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현실'사에서 출간된 빅토르 위고의 "브르타뉴의 세 아이들"이라는 소설은 솔직히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소설 속에는 주인공들이 마라나 당통, 콘월리스나 윌리엄 피트와 같은 실존 인물과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제가 읽을 때 누가 실존 인물이었고 누가 가공의 인물인지가 약간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위키를 뒤져 보았으나, 대체 이 소설에 대해서는 찾을 수가 없더군요.  한참 후에야, 이 소설의 원제가 '1793'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소설은 빅토르 위고가 마지막으로 쓴 작품으로서, 제목이 암시하듯이 프랑스 대혁명에 반발하며 일어났던 방데(Vandee) 지방의 내란을 다룬 것입니다.  


줄거리는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만 몇가지 인상적인 대목들이 있더군요.  아마 '~주의자'라는 사람들은 무척 경멸할, 빅토르 위고다운 '싸구려 인간미'가 진하게 풍겨나오는 구절들입니다.





(쪽배 위에서 권총으로 위협당하고 있는 사람이 랑트나크 후작입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것보다는 좀... 가볍게 그려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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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데 지방에 내란을 일으키러 영국으로부터 잠입한 랑트나크 후작은, 프랑스에 몰래 상륙하자마자 이미 자신의 행방이 알려져있고 자신의 목에 6만 프랑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포고문을 보고 놀랍니다.  그가 농부로 변장을 하고 숲 속으로 숨어들 때 왠 거지를 만나는데, 이 거지는 대뜸 랑트나크 후작을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 숨으라고 권합니다.)


"그럼 자네가 글을 읽을 줄 안다니 나를 넘겨주면 6만 프랑(요즘 가치로 약 7억원)을 받게 된다는 것도 알 텐데."


"예, 압니다.  금화로 말이지요."


"6만 프랑이면 큰 재산인 것도 모를리 없겠지 ?"


"그럼요."


"누구든지 나를 넘겨주기만 하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요.  당신을 보았을 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이 사람을 넘겨주는 자는 누구나 6만 프랑을 얻어 한 재산 톡톡히 장만할 거라구.  그러니 서둘러 숨겨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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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혁명정부에서 정치위원으로 내려온 시무르댕은 전직 신부로서, 젊은 시절 귀족인 고뱅 가문의 가정교사로서 어린 고뱅을 아들처럼 키운 사람입니다.  이제 청년이 된 고뱅 자작은 혁명정부의 대령이 되어 자신의 할아버지인 랑트나크 후작을 토벌하는 부대의 유능한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냉혹한 성격인 시무르댕은 고뱅이 관용/온건파인 것을 보고 크게 우려합니다.)


"왜 자네는 성 마르크 르 블랑 수도원의 수녀들을 석방시켰는가 ?"

"저는 여자들을 상대로 전쟁하진 않습니다."


"왜 자네는 루비네에서 잡은 광신적인 그 늙은 신부들을 혁명 재판소에 파송시키지 않았는가 ?"

"저는 늙은이들을 상대로 전쟁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소한 동정은 하지 말게.  시역자들이 바로 해방자야.  저 탕플 탑을 지켜보란 말이야."

"탕플 탑, 저라면 거기서 태자(처형당한 루이 16세의 아들)를 풀어 주겠습니다.  저는 어린애들을 상대로 전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이 루이 카페라면 어린애들과도 싸워야 하는 거다."

"선생님, 저는 정치가는 아닙니다."


"코세 초소의 공격에서 반역자 장 트르통이 궁지에 몰려 허둥지둥 혼자 군도를 휘두르며 자네 부대에 달려 들었을 때, 자네는 왜 '대열을 풀어 통과시켜라!'하고 외쳤는가 ?"

"한 사람을 죽이는 데 1천5백명이 필요하진 않기 때문이죠."


"라 카유트리 다스티예에서 부상당해 기어가던 조제프 베지에라는 방데군을 부하 병사가 죽이려 할 때 '전진하라! 그는 내가 처리하겠다'고 하고선 권총을 공중에다 대고 쏜 일이 있었다. 그건 왜 그랬지 ?"

"쓰러진 사람을 죽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 둘은 지금 부대장이 되어 있다.  그 두 놈을 살려 줌으로써 자네는 공화국에 두 적을 제공한 셈이야."

"물론 저는 공화국에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했지, 적을 만들어 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시무르댕은 프랑스를 환자에, 방데를 종기에 비유하며, 외과의사가 종기를 용서하지 않고 잘라내듯 방데를 냉혹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혁명은 이제 전 세계를 절단하고 있다.  그래서 93년은 유혈의 해란 말일세."

"외과의사는 침착한데, 제가 보는 혁명가들은 난폭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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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고뱅 자작은 소설 후반부에서 프랑스 농민들의 식생활 이야기도 합니다.  프랑스 농민들은 고기를 1년에 나흘 정도 밖에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요.  하긴 당시 서민들이 빵이 없어 굶는다는 이야기가 있자, 당시 왕비 앙투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닌가" ("S’ils n’ont plus de pain, qu’ils mangent de la brioche") 라고 했다지요 ?  앙투와네트도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최소한 그 여자도 농가에는 고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앙투와네트는 실제로는 pain이니 brioche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기는 빵보다 비쌀 수 밖에 없는 물건입니다.  같은 면적의 땅에서 목초를 키우고 그것으로 소나 양을 치는 것에 비해, 밀이나 쌀을 재배하여 그것으로 빵을 만드는 것이 훨씬 '많이' 만들 수 있으니까요.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서양인들은 빵을 먹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서양인들이 식사를 하는 광경을 보면, 주식이 빵이라기보다는 고기라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됩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고기집에 가서 고기를 잔뜩 몇인분씩 구워 먹고 난 뒤 '식사'로 된장찌게에 공기밥을 먹는 것처럼, (비록 순서는 바뀌었지만) 주식인 고기를 먹기 전에 가볍게 롤빵 1~2개 정도를 먹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Treason's Harbour by Patrick O'Biran (배경 : 1813년 지중해 몰타 섬) -----------------------------


하지만 화요일,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에는 '그리갈레(gregale)'라고 불리는 지중해의 북서풍이 몹시 심하게 불어 어선이 출항을 하지 못한데다, 장교 식당의 설리(Searle)는 카톨릭 신자인 장교를 접대해 본 적이 없는지라 (당시 영국 해군에서는 모든 위관급 장교는 임관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의식을 거치게 되어 있었으므로, 카톨릭 신자인 장교는 사실상 없었습니다:역주), 소금에 절인 생선을 아무 것도 준비해놓지 않았었다.  덕분에 머투어린은 영국식으로 요리된, 물기가 가득하고 맛대가리 없으며 무척 꺼림직해보이는 채소 요리로 식사를 때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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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영미식 시금치 요리입니다.  시금치를 버터와 함께 물에 넣고 푸욱 삶으면 이렇게 회색 빛이 감도는 꺼림직한 물건으로 변합니다.  저는 카투사로 군대에 갔다가 미군 식당에서 이 물건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위 소설 구절 속에서도, 빵은 주식이라기보다는, 식사의 작은 일부로서, 빵 바구니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대체 유럽인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고기를 많이 먹게 되었을까요 ?


원래부터 유럽인들은 고기를 주식으로 한다고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실은 유럽인들이 제대로 된 빵을 주식으로 한 것도 그다지 오래 된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밀과 보리로 만든 마자(maza)라는 납작한 떡을 주식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효모를 넣어 부풀린 흰빵은 명절 때나 먹었다고 하네요.  중세 유럽의 농민들도 빵을 양껏 먹지는 못했고, 이런저런 찌꺼기를 넣어 끓인 수프 또는 죽을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농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밀과 호밀, 보리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제대로 구운 빵을 먹게 되었지요.  


이렇게 가난한 유럽에서도, 물론 귀족들은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귀족의 음식은 정말 고기가 주식으로서, 중세 연대기를 보면 프랑스 왕실에서는 하루에 600마리의 어린 닭, 200마리의 비둘기, 50마리의 거위 새끼를 먹었다고 합니다.  (몇 명이서 먹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들이 어찌나 고기를 좋아했는지는 종교적 관행도 바꿀 정도였습니다.  즉, 원래 카톨릭에서는 위 소설에 인용된 것처럼, 금요일에는 고기(원칙적으로는 달걀도 포함되었다고 하네요)를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대신 생선을 먹어야 했었는데,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냥 벌금을 내고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중세에는 도로 교통 사정 때문에 내륙 지방에서는 생선 가격이 무척 비쌌으므로, 무척 경제적인 선택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때 귀족들은 두껍고 넓적한 빵을 접시 대신으로 썼는데, 이렇게 고기 국물이 스며든 빵 접시는 대개 먹지 않고 내버렸습니다.  이 고기 국물이 묻은 빵 접시는 매일 밤 성문 밖에 모여든 가난한 농부들에게 하사품으로 나누어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온 나라의 거지들은 모두 귀족의 궁성 앞에 모여 살았을 것 같은데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





(프랑스인들은 자기 나라의 상징을 삶아먹는답니다 !!!  앙리 4세와 얽힌 요리, Poule au pot, 그러니까 닭 냄비 요리 chicken in pot 입니다.  마치 우리 삼계탕 비슷한 음식처럼 보이는군요.)




