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있어 드물게 조용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는 계속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습니다만, 1809년 바그람 전투 이후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뛰어들 만큼 큰 전쟁은 없었지요.  그리고 1810년은 그의 제국이 최대 규모로 팽창했던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공국들을 병합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사상 최대의 크기로 늘어난 것이지요.  게다가 유서깊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을 맺고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아들까지 얻었으니, 정말 1810년은 나폴레옹에게 절정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숙적 영국과의 전쟁도 매우 잘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을 스페인에서 몰아낸 것에 이어 마세나가 영국의 발판인 포르투갈까지 침공해들어갔고 (물론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싸움인 대륙 봉쇄령으로 인한 영국의 곤경이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곡물 가격은 대륙 봉쇄령 이후 60%나 치솟았고 이로 인해 영국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수출은 표면적으로는 잘 되고 있었습니다.  1805년 5110만 파운드이던 수출액이 1808년에는 4970만으로 떨어지더니 1810년에는 다시 6220만 파운드로 늘어났거든요.  이는 유럽 대륙으로의 수출이 막히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을 크게 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밀수 등을 통해 여전히 유럽에도 많은 상품을 팔고 있었지요.  그러나 1810년 중순 이후 나폴레옹의 밀수 단속이 강화된데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수출 특성상 대금의 상당 부분을 현금 대신 원자재나 채권을 받아야 했던 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들어오는 돈은 부족한데 유럽 대륙의 전쟁 자금은 금화나 은화로 된 경화로 지급해야 했으니, 아무리 영국이 부자 나라라고 해도 돈이 마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1809년 한 해에만 무려 4420만 파운드를 전비로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결국 의심쩍은 지폐만 넘쳐날 뿐 경화가 부족해지자 영국에서는 극심한 인플레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재기가 발생하여 더욱 물가가 오르는 악순환에 빠진데다, 금본위제 재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은행들도 재무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1811년에는 금융 불안정과 함께 수출액도 4390만 파운드로 뚝 떨어져 버렸습니다.  유럽 대륙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으나, 당시 영국처럼 산업과 금융이 발달한 나라가 없었으니, 그 타격은 당연히 영국이 가장 크게 입었습니다.  




('템즈 강에서의 선적'이라는 Samuel Scott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폴레옹에게 승기가 막 보이려는 시기인 1810년 마지막 날, 이 모든 것의 방향을 확 돌려놓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과의 공공연한 무역 재개 및 나폴레옹에 대한 사실상의 도전장이었거든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


이미 다룬 내용입니다만, 기억 전환을 위해 잠깐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서는 영국을 먼저 굴복시켜야 한다고 나름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상품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큰 유혹인지라 유럽 각국은 대륙 봉쇄령을 위반하고 밀수를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가 다스리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나폴레옹 본인도 '면허제'라는 이름 하에 몇몇 상인들에게 영국 상품을 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도록 해줄 정도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유럽의 주요 해안가를 아예 프랑스 영토로 병합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네덜란드 및 발트해에 면한 함부르크(Hamburg), 브레멘(Bremen), 뤼벡(Lubeck) 등 북서부 독일 소공국들의 병합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프랑스의 영토는 사상 최대로 확장되었고, 영국의 재정난이 더 심해지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대륙 봉쇄령의 이런 강압적인 실행은 영국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의 고통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동맹국들의 불신과 반발심도 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의 체면을 무시하고, 알렉산드르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다스리는 올덴부르크(Oldenburg) 공국까지 병합해버린 것은 당시 유럽 대륙의 양대 세력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싸늘한 적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아, 프랑스가 이토록 크고 아름다운 적이 있었던가 ??)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이런 병합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의 적국인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나폴레옹은 올덴부르크의 병합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제시했습니다.  즉, 2년 전 알렉산드르와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던 회담 장소였던 에르푸르트(Erfurt)를 보상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모욕으로 받아들인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보상안을 거부했고, 1810년 12월 31일 러시아 황제 칙령(ukase)으로 대응했습니다.  이 칙령은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크게 2가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1) 프랑스산 비단과 와인에 높은 관세를 부과

2) 중립국 선박의 상품이 "명확히" 영국산이 아닌 경우 러시아 항구에 입항 허용


이는 대표적인 프랑스 상품을 배척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상품에 대해 환영하는 초대장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냥 허술하게라도 가짜 서류만 만들어 제출하면 되었으니까요.  아는 나폴레옹의 패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장이었고 이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도발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의식 과잉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렉산드르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아무리 여동생이 가엾다고 해도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


당연히 그런 결정까지는 크고 작은 많은 다른 요소들이 관여했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역시 폴란드와 영국이었습니다.


