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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몽'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2.18 나폴레옹 시대의 병참부 이야기 (하편) (14)
  2. 2017.11.11 바그람 전투 (제18편) - 통쾌하지 않은 승리 (28)

웰링턴은 포르투갈에 상륙하자마자 곧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적, 그리고 사회적 특수성이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독일 등 기타 유럽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큰 특징으로, 제대로 된 길이 없었습니다 !  이는 스페인의 침공 위협 때문에라도 스페인과의 교통로를 적극 개발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의 특수성에도 기인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나 모두 산업과 통상의 발달이 부진했다는 점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지역간에 거래를 할 상품이 없다보니 마차가 다닐 일도 없고, 마차가 다닐 일이 없으니 넓직한 길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지역 감정이 꽤 심한 나라여서 지방 간의 인적 왕래도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더더욱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교통망에 더해,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건조한 편이라서 농업 생산량이 그렇게 풍요롭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농가들은 어지간한 농가의 창고문만 걷어차도 밀과 보리, 달걀이 쏟아져 나왔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척박한 스페인과 대비했을 때조차도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현지 조달에 의존했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쫄쫄 굶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온 지역이 이렇게 가난하다보니,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보시다시피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이 산지이거나 메마른 지대라서, 농업에 적절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스페인은 올리브유 생산이 매우 활발한 나라입니다만, 그건 반대로 곡물 농사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지대라는 반증입니다.)




현지 조달이 어려우면 본국에서 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의 열악한 내륙 교통망이 발목을 잡습니다.  가뜩이나 프랑스 본토와 스페인 사이에 피레네 산맥이 있는 것도 장애가 되었는데, 해안길을 통해서라도 수송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뒤부터가 진짜 고생길이었던 것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보면 스페인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별로 큰 땅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건 메르카토르 도법의 특성상 남쪽에 있는 땅이 좁아보이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64만 평방 km인 것에 비해 스페인이 50만 평방 km으로서, 스페인은 굉장히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탄한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 높은 산맥과 언덕이 많은 땅이지요.  길도 제대로 없는 그런 땅을 가로질러 20만 대군이 먹을 식량을 마차로 수송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런 도전은 스페인의 게릴라들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경우, 이베리아 땅이 반도이니만큼 그냥 해상으로 수송한 뒤 내륙으로 운송하면 훨씬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저 망할 로열 네이비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현지 조달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는 수탈당하는 스페인 민중들에게도 큰 비극이었지만 약탈하는 프랑스군에게도 무척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만명 단위의 대군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그 일대의 식량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프랑스군이 먹어치우는 것도 있지만, 그 일대의 농민들이 식량을 감추거나 떠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프랑스군은 한 곳에서 1주일 이상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굶지 않으려고 먹을 것을 찾아 끊임없이 유랑하는 거지떼 내지는 떼강도 신세가 된 것이지요.  군사 작전이라는 것에서 이동이 잦을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을 압박하거나 반대로 피하기 위해서이지 굶지 않기 위해서 이동하는 군대에게는 작전의 유연성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스페인에 투입된 근 20만에 가까운 프랑스군 대부분은 먹을 것을 찾아 이동 중이거나, 분산되어 먹을 것을 약탈 중이거나, 혹은 신기루 같은 게릴라들의 뒤를 쫓아 산 속을 헤매면서 세월을 낭비해야 했고, 실제로 영국군이나 스페인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프랑스군은 그 1/4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웰링턴은 유능한 지휘관답게,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영국군이 10만 단위의 대군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군량 조달을 가장 유용한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조건은 비슷했습니다.  길이 형편 없는 것도 똑같았고,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같았습니다.  스페인의 주요 항구들이 대부분 프랑스군 손아귀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식량을 수송해올 거리는 영국 측이 훨씬 멀었습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사이의 거리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거리보다 멀었고, 그나마 영국 본토도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식량난이 심해져서 밀과 빵값이 오르는 등 난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식량을 포르투갈에 보낼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미국과 남미, 오스만 투르크, 심지어 북아프리카 모로코 등지에서 식량을 구매하여 포르투갈로 실어날랐습니다.




(혼블로워 시리즈 중에서 (실제 소설이 씌여진 순서는 아니지만) 첫번째 편인 Mr. Midmanship Hornblower는 혼블러워의 사관후보생 시절을 그린 옴니버스식 소설입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식량으로 소를 사러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 들어갔다가 전염병에 휘말려 격리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국군 병참부에게 진짜 고난은 포르투갈 해변에 온갖 보급품이 잔뜩 쌓이는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1808년 8월, 당시 쥐노가 점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탈환하기 위해 웰슬리가 포르투갈 마세이라(Maceira) 만에 상륙했을 때, 전에 언급한 샤우만(August Friedrich Ludolph Schaumann)이라는 이름의 독일 출신 병참 장교에게 주어진 임무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조수도 부하도 없이 혼자서, 그저 공책 한권을 주고는 해변 여기저기에 야적된 수많은 보급품 더미를 조사하여 목록을 작성한 뒤 이제 내륙으로 진격할 영국군 부대를 따라 수송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샤우만이 그런 업무에 숙련된 병참 장교였는가 하면 그게 또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하노버 침공 이전에 하노버 군에서 몇년 장교로 복무했다가 퇴역한 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장부 작성 등의 업무를 좀 해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국군 소속 독일군 전투 부대인 KGL 제7 연대 소속의 평범한 장교였고, KGL 장교로서는 승진과 연금의 비전이 없다고 보고 일당 7.5 실링(현재 가치로 대략 9만5천원)의 급여를 위해 병참 장교로 자리를 옮긴 아마추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아무런 지침이나 교본이 없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The British Commissary'(영국 병참부)라는 멋대가리없는 제목의 책이 한권 있었는데, 이는 메서리어(Havilland le Mesurier)라는 이름의 영국인이 쓴 것으로서, 당시 영국군 병참부 직원들에게는 수학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책이었습니다.  메서리어는 원래 해외 무역업자였다가 프랑스 혁명정부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1793년부터 네덜란드 방면 영국군 원정대에 딸린 병참 장교 역할을 했습니다.  1794년에서 그 다음해까지 벌어진 이 방면 전투에서 영국군은 형편없는 성과만 냈을 뿐이었지만, 정말 아무 준비도 안 되어있던 영국군 병참부는 이 난리통 속에서 그나마 나름 경험과 수완을 쌓았던 모양입니다.  그 이후에도 메서리어는 병참부 장교직을 사직했다 복직했다 했는데, 영국군 병참부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은 저 'The British Commissary'라는 책을 저술한 것이었습니다.  




