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06 01:05

1806년 11월,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다부를 돕지 않았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욕을 먹어야 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었고, 그야말로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도망치던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베르나도트를 포함한 프랑스군은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강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군단은 뮈라의 예비 기병대 및 술트의 군단과 함께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있었지요.  


프랑스군의 맹추격에 퇴로를 끊긴 블뤼허는 11월 5일, 과거 한자 동맹의 주요 항구 도시인 뤼벡(Lübeck)에 입성했습니다.  당시 뤼벡은 프로이센의 영토가 아닌 중립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의 패잔군 약 1만7천이 성 앞에 나타나자 입성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블뤼허는 막무가내로 성문을 열고 입성했습니다.  중립이고 나발이고 당장 갈 곳이 없었던 것이지요.  블뤼허는 절대 이 도시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도시 의회를 달랬습니다.  이는 사실 말이 안 되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프로이센군이 순순히 항복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바닷가에 몰린 프로이센군이 도망칠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블뤼허가 그런 약속을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뤼벡 시민들에게서 병사들을 먹일 대량의 술과 음식, 말 사료와 함께 병사들의 밀린 급료를 지불하기 위한 거액의 현금을 순순히 받아내려면 뭔가 약속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아니나다를까, 당장 다음날 새벽 프랑스군이 뤼벡 앞에 나타나자 블뤼허는 이 도시의 성벽에 의지하여 결사 항전을 선언했습니다.  




(오늘날의 뤼벡시 전경입니다.  덴마크 국경 인근에 있습니다.)



(당시 뤼벡 시의 지도입니다.  강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경악하는 사람들은 뤼벡 시민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뤼벡 시내에는 1천8백의 스웨덴군도 있었던 것입니다.  제4차 대불동맹전쟁에서 전혀 존재감없는 동맹국이었던 스웨덴군은 당시 프로이센군과 함께 하노버 지방의 탈환을 위해 발트해 연안에 와 있었는데, 프로이센이 예나-아우어슈테트에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참패를 당하자 허겁지겁 스웨덴 본국으로 후퇴하던 중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배편을 구해 스웨덴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10월 31일 중립 도시 뤼벡으로 들어왔던 것인데, 바람 방향이 맞지 않아 출항을 못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지도 않게 프로이센군과 프랑스군이 중립을 무시하고 이 도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겠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


뤼벡은 트라베(Trave)라는 강의 만곡부에 위치한 도시였고, 비록 낡았지만 과거에는 꽤 튼튼했던 성벽으로 보호된 도시라서 잘 하면 프랑스군의 공격으로부터 적어도 며칠, 어쩌면 몇 주 정도 버틸 수 있다고 블뤼허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침 6시부터 시작된 실제 전투의 결과는 그 기대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튼튼하다고 믿었던 북문이 베르나도트의 강력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오후 1시경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전투가 장기화될 것이라고 믿고 사령부인 시내 여관에 머물고 있던 블뤼허는 갑자기 프랑스군이 시내까지 들이닥치자 깜짝 놀라 아들과 함께 간신히 몸을 빼 탈출했으나, 그와 함께 있던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등 참모진은 고스란히 프랑스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야 할 정도로 베르나도트의 공격은 훌륭했습니다.  이 곳에서 대략 병력의 절반 정도만 건져서 도망쳤던 블뤼허도 갈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다음날 자존심 강한 블뤼허는 체면을 위해 "빵도 탄약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항복한다" 라는 문구를 항복 문서에 집어넣는 것으로 만족하고 베르나도트와 뮈라, 술트에게 항복해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북해의 괴물'로 재탄생하시게 되는 샤른호스트 장군입니다.  평민 출신으로서 승진과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나폴레옹에게 탈탈 털린 프로이센이 정신을 차리고 개혁을 하면서 빛을 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포로가 되어 고생한 것도 나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 좀 무리수겠지요.)



(뤼벡 시장으로 사용되던 광장에서 벌어진 혈투입니다.  뤼벡 시민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입니다.)




