 작전 회의 중 르클레르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하게 됩니다.  이는 황열병의 시작을 알리는 증상이었지요.  폴린은 이때서야 아내 역할을 다하여 성심껏 르클레르를 간호했는데,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고, 11월 1일, 르클레르는 투쌩보다도 오히려 먼저 저승길을 떠납니다.  폴린과 그 아들은 르클레르의 화장한 유해와, 따로 떼어낸 그의 심장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의 대를 이어 아메리카 쪽에 발을 담그게 된 로샹보 자작입니다.  르클레르와 함께 못된 짓을 아주 많이 저질렀습니다.)



르클레르의 후임은 로샹보 장군이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흑인과 뮬래토들을 증오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로샹보가 사령관이 되자 전부터 기세가 심상치 않았던 흑인 장군들인 데살린과 크리스토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백인 측에 붙었던 뮬래토 장군인 페티옹(Alexandre Petion)까지 반란군 측으로 넘어가버렸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타격은 바로 생 도밍그 원정을 가능하게 했던 아미앵 평화 조약의 붕괴였습니다.  즉 1803년 5월 18일,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다시 프랑스의 항구들을 봉쇄한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실상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되었습니다.  결국 1803년 11월 베르티에르(Vertières) 전투에서 흑인 반란군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한 로샹보는 결국 생 도밍그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초라하게 돌아가던 로샹보는 그나마 도중에 타고 있던 프리깃 라 쉬르베이앙트(La Surveillante) 호가 영국 해군에 나포되는 바람에, 전쟁 포로로 영국에 무려 9년간이나 잡혀 있다가 1811년, 포로 교환에 의해 겨우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최종적인 패배를 결정지은 1803년 베르티에르 전투의 모습입니다.)



이후 아이티(Haiti, Ayiti, 아메리카 타이노 족의 언어나 아프리카 언어로나 모두 집 또는 성스러운 대지를 뜻한다고 합니다)로 이름을 바꾸면서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한 생 도밍그의 그 후 이야기는 그다지 밝고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먼저, 정권을 잡은 데살린은 황제로 즉위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완전한 자유를 쟁취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생 도밍그에 아직 남아있던 백인 중 흑인과 결혼하기로 약속한 백인 여자만 빼고 모두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등, 정상적인 정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온순한 주인 밑에서 그런대로 무난한 노예 생활을 했던 투쌩과는 달리, 포악한 주인 밑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던 데살린은 백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흑인들과 뮬래토들도 잔혹하게 탄압했습니다.  결국 그는 1806년 암살되고 말았지요.





(데살린의 동상입니다.  현대에 들어서, 데살린의 암살은 (물론 황제인 자기 자신을 빼고는) 1인1표제의 만민 평등을 주창한 데살린의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긴다고 생각한 뮬래토들 및 그와 결탁한 외국 세력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독재자는 그냥 독재자에요.)



그 뒤를 이은 것은 남북 분단의 시대였습니다.  북쪽에서는 캅 프랑셰를 기반으로 한 앙리 크리스토프가 앙리 1세 (Henri I)로서, 황제가 아닌 왕으로 즉위했고, 남쪽에서는 포르토 프랭스를 기반으로 뮬래토 장군인 페티옹(Alexandre Petion)이 종신 통령으로 지배하는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이 두 분단국의 정치는 각기 특색이 있었는데, 크리스토프, 아니 앙리 1세는 토지를 모두 국유화하고, 과거 투쌩처럼 흑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물론 노예제는 아니고 임금제 노동이었지요.  반면에 페티옹은 싼 값에 토지를 국민들에게 매각하여 각자 마음대로 농사를 짓도록 했습니다. 





(뮬래토들의 이익을 대변했던 페시옹입니다.  그의 정치는 흑인보다는 뮬래토 엘리트들을 위한 정치라고 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이티 경제에 매우 나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화했던 그의 정치로 인해, 국민들은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런 조치는 양국의 모습을 상당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북쪽의 앙리 1세의 국민들은 사탕수수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물질적으로는 꽤 넉넉한 살림을 꾸릴 수 있었으나, 노예 생활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강제 노역으로 인해 불만이 컸습니다.  그에 비해 자유방임적인 경제 생활을 허락한 남부 공화국은 국민 대다수가 힘든 사탕수수 농사보다는 당장 먹을 곡식과 좀더 쉬운 커피 농사에 치중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는 매우 쪼들리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자꾸 탈출하여 앙리 1세의 마음을 어둡게 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병으로 신체 마비까지 온 앙리 1세는 1820년 자살을 택했고, 결국 아이티는 페티옹의 후계자인 부아예(Jean-Pierre Boyer)에 의해 다시 통일됩니다.  부아예는 내친 김에 스페인령 산토 도밍고까지 완전 정복하여, 드디어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지요.  그러나 온화한 페티옹과는 달리 잔혹했던 독재자 부아예의 정치는 산토 도밍고(지금의 도미니카) 주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결국 다시 아이티와 도미니카는 분할을 맞게 됩니다.  지금도 도미니카 사람들은 아이티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페시옹의 뒤를 이은 부아예도 당연히 뮬래토 출신입니다.)



