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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로이센'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10.14 1812년 그랑다르메(Grande Armée)의 내부 상황 (4편) (7)
  2. 2018.04.04 잃어버린 프로이센의 영토와 클로제 (11)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건 진짜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명언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서 염치, 질서, 관용, 정의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들이 군복을 입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단치히나 기타 주요 군수 창고에 얼마나 많은 군수품이 쌓여 있든 당장 배가 고픈 군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11 경보병 연대 소속 쥬세페 벤투리니(Giuseppe Venturini)라는 피에몬테(Piemonte) 출신의 중위는 자신이 수행하는 '징발'로 인해 2~3백 가구가 당장 거지꼴이 되었다면서 마음이 아프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징발 결과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장교가 수행하는 징발은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원래 프랑스군의 현지 조달 및 징발 기술은 예술의 경지에 달한 것이어서, 다들 굶주리고 바쁜 와중에도 효율적으로 식량을 수집하고 적재적소에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빼앗기는 현지 주민들에게 영수증도 꼬박꼬박 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척박한 폴란드 현지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뒤져도 나오는 것이 거의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짜증이 난 병사들은 죄없는 폴란드 농민들의 집과 창고를 마구 때려부쉈습니다.  특히 이들은 각자의 소속 국가의 깃발 아래가 아니라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 군대의 깃발 아래 움직이는 것이다보니 몰염치가 더욱 심했습니다.  심지어 폴란드군까지도 폴란드 농민들을 마구 약탈했습니다.

제5 폴란드 기마 라이플병 연대의 18세짜리 소년 대위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자기들이 가져가는 것, 심지어 가져가기 원하는 것 이상으로 때려부쉈다.  민가에 들어가서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박살을 냈다.  창고에는 아예 불을 질렀다.  밀밭이 있을 경우, 그 한가운데로 말을 몰고 들어가 마구 짓밟으며 말에게 설익은 밀을 먹였는데, 먹이는 것 이상으로 많은 밀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이건 불과 두어 시간 뒤에는 뒤따르는 그들의 굶주린 동료들도 거기에 와서 말을 먹여야 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의미한 파괴행위였다."

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그랑다르메가 집결하는 네만 강 서안 지역은 분명히 아군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길 가의 집들은 모두 창문이 깨지고 울타리는 장작불에 쓰느라 뜯겨졌으며, 많은 집들이 반쯤 무너져버렸습니다.  군복이 보이기만 하면 주민들이 도망치던 폴란드는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동프로이센에서는 이런 난장판에 민족적 감정까지 더해졌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는 작은 부상이든 티푸스든 어떤 군대에게나 낙오병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런 낙오병들은 동프로이센 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학살되었습니다.  그랑다르메 소속의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병사들도 습격 대상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랑다르메 병사들도 똑같은 적개심을 가지고 동프로이센 주민들을 대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예프 아빌(Jef Abbeel)이라는 병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숙영하는 마을마다 주민들의 가축을 필요 이상으로 모조리 도살하고 술과 식량을 빼앗는 것은 물론, 꽤 떨어진 인근 도시에 가서 자기들이 주문하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주민들을 내몰았습니다.  주문 품목 중 하나라도 못 구해오면 몽둥이 찜질로 교육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심하다고 주민들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거절할 경우 주민들은 역시 또 흠씬 두들겨 맞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주민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힌덴부르크 장군은 '동프로이센 사람들은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슬라브인에 가깝다'라며 투덜거린 바 있습니다.  실제로 동프로이센은 독일화가 많이 진행되긴 했지만 원주민인 슬라브인들을 소수의 독일계 튜톤 기사단이 정복해서 만들어진 왕국이므로 힌덴부르크의 말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도 동프로이센이 프로이센 왕국의 발상지인지라 프로이센 왕국에서 동프로이센이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는 컸습니다.  가령 윗그림의 1861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은 동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Konigsberg)에서 열렸습니다.  이 빌헬름 1세가 어린 시절인 1806년 나폴레옹에게 쫓겨 엄마와 함께 메멜까지 도망쳐야 했던 어린 왕자가 맞습니다.  또 임마누엘 칸트도 바로 이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이지요.  지금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의 해군 도시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되었습니다.)  