아무튼 그러니까 유럽인들이라고 아주 옛날부터 당연히 고기를 먹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닭이 프랑스의 상징이 된 것과 상관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고대 골 족의 상징이 수탉이었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  1589년 프랑스 종교 내란을 일단락 하고 프랑스 왕위에 오른 앙리 4세는, 대관식에서 이렇게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신께서 제게 천수를 누리게 해주신다면, 일요일마다 프랑스의 모든 농부들의 냄비에 닭이 들어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니까 그 시절에도 일반 농민들에게는, 소나 돼지는 고사하고 닭조차도 매일은 커녕 1주일에 1번 먹는 것이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다는 것이지요.  불행히도 앙리 4세는 57세의 나이에 광신도에게 암살되었습니다만, 사실 앙리 4세가 80까지 살았다고 해도 프랑스가 모든 농민이 1주일에 1번씩 닭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번영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당시에는 농업 생산력이 딸릴 수 밖에 없었거든요.  아무튼 신구교 양측의 화합을 위해 애썼던 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상 매우 존경받는 왕이 되었고, 그 왕의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 즉 '일요일의 닭'은 프랑스의 국가 이념 비슷한 것이 되어 닭이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고기국에 이밥 먹여주겠다'라고 한 대국민 약속은 현대의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비웃음거리가 되는데, 프랑스의 국가 이념이 그렇다고 하니 국민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인본주의가 아주 간지가 넘쳐 보입니다...)





(앙리 4세에게 Poule au Pot를 권하고 있는 저 여자는 Gabrielle d'Estrées 라는 귀부인으로서,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이 되기 전부터 그의 정부였던 여자인데, 앙리 4세의 아이를 낳다가 죽는 바람에 앙리 4세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고 합니다.)




앙리 4세가 죽은지 200년이 훨씬 지나 19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유럽인들은 여전히 고기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 수병들은 매주 쇠고기 4파운드(1.8kg)와 돼지고기 2파운드(0.9kg)를 배급받았다고 했지요.  이 고기들이 소금에 절여진 한 1년 정도 된 물건이라는 점만 빼면, 이 정도의 육류 배급은 정말 대단한 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먹는데 그리 돈을 아끼는 편이 아니지만, 그 정도로는 못 먹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생활이 당시 유럽 서민층의 일반적 식사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수병들이나 군인들은 직업 특성상 엄청 많이 먹어야 했거든요.  사실 저 정도의 양은 지나치게 많은 것이라서, 직업이 군의관인 저 소설 속 주인공 머투어린도 여러차례 수병들의 건강을 위해 고기 및 주류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고 언급하곤 했습니다.


같은 시기, 일반 농민들의 식생활은 영국 해군에 비하면 동물성 식품이 무척 귀했습니다.  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래도 채소나 곡물보다는 비싼 것이었으니까요.  전에 번역해서 올렸던 글 중 일부를 다시 발췌해보겠습니다.





Sharpe's Revenge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4년 프랑스) -----------


하지만 이날 밤, 루실은 불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샤프가 잘 먹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식탁 위에는 포도주, 빵, 치즈와 작은 햄조각이 있었는데, 프레데릭슨 대위는 햄을 조심스레 샤프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샤프는 프레데릭슨의 접시를 보고, 이어서 루실의 접시를 보았다.  "자네 햄은 어디 있지, 윌리엄 ?"


"카스티노 부인(루실)은 햄을 좋아하지 않으신답니다." 프레데릭슨은 치즈를 잘랐다.


"하지만 자넨 좋아하쟎아 ? 난 자네가 햄을 빼앗으려고 살인하는 것도 봤는데."


"영양분을 필요로 하는 건 소령님이쟎습니까." 프레데릭슨은 고집을 부렸다. "제가 아니고요."


샤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집에는 돈이 부족한 모양이지 ?" 그는 카스티노 부인이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리지 않고 했다.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소령님. 물론 땅은 많은데, 요즘은 그게 도움이 안되나 봅니다. 게다가 앙리의 약혼식에 가진 돈을 거의 다 써버렸나봐요."


"망할." 샤프는 햄을 우스꽝스럽도록 작은 세조각으로 잘랐다. 왼팔을 아직 제대로 쓸 수가 없어서 그의 동작은 매우 서툴렀다. 그는 햄을 세 접시 위에 공평하게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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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대가 지난, 19세기 중반 일반적인 유럽 농민의 식사도 그다지 큰 개선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밀가루로 만든 빵에 버터를 발라 먹을 정도면 유럽에서 평균 이상은 가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아일랜드에서는 감자에 버터를 발라 먹었으니까요.  아일랜드도 목축이 성행했기 때문에 그나마 버터라도 발라 먹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 버터와 우유는 있는데, 그 쇠고기는 어디 갔냐고요 ?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은 버터와 우유 정도만 먹을 수 있었고, 소는 영국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기 위해 영국에 수출해야 했지요.


19세기 후반인, 보불 전쟁 때 이야기를 보시지요.


포로들 (모파상 작, 배경 : 1870년 프랑스) -----------------------------------------------


(프랑스 시골 숲 속, 중년 부인이 사는 어느 외딴 집에 6명의 프로이센 정찰병들이 침입합니다.)


그녀는 솥에 물을 좀더 붓고, 버터와 감자를 넣었다.  그러고 난 뒤, 벽난로 안쪽 구석자리의 갈고리에 걸어둔 베이컨 한 덩어리를 꺼내어 두 조각을 내어, 그 중 반을 솥에 집어 넣었다.


6명의 병사들은 그녀의 움직임을 굶주린 눈빛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총과 헬멧을 한쪽 구석에 모아두고, 마치 학생들이 교실에서 말을 잘 듣듯이 얌전히 저녁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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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녁 식사라고 베이컨이 좀 나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수프는 모조리 하류 음식 취급을 한다는데, 이유는 수프라는 물건은 태생 자체가 적은 재료로 여럿이 나눠 먹기 위해 만든 요리라는 것이지요.  이 소설 속에서도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수프를 만드는 것이고요.


결국 유럽인들이 육류 위주의 식생활을 굳힌 것은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19세기 말엽이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지금부터 불과 150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유럽인 서민들에게 고기는 매우 귀한 음식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식민지 수탈의 결과로 유럽인들이 잘 먹고 잘 산다고 푸념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만, 그렇다고 영국이 인도의 소를 잡아오거나 이집트의 닭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니었지요.  확실히 식민지 수탈이 유럽 경제 발전의 기초가 된 것 같기는 합니다만, 거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으므로 일단 패스하겠습니다.


아무튼 결국 유럽인의 주식은 고기가 되었고, 반만년간 쌀을 주식으로 하던 우리나라도 (사실 쌀을 주식으로 한 건 몇백 년 안되었지요... 유럽인들이 빵을 주식으로 한 지 몇백 년 안된 것처럼이요) 최근 30여년 정도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 덕택에 육류를 많이 먹게 되었습니다.  대신 쌀 소비가 줄어서 큰 일이지요.  우리나라의 쌀 소비 저하 문제가 심각한 것처럼 유럽에도 밀 소비 저하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까요 ?





(한국의 쌀밥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바게뜨도 위기랍니다)




심각하답니다.  프랑스에서 1인당 하루 빵 소비량은 1880년에는 600 그램이었지만, 1950년에는 300 그램으로 줄었고, 1977년에는 180 그램으로 다시 줄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지 알아볼 엄두가 안나는군요.  다만, 우리나라는 그 과정이 불과 20~30년 사이에 급속도로 진행된 반면, 유럽은 거의 100년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유럽의 농가들은 그에 대해 적응할 기간이 길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이미 우리나라 농촌도 쌀보다는 돼지 사육과 채소 농사가 더 큰 매출을 올리고 있는데 특히 돼지 사육은 환경 오염이 심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최근에 어디서인가 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서 프랑스에서는 빵이 전멸하는 것이 아닐까요 ?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어르신들께서, 무조건 쌀밥을 먹어야 밥을 먹은 것으로 쳐주시는 것처럼 (가령 피자 3조각이나 먹고 왔다고 설명드리면 그럼 밥은 아직 안먹었네 하시면서 밥상을 차려주시는 분들이 아직 많지요), 프랑스에도 비슷한 정서가 있나 봅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왜 식사 때 빵을 먹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냥 먹어야 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을 한다는군요.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쌀밥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험상궂은 아저씨가 허버트 후버입니다.)




여담으로, '모든 냄비에 닭을' (Chicken in Every Pot) 이라는 캣치 프레이즈는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현직 대통령이자 공화당의 연임 후보이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가 썼던 선거 구호였다고 합니다.  이 문구는 스코틀랜드 작가인 알렉산더 스미스 (Alexander Smith)가 1863년에 쓴 책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세계를 다스린다면 무지와 전쟁이 사라지고 세금이 가벼워지며,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냄비에 닭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쓴 것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유래가 무엇이었건간에, 당시 경제 대공황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정말 먹고 살게 해줄 대안으로 민주당의 후보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택했다고 합니다.


결국 고기는 비싼 것이고, 동양이나 서양이나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부유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덴마크나 룩셈부르크, 스위스 같은 곳에서 고기를 가장 많이 먹을까요 ?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부유한 일본이 우리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보다 1인당 GDP가 훨씬 떨어지는 중국이 우리보다는 고기를 훨씬 많이 먹습니다.  명목당 GDP와 구매력 기준의 GDP가 다른 것도 원인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식생활이라는 것에는 경제적 배경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천년간 이어온 문화적 배경이라는 것이 무시될 수는 없는 것이라서 그렇지요.





(이렇게 쇠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행복한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요 ?  정답은 몬테비데오를 수도로 하는 나라입니다.)




참고로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쇠고기를 소비하는 나라는, 우루과이라고 합니다.  1인당 1년 소비량이 무려 60kg입니다.  근수로 따지면 무려 100근 !  대략 1주일에 2근씩 먹어치우는데요 !  참고로 개돼지처럼 먹어대는 미국도 1인당 1년에 43kg, 사람보다 소와 양이 훨씬 많다는 오스트레일리아도 39kg, 브라질도 36kg 정도입니다.  우루과이 바로 옆나라인 아르헨티나도 1인당 1년 소비량이 55kg 정도라고 하니, 솔직히 부럽습니다 !!!


