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5 06:30

'문학과현실'사에서 출간된 빅토르 위고의 "브르타뉴의 세 아이들"이라는 소설은 솔직히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소설 속에는 주인공들이 마라나 당통, 콘월리스나 윌리엄 피트와 같은 실존 인물과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제가 읽을 때 누가 실존 인물이었고 누가 가공의 인물인지가 약간 헷갈렸습니다.  그래서 위키를 뒤져 보았으나, 대체 이 소설에 대해서는 찾을 수가 없더군요.  한참 후에야, 이 소설의 원제가 '1793'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소설은 빅토르 위고가 마지막으로 쓴 작품으로서, 제목이 암시하듯이 프랑스 대혁명에 반발하며 일어났던 방데(Vandee) 지방의 내란을 다룬 것입니다.  


줄거리는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밝히지 않겠습니다.  다만 몇가지 인상적인 대목들이 있더군요.  아마 '~주의자'라는 사람들은 무척 경멸할, 빅토르 위고다운 '싸구려 인간미'가 진하게 풍겨나오는 구절들입니다.





(쪽배 위에서 권총으로 위협당하고 있는 사람이 랑트나크 후작입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것보다는 좀... 가볍게 그려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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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데 지방에 내란을 일으키러 영국으로부터 잠입한 랑트나크 후작은, 프랑스에 몰래 상륙하자마자 이미 자신의 행방이 알려져있고 자신의 목에 6만 프랑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포고문을 보고 놀랍니다.  그가 농부로 변장을 하고 숲 속으로 숨어들 때 왠 거지를 만나는데, 이 거지는 대뜸 랑트나크 후작을 알아보고 자신의 집에 숨으라고 권합니다.)


"그럼 자네가 글을 읽을 줄 안다니 나를 넘겨주면 6만 프랑(요즘 가치로 약 7억원)을 받게 된다는 것도 알 텐데."


"예, 압니다.  금화로 말이지요."


"6만 프랑이면 큰 재산인 것도 모를리 없겠지 ?"


"그럼요."


"누구든지 나를 넘겨주기만 하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요.  당신을 보았을 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이 사람을 넘겨주는 자는 누구나 6만 프랑을 얻어 한 재산 톡톡히 장만할 거라구.  그러니 서둘러 숨겨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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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혁명정부에서 정치위원으로 내려온 시무르댕은 전직 신부로서, 젊은 시절 귀족인 고뱅 가문의 가정교사로서 어린 고뱅을 아들처럼 키운 사람입니다.  이제 청년이 된 고뱅 자작은 혁명정부의 대령이 되어 자신의 할아버지인 랑트나크 후작을 토벌하는 부대의 유능한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냉혹한 성격인 시무르댕은 고뱅이 관용/온건파인 것을 보고 크게 우려합니다.)


"왜 자네는 성 마르크 르 블랑 수도원의 수녀들을 석방시켰는가 ?"

"저는 여자들을 상대로 전쟁하진 않습니다."


"왜 자네는 루비네에서 잡은 광신적인 그 늙은 신부들을 혁명 재판소에 파송시키지 않았는가 ?"

"저는 늙은이들을 상대로 전쟁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소한 동정은 하지 말게.  시역자들이 바로 해방자야.  저 탕플 탑을 지켜보란 말이야."

"탕플 탑, 저라면 거기서 태자(처형당한 루이 16세의 아들)를 풀어 주겠습니다.  저는 어린애들을 상대로 전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이 루이 카페라면 어린애들과도 싸워야 하는 거다."

"선생님, 저는 정치가는 아닙니다."


"코세 초소의 공격에서 반역자 장 트르통이 궁지에 몰려 허둥지둥 혼자 군도를 휘두르며 자네 부대에 달려 들었을 때, 자네는 왜 '대열을 풀어 통과시켜라!'하고 외쳤는가 ?"

"한 사람을 죽이는 데 1천5백명이 필요하진 않기 때문이죠."


"라 카유트리 다스티예에서 부상당해 기어가던 조제프 베지에라는 방데군을 부하 병사가 죽이려 할 때 '전진하라! 그는 내가 처리하겠다'고 하고선 권총을 공중에다 대고 쏜 일이 있었다. 그건 왜 그랬지 ?"

"쓰러진 사람을 죽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 둘은 지금 부대장이 되어 있다.  그 두 놈을 살려 줌으로써 자네는 공화국에 두 적을 제공한 셈이야."

"물론 저는 공화국에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했지, 적을 만들어 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시무르댕은 프랑스를 환자에, 방데를 종기에 비유하며, 외과의사가 종기를 용서하지 않고 잘라내듯 방데를 냉혹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혁명은 이제 전 세계를 절단하고 있다.  그래서 93년은 유혈의 해란 말일세."