서방 진출을 국가 정책으로 삼는 러시아에게 있어 폴란드는 서쪽에 확보한 소중한 발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르샤바 공국은, 아무리 독립국이 아니라 작센 왕의 개인 영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러시아에게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조그마한 공국에 불과할지라도 폴란드인들의 독립 정권이 있다는 것은 러시아령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1809년 제5차 대불동맹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서 꽤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람 전투의 결과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혹시라도 폴란드가 정식으로 독립 왕국으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러시아에게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이런 불안감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영리하게도 부지런히 조장했습니다.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를 비밀리에 이간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목표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폴레옹의 패망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때문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국경을 접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당시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오스만 투르크의 발칸 반도를 빼앗고 싶어 했는데, 그 강력한 경쟁자가 러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 관계라면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사이의 맹약인 틸지트(Tilsit) 조약을 깨뜨리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서 폴란드를 수단으로 정했습니다.  즉,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한다'라는 소문을 빈과 바르샤바에 꾸준히 퍼뜨린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1810년판 가짜 뉴스였던 셈인데, 메테르니히의 비밀 선동에 홀딱 넘어간 순진한 폴란드인들은 독립 열망에 부풀었고, 바르샤바 신문들은 독립이라는 희망찬 뉴스를 꾸준히 찍어댔습니다.  이런 상황은 빈과 바르샤바에 있던 러시아인들에 의해 그대로 알렉산드르에게 들어갔고, 그의 우려와 분노는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 쿠라킨(Alexander Borisovich Kurakin, Александр Борисович Куракин)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파리 사교계를 사로잡아 '다이아몬드 대공'으로 불렸던 쿠라킨 대사입니다.  그는 음식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고 코스별로 차례차례 서빙되는 러시아식 정찬 방식(service à la russe)을 프랑스에 전해 오늘날의 프랑스 코스 요리를 완성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프랑스와 러시아 간의 전쟁을 막아보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대로 화를 냈습니다.  나폴레옹이 바로 작년 오스트리아와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틸지트 조약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즉각 병력을 파견하여 나폴레옹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쳐부수어야 했습니다.  그런 편의를 바라고 나폴레옹은 폴란드 애인의 애원도 뿌리치고 폴란드 독립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핀란드까지 러시아에게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모두 잊고 러시아는 교활하게도 러시아령 폴란드 인근에 병력만 배치해두고 어느 쪽이든 승리하는 쪽에 붙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공국이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분쇄하자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침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건 황제들끼리 우정을 나눈 동맹국의 처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꾹 참고 우방국 대우를 해주었더니 나폴레옹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던 폴란드 독립에 대해 항의해온다 ?  이런 뻔뻔스럽고 무례한 행동에 대해 공손하게 대응할 나폴레옹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처가집인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의 획책 하에 끊임없이 러시아군의 이동 및 요새 강화에 대해 나폴레옹에게 고자질을 하며 이런 위기를 부추겼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과 이런 험악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알렉산드르는 각지의 요새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 것은 역시 폴란드 건이 컸습니다.  알렉산드르는 교황을 잡아가둔 나폴레옹의 폭거가 독실한 카톨릭인 폴란드 국민들에게 공분을 샀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더 많은 자치권과 좀더 관대한 헌법을 약속하며 폴란드인들에게 18세기때처럼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는 것이 폴란드에게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바르샤바에 그가 심어둔 밀사들은 바르샤바의 분위기를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왔습니다.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결국 폴란드에게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를 접한 알렉산드르는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국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폴란드인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역시 메테르니히의 획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나폴레옹은 냄새나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외교관인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Prince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입니다.  가짜 뉴스를 정치 외교에 활용하는데 있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르에게 전쟁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폴란드 외에도 또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었지요.  그것은 물론 영국, 좀더 정확하게는 영국과의 무역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드넓은 평원을 가진 대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홍차와 설탕, 면직물, 비단, 강철 등의 물품을 수입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남아도는 자국산 밀과 아마 등의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 뿐이었는데, 원래 그 가장 큰 고객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때문에 영국과의 교역이 막히자 러시아의 귀족들은 돈줄이 막혔고, 그 불만은 짜르 알렉산드르의 정권을 위태롭게 할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알렉산드로서는 그런 불만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거기에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나폴레옹이 여동생 시댁인 올덴부르크를 제멋대로 병합해버리고 (이건 가짜 뉴스에 의한 오해였지만) 폴란드까지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1810년 12월 31일, 그는 나폴레옹의 따귀를 갈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칙령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1811년 4월 2일자 편지에서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전쟁은 발발할 것이오.  나와 알렉산드르가 아무리 그를 막기 위해 노력하거나 프랑스와 러시아의 국익이 아무리 해를 입는다고 해도 말이오.  난 이런 상황을 자주 보았고, 내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쟁이 발발할 거라는 것은 마치 오페라의 줄거리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뻔한 이야기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바로 영국이오."