아이티의 미래를 크게 어둡게 한 것은 이런 정치적 불안정만이 아니었습니다.  무력으로 독립한 아이티는 항상 전 주인인 프랑스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프랑스에는 아이티의 토지와 농장 뿐만 아니라, 아이티 국민 전체가 노예로서 자신의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부자들이 있었고, 프랑스는 이런 부자들의 입김에 좌우되는 나라였으니까요.  부아예는 이 문제를 결국 돈으로 해결하기로 합니다.  즉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 대신, 과거 주인들이 입은 경제적 피해를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나선 것이지요.  1825년 7월 11일, 보이에르는 프랑스에게 1억5천만 프랑을 5년 안에 지불하겠다는 조약을 맺습니다.  이건 아이티의 낙후된 경제력을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결국 이 금액은 1838년에 가서 9천만 프랑으로 감축되었으나, 그래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으므로, 결국 아이티는 이 돈을 프랑스 은행에서 꿔서 프랑스 정부에 갚아야 했습니다.  즉, 아이티는 시작부터 그 미래를 프랑스에게 담보로 잡힌 상태였던 것이지요.  원리금 상환에 짖눌린 나라가 잘 돌아갈 리가 없었고, 지금도 아이티는 무척 빈곤한 나라로 남아있습니다.  아, 참고로 부아예는 1843년에 성난 빈민들에게 쫓겨나 결국 프랑스에 정착했고 거기서 죽었습니다.





(지금도 아이티는 빚에 허덕이는 나라입니다.  지금은 물론 프랑스 빚보다는 미국과 IMF에 진 빚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런 훗날 이야기말고도, 생 도밍그의 반란과 독립은 나폴레옹과 대서양을 둘러싼 나라들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먼저 생 도밍그부터 시작하여 프랑스 제국을 신대륙으로 뻗치려 했던 나폴레옹은, 돈을 벌어오는 것이 아니라 병력과 돈을 잡아먹기만 하는 생 도밍그의 현실을 보고는 입맛이 싹 가셨습니다.  그는 예전에 프랑스 영토였던 손바닥만한 생 도밍그 하나를 재정복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하물며 저 넓은 루이지애나를 경영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게다가 말타나 이집트 등을 둘러싸고 영국과의 교섭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나폴레옹은 곧 영국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될 수 밖에 없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1803년 4월 30일, 미국과 루이지애나 매각 협정을 맺습니다.  가격은 현금 6천만 프랑에 그 동안 미국에 지고 있던 빚 1천8백만 프랑의 상계, 그러니까 총 7천8백만 프랑이었습니다.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억3천3백만 달러, 그러니까 2650억원 정도입니다.  엄청난 헐값이었지요.  게다가 손바닥만한 생 도밍그의 독립을 인정해주고 받아낸 돈이 무려 9천만 프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부동산 장사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던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투쌩과 생 도밍그 노예 반란이 없었다면, 어쩌면 북아메리카 지도는 매우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요.





(미국에서 발행된 루이지애나 매각 기념 우표입니다.  저기에 보이듯이 프랑스측에서는 마르부아가 서명했습니다.)



하지만 투쌩이 시작한 아이티 독립 사건의 가장 중대한 의미는 바로 흑인에 의한 흑인의 구원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노예 반란 사건이나 탈출 사건 등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반란이 바로 이 아이티의 독립입니다.  특히 이 사건은 백인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불쌍한 흑인을 구원해준 것이 아니라, 흑인이 총칼을 들고 백인과 싸워 이겨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집니다.  흔히 흑인 노예가 해방된 것은 영국의 인권 단체의 활동이나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에 의한 것이라고 역사에 씌여 있습니다.  반면 이렇게 흑인 스스로가 흑인을 구원한 사실은 구미 위주의 역사에서 매우 등한시되는 사건입니다.  흑인이 백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백인들 위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한 사실이고, 또 투쌩은 백인 사회에서는 무척 불편한 영웅인 셈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흑인인 이 시대에도, 헐리웃에서 만들어지는 흑인 이야기는 대부분이 백인이 흑인을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투쌩과 생 도밍그의 반란이 영화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투쌩의 흉상도 미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쿠바에 세워진 것입니다.  백인들에게 투쌩은 여전히 불편한 존재인가 봅니다.)



1492년,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의 끝에서 (사실은 카리브 해였는데) 큰 섬을 하나 발견합니다.  그는 이 섬에 스페인어로  La Isla Espanola (라 이슬라 에스파뇰라)라는, 즉 스페인 섬이라는 멋대가리 없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좀더 멋나게 Hispaniola 라고 고쳐불렀지요.  이 섬에는 원래 타이노 (Taino)라는 남미 인디오 계통의 부족이 살고 있었으나, 이들은 원래 수자가 적었는데다 스페인 사람들의 공격과 박해,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천연두 등의 전염병에 곧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집니다.  이 섬에는 자연스럽게 스페인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 최초의 유럽식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산토 도밍고 (Santo Domingo)가 있는 섬 동반부에 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도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에는 아이티가, 동쪽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두 나라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블로그를 다음편까지 끝까지 다 읽고나시면 아시게 됩니다.)



17세기가 되자, 프랑스인들 (정확히 말하자면 해적에 가까운 종자들)이 카리브 해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감히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인 히스파니올라 섬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고, 그 서북쪽의 작은 섬 토르투가(Tortuga)를 근거지로 삼았지요.  이들은 출신 성분답게 평화로운 농부나 무역업자 생활보다는 히스파니올라 섬을 오가는 스페인 선박들에 대한 해적질을 주업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평상시 사냥한 짐승 고기를 훈제하여 비축 식량으로 삼았기에, 훈제한다는 타이노 족의 언어(Arawak어) buccan에서 유래된 boucanier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영어로는 이들을 buccaneer (버캐니어)라고 불렀지요.  그냥 카리브 해의 해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버캐니어라고 하면 일단은 프랑스 계통의 해적인 셈입니다.)



