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3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5.21 달콤씁쓸한 결말 - 설탕과의 전쟁 (마지막편) (7)
  2. 2017.05.14 바그람을 향하여 - 형과 동생 (20)
2018.05.21 06:00

하지만 본격 산당국(産糖國)의 꿈이 현실화되기 전에 전쟁의 물결이 닥쳤습니다.  아카르트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빌헬름 3세가 알고보니 멍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입만 살았던 강경파의 주장대로 겁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고, 나폴레옹은 '내가 바로 나폴레옹이다'라는 것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빌헬름 3세에게 혹독하게 교육시켜 주었습니다.  이 전쟁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정제소까지 집어 삼켰습니다.  1806년 밀물처럼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아카르트의 농장과 공장을 불태워버렸던 것입니다.  아카르트는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잠겼습니다.  사탕무 정제소가 사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온 나라가 탈탈 털렸고, 나폴레옹에게 알짜배기만 골라 영토를 절반이나 빼앗기고 덤으로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내야 했습니다.  프로이센에게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걸었던 러시아까지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나폴레옹과 손을 잡으면서, 프로이센은 영원히 유럽의 3류 국가로 전락하는 듯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르트의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잔치집,  누군가에게는 초상집.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의 1807년 틸지트 조약 장면입니다.)




하지만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법입니다.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멸시키고 베를린에 입성한 뒤인 1806년 11월 21일, 대륙봉쇄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영국 선박이 실어오는 영국 및 그 식민지 제품들이 유럽 대륙에 발붙이는 것이 어려워졌지요.  이에 대응하여 영국도 추밀원 명령을 통해 프랑스 및 그 동맹국 해안을 역봉쇄했는데, 그러자 나폴레옹도 질세라 더 강력한 조치인 1807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여태까지는 원산지가 세탁된 영국 및 그 식민지 제품들이 중립국 선박을 통해서나마 유럽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 막히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여러가지 현상과 문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부 지역의 일부 산업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영국이 시장에서 사라지면서 부흥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로 인해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특히 설탕 ! 사람을 중독시키는 음식은 많습니다만, 술이나 커피나 담배나 홍차나 김치나 치즈나 첫맛은 '뭐 이런 맛이 다 있어 ?'라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설탕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처음 한번 맛을 보자마자 모두 좋아하게 된 음식은 정말 드물었습니다.  그동안 설탕에 중독되었던 유럽인들은 설탕이 식탁에서 사라지자 그저 아쉬움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절실한 갈증과 욕망을 느꼈습니다.  


그런 중독 현상에서 오는 갈증과 욕망은 자연스럽게 아카르트의 사탕무 설탕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유럽 내 설탕 값이 치솟으면서, 다시 아카르트에게 지원이 쇄도하며 1810년 그는 작은 규모나마 다시 사탕무 설탕 정제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공장은 곧 보헤미아와 아우크스부르크 등으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아카르트라는 프로이센 사람이 무에서 설탕을 뽑아낸다는 신기한 소식은 곧 나폴레옹의 귀까지 들려왔습니다.  스스로를 대단한 학자로 여겼던 그는 곧 과학자들로 구성된 파견단을 슐레지엔으로 파견하여 아카르트의 정제소를 조사했습니다.  이들은 돌아와서 그 복제판인 작은 정제소 2개소를 파리 인근에 지었는데, 이들은 아무래도 재료 품질이나 경험치에서 부족한 면이 있었는지 상용적인 성공을 거둘 정도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 빌어먹을 영국놈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도 설탕을 뽑아낼 수 있다는 증거를 본 나폴레옹은 크게 흥분했습니다.  바로 다음해인 1811년 나폴레옹은 칙령을 내려 100만 프랑(현재 가치로 약 160억원)을 들여 설탕 학교를 세우고 프랑스에서도 2만8천 헥타아르의 농토를 사탕무 재배에 할당하여 대대적으로 생산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제 새롭게 태동하는 프랑스 설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태까지 면허장 제도 및 일부 중립국을 통해 수입하던 카리브산 설탕의 수입을 1813년부터는 완전 금지했습니다.  




