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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로 가는 길 (1) - 명령 불복종 여태까지 왜 바이에른이 10월 8일 오스트리아와 리드(Ried) 조약을 맺고 나폴레옹을 배신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보셨습니다.  이제 다시 시선을 나폴레옹과 슈바르첸베르크, 블뤼허와 베르나도트에게 돌려보시겠습니다.  9월 6일 덴너비츠(Dennewitz) 전투에서 베르나도트가 네를 완패시킨 뒤, 과연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먼저 나폴레옹은 8월 29~30일의 쿨름 전투 이후에도 보헤미아로 쳐들어가 슈바르첸베르크의 보헤미아 방면군과 결전을 벌이려고 시도는 해보았습니다.  그는 생시르의 제14군단을 선두로 빅토르의 제2군단과 근위대, 그리고 와해된 방담의 제1군단 잔존 병력까지 보헤미아로 넘어가는 얼츠거비어거(Erzgebirge) 산맥 일대에 투입했습니다.  실제로 생시르의 제14군단의 선두는 9월.. 2024. 10. 28.
소령 나부랭이의 패기 프로이센군이 1813년 바우첸 패배 이후 슈바이트니츠로 향하자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요새 때문이었습니다. 7년 전쟁 중이던 1761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에 맞서 가난한 촌마을인 분첼비츠(Bunzelwitz)에 참호로 강화된 진지를 구축하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유리한 지형과 함께 분첼비츠 바로 남쪽에 위치한 슈바이트비츠 요새의 지원에 의지하여 버틴 것이었는데, 실제로 오스트리아군은 그 진지를 3면에서 포위만 했을 뿐 감히 적극적인 공격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프로이센 측이 러시아에게 슈바이트비츠에서 수데텐 산맥을 등지고 나폴레옹과 대치하자고 주장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역사를 가진 슈바이트비츠의 요새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라면 오스트리아가 준비를 마치.. 2023.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