(코렝트 주점 앞에 바리케이드를 친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작, 배경 1832년 파리 --------------------


6월 5일 아침, 항상 같이 지내는 친구들인 레글과 졸리는 코렝트(Corinthe) 주점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졸리는 지독한 코감기가 걸려 코가 막힌 상태였는데, 레글에게 막 옮기 시작한 상태였다.  레글은 닳아 헤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졸리는 잘 차려 입고 있었다.


그들이 코렝트 주점의 문을 밀고 들어간 것은 대략 오전 9시 경이었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마틀로트와 지블로트가 그들을 맞이했다.


"굴, 치즈와 햄 (Huîtres, fromage et jambon)."  레글이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주점은 비어 있었다.  그들 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졸리와 레글을 잘 알고 있던 지블로트는 식탁 위에 와인 한 병을 갖다 놓았다.


그들이 처음 나온 굴을 먹고 있을 때, 계단으로 올라오는 바닥의 햇치문에서 머리가 하나 나타나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다 거리에서 냄새를 맡았지, 브리 치즈의 맛있는 냄새말이야.  들어가겠네."


그랑테르였다.  그랑테르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집어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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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문학 작품에서 감동보다는 먹을 것 관련 이야기를 즐겨 찾는 편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도 위에 인용한 부분을 읽고 무척 인상이 깊었습니다.  이 짧은 인용 구절에서 여러가지 궁금한 점이 나왔거든요.  





1) 생굴인가 요리한 굴인가 ?


저 구절을 읽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저 굴이 생굴이었을까, 아니면 뭔가 튀기거나 삶는 등 요리한 것이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엔 냉장고도 고속버스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굴의 보존을 위해서라도 훈제 굴을 만들어 놓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실제로 훈제 굴이라는 음식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저 굴이 생굴이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에도 굴은 생으로 먹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용 구절에서처럼 레글이 그냥 '굴'이라고만 이야기했으므로, 저 굴은 익힌 것이 아니라 생굴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유럽인들은 원래 해산물을 날로 먹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지만 굴만은 예외입니다.  참 의이한 일이지요.  심지어는 생선 외에의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러시아인들조차도 굴은 날 것으로 먹습니다.  체호프(Chekhov)의 소설 '굴'에서는 19세기 후반, 모스크바 길거리의 어느 불쌍한 구걸 소년이 굴이 뭔가 집게 달린 갑각류라고 생각하면서도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굴이라도 먹겠다고 하자, 신사들이 '꼬마가 생굴을 먹는다고 ?  그거 참 재미있겠네'라며 꼬마에게 굴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짧은 소설은 제가 (요즘 휴가인지라) 번역해서 올려 볼게요.


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그 감독인 퍼거슨 경 관련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퍼거슨 경의 엄격한 식단 관리 중 하나로 경기 전에는 절대 조개 종류를 못 먹게 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조개 종류는 쉽게 상해서 식중독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다고 하더군요.  퍼거슨 경의 방침은 결코 무시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익히지도 않은 생굴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요 ?


비결은 간단합니다.  반드시 살아 있는 굴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자면 먹을 때 반드시 아직 살아 있는 굴의 껍질을 자기 눈 앞에서 까서 즉석에서 먹어야 하고요.  아마 레글과 졸리가 주문한 굴도 껍질 째로 나왔을 것입니다. 


제가 '그들이 처음 나온 굴을 먹고 있을 때' 라고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번역한 원문 구절은 'Comme ils étaient aux premières huîtres' 입니다.  이걸 영어로 번역하자면 'as they were at the first oysters' 입니다.  저는 저 aux (à + les = aux), 영어로 at을 '먹고 있을 때'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굴 껍질을 까느라 애를 쓰고 있을 때'라고 봐도 크게 흠은 없을 듯 합니다.  즉, 껍질 속에 살아있는 생굴을 까먹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굴을 까먹기 위해서는 그냥 일반적인 칼을 써도 되지만 끝이 가늘고 짧은 굴까기 전용 칼을 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굴 껍질의 뾰족한 쪽이 경첩이인데, 그 곳을 잘 더듬어 보면 좁은 홈 같은 것이 있으니 거기로 칼 끝을 밀어넣고 껍질의 아래 위를 연결하는 관자 힘줄을 끊고 칼을 비틀어 껍질을 열라는 것이지요.  그러고 난 다음이 아주 중요한데, 굴 껍질에 아주 가볍게 입을 대고 굴을 먹어야 하는데, 굴 껍질 안에 있는 액체도 놓치지 말고 다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굴의 체액은 그냥 바닷물만이 아니라 굴의 피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도 마셔야 제대로 굴을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파상의 단편 소설 '쥴 아저씨' (Mon oncle Jules)에 그런 부분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문득 아버지는 우아하게 차려 입은 두 숙녀에게 두 신사가 굴을 권하는 장면을 보았다.  누더기를 걸친 늙은 선원 하나가 칼로 굴을 따서 신사들에게 건네주면, 그 신사들이 다시 숙녀들에게 그걸 건넸다.  그 숙녀들은 고운 손수건으로 굴껍데기를 잡고 국물이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입술을 약간 삐죽 내밀어 굴을 아주 우아하게 먹었다.  그리고는 재빠르고 작은 동작으로 국물을 마시고는 껍질을 뱃전 밖으로 던졌다."


문제는 저 '쥴 아저씨' 속의 굴은 항구의 배 위에서 직접 까먹는 것이지만, 레 미제라블 속의 굴은 한참 내륙인 파리 시내에서 까먹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체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파리까지 생굴을 날랐을까요 ? 





2) 어촌에서 파리까지 생굴 운송이 가능했나 ?


레미제라블 시대는 아직 철도가 프랑스 전역에 상용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 어촌이라고 할 수 있는 디에프(Dieppe)까지의 거리인 170km를 마차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당시 마차가 사람이 걷는 것보다 빠르다고 해도, 기껏해야 짐마차인데 사람보다 2배 이상 빨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시속 8km 정도가 한계였을텐데, 쉬지 않고 달려도 26시간, 하루에 8시간씩 달린다고 해도 3일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어선에서 굴을 하역하고 분류해서 마차에 싣는 것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또 파리 시장에서 하역하고 판매해서 식당에 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니, 아무리 빨리 먹는다고 해도 레글과 조이가 먹었던 굴은 바닷물에서 건져진 지 최소 5일, 아마 7일은 지난 것이었을 것입니다.  얼음도 없던 시절, 이게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


가능했습니다 !  구글링을 해보니 대합이나 홍합은 빨리 죽어 쉽게 상해버리지만 의외로 굴은 물 밖에 나온 뒤에도 꽤 오래, 심지어 시원한 곳에서 습기만 잘 유지해주면 2~3주 동안이라도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껍질은 안 깐 상태에서의 이야기이지요.   현대 미국에서도 굴은 기차 등으로 장거리 수송할 때 얼음을 쓰지 않고 그냥 물에 적신 신문지로 덮어서 층층이 상자에 넣어 수송한다고 합니다.  얼음을 쓸 경우 수돗물을 얼려 만든 얼음이 녹으면서 흘러 들어가는 물 속의 염소 때문에 굴이 죽는다는 거에요.  아직 비행기나 고속 열차 등이 발명되기 훨씬 전인 19세기 후반에도 이런 식으로 해서 미국 동부 해안 체셔피크 만에서 잡은 굴을 증기 기관차를 통해 미국 중서부 콜로라도 주의 덴버까지도 운반했다고 하네요.


실제로 19세기 후반에 포르투갈로부터 영국으로 선박을 통해 살아있는 생굴을 대량으로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화물선이 증기선이었을지 범선이었을지 불확실한데, 포르투갈 북쪽의 대표적 항구인 오포르토(Oporto)로부터 런던까지의 약 1600km 항로를 시속 16km의 증기선이라고 해도 4일, 평균 시속 9km의 속도를 내는 범선일 경우 거의 7일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항구에서의 통관 절차 및 상하역, 판매를 위한 대기 시간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2주간은 굴이 살아있어야 그런 무역이 이루어졌겠지요.  그런 생굴 무역이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1868년, 포르투갈산 생굴 60만개를 싣고 영국으로 가던 화물선 르 모를레지엥(Le Morlaisien) 호가 프랑스 지롱드(Gironde) 강 하구에서 폭풍을 만나 대피하고 있었습니다.  폭풍 때문에 발이 묶인 화물선에서는 며칠이 지나자 일부 굴이 죽어 썩기 시작했지요.  화물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자 남은 굴이라도 건져야겠다고 생각한 선장은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지방 당국의 허가를 받고 죽은 굴 상자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살아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기존의 프랑스산 토종 굴 대신 더 생명력이 좋았던 이 포르투갈산 굴이 해안에 크게 번성했는데, 처음에는 프랑스 어부들이 외래종이라고 이를 매우 싫어했답니다.  그러나 먹어보니 이 포르투갈산 굴이 맛도 좋고 번식력도 좋아서, 1910년대까지 프랑스 굴 산업을 이끄는 주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묘사한 것처럼 레글과 졸리는 마차로 디에프에서 파리까지 1주일 걸려 운송한 굴을 별 거리낌 없이 신선하게 먹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3) 19세기 전반 당시 굴의 가격은 ?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마리우스는 가난하여 아침은 자기 방에서 빵과 날달걀 1개로 때웁니다.  저녁에 식사할 때도 와인 대신 물을 마시지요.  그 친구인 졸리와 레글은 시골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로 넉넉하게 사는 편입니다.  가난한 친구들이라면 아침을 멀쩡한 자기 집 놔두고 저런 주점에 가서 먹지는 않겠지요.  그렇다고 아침부터 굴을 먹다니요 !  굴 양식이 대량으로 이루어지는 지금도 굴은 비교적 비싼 음식입니다.  특히 생굴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는 오히려 굴이 상대적으로 싼 음식이라고 하고, 유럽에서는 생굴은 매우 비싼 음식이라고 하지요.  레미제라블 시대인 19세기 전반은 과연 어땠을까요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비쌌습니다만, 저 1832년 당시에는 조금 쌌을 수도 있습니다.  육지에서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서 키울 수 있는 곡물과 육류와는 달리, 바다에서 잡아들이는 어패류는 잡는 사람이 임자였으므로 아무런 절제 없이 모든 이들이 마구 남획을 했습니다.  가령 어떤 기록에 보면 대구라는 물고기는 먹성이 좋아서 한마리의 뱃속에서 고등어와 가자미가 너댓 마리, 게와 조개가 수십 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상상이 가십니까 ?  대구가 비록 큰 물고기이긴 하지만 그렇게 크진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렇게 컸다고 합니다.  인간이 바다에서 원양 어업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네덜란드 사람들이 북미 뉴펀들랜드 등에서 대구 어장을 발견한 이래 엄청난 남획이 이루어지면서 대구가 완전히 다 자라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요즘 대구가 작아졌을 뿐, 원래는 2m까지도 자라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참조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지금은 어장이 사실상 황폐화되어 버렸지만, 과거 전라도 해안 지방에는 번식기가 되면 참조기들이 바다 속에서 우는 소리에 잠을 설칠 정도로 고기가 많았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굴도 딱 그랬습니다.  굴은 일라이드(Illiad)에서 파트로클루스가 언급할 정도로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사람이 즐겨 먹던 조개류입니다.  게다가 한번 바위 등에 달라 붙으면 전혀 이동하지 않고 평생을 거기서 지내는 생물이지요.  그러다보니 남획되기 딱 좋았고, 실제로 씨가 마를 정도로 남획되었습니다.  그런 남획에 일조를 한 것이 프랑스 부르봉 왕가였습니다.  이들은 굴을 아주 좋아해서 많이 먹었고, 특히 지금도 질이 좋기로 유명한 컹칼(Cancale) 지방의 굴을 즐겨 찾았습니다.  그러나 덕분에 18세기 초 프랑스부터는 굴을 구경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급기야 1760년대에는 심지어 베르사이유에서조차 캉칼 굴을 구하기가 어렵게 되어 귀족들도 남획의 폐해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부족해지면 비싸집니다.  굴 가격은 엄청나게 뛰었을 것입니다.