(메서리어의 'The British Commissary'입니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책입니다만, 저는 못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포르투갈에서의 영국군 병참부는 초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참부는 힘만 들고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노동일을 하는 부서라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것만큼, 빛나는 전통이고 뭐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랑 책 한 권을 손에 든 경험 없는 병참부 장교들도 막대한 보급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실은 병참부 소속 장교들은 진짜 장교도 아니었습니다.  병참부는 군의 일부가 아니라, 재무부의 감독과 지시를 받는 파견직 민간인들이었거든요.  따라서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assistant deputy commissary-general이니 하는 것들은 진짜 장군이 아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말단 사병들이 경례를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민간인 정부 관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장교들과 엇비슷한,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나는 군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권총과 군도와 같은 무기도 휴대했습니다.  병사들은 '저것들은 장교 비슷한 군복은 입었지만 장교가 아니며, 싸움이 벌어지면 우리와 함께 싸우지 않고 후방으로 도망친다'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적지 않은 경우 무기를 들고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아군에게 저평가되었지만, 사실 이들의 업무는 제1선 장교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개인적인 창의성과 수완,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전투 현장에서 대포알과 머스켓 탄환에 노출된 채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할 때, 멋진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교가 부릴 수 있는 재주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운이 좋은 자는 살아서 전진할 수 있는 것이고, 운이 나쁜 자는 대포알에 두동강이 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흙탕 길에 바퀴가 빠진 무거운 수레를 어떻게 빼낼 것인지, 수송에 3일 걸리는 건빵 자루 더미들을 어떻게 2일 안에 최전방까지 나를 것인지, 가진 돈은 50쉴링 밖에 없는데 일당 1쉴링을 요구하는 노새 30마리를 어떻게 3일 동안 빌릴 것인지 등은 그야말로 담당 직원의 역량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성공과 실패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뒤바뀔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밀가루 자루를 실은 노새들을 끌고 최전선 부대에 도착한 병참부 장교에게 주어지는 것은 '왜 이리 늦게 왔냐' '왜 보급품이 이것 밖에 없는가' 등의 핀잔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병참부는 체계화가 꼭 필요한, 나름대로 무척 섬세하고 정밀한 병과입니다.  가령 포르투갈을 통해 상륙하는 영국군 병사들의 행군에 대해 웰링턴이 병참감(Commissary General)인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게 보낸 지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들어있습니다.


"상륙하는 부대는 각자 4일치의 빵과 2일치의 고기를 휴대한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빵 외에, 1만 명의 3일치 빵을 수송해야 하는데, 가능하다면 노새를 이용해 날라야 한다.  각 노새에는 2개의 자루, 즉 224파운드의 짐을 실을 수 있으므로 전체를 위해서는 130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


이 계산은 꽤 합리적입니다.  당시 영국군 병사들의 배식량은 하루에 빵 1파운드였는데, 1만 명의 3일치라면 3만 파운드입니다.  224파운드를 실을 수 있는 노새를 130마리 동원한다면 224 * 130 = 29,120 파운드이므로, 1인당 0.97 파운드씩의 빵을 3일간 보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계산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노새가 먹을 사료는 계산에 넣지 않았쟎습니까 ?  노새는 하루에 10파운드의 곡물을 먹어야 했고, 병사들이 3일 행군하는 것을 따라 나섰다가 다시 보급품이 쌓여있는 항구로 되돌아오려면 왕복에 6일이 걸렸으므로, 노새 1마리가 싣는 224 파운드 중 최소 60파운드의 곡물은 노새가 먹어치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130마리의 노새의 실제 수송량은 29,120 파운드가 아니라 21,320 파운드였고, 병사들은 3일간 0.97 파운드가 아닌 0.7 파운드라는 부실한 양의 빵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로망이 형편없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노새들을 이용한 보급품 수송이 정말 최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영국군 병참부도 2년 정도에 걸쳐 노새꾼들과 노새들을 고용하여 운용을 하면서 경험이 쌓여, 그 고용 및 활용, 급여 지급 등 온갖 자질구레한 잡무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은 총사령관인 웰링턴 장군이 이런 노새 한마리가 몇 파운드의 짐을 싣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몇 마리의 노새가 필요한지에 대해 계산하여 병참감에게 보내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일이기는 합니다.  이런 편지는 오히려 반대로 병참감이 원정군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형태로 보내는 것이 맞겠지요.  당시 웰링턴은 병참부 장교들과 서기들의 무능력에 대해 짜증이 잔뜩 난 상황이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샤우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병참 장교들이 별다른 병참 업무 경험도 없이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다보니 워낙 아는 것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병참부는 웰링턴 하에서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총사령관 웰링턴이 직접 나서서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서'라고 지목하면서, 저렇게 노새 몇 마리가 필요하다는 계산까지 세세히 해줄 정도였으니 당연히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특히 1810년 10월부터 다음해 초까지의 대치 끝에 토헤스 베드하스(Torres Vedras) 방어선 앞에 마세나의 프랑스군을 후퇴시킨 승리는 사전에 충분한 군량을 비축해놓은 영국군 병참부가 아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아무도 병참부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았지요.  이 사실은 웰링턴 휘하 어지간한 장군들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 많은 정보가 있는 것에 비해, 웰링턴 휘하의 전체 병참부 책임자였던 케네디(Sir Robert Hugh Kennedy)에 대해서는 정말 정보가 없다는 것으로도 반증됩니다.  오히려 영국군 병참부의 위력과 중요성을 잘 알고 두려워했던 것은 적군인 프랑스군이었습니다.  1812년 웰링턴과 대치했던 마르몽(Marmont) 원수는 나폴레옹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웰링턴은 제게 보급품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광활한 척박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마르몽은 유난히 영국군의 노새 부대에 대해 넋두리를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1811년에도 그는 나폴레옹의 참모장 베르티에에게 편지를 써서 '영국군은 노새 1만2천 마리를 이용하여 너무나 쉽게 이동한다, 그러니 내게 단 1천2백 마리라도 노새를 좀 공급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개성을 가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용들이 등장하는 나오미 노빅의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 '테메레르'에 대해 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지요.  대포의 시대라고 해도 그런 거대한 용들 수백 마리로 구성된 군대가 있다면 아마 천하무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거대한 용들에게 먹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그랑다르메(Grande Armee)도 일종의 용이었습니다.  그 대군을 일거에 밀어넣으면 스페인 정도야 순식간에 휩쓸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군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답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지요.  영국군이 소수로도 내노라하는 나폴레옹의 부하들을 차례로 꺾고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낸 것은 바로 그 문제를 잘 해결했기 때문이었고, 그 핵심에는 영국의 병참부가 있었습니다.