블뤼허는 그렇게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세우고 항복하면 끝이었겠지만, 그의 고집 때문에 정작 불벼락을 맞아야 했던 것은 중립이었던 뤼벡 시민들이었습니다.  당시 전쟁의 불문률에 따르면 항복한 도시에 대해서는 약탈이 일체 허가되지 않았지만 공성전 끝에 성문을 깨뜨리고 탈취한 도시는 적어도 하루 정도는 병사들이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습니다.  뤼벡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벌어진 약탈과 강간, 살해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은 물론 프랑스군에게 있었지만, 블뤼허도 적어도 일부 책임은 져야 했습니다.  베르나도트를 비롯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뤼벡이 중립 도시이며, 프랑스군에게 저항한 것은 프로이센군일 뿐 뤼벡 시민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름대로는 미쳐 날뛰는 병사들을 제지하기 위해 노력은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맹장 우디노(Oudinot)도 그렇게 약탈에 광분한 병사들을 제지하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할 뻔 한 일이 있었을 정도로, 그런 병사들을 말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교들도 그냥 적당히 말리는 척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름 신사인 척 하려 노력했던 베르나도트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베르나도트에게 색다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포로로 잡힌 적군 중에 프로이센군 외에 스웨덴군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웨덴군 1천8백은 원치 않았던 전투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는지 거의 전부가 그대로 항복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들 말고도 프로이센군도 약 4~5천 정도가 포로로 잡혔는데, 이들은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 포로들을 마치 선심쓰는 것처럼 스페인 국왕에게 보내며 '농삿일에 쓰시든 건설 현장에 쓰시든 마음대로 하시라'며 마치 노예처럼 취급할 정도였으니까요.  베르나도트는 그런 양심에 찔리는 살육의 현장에서 만난 이 운 나쁜 외국 군인들을 프로이센군처럼 모질게 대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들을 포로가 아니라 마치 조난 당한 선원들처럼 대해주었고, 특히 그 총지휘관인 뫼르너(Carl Carlsson Mörner) 장군을 비롯한 장교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하게 마치 손님처럼 대해주었습니다.  오쥬로(Augereau)와 란(Jean Lannes)의 부관으로 일했고 나중에 매우 뛰어난 회고록을 남긴 마르보(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 장군도 그 회고록에서 '베르나도트는 이 이방인들에게 자신이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특별히 애를 썼다'라고 다소 비꼬는 투로 기술한 바 있습니다.  베르나도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뤼벡 전투의 상황이 그렇게 다소 양심에 찔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지 이 처음 보는 스웨덴인들, 그것도 꾀죄죄한 포로들로부터 나중에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베르나도트는 평생 두 번 다시 이 스웨덴 사람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참한 전쟁 범죄가 벌어지던 뤼벡에서 이 별 뜻 없이 행한 작은 선의가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되돌아옵니다.



-- To be continured



** 갑자기 여기서 마태복음 25장 35절 ~ 40절 부분이 생각나네요.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한 이웃에게 도움을 베풉시다.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Source : The Life of Napoleon Bonaparte by William M. Sloane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XIV_John_of_Swede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C3%BCbeck

https://en.wikipedia.org/wiki/Carl_Carlsson_M%C3%B6rner

https://en.wikipedia.org/wiki/Gebhard_Leberecht_von_Bl%C3%BCcher

http://kcm.co.kr/bible/kor/Mat25.html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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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애경 2018.08.06 0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태복음의 저 구절이야말로 예수님이 설파하신 사랑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전쟁에 죄없이 휘말려 고통당한 뤼벡시민들도 참 안됐네요!
    전쟁으로 피해보는건 항상 엄한 사람들뿐...

    잘보고 갑니다.

  2. 잡지식 2018.08.06 0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심없는 선행은 이자가 큰 법이외다'
    -파우스트-