이제 나폴레옹의 제국은 몰락을 향한 폭풍 속으로 휘말려들어갑니다.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illigan Sloane

History of the Expedition to Russia Undertaken by the Emperor Napoleon  by Philippe-Paul Comte de Segur

https://www.britannica.com/event/Napoleonic-Wars/The-Continental-System-and-the-blockade-1807-11

https://georgianera.wordpress.com/2015/04/16/the-port-of-london-in-the-18th-century/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er_Kura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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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까님 2019.01.28 0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짜뉴스가 힘을 갖는 건 불신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빙판길에 출근 잘 하시고 곧 설인데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십시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석총 2019.01.28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헬게이트가 열리는 군요

  3. 웃자웃어 2019.01.28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나폴레옹도 이미 러시아 본토로 깊숙히 진군하면 패배할수밖에 없단걸 아일라우 전투때 알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러시아에 쳐들어 갔을까요?

    • 하이텔슈리 2019.01.28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폴레옹은 러시아 본토 깊숙히 진군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쳐들어가서 빨리 러시아 주력을 격파하고 차르를 협상장으로 불러내 굴복시키려는 게 전쟁의 목적이었죠. 문제는 러시아군이 안싸우고 계속 도망치고 이걸 쫓아가다보니 모스크바까지 가버린 것일 뿐이에요. 모스크바 함락 시점에서 이미 나폴레옹의 계획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시점이었던 거죠.

    • 다부 2019.01.30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러시아를 육로로 직공하는 건 위험하니
      발트해안 도시들을 동원해서 리보니아에 해상보급망을 설치하고
      리보니아의 거점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노린다는 계책을 나폴레옹에게 건의를 했는데,

      나폴레옹이 "그런 성가시고 시간 걸리는 방법 아니라도 내 작전술로 간단히 쳐 없앨 수 있어"
      라고 판단해서 바로 육로로 직공했죠.

      나폴레옹은 천재지만 자신의 재능을 너무 과신해서 일이 잘 못 되었을 때를 대비하지 않고
      작전술에 너무 의존함으로서 원정에 실패했죠.
      만약에 루이 니콜라 다부의 계책대로 신중하게 러시아를 리보니아에서 압박하는 작전을 썼다면
      당시 러시아도 상황이 어려웠던 만큼 "보급문제가 해결된 대육군"을 상대로 패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보로디노 전투때에도 루이 니콜라 다부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우회기동해서 쳐야 된다고 건의했는데 역시 나폴레옹에게 묵살당했죠.
      이 때에도 나폴레옹이 루이 니콜라 다부의 건의대로 했다면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죠.

    • 웃자웃어 2019.01.30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이텔슐리님, 애초에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서도 비슷한 전술을 썼는데도 러시아군에게 고전했습니다. 폴란드에서도 크게 고전했는데, 그보다 더 광활한 러시아라면 얼마나 더 고전하겠습니까? 그걸 모를리가 없는데도 러시아를 공격했고, 현지조달을 바탕으로 하는 전술을 유지했다는것 자체가 미친짓이죠.

  4. 카를대공 2019.01.28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나폴레옹 전쟁의 절정(?)인 러시아 원정의 길이 시작되는군요.
    예나 전투 때부터 그랬습니다만,전성기에 비해 한물 간 판단력의 나폴레옹이 어떻게 그려질지 흥미진진 합니다.

  5. 안드레이 2019.01.29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메테르니히의 활약이 돋보이네요 비스마르크도 그렇고 역시 외교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은 후세에서 보면 어떻게 저런 생각이 가능한가 신기하기만 합니다

  6. nashorn 2019.01.30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마지막..

  7. 샤르빌 2019.01.30 2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막연하게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에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홧김에 전쟁이 터진줄 알았더니 역시 온갖 원인과 전조로 전운이 감돌고 있었네요.. 메테르니히의 공작과 폴란드 문제..

  8. starlight 2019.02.02 2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러시아 원정은 그 역사가 만약이 없다라는
    명확한 반증이죠. 2000km가 넘는 전역을 보급도 수송도
    병력 충원도 지연되고 끊어지고 소멸되고,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통신도 분절되고 병력 통제도 안되고, 자연사하듯 군마는 끊임없이 고꾸라지고, 병력들은 이탈하고 와해되고 이질에 쓰러지고 전투에서 소모되고,
    눈발에 얼어 동상으로 죽고 탈진과 아사로 학살아닌 학살같은 참상이죠. 아비규환입니다.