Source : The Duke Of Wellington And The Supply System During The Peninsular War, by Major Troy T. Kirby

Tracing the Biscuit: The British Commissariat in tite Peninsular War, by William Reid

On The Road With Wellington, by August Ludolf Friedrich Schaumann

https://de.wikipedia.org/wiki/August_Friedrich_Ludolph_Schaumann

https://www.britannica.com/topic/logistics-military/Historical-development

https://en.wikipedia.org/wiki/Military_logistics

https://en.wikipedia.org/wiki/Bastion_fort

https://en.wikipedia.org/wiki/Glacis

https://en.wikipedia.org/wiki/Havilland_Le_Mesu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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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ithel 2019.02.18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샤프가 텐트 노새 계산하던게 생각나네요.
    아참, 테메레르의 작가는 나오미 노빅입니다.

  2. TheK의 추천영화 2019.02.18 0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하편이네요. 지금 버스에서 내려야 해서 쟁여놓았다 봐야겠네요. ^ㅇ^*

  3. 카를대공 2019.02.18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길이 없다,산지,건조한 기후
    이거 남 얘기 같지가 않군요.

    대대로 한반도의 기후나 지형이 풍요로운 땅과는 거리가 멀었죠.
    알면 알수록 왜 옆나라들에 치이고 살았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 Spitfire 2019.02.26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반도가 곡창지대에 비하면 살기가 어려웠겠지만 주변국가들에 비해 풍요롭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국가들이 자주 침입을 한 것이지요. 도둑은 부잣집을 털지, 거지를 털지 않습니다.ㅎㅎ

  4. TheK의 추천영화 2019.02.18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군요. 영국이 승리한 이유가.
    역시 전쟁에선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끔 알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ㅇ^*

  5. 인간늑대 2019.02.18 1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미있는 글.
    감사합니다.

  6. 지나가다 2019.02.18 2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들은 항상 전투의 화려함에 주목하지만 그 뒤에서 스폿 라이트도 받지 못하고 개고생 하면서 물자를 날라주는 보급부대에는 대부분 관심이 없지요.
    사실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던지간에 영업과 같은 일선부서 직원들이 평가나 급여 및 상여에서 항상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방면 지원부서는 돈한푼 못벌고 쓰기만 한다며 갈굼당하기 일쑤인 것 같습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원부서도 항상 적정한 유지및 관리가 들어가야 될텐데 말이죠...쩝.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7. 인퀴지터 2019.02.18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한심한 책이라 나폴레옹 매니아께서 거론할줄 예상도 못했습니다. 테메레르는.

  8. 유애경 2019.02.18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식량을 바닥내고 지나가는 프랑스군 에게서 , 머문자리를 초토화 시키고 지나가는 메뚜기떼를 연상하게 되네요.


  9. reinhardt100 2019.02.19 0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 저번에 한 번 언급했지만 20만 대군을 일거에 쏟아부어서 전선을 정리했어야 했다는 제 개인의 의견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복수의 보급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프랑스 제국 단독으로 하기는 어려울거고 라인동맹이나 이탈리아 왕국 등의 실질적인 속국의 여력을 모두 동원해야 가능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20만 대군을 영국군과의 전장에 투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만한 보급선 경비 병력이 또 필요하다는 것인데 사실 나시카님 말씀대로 이 정도 병력을 이베리아반도에 쏟아붓는 것은 다른 속국들을 방기하다 시피해야 한다는 점에서 도박인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할 건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승산이 없는건 아니고 하나의 문제만 해결되면 절반 이상의 확률로 전쟁 전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베리아 전쟁을 승산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분리독립주의가 강했던 바스크, 아스투리아스, 갈리시아, 카탈루냐등을 전방 보급을 위한 배후지역으로 확보한 후 이 지역들에서 출발하는 간선도로망을 모두 확보합니다. 이후, 카탈루냐에서는 아라곤 및 발렌시아, 바스크-아스투리아스-갈리시아 전역을 석권한 후 카탈루냐-타라코나 및 사라고사-발렌시아 축선에서는 무르시아-카르타헤나를 공략 후, 지브롤터를 고립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카디스 혹은 리스본까지 지중해 연안 및 주변 내륙 전역을 점령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북부에서 출발하는 프랑스군은 부르고스-바야돌리드-살라망카까지 1차적으로 공략한 후, 마드리드를 고립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후, 메리다를 공략, 메리다-바다호스-리스본 공략을 순차적으로 이어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갔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작전에서 전체 총병력은 프랑스군 공격군으로 24만 이상, 보급선 경비병력 최소 12만이며 이외 동맹군인 이탈리아왕국군, 라인동맹군, 스위스군 등을 합쳐 최소 10만 이상을 투입하며 작전 기간은 총3년, 동원 각종 야포 및 공성포 총 2천 문, 각 부대별 상비 비상식량을 최소 한 달분(러시아원정기 나폴레옹이 준비한 비상식량분 기준) 등의 보급역량을 갖추고 임한다는 가정하에 생각해본 겁니다.