"외과의사는 침착한데, 제가 보는 혁명가들은 난폭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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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고뱅 자작은 소설 후반부에서 프랑스 농민들의 식생활 이야기도 합니다.  프랑스 농민들은 고기를 1년에 나흘 정도 밖에 고기를 먹지 못한다고요.  하긴 당시 서민들이 빵이 없어 굶는다는 이야기가 있자, 당시 왕비 앙투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닌가" ("S’ils n’ont plus de pain, qu’ils mangent de la brioche") 라고 했다지요 ?  앙투와네트도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최소한 그 여자도 농가에는 고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앙투와네트는 실제로는 pain이니 brioche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기는 빵보다 비쌀 수 밖에 없는 물건입니다.  같은 면적의 땅에서 목초를 키우고 그것으로 소나 양을 치는 것에 비해, 밀이나 쌀을 재배하여 그것으로 빵을 만드는 것이 훨씬 '많이' 만들 수 있으니까요.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서양인들은 빵을 먹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서양인들이 식사를 하는 광경을 보면, 주식이 빵이라기보다는 고기라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됩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고기집에 가서 고기를 잔뜩 몇인분씩 구워 먹고 난 뒤 '식사'로 된장찌게에 공기밥을 먹는 것처럼, (비록 순서는 바뀌었지만) 주식인 고기를 먹기 전에 가볍게 롤빵 1~2개 정도를 먹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Treason's Harbour by Patrick O'Biran (배경 : 1813년 지중해 몰타 섬) -----------------------------


하지만 화요일,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에는 '그리갈레(gregale)'라고 불리는 지중해의 북서풍이 몹시 심하게 불어 어선이 출항을 하지 못한데다, 장교 식당의 설리(Searle)는 카톨릭 신자인 장교를 접대해 본 적이 없는지라 (당시 영국 해군에서는 모든 위관급 장교는 임관시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의식을 거치게 되어 있었으므로, 카톨릭 신자인 장교는 사실상 없었습니다:역주), 소금에 절인 생선을 아무 것도 준비해놓지 않았었다.  덕분에 머투어린은 영국식으로 요리된, 물기가 가득하고 맛대가리 없으며 무척 꺼림직해보이는 채소 요리로 식사를 때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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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영미식 시금치 요리입니다.  시금치를 버터와 함께 물에 넣고 푸욱 삶으면 이렇게 회색 빛이 감도는 꺼림직한 물건으로 변합니다.  저는 카투사로 군대에 갔다가 미군 식당에서 이 물건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위 소설 구절 속에서도, 빵은 주식이라기보다는, 식사의 작은 일부로서, 빵 바구니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대체 유럽인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고기를 많이 먹게 되었을까요 ?


원래부터 유럽인들은 고기를 주식으로 한다고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실은 유럽인들이 제대로 된 빵을 주식으로 한 것도 그다지 오래 된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밀과 보리로 만든 마자(maza)라는 납작한 떡을 주식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효모를 넣어 부풀린 흰빵은 명절 때나 먹었다고 하네요.  중세 유럽의 농민들도 빵을 양껏 먹지는 못했고, 이런저런 찌꺼기를 넣어 끓인 수프 또는 죽을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농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밀과 호밀, 보리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제대로 구운 빵을 먹게 되었지요.  


이렇게 가난한 유럽에서도, 물론 귀족들은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귀족의 음식은 정말 고기가 주식으로서, 중세 연대기를 보면 프랑스 왕실에서는 하루에 600마리의 어린 닭, 200마리의 비둘기, 50마리의 거위 새끼를 먹었다고 합니다.  (몇 명이서 먹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들이 어찌나 고기를 좋아했는지는 종교적 관행도 바꿀 정도였습니다.  즉, 원래 카톨릭에서는 위 소설에 인용된 것처럼, 금요일에는 고기(원칙적으로는 달걀도 포함되었다고 하네요)를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대신 생선을 먹어야 했었는데,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냥 벌금을 내고 고기를 먹었다고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중세에는 도로 교통 사정 때문에 내륙 지방에서는 생선 가격이 무척 비쌌으므로, 무척 경제적인 선택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때 귀족들은 두껍고 넓적한 빵을 접시 대신으로 썼는데, 이렇게 고기 국물이 스며든 빵 접시는 대개 먹지 않고 내버렸습니다.  이 고기 국물이 묻은 빵 접시는 매일 밤 성문 밖에 모여든 가난한 농부들에게 하사품으로 나누어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온 나라의 거지들은 모두 귀족의 궁성 앞에 모여 살았을 것 같은데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





(프랑스인들은 자기 나라의 상징을 삶아먹는답니다 !!!  앙리 4세와 얽힌 요리, Poule au pot, 그러니까 닭 냄비 요리 chicken in pot 입니다.  마치 우리 삼계탕 비슷한 음식처럼 보이는군요.)