 



앞서 나폴레옹이 대규모로 징집된 신병들의 숙련도에 대해 걱정하는 부하의 말에 대해 심리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이 중요하다며 일축했다는 일화를 언급했었지요.  그랬던 나폴레옹도 폴란드의 포즈난(Poznan)에 입성할 때 그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폴란드 비스툴라(Vistula) 군단을 실제로 보고는 꽤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 부대는 최근까지 스페인에 파견되어 있다가 러시아 원정을 위해 막 귀환한 상태였는데, 사상자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수의 신병들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는 이 군단의 지휘관인 모르티에(Mortier) 원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너무 어리군.  내게 필요한 건 전장의 고생을 견딜 만한 병사들일세.  저렇게 어린 친구들은 야전 병원만 가득 채울 뿐이야."

 

 

(모르티에(Édouard Mortier) 원수입니다.  그의 이름은 재미있게도 프랑스어로 박격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훗날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 왕 밑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는데, 루이 필립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1835년의 폭탄 테러에서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루이 필립이 그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편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다부 휘하의 제85 전열 보병 연대의 한 소령은 네만 강가에 도착할 때까지 신병의 20%를 잃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식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먼 길을 일정에 맞춰 행군을 하다보니 탈진과 질병, 소소한 부상으로 쓰러진 병사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많았습니다.  당연히 도망병들도 많았고 심지어 자살하는 병사들도 꽤 있었습니다.  말의 경우는 더 심각했습니다.  1812년 봄은 특별히 기온이 낮았습니다.  이로 인해 곡식 뿐만 아니라 풀도 늦게 싹을 틔웠습니다.  나폴레옹이 굳이 6월 말까지 러시아 원정을 기다린 것은 말이 부족한 사료 대신 뜯어 먹을 풀이 충분히 자라길 기다린 것이었는데, 그게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근위 포병대의 불라르(Boulart) 대령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린 초지의 풀을 잘라 걷어들였는데, 그게 다 떨어지자 밀과 보리, 귀리를 걷어들여야 했는데, 그것들은 이제 막 싹이 튼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해 수확을 망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말들에게 최악의 사료를 주면서 중노동을 시키느라 말들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흔히 말 사료라고 하면 귀리나 옥수수를 떠올리는데, 의외로 말은 세심하게 사료 성분을 조정해주어야 한답니다.  가령 귀리에는 인 성분이 풍부하고 칼슘이 부족한데, 이는 말에게 필요한 비율인 칼슘:인 = 2:1과는 정반대의 비율이라서 귀리 위주로 사료를 줄 때는 반드시 석회가루 같은 것을 추가해서 칼슘 성분을 보완해줘야 한답니다.  또 옥수수 같은 경우 전분이 풍부해서 좋긴 한데 옥수수를 갈아서 준다고 해도 말은 옥수수 성분의 45% 정도 밖에 소화를 못 시킨다고 합니다.  흔히 덩치 큰 말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생존력 자체는 사람이 더 좋은 모양이에요.)  

 

 


실제로 아직 네만 강을 건너지도 않았는데 위에 언급한 이유로 죽은 말들이 꽤 많았습니다.  길가에는 그런 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고 그것들을 을씨년스럽게 개들과 까마귀떼가 뜯었습니다.  말들이 죽었으니 그 말들이 끌던 짐마차도 당연히 버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의붓아들 외젠 밑에 소속된 바이에른(Bayern) 장교 하나는 죽은 말과 버려진 마차의 수가 많은 것에 놀라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누구든 이 광경을 보면 전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허겁지겁 퇴각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장군들과 장교들의 임전 태세는 과거에 비해 크게 태평한 편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Source : 1812 Napoleon's Fatal March on Moscow by Adam Zamoyski

https://www.paulickreport.com/horse-care-category/which-is-which-matching-feed-ingredients-with-nutrients/