  10. Spitfire 2019.02.19 1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베리아 반도의 척박하고 험준함을 들으니 일생의 목표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고 싶어지네요~ 저길 걸었던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지 궁금합니다.ㅎㅎ

  11. 웃자웃어 2019.02.19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급의 중요성이 입증되는 글이군요.

  12. 리틀락 2019.03.08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은 경제력으로 하는거군요. 그렇게 무역을 중시했던 영국이 브렉시트 하는걸 보면 웃음이 납니다 ㅋㅋㅋ 대영제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자들이 경제관념은 바닥이네요

1809년 7월 6일 밤 바그람 전투의 총성이 잦아든 뒤 나폴레옹은 다른 전투에서처럼 '퇴각하는 적군을 즉각 추격 섬멸하라'고 부하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냉혈한인 그도 휘하 병사들이 거의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무려 40시간에 걸쳐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추격을 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록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라콩브(Lacombe)라는 장교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그들을 패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전투 내내 나폴레옹의 옆을 지키며 전투 현황을 속속 파악하고 있던 사바리 장군도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성급한 행동을 자제시킬 정도로 잘 싸웠다"라고 기록에 남길 정도였습니다.  


전투의 승패는 어느 쪽의 사상자가 더 많았는가로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 꼬리를 말아쥐고 물러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데, 보통 등을 보이며 후퇴하는 측의 대오가 무너지기 마련이었고, 그 뒤를 추격하는 적의 기병이나 경보병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패자의 사상자 수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바그람 전투에서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는 와중에도 대오를 굳게 지켰고, 결국 프랑스군은 평소 하던 대로 후퇴하는 적의 뒤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향상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 재정난을 일으킬 정도로 군비를 투입하여 카알 대공이 열심히 육성한 상비군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굳센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대 스파르타에 전해지는 격언 중에 '한 국가와 반복하여 자주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유는 잦은 전쟁 경험은 상대국에게도 군사 역량의 강화를 낳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에서 겪은 바가 딱 그랬습니다.  프랑스군이 국민개병제에 의한 징집군의 편성, 기동력을 중시한 전술, 자율성과 유연성을 잘 살려주는 군단제 운영을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가지고 있던 상대적 우월성은 어느 틈엔가 오스트리아군에게도 어느 정도 복제되어 있었고, 이는 전투력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또 카알 대공의 근본적인 전략도 오스트리아군의 비교적 질서있는 후퇴에 일조했습니다.  카알 대공은 전쟁 시작 전부터 개전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요.  그는 어차피 오스트리아 혼자 싸우는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꺾을 수는 없으며, 만약 싸우더라도 최후의 일인까지 다 죽어 쓰러지는 결전보다는 적당히 싸우다 패배가 분명해지면 후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지더라도 군사력을 어느 정도 보존한 상태여야 나폴레옹과의 종전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이 그런 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후 2~3시 경에 이미 후퇴를 결정했고, 덕분에 오스트리아군은 힘을 좀 남겨둔 채로 후퇴를 시작하여 군사력을 보존한 채, 심지어 프랑스군 포로 수천 명까지 끌고 후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 다음날 새벽, 나폴레옹이 혹시 오스트리아군이 어제에 이어 다시 도전해올 것인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군은 비교적 건재한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바그람 전투가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꽤 순한 전투였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바그람 전투는 이긴 프랑스군이나 진 오스트리아군이나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상자 수를 낸 참혹한 전투였습니다.   일단 양측의 참전 병력이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약 17만, 오스트리아군도 요한 대공의 병력까지 합해서 약 1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고 되어 있지요.  실제로는 요한 대공의 군대는 언저리까지만 오고 총 한방 쏘지 않았으니 전투 참전 병력 수에서는 빼는 것이 맞겠고, 또 프랑스군도 로바우섬을 지키던 보병들은 실제로는 참전하지 않았으니 일부 빠지겠습니다만, 아무튼 양측이 무려 32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이는 유사 이래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이 한 자리에 집결하여 벌인 최대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참전 병력이 많으니 당연히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시 사상자 수는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했고, 또 설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발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은 대내외 과시를 위해 적의 사상자 수를 부풀리고 아군의 사상자 수는 양심도 없이 작게 조작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군 육군 회보(Bulletin de la Grande Armée)에서는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가 전사 1,500에 부상 3~4,000으로 경미하다고 보도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실제 사상자 수는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혹자는 4만이 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도 약 3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양측 모두에게 약 20% 가까운 사상율이었습니다.  당시 승자 측의 사상율이 약 10%, 패자 측은 약 20%가 상식적인 수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바그람 전투는 양측 모두 패배였던 셈입니다.  