(지도 왼쪽에 붉은 표식이 있는 지점이 컹칼입니다.  파리에서 꽤 머네요.)



그 결과, 여태까지는 아무런 법규가 없던 굴 채집에 규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759년, 굴이 알을 낳는 시기인 여름철을 낀 6개월, 즉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는 굴의 채집을 금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져서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R-달, 즉 영어 이름에 R이 들어가지 않는 달에는 굴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습니다만) 굴은 배란기에 독성을 띠므로 굴을 먹지 않는 것이 좋긴 한데, 그보다는 '이런 식으로 잡아 먹으면 굴 씨가 마르겠다'라는 절박함이 저렇게 '굴을 먹으면 안되는 달'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굴 관련 기사들을 찾다보니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전투에 임하기 전에 항상 생굴을 후루룩 까먹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건 잘못된 이야기 같습니다.  나폴레옹의 식습관을 묘사한 비서들, 즉 부리엔이나 콩스탕의 회고록에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술 특성상 기동전을 펼치다보니 전투 직전에는 항상 식량 부족에 시달려서 나폴레옹 본인도 감자 한 알도 제대로 못 먹고 전투에 임하는 일이 많았는데 내륙인 아우스테를리츠나 예나 등지에서 생굴을 까먹었다 ?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굴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나폴레옹 본인이 아니라 그 조카인 나폴레옹 3세 때문에 비롯된 이야기 같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별나게 굴을 좋아했다고 하며, 심지어 보불 전쟁에 패해 폐위되어 영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굴을, 그것도 가급적 프랑스산 굴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저 먹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폴레옹 1세와 3세는 둘 다 프랑스 굴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바가 큽니다.  삼촌인 나폴레옹 1세가 잦은 전쟁과 과도한 징집으로 어촌에 남자 씨를 말려버린 결과 굴을 채집할 사람이 부족해졌고, 덕분에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에는 프랑스 해안에 굴이 어느 정도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의 레글과 졸리도 아침부터 굴을 주문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1830년대 들어 다시 남획이 시작되면서 굴의 씨가 또 마르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이 좋아하는 굴을 좀더 싸게 많이 먹기 위해 당시 유명한 생물학 교수였던  코스트(Jean Jacques Marie Cyprien Victor Coste)를 불러 굴 양식 방안을 모색하게 했고, 그 연구비를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코스트는 현대적 굴 양식의 아버지로 우뚝 서게 되었으니, 나폴레옹 3세도 프랑스 역사에 긍정적으로 남긴 것이 오페라 가르니에 외에도 또 있긴 한 셈입니다.



(근대 굴 양식의 아버지 빅토르 코스트입니다.)




한편,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굴 열풍이 늦게 부는 바람에, 19세기 후반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굴을 많이들 먹었다고 합니다.  1842년 미국 뉴욕을 방문한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즈는 거리 곳곳에 가장 흔한 길거리 음식으로 생굴을 파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대략 12가구 당 하나 꼴로 굴 가판대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어서, 뉴욕 시민들은 정말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주 거리로 나가 생굴을 까먹었습니다.  특히 한밤중에 출출한 사람들이 즐겨찾는 야식으로 인기가 있었다고 하네요.  한밤 중에 차가운 굴이라 !  저도 굴은 좋아합니다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륙인 시카고의 풀턴 시장에도 굴 가판대가 성행했답니다.)



  

4) 분명히 6월인데 굴을 먹을 수 있나 ?


자,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6월 봉기는 분명 6월 5일에 시작되었고, 소설 본문에도 레글과 졸리가 굴을 주문한 날이 6월 5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히 6월은 R이 안 들어가는 달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프랑스어로도 R이 안 들어가는 달은 영어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6월에 생굴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  빅토르 위고가 글을 쓰다보니 실수한 것일까요 ?


불어     영어

janvier     January

février     February

mars     March

avril     April

mai     May

juin     June

juillet     July

août     August

septembre     September

octobre        October

novembre       November

décembre       December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빅토르 위고가 실수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산란기에는 굴에 독성이 생기므로 R이 안 들어가는 이름의 달에는 굴을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은 사실 근거가 모호한 말이라고 합니다.  단지 산란기에 굴은 살이 빠지고 마르므로 먹기에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여름철에는 바닷물의 수온이 올라 적조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고, 그 때문에 그 물 속에서 사는 굴에도 사람에게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병균이 붙어있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고요.  또 무엇보다 생굴을 먹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여름철에는 세균 번식이 더 왕성하게 잘 되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저 'R이 없는 달에는 굴을 먹으면 안 된다'라는 전설은 굴의 독 보다는 굴의 생육과 번식을 보호하려는 법령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고 합니다.  가령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각 지방마다 다릅니다만) 원래 금지령은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였습니다.  9월이나 10월에는 R이 들어가는데도 먹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누군가 머리 좋은 공무원이 '그냥 R이 안 들어간 달에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사람들 기억에 오래 남겠다'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홍보를 한 모양입니다.


특히 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32년에는 굴 보호를 위해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굴을 잡지 말라는 규제의 감독과 집행이 느슨해진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레글과 졸리가 비교적 싼 가격에 굴을 먹었나 봅니다.  결과적으로 빅토르 위고의 위대함에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Source :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작

쥴 아저씨, 모파상 작

http://www.telegraph.co.uk/food-and-drink/features/why-we-need-to-celebrate-british-native-oysters/

https://www.pinterest.co.kr/pin/106045766202394053/

https://www.theguardian.com/lifeandstyle/2011/sep/07/guide-to-eating-oysters

https://www.chowhound.com/post/raw-oysters-long-die-504718

https://ephemeralnewyork.wordpress.com/2017/01/05/everyone-in-19th-century-new-york-loved-oysters/

http://www.oysters.us/history1-usa.html

http://blog.michaelscateringsb.com/cooking_on_the_american_r/2009/12/charles-dickens-on-oysters.html

https://www.thekitchn.com/myth-busting-what-time-of-year-is-it-safe-to-eat-oysters-223123

IV


병사들의 사격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시민들도 약 15분간 응사하고 있었는데, 양측 모두 사상자는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갑자기, 마치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먼저 보병대에서, 이어서 기병대에서도 비정상적으로 위협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부대들이 갑자기 뒤돌아 선 것이다.


쿠데타를 기록한 역사편찬가들은 상티에 가(Rue du Sentier) 모퉁이의 열린 창문으로부터 병사들에게 총탄 한 발이 날아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노트르-담-드-르쿠브랭스 가(Rue Notre-Dame-de-Recouvrance)와 푸와소니에르 가(Rue Poissonnière)의 어떤 집 지붕으로부터 발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자그랑 가(Rue Mazagran)의 모퉁이의 높은 집 지붕에서 발사된 권총 사격이었다고도 한다.  그렇게 총탄의 발사 장소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분은 이 문제의 탄환, 어쩌면 문을 꽝 닫는 정도의 소음을 냈던 이 탄환이 옆 집에 살던 치과의사에게 맞았다는 점이다.  질문은 결국 이것으로 귀결된다.  그 대로변 집들 중 하나에서 발사된 권총이나 머스켓 소총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는가 ?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  많은 증인들은 그 점을 부인한다.






(사건이 벌어진 현장의 주요 도로명입니다.)




만약 총탄이 정말 발사되었다면,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그것이 원인이었는가, 아니면 그저 신호였는가 ?


어쨌건 간에, 이미 언급한 대로, 갑자기 기병과 보병, 포병들이 길가 인도에 늘어선 구경꾼 인파들을 향해 갑자기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고 또 예상하지 못 했지만, 아무런 동기 없이, 아침의 그 악명 높은 경고장에 쓰인 것처럼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살육이 시작되었다.  살육은 짐나즈 극장(Gymnase Theatre)으로부터 뱅 시누아(Bains Chinois, 중국 목욕탕이라는 뜻)까지, 그러니까 파리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파도 많은, 가장 번화한 거리 전체에 걸쳐 일어났다.