https://en.wikipedia.org/wiki/%C3%89douard_Mortier,_Duke_of_Tr%C3%A9vise

https://en.wikipedia.org/wiki/East_P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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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einhardt100 2019.10.14 07: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엘베강 이동의 독일어권은 8세기 말 작센족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공세부터 꾸준히 넓힌 결과입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엘베강에서 오데르 강까지 각종 변경백령들이 세워지지만 983년 벤덴족 대반란 이후 싸그리 날아가버립니다. 이 때 신성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와 분쟁 중이서서 대응하지도 못했고요. 이후 1120년대부터 다시 시작된 동방식민운동 (Ostsiedlung)이 본격화되면서 제대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합니다. 북방의 덴마크와 스웨덴, 남부의 작센까지 서방 카톨릭권의 동부 전체가 동방 슬라브권 정복을 개시한 것인데 그 규모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십자군 이상으로 컸고 인력도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엘베강 이동의 뤼베크, 로스토크, 슈테틴, 단치히,리가 등 해상 보급이 용이한 하구에 게르만족 도시가 들어섰고 1140년대 이후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대규모 십자군을 구성하여 동방식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후 덴마크의 발데마르 대왕이 한 때 발트해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구축한 것을 시작으로 덴마크는 외젤(사레마) 및 에스토니아 북부를 스웨덴은 핀란드와 카렐리야, 라플란드를 자신들의 십자군으로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스칸디나비아와 달리 발트해 및 폴란드 지역은 초기에는 리보니아 수도회(검우기사단) 및 독일계 상인들이 정복전을 개시하지만 프루스족에 대패하면서 주도권은 우트르메르와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독일 기사단에 넘어가고 50년에 걸친 정복전이 시작됩니다. 프루스 족 및 발트해 연안 민족들 또한 헤르쿠스 만타스 등이 이끈 1274년~1281년까지의 대반란으로 저항하지만 1290년까지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전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합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 때부터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동방 러시아 공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비테니스 대공은 백러시아(현 벨라루스), 게디미나스 대공은 키예프 등 드네프르 강 연안과 붉은 러시아(현 갈리치아 및 볼히니아) 등의 루테니아 전역, 알기르다스 대공은 모스크바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 및 부크강 연안 및 흑해 일부 해안가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리투아니아는 막말로 말이 대공국이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진 제국 수준이었습니다. 이 당시 주요 전투만 해도 1362년 키예프 부근의 푸른강 전투, 1399년 제1차 폴타바(보르스클라 강) 전투 등 평균 5만 이상을 동원한 전투들이었고 생존 그 자체가 걸린 리투아니아는 계속해서 싸우면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상대편인 독일 기사단 역시 1320년대 단치히 획득 및 1346년 덴마크로부터 에스토니아 북부와 외젤과 비크 주교령을 구입하였습니다. 또한 리투아니아를 계속해서 공략해서 1382년에는 빌나우스를 사정권에 두었고 1399년에는 사모기티아 정복, 1402년에는 노이부르크 획득까지 성공해 서로는 브란덴부르크, 동으로는 에스토니아까지 발트해 남부 연안 절반을 육로로 연결한 대국으로 발전합니다.

    1410년 제1차 탄넨베르크(그룬발트) 전투가 대동방 십자군의 절정인데 이 전투에서 독일기사단이 이겼으면 현재 우랄 산맥 이서 전역은 독일민족권으로 확실히 편입되었을 정도로 북방 십자군 역사상 최대 전투였습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승리하면서 50년에 걸친 재정복전이 벌어지고 1453년~1466년의 13년 전쟁으로 독일기사단이 폴란드왕국에 신종하면서 동방식민운동은 마침내 종료됩니다.

    다만, 18세기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볼가강 개발을 위해 독일계가 이주한 적은 있습니다

  2. Franken 2019.10.14 1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영토에 진입도 안했는데 벌써 패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군요.

  3. 루나미아 2019.10.14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보급이...

  4. 2/28일 입대 2019.10.15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랑다르메라는 다국적군!이라는 표현이 가장 와닿네요. 조별과제가 망하듯이 원정도 초장부터 아주 막장이군요. 마치 스페인에 파견된 프랑스군마냥 필요이상의 학대까지 저지르고 있구요;;

  5. arandel 2019.10.20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러시아 원정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나시카님의 글로 본 러시아 원정기가 기대됩니다.
    아 그리고 나시카님, 양해를 구할까 해서요.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아이티혁명에 대한 글부분에서 아이티 봉기가 부두교 술사의 예언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가 제 블로그에 글쓸때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다고 인용해도 될까 해서요. 나시카님의 글을 링크와 함께 인용해도 괜찮을까요?