  3. TheK2017 2018.08.06 0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오늘 그 계기가 되는 암시가 열린
    느낌인데 맞겠죠. ^ㅇ^*

  4. Park Sang yeoul 2018.08.06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덕분에 잘 보고있습니다!

  5. reinhardt100 2018.08.06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뤼허의 총참모장이었던 샤른호르스트에 대해서 흔히들 '아버지가 빈농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출신으로써 독일영방 소국에서 사병부터 진급하여 장성계급까지 진급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이건 붉은 프로이센군을 추구했던 동독 국가인민군과 동독정부의 선전 때문입니다. 사실, 샤른호르스트의 아버지는 '융커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소지주급의 부농 출신에다 프로이센군의 고참 하사관으로써 장기 복무까지 했던 지역 유지급이었던 사람'입니다. 왜? 동독군이 붉은 프로이센군을 추구했냐고요? 동독의 영역 상당수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핵심 지역이었던데다가 무엇보다도 서독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만을 계승하며 독일제국의 정통성은 모두 포기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련의 괴뢰 같다는 이미지가 있던 동독으로써는 프로이센에 대한 향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동독은 군의 사상적 본류는 에스파냐 내전 당시 공화국 측으로 참전했던 '에른스트 텔만 대대'로 하였지만 막상 운용의 본류는 프로이센군으로 채택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샤른호르스트가 하노버 같은 독일영방 소국을 돌아다니면서 복무하다가 프로이센군에 지원할 때 이력서 말미가 꽤나 당시에 센세이셔널 했습니다. 일개 중령밖에 안 된 사람이 내건 조건이 워낙 파격적이었으니까요. '본인의 지원서를 접수 후 채택해주실 경우, 귀족작위를 수여해 줄 것과 군의 총참모장 자리를 약속해주시기 바랍니다'였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프로이센 국왕은 오히려 이를 다 받아주었죠. 샤른호르스트가 나름 학자 군인으로써 꽤나 날렸거든요.

    샤른호르스트가 의외로 간과되는게 프리드리히 2세 시절, 음지의 총참모장으로써 활약했던 안할트의 뒤를 이어 프로이센 참모부를 재건하였다는 것과 프로이센 상층부 관료들과 왕족들을 윽박질러 장교단의 개방화 및 농노 해방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겁니다. 전자야 워낙 유명해서 넘어가더라도 후자는 꽤나 중요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희대의 전술가로써 대승을 몇차례나 거두었지만 하나 큰 실수를 했던 게 장교단을 귀족 출신들로만 채우게 하는 일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 장교단은 '유능하지만 계급 고정성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평가를 이미 7년 전쟁 이전부터 들을 정도로 경직성이 심각했었는데 장교단 개방을 통해 일거에 해소해 버린 겁니다. 흔히, 1807년 농노해방령이 관료계급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샤른호르스트가 꽤나 이를 강경하게 주장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병력 부족 해소 때문입니다. 인구 절반이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 국민 개병제를 대거 확장하지 않으면 병력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니까요.

  6. 2018.08.07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그늘버섯꽃 2018.08.07 0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지식들은 다 어디서...와~
    감탄하고 갑니다

  8. 투팍아마르 2018.08.07 16: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유럽계 백인들은 정작 성경에 나오는 저 좋은 구절을 행할 흉내조차 내지는 않았다는것이 에러죠...^^

    • ㄴㄴ 2018.08.23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너무 인종주의에 치우친 말처럼 들릴 수 있네요. 동서양사 모두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행태는 결국 똑같습니다. 차이는 그때그때 얼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냐의 것 뿐이었죠.

  9. 카를대공 2018.08.07 2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베르나도트가 왕이 되는 밑밥이 깔리는군요.

    그런데 나폴레옹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프로이센을 개무시 했을까요?
    이전에도 그렇고 이후에도 멸시에 가까운 감정을 일관되게 보여주던데 이유가 있나요?

  10. 석공 2018.08.07 2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은 본문보다 마지막 성경구절이 더 마음에 와 닿네요...^^

2017.02.12 21:47


가스코뉴의 열혈남아 장 란(Jean Lannes)에게 있어 나폴레옹을 따라 전투에 나간다는 것은 새로운 공로와 그에 따르는 영광을 얻을 좋은 기회였고, 그는 한번도 그런 기회 앞에서 머뭇거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809년 4월 19일 밤, 노이슈타트(Neustadt)의 나폴레옹 앞에 나타난 란은 몹시 의기소침하고 심란한 모습이었습니다.  




(가스코뉴 출신의 유명한 남자라고 하면 달타냥이 1순위이고, 란이 2순위입니다.  몰랐는데, 달타냥이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라는 역사 소설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도 총사대 소속의 풍운아로 유명했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하네요.)




나폴레옹도 란을 보자마자 평소 보아오던 란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그는 란이 긴 포위전에도 끈질기게 버티던 스페인 사라고사(Zaragossa)를 마침내 함락시키고 난 뒤 쉴 틈도 없이 바이에른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저런 아부성 발언으로 그의 기분을 북돋아주려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지요.  