양측의 피해가 모두 컸던 이유는 이 바그람 전투는 유례없는 대규모 포격전을 동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488문, 오스트리아군도 414문이나 되는 전례없는 막강한 화력을 총동원했다는 점도 문제였으나, 특히 이 전투의 주무대였던 마르히펠트의 평원이 지형과 지질 탓이 컸습니다.  이곳은 땅 표면이 비교적 단단하고 매우 평평한 지역인지라, 대포알들이 땅에 처박히지 않고 통통 튀며 먼거리까지 날아가면서 많은 병사들의 팔다리와 허리를 꺾어놓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전투가 끝난 뒤, 이 전투는 포병에 의한 승리라며 휘하 포병들의 노고를 칭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포병대에게 영광을 더해주고자 전체 포병단 총사령관인 라리부아지에르(Jean Ambroise Baston de Lariboisière) 장군의 아들 페르디낭(Ferdinand Baston de La Riboisière)을 뽑아 이 승전보를 파리로 전하게 했습니다. 





(이 그림이 드물게 그려진 아버지와 아들이 한꺼번에 나온 라리부아지에르 부자의 초상입니다.  바그람 전투 당시 27세였던 페르디낭은 카라비니에, 즉 총기병대 소속 장교였는데, 역시 나폴레옹의 과도한 욕심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1812년 보르디노 전투에서 전사한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도 너무나 슬픔에 젖은 나머지 병으로 쓰러졌고, 결국 1812년 겨울을 못 넘기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낭이 들고간 승전보에는 파리 시민들이 기대했던 화려한 전과는 구체적으로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그런 전과는 노획한 적의 군기와 대포, 그리고 많은 포로의 숫자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것이 좀 부실했던 것입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10폭의 군기와 20문의 대포, 그리고 약 7,500의 포로를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빼앗긴 것은 군기 12폭, 대포 21문에 포로도 약 7천 이상이었습니다.  오히려 적자를 보았던 셈이지요.   그 때문에 전투가 끝난 뒤 이 계산서를 받아든 나폴레옹은 '전쟁이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노획한 대포도 포로도 거의 없구나, 아무 결과가 없군'이라며 한탄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다보니, 전투 다음날인 7월 7일 아침 잠에서 깬 나폴레옹은 혹시 카알 대공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도전해오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카알 대공은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물러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날 아침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의 막사를 찾은 막도날드를 갑자기 와락 끌어안아주고는 그를 '프랑스 제국의 원수'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즉, 영광스러운 원수의 계급으로 승진을 시켜준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우디노와 마르몽에게도 원수 계급을 내렸습니다.  이 사실이 공표되자, 병사들은 막도날과 우디노는 그렇다치고, 마르몽은 뭔일래냐 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파르퀑(Parquin) 소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병사들은 아예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합니다.


"막도날은 프랑스가 지명했고, 우디노는 군이 지명했는데, 마르몽은 우정이 지명한거라네"

(La France a nommé Macdonald, l'armée a nommé Oudinot, l'amitié a nommé Marmont)


사실 마르몽 달마시아(Dalmatia) 군단을 이끌고 최후의 예비대로 남아 있었고, 아무 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원수 임명장과 함께 별도의 개인 편지를 함께 마르몽에게 보내, '너와 나 사이의 비밀이지만, 넌 이 계급에 어울리는 전공을 올린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말라'고 갈구기도 했습니다.





(마르몽은 배신의 대명사로서, 라구사 공작이었던 그를 따서 Raguser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현대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봐도 정말 raguser는 trahir, 즉 배신하다라는 말의 동의어라고 설명이 나옵니다.  당대에는 더 심해서, 1830년 7월 혁명 당시 그가 시위 진압을 주저하자, 부르봉 왕가의 앙굴렘 공작은 그에게 "그를 배신했듯이 우리도 배신하려는거냐 ?" 라며 맹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갈굼을 당한 마르몽에게 '승진을 정당화시켜줄 전공을 세우라'는 말과 함께 카알 대공을 추격하라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의 달마시아 군단은 1만1천 정도로 매우 빈약한 편이었지만 전날 전투에 전혀 참전하지 않아 체력 고갈이 없는 유일한 부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맹렬한 추격을 개시한 마르몽은 3일 후인 7월 10일 츠나임(Znaim)에서 카알 대공의 잔존 병력 약 5만을 포착했습니다.   1만대 5만의 대결이었으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마르몽은 바로 뒤를 나폴레옹의 본대가 따라올 것이므로 적이 후퇴하지 못하도록 물고 늘어지는 전법을 썼습니다.  결국 양측이 하루를 넘겨가며 수천 명씩의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전투 끝에 다음날 저녁 무렵 나폴레옹의 본대가 도착하자, 카알 대공은 휴전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5차 대불동맹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카알 대공 인생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카알 대공이 이후 병으로 일찍 죽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는 이 휴전 협정을 맺으며 총사령관직을 비롯한 모든 관직에 대해 사표를 제출하고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이야기해서, 카알 대공은 이 휴전에 대해 월권 행위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겐 프란츠 황제의 승인없이 이렇게 휴전 요청을 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병사들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존을 위해 모든 책임을 지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카알 대공과 그의 가족입니다.  그가 나폴레옹급의 천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 현실 감각이 없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 그래도 그만한 인재가 없었으며, 사실 그의 전략적 판단이 처음부터 옳았습니다.)