스페인 해군은 이들을 축출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으나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신통치 않았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오히려 점차 커져, 급기야 히스파니올라섬의 서반부, 그러니까 스페인 사람들이 별로 정착하지 않았던 지역으로 넓어졌고, 1641년에는 아예 최초의 프랑스 주지사가 이곳에 파견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1664년에는 루이 14세의 재상인 콜베르(Colbert)는 이 지역을 프랑스 서인도 회사의 공식 관할 지역으로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다 9년 전쟁의 결과인 라이스빅 (Ryswick) 조약에서 마침내 스페인도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니까 히스파니올라 섬의 동쪽 2/3는 산토 도밍고 (Santo Domingo), 서쪽 1/3은 생 도밍그 (Saint Domingue)라는 "같은 이름 두 언어"로 불리게 된 것이지요.




(네덜란드의 소도시인 라이스빅 (Ryswick, Rijswijk)에 세워져 있는 '라이스빅의 바늘'입니다.  바로 라이스빅 조약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무래도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가 직접 다스리는 땅이 된 만큼, 이후로는 해적질은 점차 잦아들고 프랑스도 플랜테이션 농장을 이곳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담배, 인디고, 코코아 등을 재배했으나, 곧 주요 재배 작물이 커피, 목화, 그리고 무엇보다 사탕수수로 바뀌면서 생 도밍그의 번영이 시작됩니다.  전에 설탕과 카리브해 편에서 설명했듯이, 당시 설탕은 하얀 황금이었거든요.  황금이야 캐다보면 언젠가는 폐광이 되기 마련이지만, 이 하얀 황금은 생 도밍그의 태양과 풍토 덕분에 글자 그대로 밭에서 열리는 황금이었으니 이 설탕 플랜테이션이 가져다주는 부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18세기 말이 되면 이 생 도밍그에서 생산되는 설탕이 유럽에서 소비되는 전체 양의 40%에 달했고, 또 커피 생산량도 유럽 소비량의 60%에 달했습니다.   그야말로 영국에게는 인도가 있고, 프랑스에게는 생 도밍그가 있다고 할 정도였지요.




(사탕수수입니다.  글자 그대로 슈가 슈가 ...)



문제는 사탕수수 재배에 안성마춤이었던 이 곳의 기후가, 사람에게는, 특히 유럽인들에게는 별로 쾌적한 편이 못되어, 유럽의 농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농사일을 할 수 있는 사정이 안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바로 이 지역의 풍토병인 황열병이었습니다.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바이러스성 열병인 황열병 (Yellow Fever)은 당시 예방책도 치료법도 없는, 치사율이 사람에 따라 15~50% 정도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었지요.  덕분에 생 도밍그에 정착하는 유럽인들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몫 크게 번 농장주들은 되도록 서둘러 프랑스 본토로 돌아가곤 했지요.  무더운 기후도 기후지만, 무엇보다 황열병이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형태의 노동이 정착되게 되었습니다.  18세기에 아프리카에서 생-도밍그로 끌려온 흑인 노예의 수자만도 연인원 총 80만명에 달한다고 하니까 정말 대단한 규모였지요.  이렇게 많은 인원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별로 크지도 않은 섬으로 끌려오다보니 인류학적으로 다소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백인들 눈에야 다같은 '흑인 노예'에 불과하겠지만, 사실 넓은 아프리카 서해안 곳곳에서 끌려온 흑인들은 서로 언어가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백인 농장주들과는 물론이고, 동료 노예들과도 의사 소통이 제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기에 이릅니다.  크레올 (Creole) 어라고 하는, 프랑스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부 아프리카어도 아닌 혼합 언어가 생겨난 것이지요.  아프리카에서 이제 막 끌려온 신규 노예들은 낯설고 험악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이 새로운 언어에도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사실 익숙해진다기보다는 이 새로운 언어의 생성 및 발전에 몸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크레올 어는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이들과 그래도 의사소통이 필요했던 농장 감독들이나 뮬래토(mulatto)들도 따라 배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아이티 공화국의 공식 언어는 2가지인데 하나는 프랑스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 크레올 어라고 합니다.) 




(두 단어 모두 아이티 크레올어라는 뜻입니다.  저거 Haitian을 영어로는 헤이시안으로 읽지만 프랑스어로는 아이시앙 haïtien 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불어에는 H 발음이 거의 없어요.)