아무튼 그러니까 유럽인들이라고 아주 옛날부터 당연히 고기를 먹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닭이 프랑스의 상징이 된 것과 상관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고대 골 족의 상징이 수탉이었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  1589년 프랑스 종교 내란을 일단락 하고 프랑스 왕위에 오른 앙리 4세는, 대관식에서 이렇게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신께서 제게 천수를 누리게 해주신다면, 일요일마다 프랑스의 모든 농부들의 냄비에 닭이 들어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러니까 그 시절에도 일반 농민들에게는, 소나 돼지는 고사하고 닭조차도 매일은 커녕 1주일에 1번 먹는 것이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다는 것이지요.  불행히도 앙리 4세는 57세의 나이에 광신도에게 암살되었습니다만, 사실 앙리 4세가 80까지 살았다고 해도 프랑스가 모든 농민이 1주일에 1번씩 닭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번영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당시에는 농업 생산력이 딸릴 수 밖에 없었거든요.  아무튼 신구교 양측의 화합을 위해 애썼던 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상 매우 존경받는 왕이 되었고, 그 왕의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 즉 '일요일의 닭'은 프랑스의 국가 이념 비슷한 것이 되어 닭이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고기국에 이밥 먹여주겠다'라고 한 대국민 약속은 현대의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비웃음거리가 되는데, 프랑스의 국가 이념이 그렇다고 하니 국민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인본주의가 아주 간지가 넘쳐 보입니다...)





(앙리 4세에게 Poule au Pot를 권하고 있는 저 여자는 Gabrielle d'Estrées 라는 귀부인으로서,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이 되기 전부터 그의 정부였던 여자인데, 앙리 4세의 아이를 낳다가 죽는 바람에 앙리 4세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고 합니다.)




앙리 4세가 죽은지 200년이 훨씬 지나 19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유럽인들은 여전히 고기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 수병들은 매주 쇠고기 4파운드(1.8kg)와 돼지고기 2파운드(0.9kg)를 배급받았다고 했지요.  이 고기들이 소금에 절여진 한 1년 정도 된 물건이라는 점만 빼면, 이 정도의 육류 배급은 정말 대단한 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먹는데 그리 돈을 아끼는 편이 아니지만, 그 정도로는 못 먹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생활이 당시 유럽 서민층의 일반적 식사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수병들이나 군인들은 직업 특성상 엄청 많이 먹어야 했거든요.  사실 저 정도의 양은 지나치게 많은 것이라서, 직업이 군의관인 저 소설 속 주인공 머투어린도 여러차례 수병들의 건강을 위해 고기 및 주류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고 언급하곤 했습니다.


같은 시기, 일반 농민들의 식생활은 영국 해군에 비하면 동물성 식품이 무척 귀했습니다.  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래도 채소나 곡물보다는 비싼 것이었으니까요.  전에 번역해서 올렸던 글 중 일부를 다시 발췌해보겠습니다.





Sharpe's Revenge by Bernard Cornwell (배경 : 1814년 프랑스) -----------


하지만 이날 밤, 루실은 불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샤프가 잘 먹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식탁 위에는 포도주, 빵, 치즈와 작은 햄조각이 있었는데, 프레데릭슨 대위는 햄을 조심스레 샤프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샤프는 프레데릭슨의 접시를 보고, 이어서 루실의 접시를 보았다.  "자네 햄은 어디 있지, 윌리엄 ?"


"카스티노 부인(루실)은 햄을 좋아하지 않으신답니다." 프레데릭슨은 치즈를 잘랐다.


"하지만 자넨 좋아하쟎아 ? 난 자네가 햄을 빼앗으려고 살인하는 것도 봤는데."


"영양분을 필요로 하는 건 소령님이쟎습니까." 프레데릭슨은 고집을 부렸다. "제가 아니고요."


샤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집에는 돈이 부족한 모양이지 ?" 그는 카스티노 부인이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리지 않고 했다.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소령님. 물론 땅은 많은데, 요즘은 그게 도움이 안되나 봅니다. 게다가 앙리의 약혼식에 가진 돈을 거의 다 써버렸나봐요."


"망할." 샤프는 햄을 우스꽝스럽도록 작은 세조각으로 잘랐다. 왼팔을 아직 제대로 쓸 수가 없어서 그의 동작은 매우 서툴렀다. 그는 햄을 세 접시 위에 공평하게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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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시대가 지난, 19세기 중반 일반적인 유럽 농민의 식사도 그다지 큰 개선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밀가루로 만든 빵에 버터를 발라 먹을 정도면 유럽에서 평균 이상은 가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아일랜드에서는 감자에 버터를 발라 먹었으니까요.  아일랜드도 목축이 성행했기 때문에 그나마 버터라도 발라 먹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럼 버터와 우유는 있는데, 그 쇠고기는 어디 갔냐고요 ?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은 버터와 우유 정도만 먹을 수 있었고, 소는 영국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기 위해 영국에 수출해야 했지요.


19세기 후반인, 보불 전쟁 때 이야기를 보시지요.


포로들 (모파상 작, 배경 : 1870년 프랑스) -----------------------------------------------


(프랑스 시골 숲 속, 중년 부인이 사는 어느 외딴 집에 6명의 프로이센 정찰병들이 침입합니다.)


그녀는 솥에 물을 좀더 붓고, 버터와 감자를 넣었다.  그러고 난 뒤, 벽난로 안쪽 구석자리의 갈고리에 걸어둔 베이컨 한 덩어리를 꺼내어 두 조각을 내어, 그 중 반을 솥에 집어 넣었다.