(1865년 런던에서 설립된 리빅 고기 수프 액기스 회사 Liebig Extract of Meat Company의 불어판 기념 엽서입니다.  다소 엉뚱하지만, 여기에 아카르트의 사탕무 설탕 정제소의 모습이 그림으로 담겨 있습니다.  아마 같은 식품 회사들의 역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시리즈물이었나 봅니다.  설명에는 Fondation de la première fabrique de sucre de betterave par Achard 즉 아카르트에 의한 최초의 사탕무 설탕 제조 공장 설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가능케 만든 아카르트에게는 어떤 금전적 혜택이 주어졌을까요 ?  당시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프랑스에 이미 특허권 제도가 도입된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레종도뇌르 훈장과 함께 그에 따른 두둑한 연금이라도 주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때 당시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호되게 당한 동맹국으로서 우방국이긴 했지만, 나폴레옹에게 있어 프로이센은 어디까지나 견제 대상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아카르트에게 어떠한 금전적 보상도 하지 않았고, 아카르트는 계속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정작 그에게 보상을 제시했던 것은 엉뚱하게도 영국 설탕 상인들이었습니다.  카리브산 설탕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만끽하던 영국의 거대 설탕 상인들은 아카르트가 사탕무로부터 설탕을 만드는 방법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폴레옹이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돈이 궁하던 아카르트에게 무려 20만 탈러(현재 가치로 약 21억원)의 금전적 보상을 제시했습니다.  훨씬 더 생산성이 좋은 카리브 해의 노예 설탕 농장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왜 사탕무 특허권을 사려 했을까요 ?  그들이 원했던 것은 특허권이나 독점 생산권이 아니라, 아카르트에게 '사탕무 실험은 대실패였다, 역시 유럽에서 설탕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발표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카리브산 설탕의 경쟁자를 없애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들에게 카리브해의 설탕 플랜테이션은 요즘의 유전과도 같은 부의 창출원이었거든요.  17세기 말 기준이긴 합니다만, 영국령 바베이도스(Barbados)의 81 헥타아르(24.5만평)의 사탕수수 농장과 그에 딸린 정제소면 영국 본토의 백작 가문과 맞먹는 부를 쏟아낸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영국이 값싼 설탕을 카리브해에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태양과 쏟아지는 비 외에도 흑인 노예 덕분이었습니다.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잔혹한 조건에서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가야 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묘사하자면, 영국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실어다 카리브해에 갈아넣으면 그것이 설탕이 되어 나오는 셈이었습니다.)  



(그런 설탕 무역의 비윤리적인 면 때문에, 영국 내에서도 자국의 설탕 상인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컸고, 설탕없이 홍차를 마시자는 운동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풍자화에서 영국 왕과 여왕이 공주들에게 '설탕 없이 차를 마시니 아주 맛이 좋구나' 라고 이야기하는데, 공주님들의 표정은 과히 좋지 못하네요.)



(17~18세기 영국에서 카리브해의 설탕 농장을 통해 떼돈을 번 사람들을 sugar barons 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것도 원래 밑천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장사였고, 실제로 귀족인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설탕 귀족으로는 이 그림 속 주인공인 William Beckford와 함께 James Drax, Christopher Bethell-Codrington 등이 있습니다.  이 그림 속 주인공인 벡포드는 말년에 모든 재산을 잃었지만, 크리스토퍼 코드링턴 같은 경우는 하원의원직을 유지하며 거듭된 노예 폐지 법안에 집요하게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아카르트의 고결함이 가장 빛났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설탕이 부유한 상인들의 배를 불리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온 인류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탐욕스러운 영국 자본의 유혹을 거절하고, 사탕무 재배법과 설탕 제조법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폴레옹이 파견한 과학자들도 아카르트로부터 그 제조법을 그대로 배워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유럽에서의 사탕무 설탕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사탕무 설탕 생산량은 나폴레옹 재위 기간 동안에 카리브산 설탕을 압도할 만한 규모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의 농업 생산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유럽은 굶주림이 존재하던 곳이었거든요.  사탕무보다는 당장 배를 채울 밀과 감자를 키우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에 사탕무 재배에 많은 토지를 할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화학 비료 등에 의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탕무 재배와 사탕무 설탕 생산량도 크게 늘었습니다.  1840년 사탕무 설탕은 전세계 설탕 생산량의 5% 정도만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1880년 경에는 그 비율이 무려 50%로 늘어났습니다.  사탕무의 전성시대가 끝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였습니다.  유럽 대륙이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면서, 아무래도 당장 군인들을 먹일 밀과 콩, 가축 사료용 옥수수 등의 재배가 더 시급했던 것이 원인이었지요.  그러나 지금도 전세계 설탕 생산량의 20%는 사탕무 설탕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 프랑스, 미국과 독일 등에서는 사탕무 재배가 활발합니다.