(뱅 시누아(Bains Chinois)는 1787년 지어진 파리의 유명 공중 목욕탕입니다.  1852년에 매각된 뒤, 그 다음해에 다른 투자용 건물을 짓기 위해 철거되었습니다.)




군대는 시민들을 근접 거리에서 쏘아 쓰러뜨렸다.


그건 무시무시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비명소리, 하늘을 향해 치켜든 팔들, 그 경악과 공포, 사방으로 달아나는 군중, 보도에 부딪힌 뒤 집 지붕까지 튀어 오르는 수많은 총알들, 순식간에 거리에 가득 쓰러진 시체들, 입에 시가를 문 채로 쓰러지는 젊은이들과 벨벳 가운을 입은 채 총을 맞은 여자들...  서적 판매원 두명은 자신들의 서점 문간에서 자신들이 뭔 일을 저질렀길래 이런 일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해되었다.  그 속에 누가 있든 상관없이 죽어버리라고 지하실 환기창에 대고도 사격이 가해졌으며, 시장은 포탄과 총알로 난장판이 되었다.  살랑드루즈 호텔(Hôtel Sallandrouze)은 폭발탄 포격을 받았고, 메종 도르(Maison d'Or, 황금의 집이라는 뜻)는 포도탄 포격을 받았으며, 카페 토르토니(Tortoni)에는 병사들이 난입했다.  대로에는 수백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리셜리외 가(Rue de Richelieu)에는 피가 냇물처럼 흘렀다.






(카페 Tortoni는 당시 파리 시내 문인들과 멋장이들이 모이던 명소였습니다.)




나레이터는 여기서 이야기를 잠깐 멈춰야겠다.


이 이름없는 행위들의 존재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을 기록관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범죄를 기록하고, 사건의 당사자를 호명한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나는 루이 보나파르트를 소환한다.  나는 생-타르노(Saint-Arnaud), 모파(Maupas), 모레(Moray), 마냥(Magnan), 카를레(Carrelet), 캉로베르(Canrobert), 그리고 레벨(Reybell), 즉 보나파르트의 공모자들을 소환한다.  나는 그 처형자들, 그 살인자들, 그 증인들과 희생자들, 달아오른 대포와 김이 나는 군도, 술에 취한 병사들과 유족들, 죽어가던 사람들, 살해된 사람들, 그 공포, 그 유혈, 그리고 그 눈물들을 모두 문명 사회의 법정으로 나오라고 소환한다.


단지 나레이터일 뿐인 이 사람의 말을, 그 나레이터가 누구이든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생한 사실들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사실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을 하도록 하게 하자.  우리는 그 증언을 듣도록 하자.





(생-타르노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습니다.  권력 장악을 위해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이 반란 공모자는 불과 3년 뒤 크리미아 전쟁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직을 수행하다 위암으로 병사했습니다.)




V


우리는 증인들의 이름을 인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러는지는 이미 밝혔다.  하지만 독자들은 진실의 진지하고 신랄한 억양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 증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인도 위를 세 발자욱 걷기도 전에, 그 옆으로 행군해가던 부대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남쪽을 향해 돌아섰고, 머스켓 소총을 들어올리고는 즉각 공포에 질린 군중들에게 발포했어요.


그 사격은 20분 정도 쉬지 않고 계속 되었습니다.  가끔씩 훨씬 더 우렁찬 대포 포성도 울렸어요.


첫번째 일제 사격 때, 저는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는 인도 위를 마치 뱀처럼 기어서 아무 문이나 열려 있는 첫번째 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건 와인 가게였어요.  산업 시장(Bazaar de l'Industrie) 바로 옆의 180번지였지요.  저는 거기 들어간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사격은 계속 되고 있었고요.


거기에는 약 50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여자 5~6명과 아이 2~3명도 있었고요.  세명의 불쌍한 친구들은 들어올 때 이미 부상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그 중 2명은 약 15분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고, 나머지 1명은 제가 4시에 가게를 나올 때도 살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결국 그 남자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군 부대가 어떤 사람들에게 발포한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가게에 모인 사람들 중 몇몇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기엔 여자도 몇몇 있었습니다.  그 중 2명은 그 구역에 저녁거리를 사려고 나온 것이었어요.  변호사의 어린 서기도 있었는데, 그는 고용인의 심부름을 나왔다가 거기 오게 된 것이었지요.  증권거래소(Bourse)의 주식 중개인 2~3명, 그리고 집 주인도 2~3명 있었습니다.  초라한 셔츠 차림이거나, 혹은 아무 셔츠도 입지 못한 일꾼 몇 명도 있었습니다.  그 가게로 대피한 불행한 사람들 중 하나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약 30세 정도 되는, 회색의 짧은 외투를 입은 금발의 남자였습니다.  그는 포부르 몽마르트르(Faubourg Montmartre)에 있는 그의 가족과 식사를 하러 그의 아내와 함께 가던 중에 군 부대가 거리를 가로질러 행군하는 바람에 걸음을 멈추게 된 것이었지요.  처음에 사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와 그의 아내 둘 다 쓰러졌습니다.  그는 일어나 그 와인 가게로 끌려 들어왔지만, 그의 아내는 옆에 없었습니다.  그의 절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달래봐도 그는 계속 아내를 찾으러 달려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달라고 고집했지요.  밖의 거리는 포도탄 포격이 휩쓸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1시간 동안 그를 우리와 함께 있도록 붙잡아 두는 것 뿐이었어요.  다음 날, 저는 그 사람의 아내가 결국 살해되었고 그 시신은 시테 베르제르(Cité Bergère)에서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약 20일 뒤에, 저는 그 불쌍한 남편이 보나파르트에게 복수하겠다고 협박했다가 체포되어 브레스트(Brest) 항구로 보내진 뒤, 결국 카이엔(Cayenne)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와인 가게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왕정주의에 찬성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저는 공화주의자라고 밝힌 사람은 딱 2명을 보았는데, 하나는 전에 레폼(la Réforme, 개혁이라는 뜻)이라는 곡을 작곡한 므니에르(Meunier)라는 나이든 작곡가와 그의 친구 딱 둘이었습니다.  약 4시 쯤 되어, 저는 그 가게를 나왔습니다."






(카이엔은 적도 인근 남미 프랑스령 식민지인 기아나에 있는 일종의 감옥섬으로서, 흔히 악마의 섬(Île du Diable)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루이 나폴레옹이 집권한 1852년, 주로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해 개설되었고, 드레퓌스 사건의 그 드레퓌스 대위도 여기서 복역했습니다.  사진 속의 오두막이 드레퓌스가 살던 곳이라고 합니다.  영화 빠삐용의 배경도 바로 카이엔입니다.)




마자그랑 가(Rue de Mazagran)에서 권총 발사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증인 하나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 권총 소리는 병사들에게 모든 가옥과 그 창문에 일제 사격을 퍼부으라는 신호였습니다.  그 무차별 사격은 최소한 30분간 계속 되었어요.  사격은 생-드니 대문(Porte Saint-Denis)부터 카페 그랑 발콩(Café du Grand Balcon)까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곧 포격도 시작되었지요."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3시 15분 경,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났어요.  생-드니 대문을 향하고 서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짐나즈 쪽 집들과 퐁-드-페르 관(Maison du Pont-de-Fer, 철교의 집이라는 뜻), 그리고 생-파르 호텔(Hôtel Saint-Phar)을 향하더니, 생-드니 가(rue Saint-Denis)부터 리셜리외 가(rue Richelieu)까지의 반대 편에 있는 군중들에게 즉각 연속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불과 몇 분만에 인도 위는 시체들로 가득했어요.  가옥들은 총알 구멍이 무수히 나 있었고, 군 부대는 약 45분간 미친 듯이 계속 총을 쏘아댔습니다."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첫번째 포격은 본느-누벨(Bonne-Nouvelle)의 바리케이드에 가해졌는데, 이것이 다른 부대들에 대한 신호가 되었어요.  군 부대들은 머스켓 소총 사정거리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어떤 말로도 그런 야만적 행동을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을 하고 그 말로 표현 못 할 행위의 진실에 대해 증언하려면 그 현장을 목격했어야만 해요.


병사들은 수천발을 -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지만 - 아무 짓도 하고 있지 않던 군중들에게 쏘았어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요.  아주 깊은 인상을 주려는 의도였지요.  그게 전부였어요."


또 다른 증인도 말한다.


"전반적인 흥분이 고조에 달했을 때, 전열 보병대에 이어 기병대와 포병대가 대로에 도착했어요.  부대 중 누군가가 머스켓 소총을 발사했는데, 화약 연기가 수직으로 솟은 것으로 보아 그것이 공중을 향해 발사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무 경고없이 군중들에게 발포하고 총검으로 찌르라는 신호였습니다.  이것은 군부가 학살을 시작하는 계기를 원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또 다른 증인은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포도탄(mitraille, 산탄)이 장전된 대포가 르 프로페트(Le Prophète, 예언자라는 뜻)라는 상점부터 몽마르트르 가(Rue Montmartre)까지의 상가 전면을 찢어놓았습니다.  본느-누벨 대로로부터 메종 비으코크(Maison Billecoq)에도 포격을 가한 것이 틀림없었어요.  포탄이 오뷔송(Aubusson) 쪽의 벽 모퉁이를 때리고 벽을 관통한 뒤 집 내부까지 뚫었거든요."






(포도탄 또는 캐니스터탄이라고 불리는 이 대포알은 사진처럼 깡통 속에 작은 쇠구슬 수십개를 담은 것입니다.  대포에서 발사하면 마치 대형 산탄총을 쏜 것처럼 그 앞에 있는 적군 수십명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중략...  (이런 증언들이 끝도 없이 계속 됩니다...)


