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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전투7

드레스덴 전투 (10) - 기후 변화의 피해자 오후 2시 즈음 도착한 파발마가 가져온 소식은 바로 어제 벌어진, 저 남쪽 피르나에서의 패전 소식이었습니다. 강을 건너 급습한 방담의 그랑다르메 제1군단에게 뷔르템베르크 오이겐 백작이 밀려났다는 소식이 그제서야 도착한 것입니다. 말로 달리면 불과 몇 시간 거리인 피르나에서의 소식이 왜 그제서야 도착했는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혹은 그 소식은 어젯밤에 도착했지만, 8월 27일의 전황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유사시 퇴각 방향인 피르나 상황에 대한 걱정이 갑자기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까딱하다가는 드레스덴 점령은 고사하고 퇴로가 끊길 수도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 보헤미아 방면군 수뇌부는 오스테르만-톨스토이(Alexander Ivanovich Ostermann-Tolstoy) 백작의 러시아.. 2024. 4. 22.
드레스덴 전투 (8) - 폭우 속의 부싯돌 보헤미아 방면군이 우물쭈물하다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나폴레옹이 몰고온 증원군과 불필요했던 혈투를 벌이던 8월 26일, 드레스덴 남동쪽 엘베강 상류의 피르나에서는 또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피르나 바로 맞은 편 엘베강 우안에서 대기 중이던 방담은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드레스덴 방향에서 전투의 포성이 격렬해지자 즉각 강을 건너 피르나 점령에 나섰던 것입니다. 당시 피르나를 지키고 있던 것은 뷔르템베르크 공작 오이겐(Friedrich Eugen Carl Paul Ludwig von Württemberg)이 이끄는 1만2천의 러시아군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방담의 병력은 제1군단 거의 전체로서 약 3만5천의 대군이었습니다.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고, 오이겐도 무의미한 혈투를 벌이기보다는 일단 후퇴.. 2024. 4. 8.
드레스덴 전투 (7) - 혈전 이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입성했으나, 나폴레옹은 그런 환대에 즐거워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숨돌릴 틈도 없이 전황 파악 및 방어태세 점검과 전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탁상공론에 시간을 다 보낸 보헤미아 방면군 수뇌부와는 달리, 나폴레옹은 일사천리로 그 모든 것을 해냈습니다. 그는 드레스덴 방어선의 지휘는 계속 생시르가 맡도록 하고, 시 외곽에서 보헤미아 방면군과 전투를 벌일 야전군을 편성했습니다. 그가 끌고온 근위대는 그가 입성한 지 약 1시간 뒤에 줄지어 노이슈타트로 입성했는데, 그는 이들을 총 3개 부대로 편성했습니다. (8월 26일 아침, 소수의 참모들과 함께 드레스덴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구경하는 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있는 것으로 그려졌습니다만, 사실 이건 약간 부.. 2024. 4. 1.
드레스덴 전투 (6) - 도끼자루가 썩다 총 5갈래의 공격 중 2번 프로이센군의 공격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나름 치밀하게 머리를 쓴 결과였습니다. 만약 번호 순서대로 1번 공격부터 시작했다면 프랑스군이 보기에도 맨 좌익(보헤미아 방면군에서 봤을 때는 우익)부터 시작하여 차례차례 우익의 공격이 이어지는 셈이었습니다. 1~3번의 공격은 미끼이고 결정타는 4~5번의 공격이니, 공격이 결국 우익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프랑스군이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2번이 먼저 공격한 뒤, 이어서 더 좌측인 1번이 공격을 들어가고, 그 다음에 중앙쪽인 3번이 쳐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목적이 그랬기 때문에, 오전 5시에 프로이센군이 슈트렐렌(Strehlen) 마을로부터 그로서가르텐으로 우르르 밀고 들어가 그 곳을 지키던 프랑스군과 혈투를 벌이는 동안 .. 2024. 3. 25.
드레스덴 전투 (5) -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자 8월 25일 오후, 알렉산드르와 모로가 즉각 공격을 주장한 것에 대해 슈바르첸베르크는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아직 오스트리아군 상당수가 도착하지 않았고, 드레스덴의 방비 태세도 불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명색이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보헤미아 방면군이 드레스덴을 점령하는데, 오스트리아군은 별로 없고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만 승리의 영광을 차지한다면 오스트리아의 체면이 구겨질 것을 걱정했던 것도 분명히 반대 이유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여러 국가들의 연합군이란 그래서 어렵습니다. (독일권의 맹주 자리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프로테스탄트 왕국 프로이센과 가톨릭 제국 오스트리아의 갈등도 첨예했지만, 동방의 제국 러시아와 이름 자체가 동방의 .. 2024. 3. 18.
드레스덴 전투 (3) - BC 353 vs. AD 1813 기원전 353년 위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제왕이 조나라에 구원군을 보내려 하자, 손빈이 그를 말리면서 위군이 조나라에 몰려가 상대적으로 텅 비어있던 위나라의 도읍 대량을 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당황한 위군은 자신들의 도성을 구하려 조나라에 대한 포위 공격을 풀고 회군했습니다. 이것이 사기에 나오는 위위구조(圍魏救趙)라는 고사성어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손빈이 1813년 8월 드레스덴을 구원해야 하는 나폴레옹이 드레스덴에 입성하지 않고 피르나를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무릎을 탁 치며 저 서양인은 자신의 수제자나 다름없다고 감탄했을 것입니다. (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할 때, 제나라가 위나라의 대량을 침으로써 한단.. 2024. 3. 4.
드레스덴 전투 (2) - "포위해버리죠 뭐" 8월 23일, 나폴레옹은 분명히 시간, 공간과 병력의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있었습니다.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를 묘책을 짜내자면, 먼저 나폴레옹 같은 군사적 천재가 어쩌다 일을 이렇게 망쳐 놓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폴레옹은 애초에 이 모든 상황에 대해 꽤 든든히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슐레지엔으로 블뤼허를 치러 가면서 이렇게 장담한 바가 있었습니다. "만약 적군이 드레스덴으로 진군해온다면, 드레스덴으로부터 방담은 2일 거리에, 빅토르는 3일 거리에, 그리고 내 근위 사단들은 4일 거리에 있으니, 이 모두가 드레스덴의 제14군단을 도우러 달려올 것이다." 기억하시겠지만, 빅토르의 제2군단 약 2만은 나폴레옹이 원래 보헤미아 방면군의 침투로로 예상했던 .. 2024.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