  9. 알키비아데스 2019.02.08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헨리 키신저가 메테르니히 숭상할만 하네요

* 러시아와 프랑스의 대표 상남자와 그들의 여자 이야기를 각각 1편씩 재업 합니다.




(표트르 바그라티온 장군입니다.  약간 매부리 코인데요 ?)


 


프랑스의 상남자라면 저는 단연 장 란(Jean Lannes)을 뽑습니다만, 러시아에도 상남자로 불릴 만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그라티온 장군입니다.  동향 사람인 스탈린이 나중에 히틀러에 대한 대반격 작전 이름을 바로 이 장군의 이름으로 붙였었지요.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정식 명칭은 Prince Pyotr Ivanovich Bagration, 즉 바그라티온 왕자였습니다.  왕자라니, 바그라티온이 로마노프 왕가의 아들이었나요 ?  아닙니다.  일단 여기서 prince라는 명칭은 왕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공작(duke)보다는 더 높으나 왕(king)보다는 더 낮은 직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prince라고 해서 꼭 왕의 아들이거나 나중에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오스트리아의 외교관 메테르니히도 prince의 작위를 받았고, 나폴레옹의 참모장이었던 베르티에도 prince가 됩니다.  우리 말로는 '왕자'가 아니라 그냥 '대공' 정도가 좋은 번역으로 보이지만, 사실 prince 바로 밑의 직위에 archduke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대공 (대공작)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왕공'이라는 손발이 오글거리는 단어 외에는 적절한 단어가 없습니다.  아무튼, 바그라티온은 분명히 왕가의 자제였습니다.




(현재의 그루지아, 아니 이젠 영어식으로 조지아의 지도입니다.  2008년도 남 오세아티아와의 국경분쟁으로 인해 러시아와 전쟁을 치룬 나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 지도 중앙의 고리(Gori)라는 도시까지 러시아 군이 점령했엇지요.  원래부터 그루지아는 영어로는 Georgia인데, 당시 조지아 주에 사는 어떤 멍청한 미국인이 '러시아 군이 조지아를 침공했다는데 나 피난가야 하는 거냐 ?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냐 ?'라고 게시판에 올린 것이 유머 코너의 인기 기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출생지는 키즐라(Kizlyar)라는 곳으로서, 지금은 러시아 내 다게스탄(Dagestan) 공화국의 카스피 해 연안 지방이었습니다.  당시 그 곳은 그루지아(영어로는 Georgia) 땅이었고, 그루지아를 지배하던 바그라티오니(Bagrationi) 가문이 다스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루지아는 7세기 무렵 아랍 세력에게 정복당하기도 했으나, 9세기에 아쇼트 1세(Ashot Kurapalat)가 최초의 바그라티오니 왕조를 설립하면서 그 번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유럽에 그루지아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제1차 십자군이 벌어지던 11세기 무렵이었는데, 이때 그루지아와 대적하던 페르시아 인들이 그루지아를 '늑대의 땅'이라고 부르던 것이 유럽인들에게 '구륵(Gurg)'이라고 불리면서 이름이 그렇게 굳어졌다는 말도 있고, 용을 무찔렀다는 성 게오르기우스 (St. Georgius)를 숭배하는 땅이라고 해서 십자군들에게서 Georgia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것들은 다 외국이 그루지아를 부르는 이름(exonym)이고, 정작 그루지아 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Sakartvelo, 즉 사카르트벨로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저 위의 꼬부랑 글씨가 그루지아 글자로 쓴 표트르 바그라티온이라는 글자입니다.  아래는 러시아 키릴 문자로 쓴 표트르 이바노비치 바그라티온이라는 글자입니다.  저 대학 다닐 때 교양 러시아어 한 학기 들었습니다.)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던 그루지아 왕국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신의 채찍, 즉 몽골 제국의 침입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이후 뒤를 이어 나타난 오스만 투르크 및 페르시아 왕국의 거듭된 침략으로 쇠약해졌습니다.  게다가 바그라티오니 왕가의 내분까지 겹쳐 왕국이 여러 개의 소왕국으로 조각나기도 했지요.  1783년, 페르시아의 침략을 견디다 못한 동부 그루지아의 왕은 러시아와 방위 협정을 맺습니다만, 정작 1785년과 1795년에 페르시아의 대대적 침공으로 그 수도인 트빌리시(Tbilisi)가 함락되고 많은 주민들이 학살될 때 러시아는 그저 팔짱만 끼고 구경을 할 뿐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1800년 12월 러시아는 아예 조약을 깨고 동부 그루지아를 합병하고 바그라티오니 왕조를 폐지해버렸습니다.  이때 러시아의 짜르는 바로 알렉상드르의 아버지이자 곧이어 암살당하는 파벨 1세(Pavel I) 였습니다.  그가 그루지아를 합병한 것은 어디까지나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왕 그루지아 12세(George XII)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핑계를 달았지요.  그루지아의 귀족들은 이 조치에 강경하게 반항했으나, 러시아의 짜르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귀족들을 모조리 체포함으로써 이 저항도 곧 수그러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부 그루지아도 몇년 후에 병합되어 버렸습니다.   