"계속 가세요." 보호를 요청한 선량한 시민들에게 장교들이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시민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가던 길을 재빨리 걸어갔지요.  하지만 그건 죽음을 뜻하는 암호일 뿐이었습니다.  불과 몇 발짝 걷기도 전에 총에 맞아 쓰러졌거든요."


다른 증인이 말한다.  "대로에서 사격이 시작되던 순간에, 카펫 창고 근처에 있던 한 서점 주인이 서둘러 서점 문을 닫고 있었어요.  그때 피할 곳을 찾던 몇 명의 군중들이 거기로 들어가려 했고, 전열 보병인지 헌병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총을 쏜 사람이 그 중에 있지 않나 의심했어요.  군인들은 서점에 난입했고, 서점 주인은 상황 설명을 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는 혼자 그의 서점 바로 앞으로 끌려 나왔고, 그의 아내와 딸은 그가 막 총에 맞아 쓰러질 때에야 그와 군인들 사이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고, 그 딸은 코르셋의 살대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후 그의 아내는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들었어요."


이제 소름 없이는 묘사할 수 없는 세 건의 증언으로 마무리를 짓자.


"이 공포스러운 사건의 시작 부분의 15분간, 사격의 격렬함이 잠깐 다소 느슨해졌는데, 이때 부상당해 쓰러진 사람들 중 몇몇은 일어나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르 프로페트(Le Prophète) 앞에 쓰러진 사람들 중 2명이 일어났습니다.  한 명은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상티에 가(Rue du Sentier)를 통해 달아났어요.  그가 달아나는 중에도 총알이 빗발쳐서 그 중 하나는 그의 모자를 날려버렸지요.  다른 한 사람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몸을 일으키는 것까지만 성공했습니다.  그는 손을 꼭 쥐고 병사들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요.  하지만 그는 즉각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음날, 르 프로페트의 몇 미터 되지도 않는 베란다 옆면에 1백발 이상의 총알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출처 : http://www.napoleontrois.fr/dotclear/index.php?post/2006/04/04/115-le-coup-d-etat )




"샘이 있는 몽마르트르 가의 끝 부분에서 약 60보 정도 떨어진 곳에, 남자와 여자, 엄마와 아이들, 어린 소녀들의 시체가 60구 정도 있었어요.  이 불행한 시신들은 대로 맞은 편에 배치된 군 부대와 헌병들이 발사한 첫번째 일제 사격의 희생자들이었지요.  그들은 첫번째 사격이 시작되자마자 모두 달아났지만, 불과 몇 발자욱 못 가서 쓰러졌지요.  젊은 남자 하나는 관문 안으로 피해서 대로 쪽으로 튀어나온 벽 뒤에 숨으려고 했어요.  그는 몸을 꼿꼿이 세워 몸이 벽 바깥으로 드러나는 부분을 최소화하려고 무지 애를 썼지만, 약 10분 정도 조준이 형편없는 사격을 받던 끝에, 그도 결국 총에 맞고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어요."


또 다른 증인이다.


"퐁-드-페르 관(Maison du Pont-de-Fer)의 판유리와 창문은 모두 깨졌습니다.  그 마당에는 공포에 질려 미쳐버린 남자 하나가 있었어요.  지하실에는 거기로 대피한 여자들이 가득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가게와 지하실 환풍창에 대고 총을 쐈습니다.  토르토니(Tortoni)부터 짐나즈(Gymnase) 극장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이 1시간 정도 계속 되었습니다."






(짐나즈 극장(Théâtre du Gymnase Marie-Bell)은 1820년 설립된 파리의 유서깊은 극장입니다.  지금도 공연을 하는 극장이라고 합니다.)



***

파리 같은 세계 문명의 중심 도시에서도 저런 흉악하고 야만적인 쿠데타와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 진상을 숨기려는 음모도 뻔뻔스럽게 실행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도 저런 비극을 겪었고, 그 진상을 왜곡하려는 노력은 아직까지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저런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합시다.


II


아침 이른 시간부터 - 여기서는 미리 획책된 것이 분명한데 - 모든 거리의 모퉁이마다 이상한 플래카드들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런 플래카드의 내용을 우리가 옮겨적었으므로, 독자들은 그걸 기억할 것이다.  가끔씩 파리 시내에 혁명의 대포 소리가 울려퍼지고, 정부가 아주 절박한 조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60년 동안에도, 이런 플래카드는 목격된 적이 없었다.  그 내용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모든 집회는 아무 사전 경고 조치 없이 무력으로 해산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문명의 대도시인 파리 시민들은 인간이라면 자신의 범죄를 그런 극단적인 선까지 밀어붙일 것이라고는 쉽사리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고문은 그저 혐오스럽고 야만적인 협박용이라고 간주되었고, 거의 코미디 수준이라고들 얕보았다.


하지만 대중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전체 계획이 다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 경고는 매우 진지한 것이었다.


12월의 인간에 의해 준비되고 저질러진, 이 전대미문의 드라마의 무대가 된 장소에 대해서 한마디 첨언하겠다.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글자 그대로 성 마틴 대문이라는 뜻입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시듯이, 노트르담이 있는 시테 섬 북쪽에 있습니다.)



마들렌(Madeleine)에서 포부르 푸아소니에르(Faubourg Poissonniere)에 이르는 대로는 막혀 있지 않았다.  짐나즈(Gymnase) 극장에서 포르트 생-마르텡(Porte Saint-Martin)까지의 부분은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고, 봉디 가(Rue de Bondy), 네슬레 가(Rue Neslay), 륀 가(Rue de la Lune)도 마찬가지였으며, 생-드니(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에 접하거나 연결된 모든 거리가 다 막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틴 너머의 대로는 샤또 도(Chateau d'Eau) 반대편에서 시작된 바리케이드 하나만 빼고는 다시 바스티유(Bastile)까지 그냥 뚫려 있었다.  포르트 생-드니(Porte Saint-Denis)와 포르트 생-마르틴(Porte Saint-Martin)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7~8개의 바리케이드가 있었다.






(포르트 생-마르텡의 위치를 보여주는 구글 지도입니다.  그 바로 서쪽으로 포르트 생-드니가 있습니다.) 






(구글 덕분에 앉아서도 파리 시내 구경이 가능합니다.  사진에 보이는 길 한복판의 두 대문 중, 왼쪽의 좀더 큰 것이 포르트 생-드니, 오른쪽 것이 포르트 생-마르텡입니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때, 포르트 생-드니 주변 4개 도로가 모두 시민들이 쌓은 바리케이드로 막혔습니다.)




포르트 생-드니는 사면이 4개의 바리케이드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 4개의 바리케이드 중 마들렌 쪽을 향한 것은 진압군의 첫번째 공격을 받을 운명이었는데, 그 거리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세워져 있었고, 그 왼쪽 끝은 륀 가, 오른쪽 끝은 마자그랑(Mazagran)에 접하고 있었다.  4대의 합승마차(omnibus), 그리고 5대의 가구 운반마차, 내던져진 전세 마차(hackney coach) 감독관 초소, 그리고 부서진 간이 공중화장실(Vespasian column), 대로변의 공공 벤치, 륀 가의 계단 판석, 군중들이 통째로 뜯어낸 쇠로 된 인도 가드레일 등이 이 요새의 재료였다.  이런 바리케이드로는 그 넓은 대로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도로는 매커덤(macadam) 방식으로 포장된 것이라서, 보도블럭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 바리케이드는 대로 양쪽 끝까지 뻗어 있지도 않아서, 마자그랑 가로 향한 집 한 채를 짓고 있던 쪽으로는 큰 빈 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빈 틈을 본 어느 잘 차려 입은 젊은이가 공사용 비계에 올라가, 혼자 힘으로, 입에 담배도 그대로 문 채로 아주 여유있게, 그 비계의 밧줄을 모두 끊어버렸다.  인근의 창문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웃으며 이 청년에게 박수를 보냈다.  한 순간 뒤 이 비계는 큰 소리와 함께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틈을 막았고, 이로써 바리케이드가 완성했다.






(마카담(macadam)으로 포장된 도로입니다.  일정한 크기로 잘게 부순 돌을 깐 도로입니다.  그 이름이 혹시 마카다미아 견과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와는 전혀 무관하고, 이런 도로 포장법을 최초로 만든 스코틀랜드 출신 엔지니어 이름이 존 매커덤(John McAdam)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도 학생들이 보도 블럭을 뜯어다 경찰에게 던졌기 때문에, 대학 주변의 도로에서 보도 블럭을 모두 없애고 인도까지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원래 공중화장실이라는 것이 파리에 처음 들어선 것은 1770년 경 '신사들을 위한 소변기' 수준이었습니다.  형태도 정말 나무통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30년 경 파리 시 장관이었던 랑뷔토 백작(comte de Rambuteau)이 칸막이가 달린 소변기를 도입했습니다.  그의 정적들은 이를 비웃어 이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랑뷔토 기둥'(la colonne Rambuteau)이라고 불렀는데, 랑뷔토 백작은 이를 맞받아쳐 로마 시내에 최초의 공중 소변 화장실을 만들었다는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베스파시아누스 기둥'(la colonne vespasienn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이 굳어져, 이런 남성용 간이 화장실을 베스파시아누스 기둥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이 보루가 완성되는 동안, 약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무대 문을 통해 짐나즈 극장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에 거기의 옷장에서 찾은 머스켓 소총 몇 자루와 북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것들은 극장 용어로 '소도구'라 불리던 것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북을 쥐고 전투 준비를 알리는 북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뒤집어 놓은 간이 화장실들과 옆으로 넘어뜨린 마차, 뜯어낸 블라인드와 셔터, 낡은 무대배경 등으로 본느-누벨 대로(Boulevard Bonne-Nouvelle)의 초소 반대편에 일종의 전초진지 같은 작은 바리케이드, 아니 작은 반달 모양의 진지를 지었다.  여기서는 푸아소니에르 대로와 몽마르트르 대로 뿐만 아니라 오뜨빌 가(Rue Hauteville)까지도 관측이 가능했다.  군 부대는 아침에 그 초소에서 철수한 상태였다.  그들은 그 초소의 깃발을 뽑아와 바리케이드에 꽂았다.  그 깃발이 나중에 쿠데타의 신문들이 '붉은 깃발'로 부른 그 깃발이었다.