  6. arandel 2019.10.21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나시카님 그럼 저도 나시카님 블로그에서 본 글에서 이 정보얻었다는거 밝히면서 글 쓰겠습니다.

잃어버린 프로이센의 영토와 클로제

잡상 2018. 4. 4. 19:30 Posted by nasica

1807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굴복을 받아낸 프리틀란트는 동부 프로이센의 주도인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근처에 있는 지역입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어로 '왕의 산'이라는 뜻이고,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였습니다.  지금 이 도시는 러시아 발트 함대의 모항인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라는 이름의 러시아 도시가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유서 깊은 독일 도시가 러시아 영토가 되었을까요 ?  예전에 독일 도시였다면 그곳에 살던 독일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또, 지금 독일이 다시 매우 강대국이 되어 있는데, 독일 내에서 이렇게 잃어버린 옛영토를 되찾자는 움직임은 없을까요 ?




(쾨니히스베르크의 모습입니다.  아마 19세기 말 정도의 모습인가봐요 ?)




전에도 다룬 바 있습니다만, 독일 통일의 주역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은 원래 유럽 북동부, 즉 현재의 폴란드 북동쪽과 러시아 땅에 자리잡았던 종교적 군사 단체인 튜톤 기사단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먼 동쪽 끝 변방의 공국이 혼인 관계에 의해 독일 중부의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공국과 합쳐지면서 프로이센 왕국의 기초가 다져집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로이센이 브란덴부르크를 먹었다기 보다는 브란덴부르크가 프로이센을 먹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신하 관계 때문에, 왕국이 될 때의 이름은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지요.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프로이센은 유럽 중부와 동부에 따로 분리된 두 덩어리의 영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점차 프로이센 왕국의 국력이 강성해지면서, 이 두 영토 사이의 땅을 차지하여 두 영토를 합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지요.  이런 노력 중에 희생된 것이 바로 폴란드였습니다.  이렇게 프로이센 땅이 된 옛 폴란드 지역에는 여전히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주요 도시 지역에는 이주해온 독일인들의 인구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나폴레옹이 아일라우(Eylau) 전투 이후 제대로 된 공세를 위해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점령했던 단치히(Danzig)는 처음부터 프로이센 공국에 속해 있던, 주민 대부분이 독일인인 독일계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분열된 독일 공국들간의 알력들 속에서, 중세 자유 도시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어느 왕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 싫었던 단치히 시는 16세기 때만 해도 나름 강력했던 폴란드 왕국의 야기엘로(Jagiello) 왕조에게 손을 뻗쳤습니다.  폴란드 왕의 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단치히 시는 자치권을 허락받은 것이지요.  사실 프로이센 공국도 초기에는 폴란드 왕의 종주권 하에 있을 정도로 폴란드 왕국의 세력이 강성했거든요. 




(17세기 초반 단치히 항구의 모습입니다.)




나중에 프로이센 왕국이 강성해지면서 단치히 시는 자치권을 빼앗기고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로 편입됩니다.  그러나 1807년 포위 공격 끝에 단치히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이 중요한 발트해의 항구 도시를 프로이센에게 돌려주기 싫어서, 단치히에게 다시 자유 도시라는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단치히 자유시는 그 댓가로 나폴레옹에게 많은 세금을 바쳐야 했고,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다시 프로이센 왕국으로 편입되어야 했습니다. 


진짜 큰 문제는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에 벌어졌습니다.  1919년 베르이사이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 공화국이 재건되면서, 근 100년간 독일 제국의 땅이었던 영토가 다시 폴란드 땅이 된 것입니다.  이 지역들은 100년 전에는 폴란드 땅이었으므로 당연히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100년 간이나 독일 땅으로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독일인들도 적지 않게 이주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독일인들은 졸지에 자신들이 경멸하던 폴란드 국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었으나, 가진 재산과 생업 기반을 버리고 갈 수 없었으므로 결국 불만을 품은 채 일단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폴란드 식으로 그단스크(Gdansk) 자유도시가 된 단치히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당시 통계로는 전체 주민의 90% 정도가 독일계였던 이 도시가, 폴란드가 주권을 가지는 자유 도시라는 어정쩡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단치히 주민들은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단스크 시민으로 살던가, 아니면 가진 재산을 모두 놔두고 몸만 빠져 나가 독일에 가서 독일 시민으로 살던가를 택하라고 강요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패망하여 피폐해진 상태였으므로, 단치히의 독일계 주민들은 대부분 잔류를 택했습니다.  