Source : The Reign of Napoleon Bonaparte by Robert Asprey

1809 Thunder On The Danube: Napoleon's Defeat of the Habsburgs by Jack Gill

https://en.wikipedia.org/wiki/Wagram_order_of_battle

https://www.napoleon.org/en/history-of-the-two-empires/articles/the-battle-of-wagram/

https://en.wikipedia.org/wiki/Jean_Ambroise_Baston_de_Lariboisi%C3%A8re

http://www.napolun.com/mirror/napoleonistyka.atspace.com/Battle_of_Wagram_1809.htm

https://www.napoleon.org/histoire-des-2-empires/articles/oudinot-en-1809-1810-les-lauriers-de-la-gloire/

https://en.wikipedia.org/wiki/July_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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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loi 2017.11.11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나 나폴레옹이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라고 쓰셨는데 문장 배치를 잘못하신거 같아요

  2. 푸푸냐옹 2017.11.11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첫댓글의 영광이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3. 최홍락 2017.11.12 05: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긴 전투가 끝난 것 같네요. 바그람도 밑에 작성하신글의 댓글란도...

    • 장세동 2017.11.12 2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진리를 추구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 수비니우스 2017.11.13 0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란주동자를 닉네임으로 쓰시면서 진리를 추구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니 어떤 진리인지 궁금해지는군요.

  4. 웃자웃어 2017.11.12 1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보기에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보다는 약하지만(프랑스가 능력위주로 장교나 지휘관을 임용하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귀족위주이니.....).
    이전에 비하면 많이 강해진건 사실인것 같습니다. 즉 프랑스군과 완전히 대등하지는 않아도, 어느정도 맞서 싸우는게 가능할정도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5. 유애경 2017.11.12 1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페르디낭,잘 생겼네요^ ^.
    근데 라리부아지에르 부자의 그림은 부자지간 이라기보다 할아버지와 손자같은 느낌...결국 전쟁에 희생되고 아버지도 슬픔으로 쓰러진후 병사 했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카알대공의 가족은 화목해 보입니다.
    그도 이어지는 전쟁으로 심신이 많이 지쳤었겠죠!
    전쟁은 정말 없어져야할 비극중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6. 투팍아마르 2017.11.12 1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투를 앞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적이 있는 사람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라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말했다는데 나폴레옹은 개인의 영광(이라 쓰고 야망이라 읽음)과 프랑스의 위대함을 위해 전쟁을 서슴치 않았던 반면 카를대공은 비록 그에 맞서 싸워야하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무의미한 학살극을 줄이려 애를 썼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7. reinhardt100 2017.11.12 2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오스트리아의 경우, 헝가리,체코 민족 문제가 이 당시 정말 심각했습니다. 이 문제와 슐레지엔 상실이 겹쳐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반에 국력에 비해서 총력전 수행이 매우 어려웠으니까요.

    바그람 전투 뿐만 아니라 16세기 후반 이후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투사한 군사력의 최소 1/4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라는 게 간과됩니다만 그만큼 민족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흔히 1차 세계대전 당시 남슬라브 계열 군인들의 태업 및 보로실로프 공세 당시 러시아군에 집단투항하는 모습이 워낙 커서 그렇지, 1866년 대타협 이전만 해도 헝가리 민족은 반합스부르크의 대표주자였습니다. 인구 1/4 이상이 헝가리인이었는데 이들을 전장에 대량 투입시킬수도 없는 상황이다보니 상대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충성도가 강한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계를 대거 동원했는데, 아무래도 대 오스만 전선에서 싸우는 것 보다는 비효율적이었으니까요. 이 문제가 정말 심각하게 두드러진게 프랑스 혁명 전쟁기에 오스트리아군이 보여준 전투력입니다. 북이탈리아에 투입된 오스트리아군 절반 이상이 크로아티아나 세르비아계다 보니 라인 방면이나 플랑드르 방면에 투입된 독일계 병력에 비해 작전 수행에서 비효율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 본토 2017.11.15 1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헝가리계를 동원 못한 이유가 있었나요?

    • reinhardt100 2017.11.15 2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토님께.

      제가 티스토리가 익숙치 않아서 좀 중구난방적으로 댓글 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 양해 구합니다.

      헝가리나 체코 민족 문제는 크게 몇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우선,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통성 문제가 있었습니다. 헝가리 같은 경우, 서기 1000년에 맞추어서 교황으로부터 직접 책봉을 받아서 기독교 유럽 세계에 편입되었다는 자부심이 꽤나 강했습니다. 그리고 11-15세기 내내 동부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카로이 1세 때인 14세기 후반에는 폴란드-헝가리-크로아티아-왈라키아-몰다비아-보스니아 까지 장악했던 나라입니다. 체코, 이 당시는 보헤미아 왕국인데 이 지역도 13세기 대공위시대에는 합스부르크 따위는 명함 못 내밀 신성로마제국 내 최대 제후, 게다가 당시 독일왕-이탈리아왕-보헤미아왕의 3왕 체제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반면 합스부르크는? 스위스 아르가우의 촌동네 백작에서 겨우 벗어나서 스위스와 상 오스트리아 정도만 간신히 확보한 말 그대로 동네 왕초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가문이 결혼 몇 번 잘 하고 줄타기 몇 번 잘 해서 자신들의 상전으로 올라갔으니 헝가리나 체코 민족 입장에서는 '근본도 없는 벼락출세한 가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헝가리 같은 경우, 마챠시 1세 시절인 1485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정신 없을 때, 빈을 함락시켰고 그 전에도 한동안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적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가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헝가리 같은 경우, 1593년부터 시작된 13년 전쟁에서 기껏 왈라키아, 몰다비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했음에도 무능한 황제였던 루돌프 2세가 케네베레츠 평원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독립의 희망을 꺼 버리는 짓만 하니 1606년도에 보스트카이 이슈트반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트란실바니아공국을 만들어 오스만 제국에 투항했는데도 헝가리인들 누구도 반대는 커녕 잘했다 분위기였죠. 이걸 시작으로 해서 헝가리 민족은 17,18세기 내내 합스부르크에 문제만 터지면 반란을 일으켰는데, 유일한 예외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때였습니다. 체코 같은 경우도 30년 전쟁에서 강제로 재카톨릭화된 것에 대한 반감 및 합스부르크령이라는 이유로 스웨덴군의 집중적인 수탈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고, 이후 17-18세기 내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해 준 것도 없이 제국 내에서 공업이 발달했다는 이유로 중과세를 집중적으로 부과, '부유한 체코 지역을 쥐어짜서 못 사는 동네, 특히 오스트리아와 티롤, 크로아티아 지역 변경 군관구를 경영할 자금을 만들어내는' 상황이 백년도 더 진행됩니다. 이게 슐레지엔을 최종적으로 상실하게 되면서, 합스부르크는 더 이상 세금 쥐어짤 동네가 체코와 북이탈리아밖에 남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고, 그 중 북이탈리아는 베네치아공화국이나 사보이아 왕국등의 경쟁국가들과의 세율 경쟁 문제까지 겹치면서 쥐어짤 수도 없었고, 결국 체코만 더 쥐어짜는 상황으로 몰리면서 악화됩니다. 이건 19세기, 아니 20세기 초반까지 완화되기는커녕 계속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20세기 초반 이중제국이 붕괴되는 결정적 신호탄으로 작용합니다.