약 15명의 사람들이 이 전초 진지에 위치를 잡았다.  그들에게 머스켓 소총은 있었으나 탄약이 없었고, 있더라도 매우 적은 양이었다.  그들 뒤에는 포르트 생-드니를 커버하는 큰 바리케이드를 약 100여 명의 전투원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2명의 여자와 한 명의 백발 노인도 목격되었다.  그 노인은 왼손에 든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오른손에는 머스켓 소총을 쥐고 있었다.  두 여자 중 하나는 어깨에 군도(sabre)를 맨 채로 길 옆 보도의 가드 레일을 뜯어내는 것을 돕다가 쇠막대의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오른손의 손가락 3개를 베었다.  그 여자는 군중들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며 외쳤다.  "공화국 만세 ! (Vive la Republique!)"  다른 여자는 바리케이드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위에 꽂힌 깃대에 몸을 기대고는, 머스켓으로 무장한 셔츠 차림의 두 남자가 받들어 총을 해주는 사이 좌익 대표단이 발행한 무장 봉기 호소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군중들은 박수를 쳤다.  


이 모든 일들은 정오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일었났다.  바리케이드 이 쪽에서는 대로 양쪽의 보도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떤 곳은 조용했고, 어떤 곳에서는 "술루크 타도 ! 배신자 타도! (à bas Soulouque! à bas le traître!)"를 외치고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것은 수염난 남정네가 아니라 저렇게 서민들이 쓰는 붉은 고깔 모자를 쓴 마리안느라는 여성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명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입니다.) 




가끔씩 애도 행렬이 군중 속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 행렬은 병원 직원들과 군인들이 나르는 밀폐형 가마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선두에는 긴 막대를 든 남자들이 행진했다.   그 막대 끝에는 큰 글씨로 '군 병원 활동'이라고 적힌 파란색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가마를 덮은 커튼에는 '부상자, 앰뷸런스'라고 적혀 있었다.  날씨는 흐리고 비가 내렸다. 


이때 파리 증권 거래소(la Bourse)에는 많은 군중이 있었다.  모든 벽에는 벽보 붙이는 사람들이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는 공문을 붙이고 있었는데, 시장 상승세를 바라던 주식 중개인들조차도 이런 벽보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을 정도였다.  갑자기, 지난 2일 간 쿠테타를 열정적으로 환영하던 잘 알려진 투기꾼이 마치 도망자처럼 하얗게 질리고 숨이 찬 모습으로 나타나 소리쳤다.  "저들이 대로에서 발포하고 있어요 !"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았다.  






(파리의 증권 거래소인 부르즈(Bourse de Paris)입니다.  브롱냐르 궁(Palais Brongniart)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건물은, 원래 캥캉푸아(Quincampoix) 등 몇몇 곳에서 벌어지던 증권 거래를 통합하기 위해 나폴레옹 1세가 알렉상드르 브롱냐르에게 의뢰하여 지은 것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이 건물 디자인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는데, 정작 건축가들의 비평은 고리타분하다는 등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관련 source : http://carolineld.blogspot.kr/2016/08/last-relief.html 

https://en.wikipedia.org/wiki/Macadam

https://en.wikipedia.org/wiki/Paris_Bourse


(지난 편에서 이어지는 제롬 보나파르트의 편지 내용입니다.)


"조카여, 프랑스 국민들의 피가 흘렀구나.  그 확산을 멈추기 위해 국민들에게 진지하게 호소하렴.  너의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단다.  국민투표에 대해 언급했던 너의 두번째 선언문을 국민들은 보통 선거권의 재확립이라고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화국 헌법에 기여할 의회가 없다면 자유는 어떤 것도 보장할 수 없단다.  군대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어.  이제야말로 도덕적인 승리로서 실질적 승리를 완성할 순간이다.  패배한 경우엔 할 수 없는 것을 승리했을 때 해야 한다.  과거 정당들을 해체한 뒤에 국민 전체를 복권시키렴.  보통 선거권이 진지하고 자유롭게 행사되어, 공화국을 구할 대통령과 제헌 의회를 선출할 거라고 선포해야 한다.  


내가 이 편지를 너에게 쓰는 것은 내가 형 나폴레옹을 기억하고, 그가 내전을 얼마나 혐오했는지 공감하기 때문이란다.  내 오랜 경험을 믿으렴.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후세가 너의 행동을 평가할 거라는 것을 기억하려무나.


너를 사랑하는 숙부, 제롬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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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Nicolas Fabvier는 나폴레옹 밑에서 복무한 장교로서 페르시아와 오스만 투르크에 사절로 가기도 했습니다.  1851년 쿠데타 당시는 이미 퇴역한 상태였고,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보수파 정당의 일원이었습니다.)

 



마들렌 광장(Place de la Madeleine)에서는 두 대표 파비에(Fabvier)와 크레스텡(Crestin)이 만나 대화했다.  파비에 장군은 크레스텡에게 4문의 대포가 원래와는 반대 방향으로 포구가 돌려져 있는 것을 지적하고는, 즉각 그 대로를 떠나 엘리제 궁으로 말을 달렸다.  "엘리제 궁이 이미 방어 태세에 들어간 것일까 ?" 장군이 말했다.  크레스텡은 레볼뤼시옹 광장(Place de la Revolution, 혁명 광장, 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의 다른 쪽에 있는 의회 의사당의 전면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장군, 내일이면 우린 저기에 있을 겁니다."  엘리제 궁의 마굿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몇몇 다락방에서는 3대의 여행 마차가 이른 아침부터 짐을 싣고 말들을 정렬시킨 뒤, 좌마기수까지 이미 안장 위에 오른 채로 대기 중인 것이 목격되었다.  





(여기서 레볼뤼시옹 광장으로 불린 콩코르드 광장입니다.  광장 북서쪽에는 저 너머에는 대통령 궁인 엘리제 궁이, 그리고 남쪽의 센느 강 너머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의회 의사당이 된 부르봉 궁 Palais Bourbon이 있습니다.)




실제로 충격이 대단했고, 분노와 증오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뭔가 하나만 더 터진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몰락할 판국이었다.  그저 그 날 하루가 그대로 끝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쿠데타는 절망 상태에 근접해 있었다.  최후의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다. 과연 그는 무얼 할 생각이었을까 ?  그는 뭔가 큼직한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것으로 반격을 해야 했다.  그는 이대로 망해버리거나, 공포의 수단을 써서 위기를 벗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엘리제 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도 당시 현장에 있었던, 1815년 나폴레옹 1세의 두번째 퇴위가 있었던 웅장한 응접실 근처에 있는 1층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가끔 문이 조금 열리고 그의 부관인 로게(Roguet) 장군이 흰머리칼이 무성한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이 장군이 문을 열도록 허락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장군은 점점 더 경악스러워지는 소식을 들고 왔고, 하던 말을 자주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또는 '일이 꼬이고 있습니다' 등의 말로 끝맺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벽난로를 활활 피워놓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장착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앉아 있던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고개를 반쯤 돌리고는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계속 다음과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내 명령대로 실행하라 전하게."  






(Faustin Soulouque는 당시 아이티의 황제였습니다.  1847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장군이었던 그는 이 시건 바로 2년 전인 1849년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독재자였고, 프랑스에서는 비웃음을 사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로게 장군이 나쁜 소식을 들고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선 것은 거의 1시 경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로게 장군 자신이, 자기가 모시던 상관의 침착함과 함께 직접 세세히 묘사를 했다.  그는 왕자(Prince President를 공식 호칭으로 썼던 루이 나폴레옹을 가리킴)에게 파리 중심부의 바리케이드들은 여전히 버티고 있고 오히려 사람의 수가 늘고 있으며, 거리마다 '독재자 타도'를 외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감히 실제로 외쳐지던 '술루크(Soulouque) 타도'라는 구호를 보고하진 못했다.  그리고 군 부대가 이동하는 곳마다 힐난하는 고함소리가 그들을 맞았고, 주프롸 회랑(Galerie Jouffroy)에서는 어느 소령 하나가 군중들에게 쫓겨다녔으며, 카디날 카페(Cafe Cardinal)에서는 참모 대위 하나가 말에서 끌어내려졌다고도 보고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장군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네 !  생-타르노(Saint-Arnaud) 장군에게 내 명령을 전하게."








(Galerie Jouffroy는 지금도 유명한 파리 시내의 지붕 덮힌 140m 정도 되는 통로입니다.   쿠데타 6년 전인 1845년에 만들어진 이 길은 최초로 유리와 강철로만 만들어진 지붕 회랑으로 유명합니다.) 




이 명령이란 무엇이었을까 ?  우린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필자는 고통스럽고 주저하는 마음으로 펜을 내려둔다.  이제 우리는 그 서러운 날, 12월 4일의 혐오스러운 위기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쿠데타의 성공을 낳은 그 괴물 같은 행위에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루이 보나파르트가 미리 획책했던 음모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을 밝히려 한다.  12월 2일을 기록했던 모든 사료 편찬자들이 숨겨왔고, 마냥(Magnan) 장군이 보고서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 파리에서조차도 목격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몰래 속삭이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것을 폭로하고, 서술하고, 묘사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무시무시한 것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12월 2일은 어둠으로 덮힌 범죄이고, 침묵 속에 뚜껑이 닫힌 관이며, 그 틈 사이로는 피가 솟구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관 뚜껑을 열려고 한다.