또 생 도밍그의 사회 계층은 그냥 딱 백인과 흑인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일단 필연적으로 혼혈인들, 그러니까 뮬래토(mulatto)들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지요.  미국의 백인 농장주는 이렇게 생긴 혼혈 아이를 그냥 노예로 부려 먹었다고 하지요. (따지고 보면 자기 아들 딸인데 말입니다 !)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대개 이렇게 생긴 혼혈 아이들을 자유인으로서 적절한 교육을 시켰고, 이들은 생 도밍그 현지 군대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 재산을 모아 작은 농장을 경영하기도 하는 등 자신들만의 사회 계층을 따로 구성했습니다.  그러니까 뮬래토 농장주가 아프리카에서 막 끌려온 흑인 노예들에게 잔인하게 채찍질을 하는 것이 뭐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흑인 노예들 자신도 하나의 계급이 아니었습니다.  흑인 노예도 이제 막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1세대 노예가 있었고, 또 생 도밍그에서 태어난 2세대 노예가 있었습니다.  이들끼리도 서로 사이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생 도밍그에서 태어나 좀더 '순화된' 노예들은 좀더 덜 힘든 일을 맡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또 순수 흑인들 중에도 어렵게 자유를 얻은 자유민도 있었고, 또 산악지대로 도망쳐 산적질로 연명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산적화된 도망 노예들은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했으므로 주로 허술한 흑인 노예들의 숙소를 털었고, 그 과정에서 흑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일도 잦았습니다.   특징적인 것은, 전체 인구 구성에서 아프리카에서 끌려오는 1세대 노예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생 도밍그의 사탕수수밭 노예 생활이 그리 목가적인 생활 환경이 안되다 보니, 많은 흑인 노예들이 도중에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던데다, 노동 특성상 여자 노예의 수자가 크게 적었기 때문에 생 도밍그에서 태어나는 2세대 노예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도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생 도밍그는 저 멀리 대서양 너무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흑인들을 마치 개미 지옥처럼 빨아들이는 마의 섬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크레올 언어가 쓰이는 저 빨간 곳들은 예전에 프랑스 애들이 나쁜 일을 아주 많이 저질렀던 곳들입니다.)



이런 생태계가 100년 정도 유지된 결과는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1788년에 행해진 생 도밍그의 인구 조사 결과를 보면 (당시 인구 조사가 얼마나 정확했겠습니까마는) 백인은 27,717명으로 5.5%, 자유민으로 풀려난 흑인 및 뮬래토 (mulatto, 혼혈) 등 자유 유색인들(gens de couleur)이 21,808명으로 4.3%, 그리고 455,089명의 흑인 노예가 전체 인구의 90.2%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글쎄요, 러시아의 농노들과 러시아 귀족층 간의 인구 비율이 이 정도일지는 모르겠으나, 러시아의 농노들과 러시아 귀족층 간의 관계가 생 도밍그의 농장주 및 흑인 노예들 사이만큼 험악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자동화기나 기갑 장비, 항공기 등도 없던 시절에 기껏해야 플린트락(flintlock) 머스켓으로 무장을 한 1명의 주인이 90명의 노예들을 마구 학대하면서도 그 질서가 유지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정치가로서보다는 문필가로서 이름이 높았던 미라보 백작이십니다.)



18세기 말의 프랑스의 유명 정치가이자 문필가인 미라보 백작 (Honoré Gabriel Riqueti, comte de Mirabeau)이 생 도밍그의 프랑스인들은 "(폼페이 멸망의 원인이었던) 베수비오 (Vesuvius) 화산 기슭에서 잠을 자고 있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 상황을 두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농장주들도 이런 사실을 당연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런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한 것은 더욱 무자비한 폭력에 의한 공포였지요.  반항하는 노예들에게는 사형 정도의 간단한 (?) 처벌이 아니라 거세, 화형 등의 끔찍한 고문이나 처형이 가해졌습니다.  이런 폭력의 난무가 과연 노예들을 고분고분 길들이는데 효과가 있었는지는 1791년 마침내 드러나게 됩니다.




(지옥을 그린 그림이냐고요 ?  아닙니다.  정열과 낭만이 살아 숨쉬는 카리브 해의 어느 흔한 하루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건 스페인사람들이 카리브해 정복 초기에 타이노족들에게 행했던 모습들입니다만...)



1789년 마침내 터진 프랑스 대혁명은 언듯 생각하면 노예들에게 자유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던졌다고 상상이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혁명과 함께 선포된 인권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라고 선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엄연히 생 도밍그도 프랑스 땅이니, 그 효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실제 영향은 매우 복잡 미묘했습니다.


일단 당시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에도 본국과 동일한 법과 혜택이 주어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나 모두 노예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모두 '모든 노예는 본토에 발을 딛는 순간 자유'라는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본토가 아닌 식민지에 있는 노예들은 본토에서 인권선언을 하건 말건 그냥 그대로 노예라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윽 시발 - 제목과 포장은 요란하더니 결국 그냥 얼굴 하얀 애들끼리만 통하는 이야기였어 ?)