(현대 전세계의 사탕무 생산량입니다.  아카르트 덕분에 추운 지방인 러시아에서도 설탕 생산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유럽의 농업과 설탕 생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아카르트는 결국 그 공로를 인정받아 행복한 말년을 보냈을까요 ?  항상 그렇지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공법을 채택한 유럽 각지에서 사탕무 설탕 정제소가 계속 늘어났지만, 유럽인들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공개한 아카르트 소유의 정제소들은 그와 반비례하여 계속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노예 노동으로 생산된 값싼 카리브산 설탕이 영국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그의 사탕무 정제소들은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던 1815년, 그의 공장은 결국 파산을 선언해야 했고, 다시 6년이 지난 1821년 아카르트는 그가 사탕무 사업에 인생을 바친 슐레지엔 볼라우(Wohlau)에서 빈곤 속에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Source :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

https://en.wikipedia.org/wiki/Sugar_beet

https://en.wikipedia.org/wiki/Franz_Karl_Achard#/media/File:Liebig_Company_Trading_Card_Ad_01.12.005_front.tif

https://janeaustensworld.wordpress.com/2011/03/14/cesar-picton-wealthy-merchant-and-freed-man-the-regency-era/

https://www.economist.com/node/21525808

https://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Bethell-Codrington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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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푸냐옹 2018.05.21 0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나시카님의 글 감사히 잘보고 있습니다
    매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모바일 정보창고 2018.05.21 1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날씨가 엄청 좋네요. ^^
    멋진 하루 되세요~

  3. 투팍아마르 2018.05.21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해군 봉쇄하에 유럽대륙에서 사탕수수 대신 시도한 사탕무우 농사는 실패라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아닌것 같네요. 어째든 이 아카르트라는 분은 인격에 있어서도 고귀한분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4. franken 2018.05.21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일담이 참으로 가슴아프군요.

  5. zxc 2018.05.22 17: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고귀한 인품과 신념을 가진 사람은 빈곤속에 사는것같네요..

  6. 몽생 2018.05.23 2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경제적으로도 성공했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2017.05.14 23:24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분명히 나폴레옹 같은 괴물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전투가 끝난 다음날부터 무려 36시간 동안 아무런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나선 그에게는 어지간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패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인 5월 23일 아침부터 나폴레옹은 이미 이 처참한 패배를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된 선전 도구인 육군 회보(Le 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 실릴 전투 결과에 대해, '공격해 온 오스트리아군은 원래 위치로 되돌아 가야 했고, 프랑스군이 전장의 지배자로 남았다'라고 뻔뻔스럽게 구술했습니다.  100%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진실과는 거리가 꽤 먼 선언문이었지요.