(5.18 광주 학살을 연상시키네요...  당시에도 그런 학살 사건을 은폐하고 그걸 밝히려는 노력을 탄압했습니다.  빅토르 위고가 게른제 섬으로 망명가서 쓴 이 '꼬마 나폴레옹'은 몰래 프랑스로 반입되어 숨어서들 읽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또 다음 기회에...)


요즘 시국에 편승하여, 빅토르 위고의 'Napoleon Le Petit' 즉 '꼬마 나폴레옹'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해 몇 편에 걸쳐 올립니다.  이 책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건 보쥬 광장 거리에 있는 빅토르 위고 기념관에서 제가 찍은 당시 풍자화 사진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서 지지했으나, 그가 1851년 12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영구 집권을 하자 그에 저항하다가 영국령 게른제 섬으로 망명했습니다.  이 신문 풍자 만화에서 빅토르 위고는 12월에 파리 길바닥에 흐른 피를 나폴레옹 3세가 자세히 보고 냄새 맡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저 만화 제목인 Le Nez Dedans 은 Nose in 으로서, '코를 들이대 !' 정도의 뜻입니다.)




1848년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의 오를레앙 왕조가 무너지자, 프랑스는 공화국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동안 억눌린 각계 각층의 요구 폭발로 인한 대혼란에 빠져 듭니다.  이 와중에, 기존 정치인들의 예상과 달리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좀 덜 떨어진 인물로 보았던 루이 나폴레옹이 위대한 나폴레옹의 후광을 업고 제2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당시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의 재임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1852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1851년 말 루이 나폴레옹은 개헌을 통해 자신의 집권 연장을 꾀하지만, 의회를 장악한 자신의 정적들이 그를 좌절시키자, 치밀한 준비 하에, 백부인 나폴레옹 1세가 황제에 등극한 날이자 아우스테를리츠 전투가 벌어졌던 날인 12월 2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에 대해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곳곳에서 쿠데타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를 비롯한 지식인들도 이 저항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결국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수백명의 사망자를 내며 봉기는 실패했고, 1년 후인 1852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국을 폐지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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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의 범죄


"12월 4일"


저항은 예상과는 다른 대규모가 되어 버렸다.  


전투는 매우 위협적으로 진행되었다.  더 이상 소규모 국지전이 아니라, 아예 대규모 전투가 되어 버렸고, 사방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엘리제(Élysée)와 다른 지역구에서, 사람들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리케이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쌓아 올렸다.


파리 중심부는 임시로 만든 보루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바리케이드를 길을 막은 구역들은 커다란 사다리꼴 모양을 형성했다.  알르(Halles)와 랑뷔토 가(Rue Rambuteau)를 한쪽으로 하고, 대로들을 다른 쪽으로 했으며, 동쪽으로는 탕플 가(Rue du Temple)를, 서쪽으로는 몽마르트르(Rue Montmartre)를 경계로 했다.  그물망처럼 엮인 이 거대한 거리들은 모든 방면에서 보루와 참호로 차단되어 있었고, 매시간이 흘러갈 때마다 점점 더 무시무시한 모습을 띠었고, 요새처럼 변해갔다.  바리케이드의 전투원들은 센느 강 부두까지 전초병들을 내보냈다.  


이 사다리꼴 구역 밖에서는 바리케이드가 포부르 생-마르텡(Faubourg Saint-Martin)과 운하 인근까지 뻗어 있었다.  저항 위원회에서 대표자로 드 플로트(Paul de Flotte)를 보내온 학교 구역은 그 전날 저녁 때보다도 더 보편적으로 봉기에 나선 상태였다.  교외 지역에도 불이 붙고 있었다.  바티뇰(Batignolles)에서는 '무기를 들라'는 북소리가 울려퍼졌고, 마디에 드 몽조(Madier de Montjau)가 벨빌(Belleville) 지역을 일깨우고 있었다.  샤펠-생-드니(Chapelle-Saint-Denis)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중이었다.  상업 지구에서 남자들은 머스켓 소총을 날랐고, 여자들은 붕대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어 !  파리가 봉기했어 !"  B---가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로 저항 위원회에 들어서며 외쳤다.  





(사진 속의 인물은 마디에 드 몽조 Noël Madier de Montjau 입니다.  이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도 이 무장 봉기 이후 망명을 해야 했고,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는 1870년 이전에는 프랑스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항 위원회는 쿠데타가 발생한 12월 2일 밤에 조직된 것으로, Carnot, de Flotte, Jules Favre, Madier de Montjau, Michel de Bourges, Schœlcher, 그리고 Victor Hugo가 대표로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각기 다른 지역구의 모든 위원회가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다.  저항 위원회의 위원들은 심사숙고하며 사방의 전투에 대해 명령과 지시를 전달했다.   시민들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아직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있던 이 모든 사람들이 열정과 기쁨에 가득차 서로 포옹하기도 했다.  


쥴 파브르(Jules Favre)가 말했다.  "자, 이제 정규군 연대 하나만 우리 편으로 넘어오면 루이 보나파르트는 끝장이야."  미쉘 드 부르쥬(Michel de Bourges)도 말했다.  "내일이면 공화국이 시청(Hotel de Ville)을 접수할 걸세."  모든 것이 흥분의 도가니였다.  가장 조용한 지역구에서도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포고문이 찢겨져 나갔고, 법령 발표문이 훼손되었다.  보부르 가(Rue Beaubourg)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이 창문에서 "용기를 내세요 !"라고 소리쳤다.  소요 사태는 포부르 생 제르맹(Faubourg Saint-Germain)까지 퍼졌다.  파리 경찰 조직의 중심부였던 제뤼살렘 가(Rue de Jerusalem)의 경찰청 본부는 전체가 벌벌 떨고 있었다.  공화국이 승리할 것 같은 가능성이 보였으므로, 경찰의 고민은 엄청났다.  경찰청 안마당에서, 사무실에서, 그리고 복도에서, 서기들과 경관들(sergents-de-ville)은 코시디에르(Caussidiere)에 대해 애정어린 후회를 마음에 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Marc Caussidière는 언론인으로서 1848년 7월 혁명 때 바리케이드에서 싸우다 경찰 본부를 점령한 뒤 임시 정부에 의해 경찰 총장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런 소란 속에서, 경찰 총장인 모파(Charlemagne de Maupas)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쿠데타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봉기에 대해 험악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그가 뒷걸음질치며 꼬리를 내렸다.  아마도 그는 겁에 질려 거리의 소란과 차오르는 반란, 정의의 편이 일으킨 성스럽고 적법한 반란 소식에 귀를 기울였던 모양이었다.  그가 허둥거리며 주저하는 동안 그의 명령도 슬슬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의 전임자이던 카알리에(Carlier)는 그런 그를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  "저 불쌍한 젊은 친구가 배탈이 난 모양이군."





(Charlemagne de Maupas는 당시 루이 보나파르트 대통령 밑에서 경찰 총장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쿠데타의 주요 계획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비상 사태 속에서 모파는 모르니(duc de Morny, 당시 내무부 장관)에게 달라 붙었다.  당시 경찰청과 내무부는 전신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소식을 주고 받고 있었다.  모든 긴박한 소식과 공포와 혼란에 질린 신호들이 경찰청장으로부터 내무부 장관에게 날아들었는데, 모르니는 담대한 인물로서 좀더 침착한 편이었고, 그의 사무실에서 이런 모든 충격적인 소식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겁에 질린 소식이 처음 날아들자, 모르니는 그저 '모파가 아픈 모양이군'이라고 말했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신으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다시 어쩌면 좋으냐고 질문이 날아오자, 그는 다시 '잠이나 자시오'라고 답을 했고, 세번째로 같은 질문이 오자, 그도 평정심을 잃고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빌어먹을 잠이나 자라니까' 






(Charles de Morny는 탈레랑의 아들과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 사이에 태어난 혼외자로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동복 형제였습니다.  당시 내무부 장관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정부 요원들의 열의도 아주 빠른 속도로 식어 갔고 편을 바꾸기 시작했다.  포부르 생-마르소(Faubourg Saint-Marceau) 구역을 봉기시키라는 임무를 받고 저항 위원회에서 파견된 어느 용감한 남자가 주머니에 좌익의 선언문과 포고문을 잔뜩 담은 채로 포세-생-빅토르 가(Rue des Fossés-Saint-Victor)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즉각 경찰청 방향으로 끌려갔다.  그는 총살당할 것을 각오했다.  그를 끌고 가던 호송대가 케-생-미쉘(Quai-Saint-Michel)에 있는 시체 안치소를 지나치자, 시테(Cité) 섬 쪽에서 머스켓 소총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호송대를 이끌던 경관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초소로 돌아가게.  이 죄수는 내가 처리하겠네."  병사들이 가버리자, 그는 죄수를 묶은 포승을 끊더니 말했다.  "가게나.  내가 자네 목숨을 살려주지.  자네에게 자유를 준 것이 나라는 것을 잊지 말라구.  날 잘 봐 둬.  다시 날 봐도 알아 볼 수 있게 말일세."







(시테 Cité 섬은 파리 한 가운데 있는 센느 강 속의 섬으로서, 노트르담이 여기에 있고 각종 관공서도 있습니다.)




군의 주요 쿠데타 공모자들은 회합을 가졌다.  주요 의제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포부르 생-오노레(Faubourg Saint-Honoré)를 즉각 떠나서 엘리제보다는 방어에 더 용이한 두 전략 요충지인 앵밸리드(Invalides) 또는 뤽상부르 궁(Palais du Luxembourg)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앵밸리드를 선호했고, 다른 이들은 뤽상부르 궁을 선호했다.  이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베스트팔렌(Westphalia) 전(前) 국왕이던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 Bonaparte)가 쿠데타가 실패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다음 날을 걱정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편지를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보내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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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또 시간 날 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