"자네 말고 비엔나로 가는 길을 누가 더 잘 알겠나 ?"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이렇게 입에 발린 아부를 늘어놓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란의 울적함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폐하께서 명령하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내겠습니다"라는 상투적인 말만을 남기고 당장 다음날 새벽 전투에 나가기 위해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란이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모습은 이미 앞선 포스팅에서 보신 바 있습니다.


왜 열혈남아 란이 이렇게 울적했을까요 ?  란 본인이 아닌 다음에야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일단 너무나도 처절했던 사라고사 포위전이 큰 몫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부관인 마르보(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에 따르면 전체 사라고사 시민들이 핏대를 세우고 항전했던 그 포위전은 여태까지 란이 경험했던 이탈리아나 독일에서의 전투와는 너무나 달랐던 것입니다.  사라고사의 항복 직후,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거행된 승리 축하 미사에서, 란은 우울하고 무척이나 경건한 모습이었습니다.  열혈 자코뱅 답게 성직자나 귀족이라면 대놓고 무시하고 비웃던 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요.


그는 소규모의 부관들만 데리고 바이에른의 나폴레옹으로 가는 길에 고향 마을인 렉튀르(Lectoure)에도 잠깐 들렀는데, 그 작은 마을에 있는 4개의 성당을 모두 들러 큰 액수의 기부금을 냈습니다.  그 고향 마을 신부들은 악동 란을 매우 잘 알고 있었는데, 그가 평소와는 달리 절제되고 경건한 모습으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파리 도착 몇시간 전, 굳이 도르도뉴(Dordogne)라는 별 볼일 없는 시골 마을에 들렀습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서, 원래 그는 임지를 오갈 때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마을에서 쉬어가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마을에는 예전 시리아의 생-장-다크레(Saint Jean-d'Acre)의 무너진 성벽으로 돌격하다 목에 총상을 입고 쓰러진 란을 (비록 발목을 잡고 거칠게 끌고 오느라 머리통에 크고 작은 혹과 멍을 많이 남기기는 했지만) 구해줬던 대위가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란은 깨어나자마자 머리통의 상처에 대해 툴툴거리면서도, 그 대위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주었었고, 그 대위는 예편한 뒤 그 돈으로 고향인 도르도뉴에 여관을 매입했던 것입니다.  이 재회는 나름 감동적인 것이었다고 란의 부관 마르보는 회고록에 기록했습니다.





(란의 부관이자, 나폴레옹 관련 회고록으로 유명한 마르보 장군입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란과 함께 하는 마차 여행은 꽤 고역스러운 것이었는데, 여행길에 잘 쉬어가지 않으면서도 부관들이 마차 안에서 뭔가 먹는 것을 엄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란은 전장에서의 용기와는 또 달리 매우 깔끔한 편이라서, 마차 안에서 누가 먹는 것을 역겹게 생각했고, 특히 젊은 부관들이 닭뼈 등을 마차 창 밖으로 던지는 행위를 극도로 혐오했다고 합니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가족과 보낼 시간도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전쟁터로 이동하는 몸이었고, 황제 나폴레옹이 이미 2주전에 전장으로 출발한 상태에서 도저히 양심상 오래 집에 머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바이에른으로 출발하기 전, 의전상의 이유로 황후 조세핀을 예방했는데, 평소 란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조세핀조차도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우울한 얼굴이냐'라고 물을 정도로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친하지도 않은 사이라서 (란은 애초에 나폴레옹이 조세핀처럼 나이 많은 과부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거든요) 말을 꺼리던 란은 조세핀이 집요하게 묻자 '이번 원정에 대한 느낌이 매우 좋지 않고, 가족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지극히 약한 모습을 보이는 대답을 했습니다.


또 파리에서 만난 어느 신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게재된 란의 '빛나는 승리'인 사라고사 함락에 대해 치하를 하며 '볼테르가 칭송할 만한, 광신자들에 대한 합리주의의 승리'라고 말을 하자, 볼테르를 단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란은 씁쓸하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던 당신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 사제들... 굉장한 전사들이었습니다."






(자신의 군사 활동이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의 이념을 유럽 대륙으로 전파한다는 순진한 란의 믿음을 산산조각 냈던 잔혹한 포위전의 결말, 사라고사의 항복입니다.  사라고사의 수비대와 민간인들이 굶주리고 병든 몸에 누더기를 걸친 채로도 당당하게 성문을 걸어나와 무기를 내려놓을 때, 란은 휘하 프랑스군에게 '똑바로 차렷 자세를 유지하라'라고만 했을 뿐 아무 격려사도 하지 않았고, 스페인군에게는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고 합니다.  란은 수비대 사령관인 팔라폭스도 석방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압송해야 했습니다.)