휘하 장군들은 아예 비엔나로 철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극심한 피해를 입은 군단들을 재정비하고 패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단칼에 이를 거부했습니다.  일단 철수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이 비엔나로 철수하면 카알 대공이 병력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를 것이고,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비엔나에 집착하지 않고 아예 도나우 강 상류의 린츠(Linz)를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프랑스군은 퇴로가 끊길 것을 두려워 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 프랑스군은 둑이 무너지듯 프랑스-독일의 경계인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까지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도 오스트리아군에서는 그렇게 프랑스군의 후방을 끊는 작전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보헤미아(체코)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점 때문에 기각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무슨 생각을 하건 나폴레옹은 철수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답게 식량과 탄약 등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어 프랑스군은 여유있게 재정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빈과 린츠의 위치입니다.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기 전에 카알 대공이 프랑스군 후방을 끊을 목적으로 이미 린츠 점령 작전을 시도한 바 있었지요.  물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빛나는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군은 당연히 큰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행복과 기쁨만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카알 대공의 참모들은 이런 승리를 거두고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전투 이전과 동일한 상태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해야 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알 대공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대해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던 그는 아스페른-에슬링에서의 깔끔하지 않은 승리를 분석해볼 수록 프랑스군과 또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오스트리아군의 수적 우세가 확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을 격멸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카알 대공은 이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나폴레옹과의 평화 협상을 벌이는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견해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변변한 동맹도 없이 감히 혼자서 나폴레옹에게 도전한 것은 혼자 힘으로도 나폴레옹을 때려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일단 자신이 불을 당기기만 하면 프랑스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바이에른과 작센, 뷔르템베르크 및 프로이센의 독일 민족이 대거 봉기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로는 굳은 동맹인 러시아도 내심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견제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일단 나폴레옹이 첫 패배를 겪게 된다면 반-나폴레옹 연합전선에 러시아도 뛰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요.  당시 오스트리아의 변변한 동맹국이라고는 저 멀리 떨어진 섬나라 영국 하나였는데, 영국은 네덜란드나 북부 독일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시켜 프랑스의 뒤통수를 때려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는 모두 한낱 꿈에 불과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기대대로 반-프랑스의 깃발 하에 봉기한 것은 저 티롤 산골짜기 촌놈들 뿐이었습니다.  이 산골짜기 촌사람들은 놀랍게도 잘 싸워 르페브르의 제7 군단을 묶어두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주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바이에른이나 작센은 여전히 나폴레옹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그의 깃발 아래 오스트리아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던 프로이센은 드디어 찾아온 복수 기회 앞에서 움찔움찔 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원래부터 좀 덜 떨어진 편이었던 프로이센 왕 빌헬름 3세는 여전히 기가 죽어 있었지만, 그의 각료들은 모두 이런 기회를 그대로 흘려보내서는 안되며 당장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심지어 프로이센이 거부하기 힘든 제안까지 던졌습니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편에서 참전해준다면 과거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폴란드 바르샤바 공국을 프로이센에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빌헬름 3세는 오스트리아의 간절한 도움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힘이 아직 건재한데다, 설령 오스트리아가 이긴다고 해도 그럴 경우 오스트리아가 기세등등해질텐데, 그건 독일권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라이벌 관계에 있던 프로이센이 원하는 바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상륙이요 ?  언제나 그렇지만 영국은 세치 혓바닥과 기니 금화만 뿌려댈 뿐, 자신들이 피를 흘릴 생각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나마 이번 전쟁에서는 그 알량한 기니 금화조차 충분히 뿌리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간곡히 요청한 추가적 전쟁 보조금 지급조차도 거부했던 것입니다.




(라인 연방의 지도입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새로 만들어진 프랑스의 위성국가 베스트팔렌 왕국입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계 주민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의 기대가 완전히 헛된 망상만은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학수고대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듯 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으로부터 빼앗은 땅과 이런저런 독일계 소공국들을 모아 만든 베스트팔렌(Westphalen) 왕국에서는 그 허수아비 왕이자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Jerome)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베스트팔렌에서도 병력이 대거 징집되어 나폴레옹군의 후방 지원을 위해 파병되자, 무력의 공백 상황에서 반-나폴레옹 정서가 심각하게 무르익었습니다.  이런 위태위태한 상황에 불을 지른 것은 뜻 밖에도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 정규 경기병 연대였습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소위로 참전했던 쉴(Ferdinand von Schill) 소령은 당시 베를린에서 경기병 연대 하나의 지휘관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쉴 소령은 제4차 동맹전쟁의 패배 이후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나 그나이제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 등의 개혁론자들과 함께 프로이센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혁 운동이 빌헬름 3세에 의해 불법화되자, 아예 애국적 무장 봉기에 나선 것입니다.  그는 나폴레옹이 란츠후트 기동전을 승리로 이끈 직후인 5월 초 부대 기동 훈련을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경기병 연대를 통째로 끌고 베스트팔렌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소규모 베스트팔렌 수비군을 간단히 제압하고 오히려 현지 주민들로부터 자원병을 추가 모집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보복을 두려워한 빌헬름 3세가 기대와는 달리 쉴 소령과 그의 경기병 연대를 반란군으로 규정하자 기가 죽었고, 프랑스에 충성하는 네덜란드군과 덴마크군이 쳐들어오자 속절없이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쉴 소령의 반란군은 5월 말 결국 항구 도시인 스트랄순트(Stralsund)에서 패배했고, 쉴 소령도 전사해버렸습니다.   