6명의 병사들은 그녀의 움직임을 굶주린 눈빛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총과 헬멧을 한쪽 구석에 모아두고, 마치 학생들이 교실에서 말을 잘 듣듯이 얌전히 저녁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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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녁 식사라고 베이컨이 좀 나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수프는 모조리 하류 음식 취급을 한다는데, 이유는 수프라는 물건은 태생 자체가 적은 재료로 여럿이 나눠 먹기 위해 만든 요리라는 것이지요.  이 소설 속에서도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수프를 만드는 것이고요.


결국 유럽인들이 육류 위주의 식생활을 굳힌 것은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19세기 말엽이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지금부터 불과 150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유럽인 서민들에게 고기는 매우 귀한 음식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식민지 수탈의 결과로 유럽인들이 잘 먹고 잘 산다고 푸념하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만, 그렇다고 영국이 인도의 소를 잡아오거나 이집트의 닭을 빼앗아 온 것은 아니었지요.  확실히 식민지 수탈이 유럽 경제 발전의 기초가 된 것 같기는 합니다만, 거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으므로 일단 패스하겠습니다.


아무튼 결국 유럽인의 주식은 고기가 되었고, 반만년간 쌀을 주식으로 하던 우리나라도 (사실 쌀을 주식으로 한 건 몇백 년 안되었지요... 유럽인들이 빵을 주식으로 한 지 몇백 년 안된 것처럼이요) 최근 30여년 정도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 덕택에 육류를 많이 먹게 되었습니다.  대신 쌀 소비가 줄어서 큰 일이지요.  우리나라의 쌀 소비 저하 문제가 심각한 것처럼 유럽에도 밀 소비 저하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까요 ?





(한국의 쌀밥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바게뜨도 위기랍니다)




심각하답니다.  프랑스에서 1인당 하루 빵 소비량은 1880년에는 600 그램이었지만, 1950년에는 300 그램으로 줄었고, 1977년에는 180 그램으로 다시 줄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지 알아볼 엄두가 안나는군요.  다만, 우리나라는 그 과정이 불과 20~30년 사이에 급속도로 진행된 반면, 유럽은 거의 100년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유럽의 농가들은 그에 대해 적응할 기간이 길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요.  이미 우리나라 농촌도 쌀보다는 돼지 사육과 채소 농사가 더 큰 매출을 올리고 있는데 특히 돼지 사육은 환경 오염이 심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기사를 최근에 어디서인가 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서 프랑스에서는 빵이 전멸하는 것이 아닐까요 ?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어르신들께서, 무조건 쌀밥을 먹어야 밥을 먹은 것으로 쳐주시는 것처럼 (가령 피자 3조각이나 먹고 왔다고 설명드리면 그럼 밥은 아직 안먹었네 하시면서 밥상을 차려주시는 분들이 아직 많지요), 프랑스에도 비슷한 정서가 있나 봅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왜 식사 때 빵을 먹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냥 먹어야 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을 한다는군요.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쌀밥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험상궂은 아저씨가 허버트 후버입니다.)




여담으로, '모든 냄비에 닭을' (Chicken in Every Pot) 이라는 캣치 프레이즈는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현직 대통령이자 공화당의 연임 후보이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가 썼던 선거 구호였다고 합니다.  이 문구는 스코틀랜드 작가인 알렉산더 스미스 (Alexander Smith)가 1863년에 쓴 책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세계를 다스린다면 무지와 전쟁이 사라지고 세금이 가벼워지며, '프랑스인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냄비에 닭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쓴 것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유래가 무엇이었건간에, 당시 경제 대공황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정말 먹고 살게 해줄 대안으로 민주당의 후보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택했다고 합니다.


결국 고기는 비싼 것이고, 동양이나 서양이나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부유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덴마크나 룩셈부르크, 스위스 같은 곳에서 고기를 가장 많이 먹을까요 ?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부유한 일본이 우리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보다 1인당 GDP가 훨씬 떨어지는 중국이 우리보다는 고기를 훨씬 많이 먹습니다.  명목당 GDP와 구매력 기준의 GDP가 다른 것도 원인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식생활이라는 것에는 경제적 배경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천년간 이어온 문화적 배경이라는 것이 무시될 수는 없는 것이라서 그렇지요.





(이렇게 쇠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행복한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요 ?  정답은 몬테비데오를 수도로 하는 나라입니다.)




참고로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쇠고기를 소비하는 나라는, 우루과이라고 합니다.  1인당 1년 소비량이 무려 60kg입니다.  근수로 따지면 무려 100근 !  대략 1주일에 2근씩 먹어치우는데요 !  참고로 개돼지처럼 먹어대는 미국도 1인당 1년에 43kg, 사람보다 소와 양이 훨씬 많다는 오스트레일리아도 39kg, 브라질도 36kg 정도입니다.  우루과이 바로 옆나라인 아르헨티나도 1인당 1년 소비량이 55kg 정도라고 하니, 솔직히 부럽습니다 !!!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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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를대공 2018.11.15 1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당연히(?) 아르헨티나나 미국이 쇠고기 소비량 1위일줄 알았습니다.
    우루과이가 축구 잘하는 비결이 저기 있을지도요?

    • Spitfire 2018.11.15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루과이가 인당 고기 소비량이 높은 이유는 인구 수 때문입니다. 아르헨티나의 10분의1도 안되니까요.