(단치히, 아니 그단스크의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아주 멋진데요 !!)




이렇게 갈등의 요소가 많았던 그단스크 시 안에서는 민족 갈등이 꽤 심했습니다.  특히, 독일에서 나찌가 정권을 잡으면서는 노골적으로 폴란드계와 유태계를 차별하고 박해하는 일이 늘어났지요.  나찌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로부터 수데텐란트(Sudetenland)를 빼앗은 뒤, 이제는 그단스크, 아니 단치히를 내놓을 것을 폴란드에게 요구했습니다.  단치히는 원래 독일 영토이고 동부 프로이센과 중부 독일을 연결하는 전략적인 지역이라는 이유였지요.  결국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단치히는 독일 땅으로 편입되었고, 도시 주민들은 나찌 독일군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단치히는 독일이다 ! 라는 나찌의 포스터입니다.)




(아래 사진은 1933년에 독일로의 귀속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단치히 독일계 주민들의 집회입니다.)




이런 전과가 있다보니, 1945년 독일의 패망이 눈 앞에 다가오고 소련군의 진격이 코 앞에 닥치자, 독일은 단치히로부터 대규모로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진격하는 소련군이 독일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다룬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때와는 달리, 독일계 주민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무조건 서쪽으로 도망치기에 바빴지요.  그렇지만 항상 예외는 있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서쪽으로 탈출할 수는 없었지요.  1945년 6월, 종전 직후 기록을 보면 단치히 시내에는 약 12만명의 독일인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민간인 신분이었으나 1949년까지 사실상 포로 상태로서 소련군의 감독 하에 가혹한 노예 노동을 해야 했는데, 그나마 1950년까지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동독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1945년 전쟁 말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독일 군함을 타고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독일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제 소련의 위성 국가가 된 동독은 스탈린의 주문대로 동부 영토를 다 할양해야 했습니다.  이때 독일은 옛 프로이센 공국 지역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동독이야 그렇다치고, 서독은 이런 국경 변화를 인정했을까요 ?  물론 당시 서독 수상 아데나워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마치 북한이 함경도 전체를 뚝 떼어 중국에게 넘겨주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러나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는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맺고 당시의 동독-폴란드 국경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폴란드로서도 이익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 종전 직후 스탈린 마음대로 폴란드 동부 지역을 소련 땅으로 떼어가고, 대신 독일 동부 지역을 폴란드 땅으로 떼어준 것이었거든요.  역사적으로 보면 폴란드 땅은 원래 전반적으로 현재보다 좀더 동쪽에 있었으나,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20세기 들어 많이 서쪽으로 이동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무튼, 과거 동부 독일 지역은 이런 식으로 독일 역사에서 영원히 상실되었습니다.




(폴란드 영토가 전반적으로 서쪽으로 옆걸음질치는 모습이 보이십니까 ?)




영토야 그렇다치고, 그 땅에 살던 독일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대부분은 단치히 시민들처럼 종전이 되기 전에 서쪽으로 도주하기도 했고, 일부 남은 사람들도 1950년 이전까지 독일로 추방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서 폴란드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된 독일인들도 꽤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독일인들을 독일 정부는 여전히 자기 국민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들이 만약 지금이라도 독일로 귀국하여 독일 시민권을 취득하기를 원할 경우 그것을 인정하는 법안을 만든 것입니다.  이런 권리를 Aussiedler(이주민)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귀환한 사람들 중 여러분들이 최근에 본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미로슬라프 클로제, 즉 독일 축구 국가 대표 선수이자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누적골을 기록한 사나이입니다.  클로제는 옛 독일 영토인 실레지아(Silesia)의 도시 오폴레(Opole)에서 폴란드인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가 과거 폴란드 땅에 남은 옛 독일인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요제프 클로제(Josef Klose)도 축구 선수였는데, 그는 처음에는 폴란드 팀에서 뛰다가 나중에 프랑스 프로 축구팀 오세르(AJ Auxerre)에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외 생활을 하여 발전된 서구에 눈을 뜨게 된 아버지 클로제는 역시 공산주의 폴란드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고국에 남아 있던 가족들까지 모두 독일로 불러들여 Aussiedler로서 독일 시민권을 신청했던 것이지요.  이때 클로제의 나이 8살이었고, 이때 클로제가 아는 독일어는 단 두 단어 뿐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Ja와 Nein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렇게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옛 폴란드인들은 여전히 폴란드 국적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젊은 축구선수 클로제가 두각을 나타내자, 폴란드 국대팀에서 코치를 파견하여 '자네 폴란드 국가 대표로 뛰지 않겠는가'라는 제안을 했으나, 클로제는 '현재대로라면 독일 국대도 가능하겠다' 라며 거절했고, 결국 오늘날의 클로제로 대성할 수 있었습니다.  클로제는 '폴란드 대신 독일을 택한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라고 밝혔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그는 집에서 와이프와는 물론 아이들과도 폴란드어로 이야기할 정도로 스스로를 폴란드인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포돌스키입니다.  지금은 은퇴했나 모르겠네요.)