(그가 전사한 스트랄순트에 건립되어 있는 쉴 소령의 동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희망은 뜻하지 않은 패배에 나폴레옹이 시무룩해진 이 순간에 재빨리 유리한 조건으로 화평을 청하는 것이라고 카알 대공은 판단했습니다.  이건 아마 옳은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카알 대공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폴레옹은 체면을 완전히 구긴 상태에서 누군가와 화평을 맺을 그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화평할 생각이 전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화평을 원하지 않는 중요 인사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카알 대공의 형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 프란츠 1세였습니다.  


(이건 23년 후인 1832년 그려진 프란츠 1세의 모습입니다.  그는 시민 계급의 혁명으로 끓어오르던 19세기 초 유럽에서 개혁에 저항했던 대표적인 반동 군주로 꼽힙니다.)


황제 프란츠 1세에게 있어 카알 대공은 밥만 축내는 여러 동생들 중 믿을 만한 능력을 갖춘 유일한 형제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의 인기를 갉아먹는 잠재적 경쟁자였습니다.  일찌기 조카 프란츠 1세의 교육을 맡았던 전임 황제 요제프 2세(Joseph II)는 어린 프란츠 1세에 대해 '자기 한몸 보존이 무엇보다 소중한, 전형적인 마마 보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본성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지, 프란츠 1세에게 있어 나폴레옹 못지 않게 견제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카알 대공이었습니다.  그는 카알 대공을 오스트리아 전군의 원수(generalissimus)로 임명해놓고도, 카알 대공을 젖히고 그 참모장으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고 내리는 등 카알 대공의 군내 입지를 끊임없이 흔들었습니다.  


프란츠 1세의 입장은 단순 명료했습니다.  나폴레옹과 화평할 생각을 하지말고 싸워 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르샤바 공국을 침공했다 거기서 죽만 쑤던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대가 거기서 물러나 카알 대공과 합류하고, 또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도 돌아오면,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에게 맞설 충분한 병력을 갖추게 되는데 왜 화평을 하냐는 것이었지요.  게다가 프로이센에게 바르샤바 공국을 양보하겠다는 등의 굉장한 제안까지 해놓았으므로, 결국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 편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것이 프란츠 1세의 여전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카알 대공의 다소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매파 장군들은 카알 대공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프란츠 1세의 그런 강경한 입장에 적극 호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가뜩이나 비관적이었던 카알 대공의 기분을 오히려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유일하게 제 정신 박힌 사람이었던 그는 오스트리아 궁정과 군 수뇌부를 휩쓸고 있던 과도한 자아도취와 근거없는 자신감에 자신까지 휩쓸린다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그람 전투를 앞두고 있던 6월 말, 그의 삼촌인 테쉔(Teschen) 공작 알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쓸 정도로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전투를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저는 프랑스군에게 크게 한방 먹여줄 생각입니다.  그러나 왕조를 위태롭게 할 만한 모험은 전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최소화할 생각입니다."


원래 싸움은 기 싸움이 절반이라고 하는데, 나폴레옹과 카알 대공의 2차전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카알이 절반은 지고 들어가는 경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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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5.14 2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싸 드디어 나시카님 블로그 첫 1등입니다ㅎㅎ

    4월초부터 정주행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2. 딸기맛농약 2017.05.14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첨으로 1등해보네요. ㅎㅎㅎ
    잘보고갑니다.