(동부 그루지아의 마지막 왕 그루지아 12세입니다.)


 


결국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왕족들은 러시아의 하급 귀족으로 통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치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에 대해서는 눈에 확 띄는 대우를 해주어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었지요.  그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 바로 표트르 바그라티온이었습니다.   


바그라티온은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적자 같은 귀한 신분은 아니었고, 선대 그루지아 왕의 사생아였던 이샤크 벡(Ishaq Beg,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알렉산더로 개명)의 손자였습니다.  아샤크, 아니 알렉산더는 본국에서의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뒤 러시아로 달아나, 러시아 군 장교로 생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이자 바그라티온의 아버지인 이반(Ivan Alexandrovich Bagration)도 러시아 군에서 대령 계급까지 지냈습니다.  이런 배경 덕분에, 표트르 바그라티온은 그저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1782년 17세의 나이에 러시아 남부의, 아버지가 근무하던 연대에 하사관으로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남부의 이런저런 소규모 전투에 참전하면서 경력을 쌓은 그는 10년 후인 1792년 비로소 대위 계급으로 임관했는데, 이때부터는 정신이 핑핑 돌 정도로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2년 뒤 소령 에 이어 같은 해에 중령까지 진급했고, 다시 4년 뒤인 1798년에는 대령, 바로 또 1년 뒤에는 장군으로 승진했습니다.  사실 바그라티온이 뭐 별로 전공을 쌓은 것도 없는데 이런 초고속 승진을 시켜 주었던 것은 러시아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호적수 제1 후보였을 만큼 당대의 명장이었던 러시아의 수보로프 장군입니다.  그는 러시아 인들 뿐만 아니라, 당시 스위스 맟 이탈리아 등의 현지인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1799년에는 수보로프(Suvorov) 장군의 이탈리아-스위스 원정에 참전하면서, 수보로프 장군의 높은 평가를 받으며 비로소 군 내에 실력으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이 1796년의 1차 이탈리아 침공 때 근거지로 삼았던 도시 브레시아(Brescia) 점령 작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러시아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전혀 뜻 밖의 이유에서였습니다. 




(좀더 젊은 시절의 파벨 1세의 모습입니다.  저 맹한 8시 20분 스타일의 눈꼬리가 저 양반 얼굴의 특색인 모양입니다.  모든 그림에서 그런 모습으로 그려졌네요.)




제2차 대불 동맹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그는 러시아 궁정 내에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인물이 되었고, 특히 파벨 1세가 그루지아 병합을 획책하고 있는 마당에 그루지아 망명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입지가 올라가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1800년 당시 바그라티온 장군은 35세의 한창 나이였는데, 그 나이 때의 상남자가 가장 관심을 가질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  예, 바로 여자, 그것도 예쁜 여자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문과 재산이 화려한 여자라면 더욱 좋았겠지요.  당시 러시아 상류 사회에서 최고의 신부감으로 이름을 떨치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카테리나 스카브론스카(Ekaterina Skavronska)였습니다.  당시 방년 17세였던 이 귀족 아가씨는 나폴리 전권 대사였던 스카브론스키(Pavel Martinovich Skavronsky) 공작의 딸이자 포템킨 (Potemkin) 왕공의 조카 딸로서 으리으리한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미모의 아가씨였다는 점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 상트 페테르부르그 사교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예카테리나 2세 여제가 세운 학교에서 서구적인 교육까지 받은, 당대의 엄친딸이었습니다.  당연히 바그라티온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던 여자는 바로 이 아가씨였습니다.




(젊은 시절의 예카테리나 바그라티온 입니다.  이쁜가요 ?  흠... 금발이라던데 여기서는 흑발이네요 ?)