      브라질 남부 히우그란지두술/산타카타리나 주-우루과이-아르헨티나로 이어지는 지역은 목축이 성행하는 지역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가우초(카우보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한 묘한 유대관계가 있습니다.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문화가 비슷하다보니, 브라질 남쪽지방이 19세기 중엽 독립운동을 할 적에 우루과이가 도와주기도 했지요. 실제로 브라질 남부 사람들은 브라질 사람으로서의 자부심 보다는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 인들과 더 동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남부는 브라질에서 야권성향이 강한 편이고, 전직 브라질 대통령인 지우마가 이쪽에 정치기반을 가지고 있었지요. (이 분도 탄핵을 당했는데, 이념이나 국가에 관계없이 여자 대통령 탄핵이 무슨 트렌드였던 것인지두요..)

      브라질 고기뷔페인 슈하스코도 남부지방에서 유래된 음식입니다. 그동네는 그냥 고기가 넘쳐나다 보니, 고기도 싸고 가죽도 싸고 정말 한국인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지요~~

  2. holy cow 2018.11.15 15: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인류의 건강과 에너지 소비와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등 많은 측면에서 지금과 같은 기업형 목축에 의한 대량 육류소비는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채식주의를 비판하는 말이 많지만 나시카님이 본문에 써주신대로 불과 150여년전만 해도 전세계 인구 대부분이 채식생활을 하고 있었죠. 우리나라는 불과 40여년 전까지도 그래왔구요.
    당뇨와 같은 각종 성인병, 암 발병 증가에 이와같은 육류소비의 무분별한 증가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나시카님 좋아하시는 고기 글에 이렇게 초를 쳐서 죄송합니다만, 다른 분들도 이 문제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 카를대공 2018.11.15 2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기 약간 얻는데 물이 그렇게 많이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사실 맛 때문에 다들 외면하는거지 정말 심각한 문제긴 하죠.

    • 최홍락 2018.11.15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좁은 곳에서 가축을 집약적으로 사육하는 기업형 목축이 방목해서 키우는 것보다 자연을 덜 파괴하지요. 말씀하시는 채소를 위한 경작지 개척도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고요. 그나마 환경을 덜 파괴하면서 생산량을 유지하려면 유기농보다는 GMO를 활용하는게 불가피하고요.

      그리고 한국의 경우 김치덕분에 1인당 채소 섭취량은 연간 170여 kg으로 세계에서 1, 2위권으로 높습니다. 육류소비로 보면 한중일을 비교해보면 일본보다 약간 높고 중국과 비슷한 수준임에도 비만율로는 그 두나라보다 높죠. 성인병 원인을 찾자면 좀더 디테일하게 찾아봐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3. ㅇㅇ 2018.11.19 15: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이 삶의 질을 크게 높이기는 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런 큰 발전과 향상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는 것이고 150년 전 유럽의 약진은 나머지 세계의 희생이 있었는데 지금도 득 보는 사람이 전세계 상류층으로 넓어졌을 뿐 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좀 우울하네요. 분명 스마트폰도 있고 세상이 편해진 것 같은데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니까요.

2018.07.30 06:30

1798년은 베르나도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던 해였습니다.  데지레와 결혼하여 나폴레옹의 인척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운도 잘 트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에게 관운이 트인다는 것은 전쟁이 났다는 뜻이지요.  그 해 연말 경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스위스에서의 시민 혁명이 촉매가 되어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 11월, 그는 1개 감시군(l'armée d'observation)의 총사령관이 되어 라인강을 넘어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의 필립스부르크(Philippsburg)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드디어 나폴레옹이나 모로, 오슈처럼 1개 군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던 이 기회는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한 전쟁이다보니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 전선에서 프랑스군은 연전연패를 이어갔기 때문에 베르나도트가 지휘할 감시군은 아예 편성조차 되지 못했고, 라인강을 넘을 기회도 없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1799년 7월, 베르나도트에게 더 큰 기회가 왔습니다.  일개 방면군 사령관보다 훨씬 더 높은 국방부 장관(ministre de la Guerre)이 된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제2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연전연패하고 있었는데, 이는 주로 형편없는 보급과 병력 충원 때문이었습니다.  제2차 대불동맹전쟁이 시작되면서 스위스 방면 감시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주르당(Jean-Baptiste Jourdan)이 조사 보고한 바와 같이, 각 방면군들의 상태는 도저히 전쟁을 벌일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제1차 대불동맹전쟁 때 프랑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활약 외에도 국방부 장관으로 있던 카르노(Lazare Carnot)의 뛰어난 활약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군대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전국 교회의 종을 압류하여 녹이고 화학자들을 불러모아 질산칼륨을 제조하고 새로운 무두질 방법을 개발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여 병력과 물자를 전선으로 보냈고, 덕분에 승리의 조직자(L'Organisateur de la Victoire)라는 칭송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프랑스군이 1798년 말에는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요 ?  나폴레옹과 총재들이 1798년 9월의 프릭튀도르 친위 쿠테타를 일으켜 쫓아낸 인물 중에 카르노도 있었거든요.  