당시 생 도밍그에서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던 백인 농장주들 (grands blancs)은 오히려 프랑스 대혁명을 반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들은 노예 해방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존 왕정이 노예들의 처우에 대해 이런저런 '실정에 어두운 탁상공론적인' 규정을 만들어 노예들의 기본권을 지켜주려 했던 것을 원망하고 있던 차였지요.  또 무엇보다 더 돈많은 고객인 영국과의 거래를 제한했던 프랑스 왕정이 무너진 것에 대해 쾌재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번 기회에 아예 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좀더 많은 자율권과 그에 따른 좀더 많은 이익을 얻어내고자 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차라리 왕당파와 그를 지지해주는 영국의 세력에 막연히 뭔가를 기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들과는 또 전혀 무관하게, 주로 뮬래토로 구성된 생 도밍그의 자유 유색인들(gens de couleur)은 이번 기회에 자신들에게도 백인들과 동일한 프랑스 시민권을 달라고 주장하는 등, 한마디로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생 도밍그는 완전 사분오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혼란 와중에서도 역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돈이라고, 1791년 5월, 프랑스 혁명 정부에서는 '일정 이상의 재산을 갖춘 부유한 유색인에게는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한다' 라는 결정을 내렸고, 백인 농장주들은 이를 거부하는 등 혼란만 가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1791년 8월 21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합니다.  즉 생 도밍그의 흑인 노예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체 섬이 일제히 반란에 돌입했던 것은 (사실 전체 섬이 일제히 반란에 돌입했던 것은 또 아닙니다만) 더티 부크만 (Dutty Boukman)이라는, 도망친 노예 (Maroon slave)이자 부두(Vodou)교 술사였던 남자의 카리스마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더티 부크만이라는 이름은 영어로 Dirty Bookman (지저분한 책쟁이)라는 것이 영어 발음 그대로 넘어온 것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원래 자메이카 태생의 영국 흑인 노예였는데 프랑스령인 생 도밍그로 팔려온 사람이었지요.  이 양반은 스스로 공부를 하여 bookman이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가 되었지요.  아무튼 이 양반은 1791년 8월 14일, 보아 카이만 (Bois Caïman)이라는 곳에서 부두교 의식을 치루면서 곧 있을 노예 대반란과 그 해방을 예언했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이 양반은 반란 시작 이후 3개월만인 11월에 프랑스인들에게 살해되어 그 목이 효시되는 수난을 당했습니다만, 이 양반이 뿌린 씨는 결국 세계 최초로 성공한 흑인 노예 반란 및 독립이라는 꽃을 피우게 됩니다.   다만 이 양반이 부두교 술사였다는 사실과 부두교 의식에서 아이티 독립이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최근 아이티 대지진 이후, '아이티에 이렇게 재난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 섬나라는 시작부터가 악마와의 계약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계통 언론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언론인/종교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류에게 있어 지진보다 더 큰 재난인 것 같습니다.




(부두교는 지금도 카리브해 지역에서 널리 믿어지는 종교 의식입니다.  좀비 흑마술 같은 건 안나온다는데요 ?)



아무튼 일단 대반란이 시작되자, 그 기세는 전체 인구의 5% 정도 밖에 안되는 백인들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백인들도 이런 대규모 반란을 항상 걱정하고 있었으므로 평소에도 거주지를 요새화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해두는 등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일부 요새화된 거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이 곧 흑인들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많은 백인들과 그 가족이 흑인 노예들 수중에 떨어졌고, 이들에게는 흑인들의 잔혹한 보복, 그러니까 약탈, 관광, 고문, 사지절단, 살해 등이 저질러졌습니다.  반란 시작 2개월만에 약 4천명의 백인들이 살해되고 약 180개에 달하는 농장들이 불에 타버렸다고 하니, 전체 백인 인구의 약 1/7이 한순간에 살해된 셈입니다.  많은 백인들은 아무 배편이나 구해지는 대로 행선지를 가리지 않고 올라타고는 생 도밍그를 떠났습니다.  이들은 대개 영국령인 자메이카나 스페인령인 쿠바, 또는 미국 동해안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생 도밍그의 운명과 또 미국 남동부 지역의 크레올-프랑스 계통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지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백인들이 생 도밍그에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생 도밍그에 있던 백인들이라고 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당장 생 도밍그를 떠나면 삶의 터전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 또 배편을 구하지 못해 발이 묶인 사람들도 꽤 있어서, 반란 초기의 광기에 어린 살육을 피한 백인들은 흑인 반란군들에게 일종의 인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전원 밧줄에 묶여 감방에 갇힌 것은 아니었고요... 뒤에 보시겠습니다만 상황이 매우 복잡했습니다.




(1791년의 흑인 노예 반란입니다.  암튼 이럴 때는 누가 애초에 뭘 잘못했느니 따지지 말고, 일단 튀어야 합니다.)



사태가 이렇게되자, 비록 자신들도 혼란에 빠져있었으나 파리의 혁명 정부에서도 가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약 6천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생 도밍그의 프랑스인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이 병력의 수와 질은 전면적인 노예 반란을 막기에는 택도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오히려 생 도밍그의 흑인 노예들을 위협했던 것은 프랑스 본국이 아니라 자메이카의 영국군이었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생 도밍그의 사탕수수 농장을 내버려둔 채 몸만 빠져 나와야 했던 프랑스 백인 농장주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재산을 되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혼란에 빠진 본국 혁명 정부보다는 당장 근처에 있는 자메이카의 영국군이 더욱 의지할 만한 대상이었습니다.  왜 바로 옆, 그러니까 같은 히스파니올라 섬 동쪽에 있는 산토 도밍고의 스페인군에게는 의지하지 않았냐고요 ?  사실 스페인군은 이미 생 도밍그를 침공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매우 복잡해서, 이들은 프랑스 백인 농장주 편이 아니라 흑인 노예 반란군과 협력 관계에 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스페인에게 생 도밍그는 프랑스 해적들로부터 시작된 프랑스 세력의 침공 결과로 태어난 원수의 땅이었거든요.  무법 상태였던 생 도밍그에서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여 스페인의 세력을 넓히려면 일단 프랑스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흑인 노예들을 지원해야 했던 것이 스페인의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상황이 이랬던지라, 도망친 프랑스 백인 농장주들(grands blancs)은 생 도밍그의 번영에 군침을 삼키고 있던 자메이카의 영국군을 꼬드겼습니다.  그러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정부가 영국 및 기타 유럽 국가들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아예 잘 되었다고 판단한 프랑스 백인 농장주들은 자기들끼리 멋대로 자메이카의 영국군과 협약을 맺고 '이제부터 생 도밍그는 프랑스 땅이 아니라 영국 왕의 영토이다' 라고 선언을 했고, 그에 따라 자메이카 주둔 영국군이 생 도밍그에 상륙했습니다.   영국군은 생 도밍그의 북쪽 해안에 있는 프랑스 곶 (Cap Francaise)에 순조롭게 상륙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스페인군과도 협조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정말로 복잡했습니다.  영국군이 상륙하면서 싸워야 했던 적은 파리 혁명 정부에서 파견한 프랑스군이기도 했지만, 정작 그 프랑스군과 교전하던 흑인 노예 부대들도 영국군의 적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즈음해서는 전체 섬에 불과 3500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던 프랑스군으로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요.  흑인 반란군들과 싸우기도 어려운데 이젠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도 싸워야 했으니까요.  아무튼 해군의 지원을 받는 영국군은 순조롭게 해안 도시들을 접수했고 흑인 반란군들은 산지와 정글로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무장도 변변치 못한 흑인 반란군이 무적의 레드코트들 앞에서 승산이 있을리 만무했지요.




