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너비츠4 덴너비츠 전투 (4) - 습관성 삽질 덴너비츠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오후 3시~4시까지의 전황은, 하나의 경로로 3개 군단을 움직이겠다는 네의 약간 비상식적인 계획이 결과적으로는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습니다. 후방에서 레이니에의 군단이 조금씩 도착하여 투입되면서 프랑스군은 좌익을 점점 더 넓고 강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각 군단들이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움직이다가 이렇게 뜻하지 않게 벌어진 전투에 다른 군단들이 제때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면 상황은 제2의 그로스비어런 전투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오후 4시경이 되어 우디노의 군단이 현장에 다 도착하자, 우디노도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는 바로 코 앞에 있는 레이니에의 좌익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프랑스군의 좌익을 더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과부적인 .. 2024. 7. 29. 덴너비츠 전투 (3) - 남자가 한을 품으면 잔나(Zahna)를 지나 위터보그(Jüterbog)로 가는 길은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즉 프로이센의 국경 지대였는데, 이 일대는 그야말로 평야 지대로서 간간히 나타나는 낮은 언덕, 시냇물과 습지 외에는 거의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원래 군대가 행군할 때는 소규모 정찰대를 앞세워 지형과 함께 적의 출현을 경계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찰대로 쓰라고 존재하는 것이 바로 기병대였습니다. 그런데 위터보그를 향해 진격하던 네의 베를린 방면군은 희한하게도 그런 정찰기병대를 두지 않고 행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아마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코삭 기병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소규모 기병대를 앞세웠다가 혹시라도 코삭들과 마주치.. 2024. 7. 22. 덴너비츠 전투 (2) - 인사가 만사 네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여 확인한 베를린 방면군의 병력과 장비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로스베어런에서의 패배는 우디노가 지나치게 각 군단을 분산시킨 채 전진하는 바람에 병력 집결이 제대로 안 된 상태로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겪은 것이었고, 베를린 방면군의 사상자 숫자도 3천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후퇴하는 우디노에 대한 추격이 거의 없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원래 프로이센군의 뷜로는 가열찬 추격전을 벌이려 했으나 소심했던 총사령관 베르나도트가 추격을 중지하도록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를린 방면군은 병력도 6~7만으로 크게 줄지 않았고 포병대도 고작 14문의 야포만 상실하여 아직 190문 이상의 야포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다만 병사들, 특히 작센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 2024. 7. 15. 덴너비츠 전투 (1) - 러시아 땅의 마지막 프랑스인 결국 나폴레옹은 베를린으로 향하지 못합니다. 만약 막도날이 바우첸까지도 블뤼허에게 내준다면, 자신이 북쪽 베를린 원정을 간 사이 드레스덴까지도 블뤼허의 위협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나폴레옹의 작전은 도시와 요새에 연연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적의 주력 부대를 격파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드레스덴은 이야기가 좀 달랐습니다. 이 곳은 연합군의 3개 방면군과 대치하는 중심 거점이자 보급창 역할을 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당장 주전장이 된 주요 동맹국 작센의 수도였습니다. 여기를 잃으면 통신선과 보급선이 모두 끊어질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 축적된 많은 군수 물자와 함께 동맹국까지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습니다. 9월 2일, 나폴레옹은 자신 대신 그랑 다르메의 2인자.. 2024. 7. 8. 이전 1 다음