  3. 검불 2017.05.14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그람 전투로군요. 이제까지 언급되지 않은 북이탈리아의 요한대공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시려나요? 북부의 페르디난트 대공의 폴란드 전선, 중부유럽의 티롤 항쟁도 다루셨는데 아직 북이탈리아쪽만 이야기 되지 않은 것 같아서요.

    • nasica 2017.05.15 1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한 vs. 외젠이라는 쩌리들의 전쟁이라 빼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편에서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가면 안될까요?

    • 검불 2017.05.15 23: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름 황제의 양자와 다른 황제의 동생의 대결인데, 그러나 쩌리들의 대결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어.....

      사실, 별로 중요한 전투도 아니긴 하죠!

    • 카를대공 2017.05.18 14: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외젠 나름 호남에 의리남이라 생각했는데 나시카님께서는 쩌리라고 생각 하셨군요 ㅎㅎ 나중에 나시카님께서 다뤄주시는 외젠 특집도 한 번 보고 싶네요.

  4. mip 2017.05.15 0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전투의 서막이군요!!! 바그람을 향하여.. 제목이 너무 적절하고 느낌도 좋습니다 ㅎㅎㅎ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5. 최홍락 2017.05.15 0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가 프란츠 1세인지 2세인지 헷갈리네요. 그리고 전임 황제는 레오폴드 2세인 것 같은데...언제 한번 합스부르크 왕가 얘기를 정리해주셔야 할 듯...

    • 수비니우스 2017.05.15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키 찾아보니까 프란츠 1세가 곧 프란츠 2세라네요 ㅎㅎ 1806년 나폴레옹의 협박으로 신성로마제국 문닫기전에는 프란츠 2세였고 문닫고 오스트리아제국 선포한 이후에는 프란츠 1세래요. 프란츠 1세(이자 2세)는 전임 황제인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이고요.
      좀더 읽어보니 오스트리아제국 선포가 신성로마제국 문닫기 전이라고 하네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제국 황제인 프란츠... 아 헷갈린다... ㅎㅎ

    • nasica 2017.05.15 1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비니우스님 말씀대로 입니다. 레오폴드 2세가 요제프 2세 후임으로 즉위한 뒤 얼마 안 되어 병사하는 바람에 프란츠 2세가 20대의 약관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희한하게도 다들 2세 2세 2세네요.

    • 최홍락 2017.05.15 2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영국과는 달리 5세 6세 이런식으로 구분되는게 아닌 레오폴드 요제프 프란츠 페르디난트 등 이름을 돌려막기식으로 쓰니 많이 헷갈리네요.

  6. 장웅진 2017.05.15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군회보의 기사가 카데시전투에 대한 아부심벨신전의 기록을 연상시키는군요

  7. 유애경 2017.05.15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마 믿을만한 형제이자 자신의 인기를 갉아먹는 경쟁자...」 무능한 권력자의 자격지심 이라고 해야할까요^_^

  8. jager 2017.05.16 1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한 대공은 '중요한 순간에 왔으면 큰 도움이 됬을 것이다'와 '나중에 도착하여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두가지 서술로 익숙하네요. 엄청 무능하거나 고의적으로 태업한 건 아닌가 싶네요

  9. 석공 2017.05.17 2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10. 카를대공 2017.05.18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바그람 이후 카알대공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도 왜 더 이상 나폴레옹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나 늘 궁금했었는데요,
    나시카님께서 늘 강조하신 소심한 성격에 프란츠1세의 견제까지 더해지니 이제야 명쾌해지는 느낌입니다.

    프란츠1세의 견제가 있었더라도 본인이 소심한 성격이 아니었다면 그 뒤에도 지휘권을 잡을 수 있었을테지만
    사람 성격이라는게 본인 뜻대로 되는게 아더군요.

  11. line infantry 2017.05.19 15: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잘 읽고 갑니다. 그리고 저 프란츠 1세는 보면 볼수록 선조 같은 느낌이 드네요.

  12. Mei 2017.05.30 15: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안녕하세요.
    중간에 그림 3개가 없어진 듯 하여 말씀드립니다.

  13. 좋은글입니다. 2017.05.30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근데 모바일만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도.그림이 안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