(카르노입니다.  열역학에 나오는 카르노는 이 양반이 아니라 이 양반의 아들인 Sadi Carnot 입니다만, 이 양반도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습니다.  이 양반은 프릭튀도르 쿠데타로 쫓겨난 바로 그 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la métaphysique du calcul infinitésimal, 즉 무한 미적분의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조차 어려운 수학책을 발표했습니다.  상황이 안 돼서 공부를 못한다는 말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주 잔인한 양반입니다.)




어찌 보면 베르나도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은 현장에서 용맹과 지략을 발휘하는 현장 지휘관보다는 이런 행정가로서의 역할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의욕을 가지고 프랑스군 보급 및 충원을 위한 조치들을 취해 나가며 카르노의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내지도 않은 사임서가 신문에 게재되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베르나도트는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진짜 장관직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이는 총재 정부의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와 뒤코(Pierre Roger Ducos)가 꾸민 음모였는데, 궁극적으로는 여기에도 나폴레옹이 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실패한 이집트 원정군을 내팽개치고 나폴레옹이 홀몸으로 프랑스에 귀국하자, 이미 현정권으로는 죽도 밥도 안되겠다고 생각했던 시에예스 등의 총재들은 나폴레옹을 이용하여 다시 한번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면 국방부 장관의 협조도 필요했는데, 파리 정계에서 베르나도트가 어울리는 인물들이 자코뱅파 사람들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열혈 자코뱅이 친위 쿠데타에 협조할 리가 없다'라고 판단을 내리고 베르나도트를 미리 뽑아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시에예스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세계사 시간에 프랑스 대혁명 관련하여 이 사람이 지은 다음의 명문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람 자체는 쓰레기에 가깝습니다만, 쓰레기가 지은 문장이라고 해도 정말 뛰어난 문장입니다.

Qu’est-ce que le Tiers-État ? Tout.   제3 계급은 무엇인가 ?  모든 것이다.

Qu’a-t-il été jusqu’à présent dans l’ordre politique ? Rien.   여태까지 정치 체계에서 그것은 어떤 것이었나 ?  아무 것도 아니었다. 

Que demande-t-il ? À y devenir quelque chose.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물론 시에예스 따위의 정치 협잡꾼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바지저고리가 아니었습니다.  브뤼메르 쿠데타는 그런 썩어빠진 총재 정부의 잔당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꿈꾸던 나폴레옹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나폴레옹도 쿠데타를 위해서 직접 베르나도트의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는 브뤼메르 쿠데타가 시작되던 브뤼메르 18일 (1799년 11월 9일) 아침에도 베르나도트를 불러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으나, 베르나도트의 답변은 '당신의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겠다... 하지만 의회가 너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난 그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라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습니다.  확실히 베르나도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코뱅 원칙주의자일 뿐,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와 동서지간이었던 자신의 형 조제프에게 '그와 식사라도 하며 하루 종일 그를 감시해달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자, 베르나도트와의 관계는 그날 아침의 답변처럼 정말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명히 쿠데타에 협조한 공신록에 이름을 올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 본인과 혼인 관계로 얽힌 인척인데다 최소한 쿠데타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인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게 그의 답변처럼 애매모호한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일개 군의 총사령관, 즉 서부 방면군(l' armée de l'Ouest) 사령관으로 임명하되, 너무 참혹한 학살과 보복으로 점철되어 다들 꺼리는 분위기였던 방데(Vendée) 지방 반란 진압의 임무를 준 것이었지요.  그런데 베르나도트는 이 임무를 약 1년에 걸쳐 또 매우 훌륭하게 잘 수행해냈습니다.  하긴 왕당파의 깃발을 올리고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잔혹하게 숙청하는 것에 대해, 가슴에 '왕들에게 죽음을(Mort aux rois)'이라는 문신까지 간직한 열혈 자코뱅 베르나도트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을 것 같긴 합니다.  