당시 파벨 1세는 뜬금없이 말타 기사단장의 직위를 맡는 등 그 괴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바그라티온이 예카테리나를 흠모하고 있다는 별로 놀랍지 않은 (당시 이 아가씨에게 혹하지 않은 남자가 없었으니까요) 사실을 알고는, 어느날 갑자기 바그라티온 장군과 예카테리나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리고는 1800년 9월 2일 이 둘을 결혼시켜 버립니다.  이 조치는 아무리 파벨 1세가 괴짜라고 해도 너무나 당혹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당사자인 바그라티온조차도 깜짝 놀라고 황당해 했다고 합니다.  또 한명의 당사자인 예카테리나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 아가씨는 팔렌 공작(Peter von der Pahlen)이라는 중년의 미남과 사랑에 빠진 상태였거든요.   팔렌 공작보다 20살이나 젊은 그루지아산 종마 바그라티온이 예카테리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을까요 ?  예, 결정적으로 바그라티온은 상남자이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못 생긴 편이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을 피해 러시아에 망명을 해온 프랑스 귀족 장군이던 랑게론 공작(Louis Alexandre Andrault de Langéron)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부유하고 윤기가 흐르는 아가씨는 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바그라티온은 그저 일개 군인일 뿐이라서 말투나 행동거지도 촌티가 난다.  게다가 그는 매우 못 생겼다. 그의 아내가 되는 아가씨의 얼굴이 하얀 만큼, 그의 얼굴은 시커멓다.  그 아가씨는 천사처럼 아름답고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미녀들 중 가장 활발한 미녀이다.  그녀는 결코 이런 남편과 행복하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랑게론 장군은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도 활약했고, 부르봉 왕가 복위 이후에도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 군에서 주로 투르크 군과 싸웠습니다.  1831년에 콜레라로 사망했습니다.)




속내야 어쨌건 간에,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제일의 미녀를 와이프로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결혼 1달 뒤인 1800년 10월 15일에는 러시아 제국의 왕자(prince, Kniaz)라는 작위까지 부여받았습니다.  바로 그 두달 뒤인 12월에 파벨 1세는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바그라티온의 고향인 동부 그루지아를 병합해버리지요.  어찌 보면 바그라티온은 러시아 엘프 미녀를 한명 받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어 버린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그 누구에게도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일단 파벨 1세는 목숨으로서 그 댓가를 치렀습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애인을 빼앗겼기 때문은 아니었겠습니다만, 팔렌 공작이 주요 역할을 맡아서 자행된 암살 사건에서 파벨 1세가 1801년 3월에 살해된 것입니다.  그리고 억지로 한 결혼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예카테리나 바그라티온 여사를 오래 붙들어 매지 못했습니다.  그리 원만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은 1805년 예카테리나가 특수 제작한 마차를 타고 서유럽으로 훌쩍 떠나버리면서 끝장이 났습니다.  상남자 바그라티온이 대번에 홀아비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812년, 29세가 된 바그라티온 왕녀의 초상입니다.  여기서는 금발로 그려졌네요.)




남편 덕에 왕녀 타이틀이 붙은 이 아름다운 20대 초반의 여인은 가는 곳곳마다 대환영을 받았습니다.  그 미모와 재치, 교양은 물론이고, 특히 그 의상이 대단히 센세이셔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각종 파티에 속옷도 입지 않은 채 거의 속이 비쳐보이는 얇은 모슬린으로 된 시-쓰루 의상을 즐겨 입고 나타났기 때문에, 그녀는 Le Bel Ange Nu, 즉 아름다운 누드 천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습니다.  설마 점잖은 19세기 초 유럽 상류 사회에서 그런 옷을 입고 다녔을까 싶겠습니다만, 사실 당시에 그런 누드 톤의 시-쓰루 의상이 상당히 유행했습니다.  1802년~1803년의 짧은 아미앵 평화 기간 중 파리를 방문한 영국인들은 일부 파리 여성들이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여자들이 벌거벗고 다닌다' 며 놀라워 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Bernard Cornwell의 역사 소설 Sharpe's Waterloo 편을 보면, 주인공 샤프 중령의 와이프인 제인이 파티에 가기 위해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으면서 가슴을 강조하기 위해 젖꼭지에 붉은 루즈를 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알고 보면 나폴레옹 당시의 여성 패션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것이지요.   훗날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영국 수상을 지냈던 팔머스톤 경도 젊은 시절 이 바그라티온 왕녀를 만나 보았는데, 그 인상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투명한 인도제 모슬린 옷만 입고 있었는데, 몸에 착 달라붙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천사같은 얼굴에 백옥같은 피부, 푸른 눈, 탐스러운 금발 머리를 가졌고, 30대의 나이에도 15살 짜리 소녀 같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1802년, 당시 18살이던 팔머스톤 경의 모습입니다.  팔머스톤 경은 바그라티온 왕녀보다 1살 어린 나이였습니다.)