(우린 19세기초의 미군이다 !  다 덤벼 !)



그런데 뜻밖에도 승산이 있었습니다.  기세등등하게 생 도밍그를 침공했던 레드코트들은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했으나, 왠일이지 제풀에 지쳐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황열병의 습격을 받은 것이었지요.  실제로 영국군은 1793년에서 1798년까지 5년 동안 생 도밍그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고 행정부까지 운영하는 등, 사실상 생 도밍그를 지배했으나, 결국 흑인 반란군의 게릴라식 공격과, 무엇보다도 황열병의 맹위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1798년 다시 꼬리를 말아쥐고 자메이카로 도주해버립니다. 




(이 작은 모기가 지구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동물로 선정된 바 있다는 거 다들 아시지요 ?)



여기서 잠깐, 자메이카에는 황열병이 없었나요 ?  물론 있었습니다.  전에 설탕과 카리브해 편에서도 인용했듯이, 영국군에서 이 자메이카 주둔군으로 발령을 내는 것은 곧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자메이카에서도 견디던 영국군이 왜 바다 건너 생 도밍그에 왔다고 맥을 못 추었을까요 ?  이는 황열병이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병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실은 자메이카 내부에서도, 영국군이 계속 산이며 정글을 헤집고 다니는 야전 생활을 했다면 황열병 환자들이 크게 늘었을 것입니다.  황열병을 옮기는 매체인 황열병 모기 (Aedes aegypti, 학명에 이집트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정작 이집트에는 이 모기가 없습니다)가 주로 정글이나 습지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시 내의 모기보다는 산모기 바다모기들이 더 악랄하다고 하지요.  이렇게 흑인 반란군을 쫓아 정글 지대를 헤매야 했던 영국군은 황열병의 공격에 큰 병력 손실을 보아야 했습니다.  흑인들은 황열병에 내성이라도 있나요 ?  그건 물론 아닙니다.  다만 황열병은 한번 앓고 나면 정말 평생 면역력이 생겼으므로, 어려서부터 황열병에 노출되며 살았던 토착민들 (황열병은 원래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따라 건너온 병이었습니다) 은 좀더 면역력이 강했을 것입니다.  


영국군의 침공은 시작만 요란했을 뿐 결국 별 소득 없이 끝났는데, 이 영국군의 침공이 생 도밍그의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을 하나 만듭니다.  바로 투쌩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의 등장이지요.




(지금의 아이티 공화국 지폐에 나오는 투쌩의 모습입니다.  사실 보면 그림마다 얼굴이 천양지차로 다 달라요.)



이 투쌩 루베르튀르라는 양반은 당연히 흑인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1743년 정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루베르튀르라는 성은 사실 나중에 붙여진 것이고, 처음 이름은 그냥 투쌩이었습니다.  그 이름 Toussaint은 영어로 all saints, 즉 '모든 성인'을 뜻하는 것인데, 뭔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붙인 것은 아니고 그냥 11월 1일, 즉 만성절 (All Saints Day)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뒤에 생겨난 성인 루베르튀르(Louverture)는 영어로 the overture, the opening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훗날 그가 반란 전쟁을 지휘할 때 그가 전투를 이끄는 모습을 본 프랑스 관리가 '저 자가 향하는 적진에는 항상 구멍이 생기는군 !' 하고 감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간단히, 그냥 그의 앞니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도 합니다. 


투쌩은 생 도밍그에서 노예로 태어난, 즉 2세대 노예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서부 아프리카 베넹의 왕자였는데 그만 노예 상인들에게 납치되어 생 도밍그로 끌려온 사람이라고 전해집니다만, 그 말에는 사실 아무 증거가 없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당나라 황제와 용녀의 자손이라는 설과 비슷한 것 같아요.  투쌩은 2세대 노예답게, 자신이 속한 브레다 (Breda)라는 지역의 농장에서 중간 보스 역할을 하는 착실한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유까지 허락받았고, 월급을 받는 농장 감독으로 계속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돈을 모아 작은 커피 농장을 임차하여 커피 농사도 지었다고 하네요.  그 커피 농장에서도 노예를 썼냐고요 ?  예 당연하지요.  노예가 약 12명 정도 딸린 작은 농장이었다고 합니다. 