(이 그림은 1793년 낭트(Nantes)가 함락된 이후 자코뱅 혁명군이 카톨릭을 신봉하는 왕당파 시민들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입니다.  원래는 포로로 잡힌 시민들을 구석에 몰아넣고 그냥 마구잡이 사격으로 사살했는데, 기관총이 아닌 관계로 그 사살 속도가 시원스럽지 않자 대형 보트에 시민들을 잔뜩 싣고 강 한 가운데로 가서 보트들을 통째로 침몰시켰다고 합니다.  반란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가리지 않고 학살하기도 했으며, 저 그림에서 묘사된 것처럼 여성들의 옷을 벗기고 다른 남성과 함께 묶은 채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하다가 죽이기도 하는 등, 방데에서는 그야말로 끔찍한 제노사이드(genocide)의 전쟁 범죄가 횡행했습니다.  이런 야만적 진압은 결국 반작용을 낳아 방데 지방에서는 이후로도 계속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의 껄끄러운 측근으로 비교적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할 때 임명한 18명의 초대 육군 원수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전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폴레옹의 충신도 아닌데 원수로 임명된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18명의 원수들 중에는 그런 어정쩡한 위치의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가령 뚜렷한 전공도 없이 허명만 요란한 주르당의 경우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쿠데타 때 근위대 병사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생 끌뤼(Saint Cloud)에서 쫓겨난 의원들 중 하나일 정도로 나폴레옹과는 대립각이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이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또 오쥬로(Pierre Augereau)의 경우 나폴레옹의 제1차 이탈리아 침공 당시 마세나와 함께 나폴레옹의 필승 원투펀치로 활약했지만, 정치적으로 철저한 자코뱅이라서 결국 나폴레옹의 심복이 되지는 못한 사람이었는데 그도 명단에 올라갔지요.  반면 나폴레옹의 초창기부터의 심복이자 전공도 많았던 마르몽(Auguste de Marmont)은 1809년에나 원수가 됩니다.  즉, 당시 누가 원수가 되느냐는 단지 얼마나 잘 싸우고 나폴레옹과 얼마나 친하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군과 정계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인물인가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독재 권력을 추구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전제군주가 아니라 국민의 지지에 의해 즉위한 황제였으므로 그런 사회 각계 각층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크게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총재정부 시절 나폴레옹 밑에서 크게 활약했던 오쥬로가 정작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별 활약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오쥬로의 철저한 자코뱅 성향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냥 오쥬로의 그릇이 딱 거기까지일 뿐 더 뛰어난 장군들에게 밀린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오쥬로가 나폴레옹에게 물을 먹은 것은 이 그림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테브냉 Charles Thevenin이라는 화가가 총재정부의 위임을 받아 그린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오쥬로'(AUGEREAU AU PONT D’ARCOLE) 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에서는 아르콜레 다리를 앞장 서서 돌파한 사람이 나폴레옹이 아니라 오쥬로로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저렇게 깃발을 들고 자살 공격대의 맨 앞에 서지 않았지요.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뒤 그로 및 베르네 등의 더 뛰어난 화가들의 그림으로 신속하게 교체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같은 거물이 그렇게 치사했겠냐고요 ? 치사했습니다.)




(윗그림은 유명한 그로(Antoine-Jean Gros)의 '아르콜레 다리에서의 나폴레옹'이고 아래 그림은 베르네(Horace Vernet)의 같은 제목의 그림입니다.)




그렇게 나폴레옹 치하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베르나도트는 하노버(Hanover) 등 주로 독일 북부 지방에서 총독으로 근무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평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워낙 뛰어난 행정가였던데다 합리적이고 중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제국의 압제 하에 신음하는 처지였던 하노버 지방 사람들은 큰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 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권위도 그에 따라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또는 데지레 때문인지 그는 1805년 12월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주로 예비대로 있다가 전투 막판에 투입되어 상대적으로 전공이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폰테 코르보 대공(1st Sovereign Prince of Ponte Corvo)이 되어 드디어 귀족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까지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있어 베르나도트는 여전히 껄끄러운, 상전같은 부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껄끄러운 관계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곧 벌어집니다.  




** 다음 편은 많이들 짐작하시다시피 과거에 이미 다룬 유명 전투들 이야기가 됩니다.  제 블로그에 처음 오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내용 전개상 건너 뛰고 갈 수는 없어서 다루긴 다뤄야 하는데, 아무래도 과거에 썼던 글의 재탕이라고 느끼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해서, 다음 편인 제6편은 원래 재탕글을 올리는 목요일 아침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로서는 다음 편은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되는군요...)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II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D%C3%A9sir%C3%A9e_Clary

https://fr.wikipedia.org/wiki/Charles_XIV_Jean

https://en.wikipedia.org/wiki/Lazare_Carnot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iconographie/augereau-au-pont-darcole-15-novembre-1796/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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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NNES 2018.07.30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글 잘읽고 갑니다~
    근데 다음편 아우슈테트 전투 재탕 하실꺼죠? 흑흑..ㅜㅜ
    무더위 조심하세요~~ㅋ

    • nasica 2018.07.30 1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억 어떻게 알았지...?) 말씀하신 대로 써놓고 보니 사실상 재탕이라 저로서는 날로 먹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용 흐름상 빼고 갈 수는 없으니, 대신 다음편은 원래 재탕을 올리는 목요일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 한글맨 2018.07.30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윽 2등

    애매모호하다는 '모호하다'로 쓰는 게 낫다는 이야기가 있네요
    아랫 글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
    '말이나 태도가 흐리터분해 분명하지 않다'는 뜻으로 쓰는 단어들로 '모호하다''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있다.

    한자어 '모호(模糊)'와 '애매(曖昧)'는 같은 뜻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분명하지 않음'의 뜻으로 원래 '모호'만 사용하고 '애매'는 쓰지 않았다.

    우리와 달리 일본에서는 '애매'와 '애매모호'도 '모호'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이것을 다시 우리가 받아들여 사용함으로써 '모호하다' 외에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함께 쓰이고 있으며, 지금은 국어사전에도 모두 올라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단어인데 굳이 일본식인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를 쓸 필요가 없다. '애매모호'는 더구나 같은 뜻을 가진 단어의 중복 형태다.