파리에서 만난 또 다른 지인 하나가 '이번에도 쾌승을 거두고 빨리 돌아오시길 바란다'고 인사를 하자, 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돌아올수 있을지 잘 모르겠소.  뭐 돌아온다고 해도 금방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겠지요.  전쟁을 하는 것이 황제의 운명이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 내 운명이요.  언젠가는 우리 둘 다 죽겠지요.  지금이든 나중이든.  난 그저 우리 둘 다 다시 소년이 되었으면 좋겠소."


종합해보면, 란은 이번 원정이 자신의 마지막 원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군인들이 가지는 뭔가 알 수 없는 본능에 의해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저 모험과 영광을 좇아 따르던 나폴레옹의 전쟁이 남기는 상처와 폐허를 스페인에서야 비로소 통감했고, 더 이상 그런 참극을 빚어내기가 꺼려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꺼림직해서였을까요 ?  란츠후트와 레겐스부르크에서 큰 공을 세우며 잘 싸웠던 란은 비엔나 점령 이후 도나우 강 도하 작전에서 큰 실수를 하나 저지릅니다.  


빈 점령 전에 타보르(Tabor)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도나우 도강에 어려움을 겪던 나폴레옹은 부교를 놓고 도강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빈 주변에서 부교를 놓기에 적절한 위치를 찾도록 베르트랑 장군에게 명했고, 베르트랑은 카이저에버스도르프(Kaiserebersdorf)를 그 지점으로 제시했다는 것을 앞서 언급한 바 있지요.  


그러나 적이 지키는 강변을 도하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부교를 놓고 도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작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 기만작전을 펼치기로 합니다.  포병 장교인 송기(Nicolas-Marie Songis des Courbons) 장군이 별도로 제시했던 뉘스도르프(Nussdorf)는 빈에서 상류쪽으로 몇 km 떨어진 곳이었는데, 여기에도 부교를 놓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이는 오스트리아군의 시선을 끌기 위한 목적일 뿐이었고, 주공은 어디까지나 에버스도르프 쪽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기만 작전을 란에게 맡깁니다.





(송기 장군입니다.  나폴레옹처럼 포병 장교 출신인 그는 이탈리아 원정은 물론 이집트 원정까지 나폴레옹을 따라다녔습니다.  뉘스도르프를 도하 지점으로 선택한 것을 보면 기술적으로 정말 우수한 장교였고 나폴레옹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제국 출범과 함께 귀족 작위도 받았습니다.  다만, 이과 출신의 한계였는지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있고, 바로 이 사건 다음해인 1810년 병사하고 맙니다.)




이런 기만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두 다리를 거의 동시에 놓아야 했고, 나폴레옹도 란에게 그 사실을 주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공 방향인 에버스도르프에도 부교를 놓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뒤에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부교 건설에 필요한 자재가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란이 뉘스도르프 현장에 와서 보니, 송기 장군이 이 자리를 부교를 놓을 최적지라는 것이 이해가 갔을 뿐만 아니라, 부교 건설에 필요한 자재를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뉘스도르프 건너편에는 슈바르처-라켄(Schwarze-Laken)이라는 작은 섬이 있었는데, 그 섬과 도나우 강의 좌안 사이는 무척 짧을 뿐만 아니라 이미 다리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우안으로부터 그 섬까지는 도나우 강폭이 그리 넓지 않아서, 기습적으로 섬을 점령하기만 하면 다리를 놓기도 쉬워 보였습니다.  바로 인근인 스피츠(Spitz)에는 오스트리아군 진지가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게 되면 기습 효과가 사라진다고 란은 생각했습니다.  실은 프랑스군이 이쪽으로 부교를 놓을 계획이다라고 기만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것을 깜빡했던 모양이지요.





(뉘스도르프는 지도 왼쪽 중단에 보입니다.  중앙 하단에 보이는 로바우 섬이 실제 주공이 이루어진 방향입니다.)