(투쌩의 또다른 그림입니다.)



이 배경만 보면 투쌩은 흑인 노예 반란을 지휘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투쌩은 초기 반란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가족과 함께, 브레다 농장의 백인 주인 가족을 서둘러 배에 태워 스페인령인 산토 도밍고로 피신 보내줄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는 노예 출신치고는 꽤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약간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크레올 어 외에도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고, 그리스 철학자 이야기나 마키아벨리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글을 쓸 줄도 알았는데, 불행히도 맞춤법은 철저히 엉터리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의 얇팍한 지식만으로도 그는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는 지식인으로 통할 수 있었고, 특히 어려서부터 배운 아프리카 민간 요법과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배운 의학 지식으로 인해, 그는 의사로서 흑인 반란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주로 프랑스 관리들과 흑인 반란군 사이의 협상 등에서 활약했는데, 주로 온건파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관리들과 흑인 반란군은 전쟁 상태였으므로, 흑인 반란군은 프랑스와 대립하는 스페인군과 손을 잡은 상태였는데, 투쌩도 역시 스페인군과 협력하여 프랑스 관리들을 공격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그의 지휘나 부대 운용이 차츰 두각을 드러내면서 그의 휘하에 흑인 병사들이 많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아이티에서도 여러가지 평가를 받고 있는 손쏘낙스입니다.  투쌩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프랑스에 보내진 뒤, 그냥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1791년 시작된 흑인 노예 반란은 2년이 흐르도록 수습되지 못하고 있었고, 특히 위에서 언급한 영국군의 침공으로 인해 더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인 프랑스 관리 손쏘낙스(Léger-Félicité Sonthonax)는, 이 꽉 막힌 상황에 돌파구를 만들고자 1793년 8월 과감한 조치를 하나 취합니다.  즉, 손쏘낙스는 일개 지방 관리임에 불구했으므로 이런 일을 할 권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임하에 생 도밍그의 모든 노예들을 자유인으로 풀어준다는 노예 해방 선언을 해버린 것입니다.  마치 남북 전쟁 때의 링컨 대통령처럼 말이지요.  그 결과도 비슷했습니다.  처음에는 투쌩을 비롯한 흑인들은 이 조치에 별로 감동하지 않았습니다.  궁지에 몰리니까 내놓은 궁여지책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또 실제로 그럴 권리와 힘도 없는 하급 관리 주제에 립 서비스에 불과하다는 평판이었지요.  그러나 몇개월 뒤, 파리 혁명 정부에서도 '모든 프랑스 식민지의 노예들은 이제부터 자유인'이라는 노예 해방 선언이 선포되자,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특히 스페인군도 점점 세력이 커지는 투쌩의 부대에 대해 견제를 해오던 터라, 투쌩은 노예 해방을 선언한 쪽을 위해 싸우겠다며 스페인군 쪽에서 프랑스군 쪽으로 전향을 선언해버린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백인 농장주들이 조국이고 이념이고 내 돈을 되찾아야겠다며 영국군을 끌어들인 것이 결국 프랑스의 노예 해방 선언을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투쌩이 자유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결국 생 도밍그, 즉 훗날의 아이티 공화국으로 하여금 세계 최초로 백인 국가의 압제에서 벗어난 흑인 노예들의 성공적인 독립국가 창설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그건 상당히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당장 투쌩은 삽시간에 유리한 입장에서 사면초가의 프랑스 정부군 입장으로 바뀌면서 큰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일단 스페인군의 공격은 물론이고, 여태까지 같이 스페인 측에서 싸워온 동료 흑인 부대들의 공격도 받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프랑스 정부군을 공격하는 영국군의 공격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고진감래라고, 좀 버티다보니 사태가 조금씩 호전되었습니다.  일단 1795년 바젤 (Basel) 조약에서, 스페인 본국 정부는 파리 혁명 정부에게 생 도밍그는 물론이고 히스파니올라 섬 동부 지역인 산토 도밍고까지 다 넘겨주기로 협약을 맺습니다.  식민지 현지 상태와는 무관하게, 스페인 본국 정부의 사정이 궁했거든요.  또 투쌩의 이상과 리더쉽에 끌린 흑인 반란군 병사들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면서,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흑인 군벌들과의 싸움에서도 승기를 잡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멋대로 노예 해방을 선언한 프랑스 관리 손쏘낙스와의 관계도 좋아서, 손쏘낙스는 투쌩의 두 아들이 프랑스 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유학까지 보내줍니다.




(1795년 바젤 조약의 핵심은 파리 국민공회가 스페인 및 프로이센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영국군이었습니다.  그는 영국군을 생 도밍그에서 정면 승부로 몰아내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실패했고, 방법을 바꾸어 게릴라 전술로 영국군을 괴롭혔습니다.  이것이 주효했습니다.  영국군도 정글에서 치고 빠지는 투쌩의 부대를 어찌하지 못하고 황열병에 픽픽 자꾸 쓰러지기만 했습니다.  이러는 사이 투쌩은 본국 프랑스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동료 흑인 지휘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나 많은 굴곡을 겪습니다만, 결국 그와는 상관없이 영국군으로 하여금 '생 도밍그는 지옥'이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영국군을 몰아 붙이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황열병의 공로가 컸지요.  결국 1798년 4월 30일, 투쌩은 영국군 메이틀랜드 (Thomas Maitland) 장군과 종전 협정을 맺습니다.  