팔머스톤 경이 바그라티온 왕녀의 미모에 혹했던 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당대의 지성인 괴테도 이 왕녀를 만나보고는 그 미모에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바그라티온 왕녀가 이런 옷차림을 하고 유럽의 지성들과 철학과 정치만을 논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가는 곳곳마다 공공연하게 스캔달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작센의 외교관인 폰 슐렌베르크 공작(Friedrich von Schulenberg), 뷔르템베르크의 왕자, 영국 귀족 스튜어트 경(Charles Stewart), 바이에른의 루드비히(Ludwig) 왕자 등 으리으리한 사람들의 그녀의 침대를 거쳐갔는데,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 메테르니히(von Metternich)와 사실혼 관계에 들어가서 딸까지 두었습니다.  메테르니히와 그녀 사이에서 난 이 딸은 메테르니히 가문에서 키워 시집을 보낼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을 물먹인 남자 메테르니히입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집요하게 괴롭힌 배경에는 바그라티온 왕녀가 있었습니다.)




와이프가 이렇게 그야말로 유럽을 뒤집어 놓고 다니는 동안, 남편인 바그라티온은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 와이프에게 돌아올 것을 부탁했습니다.  하도 애절한 편지를 하도 많이 보내는 바람에 유럽에서 그녀와 있던 친구들조차 '나 같으면 돌아간다' 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으나, 이 아름다운 왕녀는 시커먼 얼굴의 그루지아 상남자에게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여자는 남편에게 꼬박꼬박 소식을 보내기는 했습니다.  그 내용은 100% 청구서였습니다.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해도 연예인이 아닌 이상 그 인기로 돈을 벌 수는 없었고, 오히려 그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생활비와 유흥비를 써대야 했습니다.  그 비용 청구서만 꼬박꼬박 남편에게 날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남자=호구였는지, 바그라티온 장군은 이 청구서를 성실히 지불하여 와이프가 돈 때문에 창피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오죽하면 바그라티온 왕녀의 친모조차도 자기 딸의 뻔뻔스러움과 낭비를 비난했는데, 이 우직한 그루지아 상남자는 자신의 장모에게 '내 와이프를 비난하지 말라'며 역정을 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과의 전투가 일단락된 1808년, 그 동안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의 부인에게 훈장이 주어졌는데, 이때 바그라티온 왕녀에게는 훈장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남남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바그라티온은 밸도 없이 "내 와이프인데 왜 훈장을 못 받나" 라며 항의를 했습니다.




(정식 부인을 두고 바그라티온 왕녀와 놀아난 메테르니히가 부도덕하다고요 ?  당시 귀족 사회에서 그런 일은 아주 많았습니다.  이 여자는 당시 메테르니히의 또다른 러시아 출신 정부였던 도로테아 리벤 Dorothea von Lieven 입니다.  이 여자도 귀족 가문의 유부녀로서 러시아의 런던 대사의 와이프였는데, 런던에서 메테르니히와 놀아났을 뿐만 아니라 저 위에서 언급한 팔머스톤 경과도 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제 눈에는 이 여자가 훨씬 더 현대적인 러시아 엘프녀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비극이라고, 이런 호구같은 남자 바그라티온을 사랑하는 여인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짜르 알렉상드르의 여동생이자, 바그라티온 왕녀와 동명이인인 예카테리나(Ekaterina Pavlovna) 공주였습니다.  그녀는 이 듬직한 장군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는데, 바그라티온은 이 공주님의 구애를 냉정하게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는 자신의 적법한 아내 예카테리나 바그라티온 뿐이라는 것이었지요.  심지어 나폴레옹도 (물론 정치적 이유에서였지만) 이 예카테리나 공주에게 구혼을 할 정도였지요.  그러나 바그라티온이 완강하게 구애를 거부하자, 결국 예카테리나 공주는 자신의 사촌뻘이자 뷔르템베르크의 왕자이자 나중에 왕이 되는 빌헬름 1세 (Wilhelm I)와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의 초상입니다.  흠... 바그라티온이 그녀의 애정 공세를 거절한 이유가 짐작이 가는데요...저 위에 나온 다른 러시아 여자들과는 확실히 좀 차이가 나네요.)