란과 그 휘하의 생틸레르(Saint-Hilaire) 장군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주변에서 끌어 모은 큰 보트 몇 척에 병력을 실어 슈바르처-라켄 섬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약 2개 연대 병력인 1500명을 몇차례에 걸쳐 투입했는데, 이것이 대실수였습니다.  이 섬에 있던 소규모 오스트리아 수비대는 즉각 경보를 울리며 스피츠의 본대를 불러왔고, 큰 보트 몇 척으로 조금씩 축차 투입되던 프랑스군은 그 수비대를 즉각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다리를 통해 대거 대포까지 갖춘 대규모 지원군을 투입한 오스트리아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프랑스군을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다시 보트를 이용해 병력을 빼내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엄청나서 사망자만 5백에 부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뿐만 아니라, 퇴로가 끊긴 수백명은 오스트리아군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참패였습니다.


훨씬 더 나쁜 것은, 이 모든 것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강변으로 달려온 나폴레옹의 눈 앞에서 벌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어이없는 실수에 격노했고, 차마 란에게 야단을 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란의 부하인 생틸레르를 격렬하게 질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패전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란은 비록 자신에게 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분노에 움찔하여 슬금슬금 뒷걸음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발이 로프에 걸렸고, 란은 그만 그대로 뒤로 넘어져 강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비극적인 패전 속에서 벌어진 뜻하지 않은 코미디같은 상황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직접 강물 속에 뛰어들어 란을 일으켜세웠습니다.  이 두 친구는 물과 진흙에 흠뻑 젖은 상태로 한동안 말없이 서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쓸데없는 경고만 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원래 5월 초 카알 대공의 주력 부대는 빈 북서쪽 훨씬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의 맞은 편에는 고작 1개 군단만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뉘스도르프에서 란의 어설픈 도강 시도가 참패로 끝나자 카알 대공은 나폴레옹이 빈 일대에서 도강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력을 이동시켜 나폴레옹과 도나우 강을 끼고 맞서는 위치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라도 도강이 이루어졌다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폴레옹은 아직도 에버스도르프에서 도강을 시도할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대 프랑스 제국 황제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매우 하찮은 물건, 바로 닻이었습니다. 


--계속   



Source : The Emperor's Friend: Marshal Jean Lannes By Margaret S. Chrisawn

Three Napoleonic Battles By Harold T. Parker

https://en.wikipedia.org/wiki/Nicolas-Marie_Songis_des_Courbons

https://en.wikipedia.org/wiki/Jean_Baptiste_Antoine_Marcellin_de_Marbot

Posted by nas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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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로이센군 2017.02.12 2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이 블로그 첫 댓글을 달아보네요^^
    제가 좋아하는 원수들 중 하나인 열혈남아 란의 최후가 다가오는건가요...

  2. 유애경 2017.02.13 0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란장군은 확실하게 죽음을 예감했던 모양이네요.군인이 전장에서 전사하는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서글픈 느낌입니다.그나저나 조세핀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니 란장군의 성격으로 봐선 싫다는 티를 팍팍 냈을려나...^_^

  3. 오스트리아 2017.02.13 1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란의 최후가 서서히 다가오네요.

  4. 야거 2017.02.13 1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음에 대한 예감보다 스페인에서 나폴레옹 전쟁 전반에 환멸을 느낀게 아닐까 싶네요

  5. 연습장 2017.02.13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란같은 역전의 용사도 ptsd증상에는 어쩔수 없군요.

  6. 석공 2017.02.14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술을 먹을 때 평소보다 쓰거나 달면은 그 날은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절제하는 편입니다. 암튼 평소와 다른 모습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죠...

  7. hhbooks 2017.02.15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nasica님.
    저는 평소 nasica님 글을 즐겨보고 있는 출판인입니다.
    연재하시는 글과 관련해 한번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
    연락드릴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덧글로나마 말씀을 전합니다.
    연락이 가능한 전화번호나 메일 주소를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제 연락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도서출판 항해 박지석
    010-9922-6884
    hhbooks@naver.com

  8. starlight 2017.02.20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많은 죽음. 특히나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의 분투에 큰 충격과 혼란을 겪은 듯 합니다.
    가치관의 혼란, 정신과 체력의 극진한 소모로 피로감이 극대화될지 않았을까요?
    장란의 최후를 알기에 애잔하네요.

  9. ^^ 2017.02.20 18: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가스코뉴 출신 유명한 남자라면 Cyrano de Bergerac가 1위 아니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