      세번째, 당시,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오스만제국 국경지대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 덕분에 한때 구 헝가리 왕국 전체, 베오그라드와 보이보디나 지역까지 합스부르크가 차지하긴 했지만, 1737-1739년에 있었던 7차 터키-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한 번에 싹 다 말아먹어버립니다. 이 때 오스트리아가 넘긴 영토가 왈라키아 전역, 서부의 바나트(티미쇼아라)를 제외한 트란실바니아 남부 및 중부, 베오그라드, 보이보디나 등 한 마디로 기껏 40년동안 빼앗아 온 영토를 이거 하나로 싹 다 날린겁니다. 특히, 베오그라드 상실이 치명적이었는데, 베오그라드가 발칸 반도 서부에서 도하하기 가장 유리한 위치로써 터키 제국 북진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죠. 그런데 터키가 이곳을 가지게 되면서 언제든지 밀고 올라올 수 있다는 공포감이 그 당시까지는 현존했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7차 전쟁 당시, 베오그라드 공방전이 끝나자마자 터키는 대규모 원정군을 추가로 동원 제3차 빈 포위를 하려고 했지만, 러시아 전선이 급박해지면서 중단하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나중에, 1770년대 후반, 바이에른 선제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대터키방어를 무시하고 모든 병력을 바이에른에다가 투입했는데, 당시 헝가리에서의 반발이 극심했죠. '그러다가 터키가 북진하면 너네가 책임질거냐?'였고 당연한 걱정이지만, 합스부르크는 그건 우리와 상관없다 식으로 무책임하게 넘겨버렸죠. 다행히도 당시, 터키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완패를 하는 바람에 군대 재건에 집중해야 해서 기우에 그쳤지만, 합스부르크는 헝가리를 그저 쓰고 버리는 말 정도로 본다는 인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번째로, 헝가리 병력의 구성문제입니다. 헝가리나 폴란드 같은 국가는 기병이 주력인데, 이 당시 서구권 군대는 기본이 전열 보병전술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헝가리 인들하고는 그리 맞을 리 없었죠.

      일단 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결론은? 합스부르크는 헝가리나 체코 민족에게는 압제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 수비니우스 2017.11.16 0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동안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적이 언제인가요?? 신성로마제국 황제목록을 봐도 잘 모르겠어서요...

    • 본토 2017.11.16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흥미로운 내용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궁금한게 해결됬어요 ㅎㅎ 혹시 나시카님처럼 관련 내용 블로그 같은데 올리시나요?

    • 수비니우스 2017.11.16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사례 좀 부탁드려요.

  8. Guillaumet 2017.11.13 0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봤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전에 오스트리아 여행가서 본 카알대공 동상이 생각나네요. 확실히 동상이 세워질 만한 인물이였던거 같습니다

  9. 수비니우스 2017.11.14 08: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을 주춤하게 만든 카를 대공이 더이상 오스트리아군을 이끌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전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시카님 글 읽고나니까 이해가 잘되네요 ㅎㅎ

  10. jager 2017.11.14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카를 대공이 천수는 누린 거 같은데, 만약 계속 군을 지휘했으면 끝이 안좋았을겁니다

  11. reinhardt100 2017.11.16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토님 블로그 같은거는 하지 않습니다. 해봐야 헛소리하는 사람들 와서 헛소리 늘어놓는거 문제와 저작권법에 걸리지 않으려고 일일이 각주 다는게 귀찮아서요. 댓글달아주고 처리하는게 더 편하기도 합니다.

    • 수비니우스 2017.11.16 1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느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거에요?? 이건 헛소리도 아니고 저작권의 문제도 상관없는것 같은데요

    • reinhardt100 2017.11.16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보기 싫다. 황당하다. 불쾌하다. 어설프게 댓글달지 말라. 그 밖에도 표현들 많이도 달아놓았었죠? 그리고 꼬박꼬박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해 놓고 이제와서 보기
      싫은 댓글 다는 사람한테 궁금하니까 질문? 앞으로도 질문에 대한 답변? 기대하지 마세요.

    • 수비니우스 2017.11.17 0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꼬박꼬박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해 놓고 이제와서 보기싫은 댓글 다는 사람한테 궁금하니까 질문? 앞으로도 질문에 대한 답변? 기대하지 마세요."라는 말은 황당하네요. 단순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님의 주장의 근거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겁니다. 이걸 얘기 안하는건 님의 주장의 근거만 약화시키는게 될겁니다. 뭐 하고싶은 말만 학술적인 모양의 포장으로 말씀하실거면 답변 안하셔도 됩니다. 맞는지 안맞는지 근거제시 안할것이니 검증하지 말라는 말은 무적이니까요.

