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담10 쿨름 전투 (7) - 방담과 짜르 쿨름 전투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방담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요? 방담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최후까지 전방의 러시아군을 막아내던 포병대를 지휘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병사들을 지휘하느라 결국 프로이센군을 뚫고 포위망을 빠져나간 1만여 명의 무리 속에는 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코삭 기병들에게 사로 잡혀 포로가 되었는데, 프랑스측의 기록에 따르면 짜르 앞에 끌려간 그는 알렉산드르로부터 약탈을 일삼는 불한당이라는 꾸짖음을 듣자, '난 최소한 지 애비를 죽인 자식이라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라고 말대꾸를 했다고 합니다.(쿨름 전투에서 코삭 기병들에게 사로잡히는 방담의 모습입니다.) 이건 거친 성격 탓에 술트와 제롬 보나파르트 등 자신의 상관들과 끊임없이 알력을 빚던 방담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 그.. 2024. 6. 17. 쿨름 전투 (6) - 구멍을 뚫다 운명의 8월 30일 아침이 떠오르기 전에, 이미 전날 밤 방담은 휘하 사단장 및 참모들을 불러모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작전 회의를 한 바 있었습니다. 모두의 의견은 일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곧 도착할 것이니, 당장 눈 앞의 적 방어선이 견고하더라도 어떻게든 이를 뚫어야 하며, 이를 해내지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이 쿨름에서 버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드레스덴에 앓아 누워 있고 그들을 도우러 오는 프랑스군은 없다는 것을 모르던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습니다.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30일 새벽에 쿨름에는 방담이 그토록 아쉬워하던 예비 포병대 등이 뒤늦게나마 마침내 도착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12파운드 중포 6문과 2문의 곡사포, 그리고 8문의 8파운드 포가 있었고, .. 2024. 6. 10. 쿨름 전투 (5) - 산 속에서는 모두가 혼란하다 적군이 계속 증강되는 가운데, 후발대로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의 본대로부터 소식이 없자 아마 방담도 슬슬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8월 30일 오전 6시 30분 경에 나폴레옹에게 보낸 방담의 보고서는 다소 횡설수설하는 내용이었는데, 그의 초조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적군은 테플리츠로 가는 길을 결연한 의지로 방어하고 있습니다. 밤 사이에 적의 병력은 증원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현 위치를 지키고 폐하의 명령을 기다릴 뿐입니다. 저는 병력을 집중시켜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려 했으나, 아직 저의 예비 포병대가 도착하지 않았으며 탄약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제23사단을 따라가버린 제 기마포병대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식량도 없습니다. 적군이 (마을들의) 모든.. 2024. 6. 3. 쿨름 전투 (4) - 호라티우스 삼형제의 교훈 여기서 잠깐 명화 하나 감상하고 가시겠습니다. (호라티우스 삼형제의 맹세라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나폴레옹 궁정화가였던 다비드의 그림입니다. 고대 로마식 경례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악명 높은 나찌 경례법이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 그림은 로마 시대의 그리스 출신 역사가인 리비우스(Livius)의 책에 나오는, 초기 로마 왕정 시절 호라티우스 삼형제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를 그린 것입니다. 약간 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이웃 도시와 분쟁이 생기자 호라티우스 삼형제와 이웃 도시 국가의 쿠리아티우스 삼형제가 3대3 대결을 벌여 승부를 가른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승부의 내용이 상당히 전술적입니다. 대결 초반, 쿠리아티우스 삼형제가 우세를 점하여, 호라티우스 형제들 중 2명이 죽어버립니다. 쿠리아티.. 2024. 5. 27. 쿨름 전투 (3) - 국왕이 보낸 편지 방담의 프랑스군이 테플리츠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급히 피난하시라는 프란츠 1세의 편지를 받은 사람은 바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이었습니다. 8월 27일, 다들 드레스덴에서 후퇴하자는데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28일에도 한번 더 싸우자고 주장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정작 후퇴가 결정되자 누구보다도 재빨리 말을 달려 안전한 후방인 테플리츠에 먼저 당도했었던 것입니다. 27일 밤까지도 드레스덴에 있던 양반이 28일 밤에는 남쪽으로 55km 떨어진 테플리츠에 와있었으니, 아마 엄청난 속도로 말을 달렸던 것 같습니다. (1837년 경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모습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개혁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결국 그건 똑똑한 왕비 루이자 덕분이었다는 것이 드러났고, 사랑했던 왕비 루이자가 .. 