자신의 매정함 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그라티온 왕녀는 아예 비엔나에 둥지를 틀고 바그라티온 장군의 주머니로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살롱은 반-나폴레옹 인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결국 오스트리아가 다시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제5차 대불 동맹 전쟁에 뛰어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남편 바그라티온의 전사, 그리고 나폴레옹의 패망 이후에도 그녀는 화려한 삶을 계속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패망 이후 그녀는 거처를 비엔나에서 파리로 옮겼고, 발작(Balzac)이나 스탕달(Stendahl) 등의 대문호들과도 사귀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명작 레미제라블 끝부분에, 테나르디에가 마리우스로부터 돈을 뜯어내려고 귀족으로 변장을 하고 찾아왔을 때, 테나르디에가 허세를 부리며 '아마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그라시옹 공작 부인의 살롱에서였나요 ?' 하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바그라시옹 공작 부인이 바로 이 여자입니다.  바그라티온 왕녀는 이후에도 잘 먹고 잘 살다가 결국 1857년 74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베네치아에서 죽었습니다.  아마 된장녀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삶이었겠지요.


 


(베네치아에 있는 예카테리나 바그라티온의 묘비입니다.  이름도 아예 서구식으로 캐서린이라고 써놓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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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왁굳좋아 2018.04.18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일등!

  2. 헤메메 2018.04.19 0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어요!! 근데 아직도 ♪♩♬♩라는 표현 쓰시나요?

    • 헤메메 2018.04.19 0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글은 예전글 재업이군요. 근데 된.장.녀 금칙어인가봐요. 진보적인 글을 쓰시는 분이고 다정한 글을 쓰셔서 몰랐는데 예전에는 차별적인 단어나 옛 유럽남성들의 나쁜버릇(사실 이건 너무 약한 표현 같아요)을 옹호하는 것처럼 쓰신 적도 있으셨군요. 그래도 요즘에 올라온 글에는 그런게 없어보여서 나시카님 글이 좋아요.

    • 이산이아닌가벼 2018.04.19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분명 지금 기준으로 보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할 기준이지만, 그 당시에는 만연하고 있었으니 무조건 비난하는 것도 무리가 있죠. 예를 들어 성군이라는 세종도 자식의 망나니질-살인-에 대해서 옹호했는데 지금 기준으로는 이런 살인죄를 옹호한 세종을 비난해야 마땅하겠지요. 그렇지만 그 당시 기준에서는... 그렇죠. 무조건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상황도 고려해야되지 않을까 싶네요.

    • 수비니우스 2018.04.19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했다고 하는게 아니라 시대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어쩔수 없었다 정도 아닐까요 200년 뒤 사람의 기준으로 지금 우리를 본다면 우리도 어딘가 조금씩 문제가 있을테니까요

    • nasica 2018.04.19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비난할 건 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특별히 된.장녀라는 단어 자체만 문제가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헤메메님의 댓글을 읽고 생각해보니, 바그라티온 부인의 경우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강제로 결혼했으니 바그라티온을 철저하게 이용만 해먹었다는 비난을 하는 것이 매우 불합리하네요.

      결과적으로 헤메메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된.장녀라는 표현을 바그라티온 부인에게 쓴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 헤메메 2018.04.19 22: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산님하고 수비님 말씀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헤메메 2018.04.19 2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시카님 친절한 덧글 감사드려요.

  3. 으흐흐 2018.04.19 0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같으면 이혼하고 짜르 매부가 됐을텐데 말이죠. 저 당시 러시아 정교도 이혼은 안 되었겠죠? 그러고보니 자식은 있었나요? 두 사람 사이에?

    • 이산이아닌가벼 2018.04.19 1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2번까지는 가능하고 3 번째는 무조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살아야해서 3 번째는 심사숙고했다고 그러네요.

  4. 제리 2018.04.20 0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RLovWXcjiZI
    여기 들어가 보면 훌라브른 전투에서 활약하는 상남자 바그라티온이 나옵니다.(흰색 털모자 쓴 남자)
    물론 배우지만 매우 미남으로 나옵니다.

  5. 웃자웃어 2018.04.21 1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지아라....다른 나라와 외교를 할때는 무조건 자국의 역량도 감안해야 한다는걸 알려주는 반면교사이죠.

  6. sfdsf22 2018.04.22 07: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시카님 워털루 전투까지 들어가려면 한 5년은 기다려야 하나요?

  7. sfdsf22 2018.04.23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혹시 나폴레옹 전쟁 다음의 연재 계획도 있으신가요??

  8. 자방 2018.11.22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데요 ㅎㅎ

  9. ㅇㅇ 2019.02.22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라는 표현 자체가 이상한것 같지 않은데요. ♪♩♪♩ 맞잖아요?

  10. ㅇㅇ 2019.02.22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이 ♫♪♫ 왜 저래 나오냐 된-장-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