    더 큰 문제는 한자어 '애매(曖昧)하다'와 별개로 순 우리말 '애매하다'가 있어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순 우리말로서의 '애매하다'는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아 억울하다'는 뜻이다.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 "애매한 사람을 죽이려 들지 마라" 등에서처럼 쓰인다.
    출처 : 중앙일보, 우리말 바루기

  3. 유애경 2018.07.30 1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끊임없이 나폴레옹의 경계와 견제를 받았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베르나도트 였을것 같다는...

    항상 여러가지 글 잘보고 갑니다.

  4. 찐빵 2018.07.30 18: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랑스인들도 상당히 잔인하네요.방데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건 잊어서는 안 될 사건 같습니다.

  5. 방랑자 2018.07.30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805년 12월 이후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라면,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의 말을 따르기만 했다가 짐승이 말도 안되는 공적을 세우게 만든 그거겠군요.

  6. reinhardt100 2018.07.30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데가 드디어 나오네요. 이 방데반란이 꽤나 요인이 복잡하죠.

    혁명 초기 의외로 교계는 혁명에 동조적이었습니다. 이들 역시 사회하층민들과 직접 동고동락했으니까요. 교계 재산을 국유화한 재원으로 아시냐 지폐를 발행하는 거도 교계에서 동의한 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당장 성경에도 이웃을 살피라는데 하물며 교구의 민중들이 다들 굶주리는데 자신들의 재산으로 이를 구원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요. 방데 지방은 이런 일반적인 프랑스 지역과 달랐다는게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방데 지방은 다른 지방과 달리 자작농 비율이 높았고 교회 재산이라는 것도 '교회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가 공유하는 재산을 교회가 관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혁명정부가 갑자기 아시냐 만든다고 몰수하겠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돌아버릴 상황이 된 겁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게 혁명전쟁 발발 후 30만 징병령이 내려진겁니다. 그것도 방데에서 가장 먼저 징병이 시작된 겁니다. 가장 후방인데 가장 먼저 징병한다고 하니 주민들이 격분한 건데 이걸 본 혁명정부는 일벌백계로 때려잡으려다보니 방데를 박살내기로 작정했고 진압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이 당시 방데 인구가 70만 좀 넘었는데 최소 10만 단위로 학살이 이루어졌죠.

    이 때문에 방데는 부르봉 왕정 복고를 가장 열광적으로 지지했고 나폴레옹의 제2제국 시절까지만 해도 대놓고 삼색기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중앙정부와 충돌하는게 다반사였습니다. 보불전쟁이 프랑스에 미친 가장 긍정적인 영향이 무엇이냐고요? 방데지방이 혁명 이후 처음으로 공화국을 지원하면서 어느정도 혁명을 인정했다는 겁니다. 조국 프랑스가 위기에 빠졌고 더 이상 부르봉 왕정복고도 불가능한 현실을 인정하고 공화국과 화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겁니다. 제3공화국 정부 역시 이즈음부터는 방데에 대하여 지원을 어느 정도 늘려주어 민심을 다독였고요. 방데조차도 삼색기를 인정했으니 이제 다시는 왕정복고 따위는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자신감이 넘치게 된 거니까요. 이 시기부터 혁명기념일이 단지 파리와 혁명에 동조했던 북부 일부만의 축제가 아닌 전국민이 제3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시켜주면서 국민 모두가 즐기는 진정한 국경일이 된 것도 덤입니다.

    • 2/28일 입대 2018.07.31 2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와 저렇게 긴 내용을 이렇게 짧게 다 커버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방데 내전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봤어도 그 전개과정은 처음 보네요

    • reinhardt100 2018.08.09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이제서야 확인했습니다. 답글이 늦었는데 이 방데 문제는 꽤나 복잡합니다. 책으로 보시는게 더 정확할 겁니다.

  7. 투팍아마르 2018.07.30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로 드시든 회쳐 드시든 상관없습니다. 자주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베르나도트 이 양반도 어지간히 꼬장꼬장한 성질인것 같습니다. 이 정도 인물이 살짝만 숙여도 나폴레옹처럼 허세 있는 타입은 입이 헤벌레해서 막 퍼줬지 싶은데 끝까지 긴장관계가 유지된걸로 봐선 한 성미 한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방데지방을 지도에서 찾아보니 주변 도시가 낭트, 라로셀등이 있는데 옛날 위그노의 본거지인 동네더군요. 독립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부류가 일본인보다는 오히려 한국인 앞잡이들이었던 것처럼 방데 역시 위그노의 본진에서 카톨릭으로 전향한 동네라 오히려 카톨릭에 대한 혁명정부의 억압에 더 반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8. ...... 2018.07.31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무원 수험 헌법, 사법시험 헌법쪽에서는 시에예스의 국민주권론과 루소의 인민주권론을 죽어라 배웁니다.
    매년 40문제 5지선다 중 최소 한두지문은 나왔거든요.

  9. 메에용 2018.08.01 0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재밌어요

  10. ㅇㅇ 2018.08.01 18: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부 제대로 하는 사람은 정말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무슨 시련이 오든간에 알아서 하는군요

  11. TheK2017 2018.08.02 0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네요. 다음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0*

  12. 석공 2018.08.04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더위 조심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