2024. 5. 20. 쿨름 전투 (2) - 너는 이미 혼자다 이렇게 쫓고 쫓기는 가운데 페터스발트에 먼저 도착한 것은 오스테르만의 러시아군이었습니다. 이때 오스테르만은 임진왜란 때 문경새재를 지키는 신립 장군의 자세로 페터스발트에 배수의 진을 치고 방담을 막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야 했을 것 같은데 막지 않았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평소 그렇게 용감하다고 소문났던 오스테르만은 이때만큼은 약간 이상할 정도로 겁에 질려 빨리 이 산길을 넘어 최종 목적지인 테플리츠로 가야 한다고 조바심을 냈다고 합니다. 오스테르만은 페터스발트 고갯길로 접어들기 바로 직전의 작센 마을인 헬렌스도르프(Hellensdorf)에 일부 병력을 남겨 방담의 추격을 잠시 저지했지만, 방담의 제1군단이 그 마을을 우회하여 포위하려 하자 곧 철수했고, 곧장 페터스발트를 거쳐 얼츠비어.. 2024. 5. 13. 쿨름 전투 (1) - 쉬운 듯 어려운 듯 애매한 임무 (** 오후에 새로운 source를 읽은 것이 있어서 오늘 아침에 발행된 일부 내용을 저녁에 수정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드레스덴 전투 첫날인 8월 26일,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엘베강 상류의 피르나에서 뷔르템베르크 공작 오이겐을 쫓아내고 피르나를 점령한 방담에게 주어진 역할은 분명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드레스덴에서 보헤미아 방면군을 격파하면, 당연히 보헤미아로 퇴각할 연합군의 퇴로를 끊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싸움에 지고 도망치는 적군의 퇴로를 막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임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랬을까요? 일단 그 임무 자체는 나폴레옹이 방담의 제1군단에 더해 5만의 근위대와 함께 자신이 직접 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도 되지만, 동시에 방담의 제1군단 .. 2024. 5. 6. 드레스덴 전투 에필로그 - 나폴레옹답지 않았던 싸움 드레스덴 전투는 나폴레옹이 여태까지 거두었던 승리와는 다소 결이 다른 전투였습니다. 대표적인 부분이, 나폴레옹의 병력이 적군보다 훨씬 적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흔히 알려진 바와는 달리, 나폴레옹은 적은 수로 다수의 적을 무찌르는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성이 헛된 것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 반대로 나폴레옹은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소리입니다.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수가 적보다 더 적더라도, 언제나 어떻게든 전투 당일 현장에서는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끌어 모았습니다. 당장 눈 앞의 적이 더 많을 경우엔 싸우지 않고 움직였고, 언제나 적보다 더 빨리 움직여 병력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20만에 달하는 적군에 대해 첫날은 고작 7만, 둘쨋날에도 12만 정도의 병력.. 2024. 4. 29. 드레스덴 전투 (2) - "포위해버리죠 뭐" 8월 23일, 나폴레옹은 분명히 시간, 공간과 병력의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있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를 묘책을 짜내자면, 먼저 나폴레옹 같은 군사적 천재가 어쩌다 일을 이렇게 망쳐 놓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폴레옹은 애초에 이 모든 상황에 대해 꽤 든든히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슐레지엔으로 블뤼허를 치러 가면서 이렇게 장담한 바가 있었습니다. "만약 적군이 드레스덴으로 진군해온다면, 드레스덴으로부터 방담은 2일 거리에, 빅토르는 3일 거리에, 그리고 내 근위 사단들은 4일 거리에 있으니, 이 모두가 드레스덴의 제14군단을 도우러 달려올 것이다." 기억하시겠지만, 빅토르의 제2군단 약 2만은 나폴레옹이 원래 보헤미아 방면군의 침투로로 예상했던 .. 2024. 2. 26. 제롬 이야기 - 나폴레옹의 일시적 실수 ? 본질적 문제 !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Napoléon Bonaparte)는 1784년 생으로서 나폴레옹에게는 15살 어린 정말 아들 같은 막내 동생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3년 툴롱(Toulon) 포위전을 통해 중위에서 장군까지 일사천리의 승진 가도를 달리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9살이었습니다. 이 툴롱 포위전이 한창일 때만 해도 보나파르트 일가는 고향 코르시카에서 쫓겨나 집도 절도 없이 마르세이유의 월세방을 전전하던 신세였지만 나폴레옹의 출세 덕분에 그 이후로는 생활에 기름칠이 잘 된 편이었습니다. 즉, 제롬은 형의 후광에 힘입어 아주 어릴 때 빼고는 그다지 세상살이가 어려운 줄 모르고 자라났다는 이야기지요. (베스트팔렌 국왕 제롬 보나파르트 전하이십니다. 가만히 보면 이목구비가 확.. 2019. 12. 16.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