(메이틀랜드와 협약을 맺는 투쌩. 투쌩이 젊어서 사탕수수밭에서 일할 때, 어디 감히 영국 귀족과 눈을 맞출 생각이라도 했었겠습니까 ?)



조건은 영국군이 철수하는 대신, 그동안 프랑스 혁명에 반대 활동을 해왔던 프랑스인들을 사면해준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투쌩의 완승이었습니다.  콧대 높은 영국 귀족 출신 장군이었던 메이틀랜드는 한낱 아프리카 흑인 노예 출신과 이런 굴욕적인 협약을 맺으려니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나중에 메이틀랜드는 자메이카로 흑인 노예 반란을 전파하지 않겠다는 약속 하에, 생 도밍그에 대한 해상 봉쇄까지 다 풀어줍니다.  메이틀랜드가 프랑스에서 파견된 백인 관리인 에두빌(Gabriel Hédouville)을 배제하고 투쌩과 직접 대화한 것도 사실은 투쌩과 프랑스 본국 정부와의 사이를 틀어놓으려는 계책의 일환이었습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속셈이었지요.  


그런데 그게 잘 먹혔습니다.  원래 프랑스 본국에서도 (비록 노예 해방이네 뭐네 떠들었지만) 한낱 노예 출신 검둥이가 생 도밍그같은 부유한 식민지의 정권을 한 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1798년 3월 본국에서 파견나온 에두빌은 이미 올 때부터 투쌩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온 것이었습니다.  에두빌은 뮬라토 장군이자 투쌩의 라이벌이었던 리고 (André Rigaud)를 부추김으로써 이이제이의 전략을 펼치려 하였으나, 결국 투쌩은 이 정치 및 군사 분쟁에서 승리하여 에두빌과 리고 모두를 프랑스로 축출해버리고 명실상부한 섬의 1인자가 됩니다.




(리고는 어려서부터 부유한 농장주였던 백인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교육도 잘 받았습니다.  그는 두발은 흑인처럼 검고 곱슬곱슬했으나, 피부색은 거의 백인처럼 밝은 편이었다고 하며, 좀더 백인처럼 보이고자 부드러운 머리털로 된 가발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뮬래토가 흑인보다는 우수한 사회적 지위에 있다고 주장했으므로, 투쌩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투쌩의 정치는 한마디로 중도 보수파 정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노예제 폐지가 유지되는 한, 독립 공화국을 세우겠다는 야심이 전혀 없었고, 그가 만든 생 도밍그 자체 헌법에도 생 도밍그는 프랑스의 영토이며 생 도밍그의 모든 사람들은 프랑스 국민이라고 명기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생 도밍그 혁명 자체가 부두교 의식에서 시작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통 카톨릭을 생 도밍그의 국교로 내세웠습니다.  또한 그는 경제 부흥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당연히 노예 노동은 금지했으나, 그는 전직 노예였던 흑인들에게 다시 사탕수수 농장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농사를 지으라고 강요했습니다.  여기서 과거 고된 노동의 악몽을 떠올린 많은 흑인들이 반발했습니다만, 그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경제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그의 군대는 무너질 것이고, 그럴 경우 다시 노예제를 확립하러 영국이든 프랑스든 스페인이든 백인 세력이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판단이 옳았습니다.  


바로 1799년,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새 헌법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터져 나왔습니다.   나폴레옹이 발표한 이 헌법에서, '식민지는 별도의 법에 의한 통제를 받는다'라는 구절을 넣었던 것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노예제를 부활하겠다'라는 선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때문에 나폴레옹과 투쌩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다지 좋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에 투쌩에게 내려졌던 프랑스 군대의 장군직을 그대로 인정해주었으나, 당시 투쌩이 계획 중이던 산토 도밍고로의 원정을 금지시켰습니다.  당시 산토 도밍고는 명목상으로는 1795년 바젤 조약에 따라 프랑스 땅이 되었으나, 여전히 스페인 총독이 노예제를 유지하며 지배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스페인과의 관계 때문에라도 이 원정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투쌩은 나폴레옹의 명을 어기고 그대로 침공을 감행, 마침내 전체 히스파니올라 섬을 완전히 정복해버립니다.  투쌩은 명실상부 검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릴만 했습니다.




(뭐 ? 검은 나폴레옹 ?  새로 나온 짝퉁인가 ?  말만 들어도 불쾌하군.)



이렇게 검은 나폴레옹과 하얀 나폴레옹의 관계는 시작부터가 삐그덕이었습니다.  특히 투쌩이 1801년, 위에서 이미 언급한 생 도밍그의 자체 헌법을 제정하여 나폴레옹에게 전달하자, 나폴레옹은 그 사절로 온 뱅상(Vincent) 대령을 그대로 엘바섬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불쾌감을 명백하게 표시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불쾌하게 여길 만도 했던 것이, 투쌩의 서신이 이렇게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흑인들의 1인자가 백인들의 1인자에게"   (공손하게 1.5인자라고 표현해야 했었을까요 ?)


물론 투쌩은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은 받지 못했지요.  아, 답장이 오기는 왔는데, 편지로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1802년, 나폴레옹의 매제 르클레르 (Charles Emmanuel Leclerc) 장군이 약 2만명의 병력을 끌고 카리브 해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