      어느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건지를 말해달라는건 님의 주장의 근거를 확실히 해달라는 것이고, 이전에 님의 댓글이 보기 싫었던건 분위기를 망치거나 지금처럼 근거를 밝혀달라고 할때 밝히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인건데, 지난번 것은 개인의 일이니까 안밝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순수하게 학술적인 거잖아요? 말못할 사정이 있나요?

      그리고 전 "어설프게" 댓글달지 말라고 한적이 없습니다. 있으면 해당부분을 복붙하고 해당댓글의 날짜를 옆에 적어주세요. 댓글보기 싫다, 황당하다, 불쾌하다는 지난번의 댓글들 얘기고 이번 댓글하고는 전혀 상관도 없는데 끌어오는 것은 당황스럽네요.

    • ㅇㅇ 2017.11.17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네요. 사람이 사회 지능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깨닫고 갑니다. 다른 지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A%B8%B0%EC%8A%A4%EB%AC%B8%ED%8A%B8_(%EC%8B%A0%EC%84%B1_%EB%A1%9C%EB%A7%88_%EC%A0%9C%EA%B5%AD)
      여기 예시 하나 있네요.
      이거 찾는거 하나도 안 어렵고 구글에 헝가리 왕 신성로마제국 하나 치면 바로 나옵니다.
      님 같은 분들보고 핑프라고 하더라구요. 자기가 찾아보면 쉽게 되는걸 꼭 남한테
      난리를 피우는 핑거 프린세스라고...
      자기가 하는 짓을 학술적인 근거 제시 요구라고 포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는데, 학자가 근거 제시를 포함한 확술 활동을 제대로 하면 학술적 권위, 명예, 직위, 금전 등등을 얻죠. 님은 저분한테 뭘 줍니까? 대빵만한 스트레스?

    • 수비니우스 2017.11.17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전에도 한동안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했던 적도 있습니다."라고 해서 헝가리 왕이 다른 독일 왕가 가문처럼 여러명을 몇백년에 걸쳐서 황제를 겸임했던 건가 했는데 구구레카스의 정신으로 구글링했더니만 링크의 딱 한명 뿐이었고, 심지어 그 한명은 친아빠가 룩셈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데 자식이 딸밖에 없던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사이도 좋게 할겸 해서 양자이자 사위로 데려가서 헝가리 왕에 앉혀준 것으로 헝가리 사람이라기보다는 룩셈부르크 왕가로 구분되는 사람이었네요. 참 많군요! 다른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왕은 죄다 1500년대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이고...
      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네요. 사람이 분석 지능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깨닫고 갑니다. 다른 지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 ㅇㅇ 2017.11.17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분은 많다고 한 적이 없으니까요. 26년정도면 한동안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별 문제가 없고. 그걸 뭐 수백년 했다고 상상한건 님 자유니 그거야 남이 신경쓸 일은 아니고...
      그 문단의 요지는 그 시점에 합스부르크에 비해서 헝가리 왕가의 역사적 권위가 훨씬 높았다는 거 아닌가요? 그럼 요지에 어긋나는 얘기도 아니죠. 제국 황제 가문쯤 되면 웬만큼 권위 없는 집안으로 아들을 양자나 사위 보내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 그리고 저도 "친아빠가 룩셈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데 자식이 딸밖에 없던 헝가리 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사이도 좋게 할겸 해서 양자이자 사위로 데려가서 헝가리 왕에 앉혀준 것으로 헝가리 사람이라기보다는 룩셈부르크 왕가로 구분되는 사람" 관련된 내용 궁금한데 출처 좀 알려주세요.

    • 수비니우스 2017.11.17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거 님이 링크단 위키피디아에서 링크만 몇번 타면 나오는데... 뭐 제가 문의한거에 카운터 같으니까 전 "님 같은 분들보고 핑프라고 하더라구요. 자기가 찾아보면 쉽게 되는걸 꼭 남한테 난리를 피우는 핑거 프린세스라고..."라고는 안할께요.
      26년이면 한동안인게 맞는데 그마저도 독일출신 빨인거지 헝가리왕빨은 아닌거잖아요. 헝가리왕빨이면 이전이나 이후에도 헝가리왕들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요. 사실 저기가 룩셈부르크 왕가 출신 황제 중 마지막이긴 하지만요.

    • ㅇㅇ 2017.11.17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아채시니 다행이네요.
      여튼 저 문단의 핵심은 헝가리 왕가가 합스부르크에 비해서 역사적 권위가 높았다는 거지 지기스문드가 신롬 황제가 되는데 헝가리 왕빨이 얼마나 먹어줬는지가 아니죠? 그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시면 동시대에 합스부르크 가가 신롬 황제가문과 통혼하거나 양자로 들이거나 하는 예를 가져오셔야죠. 그러면 이 봐라 헝가리 왕가가 합스부르크 가에 비해서 당시 권위가 별로 나을것도 없었다 주장할 수 있죠. 핵심 논지가 아닌 부분에서 자존심 싸움에 너무 시간 들일 필요는 없어보이네요.

    • 수비니우스 2017.11.18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핵심 논지가 아닌 부분에 질문 하나 한 것을 제3자가 끼어들어서 자존심 싸움으로 몰아가는 데에 제가 시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 안해서 그냥 알려달라고 한건데 말이죠. 그걸 끼어들어서 핑프다 뭐다 할 자격이 누군가에게는 있는 걸까요. 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네요. 사람이 독해 지능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깨닫고 갑니다. 다른 지능이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