이와 비슷한 처지의 선수로는 현재 아스널에서 뛰고 있는 포돌스키(Lukas Podolski)가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독일인이 된 포돌스키는 한때 클로제와 함께 바이에른 뮌헨에서 선수 생활을 했는데, 이때 이 둘은 상대팀 선수들이 자기들 말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필드 위에서는 폴란드어로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요즘 점점 강성해지는 통일 독일에서, 혹시라도 나중에 '상실한 옛 프로이센 영토를 되찾자'라는 움직임이 벌어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지요.  위에서 언급했듯이, 1970년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 조약을 맺고 옛 영토를 완전히 포기한다고 선언했을 때, 독일 내 보수파들은 민족에 대한 배신 운운하며 격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만난 어떤 독일 영감님 말씀을 들어보니, 현재로서는 그럴 염려, 즉 옛 영토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생길 우려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스탈린이 나름 철저하게 그럴 가능성에 대비하여, 옛 독일 영토에 있던 독일계 주민을 철저하게 추방했기 때문에, 과거 영토에 남아 있는 독일계 주민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옆의 섬나라 인간들과는 달리, 독일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독일의 영광은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이웃 국가들과 공존하는 리더쉽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르지요.  우리나라처럼 작고 힘없는 나라에서도 세계 제2위의 강대국 중국으로부터 거의 천년 전에 잃어버린 만주 벌판을 되찾아야 한다고 떠벌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중에 독일에 또 미치광이들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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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쇼펜하우어 2018.04.04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과 상관 없지만... nasica의 뜻이 뭐죠?

    • nasica 2018.04.05 07: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Scipio 가문 인물 중 하나의 별칭인데, 저도 정말 뜻을 몰라서 그렇게 적은 것입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코가 길거나 크거나 뾰족하다는 뜻이더군요.

  2. 잡지식 2018.04.05 0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스키피오 나시카인가요?

  3. 김똑딱 2018.04.05 0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돌스키는 현재 빗셀 고베에서 뛰고 있습니다.

  4. 수비니우스 2018.04.05 0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키피오 나시카라는 사람이 누굴까 하고 찾아봤더니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라는 이름을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4대가 같이 썼네요 ㄷㄷ 로마는 왜 이리 이름 돌려쓰기가 많았는지 참...

  5. 에로준 2018.04.08 0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공개된 nasica의 뜻이...

  6. 하락장숏스탑 2018.04.08 2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주국토 회복해야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아웃사이더인거 같죠? 학계에선 아싸더라도 국회강연하는 사람 문화부에서 방귀좀 끼는 사람중에 황당고기 신봉자들이 많습니다.

  7. 하락장숏스탑 2018.04.08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폴란드ㅡ독일 문제로 만주고토 회복론을 가볍게 논파하셔서 놀랍습니다. 남북 통일문제와 독일-오스트리아 통일문제를 비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은 잡히지만 나시카님 만한 필력이 나오질 않습니다.

  8. 만주개장수 2018.08.29 2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Dd//님 말처럼 절대적 평가로 생각하니 위에 만주 문제처럼 주장하는 사람이 생기는가봅니다..

    전쟁날수 있는 우리 주위나라들과 비교해야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약소국 얘들 하고 전쟁할건 아니 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